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Rev.김다니엘
들어가는 말
성경에 나타난 예정론은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A.D.354~A.D.430)에 의해 본격적으로 체계화된 이후 예정론은 기독교 교회 전통에 있어서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어 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유산을 이어 받은 칼빈은 예정론을 더욱 명백하게 조직적으로 전개하여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칼빈의 이중 예정론에서는 하나님은 선택자와 유기자를 이미 만세 전에 결정해 버리신 불공평하신 하나님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전통적인 예정론은 시대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 왔다.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역시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다가 반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놓친 경우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갈등의 양상을 보여 왔다. 또한 이러한 갈등이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들에게 의문과 갈등을 낳게 하였다.
사도 베드로는 성령충만을 받은 후에도 이방인을 부정하게 보는 유대인의 오랜 편견과 전통에 사로잡혀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는 일을 꺼려했던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편견을 쉽게 가질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이 영화로움 몸을 입고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과 진리를 온전히 아는데에 청동으로 만든 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한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런 부족함으로 인해 교회 내에 열띤 논쟁을 벌릴 때에 고정관념이나 편견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예정론은 쉽게 논쟁하게 되는 주제중의 하나이다. 오늘날까지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칼빈 (Calvin, John, 1509∼1564)의 예정론’과 칼빈 사후( 死後) 200년후의 칼빈의 예정론을 반박한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
의 예정론’이 있다. 물론 칼빈이전에 칼빈과 대동소이한 예정론을 주장한 어거스틴과 같은 신학자나 목회자가 있었고 웨슬레 이전에도 웨슬레와 비슷한 예정론을 설파한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같은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으나 자신의 예정에 관한 신학적 견해를 가장 잘 정리하여 주장하고 교회에 영향을 끼친 예정론은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레의 예정론’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한 하나님의 종들 사이에 서로 다른 예정론이 존재하고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듯 언급한 두 예정론을 수정하거나 결합하는 여러 예정론이 있다.
20세기 스위스가 낳은 최대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 ~ 1968)는 바르트의 이중 예정은 전통적으로 말하여 온 절대적 결정(선택과 유기)으로서의 이중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는 구원의 선택을 결정하셨고 하나님 자신에게는 인간의 저주와 죽음을 결정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에 대한 위협이나 응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심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즉 복음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예정론을 “선택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칼빈주의적 전통과 알미니우스의 전통의 종합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의 주체와 객체로 말하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과 버림을 말함으로서 예정론을 하나로 종합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르트는 칼빈의 이중 예정의 틀을 사용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사람들의 선택의 가능성 및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음으로서 그의 예정론이 만인 구원설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칼빈주의적인 이중 예정과 동시에 온 인류에 대하여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알미니우스적인 요소를 수용하여 복음의 빛으로 해명했다고 보는 것이다. 바르트의 예정론에는 창조론과 화해론의 중심이 되는 선택론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약속을 중심으로 예정론 사상을 이해한 것이다. 그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 사건은 하나님의 자유한 의지의 사건으로 보며, 이것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포괄된 것으로 말한다. 또한 화해론의 중심 내용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선택을 결정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그의 선택론은 화해론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바르트의 선택론의 특징은 숙명이 아닌 인간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유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선택인 긍정에 대하여 응답하고 복종해야 하는 자유인데 이것이 곧 인간의 현실적인 자유라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긍정에 부정으로 응답한다면 그 인간은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 것이요 자유를 상실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버림받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긍정함으로 인하여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버림에서, 선택으로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의 자유를 가지게 된다. 결국 인간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택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 공동체와 함께 믿는 자로서 선택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선택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선택은 사명의 선택을 위한 것이다.
예정론은 영원 전에 지옥갈 사람의 살생부를 적으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의 죄를 감당하시고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복음의 총화라고(엡1:4-5, 7)했다.
오늘날 예정론은 바르트와 위겐 몰트만(J.Moltman)을 거쳐 ‘복음적인 예정론’으로 보편화되고 있는데 바르트는 예정론과 관련하여 신론에 대해, 몰트만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간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기까지 ‘예정론“은 발전을 계속해 왔다.
인신칭의(因信稱義)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종교개혁자들의 구호이다. 인신칭의가 종교개혁자들의 근본 신앙노선이었고 당대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었지만 종교개혁자들의 특허품이 은 결코 아니다. 인신칭의는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담타락후 하나님의 선재 은총을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중 예수님을 증거한 아담의 칠세 손 에녹부터(유1:14)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모든 하나님 종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고백인 것이다. 인신칭의 하나만을 봐도 우리는 편견을 싶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지 사람이 만든 교리나 전통이 절대로 성경에 있는 하나님 말씀보다 우선할 수도 같을 수도 없다.
칼빈의 가르침이든, 웨슬레의 주장이든 상관없이 성경에 일치한 것만이 진리이다. 어떤“주의”(主義-ism)에 얽매이는 것은 성경을 편견 없이 이해하는데 최대의 장애라고 생각하며
주의자로 표현한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성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지 어떤 사람의 사상이나 이론을 성경 무오류설(無誤謬說)처럼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과 똑같은 권위를 두고 칼빈 무오류설이나 웨슬레 무오류설을 따르고 신봉하는 어떤 사람의 주의자가 되는 것은 오류중의 오류이다.
신학적인 견해 차이
서론에서 언급한대로 오늘날까지 세계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레의 예정론을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칼빈 예정론을 살펴보면 절대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 은 칼빈에 의해 정리되었고 도르트 회의에서 결의하고 선언하였다.
칼빈은 1536년에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섰고, 1559년에 최종판을 완성하였다. 도르트 신조는 1618년에 작성되었다. 이 둘 사이에는 약 60년의 시간적 차이가 있다. 따라서 두 사상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발견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라고 생각한다. 실제적으로 칼빈의 예정론과 도르트 신조의 예정론은 그 내용에 있어서 거의 일치한다. 여기서 필자는 일반적으로 칼빈주의 5대강령 곧 TULIP이라고 알려진 틀에 맞추어서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반박하며 자신의 예정론을 주장한 요한 웨슬레의 반박 견해를 살펴 보고자 한다. 참고로 칼빈주의 5대 강령과 웨슬레의 반박견해와 예정론은 각 예정론을 지지하는 교회들이 주해한 내용임을 밝힌다.
먼저 칼빈의 예정론이 담긴 칼빈주의의 5대 강령을 살펴보자.
1.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은 본래 선으로 향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하여 비참한 노예의 신세로 전락했으며, 인간의 성품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그 정신과 의지는 전적으로 새로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원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무엇이든지, 사람 속에 있는 것은 지성으로부터 육신에 이르기까지, 또는 이해력과 그 마음이 전적으로 부패되었다.(롬2:12; 롬8:7) 그 결과 지성과 의지에 손상을 입어 분별력이나 판단 능력과 수행 능력을 잃게 되었고, 의로움, 정직함, 선을 택할 수 있는 자유 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도르트 신조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하여 저주 아래 있고, 영원한 죽음을 받게 되었다고 말하며(롬5:12), 이 신조는 인간이 자유 의지를 남용하여 타락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타락한 자손을 낳았다고 하였다. 결국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부패와 영적인 죽음을 자초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칼빈과 도르트 신조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고 있다. 차이점은 인간의 타락을 칼빈은 예정과 분리시켜 인간론에서 다루고 있는 반면 도르트 신조는 인간의 타락에서 예정론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칼빈에 있어서 선택은 공로의 예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즉 선택은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근거하여 사람들을 구별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하여 선택하였다는 것이다.(살후2:13; 엡1:4,5,11; 요15:16) 바로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며, 결코 사람의 공로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도르트 신조는 선택이 예지된 신앙, 신앙의 복종, 성결, 혹은 앞서야 할 필수 요건으로서의 사람에게 있는 다른 어떤 좋은 자질이나 성정, 혹은 선택이 의존할 어떤 원인과 조건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다만 사람이 신앙과 신앙의 복종과 거룩 등에 이르도록 선택된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모든 구원의 미덕의 원천이며 여기서 신앙, 성결, 그 밖의 구원의 선물, 또한 마지막에는 구원의 결과, 성과로서의 영원한 생명이 생긴다고 하였다.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칼빈은 하나님이 만인을 평등하게 부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고정된 법칙을 만드심으로서 스스로를 구속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였다. 즉 바울이 아시아에서 선교하는 것을 금하시고 마게도냐로 데려가신 분은 이 보배를 기뻐하시는 자에게 나누어 주실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고 계신다. 또한 이사야를 통하여 어떻게 구원의 약속이 택하신 백성에게 특별히 정해져 있는가를 더욱 분명히 선언하였다. 즉 차별없는 인류가 아니라 오직 그들만이 그의 제자가 될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만인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에 충분한데 반하여 그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오직 택한 자를 구원하는데 있다. 바로 성부께서 택하신 사람들이 성자로 말미암아 속죄되고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별됨으로서 선택, 구속, 성화는 언제나 동일한 사람을 상대로 이루시는 것이다.(요10:14-15; 요17:6,9,10; 행20:28)
도르트 신조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살리시며 구원하는 효력이 의롭게 인정받는 신앙을 주시고 그것으로서 그들을 실패없이 구원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선택된 모든 사람에게 보급시키는 일이 성부하나님의 가장 높으신 계획이고, 가장 자비로운 뜻과 목적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이 은혜를 베풀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죄와 과오 이외에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것으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따라서 이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무한한 감사를 돌려야 한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고 하면 하나님의 자비의 풍성함을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은혜를 입었다면 구원에 대한 수용과 거절의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지게 된다. 따라서 제한 속죄는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야박하게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주도권을 일관성있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교리이며 실제로 대속의 은혜가 구원 받은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다는 사실들로 미루어보아 이 교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칼빈은 말하기를 부르심은 말씀의 들음에만 의존하지 않고 거기에 성령의 조명이 있음으로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하였다. 분명히 인간은 자신의 충동에 떠 밀려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이 없으며 경건한 자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자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특히 칼빈은 그의 요한복음 6:46의 주석에서 택자와 비택자에게 똑같이 베풀어지는 외적인 부르심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오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복음의 말씀이 일반적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으나, 죄인 자신의 무능력에서 오는 무지 때문에 복음 앞에 선 인간은 본래부터 눈먼 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부터 눈먼 자들은 성령께서 깨우쳐 주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도르트 신조는 하나님께서 택자들을 회심하게 하실 때에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미치게 하신다고 하였다. 성령은 닫힌 마음의 문을 여시고 단단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죽어 있는 의지를 살리신다. 이것은 우리의 협력없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가 살아 있게 만드시는 일이다.
5. 성도의 견인(Perserance of the saints)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이름을 아는 지식을 주시고 자기 교회의 품안에 취하여 넣으신 자들은 그의 보호와 관심 아래 받아들여진다고 하였다. 또한 아버지는 받아 들여진 모든 자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지켜지도록 그에게 위임하신다. 따라서 참 신자는 타락할 수 없으며, 유다는 구원이 아니라 직분적인 선택을 받은 경우이다고 하였다. 칼빈은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주권이 반드시 성취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도르트 신조는 신자들이 내재하는 남은 죄와 이 세상의 유혹 때문에 은혜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 어려우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성실하시며, 그들을 은혜 안에 깊이 머물게 해서 마지막까지 강력하게 붙들어 보존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신자들이 신앙과 은혜에서 아주 탈락하는 일이 없고, 또 그들의 후퇴를 계속하되 멸망하는 일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변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공적과 중보와 보존이 무효화될 수 없고, 또한 성령의 인치심이 파기되거나 혹은 말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웨슬레 신학을 통해 본 이중 예정론의 비평적 이해.
1. 전적 무능력(Total Inablity)에 대하여
이 교리는 원죄(原罪)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것을 “첫 조상 아담의 죄로 안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으며, 이로인해 인류는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과 부분이 전적으로 더럽혀져서 우리는 선(善)에 전적으로 싫증을 느끼고 무능해지며, 그것을 반대하게 되었으며, 악으로 완전히 기울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칼빈도 이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인간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사악한 물결속에 휩싸여 있어서 죄가 없는 곳이라고는 한 부분도 없으며, 그래서 결국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죄악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인간성 그 전체에 선한 요소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웨슬레 역시 죄관은 역사적 기독교의 원류(原流)를 따라서 성 바울과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등의 그것을 답습하였다. 창세기 6장 5절을 구절로 한 그의 ⌈원죄⌋라는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우리는 교리적인 체계로서 생각할 수 있는 기독교와 가장 세련된 이교(異敎)간에 한 가지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은(이교도) 모든 인간의 선은 결핍되어 있으며, 악한 행위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인간성의 전체적인 기능에 있어서까지 전적으로 타락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였습니다”라고 하여 전적 무능력(부패)에 관한 그의 견해를 잘 표현하였다.
한편, 웨슬레에게 있어서 이 원죄의 교리는 이교와 기독교를 구별하는 근거로써 이해되었다는데 특이점이 있다. 웨슬레는 어떠한 제목을 내걸든지 간에 원죄의 실재를 부인하는 자들에게 “이교와 기독교를 달리하는 근본적인 법에서 이교도“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웨슬레는 아담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칼빈과 다른 견해를 가졌다.
즉,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권을 나타내기 위하여 아담의 범죄와 죄의 도입을 하나님의 의도에 의한 것으로 보았는데, 웨슬레는 범죄 행동의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요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진 범죄자이므로 하나님이 그 죄책을 질 수 없다 하여 죄의 도입과 그 책임을 인간에게 돌렸다.
또한, 웨슬레는 아담 한 사람의 범죄요 전 인류가 다 함께 죄성과 함께 죄책을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어긋남이 아닌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칼빈과 다른 견해를 가졌다.
즉,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지(豫知)의 능력과 의지로 멸망당할 자를 창조하셨으나, 우리는 ”그가 왜 멸망당할 자를 지으셨나 하는 것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인간으로서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한 것이며, 만일 우리가 공의의 문제를 논한다면 이것은 신의 ‘최고의 공의에 속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웨슬레는 칼빈의 예정적 논리에 대하여 그것은 계시 자체의 모순성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그 후손에게 미치는 것은 혹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인간 심령 속에서 역사하는 선행 은총과 그의 절대의 사랑으로 제 2의 아담인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그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질병과 인간성의 부패에 치료의 길을 열어 놓았으며, ... ”라고 하여 칼빈(주의)의 견해를 반박하였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에 대하여
뵈트너는 이 교리에 대해서 때로 개혁주의의 `심장’이라 불릴 정도로 아주 중요한 교리임을 천명 하였다. 이 교리는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전제로 한 것인데, 그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은총을 받아 선택된 사람은 구원을 받고,하나님의 간과하심으로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멸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레는 이 교리에 있어서 아주 단호하게 칼빈주의를 부정 하였다.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말하길, “이 선택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은 마치 성경이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았다고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는 무조건 선택이라는 것은 믿을수가 없다. 이런 도리는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을뿐 아니라(다른 이유는 말 않고라도),이것은 동시에 무조건적 유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덧붙여서 그는 “유기의 도리를 내포하지 않은 선택의 도리를 지적해 보자, 그러면 나는 무조건 선택의 도리도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성경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사실을 믿는한 유기의 도리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은 신구약 전체의 내용이나 흐름과는 전연 상치된다.”고 했다.
웨슬레의 이 교리에 대한 중요한 반대 몇가지를 들어보도록 하자. 웨슬레는 그의 `예정론에 대한 냉정한 고찰’ (predestination calmly considered)과 `필연성에 대한 논구‘ (thoughts upon necessity)라는 논문에서 무조건 선택의 교리와 그 반대론 중 어느 것이 더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영광스런 속성들, 즉 그의 지혜와 공의와 자비를 드러내는가를 검토해 보자고 하였다.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과 멸망을 미리 결정하심이 없이 생명과 사망, 선과 악의 길을 준비해 놓으시고 인간의 자유 의지로 그 두 길중 하나를 택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더 합치한다는 것이다.
둘째, 유기의 도리를 내포한 선택의 도리는 또한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 멸망 받기로 결정된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은혜가 없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범한 죄과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臼?준비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내리신다면, 이에서 더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세째로,이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어긋난다.가령 여기 어떤 사람이 그의 입김 한번으로 수 백만명을 구원할 능력이 있는데도, 그중에 단 몇 사람만을 구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버려두고 말하길 “그것은 내가 구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가 원치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자비한 하나님이라고 하겠는가?
네째로, 이것은 전도의 필요성을 없앨 것이다. 전도는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데, 선택을 받은자는 전도의 여부없이 마침내 구원을 받을 것이요, 멸망 받기로 예정된 자는 전도를 듣거나 못 듣거나간에 결국은 틀림없이 멸망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이 교리는 하나님을 거짓말 장이로 만든다.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원하시느니라” (딤전 2:4, 겔 18:23)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멸망받기로 확정 하셨다면 하나님은 일구 이언하는 거짓말장이가 될 것이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마지막으로, 이 교리는 성경의 몇 구절만을 가지고 자기들의 주장을 고집하나, 성경의 다른 곳에는 이를 반증 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으며, 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사상이나 흐름은 이것을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웨슬레의 주장은 그의 성경 해석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칼빈주의자들이 무조건 선택의 교리를 가장 잘 대변해 준다고 하는 성경 구절들은 `요 6:37’, `엡 1:4,5‘, `롬 8:29,30’, `롬 9:13‘등이다.
이 구절들을 웨슬레는 어떻게 해석했는지 알아보면서 `무조건 선택’의 교리를 부인했는지 알아보자.
(1)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자기를 잃어버린 자로 여기고 아버지의 끌어당김에 이끌려 따르는 자는 모두 아버지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아들에게 주신다.
②“내게로 올 것이요”- 신앙으로, 오직 신앙으로만이 예수께로 올 수 있다.
③ 그리고 이렇게 하여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쫒지 아니하리라”- 만일 끝까지 참고,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기만 하면(요 5: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용서와 성결과 하늘이 주어진다.
④ “내게 주신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요 17:6, 12를 보라. 그들이 만일 끝까지 참으면 잃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참지 못했다.
요 17: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2) 엡 1:4,5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① “우리를 택하사”-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미리 아신바 된 유대인과 이방인 전부를 가리킴이다.
② “그 기쁘신 뜻대로” - 그 기쁘신 뜻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 오직 믿는 자에게 값없이 이 축복을 내리신다는 영구 불변의 흔들림 없는 뜻이다.
③ “우리를 예정하사 ...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후일에 그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자 (嗣子)가 되는 광명을 누리게 하기위해 미리 정하셨다는 뜻이다.
(3) 롬 8:29,30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①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때가되면 미리 정하신 그들을(에베소서 1:4-5의 해설 참조) 그의 복음과 성령으로 부르신다.
②“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고”- 그들이 하늘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행 26:19),그들을 용서 하시고 받아 주신다.
행 26:19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③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들을 계속하여 그의 인자하심 안에 있게 하시고는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마지막에는 영화롭게 하신다. 사도바울은 여기서나, 그리고 그의 서신의 다른 부분에서도 어떤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고, 영화롭게 된다고 하는 말을 명백하게 언급한 일이 없다. 그는 단지 이런 것이 곧 하나님께서 한 단계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 가시는 방법이란 사실만을 단언한다.
(4) 롬 9:13(“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①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이 사랑은 특이한 사랑 이었다. 즉,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푼 사랑이 바로 그것이었다.
② “에서는 미워하였다”- 즉,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자손인 에돔 족속을 미워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알아 두어야 한다. 첫째, 위의 사실들은 야곱이나 에서 개인에 관한것이 아니라는 것과 둘째, 그것은 그들이나 그들 자손들에게 적용되는 영구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등이다.
이와같이 논문과 신약성서 주해를 통해 볼때 웨슬레는 선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수의 사명을 맡겨주기 위하여 어떤 특정의 인물을 택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보통 개인적이요, 무조건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레스(Cyrus)왕은 성전 건축을 위하여, 사도바울은 12제자와 함께 복음의 선포를 위하여 선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영원한 복지와는 무관하다. 왜냐하면 선택된 자 중에도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기 때문이다.(예, 가롯 유다, 요한복음 6: 70)
둘째, ‘선택하셨다’는 성경상의 용어에 대한 문제이다. 웨슬레는 이러한 용어들은 기독교가 유대인들로 부터 채용한 것들이라고 하였다. 즉, 우리의 주님과 사도들은 본래 유대인이며, 이스라엘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용어는 자연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용어로 전파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개념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상 숭배와 악행에 젖어있는 백성들로 부터 분리시켰다는 개념과 동일한 것처럼, 신약 성경상의 ‘선택하셨다’는 용어는 비그리스도인들의 사이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한가지 다른 것은 선택하셨다는 말이 구약 성서에서는 모든 보이는 교회의 회원들에게 적용시킨 것이라면, 신약 성서에서는 보이지않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적용시켰다는 점이다.
세째, 이것은 칼빈(주의)의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교리에 가장 확실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웨슬레는 “선택이란 어떤 사람으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택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버리심(유기) 처럼 조건적”이라고 하였다. 이 두가지 도리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마가복음 16: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이다. 이에 따르면 모든 진실된 신자는 성경상으로 택함을 받은 자이고, 불신자는 그가 믿지 않는 한 버림받는 자이다. 즉, 웨슬레는 칼빈과 달리 믿음에 의한 ‘조건적 선택’을 주장하였다.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에 대하여
지금까지 계속 논의해 왔듯이 웨슬레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실재에 있어서는 오직 선택된 자에게만 제한된다는 ‘제한 속죄’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도, 공의에도, 지혜에도 모순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웨슬레의 속죄에 대한 견해는 ‘제한속죄’와 비교하여 ‘보편 속죄’로 나타난다.
이것은 웨슬레가 퀘이커 교도인 바클레이(Barclay)의 허락을 받고 다음의 3가지 점을 인용한데서도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① 모든 인류는 본질상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그가 보시기에 악하다.
②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죽게하셨고, 그리스도는 세계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각성시킨다.
③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오는 이 혜택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지식에서 제외된 자들에게도 미친다.
웨슬레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구분하여 말하였다.
①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 즉 죄 중에 죽은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었다.(고린도 후서 5: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意味)를 밝혀준다.
② 그는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화해의 제물이며,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물이다.(요한 1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능(效能)을 밝혀준다.
③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 분을 위하여 살도록하기 위한 것이다.(고린도 후서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죄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계획과 목적(目的)의 표현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해 대신하여 짊어지신 죽음인 것이다.
또한, 웨슬레는 자신의 이런 견해에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 “그대들은 나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에 노골적으로 밝히신 말씀 중에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지않고 다만 몇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과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한 화해의 제물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그의 죽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위하여 죽으신 그 분을 위하여 살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 달라”고 반문하며 ‘제한 속죄’의 견해를 일축하였다.
이와같이 웨슬레에게 있어서 속죄는 매우 중요시 되었다. 그것은 인간을 죄의 사슬에서 구원하고 하나님에게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의 원천(源泉)이다. 더우기 앞으로 중요하게 논의될 선행적 은총(Preventing Grace)마저도 이 속죄에서 유래되며, 이 은총은 그리스도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을 초월해서 인간의 모든 자녀들에게 확산된다.
4.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able Grace)에 대하여
지금까지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웨슬레의 입장에서 이중예정론을 파헤쳐 보았는데, 개별적으로 볼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문제란 웨슬레가 믿음에 의한 ‘조건적 선택’과 ‘보편 속죄’를 주장하면서도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동시에 주장하였다는데 그 원인이 있다. 다시 말하여 웨슬레가 지적하는대로 전적 무능력(부패)한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믿음 조차도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일찐대 어떻게 그런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웨슬레는 ‘선행적 은총’이란 교리로써 잘 설명해 주었다.
선행적 은총이란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 중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복된 임재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상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이것에 근거하여 웨슬레는 “누구나 고의적으로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전에도 하나님은 그의 성령으로 모든 인간의 심령 속에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선행적 은총의 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첫번째 결과로써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이다.
② 그 대상은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로, 인간 중에 이 은혜를 받지 않은 자는 하나도 없다.
③ 그 내용은 인간의 원죄의 죄책(The Guilt of Original Sin)을 사해 주신 것이다.
④ 나아가 인간은 이것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에 능동적으로 응답할 수있는 능력, 곧 어느 정도의 자유 의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⑤ 이것은 우리가 ‘생래(生來)의 양심’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교화(敎化)하시는 빛 등을 의미한다. 또한, 선행적 은총이란 성령께서 때때로 모든 사람에게 역사하시어 깨닫게 하시는 것 전부를 말한다.
이와같은 웨슬레의 사상을 통해 그가 칼빈의 ‘불가항력적 은총’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표명했을지는 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불가항력적 은총’에 의해 그의 선택된 자들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선행적 은총에 의한 부르심’으로 전 인류를 부르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설교문 ⌈자율적 구원의 성취⌋에서, 본문인 빌립보서 2: 12-13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의욕을 일으키심과 동시에 구원의 성취를 위한 행동을 하게 하신다”라고 말한데서 확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심령 속에서 구원을 위하여 이와같이 일하신다면 왜 모든 인간이 다 구원받지 못할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여기에 칼빈주의의 예정 교리의 근거가 있는데, 그들은 이것의 이유가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과 못 받을 자들을 예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웨슬레는 이와는 반대로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역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들의 자유로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에 의하나 여기에는 역시 인간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이렇게 성령이 인간의 심령 속에서 ‘소원’ 즉 ‘의욕’을 일으키시는 그 역사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원에 관한 몇몇 진리들을 깨달을 수 있다. 첫째, 우리는 그의 도우심을 받아 구원을 향하여 노력할 수 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역사를 중지히실 것이다. 웨슬레는 이것을 설명하여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는다”(마태복음 25:29)는 말이라고 하였다.
선행적 은총은 양심(良心)과 자유 의지(自由 意志)에도 연관되어 있다.
웨슬레는 인간의 도덕적 선의 뿌리를 인간의 양심으로 보았으며, 이 양심이 존재하게된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요 그것은 선행적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웨슬레는 에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선(善)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웨슬레는 자유(自由)와 의지(意志)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유는 의지의 작용이 아니요, 인간 영혼의 독립된 속성으로서, 영혼의 각 심리작용과 신체의 동작을 관장하는 능력으로 보았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 결단의 능력으로써 “나는 비록 내 성품의 부패때문에 내 마음을 통제할 능력을 갖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 아래 선이나 악을 택할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하였다.
웨슬레는 복음에 나타난 구원의 신앙을 두 갈래의 유기적 부분으로 구분하여 말했다. 그것은 하나는 완성된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미완성된 부분이다. 완성된 부분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의 구원과 축복을 위하여 실제로 어김없이, 그리고 완전히 이루신 모든일을 말하는 것이며, 미완성 부분이란 하나님께서 기독교회의 집단적인 경험을 통해서와 각 신자의 개별적인 경험안에서 계속적으로 역사하시는것을 말한다. 이와같이, 성령은 개별적인 경험안에서 계속적으로 ‘선행적 은총을 통한 부르심’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웨슬레는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대비하여 ‘전적 무능력’은 그대로 수용하였고, ‘무조건적 선택’은 믿음에의한 ‘조건적 선택’으로, ‘제한 속죄’는 ‘보편적 속죄’로, ‘유효한 부르심’은 ‘선행적은총에 의한 부르심’으로 정립하였음을 알았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 대한 웨슬레의 입장은 어떠한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웨슬레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강경하게 반대 하였다. 그는 그의 논문에서 성경 상의 8가지 예를 들어서 그것을 반박 하였다.
(1) 진실된 신자, 즉 하나님의 판단에 거룩하고 의롭던 자라도 마침내 은혜에서 떨어지는 사실을 우리는 에스겔 18: 24에서 볼 수 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2) 좋은 믿음을 줄 수 있는 좋은 양심을 받은 사람이라도 마침내 타락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디모데 전서 1:18-19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3) 좋은 감람 나무라할 수 있는 신령한 보이지 않는 교회에 접붙임을 받은 자도 마침내 타락할 수 있음을 로마서 11: 16-22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롬 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롬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롬 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 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 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롬 11: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롬 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4) 참된 넝쿨에 속한 그리스도의 가지라도 마침내 타락하여 떨어질 수 있음을 요한복음 15: 1-6을 통해 알 수 있다.-“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 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5)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이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오염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도, 미끄러져 다시 오염되고 영원히 멸망할 수 있음을 베드로 후서 2: 20을 통해서 알 수 있다.- “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6)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고린도 후서 4: 6), 성령을 나누어 받고, 성령의 증거와 그 열매를 가진자(로마서 8:16, 갈라디아서 5:22)라도 떨어져 영원히 멸망할 수 있다.
(7)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져서 영원히 죽을 수 있음을 히브리서 10:38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에서 물러간다함은 물러가 멸망한다는 것이다.
(8) 계약의 피로 거룩함을 입은 자라도 타락하여 마침내 영원히 죽을 수 있음을 히브리서 10:26-29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히 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 10: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 10: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한편, 불가항력적 은총에 대하여 칼빈주의는 요한복음 10:28-29, 베드로 전서 1:4-5 등을 들어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1)요한복음 10:28-29(“...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 ”): 요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구절에 대하여 웨슬레는 그 앞 절로 소급하여 해설한다. 즉, “내 양은 내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여기에는 세가지 조건부 약속이 있다.
① 신앙으로 나의 음성을 듣는 자.
② 나를 사랑하는 자로써 나에게 알려져 나의 인정을 받는 자.
③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를 따르는 자.
그러므로, 위의 세가지 조건에 근거할 때만 저희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2)베드로 전서 1:4-5(“ ...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만 구원받으며, 유지되는 것이다.
한편, 칼빈주의는 이 교리에 관련하여 구원의 확실성을 설명 하였는데, 웨슬레는 그것을 부정하고 성령의 증거에 의하여 구원의 확실성의 도리를 전개 하였다. 왜냐하면, 성도(피택자)의 견인 이라는 개인 영혼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선택교리의 근원에서 분리되어 결코 확신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비록 예정론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는 결코 자신이 예정되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선택에서 제외 되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을 일으킬 뿐이다.
웨슬레는 그리하여 성령의 증거에 의한 구원의 확신교리를 발전시켰는데, 성령의 증거에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 (the Direct Withess of the Spirit)와 성령의 간접적인 증거 (the Indirect Witnes of the Spirit), 그리고 성령과 우리 영과의 공동증거 (the Joint of the Spirit the our own spirit)가 있다고 하였다.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란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에게 강하게 주는 내적 느낌 (Inward Impression on the soul)”이며, 사람이 중생할때 평생에 단 한번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신자안에 내재하시는 한 지속되는것이 원칙이다.
또한 성령의 간접적인 증거란 웨슬레가 때로 우리 영의 증거 (the Witness of our own spirit) 또는 선한 양심의 증거 (the Witness of a good conscience)라고 부른 것으로 이는 “우리가 우리 안에서 (in our own souls)느끼는 것을 곰곰히 생각하여 행하거나 또는 이성적으로 추리한 결과에서 오는 확신”이며, 성서가 묘사하는 신자의 표적에 기초하여 나도 하나님의 자녀이구나 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레는 이 선한 양심의 증거가 성령의 직접증거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성령의 직접증거가 이에 선행한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공동증거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증거를 어떻게 인간의 환상이나, 마귀의 현혹에서 구별 할 수 있는가 하는 영적분별의 문제를 다룬것으로 “신자가 의식하는 내적인상 (Inward Impression), 곧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는 선한 양심의 증거에 의하여 일치를 보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열매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된 모순된 내적 느낌을 하나님의 영적 느낌인 양 주제넘게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할것은 우리가 시련을 당할때에는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일시 사라질 수 도 있으며, 범죄할때는 이 성령의 증거가 소멸된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다시 주 안에서 걸어가면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증거가 회복되며 증가 되는것이 보통이라고 웨슬레는 말했다. 이러한 성령의 증거의 소멸과 재형성을 고려할때, 한번 성령의 증거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 구원을 보증하는것은 아니며, 또한 이러한 확신이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성령의 증거를 통해 개인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으나 성령의 증거를 가진자만이 구원받은자인것은 아니다.
이러한 확신의 교리에 관련하여 스코트 (W. A. Scott)는 말하길, “웨슬레의 생각으로는 기독교 생활은 명확한 회심의 경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죄의 용서와 구원함을 받았다는 내적인 확신의 느낌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런 경험을 조장하려는 데 웨슬레의 일차적 목적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그리하여, “그의 설교는 구원 받았다는 느낌을 일깨우려는 노력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웨슬레의 설교는 일반적으로 두려움과 뉘우침을 자아내려고 했으며 죄인임을 가능한 한 철저히 느끼게 하려고 하였다. 그 다음 이와 같은 강도 (强度)로서 구주이신 그리스도에게 신뢰를 두도록 호소하였다.
또한, 와인쿱(M. B. Wynkoop)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확신은 최소한 다음의 두가지 중요한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여 웨슬레의 입장을 잘 대변 해주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위험에서 가능한 모든 도움으로 우리를 보호하도록 그 분을 충동한다는 사실인데, 따라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또 다시 타락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둘째의 중요한 진리는 성결의 본질로써, 믿음안에서의 인내는 그 사람 자신의 믿음에서 유도된 힘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정도 (Quality)이다. 즉, 우리의 믿음의 힘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
2.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레 예정론의 중요한 개념 차이
이떻게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몇 가지의 근본적인 개념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 첫째: 은총(恩寵)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값비싼 것이다. 그런데 칼빈이 이해하는 것은“하나님의 은혜는 값비싼 것이므로 아무에게나 함부로 나누어줄 수 없다. 따라서 구원시키기로 선택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며, 또 이 은혜를 받는 자는 반드시 구원되고야 만다”는 것이다. 곧 은총의 배타성과 절대성을 말한다.
그런데 웨슬레의 이해는 각도가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비싼 것이다. 따라서 이 은혜는 우리를 중생의 단계에 머무르게 해 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성장하여 결국 성결해지며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해주고야 만다.” 여기엔 은총의 포괄성 및 적극성과 발전성이 있다.
(2) 둘째로는 중생(重生)에 대한 개념 차이다. 칼빈은 이 말을 결코 타락될 수 없는 확실한 구원의 징표로 생각한다고 했으나, 웨슬레는 의인이나 양자됨과 연결시켜 이해한다. 만약 중생했던 사람이 후에 타락하는 일이 생겼다면, 칼빈주의에서는 우선 그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할 것이고, 다음에는 그의 과거의 중생은 실은 거짓된 (또는 비성서적) 중생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웨슬레의 해석은 다르다. 그는 확실히 중생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양자로서의 신분과 거룩한 생활을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양자의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을 뿐이라고 할 것이다. 곧 개혁자들이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율법을 경시하였으나, 웨슬레는 성결을 강조함으로 “신앙의 열매”인 참구원을 설명한 것이다.
(3) 셋째로는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예정(豫定)이라는 말의 개념 차이다. 칼빈주의에서는 예정을 구원과 직결시킨다. 그러나 웨슬레는 “구속의 계획”이라고 이해한다.
“모든 신자는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예정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 누구를 부르실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계획을 따라 창세전에 정하신 그의 행동의 계획에 의하여 부르시는 것이다.(Wesley)
웨슬레 신학자인 와일러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예정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을 자녀로 삼으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비적이며 은혜로운 계획이다.
웨슬리안 성경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 준비, 목적 안에서,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택함을 입은 것이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도록 미리 정하여진 것이다."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이중예정론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예정에 관련된 주장을 하였다.
(1) 일반 예정(general predestination) :
웨슬리는 선재적 은총으로 칼빈주의자들의 이중 예정론을 비판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선택하시는 등의 구원과 상관없는 특수 예정(Special predestination)은 인정하나 구원과 상관하는 일반 예정(General predestination)은 알미니우스주의의 입장에 서서 단호히 비판한다.
1739년 '값없이 주시는 자유로운 은총'(Free Grace)이라는 설교를 통해서 만인속죄론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롬8:32]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은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그 사랑은 인간의 어떤 능력이나 공로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 안에 값없이 부어주시며, 또 모든 이를 위해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어떤 자는 영원한 멸망에, 어떤 자는 영원한 구원에 이중적으로 예정되어 있지 않다. 예정은 모든 설교를 헛된 것으로 만든다. 선택된 자들에게는 설교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냐?
이중 예정론은 성결의 동기를 모두 없애 버리기에, 성결을 위한 노력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예정은 몇 가지 성결, 곧 온유함을 파괴하고 적들, 악한 것들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파괴한다. 예정은 종교의 위로와 기독교의 행복을 파괴하며, 영적 행복을 빼앗아 간다. 예정은 불안한 교리로, 선을 행하려 하거나, 죽어 가는 영혼을 구원하려는 우리의 소망을 무시한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긍휼은 선택된 몇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만 구원시킨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길 원하는 것처럼 성경 곳곳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을 위선자로 만든다. 결국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을 악마보다 더한 거짓말쟁이로 몰고 가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교리다.
(2) 특수 예정(special predestination) :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의 특수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그의 예지(foreknowledge)에 따라 특수한 사람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특수한 일을 맡기신다.
예를 들면, 선교적 사명을 위해 선택되는 사사, 왕, 제사장, 예언자, 목사, 선교사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하나님의 이 선택은 개인적이고도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특수 예정은 "영원한 행복", 곧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3) 조건적 일반 예정(conditional general predestination) :
웨슬리는,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될 것이다" 라는 마가복음 16:16을 근거로 조건적 선택을 주장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조건이다. 즉 구원에는 믿느냐? 안 믿느냐? 라는 조건이 붙는다는 것이다. 진리의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예지에 의하여, 성령의 성화를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불려지고 선택되어지는 것이지 칼빈의 예정과 같이 무조건적인 선택(election)과 무조건적인 유기(reprovation)는 웨슬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4) 섭리 신앙(providence) :
웨슬리는,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라는 누가복음 12:7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정신앙은 비판하나 섭리의 신앙은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거대한 것 뿐 아니라, 아주 작은 개인의 삶까지도 특별하게 섭리하신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 섭리 신앙을 성 어거스틴의 말, 곧 '당신은 개개인을 마치 모든 사람을 돌보시듯 돌보아 주시고, 모든 사람도 마치 개인을 돌보시듯 돌보아 주십니다' 라는 말로 요약한다.
캘빈의 예정론과 웨슬레 예정론사이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
요한 웨슬레의 예정론은 획기적인 변혁이 시도되었다. 그것은 마치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nicus,1473-1543)적 전환과 같은 엄청난 것이었다. 요한 웨슬레는 ‘선재은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을 강조하고 동시에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보편적 구원설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설자리가 없게한 칼빈주의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줄기차게 크게 주장함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약화시킨 펠라기안주의나 아르미니안주의자들과도 구별된다.
칼빈의 예정론과 웨슬레의 예정론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요한 웨슬레가 주장하는 “선재은총”이다.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측만을 보았다면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성경해석은 논리가 잘 맞지않은 극단성이 있으나 웨슬레는 종합적이고 성숙한 면모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웨슬레 신학은 신약 성서에 있는 중요한 요소에 한 학파의 장점들을 창의적으로 종합한 데 그 특징과 공헌이 있다. 웨슬레는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한 신약성서에 나타난 주요한 요소들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교회의 각 전통이 지니고 있는 장점들을 결합시키곤 하였다. 웨슬레는 성결의 개념을 로마 카톨릭의 강조에서 가져왔고 그의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만으로 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강조를 채택했다. 웨슬레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와 경건 주의자들이 강조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개념을 창의적으로 종합하여 기독자 완전의 성서적 교리를 수립한 것이다.
선재은총(preventing or prevenient grace) 이란 선행(先行: Pre), 즉 “-보다 앞서는, -보다 먼저, 예비하는”이란 의미이다. 즉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기 이전부터,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은총을 말한다. 성경적인 표현으로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롬5:8)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말한다.
은총이란 “죄인인 인간이 구원얻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발적이며 무조건적이며 공로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하나님의 은총뿐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이 가진 “양심”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선물이며, 또 하나님과 선과 악에 대한 부분적인 지식, 하나님을 찾으려는 욕망, 율법이 없지만 율법대로 행하려는 이방인의 양심을 선재은총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롬2:12-15)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시는(요3:17) 죄인을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행은총이라 할 수 있다. 웨슬레는 이렇게 선재은총에 대해서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게된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 선재은총은 만인을 위한 은총(Universal Grace)이며, 만인 안에서 작용하는 은총이며 거저 주시는 은총(Free Grace)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만민에게 공의로운신 것이다.
시 9: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시 9:8
他要按公义审判世界, 按正直判断万民.
디모데전서 2장 3,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으며, 또 에스겔 33장 11절에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는 말씀이 있고, 베드로후서 3장 9절에도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부르심을 거절함으로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은총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범죄하고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신 바 은총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고 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은총[은혜]은 모든 사람에게 부여되었다. 이것이 선행적(先行的) 은총으로, 인류로 하여금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이 은총에 의하여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믿을 수는 없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무조건적인 예정과 선택에 무리하게 결부시킴으로써 범죄로 손상되었을지라도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완전히 무시하여, 책임 있게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말았다. 웨슬리의 말처럼,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죄로 인하여 비록 어두워지고 약화되어, 스스로 선을 택하고 의를 행하기에는 무력하게 되었지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선행적(先行的)인 은총이 임할 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캘빈은 “불가항적인 은총”을 주장하였지만, 웨슬레는 이 은총을 응답하거나 혹은 거절할 수 있는 “가항력적인 은총”을 주장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대등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구원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만의 은혜에 의하여 가능하지만, 인간에게는 부르심에 응답하며 믿음을 선택하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을 스스로 져야만 한다.“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요3:16)
웨슬레의 신학의 선재은총에 대해서 많은 자들이 오해와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웨슬레의 신학을 펠라기우스(Pelagius)와 비교하기도 하며 인본주의적인 구원론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웨슬레는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 적이 결코 없다. 그는 ‘값없이 주는 은총’(Free Grace)를 주장하였으며 ‘인간의 의지’(Free Will)를 강조한 적이 없었다. 웨슬레가 말한, 인간의 응답과 책임은 언제나 “은총 안에서” 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분명하다. 다만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만, 예수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어느 인간이 구원을 받지 못하기로 이미 결정되어있으므로 믿음을 선택하여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강요된 선택이었므로 하나님의 책임이지 인간 스스로의 책임이 아니다.
다음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선재은총에 대한 결론이 된다.
1)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고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3) 또한 이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으로 우리는 전도해야만 한다.
알미니우스와 웨슬리의 차이점
한편 알미니우스와 웨슬리의 차이점 알미니우스가 웨슬리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친 것이 사실이지만, 웨슬리를 알미니안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구원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은혜의 개념에 있어서 웨슬리와 알미니우스는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은혜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냐에 따라서 칼빈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펠라기안이 될 수도, 세미 펠라기안이 될 수도 있고, 웨슬리안이 될 수도 있다.
우선 알미니우스가 이야기하는 은혜의 개념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보자. 그는 자유의지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런 상황에서 참된 선을 향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하고, 불구가 되고, 허약해지고, 굽고,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갇히고, 파괴되고, 상실되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은혜의 도움이 없이는 쇠약해지고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고무되지 않으면 어떤 능력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의 구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없이는 전혀 무능한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볼 때에 아주 세심하게 살펴보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는 이미 파괴되어진 자유의지에 하나님의 은혜가 덧입혀질 때에 이미 무능했던 자유의지가 변하여져서 스스로 안에 능력이 생기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위의 말에서도 그는 '은혜에 있어서 고무되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무되다'라는 말 자체가 풍기는 뉘앙스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로 인하여 내 안에 파괴되어졌던 자유의지가 올바르게 작동하며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알미니우스의 이런 표현은 그가 펠라기안주의를 거부하면서 한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에게 펠라기우스처럼 은혜라는 말과 관련해서 착각하고 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나에게 있어 그 말은 단순히 마음의 조명, 감정의 마땅한 순서. 그리고 선한 것에 대한 의지의 경향을 위해 필요한 것을 의미한다. 나는 자연적이고 육적인 인간의 마음은 모호하고 어둡다는 것과 그의 감정은 부패하고 절제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의 의지는 완고하고 불순종한다는 것과 인간 그 자신이 죄로 죽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참으로 선한 것은 무엇이나 올바르게 이해하고 존중하며 숙고하며 원하며 시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지성, 감정, 의지, 그리고 그 모든 능력에 있어서 중생하여야 하며 새로워져야 될 필요가 있다. 그가(타락한 인간) 이러한 중생 또는 회복에 참여하게 될 때에 나는 그가 죄에서 구원받았으므로 선한 것을 생각하고 바라며 이행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계속적인 도우심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알미니우스가 정의한 은혜가 무엇인가? 그는 " 단순히 마음의 조명, 감정의 마땅한 순서, 그리고 선한 것에 대한 의지의 경향을 위해 필요한 것을 의미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표현 속에는 알미니우스의 은혜는 그 인간 속에 내제되어져 있는 가능성을 일깨우기 위한 필수적인 하나의 과정처럼 생각할 수 있는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위의 표현을 통해서 은혜를 통해서 일깨워지는 인간 내에서의 가능성을 지성, 감정, 의지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은혜를 통해서 내 안의 지성, 감정, 의지가 새로워져서 이런 인간적인 요소가 중생에 참여하게 될 때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은혜 없이도 내 안에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펠라기우스의 주장과는 다른 면이지만 부분타락을 이야기하는 로마 카톨리의 반펠라기우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즉 원죄로 인하여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은 파손되었지만, 완전히 파손된 것은 아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인간 안의 이전까지의 파손되었던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인간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이 신인협동설로 이야기 되는 부분이다. 인간이 구원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모습이다.
물론 이것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원죄부터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야겠지만, 알미니우스가 체계적인 구원론을 정립했다기보다는 칼빈의 예정론에 반발하는 정도로의 신학을 전개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체계에 있어서는 미흡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위와 같이 말하고 있지 않는다. 웨슬리는 결코 신인협동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의 선행의 은혜는 초자연적인 은혜이다. 초자연적인 선물로서 주어지는 양심은 결코 지성, 감정, 의지와 같은 인간적인 요소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웨슬리는 양심('on Conscience')이라는 설교문에서 양심이라는 현상이 모든 인간에게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것이 '자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즉, 모든 인간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는 하나), 사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으로 부여된 기능들을 넘어서서 그 위에 주어진 하나님의 초자연적 선물'이라고 보고 있다. 더 명백히 말하기를 소위 양심이라 하는 그러나 사실은 선행은혜라는 현상은 "자연이 아니라, 이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개개의 인간을 비추는 참 빛이신 그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자연을 넘어선 초자연적 선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은혜를 통한 구원은 인간의 내재적인 요소의 회복을 통해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는 별개로 구원만을 위한 은혜로 인간에게 임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분명히 선행의 은혜를 표현하길 "인간의 모든 자연적으로 부여된 기능들을 넘어서서 그 위에 주어진 하나님의 초 자연적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연적으로 부여된 기능에 대해서는 웨슬리는 이해력과 정서와 어느 정도의 자유, 즉 스스로 움직일 수 있으며 스스로 자신을 통치할 수 있는 기능이 부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이해력과 정서, 자유등 인간의 내적인 요소들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데 조금의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다. 인간이 구원을 위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구원은 100% 하나님의 역사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역사를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이것은 내가 (인간이) 한 일이 아니다. 또한 내 공로도 될 수 없다.
복음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100% 일하시고 이에 응하여 내가 100%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멘'으로 응하는 것이다. '아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이 일만이 옳습니다. 그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모두 완전히 배제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아멘을 진정으로 말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 속에 있는 모든 자연적 및 인간적 기능과 힘과 노력을 100% 가동했으되, 하나님이 행하신 일만이 옳고, 그 이외의 가능성은 모두 완전히 배제되므로, 이 모든 나의 것이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 앞에서 100 % 무가치하다는 것을 진정으로(즉,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형태로) 인정하는 것이다. 즉, '오로지 하나님만이 옳으시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만이 옳습니다, 그 이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멘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유일하게 타당한 응답이다. 이런 의미에서 웨슬리는 양심의 가책에 대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순종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은혜에 대하여 우리가 보여야 하는 유일한 반응은 나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순종하는 것(즉, 아멘으로써 말하고 행하는 것) 밖에 없다. 그렇다면 선행은혜를 포함한 모든 구원의 은혜(즉, convincing grace, justifying grace, sanctifying grace)에 있어서 하나님의 100%하시는 일에 대하여 인간은 최선을 다해 아멘으로써 말하고 행하므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0%로 만드는 것이 웨슬리가 말하는 의미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행위‘(act)와 ’인간의 반응(react)'의 올바른 의미이다. 즉 웨슬리는 펠라기우스와 세미 펠라기우스의 오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알미니우스는 세미 펠라기우스로 오해할 만한 충분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또한 은혜에 대한 개념 자체가 웨슬리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알미니우스는 조건적 선택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예지 예정론으로 세상이 생기기 이전에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이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할 것을 예견하신 구분의 예지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을 사람들만을 택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이 믿는 것과 그 믿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책임이 강조된다.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이 세상에서 도덕성이 요구되는 존재이며, 그의 구원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웨슬레는 인간의 결정이나 행위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속에 속한 구원의 대상으로 본 것이 큰 차이점중의 하나이다.
복음적 신인 공동설(Evangelical Synergism)
한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개혁자들은 이것을 발견했고 그렇기에 Sola Gratia를 소리높이 외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에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책임문제”이다. 만일 인간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고 인간의 노력은 조금도 필요 없는 것이라면, 구원받지 못한 인간에게 어떻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인가?
역사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는 펠라기우스의 이론이다. 그는 원죄를 부인하고 자력 구원을 외쳤다. 따라서 구원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우리 구원의 모범이 될 뿐, 신앙의 대상이거나 구세주는 아니다.
둘째로 펠라기우스에 상반되는 것으로 어거스틴이나 칼빈의 이론인데, 이들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함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능력도 없음을 말한다. 오직 예정된 자들(택함을 받은 자들)만 후천적으로 응답할 은혜를 받아 구원되고 성장한다. 여기에는 인간이 책임이 설자리가 모호하다.
셋째는 앞의 두 가지 이론을 종합한 것으로 반(半)펠라기우스주의(Semi- Pelagianism)이다. 이것은 신인공동설(神人共働說)이라 하는데, 인간은 부분적으로 타락했으므로 아직 자력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능력이 남아있다고 본다. 그러나 인간 자신의 능력은 어느 정도 타락했기에 구원을 완성시킬 수가 없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를 더 받아야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웨슬레의 견해인데, 그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완전무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선재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역설한다. 따라서 한 인간이 구원을 받고 못 받고의 책임은 , 칼빈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선택 여부에 달려 있고 인간의 책임은 그 설자리를 잃지만, 웨슬레의 경우에는 모든 인간이 선재은혜를 받았기에, 그 책임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고백은 사도 바울과 함께 “네가 가장 많이 수고하였으나,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라고 하게 된다.
결론
오늘날까지 칼빈의 예정론은 성경해석에 있어 스스로 많은 모순을 않고 있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더구나 이중예정론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이 인간의 자유의지나 인격이 설자리가 없는 하나님의 주권이어서 더 이상 어떤 상향발전의 문을 스스로 닫아 버린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똑같이 종교 개혁자의 기수로 쓰임받았지만 성경관이 달랐고,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했고, 루터는 '믿음'을 강조 했다.즉 신학출발은 루터는 '이신득의', 칼빈은 '신 절대주의' 신학중심은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 칼빈은 '신 절대중심' 구원관이나 예정론의 입장에서도 루터는 '웨슬레'에 가깝고, 칼빈은 '전적 하나님의 주권'이라 하였다. 그러나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부흥을 이룬 교단들은(예를들면 오순절 계통,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구세군, 온건파의 웨슬레안 침례교, 온건파 칼빈주의와 웨슬레안의 장로교 등) 요한 웨슬레의 구원관과 예정론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전도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전도지 내용들도(예를들면 4영리)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받도록 초청하고 있다.
교회 역사상 두 종류의 신학이 대립되어 왔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며 인간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형태의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 그 극단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결심이 구원을 이룬다는 극단적인 알미니안 주의이다. 극단적 칼빈주의와 극단적 알미니안주의는 결국 선교의 장애물이 되고 교회를 죽이는 양 극단의 신학이다. 신학적으로도 건전성을 유지하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와 인간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웨슬레처럼 인간의 책임교리를 함께 강조해야 한다. 인간이 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웨슬레주의와 구원의 궁극적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점을 함께 강조해야한다. 그래야 건전한 복음주의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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