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 323년은 중동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해였다. 역사의 무대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젊은 나이에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내친김에 인도를 정복하기 위해서 BC329년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로 진격한 그는 스피타메네스를 지도자로 삼은 이곳 백성들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받고 2년 동안 고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쪽 대양 연안까지의 도달을 목표로 한 그는 BC327년 인도 북서부로 진격하여 코끼리부대를 거느린 포로스 왕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오랜 전쟁에 지친 장병들의 전진거부로 인해 히파시스 강 부근에서 동진(東進)을 단념하였다. 그러자 그는 진로를 남으로 바꿔 인더스 강 하구까지 내려갔으며, 이어서 아프가니스탄 남쪽 기슭의 마크란 사막을 답파(踏破)한 뒤 수사 하마단을 경유하여 BC323년 비로소 바빌론으로 귀환하였다. 이때 네아르코스는 왕명에 의해 함대를 이끌고 인더스 강 하구에서 페르시아만 깊숙한 지점까지의 해로탐사에 성공하였는데, 이것은 동방원정의 큰 성과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인도 정벌에서 지칠 줄 모르는 용맹을 과시했지만 인더스 강의 습지대에서 더위와 장마와 모기에게 물려 말라리아라는 병으로 급사를 하게 된다. 오늘날 이라크의 바벨론에서 알렉산더가 열병으로 숨을 거두었을 때 그가 남겨놓은 거대한 제국은 어느 누구도 홀로 통치할 수 없는 광활한 영역이었다. 자연히 그의 부하 장군들 사이에 통치 영역이 분할되었다.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게 돌아갔고 그는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프톨레미 왕조를 이루었다. 또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소아시아 지역은 셀레우크스 장군에게 할당되었고 안디옥(안티오크)을 수도로 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를 이루었다. 이들희랍의 통치세력 사이에 위치한 것이 유대인들의 땅 팔레스타인이었다. 약 100년 이상 팔레스타인 지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관용주의 정책으로 정복민들을 다스렸고 이들의 통치기간에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평온을 유지했다.
그러나 주전 200년께 팔레스타인을 사이에 두고 양대 세력이 쟁탈전을 벌였다. 결과는 셀레우코스 왕가의 승리였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셀레우코스 왕가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가의 통치 정책은 정복지 내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희랍문명(헬레니즘)으로 통일시키는 ‘희랍문명 통일화’ 정책이었다. 특히 주전 170년대 안티오쿠스 4세는 강력한 희랍화 정책을 추진했다.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정책의 추진은 곧 종교적 탄압의 형태로 나타났다. 안티오쿠스 4세는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행해온 할례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긴 어머니는 아기와 함께 처형되었다.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게 했고 성경책(당시는 모세5경)을 소지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발견된 성경책은 불에 태워 없애버렸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유대인들로서는 참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을 격분시킨 것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희랍의 최고신 제우스를 위한 제단과 신상을 세우게 하고 제우스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희랍의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
이러한 상황에서 주전 167년 유다지역의 작은 마을 모디인(Modiin)에서 유대인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각오하고 투쟁에 나선 것이다. 이러한 저항운동은 유대인 하스몬(Hasmon) 가문에 속한 ‘마타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이 주동이되어 시작되었다. 이들이 항거의 기치를 내걸자 많은 유대인이 그들 주변에 모여들었고 결국 혁명으로 확대되었다. 이 혁명의 지도자는 마타디아의 다섯 아들 중에 ‘유다’였다. 그의 별명은 ‘쇠망치’라는 뜻의 ‘마카비’(Maccabee)였다. 사람들은 그를 ‘유다 마카비’라고 불렀고 그가 주도하는 혁명은 ‘마카비 혁명’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페르시아(바사)정벌에 나선 알렉산더
마카비 혁명군은 안티오쿠스 4세의 군대에 비해서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현지 지형과 지리에 익숙하다는 강점을 살려 게릴라식 기습공격으로 승리의 전기를 잡아나갔다. 3년간의 투쟁 끝에 ‘유다 마카비’가 이끄는 혁명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곧 성전산 위에 세워진 성전에 들어가 성전 안의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제거하여 정화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 성전을 새롭게 봉헌했다. 이 날이 구약시대 월력으로 키슬렙(Kislev)월 25일이었다. 이후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은 이날을 ‘하누카’(Hanukkah)절기로 지켜오고 있다. 성전을 ‘봉헌’했다는 뜻이다. 우리의 달력으로 12월 중순쯤이 되는 하누카 절기에는 유대인 가정이나 회당에서는 ‘하누카 촛불’을 켠다. 8개 촛대에 매일 저녁 하나씩 촛불을 켜 나가서 마지막 여덟째 날은 8개 촛불이 모두 켜진다.
이러한 촛불의식에는 유래가 있다. ‘유다 마카비’가 혁명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성전을 밝히는 등불의 기름이 하루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성전에서 사용하는 성유를 만들려면 여러 날이 걸리는데 기름이 하루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유가 만들어질 때까지 하루치 기름은 기적적으로 8일간이나 성전을 밝혔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하누카 절기에 촛불을 켜는 의식이 생겨났다. 그래서 하누카를 일명 ‘빛의 축제’(Feast of Lights)라고도 부른다.
마카비 혁명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셀레우코스 왕가는 예루살렘 성전의 관할권을 유대인들에게 이양해 주었고 이로써 마카비 혁명은 일단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유다 마카비와 그의 형제들은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독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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