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바빌로니아 포로시대(586~538 B,C,E)

안명애 2015. 4. 18. 23:43

성전 멸망과 바빌로니아 유배(류배)

721B.C.E.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로부터 멸망 당한 후 남유다는 여러 왕들의 개혁과 발전 의지를 통하여 독립을 계속 유지해 왔다. 드러나 약소 국가인 유다는 강대국인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Zedekia)는 예언자 예레미아의 강력한 권고(27)에도 불구하고 국제 질서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채 바빌로니아와 맺은 맹약을 깨뜨리고 이집트에게 기울어 지고 말았다. 이러한 약소 국가의 반역은 대제국 바빌로니아의 느브간네살 왕을 머뭇거리지 않고 신속하고 강하게 불러들인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589B.C.E.정월 예루살렘은 포위 되었으며, 35개월 동안의 포위는 급기야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예레미아는 이미 선언하기를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내가 그들(유대인)을 그 땅(바빌로니아)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27:9b,11) 하였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의 삶을 크게 변화 시켰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신앙적 삶의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바로 이러한 모든 삶의 터전을 상실한 채 바빌로니아에서의 유배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산'(Dispersion)'포로'(Exile)

예루살렘 멸망 이 후 가장 중요한 외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산'(리산)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바빌로니아 '포로'(포로)는 유다가 완전히 멸망 당한 이후에 일어난 일시적인 강제 이주를 암시하는 것으로써 유다 백성의 극히 일부만이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성경의 보도에 의하면 4,600명의 유다 백성이 세 차례에 걸쳐 추방 되었으며, 그 가운데 약 13는 제2차 추방 때에 강제 이주 되었다(52:28-30). 아른 자료에 의하면 제1차 추방 때에 약 1만명이 추방 되었다(왕하25:14-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 이송된 왕족, 국가 관리, 사제, 군대 장관 및 기술자 등을 모두 합쳐도 이 숫자는 고작 당시의 전주민의 5%를 넘지 않는다.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며(cf.2:11-21;4:9f.),상당 수의 사람들은 자의 및 타의에 의해 팔레스틴을 빠져 나가 바빌로니아보다 훨씬 가까운 이집트(왕하25:26;42) , 페니키아, 시리아, 요르단 동편 등지로 펴져 나갔다. 많은 경우 이들은 불확실하고 불리한 팔레스틴의 생활 조건보다는 나은 것으로 믿어지는 지역으로 이주하여 흩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에 계속 남아 거주하였던 다수의 유대인들(33:24)은 나름 대로의 생활 문화를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비록 정치적 독립을 상실한 땅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나름대로의 전통 문화와 관습에 충실하였다. 적어도 이들은 새로운 이방 문화와의 접촉을 통한 영향을 적게 받고 살았다는 점에서 민족적, 종교적 긍지를 어느 정도 가지며 살아온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진정한 구심점은 그들에게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멸망은 백성들을 이산 집단과 계속 팔레스틴에 머물러 살아가는 거주 공동체로 나누어 놓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두 집단 사이의 구조적 차이는 점차 커져 갔던 것이다. 나아가 바빌로니아로부터 귀향하게 될 때 이산 공동체 가운데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바빌로니아에 남아 살게 되는 집단이 있게 되는데, 소위 바빌로니아로부터 돌아온 복귀 공동체와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거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특징으로 요약된다.

바빌로니아의 유대인

바빌로니아에 잡혀간 유대인들은 유다의 정치적, 종교적, 지성적으로 지도층에 속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수적으로는 소수였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에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하면서 이스라엘의 장래를 설계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비교적 온건하였다. 북이스라엘을 멸망 시킨 앗시리아의 경우 식민지의 지도자들을 추방하고 본토인들을 이주, 혼혈(혼혈) 시킴으로써 식민지의 백성들을 지배자 집단과 동화시킴으로써 식민지의 정치, 종교, 사회,문화를 모두 파괴하고 말살시키는 것과는 달리, 바빌로니아의 느브간네살은 제국 국민의 집단 이주등의 정책은 실시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미스바에 그의 직위 관청을 가지고 있었던 그달리야를 임명하여, 폭넓은 권한을 가지고 그 땅의 주민들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달리야가 그 땅에 남아 있던 왕족에게 암살을 당한 후(왕하25:25;41:1-3) 주변의 암몬, 에돔 사람들이 팔레스틴에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바빌로니아의 팔레스틴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크거나 중요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느브간네살의 후계자인 아멜 마르둑(Amel Marduk,561-559 B.C.E.)은 감옥에 오랫동안 갖혀있던 여호야긴왕을 석방시켜 자유롭게 하는등 유대인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었다(왕하25:27-30;52:31-34).

이러한 바빌로니아의 식민 정책은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송된 유대인들의 포로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포로민들의 생활 상에 관하여 자세한 기록이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주로 황폐한 농업 지역에 정착하여 조밀한 포로 수용소같은 집단을 건설하고 살았으며(cf.3:15;2:59;8:17;137),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29:5-7;cf.8:1;14:1;33:30f.).토착민들과 포로민들 사이의 법적인 차별은 발견되지 않으며,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생활해 나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대인들의 전혀 새로운 문화적 배경을 가진 바빌로니아에서의 포로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전통적인 유대의 신앙과 전통에 관하여 재정립을 요구하였다. 성전 예배기능을 계속할 수 없었던 이들로써는 새로운 예배 형식을 개발해 내지 않으면 안되었고, 예배에 필요한 문서들의 작성을 요청 받게 되었다. 여기서 율법 교사들의 역할과 지위가 부각되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의견을 가진 다양한 종파들이 각각 생겨나기 시작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려는 희망과 소원은 암담한 그들의 현실 속에서 점차 싹터오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꿈꾼 희망은 제2의 이집트 탈출 같은 정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야훼의 전적인 능력으로 인한 종말론적 회복이었다: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11:17).

팔레스틴의 유대인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땅의 백성들"(Am Ha-aretz,왕하24:14;25:12)이라 불리웠는데, 이들의 경제적 조건은 매우 열악(렬악)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의 황폐해진 도시와 농경지에 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증명해 주고 있으며, 이는 과다한 과세와 소작으로 인한 영세성이 주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유대인의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주체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은 세겜, 실로, 사마리아 등지에서 온자들과 함께 예배가 드려졌으며(41:4-8), 이 제의는 추방을 면한 하위직 사제들이 관장하는 동물 희생 제사였다. 특히 성전 멸망을 기념하는 금식 기간 중에는 애가와 시편 70, 105, 106편등이 공적으로 읽혀 졌다(7:2-7;8:18-19).

한편, 일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중앙 집권화로 인하여 뒤로 물러났던 이전의 지방 제단들이 복구 되면서, 이스라엘 종교의 혼합주의적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였다(44:16-17). 특히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심산 제의는 대표적인 이 시대의 모습이었다.

포로생활과 이스라엘의 신앙

이스라엘에 몰아 닥친 엄청난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앙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않되도록 하였다: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들의 손에의해 무너진 것은 어떤 이유에서이며, "영원한 기업"으로 삼으시겠다는 다윗왕에 대한 약속은 파기된 것인가?하는 질문과 함께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63:19;33:10;37:11). 이러한 질문들은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제기된 적이 없는 질문들이었는데,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은 언제나 인종적으로나 제의적으로 잘 정의된 하나의 단일 공동체를 의미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망가뜨린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신앙은 이러한 질문들을 단순한 물리적인 생존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에 관한 신학적 해명을 제시하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의 불꽃을 살려 나갔다. 이러한 작업은 백성들과 함께 바빌로니아로 잡혀갔던 예언자 예레미아와 에스겔에 의해 준비되었다. 이들은 멸망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위해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갈 것을 역설하였다(31:31).

특히 그들은 귀환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포로 공동체의 대부분은 자기들의 처지가 잠정적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미래에 대한 유토파아적인 꿈은 강력하게 형상화 되었다(40-48).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 속에서 싹터 나갔으며, 이것은 곧 이방 제의나 문화와의 단호한 격리주의적 조처로 이어지면서 불가피하게 배타주의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경향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세계를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이해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악의 문제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쓰여진 작품들에서 천사, 사탄, 악마, 귀신 등의 주제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하며, 아울러 하나님의 사후 심판과 상급에 관한 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예정된 '하나님의 날'에 있을 임박한 심판과 미래에 대한 완성의 희망은 점차 일관된 체계를 갖춘 종말론적인 역사 의식으로 발전해 나가면서, 묵시문학과 묵시문학적 사상의 태동(태동)을 가져 다 주는 기회가 되었다.

, 그들은 성전 없이도 이룩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하면서 율법의 중요성을 강조해 나갔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켜주는 두 기둥-성전과 율법-중에서 파괴된 성전에 대한 재건의 희망과 열정이 식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율법을 보다 강조함으로써 성전대신 율법을 중심으로 한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재편과 신앙적인 삶을 이어나가려는 이들의 노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 새로운 공동체의 재건이라는 목표는 바로 율법을 통하여 이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문화된 토라가 바로 이 시기에 정리되어 편집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필연적으로 율법 중심의 유대교(Judaism)를 출현시켰다. 율법은 이제 단순히 공동체와 그 일원들을 규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공동체를 창출하고 결속하며 정체성을 부여해 주는 주체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