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예수님은 어느나라 말을 쓰셨는가?

안명애 2015. 6. 9. 22:06

이상훈 교수의

    <<  예  수  의     언  어  >>
        His Mother Tongue

    예 수께서 기도 하실때에 사용한  언어가 아람어(aramaic)이며 예수는 이 언어로 설교하시고 교훈하였다. 복음서중 원초적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마가복음이 이 아람어의 몇 가지를 보존하고 있다. "아바"(막. 14:36,참조,롬.8:15, 갈.4:6),"  달리다굼"(막.5:41),"에바다"(막.7:3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 15:34
  ,마태. 27:46)등이 그 예이다. 신약에  수록이 된 중요한 아람어에 "마라나다"가  있으나 그 언어는 바울의 언어이다(고전.16:22).

    예 수의 언어에 대해서는  주로 아람어가 대중에게 사용이  된 언어임이 틀림이 없고 또한 예수의 기도의 언어였음이  틀림이 없으니 그러나 또한 일반 시정언어(市井言語)인 헬라어나 또한 구약문전(舊約文典)의 해독을  위한 히브리어까지 숙달 하신 것으로 생각이 된다.  Dalman교수가 예수의 언어 특성을  지적하여 "갈릴리 아람어"였다라고 결론을  내린바  있고  현재까지  이  예수의 언어학파(The  School  of  Jesus'  language)에서 이 갈릴리 아람어의 이해에 집념하는 신약학자들이 있다.

    성서세계에 있어서, 아람어와의 관계와 그 사정은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이 된  역사적 상황으로 이해 하여야 한다.  지금에 이르러 확실한 기정사실이지만 예수의 교훈과 비유 그리고  구체적으로 산상설교와 주기도문이 원초적으로 아람어의 구성 내지는 문장으로 존재하였고 그  자료가 즉시 희랍어로 번역이 되었다가 오늘의 현대어와 그리고는  우리의 국어로 옮긴 것이 사실이면  이 아람어의 사정은 성실하게 이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아람어는 예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엄 격하게 고전어의 언어권(言語圈)을 언급하면,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둘다 샘족계의 언어이고 성서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기실 히브리어의 전 역사는 동일언어가족이면서 보다 광범하고 우수한 언어영역(言語領域)을 형성한 아람어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한 예로, 하란의 한  돌 무덤을 이름하여 야곱은 히브리어로 '갈르엣'이라고 그리고 그의 장인인  라반은 아람어로 '여갈사하두다'라고 서로  엇 갈린 표시를 하였다. (창.31:47-48).

    두 언어가 견지하여 온 긴장관계가  기원전 721년부터 아람어의 우세로 기울다가 바빌론으로 히브리사람들이 집단포로로 끌려갔다가 귀향한 후부터는 히브리어의 사용은 고작  상류층만의 소수가 그들의 종교적보수성을  위하여 사용할 뿐인 미미한 상태로 남게 되었고, 일반은 이미 아람어밖에는 이해 하지 못하는 아람어 절대우세의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에스라와  함께 레위사람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일반 대중을 향하여 히브리어 본문으로 모세의 교훈을 읽고  또한 큰 소리로 아람어로 풀어주어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였을 때(느헤.8:7-8)  저 유명한 느헤미아의 부흥이 불이 붙었었다.

    그러나, 예수시대로 접어 들어 이미 아람어만의 주도권이 100여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언어는 아람어였으며, 예수의 주변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기쁜소식에 접한 팔레스틴사람들의 언어 역시 아람어였다. 어찌하여 예수는 일상 사용하는 언어로서 유대인의 민족어이며  신학언어인 히브리어나 당시의 문학과 철학언어였든 희랍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 대중어를 사용하였는가 하는 이유는 문제이다. 앞서 언급을 한 바와 같이  예수의 교육수준과 범위가 경이로운 정도이며 그의 언어구사가 히브리어나 희랍어나 전혀 부자유함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정사실로 정하고 이 질문에 접근하면, 어찌하여 당초에 예수가 그의 교훈을 주로 아람어로 전달했는가 하는 수수께기의  해답은 아래와 같은 상황(狀況)이해에서 조명이 되어야  한다.

    1. 희랍어는 희랍 로마세계(Greco-Roman  world)에서 교육 받은 사회층에서 사용이 된 언어이지만 아람어는 서민언어(the tongue of the ordinary people)로서 서민들의 중요한 전달 수단이었다고 하는 것.
    2. 유대인이 회당 안에서 히브리어의  성문서를 읽을때는 반드시 서민의 언어인 아람어로 번역을 하였고 이러한 번역문을 '탈굼'(Targums)이라고 불렀다.

    3. 기원 1세기에 집필이 된 아람어 문서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알수 없으며 현재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얻은 소득은기원전 4세기와 기원 4세기의 아람어 문서일 뿐이고 따라서 그 중간 800년간의 아람어  문서는 거의 발견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4. 위에서 언급한 사실은 예수시대의 아람어가 주로 구전수단의 언어였으며 문서언어가 아니였다고 판단하게 한다는 것.
    5. 따라서 예수의 교훈과 비유에  사용이 된 아람어는 강열하게 기억에 호소하는 그림언어 또는 詩語(시어)의 성격의 언어였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이상과 같이  5가지의 상황설정을 전제하면서 예수의  언어인 예수의 아람어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심층이해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1. 예수의 언어에 관한 탐구는 가장 원초적인 예수의 교훈과 예수의 설교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가 된다.
    2.언어 구사및 언어의  선택은 즉시적으로 그 인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이 된다.

    3. 특별한 예수의 언어인 당시으 아람어는 문서언어가 아닌 구전언어였기 때문에 강열한 예수의 인격이 실려있다.
    4. 기원전 4세기와 기원전 4세기의 아람어문서의 연구에 의하면 아람어는 유별나게 그림언어(picture  language)이며 시와 같은 구성에  의한 語法으로 의사자 전달이 된다. 구체적인 예로, 예수의 아람어의 문절에서는 리듬(rhythms)과 동운어(同韻語)(rhyme)의 강열한 색채가 있으며 그러한 시적표현과 그림언어의 사용으로 예수의 많은 교훈과 설교나 비유가 생동적으로 수용이 되고 오래 오래 기억에 머물렀다.

    이와같이 신선한 안목으로 복음서를  해석하여야 할 서론적인 시도는 마태복음에 기록이 도니 맥락에 의한 주 기도문의 이해이다. 주 기도문을 4세기의 아람어에 의한 재구성을 하고 보면 지금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의 "일용할"의 형용어의 의미가 풀린다. 본래 현재의 희랍어 본문에 나오는 "일용 할"의 의미를 지닌 epiousion(마태.6:11)이라고  하는 낱말은 희랍어의 역사에서 기원 1세기에는 없는 낱말이며,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가리켜 기독교가 창작한 언어라고 한다(참조,Basil Fletcher, The Aramic Sayings of Jesus,p.19). 4세기에 쩨롬은 현재는 발견이 되지 않고 있는 아람어로 된 "나사렛 사람들의 복음서"와 비교하여 이 낱말이 '마하르'(mahar)라고  하는 아람어인 것을 확인하여 그 의미가 "내일을 위한  "또는 "미래를 위한"의 의미가 함께  있다고 보았다. 예수가 우리들의 참 "생명의 떡"이심을 함께  생각하면서 풀어야 할 포괄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태.6:13)의 아람어는 "talinen"이고 이 "타리넨"은 그 뒤에 따라오는 아람어의 낱말인 "파시넨"(passinen) 곧 "구하옵소서"(같은 13절)와 완전히 일치하는  동운어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시험으로 길을 인도하는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고난에 처하여 있을때
버리지 마옵시고" 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강하다)  

   근자에, 주기도문에 관한 질문에서  어찌하여 마태복음의 본문(6:9-13)과 누가복음의  본문(11:2-4)에  차이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Joachim Jeremias의 해석에 의하면 그러한 변화는 각기 개성있는 복음서의 독자의 차이가 빚은 맥락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마태복음안에 담겨진 기도의 지침은 어릴 때부터 기도생활에 익숙하였으나 이  생활이 진부하여져 생명력을 상실한 그러한 대상들에게 준 지침이고,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처음으로 기도생활을 시작하는 독자들에게 용기를 제공하기 위한  지침이라고 하였다. 명백한 사실은, 마태복음이 유대인 크리스챤들에게 의도한 전승임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이르러, 신약의 해석학적 규범을 언급할 때에 문법적이해와 사회학적이 해와 그리고 신학적이해 , 이와같이 세가지  범주의 협력을 중히 여기며 특히 사회및 역사적 탐구가 浮上하고 있는 경향이다.
    그 러나 주기도문에 관한 질문중에서,  마태복음의 맥락에 있는 송영(doxology) 부분("...대개 나라와  권세와...")이 누가복음에는 없고 그리고  요즘의 신약의 마태복음에서도 생략이 되고  있는 새로운 사실에 저우기  당혹을 하는 신도들을 만난다. 이 문제의 해석을 위하여 중요한 요소가 예수의 언어인 아람어의 성격이다. 예수의 아람어는  지극히 회화적(繪畵的)이고 시적(詩的으로 구성이  되어, 예화나 비유의 경우에는 그림과 같고 산상설교나 주기도문의 경우에는 시의 리듬이 있고 동운어가 끝부분에서 맞아 떨어지고 있어서  듣기에 아름답고 기억에 새겨진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리듬과  동운어가 그 끝부분의 송영에서는  전여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성상의 모순을 설명하여 본래 초대교회에서는 성만찬 만큼이나 이 주기도문이 소중한 예배형식의  유산이었고, 직접, 주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이 기도문을 함께 기도할 때마다  어느듯 일찍부터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이와 같이  경건하게 송영을 제창하므로 끝 났다고 생각을 한다. 마치 오늘의 한국교회가 기도 할때에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하는 경건한 신앙행위와 유사하다.

    이와 같이 예수의 언어연구는 기원  21세기의 아람어의 연구와 함께 또한 헬라어로 번역이 되었으나 마치 눈부신 後光처럼 해석학자의 안목에 드러난 복음서의 맥락들, 다시 말하여 특히 예수의  교훈, 예화, 설교, 비유등의 경우에서 생동적으로 숨 쉬는 그러한 구전의  아람어의 구성을 탐구하므로서 예수의 원초적 의미 가 다시 발견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깊은 심층적 차원이라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