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래교회와 서상륜 기념비 |
스코틀랜드선교사 로스(Ross)와 매킨타이어(J. MacIntyre)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조선선교에 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1874년 의주사람 이응찬을 만나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자, 그의 친구인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이 고려문에서 만나 최초로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 중 이응찬은 로스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로 일을 하면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 서상륜 |
당시 조선은 대동강 변에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이후 더욱 쇄국정책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로스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는 머지않아 조선에도 선교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을 믿고, 성경번역사업을 위하여 조선청년들에게 투자하면서 성서번역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마침내 로스선교사는 서상륜의 도움으로 1882년 최초로 『로스역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중국 땅 심양에서 한글성경을 발간하였다. 이는 한문에 조예가 깊은 서상륜의 결정적인 역할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고 하는 점에서 로스와 서상륜의 공동번역이라고도 말한다.
그렇게 성경을 번역한 서상륜은 또 하나의 사명을 안고 그가 번역한 누가복음을 안고 압록강을 건너 고향 의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도중에 압록강 국경 관리들에게 적발되었다. 그 당시는 성서 반입이 철저하게 금지되었으나 고향 친구의 도움으로 10권을 챙겨 고향에 오게 되었다. 그는 고향에서 전도에 위기를 느끼면서 동생 서경조와 함께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송천松泉)로 피신하였다. 그는 자기의 가슴 품속에 몰래 숨겨온 성경을 가지고 외가 친척과 인근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전도가 점차 활기를 띠면서 가정집 예배처소에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1883년 한국 최초로 외부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소래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1885년 4월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최초 선교사로 입국하면서 조선 땅에도 본격적인 선교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데 소래교회는 그 이전에 이미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소래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할 때에도 언더우드 선교사가 건축자금을 미국에 가서 모금하여 지원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교회 교인들은 “우리가 우리 예배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아서 하는 것은 본의에도 어긋나며, 후세에 전하는데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정중히 거절하였다. 언더우드는 그 뜻을 존중하면서 서양의 램프등 5개를 교회에 기증하였는데 그 불빛이 얼마나 밝고 환했는지 온 동리를 환하게 밝혔다고 한다. 이렇듯 소래교회는 한국최초의 예배당인 동시에 외국의 원조 없이 자생적으로 세운교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큰 것이다.
한편 1887년 9월27일 언더우드에 의하여 서울에 설립된 최초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창립될 때 참여한 14명은 서상륜이 전도한 소래교인들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 서상륜을 새문안교회의 조사로 세워지면서 피차 동역자가 되어 선교초기 권서로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복음사역에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서상륜은 1925년 12월16일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장례는 장로교총회장으로 치러졌고 장지는 장연군 대탄리에 안치되었다.
그의 동생 서경조는 한국교회최초목사7인 중 한 명이다. 그의 자녀 독립운동가 서병호는 상해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후손으로 서원석(대한성서공회) 서경석(목사) 등이 있다.
후일 언더우드가,‘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추수하러 왔다’고 말한 데서 서상륜의 교회사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목숨을 담보로 이루어진 헌신, 서상륜의 순교자적인 삶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가 있다. 서상륜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입국 이전, 이 땅에 이루어진 사도행전이다. 그의 높은 뜻을 기리는 한국기독교선구자 서상륜과 이수정의 기념비가 용인시 총신대 신대원에 복원된 소래교회 뜰 안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1883,5,16. 최초로 세워진 초가 교회 모습
1884년의 소래교회
최초의 소래교회 (김학수 화백 그림, 100주년 기념관)
1895 두번째 세워진 8칸 기와지붕 교회
1895년 와가교회
1895 두번째 세워진 기와지붕 교회
1895년 와가교회,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사진
두번째 예배당 모습
원래 소래교회는 1883년 5월 16일 서상륜, 서경조 형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솔래(松川理)에 세워진 초가집 예배당으로서 순수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세워진 최초의 교회요, 한국의 뿌리가 되는 교회이다. 이후 1895년에 8칸 기와집 예배당으로 건축 되었으며, 1896년에는 다시 8칸을 증축하여 총6칸 32평이 되었다. 이 교회가 세워진 송천리의 명칭은 순 토박이말로 '솔샘'이었다. ‘솔샘’은 ‘솔내’로 변했고, 다시 그것이 '소래'가 되었는데,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들어간다.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의 작은 마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1883년 5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기록되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이 땅에 들어오기 2년 전의 일이었다. 소래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초기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언더우드가 1887년 초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을 때 처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소래교회 신자들이었다. 또 그해 9월 장로교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 주축이 된 것은 서상륜을 비롯한 소래교회 출신들이었다. 언더우드 등 서양선교사들이 잇달아 이곳을 방문했고 한국에 새로 오는 선교사들은 으레 소래교회에서 한국의 전통과 선교 방법을 익혔다. 일제시대 소래교회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강한 서북지방에서 규모는 작지만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교회였다. 해방 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교회 신자들이 대거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문을 닫은 것을 지난 1988년 총신대 구내에 복원했다. 북한 땅에 있던 약 3200개의 교회 중에서 유독 소래교회만 남한에 복원된 것은 이것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첫 번째 개신교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총신대 양지캠퍼스의 소래교회는 1895년 처음 세워지고 이듬해 증축된 두 번째 예배당의 모습이다. 한국기독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초대교회 믿음의 선배들의 자주적 신앙 전통의 계승과 한국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서 역사의 산교육 현장이 되며, 북한 교회의 수복과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 처소가 되게 하기 위하여 1988년 9월 30일 다시 증축되어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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