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는 1912년 9월 1일 창립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초대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선교사로 와서 한국 최초의 장로회 목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지 27년 만의 일이었다. 원래 장로교회의 행정치리 기구에는 당회(Session), 노회(Presbytery), 대회(Synod), 총회(General Assembly)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대회 제도를 두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에서 한국교회 최초 당회장이 되었고, 노회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 제1대 회장이 된 사람은 마펫이었다. 언더우드는 이때 안식년으로 미국 체류 중이었다. 그는 귀임 후에 1909년 노회에서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후 창립총회에서 제1대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처음 선교사들이 내한했을 때는 기독교를 전할 수 없었고 조직된 교회도 없었다. 1889년 일시적으로 장로교 선교사들의 공의회가 구성된 바 있었으나 1893년에야 미국 남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장로교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캐나다장로교와 호주장로교 선교사, 한국인 대표들이 참석하는 ‘조선장로회공의회’가 구성된 것은 1901년의 일이었다. 당시엔 선교사들이 모든 것을 주관하였다.
언더우드가 총회장이 됐던 이유
1900년을 전후해 한국교회는 급성장했다. 한국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끌어들인 동인(動因)에 관해 언더우드 부부는 먼저 ‘청일전쟁, 콜레라 창궐, 황후 피살, 그 후의 소요, 독립협회운동, 러일전쟁, 일본에 의한 나라 강탈과 식민지화 등 모든 국가적 재앙, 정치적 격동’을 꼽았다. 당시 조선에는 500여년의 사직이 망하는 것을 보고 교회 문을 두드린 사람이 많아 민족적 비운의 시기에 교회는 급성장했던 것이다. 그 다음 성장 요인은 자발적인 기독교 복음 전도와 교육이었다.
한국 교인들은 1907년 평양신학교에서 7명의 졸업생이 처음 배출되었을 때 주체적인 치리 기구를 만들었다. 그해 9월 졸업생을 목사로 장립했고 장로교회 치리법에 따라 처음으로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 노회는 전국에 단 하나밖에 없었고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노회였기 때문에 흔히 독노회(獨老會)라고 부른다. 이 독노회는 한국인 목사 7명, 장로 40명, 선교사 38명으로 구성되었다. 1911년 대구에서 모인 독노회는 장로교 최고 의결기관인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했고, 5개 조직교회당 목사 1인과 장로 1인의 총대를 내어 구성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12년 총회가 구성되었다. 이때 한국 장로교회는 노회 7개, 조직교회 134개, 미조직교회 1920개, 예배당 건물 1438채, 한국인 목사 69명, 외국인 목사 77명, 장로 225명, 세례교인 5만3008명, 총신자 수 12만7228명의 교세를 이루고 있었다.
첫 총회는 평양의 경창리에 있던 여자성경학원에서 장로 221명, 목사 96명(선교사 44명 포함)이 회집한 가운데 직전 독노회장이었던 레이놀즈(W L Reynolds) 선교사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언더우드의 총회장 피선은 첫 선교사의 공적을 예우한 것이었다.
1885년 한국 선교를 시작하여 각 분야 사업의 초석을 놓아 한국교회가 경이적 성장을 할 수 있게 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고, 새로 구성된 총회에서도 그 초석을 잘 놓아달라는 염원의 표시였다. 언더우드는 청년 시절 이 땅에 와서 자신이 뿌린 씨가 다른 선교지들과는 견줄 데 없이 급속히 자라나는 것을 본 당사자이면서 목격자였기 때문에 크게 감격해했다.
해외 선교사 파송 결의
언더우드가 총회장으로서 회의를 진행하면서 사용했던 의사봉을 ‘고퇴’라고 불렀다. 일곱 개의 각기 다른 빛이 나는 나무는 당시 7노회를 상징했고 세 띠를 달아 삼위를 상징했다. 고퇴는 십자가 위의 반석 같은 교회를 상징해 견고한 나무로 제작했다. 이 고퇴는 독노회를 처음 조직할 때부터 사용했다. 당시 선교사들은 의사봉을 망치라고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게일이 두드릴 ‘고(鼓)’ 자와 나무망치 ‘퇴(槌)’ 자를 합하여 고퇴라고 정했다.
창립총회에서는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산둥성 내양현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을 선교사로 파송키로 한 것이다. 동아시아를 향한 기독교 선교는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이루어졌지만 선교사 파송은 한국에서 먼저 행해졌다. 한국교회는 이 일을 통해 교회는 선교하는 공동체이며, 교인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증인이어야 함을 증언했다.
다른 한편으로 언더우드 선교사가 자립하고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하도록 선교의 씨를 뿌린 수고의 열매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한국교회는 이미 처음 노회가 조직되었을 때부터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한 이래 일본, 시베리아, 만주에 선교사를 파송해오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으로부터 받은 유교문화에 대한 보답으로 기독교를 전한다는 마음으로 중국 선교에 임하였다. 그러나 당시 중국 정세는 달랐다. 중국은 스스로 대국이라고 자만하고 있었고 이미 유수한 기독교 단체들의 선교사들이 오래전부터 활동해오고 있었다. 그런 중국 땅에 역사가 일천하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웠던 한국교회가 선교를 수행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의 마음은 어쩌면 1세기 로마시대에 망국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전도하러 갔던 심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나라가 쇠망해가는 상황에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었고, 온 신도들이 마음을 합하여 나라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기구를 탄생시켰다. 또 밖으로 해외 선교를 담당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장차 교회가 나아갈 진로를 닦았다. 여기에 첫 총회 조직의 큰 의미가 있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선교 활동 27년만에 장로교 초대 총회장에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는 중국 산둥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왼쪽부터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 언더우드가 1914년 한국 선교 30주년을 기념해 연설하고 있다.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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