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칼빈주의

안명애 2015. 6. 21. 21:24

a) 칼빈의 생애(1509-1564)

- 칼빈(Jean Cauvin, Joh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북 프랑스 노용(Noyon)에서 주교의 재정고문인 G rard Cauvin과 그의 부인 Jeanne Lefranc의 아들로 태어났다.

- 노용에 있는 Coll ge des Cappettes에서 라틴어를 공부하고 1523년 (추측하건대) Coll ge de la Marche와 Coll ge Montaigu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 1528년 문학석사를 취득했다.

- 1528년 파리에서 오를레앙(Orl ans) 그리고 1529년 부르제(Burges) 대학교에서 법학과 인문주의를 공부했다.

- 1531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파리에 왔다.

- 1533년부터 파리대학교의 인문주의자들 모임의 회원이 되었다. 이 모임은 종교개혁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Faber Stapulensis). 이 때에 에라스무스, 루터, 멜랑히톤의 글을 읽었다.

- "갑작스런 회심"으로 종교개혁적인 인식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1527/28년 혹은 늦게는 1533/34년).

- 1534년 말 칼빈은 프랑스와 1세 때 프로테스탄트 박해 때문에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슈트라스부르크를 지나 1535년 바젤에 왔다. 여기에서 그의 처녀작이고 주요작이 나왔다: '기독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 1536). 종교개혁 신학의 고전적인 작품으로 루터의 교리문답을 본받은 복음적인 가르침의 교리문답. 이 책으로 프랑스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받고 있는 오해를 방어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판이 나왔다: 1539, 1541 그리고 1559년판.

-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 잠시 머문 뒤 도중에 제네바에 들러 파렐(Wilhelm Farel)로부터 이 도시에서 종교개혁에 함께 동참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네바에 머물게 된다 (1536년). 칼빈은 1537년 제네바 교회법을 작성하여 시의회에 제출하였다. 시에서 시민들이 파렐과 칼빈이 제네바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1538년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 마틴 부처(Martin Bucer)의 간곡한 부탁으로 슈트라스부르크에 있는 프랑스 난민들의 교회를 맡았다. 고등학교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쳤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독일의 종교개혁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1540년대 초반 하게나우(Hagenau), 보름스(1540/41),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1541)종교회의에 참석하여 멜랑히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가졌다.로마서 주해.

- 제네바에서 칼빈의 추종자들은 그의 귀환을 성취하다. 자신의 교회법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1541년부터 제네바에 다시 머물게되었다. 투쟁 하에서 그의 종교개혁적인 활동의 시작. 첫째 성과: 제네바의 교회법이 시의회에 받아들여짐, 'Ordonnances eccl siastiques'.

- 1553년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논쟁들은 반삼위일체론자인 세르베트(Michael Servet)를 반박하는 소송을 하였다. 이 소송은 세르베트를 화형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 1555년부터 칼빈은 자신의 적수들을 능가하였다. 그는 동서 유럽에서 복음주의자들의 종교개혁적인 지도자요 조언자가 되었다.

- 1559년 신학 아카데미가 제네바에 설립되었다.

- 1564년 칼빈은 제네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자(Theodor Beza, 1519-1605)가 칼빈의 후계자가 되어 제네바 교회를 지도하게 된다.

b) 칼빈의 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관점들

- 루터의 가장 위대한 제자인 칼빈은 조직신학자로서, 성서주석가로서 그리고 설교가로서 의의가 있다. 그는 종교개혁적인 신학을 마침내 완성하였다. 루터 이후 그의 신학은 어거스틴, 에라스무스, 부처 그리고 멜랑히톤의 영향을 받았다.

- 루터와는 상대적으로 칼빈에 있어서 신학적인 강조가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성서를 보는 입장에서 축자적인 관점과 신관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의 절대성, 영광의 강조.

-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전체 성경의 증언에 대한 교리적인 개관에 대해 칼빈은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서의 권위는 성령의 내적인 증거에서 싹이 튼다(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 칼빈은 바울로부터 해석된 루터의 성서관의 단면성을 피하기는 했지만,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서 사이를 구별했던 자유를 잃었다.

- 칼빈은 완전히 자유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다. 이 은혜는 말씀을 통한 부르심과 믿음에 선행한다. 또한 칼빈은 루터처럼 선택과 하나님의 의롭다하심과의 맥락에서 보지만, 1539년부터 멸망을 선택과 논리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중예정에 도달한다(praedestinatio gemina). 이것은 칼빈주의의 특이한 표식으로 내·외적으로 심한 논쟁을 일으킨다. 17세기의 칼빈주의에서 선택은 신앙의 순종에 대한 보이는 열매로 볼 수 있다는 관념을 세우게 된다(Syllogismus practicus).

- 칼빈신학의 윤리적인 강조는 신중심적인 특색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신앙의 순종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에 속해야 한다. 그리하여 칼빈은 율법의 3중 사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triplex usus legis). 율법은 의롭다함을 받은 인간의 새로운 삶에 있어서 유효성을 가진다.

- 성찬론: 칼빈은 그리스도의 실존성을 주장한다. 이 실존은 성령을 통해 나타난다(영적인 실존). 칼빈은 믿음없이 먹음 (maducatio impiorum)을 부인한다.

c) 칼빈의 제네바에서의 활동


- 칼빈의 교회관은 이미 1541년의 제네바 교회규정( Ordonnances eccl siastiques )에 나와 있다. 교회에 관한 조직 형태는 신약성서를 모범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네 개의 직무로 구성되어 있다: 목사, 교사, 장로와 집사. 특히 칼빈의 교회에서는 권징을 하고 평신도들에게 주어지는 장로직이 특색을 이루고 있다. 칼빈의 엄한 교회권징은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을 지키기 위함이다. 또한 가르침과 사회사업은 교회의 직접적인 실천영역이다.

- 칼빈 교회에 있어서 특색은 시민과 교회 공동체의 상호간의 침투이다. 칼빈은 대다수 교인들과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를 구별짓지 않고 민족교회적인 구조를 고수하였다.

- 수많은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논쟁 이후 칼빈은 마침내 제네바 교회를 서유럽에 있는 수 많은 교회들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d) 기독교 강요의 형성

- 칼빈은 자기 친구들과 믿음의 동지들에게 복음적 신앙을 변호하기 위하여 '강요'(Institutio)를 썼다. 그는 강요를 1534년 앙굴렘(Angoul me)에서 쓰기 시작하여 1535년 바젤에서 완성하였다. 제1판은 1536년 3월 라틴어로 바젤에서 발행되었다.

- 머리글은 프랑스왕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 종교개혁을 변호하고 재세례파를 공격하기 위함이다. 종교개혁의 날카로운 적수들이 이미 프란시스 1세에게 그들의 책들을 헌정하였다. 그 가운데서 사돌레(Sadolet)는 자신의 로마서 강해의 서문을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로 썼다. 사돌레는 이단척결을 프란시스 1세에게 요청하였다. 종교개혁의 다른 적수인 부데(Bud )는 그의 책 '헬레니즘으로부터 기독교로의 과도기'(Transitus Hellenismi ad Christianum)에서 왕을 칭송하였다. 여기에서 부데는 "매우 혐오스러운 섹트의 가르침"에 대해 비판하였다. 사돌레와 부데는 복음적인 가르침을 비난하였다. 이런 일 때문에 칼빈은 강요를 프란시스 1세에게 헌정했고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 몇가지 이야기하고 있다.

- '강요'는 교리를 가르치는 책으로 루터의 '소교리문답'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율법(Dekalog), 사도신경(Apostolikum), 기도(주기도문), 성례전(세례와 성만찬), 거짓 성례전들과 기독교의 자유.

- 라틴어판 제2판은 1539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발행되었다. 불어판 제1판은 1541년 제네바에서 발행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교리 문답서가 아닌 교리서, 교의학책이다.

- 칼빈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재세례파를 알았다. 재세례파와의 대화에서, 세르베트의 글에 나온 사상을 반대하기 위하여 칼빈은 삼위일체론을 부가하였다. 재세례파를 공격하기 위해 칼빈은 全章을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에 대해 보충하였다. 이와 같은 목적에서 그는 유아세례에 대한 변증을 보충한다(구약과 신약의 관련 속에서).

- 라틴어 제3판은 1543년에 출판되었다. 이에 대한 불어판은 1545년에 나왔다. 새로운 장들은 직무에 대하여 쓴 것인데 신학적인 근거를 처음으로 제시한다.

- 라틴어 제4판은 1550년에 나왔다. 이에 대한 불어판은 1551년에 나왔다. 여기에는 성서의 권위, 성인 숭배와 성상 숭배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보충하였다.

- 라틴어 최종판은 1559년에 나왔다. 이에 대한 불어판은 1560년에 나왔다. 4권 80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 신론(하나님, 창조주요 세상의 전능하신 주관자, 18장). 제2권 구원론(그리스도, 구원자, 17장). 제3권 성령론(성령, 인간 안에서 성령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 25장). 제4권 교회론(교회와 성레전, 20장).

e) 서유럽에서 칼빈주의의 확산


 - 서유럽의 종파 싸움과 카톨릭의 재강화의 시대에 칼빈주의가 확산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루터주의와 비교해볼 때 더 강한 공동체 정치적인 활동을 보여준다.

 1) 프랑스

 - 갈리아 신앙고백(Confessio Galicana, 1559)은 프랑스 개신교회의 근간이 되었다.

 -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대립은 8 번에 걸친 위그노파 전쟁을 낳게한다(1526-1598년).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박해의 극점은 소위 말하는 바르톨로메우스밤에 일어났다(1572년). 앙리 4세는 낭트(Nantes)칙령(1598년)에서 위그노파에게 양심과 종교의 자유와 함께 시민계급의 평등권을 승인한다.

 - 낭트 칙령 이후 프랑스에서 칼빈주의는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루이 14세 치하에 새롭게 고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1685년 폐지하였다. 수많은 위그노파 사람들이 프랑스를 떠나야 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85년 포츠담 칙령을 통해 신앙의 난민들을 자기 나라에 불러들였다. 이 난민들은 이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문화와 정신적인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네덜란드

 - 스페인의 지배(1566-1609년)에 대한 네덜란드의 독립전쟁과의 관계에서 칼빈주의는 -프랑스와는 달리-북부 지역들에서 국교의 지위를 획득하다.

 - 칼빈주의 교회의 기본적인 고백은 벨기에 신앙고백서 (Confessio Belgica, 1561년)이다.

 - 종파의 시대에 네덜란드는 종교의 자유를 가장 광범위하게 인정한 나라이다. 경제적이고 정신적 문화적인 비약이 17세기에 있었다.

 - 정통 칼빈 신학에 있어서 주된 논쟁은 예정론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소위 말하는 "아르미니우스 논쟁"(Jakob Arminius, 예정론을 가장 강력히 반대한 사람)은 도르트레히트 종교회의(1618/19년)에서 예정론의 확증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 종교회의의 결정은 전체 칼빈주의와 연관을 가졌다.

 - 새로 설립된 라이덴(Leiden), 그로닌엥(Groningen) 그리고 우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중요한 칼빈신학이 전개되었다. 주요한 신학자들:

푸치우스(Giesbert Voetius, 1588-1676): 네덜란드의 "정확주의"(Pr zismus)의 창시자(살아있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경건에 대한 증명).

코케우스(Johannes Coccejus, 1603-1669): 성서의 계약(foedere)에 근거하여 구속사적인 신학을 세운 "계약신학"으로 유명하다.

후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는 국민들의 협동적인 삶에 관습과 법의 보편적인 기초들을 세웠다. 이러한 기초들로 그는 유럽 계몽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3) 스코틀란드

 - 스코틀란드 왕국은 종교개혁자 낙스(John Knox, 1505-1572)에 의해 칼빈주의가 특히 엄격한 형태로 승리하였다. 스코틀란드 칼빈파 교회는 "스코틀란드 신앙고백"(Confessio Scotica, 1560)에 그들의 신앙고백의 기초를 두었다.

 4) 독일

- 서유럽에 비해 독일에서 칼빈주의는 비교적 상당히 약하다. 칼빈주의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과 군주의 교회지배 아래에 있어야 했다.

- 1560년 이전에 루터교 지역인 팔츠(Pfalz)가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치하에서 칼빈주의를 받아들인다. 1563년 선제후국 팔츠의 교회헌법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포함하고 있는- (연합 교리문답으로 간주되어진다: 이중예정론이 없는 약화된 칼빈의 교리).

- 1613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요한 지기스문트(Johann Sigismund)가 정치적인 이유에서 칼빈주의 교회로 개종하였다. 그는 유스 레포르만디(ius reformandi)를 버리고 국민들은 루터교 교인으로 남아있었다.

- 그외의 칼빈주의 지역: 브레멘, 안할트, 헷센-카셀 그리고 리펜-데트몰트.

- 니더라인 지역에만 있는 원래 칼빈주의 지역: 클레베(Cleve), 윌리히(J lich)와 베르크(Berg). 여기에서 형성되어진 노회적(老會的)인 교회헌법은 19세기 독일 지역교회들(Landeskirchen)에 있어서 최초의 노회적인 구조들에 영향을 끼쳤다.


XV. 영국 성공회의 성립

a) 영국성공회의 시작

- 영국 국교회(성공회, Anglican Church)는 그 기원이 신학적인 새로운 인식이나 신앙의 새로운 형태에 있지 않고 영국이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이탈하는 교회정치에 있다. 이 분리는 헨리 8세(1509-1547)에 의해 1534년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교황이 그의 이혼 청원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원래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21년에 발표된 루터를 반박하는 그의 글 "7성사에 대한 주장"(Assertio septem sacramentorum)은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defensor fidei)라는 칭호를 가져다 주었다. 정치적 사안과 그의 결혼문제로 헨리는 교황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는 아라곤의 카타리나(Katharina von Aragon)와의 결혼에 혐오를 느끼고 궁녀인 안나 볼레인(Anna Boleyn)과 결혼하기 위해서 교황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이 결혼의 취소를 허락받기 원했다. 사실 카타리나와의 결혼은 교회법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 카타리나는 헨리의 큰형인 아더(Arthur)의 미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교황의 특례로 이 결혼을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 영국의 수상이자 추기경인 올시(Thomas Wolsey)는 동시에 교황의 사절이기도 했다. 교황청에서는 독일 황제 칼(Karl) 5세의 압력을 받아 헨리와 카타리나의 결혼이 유효임을 주장하였지만(카타리나는 칼 5세의 백모), 올시는 이를 관철할 수 없었다. 1529년 올시는 면직되고 영국의 성직제도는 왕을 영국교회의 머리로 인정하였다(1531년). 이 무력적인 행위로 헨리는 1533년 카타리나와의 결혼에 대한 교회적인 분리와 안나 볼레인과의 결혼에 성공하였다(1536년 볼레인을 단두대에 보내고 결혼을 한다). 1534년 국회는 수장령(suprematakte)에서 왕을 영국교회의 머리(supreme head in earth of the Church of England)로 공포했다.

- 교회개혁에 있어서 헨리의 권위있는 조언자는 무자비한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이었다. 이 새로운 법안에 반대하는 자들은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1534-1539년 동안 수도원이 폐지되었다.

- 위클리프(1384년 사망)에게 있었던 지배세력적인 교회에 대한 예리한 신학적인 반대는 "롤라덴파"(Lollarden)의 사상에 의해 계승되었다. 롤라덴파 외에 영국에서는 인문주의가 교회의 개혁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틴달의 번역성서는 번역에 수정을 가하여 오늘날까지 영국에서 읽혀지고 있으며 이것은 영국 종교개혁의 근원이었다. 그리고 또한 루터의 사상도 종교개혁의 도(道)를 영국에 전했다.

- 이러한 정신적인 운동들은 영국에서 단순히 분열로 머물러 있지 않고 종교개혁적인 사상이 일어나도록 했다. 이미 왕국 섭정관인 소머셋(Somerset)은 미성년자인 국왕 에드워드 6세(Edward VI. 1547-1553) 아래서 헨리 8세가 세웠던 영국의 "카톨릭적인" 국교회로부터 교리에서 명백히 복음적인 교회를 만들었다; 이것은 대륙의 개혁교회적이면서 또한 루터교적인 기초 위에 선 42개 신조가 증명하고 있다. 물론 루터교적인 견해가 때에 따라서 칼빈적인 것에 억지로 맞춰진 것도 있다. 성찬론과 기독론을 예로 들 수 있다. 오늘날 공적으로 인정받은 1562년의 39개 신조(1571년 승인됨)는 아주 적게 개정된 단지 42개 신조의 수정본이다. 이와는 반대로 예배 형식에서 에드워드 6세 때에 영국 국교회는 매우 보수적이며 매우 카톨릭적으로 남아 있었다.

b) 영국에서 새로운 정신적인 사조

- 엘리자베드(Elisabeth, 1558-1603) 여왕 치세 때 영국국교회는 교리에서 중도적인 칼빈주의를 취했다(1562년 39개조). 의식과 헌법은 카톨릭의 형태로 남아있었다.

- 16세기 중반부터 청교도주의 운동은 칼빈적인 사상을 택하였다. 특히 시민계급에서 엄격한 성결의 생활에 대한 원칙들이 전체주의적인 왕정정치와 영국국교회(성공회)에 대하여 반대 입장에 있다.

- 로마 교황편인 스페인 무적함대(armada cat lica: 5만 8천톤, 3만명과 포 2천 4백문을 수송할 수 있는 130척의 선박으로 구성됨)가 1588년 영국 해군에게 패배하였다. 이로써 영국내 로마 카톨릭은 침체하였다.

- 1603년 엘리자베드 1세가 사망하고 엘리자베드 부왕(父王)인 헨리 8세의 혈연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James VI)는 1603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또한 즉위하였다. 제임스 1세는 모친 스코트랜드의 메리(친로마파)가 엘리자베드 1세에 의해 사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성공회의 입장에 섰다. 그는 로마 카톨릭을 박해하지 않고 오히려 교황청과 성공회의 화해를 원했다.

-16세기 말 영국에서 성공회의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사용과 사도적 계승의 주교직을 외면하고, 개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왕권을 대항하고 의회를 존중하는 청교도들의 열의가 상승하고 있었다. 제임스 1세는 본래 장로교 중심의 스코틀랜드 왕이었으나 잉글랜드 왕이 됨으로 청교도들은 왕의 교회 정책에 큰 기대를 걸고 왕에게 "일천명의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여기에서 청교도들은 영국 성공회의 기도서 사용에 반대하며 여러 가지 점을 제거해주도록 요구했다. 제임스 1세는 이 탄원과 간청을 1604년 Hampton 궁정회의에서 토의하도록 했다. 이 회의는 제임스 1세 자신과 주교, 청교도 지도자 사이에 열려 기도서와 교리부분에서 약간의 수정을 했고 성서의 새 영어 번역판(Authorized Version)을 내놓았다. 이 회의에서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에게 특별한 요청을 했다. 그것은 "안식일 엄수주의", 즉 주일에 모든 운동과 오락 등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제임스 1세는 "스포츠에 관한 담화문"(Decleation of Sports)을 1618년 발표하여 주일에 적절한 오락을 승낙하였다.

- 제임스 1세는 친(親)로마주의인 그의 어머니 스코틀랜드의 메리와는 달리 로마 카톨릭에 동조하지는 않았다. 제임스 1세는 성공회를 지원하였다. 그는 왕직과 주교직은 일치되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왕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고 교회는 왕권을 지원하며 왕은 교회를 도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 청교도들에 대한 국가의 압력은 마침내 많은 사람들을 네덜란드로 이주하게 했고 그곳에서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과 합세하여 약 100여명이 같은 해 11월 11일 신대륙 미국의 Plymouth Rock에 상륙하게 되었다. 이후로 청교도들은 미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

- 1625년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를 통치했다. 찰스 1세는 독재를 했다. 1629년부터 1640년까지 의회가 휴회되었다.

- 1642년 국가와 교회의 지도자 그리고 청교도들 사이의 대립으로 야기된 시민전쟁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장로교, 청교도 그리고 의회가 한파가 되었으며 청교도가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청교도인 올리버 크롬웰의 등장으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군을 차례로 패배시킬 수 있었고 찰스 1세를 처형하였다.

- 1642년 영국의 시민전쟁은 교회 권력층과 민병, 정계, 성공회와 개신교, 주교와 청교도 사이의 대립과 혼란상태를 야기 시켰다. 이 때 많은 교파가 생기게 되었다.

- 브라운주의자(the Brownists): 회중교회의 초기 호칭이다. 브라운(R. Browne, 1550-1633)이 청교도에서 분리하여 회중교회주의(congregationalism) 창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 회중교회: 각 개체교회가 자립적으로 영국 국교회에서 독립한 교회이다. 네덜란드와 미국에 퍼졌고 현재는 영국에서 장로교회와 연합되어 있다.

- 영국 침례교회: 브라운주의로부터 나왔다. 성공회의 성직자인 John Smith에 의하여 청교도들로부터 분리되어 네덜란드에서 무리를 거느리고 건너와 신자 집합과 상통하는 뜻에서 침례제도를 세웠다.

- 영국혁명으로 특히 퀘이커 교도들이 중요하다(진리의 공동체). 퀘이커는 구두공인 폭스(George Fox, 1624-1691)에 의해서 세워졌다. 폭스는 인간의 영혼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음성을 발견하는 것을 진리로 주장하는 신비주의자였다. 퀘이커들은 관용에 대한 넓은 원칙을 통하여 근대의 사회사에 영향을 끼쳤다(여성 평등권, 감옥의 개선, 후에는 노예해방).

- 청교도적인 경건문학은 수많은 번역을 통하여 독일의 신학과 교회사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독일 경건주의의 중요한 뿌리 가운데 하나다. 가장 유명한 청교도의 문학은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의 '경건의 실천'(Practice of Piety)이다.

c)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 시민전쟁 시의 장군으로 청교도의 지도자요 영국의 통치자인 크롬웰은 1653년 12월 16일부터 1658년 9월 3일까지 호민관(Lord Protector)로 있었다. 크롬웰은 1599년 4월 25일 헌팅돈(Huntingdon)에서 시민계급으로 태어났다. 1616년 캠브리지에 있는 Sidney Sussex College에서 청교도인 Thomas Beard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나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 헌팅돈에서 1628/29년에 의회에 진출하였다. 1630년 회심을 체험하고 장기(長期) 의회(1640년 11월-1653년 4월)에서 청교도의 당원이 되었다. 1642년 10월 대위, 1643년 2월 대령, 1644년 준장이 되었다. 1644년 7월 3일 Marston Moor에서 의회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승리의 열쇠는 청교도적인 훈련을 받은 병사들에게 있었다. 그의 군대는 숫자는 적었으나 강력한 기병대가 있었다. 그의 군대는 성전(聖戰)에 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편을 노래하며 전쟁터로 달려가곤 했다.

- 1640-60년의 영국혁명에 청교도들은 또한 정치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비중있는 정치지도자로서 "거룩한 사람들"의 의회 무리들을 규합하였다. 크롬웰의 지도 아래 종교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이루었다.

- 1645년 6월 14일 Naseby에서 왕군(王軍)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승리 이후 의회와 군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전쟁에서 이긴 의회는 청교도적인 정책을 채택하였다. 주일에는 반드시 종교적 행사만 시행하도록 하고 일절의 방탕한 오락을 금지시켰다. 의회의 대다수는 장로교 조직에 따른 정부형태를 주장했다. 즉 감독없는 국교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부에서는 독립파들이 득세하였다. 1646년 의회는 군대를 해산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 장로교인(Presbyterianer)은 엄격한 청교도들(회중교회자들 혹은 독립교회자들)에 대립되어 있었다. 이 두 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1646)을 통해 교리에서 일치를 보았으나 교회관에 있어서 상이하였다. 회중교회 신자들은 개교회들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으나 장로교인들은 시민공동체와 교회와의 연합을 주장했으며 노회로 된 교회창립을 요구했었다.

- 크롬웰은 찰스 1세가 참수형을 당한 뒤 영국의 호민관(Lord Protector)이 되었다.

d) 영국국교회의 공고화

- 크롬웰이 죽고 나자 감독제의 국가교회가 재건되었다. Monck 장군은 구(舊)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통해 새 국회를 구성하여 찰스 2세를 1660년 왕위에 복귀시켰다. 1649년 찰스 2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이었으나 내전으로 네덜란드에 피신해 있다가 1660년 귀국하였다.

- 찰스 2세는 1662년과 1672년 사면령을 내려 이교신앙에 대한 묵인을 발표했다.

- 1661년 사보이 회의(성공회 주교 12명, 장로회 12명 그리고 기타 관계자들이 사보이에 모여 기도서 개정을 시도한 회의)가 열려 청교도와 성공회 사이의 기도서 개정을 기도했지만 장로교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끝이 났다.

- 찰스 2세는 1662년 기도서 사용의 통일령을 내려 당시 의회에서 장로교가 주도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회로 국교를 복귀시켰다. 이 성사의 배후에는 Hyde와 Clarendon의 역할이 있었다. 이에 반대한 장로교 성직자들은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고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때에 청교도 성직자 700여명이 성직에서 면직되었다.

- 스튜어드 왕가의 재카톨릭화 시도는 무산되었다. 1689년 관용령에서 프로테스탄트 비국교들에게도 종교와 양심의 자유가 허락되었지만 시민권은 제한되었다. 카톨릭과 소지니안은 이 관용령 밖에 있었다.

 

XV. 종교개혁 이후의 로마 카톨릭 교회

1. 카톨릭의 개혁과 반종교개혁

- 종교개혁 이후의 카톨릭교회는 카톨릭의 개혁과 반종교개혁이라는 이 두 개의 개념들로 함축성있게 나타난다. 반종교개혁 이라는 개념은 종교개혁과 루터의 등장이 16세기에 로마 카톨릭에 대한 중요한 사건임을 알게 한다. 로마 카톨릭은 이 세기의 후반기에는 전반기와는 전혀 다르다.

- 루터교와 칼빈적인 개혁교회의 종파형성의 관련 속에서 "카톨릭의 종파형성"이라는 개념은 카톨릭 자체의 고유한 권리를 가진데도 불구하고, "반종교개혁"이라는 개념이 불가피하다.

- 카톨릭 교회를 개혁시킨 힘의 근원이 어디 있었느냐에 대한 질문에 관해 여러 가지 답변을 들을 수 있다. 반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물론 한 가지 확실한 견해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을 반대함을 목적으로 일어난 활동일 뿐만 아니라 카톨릭 교회에 대한 위협을 대항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한데 모으는 본질적으로 종교개혁의 반대 입장을 지지하는 힘이다.

- 이러한 관점에 반대하면서 카톨릭의 역사학자인 얀센(Johannes Janssen)은 '중세 독일 민족사'(Geschichte des deutschen Volkes seit dem Ausgang des Mittelalters, 1876ff.)에서 카톨릭 교회는 이미 15세기에 개혁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루터의 등장은 이 힘의 성취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고 한다; 16세기 후반에야 이 힘은 관철이 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얀센은 이것은 반종교개혁이 아니고 카톨릭의 독특한 종교개혁이라고 주장하였다.

- 루터의 등장 이전에 개혁의 힘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힘의 진원지가 어딘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수십년 동안 사람들은 이 힘을 스페인에서 찾았다. 사실 15세기 후반 그곳에서는 페르디난드왕(카톨릭)과 추기경 시메네스(Ximenes) 사이에 개혁된 카톨릭 교회가 세워졌다. 예수회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것도 반종교개혁을 카톨릭 교회의 스페인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도 단편적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회의 이념은 사실 스페인에서 원래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메네스 추기경이 실행했던 개혁에 개혁에 대한 정신적인 힘도 스페인에서 온 것은 아니다. 브란디(Karl Brandi)는 이탈리아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또한 네덜란드라 볼 수 있다. 네덜란드는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의 고향이다. 카톨릭 교회의 내면적인 갱신을 일으켰던 일반적이 아닌 구체적인 힘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갱신의 세력: 3개의 정신적 뿌리를 들 수 있다.

 ① 수도회의 규칙: 수도원 자체의 세력

 ② 근대의 경건(devotio moderna), 독일 신비주의의 후기 형태.

 ③ 인문주의

- 이 개혁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이 개혁을 일으키게한 원천은 교회와 밀접한 연관을 맺은 스페인에서 일어난 신비적인 경건이다: 성 아빌라의 테레사(Theresa von Avila, 1515-1582). 그녀는 "맨발의 카멜수녀원"의 창설자이다. 카톨릭의 개혁은 특히 수도원의 창설 운동과 이미 있던 수도원의 갱신운동이다: 카프친 교단, 테아틴 교단, 하나님의 사랑회.

- 수도원 이외에 살라만카(Salamanca) 학교에서 신학의 갱신이 일어났다.

- 트렌트 공의회와 예수회의 활동은 카톨릭의 개혁과 반종교개혁의 관심사를 특히 나타낸 것이다.

2. 트렌트 공의회(1545-1563)

- 트렌트 공의회에서 카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의 도전에 대하여 교리와 개혁법령으로 답변했다. 개혁법령들은 근대 카톨릭주의의 역사를 열었다. 카톨릭 교리는 종교개혁 신학에서 제기되었던(칭의론과 성서론) 주된 문제에 대하여 비로소 개념이 세워졌다. 중세 신학에서 이 문제들은 최종적으로 결정이 되지 않았다.

- 트렌트 공의회의 칭의론은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를 반대하며 또한 후기 스콜라 신학에 있어서 펠라기우스적인 경향을 반대한다(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공로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공로로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앙과 칭의보다 앞선다. 그러나 칭의는 본질적으로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은혜를 부어주심은 성례전에 나타난다. 인간은 성결에서, 그가 의지적으로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트렌트 공의회의 칭의론은 신앙과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의 중도이다.

- 교회의 교리의 원천으로서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오직 성서로"(sola scriptura)를 반박하는 것이다. 성서와 전통에 "동일한 경외"를 표한다.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는 성서의 권위적인 해석을 한다. 표준적인 성서는 라틴어역이다(Vulgata). 카톨릭의 세 가지 권위에 대하여 종교개혁의 "오직 성서"는 상반되는 것이다: 성서, 전통과 성직.

- 그외에도 원죄, 연옥 그리고 성례전에 대하여 말한다(7성사: 세례, 견진, 고해, 성찬, 혼인, 서품, 종부).

- 개혁법령들은 특히 주교직의 개혁에 있었다. 교황권에 대한 개혁은 전혀 없었다. 주교들에게는 교구에 거주해야 할 의무, 신부양성을 위하여 신학교를 설립하는 일, 종교회의의 개최 그리고 로마 탐방이 규정되었다. 그리고 오류들이 제거되었는데 특히 돈으로 살 수 있었던 사면부다.

- 공의회의 폐회 이후 개혁조치들: 트렌트 신앙고백은 사제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금서목록, 개선된 성무 경본과 통일된 미사책(Missale Romanum, 1570).

- 교회개혁으로 개방된 교황주의는 공의회 결정들의 실행을 감독하였다.

- 공의회 정신의 주요 감독들: 칼 보로매우스(Karl Borrom us, 1538-1584), 밀라노의 대주교인 메스펠브룬(Julius Echter Mespelbrunn), 뷰르츠부르크의 대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