짧은글 긴여운

한국 교회의 설교의 문제점

안명애 2015. 1. 3. 12:17

1.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는 가운데 본 장에서는 설교의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부족한 가운데 여러 사람들의 자료를

본 장에 첨부한 가운데 여기에 실린 내용은 100% 필자의 글이 아님을 미리 밝히는바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장이 둔화된 가운데 산적한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그 중에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 설교의 문제점도 심각한 가운데 한국교회는 설교의 위기를 맞고 있다.

수많은 교회에서 수많은 설교가 선포되고 있지만 한국교회는 변질된 신비주의, 열광주의, 기복주의, 성공주의에 물들어져 선포되는 설교는

복음적이며 성경신학적인 말씀보다는 기복주의, 성공주의적인 설교가 대부분인 것이다. 과거 필자는 마틴 로이드 목사의 '목사와 설교'를 읽었는데 아주 감동적이었다. 그 내용 중 저자는 말하기를 과거에 수십년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설교를 들었는데 복음에 관한 설교는 많이 들었지만 복음 자체에 대한 설교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이 말을 잘 이해 못할지 모르겠는데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

예를 들어서 교회에서 목사가 성도들에게 수박(복음이라는 수박: 예)을 전하는데 한 마디로 수박 겉 핥기식으로  수박의 겉은 어떻고 속은 어떻다는 말만하고 진정 수박 맛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복음에 관하여 말만했지 복음 자체를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복음이 실종 되었다.(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대형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들은 복음을 가장한 도덕적인 윤리적인 설교로서 기복주의 성공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이것은 저멀리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릭웨렌, 조엘 오스틴 등을 중심으로  개신교가 복음주의를 가장한 도덕주의, 성공주의로 흐르고 있는 실정이다.



2. 한국 설교의 현장의 위기 요소들

첫째는, 우리의 초기 설교자들이 가지고 있던 설교자로서의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상당수에 이르는 설교자들이 자신의 전체를 던져 하나님이 오늘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를 찾아 들을려는 뜨거운 열심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의 설교집을 뒤적거리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잡아 강단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음성으로 말의 기교를 부리는 습관화된 모습이 보인다. 말씀과 자신이 화신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이러한 비극적 현상은 설교의 상실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사연이 될 수 있다.

둘째는, 우리의 설교에서 말씀의 주인이신 성삼위 하나님은 보이질 않고 설교자만 들어나 보이는 기현상이 발생되고 있다.

셋째는, 이상과 같은 결과는 자연적으로 강단을 설교과 아닌 연설의 장으로 만들게 되고 거기서 설교자는 부담없이 자신의 경험담이나 끝없이 엮어지는 예화의 진열장으로 설교사역을 탈선시키는 슬픈 현상을 보게 된다.

넷째는,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말이나 고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설교자들에게 있다. 이것은 오늘의 설교에 대한 불평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다. 상호의사 전달의 실패이다.

다섯째, 오늘날의 설교는 대개 싫증이 나고, 지루하며,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가 이제는 더이상 사람들에게 닿지 않고 있으며 선명하지 못하고 지겹기만 하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 안되는 중요한 원인들이 어디에 있든지간에,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자기의 삶에 연관시키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섯째, 요즈음 설교는 과감한 설교가 못 된다는 것이다. 이문제는 오늘의 설교가 삶의 현장과 별로 관련이 없는 고상한 이야기들로 가득찼다는 것을 말한다.  그 메시지가 때로는 고무적이고 위로의 성격을 띠기도 해야 되겠지만, 때로는 도전적이고 심령을 뒤집어 엎는 설교를 해야 될 때도 있어야 한다.

일곱째, 오늘의 설교는 상호전달이 안된다. 설교가 전하려고 하는 내용이 아주 빈약하게 전달되고 있다. 교회와 설교는 현대 사회와 의미있게 상호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심한 비판을 받고 있다.

여덟째, 오늘의 설교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설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크리스챤이 되게 하는 독특한 힘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교회에 가는가? 한 교회의 행동이 설교의 말씀과 맞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성실성의 위기이다. 

아홉째, 이제까지 설교가 너무 강조되어 왔다며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아주 신선하고 새로운 방법들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제는 더이상 설교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설교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무리들도 있다. 

 

 3.한국강단의 위기 요소들  

첫째,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과중한 설교의 양이다. 일주일에 최소한 3편 이상의 설교의 횟수와 1년이면 156회,10년이면 1560편의

설교의 횟수는 역사상 아무리 위대한 설교가라고 할지라도 이만한 분량을 남기지는 못한 것을 볼수 있다.

둘째,  과중한 목회일로 인한 준비의 부족이다. 목사의 역할은 한가지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말씀의 선포자로, 말씀을 가르쳐 바른 길로 인도하는 교사로, 교인들의 문제점을 들어주고 길을 밝혀주는 상담가로서, 교회의 제반행정을 조직하고 이끌어가는 행정가로서의 많은 일을 하다보면 25분의 설교에 25시간의 설교준비라는 많은 준비가 실상은 어렵게 된 것이다.

 

셋째, 본문을 떠난 설교를하고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말씀의 봉사자가 되어야 하지, 말씀의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해석해 주고, 그들의 삶에 적용해 주는 봉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넷째, 설교자가 성서의 중심 멧세지를 잘못 전한다. 설교자가 성서의 해석과 바른 신학적인 이해가 없이 말씀을 선포하게 될때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설교자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설교자는 성서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잘 나타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다섯째, 설교의 멧세지가 기복중심적으로 흐르고 있다.설교는 하나님의 뜻의 선포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아 그분의 풍성하심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간이 미쳐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행치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엄한 질책이 있다는 사실도 선포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즉, 말씀의 선포에는 백성들을 싸매는 제사장적 기능과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예언자적인 기능도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기독교는 제사장적인 축복과 치유의 말씀만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꾸짖고 책망하시는 예언자적인 음성은 소홀히 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여섯째, 설교의 내용이 교인들의 구체적인 삶과는 멀다. 설교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말씀을 듣는 자들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고 그들의 삶을 결단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가 단지 성서의 진리만을 외칠때에는 성경의 말씀은 땅에 뿌리 박힘없이 공중에 뜬 나무와 같은 것이다.

 

일곱째, 말씀앞에서 결단이나 변화보다 안일한 외침에 가깝다. 설교의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촛점은 성도의 행동이 바꾸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안일하고 도피적이고 미사여구만으로 설교가 채워질때 당연히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덟째, 설교자가 설교의 내용과는 다른 삶을 산다. 주님의 가르침은 먼저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 그대로 따라오게 하신 것 이다. 설교자가 말씀의 내용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때 그는 바리새인과 다름 없는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완전히 살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하는 근사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4. 교인(청중)들의 위기요소
첫째, 예언적이고 고통을 요구하는 설교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요함이 찾아오자, 예전의 고통과 어려움을 쉽게 잊어버리고 주의길을 따라오라는 고통을 요구하는 설교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예배에 전심으로 참여하는 정신의 부족에 있다. 설교를 들어주는 방관자적인 자세속에는 하나님과의 실존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세째, 설교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이 부족하다. 능력 있고 힘있는 설교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설교자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회중들은 설교자의 설교를 최대한으로 경청하고 마음으로부터 응원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때 처음에는 미숙했지만 성장하는 설교자로서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5. 도덕주의적 설교는 무엇이 문제인가

 

기복적인 것에 중심을 둔 과거 설교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지탄을 받았고, 이제라도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삶을 보이자는 반성적 차원에서 도덕주의적 설교가 강조되는 것 같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주장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오늘의 지성적 기독교인들에게는 윤리적 설교가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권장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휴머니스트가 되거나 도덕군자가 되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게 아니라는 걸 우선 명확히 직시해야 한다. 거칠게 말해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도덕적 가치는 설교가 근거할 복음의 본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설교가 지향할 하나님 나라의 근본 가치도 아니다. 둘째,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는 도덕적 가치를 케리그마의 중심에 놓는 것은 바리새인의 율법주의와 다를 게 없다.

 

초등학생에게 훈화하듯 설교하는 목사도 적지 않다. 가정의 달인 5월이 되면 ‘부모에게 효도하자’거나 ‘올바른 부부관계’ 등의 주제로 설교하는 목사들이 있다. 생일을 챙기고, 가능하면 이벤트도 만들라고 조언한다. 이건 근본적으로 설교가 아니다. 생명의 신비와 하나님 통치의 새로움을 담은 성서를 삼강오륜 같은 윤리적 명제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오늘날 설교가 도덕주의로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설교가 청중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보인다는 데 있다. 이것을 세분하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둘은 상반되면서도 그 토대는 동일하다. 하나는 도덕주의 설교가 신자들의 죄책감을 자극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율법적 신앙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죄책감의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패한 세상과 다르다는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힌다. 양쪽 다 건강하지 못하다. 복음은 불안도 아니고 우월감도 아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은총으로 들어서는 시간이다.

 

 

  - 정용섭 목사 저서 설교란 무엇인가 중에서 -

 

 

 

6. 순수복음과 성공주의                                                

 

 

    

                    

▲제 나름대로 분석, 분류한 결과에 의하면    

시중에서 접하는 설교를 <성공주의적 관점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순수 복음

     10% 

 중도 노선

성경을 잘 설명하고, 복음적 내용을 잘 설명하지만

결론은 항상 성공주의로 맺는다.         80%

 순수

 성공주의

(기복주의)

   10%

 

*아래 그림이 더 이해하기 쉽다.

A집합은 순수복음을 전파하는 분을 나타내고   10%

B집합은 순수 성공주의를 전파하는 분을 나타내는데,   10%

오늘날 가장 많은 설교자들은, 둘 다 전파한다. 수학적으로 '교집합'이다. 80%       

                                                       청부사상 역시 '교집합'에 속한다.

 

 

(이 부분은, 정말 염치 없는 표현이지만, 발전을 위해서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가만히 보면, 해외유학파는.. 주로 순수복음이다. 왜냐하면 해외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부사상, 성공주의는.. 주로 국내파가 주장한다.

 

어떤 위화감을 조성하는 뜻은 결코 아니고, 

과거 역사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기독교는.. 결코 성공주의, 청부사상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뜻.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도 TV방송을 통해서, 은사주의 계통에서, 성공주의, 청부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있다.)

 

*순수복음 - 1년 내내 ‘부자 되고 성공하시라’는 설교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냥 인격적 내용, 성경적 내용을 그대로 전한다. 


*순수 성공주의 - 1년 내내 ‘부자 되고 성공하는’ 설교를 전한다.

적극적 사고방식, 자기 계발적 메시지, 내적 치유가 주류를 이룬다.

미국의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원조이고, 최근에는 조엘 오스틴 목사가 대표적이다.

 

*중도노선 - 강해설교든지, 주해설교든지, 제목설교든지, 

성경의 본문의 내용, 복음적 내용을 비교적 충실히 전달한다.

그런데 결론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래서 그 결과 <복 받아서 부자되고 성공하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가장 큰 퍼센테이지를 차지 하고 있다고 본다.    



◑인간의 근본적 문제 - 돈과 성공으로 결코 풀지 못한다.


①죽음의 두려움 -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런데 그 때가 오면, 편안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신자가 있고,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신자(?)도 있다.


인간의 본질적 문제, 그래서 종교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죽음의 문제!

이 문제의 해결은 - 오직 신앙이요, 믿음이지, 돈과 성공이 아니다.


그런데 평생 돈과 성공을 목표로 신앙 생활한 교인은

죽음의 문제에 맞닥뜨려졌을 때,

결국 자기가 붙잡은 ‘성공주의 복음’이 가짜 복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②인간관계 갈등의 문제 - 누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 말했듯이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미움, 분노, 분쟁, 갈등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참 복음과 참 신앙은 ‘용서, 화해, 사랑’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그에게 참된 행복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소위 ‘성공주의 복음’은, 돈과 성공을 줄지는 모르나,

인간에게 참된 용서, 참된 화해를 주지 못한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면서도, 평생 이웃과 갈등하며 살아간다.

 

③죄와 죄책의 문제

이 문제 역시 인간이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실제적 문제이다.

참 복음, 참 신앙은 ‘죄와 죄책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위험과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또한 연약해서 그 길로 빠진 사람들을 돌이키는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소위 ‘성공주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를 사했다.’로 한 번 선언하는 것으로

끝내버린다.

그리고 실제적 관심과 설교의 주제는 항상 ‘성공, 물질’ 이런 것들을 다룬다.


④명예심, 안정감의 문제

오늘날 명예퇴직, 조기퇴직, 청년실업이 늘어가면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명예심, 자존감’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대두된다.


우리의 참된 명예심과 안정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온다. 그 분의 아들, 그 분의 자녀로서 가지는

자기만족self-confidence과 안정감이다.


높은 지위, 많은 은행 잔고도 명예심과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일시적이다.

그것은 참된 복음이 아니다.

 

⑤정신적 고독과 방황

독신은 물론이고, 결혼을 해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하고 소외감을 느낀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이 방황한다.


삶의 경제적 여유가 생긴 사람들이 최고로 원하는 것은 - 여행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방황’이다.

뭔가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면 행복과 참 만족이 있을 것 같아서 떠나보지만,

거기에 가도 허전하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틈만 나면 다시 또 (그 허무한 여행을) 어디론가 떠난다.


인간의 고독과 방황 - 이 실존적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돈과 성공’이 결코 아니다.

참된 복음이며, 예수님과의 참된 관계 맺음이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준다.

 


7. 나가는 말


①교회를 다니는 교인이라도, 위의 5가지 대표적으로 예로 든 삶의 문제들로 인해

실제로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문제들에 오래도록 붙잡혀 신음하고 있다. 

교회가 강조점을 '복음'에 두지 않고, '복과 성공'에 둘 때 그렇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르침, 설교를 보면

그 결론으로 언제나 '복받아 부자되고 성공해라'고 내리신 적이 -없다-.

 

‘물질과 성공’이 인간의 절실한 필요인 것은 사실이다.

‘물질과 성공’으로 신자가 자기 앞가림하는 것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자가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인간에게 필요한 요소이긴 하나, 

‘복음’처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물질과 성공’에 위험적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짧게 말하자면 득실이 2:8이라고 본다.

득이 20%면, 실이 80%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토록

너희가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못하며,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 들어감보다 어려우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며,

그것이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른다고 수차례 경고하셨다.             딤전6:10


‘물질과 성공’의 달콤함과 아름다움을 전하는 사람은

그것 때문에 형제간에 서로 원수되고,

그것 때문에 자녀가 타락하고,

그것 때문에 온갖 방탕한 죄를 짓게 되고,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고

결국은 그것 때문에 천국마저 잃어버릴 위험성이 80% 있다는 것을

청중들에게 정직하게 전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인간의 참 행복은, ‘물질과 성공’의 획득에 있기 보다는,

주님과 깊은 교제 관계, 성령 충만, 은혜 충만, 진리 충만, 봉사 충만 등에서 온다.

주님의 인격을 본 받고 닮아감,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감에서 온다.


그런데 이런 복음의 중요한 주제는 흐지부지하게 전하고,

 

말씀을 잘 가르치더라도 그 마지막 결론으로,

그래서 ‘복 받아 부자되고 성공해라!’는 것은... 복음에 물을 타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면 나중에 천국 가서 주님께 반드시 책망 받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설교하신 적이 없다고 본다. 

 

물질과 성공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고

 

 인간을 본질적으로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은 -사탄의 미혹-이다.

 

오늘날 복음이 사람을 자유하고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성공이 사람을 본질적으로 자유하고 행복하게 해 준다는

'잘못된 신학'을 가진 분들이 없지 않는 것 같다.

 

물질과 성공을 어쩌다 가끔 전할 수도 있다. 그런 면도 성경에 일부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항상' 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순수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물질과 성공의 혜택을 전한다면, 다른 시간에는 그 폐해도 전해야 한다.

 

과거 학부시절에 1950~60년대에 제작한 프랑스 영화를 본 적이 있었는데

'흥행에 관계없이' 예술성만 충분히 표현한 영화가 있어서 깜짝 놀랐었다.

'저러면 먹고 살기 힘들텐데...' 하면서 동시에

'1950~60년대에 벌써 먹고 사는 것을 기본적으로 해결했구나!'로 생각을 고쳤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분들도 '흥행에 관계 없이 순수 복음'을 전하는

전파자들이 앞으로 더 많이 나올줄 믿는다.

사회에서도 '순수 예술'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지 않는가!        


 

▲초신자에게 기복적 신앙은 필요하다는 주장에 관하여

처음부터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신앙은 처음에는 기복적이다.

자신의 건강이나 가족들을 위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 달라고 청하는 단계다.

이런 단계는 누구에게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단계를 벗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과 아픔까지도 받아들이고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미할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이다.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의 일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과 말씀을 전하기 위해 힘쓰게 된다.

 

     그런데 사람의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처음부터 '기복주의, 성공주의'로 신앙을 출발한 사람은.. 결코 그 틀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신자에게 기복적 신앙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어쩌면 그 기복 신앙으로 인해, 참 복음에 대한 접속을.. 영구히 방해할 수 있으므로, 올바르지 않고,

     무엇보다 예수님도 그런 방식을 쓰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