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마카비 전쟁의 배경
안디오커스 4세는 이집트 원정을 떠나기 전에 먼저 유다의 헬라화 정책을 발표하였다. 보수적인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 오니아드(Oniads) 3세의 동생 야손(Jason)은 그의 형과는 달리 매우 진보적이고 헬레니즘적인 성향을 가진 자였는데, 그는 왕에게 헬라화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제안하면서 174년 B.C.E.에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II Macc.4:1-9). 야손은 예루살렘 성안에 경기장(Gymnasion) 과 청년 훈련소(Ephebeion)를 건축하고, 청년단을 결성하는 권한을 얻는 조건으로 왕에게 150 달란트를 바쳤다(2 Macc.4:9).그는 온갖 형태의 헬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안디오커스(Antiochus) IV세가 제1차 이집트 원정(170-168년 B.C.E.)에 나간 사이에 야손은 171년 B.C.E. 성전 경비 대장의 형제요 사제 가문(Zadokite)에 속하지 않았던 마넬라우스((Menelaus)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 역시 왕에게 돈을 바치고 대제사장의 직을 사들인 자였다(2 Macc.4:23-26).그의 임기 동안 예루살렘은 그리이스식 도시로 건설되었으며, 체육 학교(gymnasium)를 세워 유대 청년들에게 그리이스의 운동 경기를 보급시켰다. 또한 왕에게 약속했던 뇌물을 조달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성전의 기물들을 내다 팔기 시작하였다(II Macc.4:27-32).
제2차 이집트 원정(168년 B.C.E.)을 실패하고 돌아온 안디오커스 4세는 자신의 실추된 정치적 위신과 경제적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팔레스틴의 땅과 민족을 제의적으로 헬라화 시키는 종교 정책(1 Macc.1:41-51)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전 위에 '파멸의 우상'(shikutz meshemem)을 세웠으며, 율법책을 불살랐다(1.Macc. 1:54-57).그리고 성전의 기물들을 약탈해 갔다. 이러한 종교 정책의 목적은 반유다적(anti-semitic)이라기 보다는 그 당시의 만성적인 재정 적자의 상황과 그 때에 사용된 방법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바와 같이 반이집트적(anti-Egyptian)이고 친시리아적(pro-Syrian)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그동안 헬라주의자(Hellenizer)와 전통주의자들 사이의 종교-문화적 갈등과 계층간의 정치적 대립의 양상을 폭발시키는 작용을 하였으며, 이는 안디오커스 3세로부터 어느정도 보장된 유대인의 종교적 자유를 빼앗는 명백한 배교 행위로 간주 되면서 유대인들은 일종의 문화 투쟁을 벌였다.
더우기 정통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분노는 훨씬 더 커서 이 행위를 '황페케하는 가증한 일'(단11:31;12:11)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종교적 자유를 위한 투쟁의 성격의 것이었다. 이러한 저항은 느헤미아와 그를 따르던 자들이 행했던 개혁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들은 율법에 충실한 자들로써 제사장 가문의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저항은 마따디아의 다섯 아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 그의 아들 중 가장 유명한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의 이름을 따서 '마키비 일가', 혹은 '마카비 전쟁'이라고 일컬어 졌다.
이 가문은 귀족에 속하지 않은 지방의 사제 가문으로서(1 Macc.2:1)토비아 가문과는 달리 헬레니즘화를 거부하였다.
결국 유대의 헬라화 과정은 두 집단 사이의 적대 행위에 의해 이용되었으며, 두집단 사이에 있었던 많은 유대 백성들은 분명한 입장에 서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전쟁은 유다와 헬라와의 대결이라는 형식보다는 유다 공동체 내의 헬라주의자들(Hellenizing Party)과 민족주의자들(National Party) 간의 시민 전쟁(Civil War)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특히 헬라의 정책에 동조하면서 개인의 이익을 누리던 제사장을 포함한 귀족 계층들은 종교적으로 전통적인 율법에 대한 이해를 크게 달리하면서 헬라화 정책에 앞장섰으며, 그들은 헬라식 교육과 생활을 장려하던 자들로서 헬라 문화를 통한 유대교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이에 반대하는 전통주의자들은 적극적으로 이에 맞서 급기야 시민 전쟁의 양상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마카비 전쟁에 관하여 적고 있는 마카비서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② 유다 마카비, 요나단, 시몬(167-141년 B.C.E.)
167년 B.C.E.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는 정치적,문화적 통합(unification)을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대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제사 행위를 금함.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짐승을 희생 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음란과 더러운 일로 스스로 몸을 더럽힐 것.
*율법서를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상과 같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1 Macc.1:44-50).
이 무렵 모디인(Modi'in)에는 마따띠아(Mattathias)라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제사장 가문의 아들이었다. 그는 정부가 파견한 제의 관리들에게 "왕의 영토에 사는 모든 이방인이 왕명에 굴복하여 각기 조상의 종교를 버리고 그를 따른다 작정하였다 하더라도 너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끝까지 지킬 결심이오"(1 Macc.2:19-20)라 말했다. 이에 개의치 않고 제의를 드리려고 나선 한 유대인을 쳐 죽이고, 이어 왕의 사신까지 죽여 버렸다(1 Macc.2:23-26).그는 그의 다섯 아들을 데리고 유다 광야로 나아가 그곳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헬라주의의 신봉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종교의 자유와 예루살렘에서의 성전 제의의 회복이었다. 이 때 율법에 열심인 하시딤(Hasidim) 도 합세하였다(1 Macc.2:42;cf.단11:33).
166년 B.C.E. 마따띠아가 유언을 남기고 죽은 후 그의 세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e,166-160)가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그가 전사한 160년까지 "사자처럼 용맹했다"(1 Macc.3:4).그는 종교적인 인품보다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역량을 가진 유다 민족의 영웅이었다. 그와 그의 군대는 유다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1 Macc.3:8)을 찾아 진멸시켰다. 시리아의 군대 장관은 리시아(Lysias)였으며, 그에게는 "하나님을 배반한 유대인들"(1 Macc.3:15)이 따르며 전투에 참여하였다. 유다 마카비는 벧 호론(Beth-Horon), 엠마오(Emmaus), 벧쥬르(Beth-Zur)등지에서 승리하였다(1 Macc.3:10-4:35).
이어 예루살렘에서 "황폐케하는 가증한 것"인 제우스 제의를 제거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증한 것이 들어 선 이 후 3년 반(단7:25,cf.계12:6)만인 주전 164년 12월 25일에 레위인의 희생 제사를 부활시킨 것이다(1 Macc.4:36-58).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해마다 열렸는데 그것이 바로 하누카(Hanukkah), 즉 성전 봉헌일이었다(1 Macc.4:59;요10:22; 2 Macc. 10:1-9).
주전 164년 안디오커스 4세가 페르시아에서 갑자가 사망하자(1 Macc.6:1-16)그의 뒤를 이어 등극한 안디오커스 5세(164-162 B.C.E.)는 그의 나이 겨우 10세였다.
이 때 시리아의 군대 장관 리시아(Lysias)는 섭정관이 되어 유다 반란군을 본격적으로 토벌하기 시작 하였다. 그들의 군대는 벧 사가리야(Beth-Zacharia)를 격파한 후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1 Macc.6:28-54). 그런데 바로 이 때 왕위를 노리는 리시아의 정적(정적) 필립비(Philippi)가 페르시아로부터 시리아를 공격해 오자 리시아는 급히 철군하고 말았다(1 Macc.6:55-59).
이어 셀류커스의 아들 데메드리오 I세(Demedrio I,162-150)가 등극하면서 헬라주의자 알키모스(Alcimus)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1 Macc.7:9).또 그가 임명한 니가노르(Nikanor) 장군은 사정없이 유대인을 공격하였다. 예루살렘을 포위한 그는 벧 호론 전투에서 사망하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이 날을 나카노르의 날(Nikanor'day)로 경축하였다(1 Macc.7:50). 그러나 그 후 얼마동안 유지된 그들과 의 평화는 주전 160년 베레아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영웅 유다 마카비가 전사(1Macc.7:1-9:22)하게 되자 곧 깨어지고 말았다:"유다가 죽은 후 이스라엘 전 영토에서 율법을 저버린 자들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고 악을 일삼는 자들이 사방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1 Macc.9:23).
유다 마카비의 후계자는 그의 막내 동생 요나단(Jonathan,160-142년 B.C.E.)이었다(1 Macc.9:28-12:53).그는 형 유다와는 달리 그가 지닌 비상한 외교술로 그가 활동하던 기간에 일어난 국제 정치의 변화에 매우 적절히 대응하였다. 즉 셀류커스 왕가의 데메드리오 1세 보다 안디오커스 왕가의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150-145 B.C.E.)에게 더 접근하면서 이익을 취하였다. 또 로마와 스파르타와의 관계를 맺으면서 국제 정치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였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는데 데메드리오 I세가 화친을 요청하면서 얼마간의 평화의 기간을 맞이한다. 요나단은 152년 B.C.E. 예루살렘 성을 수축하고 맞은 초막절에 스스로 대제사장(kohen hagadol)이 되어 사제복을 입었다(1 Macc.10:21). 이로써 마카비 일가의 힘은 견고해 졌으며, 이어 주전 150년에는 요나단이 왕으로서 자색 옷을 입고 당당히 나서게 되었다. 이로써 일각에 왕과 대제사장의 역할을 한 몸으로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헤스모니안 일가가 유다의 공식적인 통치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게 된다. 동시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진 후 계속되어 오던 사독 가문의 제사장의 전통은 무너지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외교적 기술은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시리아의 야전군 사령관인 트리폰(Tryphon)은 요나단을 매우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주전 143년 벧 산(Beth-Shean), 즉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 전투에서 요나단을 포로로 잡아 처형하였다(1 Macc.12:39-53).
요나단의 뒤를 이은 시몬(Simon,142-135년 B.C.E.)은 요나단과 유다 처럼 많은 성과를 올렸다. 특히 그는 요나단과는 정 반대로 데메드리오 2세(145-138B.C.E.)와 동맹을 맺으면서 그로부터 세금을 면제 받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1Macc.13:31-40).무엇보다도 시몬은 "유대인의 대사제(haKohen haGadol, s)이며, 사령관(sar haTzaba, s)이며, 지도자(nasi' Hayehudah, s)"(1 Macc.13:41-42)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독립적인 화폐를 주조하였으며(1 Macc.15:6),이 주화들은141-136년 B.C.E.경부터 사용되었다. 주화의 표면에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이면에는 한 세겔 또는 반 세겔의 액면이 부각되었다. 이로써 모디인에서의 반란 이후 25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 후 약 444년 만에 처음으로 주전 142년에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79년 동안(142-63 B.C.E.)에 걸친 헤스모니안 왕국(Hasmonean Kingdom) 의 자유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정치적 자유'를 얻는데까지 이른 것이다.
시몬은 그가 이끄는 군대를 욥바(Jaffa)에 보내 안디오커스 IV세 아래 주둔하고 있던 외국인들을 몰아 냈으며, 게젤(Gezer)을 점령하고 그곳에 자신의 왕궁을 짓고 (I Macc.13:43-48),그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를 그 도시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나아가 시몬은 141년 B.C.E.예루살렘 요새를 점령하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호소리도 드높게 비파와 꽹과리와 거문고 소리에 맞춰 찬미와 노래를 부르며 요새안으로 들어왔다"(I Macc.13:51).이 날을 경축일로 정하여 지켜 나갔다.
또 시몬은 로마와 스퍼르타와 동맹을 갱신하였으며(I Macc.14:16-24),온 유다백성들은 모여 시몬에 대한 찬사를 보내며 그의 지도에 따를 것을 다짐하였다(IMacc.14:25-49).
이러한 번영과 평화의 시대는 1 Macc.14:8-15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들은 "...백성은 평화롭게 자기 땅을 가꾸었고,...노인들은 거리에 나와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며 태평세월을 구가하였고...율법을 저버린 자들(poshe'i batorah)과 악한들을 모두 없애 버렸다.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기물들을 많이 갖추어 놓았다"고 적고있다. 이는 마치 묵시문학적 환상(암9:11-15;미4:4;사32:15;35:1-10등)의 성취된 모습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마카비의 다섯 형제가 영웅적인 헌신으로 싸우던 30년간의 마카비 전쟁은 134년B.C.E. 시몬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지마는 존폐의 위협에 놓였던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적인 기간이었으며, 유다는 다시금 종교적 자유와 더불어 정치적 자유를 이룩한 한 왕조의 막을 열어놓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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