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한 단어라도 상황이 다르면 다른 의미를 갖는다. 공사 현장에서 벽돌하고 외친다면 동료에게 벽돌을 달라는 뜻이다. 그러나 길에서 벽돌하고 외친다면 통행자가 떨어지는 벽돌에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 뜻이다. 동일한 개념, 주제가 어느 상황(문맥)에서 설명되는지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가르침들 사이 이 면에서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
또 다른 예가 있다. 동일한 속도라도 위치에 따라 속도감은 달라진다. 탄 자동차 안에선 그 차의 속도를, 그러나 마주 달려오는 자동차 안에선 두 차의 속도를 더한 속도를 그리고 나란히 달리는 자동차 안에선 두 차의 차이만큼만 속도를 느낀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라도 다른 상황(문맥)에서 달리 느껴진다.
성경이 허무를 말한다고(전1장) 불교가 말하는 허무주의와 같은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 안에서 소망을 발견한 상태에서 허무를 논했다. 그러나 불교에선 그저 세상사가 그림자 같아 허무하다고 주장할 뿐이다. 단어나 주제가 같다고 어떻게 이 둘의 가르침이 같다고 볼 수 있는가?
요셉, 다윗과 다니엘의 비전과 꿈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에 의해 이끌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근거를 둔 계시들이었다. 그러나 영웅들의 비전은 세속사를 이끄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서 나온 인간의 꿈과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야망이나 비전이란 단어나 개념이 같다고 세상 영웅들을 성경의 인물들과 동일하게 놓고 설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맥(상황) 면에서 성경 예화와 세상 예화 사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같은 단어, 개념 그리고 주제라도 상황이나 위치가 다르면 완전히 다른 가르침을 준다. 이 점에서 성경 본문과 세상 예화 사이 가르침 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 이야기들을 성경 본문을 설명하는 예화로 사용할 수 있는가?
성경 본문을 잘 설명하기 위해 무리 없을 정도의 짧은 예화는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의 가르침을 대체시킬 수 있는 긴 세상 예화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성경의 구속사적 가르침을 세상의 가르침으로 상식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실수는 역사적, 문화적 상황이 동일한 개념을 완전히 다른 가르침으로 만든다는 원칙에 무지한 결과이다.
같은 가르침이라도 어떤 역사적 상황 아래 주어졌는지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이 차이를 알고 성경 본문을 말하기 위해 세상 예화를 면밀하게 사용하라! 그러나 가능하면 금하고 성경 자체가 사용하는 예화들을 이용하여 본문을 설명하라! 예컨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 관계를 설명하는 부부 관계처럼....
성경은 성도의 됨됨이와 행함에서 온전케 하는 목적(딤후3:16-17절)을 위해 기록된다. 성경 저자들도 이 목적에 맞춰 아주 조심스럽게 세상 예화들을 선별하여 본문을 설명한다. 이런 조심성이 성경 해석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아닌 세상의 지혜, 철학, 사상, 상식과 처세술을 전하는 강연자로 전락한다. 주의 이름으로 사역하지만 상급은 전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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