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글 긴여운

기복적 설교에서 윤리 설교로 방향을 전환하라

안명애 2016. 2. 18. 00:02

사복음서가 천국 복음서이며 동시에 제자 양육서라고 예전 설명한 적 있다. 그렇게 주장한 이유는 많은 목회자들이 사복음서를 기록 목적에 벗어나서 제 마음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사복음서를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기록했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시키려 왔다면 구약의 예언은 무엇을 목적하는가? 창조 기사가 이를 잘 밝힌다.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이었다(1:26-28). 이에 실패하자 하나님은 구속을 약속했다(3:15) 그렇다면 예수님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왔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어야 했고 부활, 승천해야 했다. 사복음서가 천국 복음서인 이유이다.

 

 그럼 사복음서는 왜 제자 양육서인가? 예수님의 승천 후 제자들은 이 땅에 남아 계속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을 양육해서 파송해야 했다(3:14-15).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이 4 가지 관계 즉 하나님, 사람, 세상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처신하며 천국 복음을 전했는지 배워야 했다. 이들은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이 누구이며 무슨 목적으로 무엇을 했는지 잘 배웠다. 이 위에 어떻게 사역하느냐를 이들은 배워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묵상자들은 사복음서를 기독론적 관점에서 묵상하지만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선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윤리가 배제된 신학 지식은 병신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들 4 가지 관계에서 어떻게 자신을 처신했는지를 자세히 살펴 예수님으로부터 신앙 삶 자체를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물리학 천재가 강의실 문을 열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이를 본 그의 친구들이 쉽게 문을 열어주며 강의실로 들어갔다. 천재는 머리를 흔들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여느냐는 식의 표정을 보였다. 물리학 천재는 지식으로는 무엇이나 다 아는데 삶에선 바보였다. 지식이 몸으로 체득되지 못해서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위의 물리학 천재와 같지 않은가? 신학 지식만 습득하고 어떻게 신앙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

 

신학이 윤리로 표현되지 못해서이다. 지금까지 강대상에서 신학 강의는 듣지만 어떻게 신앙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선 들어보지 못해서이다. 이젠 사복음서도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도 설교되어야 한다. How가 없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who what은 그냥 죽은 지식일 뿐이다. 주지적 신학의 문제이자 기독교의 비극이며 불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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