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삼일운동과 기독교 문화유적

안명애 2015. 3. 1. 17:56

1.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수용된 이래, 기독교는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반 영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는 이제 우리 문화의 살과 피가 되었다. 기독교는 우리 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고난을 받고 있을 때에도 재생의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3ㆍ1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도 기독교가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이 중에서 김창준 목사는 숭실대학 5회 졸업생이다. 기독교학과 학생회는 제4회 기독교문화 유적 답사의 주제를 ‘3ㆍ1 운동과 기독교’로 정하여 지난 2004년 5월 26일(수)부터 27일(목)까지 1박 2일 여정으로 경기도 화성과 충남 천안 일대를 답사했다.

 

2. 제암교회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에 이르자, ‘제암리 3ㆍ1운동 순국유적지 제암교회’라는 큰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제암리 322-4에 들어서니 제암교회와 순국기념관이 보였다. 시청각교육실, 제1전시관(제암리관), 제2전시관, 제암교회, 교회사택, 23인 상징조각물, 23인 순국묘지, 3ㆍ1정신교육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암리 사건은 발안 장날 시위 등 수원 화성지역 주민들의 1919년 3ㆍ1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보복 응징으로 일제가 자행한 만행의 결정판이었다. 검거반은 4월 2일에서 6일, 9일에서 16일까지 2차에 걸쳐 이 지역을 돌며,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들을 방화 습격했다.

대대적인 수사를 벌여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했다. 이 과정에서 제암리사건의 전주곡인 수촌리사건이 일어났다. 수촌리사건은 4월 2일 장안면과 우정면 주민들이 합세하여 벌인 독립만세시위가 그 도화선이 됐다. 2천여명의 면민들이 총을 쏘며 맞서는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고 주재소건물을 방화했다. 일본군 검거반은 4월 5일 새벽 수촌리를 급습하여 불을 질렀고 마을의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 주민 천여명이 3월 30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일제 경찰의 발포로 시위 군중 3명이 사망했다. 흥분한 시위대가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질렀다. 군중들은 주재소를 습격했다. 일본인 43명이 30리밖 삼괴지역으로 피신했다. 아리타 중위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4월 13일 발안에 도착했다. 4월 15일 오후 제암리에 도착한 일본군은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제암교회에 모이게 했다. 미리 명단을 파악하여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아리타 중위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종후 권사로 추정되는 교인대표가 대답했다.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했다. 사격 후 불을 질렀다. 세 사람이 탈출을 시도하여 노경태씨만 살아남았다. 23명이 순국했다. 이 중 10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일본 군인들은 이웃마을 고주리로 갔고 마을 지도자 6명이 순국했다.

이튿날, 수촌리 현장을 확인하러 가던 언더우드 선교사 일행이 제암리 참상을 목격하고 신속하게 외부에 알렸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4월 18일 이래 제암리와 수촌리를 수차례 방문하며 사후 수습을 도왔다. 그는 보고서를 캐나다와 미국에 전달했고.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써서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제암리 일대 독립운동은 일제 무단통치를 종결시키고 식민정책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대외적으로 잔혹한 식민통치의 실상을 폭로하는 계기가 됐다. 우리 민족의 독립 열망과 자주독립정신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전국적 3ㆍ1운동은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민족국가의 맥을 이으며,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이 되게 했다.

복음이 들어온 곳에 교회가 섰고, 교회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기도하며 애국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제암교회에서의 순교는 일제에 항거한 한국 교회의 한 표본이며, 우리 민족의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심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3. 유관순 기념관

 

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252번에 들어서니, 유관순 기념관이 보였다. 이 기념관은 유관순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후손에 전하고, 역사 교육의 장으로 제공하기 위해 개관했다. 전시공간에는 3ㆍ1만세운동 이미지를 청동부조물로 설치했다. 유관순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연출하고 아우내 만세운동 상황을 영상과 함께 재현했다. 옥중 항쟁 모습을 매직비전으로 연출했다. 체험공간과 영상실이 갖추어져 있다.

1902년 3월 15일(호적: 11월 17일)에 천안 병천 용두리에서 태어난 유관순은 기독교학교인 공주 영명학교에서 수학한다.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한 유관순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서울만세운동에 참가한다. 3월 5일 학생단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3월 10일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에 내려가 독립운동을 펼친다. 유관순은 일제 아래서 고통 받는 민족을 구원하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 길이 민족의 일원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관순의 이러한 기독교 신앙 양심과 민족애는 어떤 시련과 탄압도 이겨내는 신념이 되었다. 유관순은 1919년 4월 1일 일본 관헌에게 체포된다. 5월 9일, 6년형을 선고받는다. 6월 30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1920년 3월 1일, 옥중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다. 그 해 10월 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순국한다.

유관순의 민족 독립 운동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신앙에서 애국운동의 열정이 나왔으며,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용기가 발동되었던 것이다.

 

4. 매봉교회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38-6에 도착하자 매봉교회와 유관순 생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의 옛 이름은 지령리인데 1899년 스웨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이 들어왔다. 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 즉 구주라는 복음증거와 농촌계몽, 미신타파, 문맹퇴치, 독립운동을 겸하게 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매봉교회가 참가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침략에 방해가 된다하여 매봉교회에 방화를 일삼기도 했다.

매봉교회는 빼앗긴 나라를 위해 기도하다가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다. 독립만세운동이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기도와 체계적인 조직이었다. 이 운동에 전교인이 참여했다. 집회금지령이 내려졌다. 교회가 불살라졌다. 1967년 이화여고 동창생들이 다시 교회를 세웠다. 현재의 매봉교회는 1998년에 재건축되었다.

매봉교회 옆의 유관순 생가는 기독교신앙과 애국심 고취에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유관순은 유중권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여 개화한 집안이었다. 마을에서 존경과 칭찬을 받는 가문이었다. 유관순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굽히지 않고 관철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유씨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장차 너희들은 부지런히 공부하여 민족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유관순은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기독교 신앙과 학업을 바탕으로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일꾼으로 자라나게 되었던 것이다.

5. 맺는 말

 

기독교가 들어간 곳에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한 영혼이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 변화된 사람은 그가 속한 곳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며, 지도자로서 헌신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민족과 국가를 건실히 세워나가는 이정표의 역할도 한다. 아울러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애국 활동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화성시 제암교회나 유관순 기념관, 그리고 매봉교회와 유관순 생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독교문화 유적이다. 기독교학과 학우들은 답사를 마무리하며, 유익한 대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기독교학과 학우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기독교세계관을 체계적인 지식으로 습득하여 기독교계를 비롯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일꾼으로 나아가 섬기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암교회 교인들과 같은 신앙으로, 유관순과 같은 믿음과 삶으로 우리나라와 세계를 위해 봉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답사를 통해 모든 참가자들이 얻은 소중한 열매라고 하겠다.

 

<참고자료>

 

숭실대 기독교학과 학생회, 제4회 기독교문화 유적 답사 자료집, 2004.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3ㆍ1운동과 한국 교회의 역사 참여, 1989.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개정판),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화성시 제암리 3ㆍ1운동 순국기념관 안내문

유관순 기념관 안내문

제암리 3ㆍ1 순국기념관 홈페이지 www.jeam.go.kr

매봉교회 홈페이지 www.maebong.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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