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유대인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

안명애 2015. 6. 9. 22:03

첫째 이유 - 유대인의 메시야관 ;


 


우리 거듭난 성도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믿는다. 한국말로 구세주, 구주로 번역될 수 있는 메시야는 영어로는 ‘머싸이어’ (Messiah), 히브리 말로는 ‘마쉬아흐’ 또는 메시아 (Mashiah) 이며 헬라말로 그리스도 (Christ) 인데, 이는 ‘기름부은자’ (The Anointed) 란 뜻이다.


유대인은 모세 오경과 구약 성경에 기초한 자신들만의 메시야관(觀) 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이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이들 유대인의 메시야관에 예수가 들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유대인의 메시야관은 어떤 것인가? 쉽게 풀어 설명하면 ‘성경에 기록된 내용대로 메시야가 할 일을 하는 자가 메시야이다’ 라는 것이 이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유대인들이 믿는 바, 메시야가 하는 일, 즉, 메시야의 지상 사역 내용은 무엇인지 살펴 보자.

 

 

메시야가 지상에 와서 성취할 일 ;


1.       제3성전 건축 (에스겔 37:26-28)


2.       모든 유대인, 즉, 잃어 버린 10지파를 포함하여 이스라엘 12지파를 모두 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불러 들이는 일


3.       증오, 갈등, 핍박, 고통, 질병 등 모든 인간의 고난을 없애고 지상에 평화를 이룩하는 일


4.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 모든 족속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일


5.       위 모든 일을 함에 있어 모세 오경, 즉 토라와 그 율법을 준수하는 일

 

 

이상이 유대인이 믿는 메시야가 이 지상에 오셔서 할 일의 목록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는 2,000년 전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위의 일 중 단 한가지도 하지 않았다고 유대인은 보고 있다. 물론, 우리 거듭난 성도들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 초림하셔서 인간 구원의 구속사적 임무를 완수하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며 하늘에 올라 가신 것을 잘 알고 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하늘에 올라 가신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셔서’ 이 모든 일을 이룰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유대인은 진정한 메시야는 처음 와서 단번에 이 일을 다 이루어 낼 것으로 믿고 있으며, 다시 오시는 메시야 즉, 메시야가 두 번째로 올 수 있다는 개념이 없다.


특히, 유대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율법 즉, 계명을 계명 그대로 지키지 않은 것을 주목하고 있으며 모세가 전해준 토라를 믿지 않고, 그 계명을 어기고, 율법을 무시한 예수를 메시야의 후보로조차도 생각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 유대인의 예수에 대한 생각은 이것이다. “ 예수는 토라를 지지하지 않고 이를 가르치지 않았다. 또 예수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모으고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 지배 당대에 회복시키지 않았다. 한편, 예수는 이 고통과 죽음의 세상을 끝내고 이 세상을 ‘평화스럽게’ 만들지 않았다. 원, 투, 쓰리, 스트라이크 아웃! 예수는 메시야의 후보로조차 생각할 수 없다. ” 이런 식이다.

 

 

물론,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울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신 것을 잘 알고 있다. 또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율법은 껍데기 뿐인 외식하는 율법적 행위였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던 율법의 정신, 즉 이웃 사랑과 하나님 경외의 정신이 빠지고 없는 ‘회칠한 무덤’ 같은 가식적 율법 행위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길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라 하시고 또,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라 하시며 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시고 또 한편, “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 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시며 이스라엘의 형식 뿐인 율법 지키기 즉, 마음에도 없는 율법적 행위, 속 마음으로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만 율법적 행위를 지키는, 그 위선과 외식을 통렬하게 꾸짖고 계시는 것이다.


또 신약 성경에 들어 와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율법사와 제사장들의 외식을 기회 있을 때마다 꾸짖으시며 마태 복음 23장 전체에 걸쳐, “화 있을 진저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여 --”, “화 있을 진저 너희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여 --”, 하는 꾸지람을 여러번 반복하고 계신다. 심지어 예수님은 마태복음 15장 5-6절에서 당연히 부모를 봉양해야 할 물질도 하나님께 바쳐 진 바 되었다 하며 부모 봉양을 회피하는 당시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율법 핑계를 통렬히 지적 하시며 이사야를 인용하여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하고 계신다.


우리는 당시 유대인의 율법 지키기가 외식적 행위에 그치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으며 또 예수님께서 이들을 왜 꾸짖으신 것인지, 유대인들이 뭘 잘못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 어떤 뉘앙스를 가지고 나무라신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사랑하는 마음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진정으로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이었지, 안식일 지키고 계명 지키고, 인간 스스로가 만든 전승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시고, 절기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 가시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지니라” 하시며 결코 율법을 무시한 적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또 안식일을 범했다고 유대인들이 비방하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신약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든 행적, 모든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의 이면에 있는 ‘긍휼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30년간이나 고생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고친 것에 대해 아무 거부감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확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위와 그 행위의 이면에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왜냐고? 유대인에게는 신약 성경이 없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이것이다. 종종 유대인은 기독교인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들 개신교인 또는 기독교인이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왜 돼지고기를 먹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이 명하신 절기들 즉, 유월절, 초막절, 무교절을 지키지 않느냐고? 우리는 그 이유를 안다. 사도행전 15장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먼저 전문을 인용한다.

 

 

사도행전 15장 1절 – 3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이 사도행전 15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누군가가 이방인 교회에 가서 이방인 성도들더러 할례를 받으라고 가르쳐 큰 혼란이 일어 났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 교회의 대표로 예루살렘에 올라 가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과 사도들과 이 문제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 회의 결과로 이방인에게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만 삼가하게’ 하고 일체 유대인의 율법적 행위는 면하게 하자는 것이 의결되었고,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이방인 교회를 방문하여 이 회의 결과를 전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 이방인 성도가 돼지고기를 먹고, 유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유이다. 즉, 이런 이방인 교회의 율법 면제는 2,000년 전 사도들의 회의 결과 정해 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런 내용을 모른다. 왜? 유대인에게는 신약 성경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행전도 없고, 또 사도행전의 내용을 풀어 설명할 교사도 없다. 이것이 오늘날 유대교와 유대인의 한계이다. 이 모든 것을 아는 우리가 유대인을 먼저 이해하고 보듬어 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 이 유대인의 메시야관을 그대로 받아 들여 유대인들로부터 완벽한 메시야로 경배 받으며 등장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탄과 짐승이다. 먼저 ‘짐승’은 예루살렘 제3성전 건축을 추진하여 유대인의 전폭적 지지를 얻을 것이다. 그 다음 DNA 검사 등을 통하여 잃어 버린 10지파를 찾아 냈다고 선전하며 일단의 유대인 무리를 세계 각처에서 이스라엘로 불러 모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완전히 회복시킬 것이다. 셋째, 세계 단일 정부 수립후에 전 3년반의 가장된 평화시대 개막을 통하여 전쟁도, 고통도 없는 완전한 세계평화를 유대인에게 보여 줄 것이다. 한편 이 모든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사탄과 짐승은 토라, 모세오경을 인용하고 이를 존숭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야말로 유대인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완전한 메시야로 등극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삼진 아웃 당한 이 분야에서 사탄과 짐승은 가히 4 연타석 홈런을 날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 언제 제3 성전이 건축될 것인가 늘 예의 주시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둘째 이유 – 교회의 반 유대주의 ;


 


유대인이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교회’ 때문이다. 교회가 유대인을 예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유대인을 자신들의 반유대주의를 통해 핍박하고 박해하고 추방하고 학살하였다. 종교혁명 이후 개신교회는 유대인에 대해 적대적임과 동시에 또 철저히 무시하고 비난하고 낮추어 보고 드디어는 2차 대전 중 홀로코스트를 통해 집단 학살하였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유대인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유대인이 예수를 믿지 않는 첫째 이유는 유대인의 메시야관 때문 이지만 이런 교회의 반유대주의가 유대인을 예수로부터 멀어지게 한 더 큰 이유이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내용 중 2차 대전 중의 유대인 학살 즉, 나치 독일에 의해 유대인 600만이 학살된 홀로코스트가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 대부분의 성도들을 포함하여 - 이 유대인 학살이 아돌프 히틀러라는 정신병자, 독재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뜬금없이 행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결론은 이것이다. 홀로코스트는 결코 어느날 갑자기 역사 속에 나타 난 것이 아니다. 홀로코스트는 역사를 통하여 세기와 세기를 거듭하며 무려 2,000년 간, 장장 20개 세기를 통하여 쌓여져 온 유럽 사회와 교회의 반 유대주의, 반 셈주의 (Anti-seminism) 가 그 시점에 누적되어 분출한 것 뿐이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마이클 L. 브라운이 쓴 “우리의 손은 피로 물들었다” ( Our hands are stained with blood) 에서 몇 대목을 인용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절 AD 325년의 니케아 공회의에서는 “이제 우리는 혐오스러운 유대인 무리들과 공통점을 갖지 않을 것이다” 라고 선언하며 안식일을 일요일로 바꾸었다.

 

 

AD 347 – 407년 시대에 활동한 위대한 설교자 John Chrysostom 은 설교 도중 왕왕 이렇게 언급하였다.

“ 일을 시키기에도 부적합한 이 짐승, 도살에나 적합한 이런 짐승, 유대인이 고통당해야 하는 것은 유대인 그들의 운명이다. 우리는 이들과 눈조차 맞추지 않아야 하고 더더욱 인사를 나누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들은 온 세계의 암병이고 부패 그 자체이다. 이들 유대인의 영혼에는 악마가 깃들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유대인과 그 회당 모두를 증오해야 한다. ” 이는 교회의 초기 시절 위대한 설교자로 숭앙 받았던 사람의 설교 내용이다.

 

 

AD 613 년 경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 상황을 보자. 당시 스페인에 살고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침례 받기를 거부하면 즉시 그 나라를 떠나야 했으며, 이런 추방령이 내려 진 몇 년 후까지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들의 지시에 불응했다고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한 뒤, 노예로 공표되었다. 7살 이상의 유대인 자녀는 부모로부터 떼어 내 강제로 기독교 가정에서 교육받게 하였다.

 

 

1096년, 1차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은 에루살렘 주위의 도시들을 먼저 거룩하게 한다는 명분 으로 20,000 여명의 유대인을 예루살렘 근처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들과의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학살하였다.

 

 

1146년에서 1147년 사이 제2차 십자군 전쟁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십자군은 이슬람과 싸우는 도중 유대인 회당에 피신해 모여 있던 유대인들을 불을 질러 모두 타 죽게 하고 유대인들이 회당내에서 화염에 싸여 죽어 가고 있을 때, 회당을 빙 둘러 서서 “그리스도를 경배합니다” 라는 찬송을 불렀다. 망토와 앞가슴을 가리는 흉패에 커다란 십자가를 그려 넣은 복장을 입은 채로, 역시 십자가를 그려 넣은 방패를 손에 쥐고 말이다.  왜, 이런 만행을 저질렀냐고 ?  물으신다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1478년 경 스페인의 종교 재판과 그 당시 스페인의 유대인 탄압 상황은 훨씬 더 비인간적이다. 먼저 모든 유대인은 재산을 그냥 놔 두고 이 나라 스페인을 당장 떠나야 했다. 유대인이 만약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면 추방은 면해졌다. 그러나 대부분 유대인들은 추방을 면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만 개종하는 척 했을 뿐 집에서 몰래 유월절을 지키고 무교병을 먹고 또 다른 유대 풍습을 지속하였다. 이런 유대 절기를 몰래 지키거나 유대 풍습을 지속한 것이 발각되면 붙잡아다 고문하고 사실을 자백하게 했다. 유대인이 고문을 못이겨 이번에는 진실로 개종하고 교회에 나가겠다고 다짐하면 이런 절차를 밟아야 했다.


‘남자나 여자나 개종을 다짐한 유대인은 맨발에 허리까지 벌거 벗은 상태로 모자도 없이 성당까지 걷게하고 행진을 시켰다.  영적 어둠에 있다는 증거로 손에는 불 안 붙인 양초를 들게하고 성당에 도착하면 신부가 “부정한 너희들에게 이제 십자가의 싸인을 준다” 라며 이마에 십자가 싸인을 그려 넣었고 매질한 후, 집에 벌거 벗겨 돌려 보냈다. 이런 일을 매주 금요일 똑 같이 6주일을 계속해야 했다.’

 

 

이런 교회들의 반유대주의와 시민들의 반 유대 정서가 세월을 거쳐 누적되어 쌓이면서 결국은 저 야만적인 홀로코스트로 이어 진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 할 것이다. 아니, 나치당은 진정한 크리스천이 아니지 않았냐고. 물론, 우리는 안다. 독자 여러분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나치 장교와 관료들이 진정한 크리스천, 거듭난 성도가 아니었으며 오늘 우리 성도와는 아주 다른 부류였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나치 장교도 나치 정부 요인도 다 기독교인 즉, 루터파 개신교인이거나 가톨릭교인이었던 것이다. 기독교란 말은 그리스도를 중국어로 ‘기독’ (基督)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곧 그리스도교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교는 영어로 Christianity 이며 교인은 크리스천이다. 오늘날 가톨릭을 개신교와 구분하기 위하여 가톨릭은 로마가톨릭으로, 그리고 우리 개신교는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라 부르고 있지만 유대인들이 보기에 기독교 즉, Christianity 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종교이다. 즉,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나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루터교든, 가톨릭이든 예수를 구주로, 그리스도로 믿음을 고백한 사람, 강제 노동 수용소라는 자신의 ‘직장’에 출근하기 전에, 즉, 유대인을 가스실로 처넣는 ‘업무’를 수행하기 전에, 집에서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으며 식사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드리고 나오는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전범들은 유대인 학살의 핑계를 대며 파렴치하게도 마르틴 루터를 인용해 자신을 방어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 보면 우리가 개신교의 위대한 개혁가로 기억하고 있는 마르틴 루터 조차 연설과 강연과 저술을 통해 유대인을 폄하하고 모독하고 핍박한 것은 다른 가톨릭 사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하였다.


“ 첫째, 이들은 성경의 겉표지 조차 읽을 자격이 없다. 그 첫 페이지를 읽을 자격은 더더욱 없다. 이들의 회당은 불 태워 없애 버려야 하며 이들의 집도 부수고 무너뜨려 버려야 한다. 탈무드와 기도책을 빼앗아 버려야 하고 랍비들을 위협하여 그 가르치는 행위를 즉각 중단시켜야 한다. 고리대금업을 당장 중단시키고 여행의 자유를 박탈하여야 하며 이 천한 게으럼뱅이들을 일터로 몰아 내어 그 이마에 땀 흘려 자신들의 빵을 직접 벌게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유대인을 보거든 얼른 성호를 긋고 ‘저기 악의 화신이 온다’ 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나치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지만, 유대인은 나치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기독교인으로 알고들 있으며 또한, 반 유대주의가 ‘교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다. 또 우리 개신교인들이 마르틴 루터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을 유대인도 알고 있다.

 

 

한편, 역사를 통하여 교회가 유대인을 핍박한 유형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개종 (Conversion), 둘째, 추방(Expulsion), 셋째, 박멸 (Annihilation) 이 그것이다. 먼저 유대인에게 개종을 강요한다.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 그러면 살려는 둔다. 다만, 위와 같은 굴욕적인 절차를 통해서만 개종이 이루어진다. 개종을 거부하면 추방이다. 너희는 ‘우리 교인들과 더불어 같이 살 자격이 없다’ 라는 것이다. 추방이 별 의미가 없다면 최종 방법 즉, 파이널 솔루션 -  전멸, 학살,박멸이다. ‘너희는 살아서는 안된다’ 이다. 개개인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 아니다. 마을 전부, 공동체 전부, 그 나라에 사는 유대인 전부를 문자 그대로 전멸시킨 것이다, 이것이 반 유대주의의 마지막 해법, final solution 이다. (다니엘 보트킨; Why Jews don’t believe Jesus? 유투브 동영상 참조; 자막 번역은 다음 카페 ‘옛적 그 선한 길’ 제공)

 

 

위와 같은 것들이 지난 2,000년간 교회가 유대인에게 자행 해 온 반유대주의이다. 1940년대의 홀로코스트는 절대로 어느 날 갑자기, 나치에 의해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에서 악질 고리대금업자 유대인 샤일록을 등장시키기 훨씬 이전인  중세 시대부터 유럽 사회와 유럽 교회는 유대인들을 게토에 몰아 넣어 따로 살게 했고, 다윗의 황색 별을 가슴에 달고 다니게 만들었고, 대놓고 손가락질 하고 린치를 가하고, 정당한 직업을 갖지 못하게 했다.  셰익스피어가 유달리 반 유대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연연히 이어 내려져 온 당시의 전반적 사회 풍조가 그러했던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이 모든 반 유대주의의 근저에 있는 유럽 사회와 유럽 교회의 유대인에 대한 반감의 근본적 원인을 고찰할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다. 요점은 이것이다. 2,000년간 교회는 유대인을 증오하여 왔고, 유대인은 교회를 배척하여 왔다. 유대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저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만약 앞선 페이지에서 인용한 ‘시온의 의정서’ 가 진실로 존재하는 문건, 즉 유대인 장로들에 의해 실제 만들어 진 사실적 문건이라면 유대인과 유대인의 장로들은 2,000년 간 일방적으로 당해 온 교회로부터의 핍박을 이제 금권으로 복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이런 정도까지 교회가 유대인을 핍박해 온 것이 사실이라면, 유대인의 마음속에 저런 불타는 복수심이 깃들여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탄이 교회와 유대인을 멀어지게 만들어 왔다고. 그리하여 두 증인의 출현을 막아 왔다고. 유대인을 미혹하고 교회를 타락시키고 둘 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그래서 유대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한사코 거짓말로 막아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교회는 이 시대 로마 가톨릭과 예전의 교회와 얼마나 다른가? 나는 오늘 우리의 교회는 철저히 유대인에 대해 무관심하고, 따라서 무지한 편이라 생각한다. ‘Gates of Eden’ 이란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Why Jews don’t believe Jesus?” 란 글을 쓴 Daniel Botkin 은 오늘날 소위 신학 대학을 나왔다는 사람도 교회의 반유대주의, 반셈주의가 무어냐고 반문하고 있다고, 이런 유대인에 대한 무관심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중세와 근대 이전의 유럽 교회가 반 유대주의를 낳은 것은 나는 일차적으로는 그 당시 교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그 당시의 교인들은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는 길이 없었고 성경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사제들에 의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던 것이다. 모든 성경은 라틴어로만 씌여 졌고 따라서 일반 민중은 성경을 주더라도 읽을 수 없었다. 성경은 신부, 사제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가? 집집마다 관주 성경, 한영 대역 성경, 개역 한글, 개역 개정 몇 권씩은 있는 형편이며  딸내미 성경책 따로, 와이프 성경책 따로, 한 집에 성경 서 너권씩은 다 가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늘의 유대인을 성경속의 유대인과는 전혀 다른 ‘하늘에서 문득 떨어진 별종’ 쯤의 인간 부류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제 이런 무관심을 버려야 할 때이다. 적어도 우리 거듭난 성도들은 각자가 자신의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세의 가톨릭 교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오늘 이 시대는 우리 거듭난 성도들이 두 증인 된 유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이해하고, 보듬고, 싸 안고 가야 할 ‘마지막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우리 성도들의 밝은 행위를 보고 유대인이 예수님께로 돌아 오는 - 그런 빛과 소금의 역할을 우리 교회와 성도가 공동으로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