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앙인물

조선교회의 1 호 목사~조선의 바울 김 창식 목사

안명애 2015. 3. 24. 08:00


 

   김창식 목사(1857~1929)


   한국개신교회 1호 목사인 감리교 목사 김창식(金昌植 1857~1929.1.9)은 1857년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 생금리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농사일을 하다가 21세 되던 해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머슴, 마부, 지게꾼, 막노동꾼 등을 전전하다가 29세 되던 1886년 박노덕과 결혼을 하면서 비로소 정착생활로 접어든다.


   당시 장안에는 서양 야소교인들이 아이들의 간을 떼어 약을 만든다는 괴이한 소문이 파다하였다. 실은 반 개화성향을 지닌 수구파 세력이 조작한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김창식은 서양인의 야만성이 정말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마침내 미 북감리교 선교사 올링거(F. Ohlinger 1887년 말 내한)의 집에 잡부로 취직을 하여 선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불미스런 행동을 찾고자 하였으나 소문으로 들었던 불측하고 해괴한 일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올링거 목사 내외의 인격과 생활에 감화를 받으며 오히려 그리스도교에 마음을 열게 되었고, 올링거, 아펜젤러 선교사로부터 마태복음을 비롯한 4복음서와 ‘셩경초등문답’ 등의 교리서를 배웠다. 마침내 1890년경 세례 받고 1892년 봄, 미국 감리회 조선선교회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전도인이 되었다. 이후 1893년 올링거가 미국으로 돌아가자, 미국 감리교 의료선교사 홀(W.J. Hall 1891년 12월 내한)의 개인비서 겸 조사가 되어 평양으로 간다. 서문 밖의 어느 기생집을 사들여 진료소를 겸한 예배당을 마련하고, 그해 8월 김창식은 홀과 함께 평양지방에 정식으로 파송되어 순회전도를 시작하였다. 당시 신혼이던 홀이 평양과 서울을 왕래하면서 일을 보는 동안 교회업무를 김창식이 거의 도맡아 하게 된다.


   한편 1894년 5월 수구파였던 평양 관찰사 민병석이 평양에 기독교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서양선교사를 돕던 장로교 한석진 조사와 감리교 교인 8명을 평양관아로 압송하여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을 하였다. 그러나 한석진과 김창식은 “나는 기독교가 옳다는 사실을 안 이상 기독교 신자로 살 것이며 또 복음을 전하겠다.”고 말하여 계속해서 혹독하게 고문을 받고 죽을 지경에 이른다. 이때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미국과 영국 총영사가 조정에 강력하게 항의를 하여 마침내 어명에 의하여 관가에서 이틀 만에 풀려나게 되는데, 이때 마포삼열 선교사가 그 어명을 받아가지고 관가로 뛰어 들어가면서 "여기 왕이 왔소!" "여기 왕이 왔소!" 하며 소리 질렀다고 한다.


   1894년 7월에 청일전쟁이 일어나 평양이 전쟁터가 되었다. 당시 교회당이나 선교사가 운영하던 병원은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피난가지 못한 이들의 은신처였는데, 홀 선교사와 김창식은 남아서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또한 그해 12월 홀 목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평양선교를 도맡아 하는 등, 위기상황에도 변함없이 선교활동을 하여, 전쟁이 끝난 후 오히려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다.


   1896년부터는 노블과 함께 평양이북 지역의 감리교회를 이끌며 그해부터 시작된 신학회에 들어가 4년 과정의 정식 목회자 수업을 받았다. 1899년에는 삼화골로 파송 받아 평양 밖 지역까지 전도하였다. 이후 ‘순행(巡行) 사역자’로 서북지방의 소외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파하는, ‘길 위의 목사’, ‘민중 전도인’으로 알려지게 된다. 열다섯 나이에 집을 떠나 유랑하며 얻은 경험적 지식이 목회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후 17년만인 1901년 5월 14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제17회 미국감리회 조선선교연회에서 스크랜턴 감독의 집도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김기범과 함께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직후 그는 고향인 황해도 수안군에 파송 받아 1년간 활약하다가 신계로 옮겼고, 1904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지방감리사로 임명되어 북한지역 순행목사로 5년간 순회전도에 진력하였다. 1918년 경기도들 1919년 안산구역, 1920년 수원 서지방에서 각각 순행목사로 일했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24년 67세로 정년은퇴하기까지는 황해도 해주지방 순행목사로 활약했다. 은퇴 후에는 외아들(김영진)의 보살핌 속에서 홀 선교사의 아들인 셔우드 홀이 조선에 와서 결핵환자들을 위해 세운 해주 구세요양원에서 지내다가, 1929년 조용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처럼 김창식 목사는 1901년 한국인 최초의 목사가 된 후 25년을 전국을 돌며 125개 교회를 개척하였고 48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평생을 산골과 농촌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고 거리에서 전도하는 등, 전국을 누비며 평생을 방랑길에서 고난과 박해를 겪으면서도 신앙심이 약한 교인과 불신자들을 찾아가 몸으로 그리스도교 교리를 전파하였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가 한국 최초 목사가 되는 신분의 수직 상승을 하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낮은 자’의 자세를 견지하며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의 바울’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 그가 바로 김창식, 조선의 1호 목사이다.

 

 

1901년 5월14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김기범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김창식(金昌植) 목사에 대한 선교사들의 영문 보고서 기록을 보면 종종 그의 이름이 ‘Kim Chang Siky’ 혹은 ‘Kim Chang Siki’로 표기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김창식이’가 된다. 마지막 글자를 ‘Sik’이라 해야 할 텐데 끝에 ‘i’ 혹은 ‘y’가 덧붙은 것이다. 처음엔 인쇄할 때 실수로 알았으나 그렇게 표기된 것이 한 두 번이 아닌 것으로 보아 선교사들은 그의 이름을 ‘김창식’이 아닌 ‘김창식이’로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활자 하나 차이지만 거기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알려진 대로 김창식은 젊어서 고향을 떠나 전국을 방랑하며 양반집 머슴과 마부, 장돌뱅이, 지게꾼 등 안 해본 일 없이 살아온 ‘밑바닥’ 인생이었다. 그렇게 서울까지 와서 남대문 시장에서 막일을 하면서 살던 그에게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들을 유괴하여 노예로 팔거나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렸다. 그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의 집에 ‘위장취업(?)’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1888년 일이다. 그는 선교사 집 문지기로 출발했다. 행랑아범처럼 마당 쓸고 장작 패면서 선교사가 지방 전도를 나갈 때 그가 탄 말을 끌었다. 그러면서 선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요리사로 승격(?)되어 선교사 가족들의 안방 생활까지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식육(食肉)’의 현장을 잡으려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이웃 선교사들의 집도 예의 주시하였다.
그렇게 2년 동안 선교사 집 ‘하인’으로 살면서 집중 감시하였지만 그가 소문으로 들었던 불측하고 해괴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떠돌던 소문이 헛소문인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그의 ‘주인’ 선교사 가족뿐 아니라 주변 선교사들의 행동거지가 그동안 보아왔던 조선의 양반들과 달리 겸손하면서도 권위가 있었다.
언어와 문화는 다르지만 선교사들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하인에 불과한 그를 따뜻한 말과 미소로 대하는 선교사들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선교사들의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알고 싶었다. 기독교에 마음이 열린 것이다.<BR>
그런 그에게 올링거는 한글 쪽복음 <마태복음>을 주면서 “5장부터 읽어보라”고 하였다. 거기서 그는 가난하고, 슬퍼하고, 목마르고,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 복음을 읽었다. 그 때부터 그와 선교사의 대화는 ‘가사 중심(家事中心)’에서 ‘복음 중심(福音中心)’으로 바뀌었다. 선교사들은 그가 복음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는 것을 귀찮다 하지 않고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BR>
지금까지 이런 ‘주인’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선교사처럼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선교사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는 신자가 되었다.
예수 믿고 세례 받은 김창식은 선교사들의 부탁을 받고 전도인으로 나섰다. 1893년 감리교 선교부가 평양선교를 개척하기로 결정하자 그는 선교사 홀과 함께 평양으로 내려가 서문밖에 진료소를 겸한 예배당을 마련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BR>
그런지 1년 후, 수구파였던 평양 관찰사 민병석이 평양에 기독교가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일시에 10여 명 교회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을 가하였는데 대부분 굴복하고 나왔는데 김창식 만은 마지막까지 “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며 버티며 얻어맞아 거지반 죽은 상태에서 선교사들의 항의로 풀려났다.
선교사들이 그에게 ‘조선의 바울’이란 별명을 붙여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후 별세하기까지 그는 바울처럼 전국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이처럼 헌신과 희생의 삶으로 선교사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김창식 목사를 처음 선교사 집에 ‘일꾼’으로 소개한 이는 당시 배재학당 학생이었던 이교영이었다.
여주 양반 출신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서울에 올라왔다가 예수를 믿게 된 이교영이 “어이 창식이, 창식이” 하면서 그를 선교사에게 소개하였던 바, 선교사들도 그 때부터 그를 ‘창식이’ 하고 부른 것이 영문 이름표기에 ‘i’ 혹은 ‘y’가 들어가게 된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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