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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브레이너드

안명애 2015. 3. 28. 08:36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1718년에 커넥티커트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고 열네 살에 어머니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천성적으로 우울함과 낙담에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늘 아빠, 엄마를 찾으며 울고 슬퍼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740∼1743년의 뉴잉글랜드 대각성운동 기간에 그는 성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흥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아
개인적 구원체험을 얻고자 하여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이 와 닿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구원문제를 앞에 두고 1년 이상을
기도와 금식으로 시간을 보낼 정도로 열렬한 성령파였습니다.

‘주님! 저의 눈을 열어 저의 죄악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해 주십시요!’

때때로 불신 가운데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는 힘써 기도했고 마침내 21살에 개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온 몸과 맘으로 깨닭게 되었으며,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사랑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살고자 결단 하였습니다.

그가 21세에 개종한 후 그의 기도 생활은 더욱 빛이 났기 시작했고,
기도 가운데 얻는 기쁨이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능가한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근심걱정이 밀려올 때면
그는 기도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구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주님을 알아가며 그 은혜를 체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디언 선교사로서의 헌신을 위한 기도.
그는 예일 대학에 진학하여 목회를 준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교수들은 그때 불고 있는 대각성운동에 별로 공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브레이너드가 2학년 때 일입니다.
학생부장이 기도모임 때마다 분위기를 썰렁하게 하자
브레이너드는 그를 은혜가 아주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오해의 소지가 되어 퇴학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제적된 후 브레이너드는 여러 목사들로부터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로서는 예일 대학에 다니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경건생활 가운데 그는 불쌍한 영혼들과
그리스도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래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함으로 나의 인생을 불태우며 살자'
결심하기 시작하여 그의 선교에 대한 헌신은 시작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인디안의 구원을 위하여 뭔가 해야만 한다고 느꼈고
그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생활에 헌신하였습니다.
아침에 기도하고 점심에 기도하고 저녁에 또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24번째의 생일을 금식과 기도로 바치기로 작정할 만큼
기도열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생일에 복음 사역을 준비하려고 예수님처럼 밤이 다하도록
힘써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날마다의 생활을 거의 기도에 파묻혀 보냈습니다.
새벽에, 저녁에, 밤에 그는 홀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때로는
그를 찾아오는 방문객들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적 교만을 자각할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회개의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말을 타고 숲속을 지나다가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새로 헌신하기도 했습니다.
“오! 주님 당신께 나를 드립니다. 나를 받으시고 영혼토록 당신의 것으로 삼으시옵소서!”

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년에는 영광의 세계를 사모하며 이 세상을 속히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모든 관심은 이방인들의 개종뿐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나는 살기를 원한다.”
사도 바울이 품었던 간절한 기도와 소원을 그도 꼭 같이 품었던 것입니다. 

인디언을 위해 기도와 열정을 바친 그는 1743년 인디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인디언들의 친구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디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살았습니다.

브레이너드가 25세 되던 해인 1743년 4월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말을 타고 황무지에 있는 카우나우믹에 갔다.
그곳에 사는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였다.
그들에게서 한 마일 반쯤 가서, 마루도 없는 통나무 집에 짚 더미를 깔고
생활하는 매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묵었다.
내가 인디언들 틈에서 어떤 봉사를 한다거나,
어떤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5월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매우 외로운 황무지에 살고 있다. 영어를 말하며 교제를 나눌 사람은
나의 인디언 통역자 단 한 사람뿐이다.
나는 인간적 처지로 볼 때 외롭게 살고 있다.
내 식사의 대부분은 삶은 옥수수나 옥수수 죽이다. 거처래야 짚 더미 속이다.
내 사역은 어렵고 매우 힘들다. 인디언들은 살 땅이 없다.
지금 사는 곳도 독일인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들이 강압적으로 빼앗아 버렸다.
그들은 불쌍한 인디언의 삶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다.
내가 알기로는 그들은 날 미워하고 있다.
내가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기 때문이다.”

브레이너드는 카우나믹에서 일년간 인디언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하고 나서
뉴욕에 있는 펨버튼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 그의 사역을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그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저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과 함께 일을 했습니다.
그들의 형편에 가장 적합한 선교 방법을 찾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실 그들은 생활 자체가 죄 덩어리였습니다.
사악한 마음과 타락한 성품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에 합당치 못한 형편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고통 당하시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그들에게 알려주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형편에 맞는 몇 가지 기도문을 작성했습니다.
이것을 다시 인디언 말로 번역했습니다.
찬송가 몇 편도 인디언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많은 역경과 난관에 부딪혀 좌절에 빠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인디언들 가운데 힘 있게 역사하는 것을 보고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몇 사람들에게 복음의 역사가 너무나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비참한 형편에 있는가를 스스로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울면서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영적 관심사를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하기도 했습니다.”

첫 선교지인 카우나우믹에서 어려움이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옥수수죽을 먹고 짚더미 속에서 자기도 했으며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온 밤을 숲속에 누워 있음으로 굶주린 늑대들이 침을 흘려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두려움과 고통의 연속된 생활을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잘 이기고 극복해 나갔습니다.
인디안어를 배우기 위해 무인의 정글을 수도 없이 오갔습니다.

그는 때마다 온밤을 깨어 기도했고 믿음의 친구들과
이웃 전도자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기도하느라고 며칠이고
기도에만 열중하기도 했습니다.

점차 그의 믿음과 수고가 인정되어 가장 살기 좋은
아늑한 도시의 목사로 초빙되었지만 그는 인디언 복음화를 위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고자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인디언 양들을 심방하며 복음을 전하느라
광야의 위험을 감수하며 강행군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의 수고가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크로스윅스에서의 성공적인 사역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은혜로운 말씀을 함께 들으려고 친구들을 데리고 온 여인들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친구들을 말씀잔치에 초대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습니다.

한 달 후 그들은 브레이너드 목사님이 감사기도를 드려주기 전에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대단히 영적인 자들이 되었습니다.

해가 지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임했고
인디언들의 회개도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그가 27세 되던 해인 1745년 11월 3일의 일기장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오늘은 인디언 여섯 사람이 신앙을 고백했다.
이 중에는 80세 된 할머니도 있었다.
두 사람은 50세 가량이었는데 인디언 가운데서 악명 높기로 유명했다.
한 사람은 사람을 죽인 적도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술 먹고
싸움질 잘 하기로 악명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는
백성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변화된 확실한 증거를 보일 때까지 나는 수 주일간 그들을 붙들어 주었다.”

11월 4일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집회에는 많은 눈물과 격렬한 흐느낌과 애통이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웃과 친구를 위해서 우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 일에 실패하여 우는 것보다 영적인 문제로 우는 것이었다.
23명의 인디언들이 신앙을 고백했다.”

데이빗 브리에너드는 자기의 인디언 선교 사역을 평가하는 글도 남겼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어느 시점에서 인디언 가운데 일을 시작하신 것이 분명한데
그 시점은 나의 힘이 한계에 도달해 있던 시점이었다.
나의 건강은 말이 아니었고 인디언 선교는 절망적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신 것이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곳 저곳에 사는 인디언들을 부르시고 그들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시고 큰 일을 행하셨는가를 나는 표현할 길이 없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남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
며칠을 지내지 않아 그들은 사방에 몰려들었다.
20마일 40마일이 넘는 곳에서 인디언들이 몰려들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것이었다.
셋째 못된 사람들이 내가 전한 복음을 비방하고 다녔지만 하나님께서
이 불쌍한 인디언들을 그 악랄한 비방에서 지켜주셨다.
기독교를 비방하는 음모가 백인 몇 사람들에 의해서 꾸며졌다.
이 못된 사람들이 인디언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중상 모략을 다하곤 했다.
내가 사기꾼이고 악당이며 그들을 영국에 노예로 팔려는
꿍꿍이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악랄한 술책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간섭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브레이너드는 인디언들의 친구로 한평생을 불살아 버렸습니다.
그는 임종시에도 인디언들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졌는데
인디언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과 사랑은 요나단 에드워즈에게도 미쳤는데
에드원즈는 나중에 인디언들의 구원과
인권과 복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주님 사모와 천국 사모에 사로잡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과 가슴은 항상 주님을 사모하고 천국을 사모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이 항상 주님과 천국을 사모했던 것처럼
브레이너드도 항상 주님과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그의 기도와 일기는 온통 주님을 사모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간절한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아 새 예루살렘이여! 내 영혼이 갈망하노라.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여!
이 땅에서 구속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배울수 없는 그 복된 노래여!
주여, 나 홀로 나그네로 있사오니 이 땅에 아무런 위로가 없는 때문이니이다.
내 영혼은 ‘나의 주여’ 부르짖음으로 기뻐하나이다.
나의 주 내 유일한 사랑, 예수여, 떠나지 마시고,
내 영혼을 받으소서”(1742.4.25).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 났을 때 내 마음은 하나님과 하나 되고 싶은 갈망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천국은 가까이 있었다. 언젠가 나는 평화롭고 축복된 천국에 갈 것을 알았다.
내 영혼은 이미 멀리 날아오르고 있었다.”

(1743.3.7) “죽음이여 오게나 자네의 끈에 입맞추리니.
죽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 겁날 것 조금도 없어.
영원한 곳으로 가는 길일뿐.”(1743.8.23)

브레이너드는 인디언들을 위해서 그의 젊음을 모두 불태우다가
그의 육신은 완전히 탈진해 졌습니다.
1746년 가을에 그는 학생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결핵 때문에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고통으로 인하여 설교도 기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나중에는 피를 토하며 온 모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은 12개월 동안 사랑하는 친구들에 둘러싸인 채 침대에 누워 지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건강관리에 있어서 허점이 있었음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동생에게 선교 사역을 이어주면서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신신 당부하였습니다.

그는 1747년 29세의 꽃다운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생명을 내걸고 하나님 앞에 헌신한 삶을 살았기에 29세란 젊은 나이로
하나님 앞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몇 달 동안 인디언 마을을 떠나 노스햄톤에 있는
요나단 에드워즈의 집에 가서 머물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디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일기를 섰습니다.
그의 마지막 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 영원의 문턱에 서 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나는 지금 영광을 얻기 위해 천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하늘 나라의 한 모퉁이에 서서
모든 영광과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서 이다.
이것만이 나의 부르짖음이요 탄식이요 소원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는 것!
그리고 그를 영원토록 기쁘시게 하는 것!
오직 이것만이 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이다.”

브레이너드는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약혼녀인
요나단 에드워즈의 딸 제루샤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였습니다.
“나는 그대와 차마 이별할 수 없소.
그러나 우리는 행복한 영원을 함께 누릴 것이요.”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영혼은 오늘 하나님의 품에 고이 안긴다.
나는 그와 함께 있기를 그렇게도 갈망해 왔었다.
나는 그의 영광을 바라보고 싶다. 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는 1747년 10월 9일 2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의 설교를 통해 은혜의 소나기가 홍수처럼 쏟아 부어져서
살인과 싸움과 도적질을 밥먹듯이 하는 인디언들의 가슴이 녹아졌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은 모두 고꾸라져서
구툼마우할룸메 구툼마우할룸메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 뜻은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복음을 듣는 양마다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긍휼을 간구했습니다.

그는 은혜의 사역에 대하여 스스로 평가하기를 그의 힘이 한계에 도달해서
모든 인간적 소망이 깨어져 버렸을 때
전능하신 주님께서 역사하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헌신적으로 양들을 섬겼습니다.
날마다 교리문답 식으로 그들의 심령에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신앙을 심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완전히 희생하여 선교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애는
후세에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슴과 생애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1740년대 미국을 휩쓴 대각성운동의 주도자 요나단 에드워드의 심장에
깊은 감동을 끼쳤고 존 웨슬리의 마음에 큰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윌리암 케리와 헨리 마틴 짐엘리오트 선교사의 마음을 움직여서
복음 사역에 종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도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위해, 하나님과의 약속을 위해
복음을 전한 그의 기도와 헌신이 인디언의들의 복음화에 시작이 되었으며
선교에 대한 절실함을 알게 하는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줌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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