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기독교 핵심진리

안명애 2015. 4. 14. 07:54

기독교 핵심진리

 

 

 

인생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고, 행복과 불행이 마주치고, 빛과 어둠이 상존합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가 사랑하고 사랑 받을 때입니다. 하지만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집착하게 되고 갈등하면서 사랑의 이중성이 나타납니다. 사랑은 기쁨과 행복의 샘물이 되기도 하지만 슬픔과 불행의 샘물이 되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이란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고통하고, 번민하는 생로병사우비고뇌(生老病死憂悲苦惱)라고 하였습니다. 유교에서는 인생이란 기쁘고, 노엽고, 슬프고, 즐겁고, 사랑, 미움, 욕심인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인생이란 죄로 인하여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우고, 다투며, 음행과 방탕함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결국 인생의 실존이란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아도 수고와 슬픔뿐이고(90:10), 불교의 관점에서 보아도 고뇌와 고통뿐이고, 유교의 관점에서 보아도 오욕의 삶입니다. 수 천 년 동안 성인, 성자들이 본 인생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모든 인생이 짊어지고 해결해야할 이러한 고통과 고난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해답을 찾아 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종교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는 고통의 원인은 욕심과 집착에서 기인하는 것임으로 그 집착을 끊고, 참 지혜를 깨달아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러 해탈하면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유교의 공자는 인()을 실천하여 군자(君子)가 됨으로서 인생의 희노애락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불교나 유교에서는 스스로 수행을 하고 학문에 정진함으로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반대입니다. 인간은 많은 학문을 배우거나, 계율을 지키고 수행함으로서 절대로 죄의 증상들인 고통과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많은 학문을 배우고,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한계는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에 배움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으며, 계율을 지킴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는 계율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이 계율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달아 더욱 절망하게 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 실존의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문제는 자기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구원으로만 가능하다고 봅니다. 예를들어서 수영을 못해서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헤엄을 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수영을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구조요원이 나타나서 그에게 손을 내밀고 건져주어야만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고난과 고통의 삶을 살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원인은 때문입니다. 욕심과 죄로 인하여 나타나는 증상이 고난과 고통과 죽음인 것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증상들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욕심과 욕망으로부터 파생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인간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해주신 것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 사람들에게 성부 하나님께서는 죄를 사해주시고 의롭게 되었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것을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로 받아들이셔서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상속받도록 허락하십니다.

기독교에는 이 진리를 복음(福音)’이라고 부릅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듣는다고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 복음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한국에도 많은 종교, 많은 신이 존재합니다. 계룡산에 가보면 골짜기마다 섬기는 신들이 다릅니다. 일본에는 8백만이 넘는 신이 있고, 인도의 힌두교에는 3억이 넘는 신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지구상에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 모든 신은 인간이 선택하여 믿을 수 있습니다.

즉 종교는 자유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신을 믿고 종교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고 싶다고 아무나 믿을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 중에서 자기가 믿고 섬기는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는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왜 기독교인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바로 그 사람이 나를 낳아야 합니다. 나를 낳은 사람이 바로 아버지입니다.

나를 낳지도 않은 사람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반드시 자기를 낳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4:6)

 

이 말씀의 뜻은 기독교인이란 성령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들어오셔서 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니고데모라는 한 공회원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3:3-7)

(물과 성령이란 성령세례를 의미합니다. 성령세례란 성령과 연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육체의 부모로부터 육체가 태어나는 것처럼, 기독교인은 성령을 통하여 영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육체로 태어나는 것이 첫 번째 태어남이라면, 영으로 태어나는 것을 두 번째 태어남(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니고데모는 자기는 이미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나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분리해서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자기가 선택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로 자기가 선택해서 믿을 수 없습니다. 이 원리는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이지, 자식이 부모를 낳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교회에 나가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성령이 그 사람을 낳지 않으면 아무도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 중에서 거듭나지 않은 채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일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성령으로 낳음을 입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계속 육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육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과 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사람이 육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면 육으로 하는 신앙생활이고 예수님만 자랑하면 영으로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즉 자기가 가진 물질, 학벌, 경험, 봉사, 헌신 등을 자랑하며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다 육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육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만 겸손하게 헌신하고 충성하면서도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예수님만 자랑하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어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을 통해서 낳음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신 후 그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흙에 불어 넣어진 생기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마른 뼈 환상에서도 그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되도록 역사하는 능력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흙도 생령이 되게 하시며, 마른 뼈도 군대가 되도록 역사하는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낳음을 입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으시며, 그 낳으신 성도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성화시키시며, 마지막 때 그 성도들을 부활시키셔서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명을 완수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을 떠나서는 기독교인으로서 단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습니다.

이 핵심적인 진리를 잘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불교와 비교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모든 고난과 고통이 욕심과 욕망에 집착된 자기로 인하여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 집착을 멸하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끝임 없이 팔정도(八正道)의 수행을 통하여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도록 가르칩니다. 그래서 오늘도 불자들은 무아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끊임없이 수행하고 또 수행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성령님을 소망하고, 성령님을 바라보며, 성령님만 쫓아가야 합니다. 즉 불교에서는 끝임없이 자기 수행을 통해서 열반에 이르려고 노력한다면, 기독교인은 자기의 행위나 자기의 노력을 포기하고 오직 성령님만 의지하고, 성령님만 쫓아감으로 천국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을 모르고서는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고, 성장하고, 완성되는 모든 구원의 역사가 불가능합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성령님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님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고 의지할 때 신앙이 성장하고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하셔서 낳으시고, 키우시고, 성장시키는 역사를 성령님이 하고 계십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생활이란 성령을 통하여 시작되고, 성령을 통하여 성장하고, 성령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임으로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성령을 만나기 위하여 금식하고, 고행하고, 열심히 찾아야 하나요?

 

아닙니다. 성령은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최초로 성령 받는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이들에게 성령이 임할 때에는 공통되는 두 가지 일이 선행되었습니다. 첫째는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현장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둘째는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뜨겁게 기도하는 중에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로마서에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고 기록하였습니다. 믿음은 복음을 들을 때 생긴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을 들을 때 성령님이 임하시고, 그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믿음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만나기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성령을 따라가기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성령을 통하여 능력을 덧입기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기록된 성경으로서의 말씀과 삶의 현장에서 각각 개인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는 사람에게는 복음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처음에는 성령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각각의 삶의 현장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장할 수 있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에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단절됨으로, 영적으로 무능하고 무기력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세계적인 권위자인 예수전도단의 로렌 커닝햄(Loren Cunningham) 목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으로 12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1.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

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허락하라.

3. 용서받지 못한 죄를 고백하라.

4. 도끼 머리 원칙을 사용하라.

5. 당신 자신이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6.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는 다른 이에게 당신이 인도하심 받은 것을 말하지 말라.

7. 동방박사의 원칙을 사용하라.

8. 속임수에 대해 조심하라.

9. 사람의 반대는 때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인도하심이 될 수 있다.

10.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각자가 다 독특한 사역이 있다

11.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수록 더욱 쉬워질 것이다.

12. 주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로렌 커닝햄 목사가 가르치는 12가지 방법 중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사람과 사람이 말하듯이 선명하게 임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분명하게 음성을 들었던 그때로 돌아가서 듣고(도끼 머리원칙), 다른 사람이 들었다고 말하는 음성을 따르지 말고 자기 자신이 들어야 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생각되어도 자신이 들은 음성을 완전하게 이해할 때까지 타인에게 말해서는 안되며, 사탄의 음성 일수도 있으니까 속임수에 대해서 조심하고,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해서 행할 때도 각별히 주의해야 하며,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익숙해지면 쉬워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렌 커닝햄 목사가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이라고 가르친 12가지 중에서 10가지가 하나님의 음성은 분명하고도 선명하게 들리는 것이 아님으로 특별히 주의해서 한다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왜 사람과 사람이 말하듯이 선명하게 들리지 않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환상 가운데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본인은 4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하나님이 환상이나 꿈을 통하여 음성을 들려주신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내 주변의 많은 목사와 성도들도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음성을 들려주시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자주 듣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신적인 질환이 있거나 무속 신앙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하나님이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음성을 들려주지 않으시는 이유는 이미 자신의 음성을 완성하여 계시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계시가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 말씀에 주의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방법입니다.

 

한국 사람이 중국 사람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중국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이 중국 사람의 음성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중국어 회화를 공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으로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육체이기 때문에 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인 귀를 통해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비상식적이다. 중국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서 중국어 회화책을 배워야 하듯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회화책인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천 년 넘게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말씀하신 영적인 회화책입니다. 성경을 배우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수 없습니다.

 

본인이 깨달은 하나님 음성 듣는 법 7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경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중국어를 공부해야 중국 사람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둘째 그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순종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자기의 욕심과 욕망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거나 듣지 못합니다.

 

셋째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회개해야 합니다. 죄 가운데서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넷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입니다. 자기를 간절히 찾고 사모하는 사람을 만나주십니다(8:17).

 

다섯째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섯째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을 화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은 소멸됩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자기 주관적인 생각인지, 혹은 악한 영의 음성인지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는 반드시 선한 열매가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있고, 응답의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경험되는 열매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점점 더 강력한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통한 열매는 즉시 나타나기도 하지만 오랜 후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이 반복될수록 성령의 능력과 열매를 풍성하게 맛보게 됩니다.

 

성령을 통하여 거듭난 성도는 반드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열매로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은 하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능력을 통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가 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매일 매순간 듣고 따라감으로 성령의 능력,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신앙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의 핵심진리는 대비되는 두 단어의 개념을 이해함으로 더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대비되는 두 단어를 몇 개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과 신약, 은혜와 율법, 육체와 성령, 하늘과 땅.

 

기독교의 핵심진리 5번째는 율법과 은혜 중에서 율법의 개념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본인은 고등학교 때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매우 보수적이고 율법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율법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구원의 확신' 부분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할 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어졌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이 부족할 때는구원받지 못한것 같은 두려움과 갈등에 고민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기초가 매우 중요합니다.

기초가 잘못되면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하지만 기초가 튼튼하면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율법에 기초한 신앙은 자기의 행위에 따라서 언제든지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하지만 은혜에 기초한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율법과 은혜에 대해서 분명하게 배움으로 율법의 기초가 아닌 은혜에 기초한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율법이 어떻게 주어졌으며 그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짐승과는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만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그 인간에게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맡기셨습니다. 창세기에는 이때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6-28)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전지전능한 능력을 덧입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존재였습니다. 즉 하나님 같은 신적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의 지식과 능력을 나눠주셨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지식과 능력으로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로 이 땅을 통치하고 다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신적 능력을 주시면서, 인간이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이라는 표식으로서 선악과를 주셨습니다. ‘선악과는 인간이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경계선입니다. 인간이 이 경계선을 넘어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입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도전하는 악한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만드시고 그 경계선을 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2:16-17)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 경계선은 절대로 넘어서는 안됩니다. 이 경계선을 넘는 순간에 인간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스스로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창조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릴 수 있는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는 것인데. 하나님을 부정하고 스스로 신이 되는 순간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던 모든 능력을 상실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피조물로서의 경계를 넘지 말라고 선악과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뱀의 유혹을 받아 결국 이 경계를 넘어서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나고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던 생명이 단절됨으로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려는 순간 인간은 영적인 존재에서 육적인 존재가 되었고,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인간에게 율법을 주심으로서 죄의 자리를 벗어나 의의 자리로 옮겨오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율법은 선한 것으로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면 의롭게 되어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죽음에 이른 인간이 하나님이 새롭게 주신 율법을 다 지켜 행하면 다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시고, 그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셔서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받은 율법을 다 지키기로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다 지켜 행할 능력이 없자,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율법으로 다 바꾸어버렸습니다. 예를들어서 이혼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킬 수 없자, 이혼증서를 써주면 이혼할 수 있다는 조항을 새롭게 첨부하였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없자, 안식일에 행해야 할 규칙들을 정하고 그것만 다 지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 것이라고 합리화 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는 율법은 형식만 남아있고 내용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고,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산상보훈을 통하여 참된 율법의 내용을 다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고, 미워만 해도 살인이라고 가르치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래 목표가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 지는 것’(5:4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율법의 본래 목표와 수준이 드러나자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인간의 수준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3:10)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무도 지킬 수 없는 율법을 하나님이 왜 주신 것일까요?

로마서에서는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첫 번째 이유는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교통법이 생기기 전에는 무단횡단을 하거나, 중앙선을 침범해도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통법이 생기면 그 법을 어기는 운전자는 범법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는 율법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이 완전한 죄인이며,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5:20a)

 

어떤 학생이 스스로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다가 시험에서 낙방하면 그때에 자기의 실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율법이 주어지자 자신의 능력으로는 율법을 다 지켜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 질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게 됩니다. 

 

셋째는 율법을 포기하고 은혜의 자리로 나가도록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행하면 행할수록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을 육체를 가진 인간이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성도라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육체로부터 일어나는 욕망과 욕심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한계를 분명히 깨달을 때 율법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주시는 복음, 즉 은혜의 법 아래로 나아오게 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3-4)

 

기독교 신앙생활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행위를 자랑하는 모든 것은 율법적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불교는 수행이라는 행위를 통한 종교생활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은혜로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헌금생활, 봉사생활, 전도생활 등 모든 것이 행위가  될 때 그것은 자기의 자랑이 됩니다. 신앙생활이 자랑이 되는 것은 그의 신앙이 율법에 기초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헌금생활, 봉사생활, 전도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행한 모든 헌신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하는 신앙생활에는 자기 자랑이 없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은혜가 아닌 율법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은혜로 신앙생활하는 성도에게는 오직 긍휼과 자비와 겸손만이 있을뿐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공기나 물이나 흙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머리카락 하나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인간이 누리는 모든 것들은 인간의 지혜나 능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력의 법칙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법칙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려고 은혜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자기의 욕망과 욕심을 추구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기의 힘과 자기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새로운 세상은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교만, 자랑, 무자비한 곳(1:29)이 되어버렸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6:5-7)

 

은혜를 떠나 인간의 욕망과 능력으로 세워진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세운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키셨습니다. 하지만 그 심판에서 단 한사람이 구원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노아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

 

노아가 홍수심판에서 유일하게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은혜에 거했기 때문입니다.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고, 은혜 밖에 거하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것도 은혜 밖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노아를 의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

 

은혜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아도 되고, 안받아도 되는 선택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은혜가 없는 땅, 은혜가 없는 세상은 죽음이 왕 노릇합니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운 이 세상은 슬픔과 고통과 불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은혜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는 인간을 탕자로 비유하셨습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아 그 재물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결국 파산한 탕자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자기의 힘과 자기의 능력을 포기하고 은혜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탕자의 모든 허물과 죄는 용서 받고 회복되었습니다(15:22). 은혜 받은 탕자는 죄가 왕 노릇하던 불행한 삶에서 은혜가 왕 노릇하는 행복한 삶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자리를 떠나 스스로 왕이 되고 스스로 신이 되어 살려다가 죄의 노예가 되어서 죄 아래 신음하며 죽어가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은혜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예수님을 믿어 은혜의 자리로 나오는 사람은 은혜가 왕 노릇합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21)

 

은혜가 왕 노릇하는 곳에서는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 받습니다.

더 이상 정죄가 없으며, 심판이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상처가 치유 되고, 저주가 사라지며, 생명과 평안이 회복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은혜생활입니다.

은혜가 없는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은혜로 하는 신앙생활은 자기를 자랑하지 못합니다.

은혜란 자기로 말미암아 결과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모두에게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 신앙 생활하는 교회에서는 오직 용서와 화해와 자비와 긍휼이 있을 뿐입니다.

아무도 누구를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 아래 파산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은혜로 회복시켜주신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를 용서하고, 긍휼이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