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설교자들은 최근 발생한 사건, 오늘 부딪힌 생의 문제, 감동적인 이야기 또는 유명한 사상가나 철학자의 주장을 말함으로 설교의 서론을 장식한다. 이 때 유교의 성인들의 말도 주저 없이 인용된다. 설교의 도입을 위한 흔한 방법이다. 오늘의 상황을 먼저 말함으로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하는 시도를 보인다. 신앙 삶의 적용 문제를 쉽게 찾도록 돕기 위함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는 없는지?
성경과 성도의 삶 사이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 이 괴리를 어떻게 매우느냐가 설교자의 고민과 고역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성경을 자세히 관찰하여 가르침과 교훈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오늘의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많은 설교자들이 누구나 다 동의하는 현재의 문제를 먼저 말하고 성경에서 성구를 하나 끄집어내 답인 것처럼 언급하며 설교를 끝맺는 이유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시대를 불문하고 신앙 삶의 기준은 성경이다. 성경의 과거 기록에서 얻은 가르침을 오늘날의 신앙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 그러나 위의 설교 방식은 현재에서 출발하여 성경의 과거로 가서 해답을 억지로 꽤 맞춘다. 결국 현재가 기준이 된다. 이것은 곤란하다. 성경의 가르침은 구속사를 위한다면 위의 설교에서 서론을 위해 도입된 설교 자료들은 세속사에 속하는 일들이다.
세상의 세속사와 성경의 구속사는 내용상 서로 완전히 다르다. 결국 위의 설교 방식은 상식적인 것을 억지로 성경의 가르침에 꽤 맞추는 식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상식처럼 된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나 철학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아테네가 아니며 예수님도 세상의 위인들 중 하나가 아니다. 이런 일에 목회자들이 앞장 선다는 것은 모순이며 역설 자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