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
멜랑히톤은 1525년 신학교수직에 임용되어 생애동안 헬라어를 가르치는 일에 열중했으며, 탁월한 인문학의 능력과 자질에 힘입어 중등교육기관의 설립과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실제적인 교육목표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지향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증거와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문학의 연구가 그리스도의 활동을 이해하는 가운데서 그 목표를 가지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향하는 길은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서 근원(성경)에로 이끄는 것이었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목사와 교사는 견고한 학문적이며 신학적인 교육(양) 없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연설문 “학문적인 생활의 찬양”에서 학문적인 배움은 최고의 삶의 단계로서, 삶을 도우는 학문의 보존과 확산은 가장 거룩한 일이며, 삶에서 가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위라는 것을 증명했다.
2. 말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루터의 종교개혁의 사역 가운데 중요한 관심을 나타낸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적으로 교육을 받도록 하는 일이었다. 대소요리문답서, 새로운 노래들, 독일어 성경의 번역 등은 후대의 세기 동안에도 계속적으로 오늘날까지 크게 작용하는 것들이 되었다. 루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교육에 대한 관점은 만인제사장의 입장에서도 확인된다.(벧전 2:9) 여기서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서 배움이 필요하며, 그 배움은 자신의 믿음과 그 믿음의 근거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루터는 두 왕국론에 대한 이해에서 하나님의 통치방식이 영적으로는 말씀과 성례이며, 세상적으로는 인간이성의 사용을 통해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영적인 통치의 역할에 책임자들로서의 목사들은 성경의 철저한 지식이 필요한데, 그 성경이 기록된 언어(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세상의 다스림을 잘 이끌기 위해서 자유 7과목의 지식과 역사와 수학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고 하였다.
루터는 자녀교육에 대한 문제를 부모의 책임으로도 강조하였는데, 만인제사장적 이해에 따라 자녀에 대해여 부모는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로서 그들의 영혼을 돌보아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3. 훌드라이히 쯔빙글리(H.Zwingli: 1484-1531)
1523년 발표한 종교교육에 관한 글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좋은 집에서 교육 될 수 있는가”는 영혼들이 신앙을 통하여 어떻게 올바르게 교육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1525년 프로페차이(Prophezey)라는 성경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상급학제와 시민생활에 적용되는 성경해석을 시도하고 가르쳤다. 이러한 대중교육은 1559년 칼빈이 제네바에서 설립한 아카데미와 함께 개혁교회의 대학들의 모델이 되었다.
4. 요한 칼빈(Johann Calvin: 1509-1564)
칼빈은 학교와 교육, 또는 학습에 관한 글을 쓴 일은 없지만, 교회 안에서의 교육과 교회를 통한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루터의 방식에 의존되었던 요리문답서를 통한 교육(1537-1542)은 그의 교회법과 신학의 교육적인 성격을 통하여, 그가 의도했던 것이 교육이었음이 분명해지며, 후에 그의 사상을 추종했던 개혁교회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종교의 교육자로서, 주저“기독교종교의 가르침(기독교강요)”을 비롯한 저서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존재를 하나님의 학교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생애동안의 배움의 과정으로 표현하였다. 칼빈의 교육은 하나님의 교육론(Paedagogia dei)으로서 핵심은 조절(accomodatio)이란 개념이다. 이는 택한 백성들을 구원으로 유도하기 위하여, 그들의 이해력에 상응하게 행동하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작용을 전제한 것이다.
칼빈은 교육적인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대한 교육자에 속한 자이다. 그의 업적은 종교개혁을 교육적인 프로젝트로, 그리고 교육적으로 영향을 주는 하나님의 도구로 이해한 바로 그것이었다.
5. 요한 스트룸(Johann Strum: 1507-1589)
1538년에 그는 스트라스부르그 시 의회에 중등교육을 위한 새로운 교육법을 제출하였다. 그리고 세 곳의 라틴학교로 구성된 김나지움의 총장으로 재직하며, 섬세한 학교 프로그램을 발전시켰으며, 학교에서 요구되는 교재를 집필하였다, 후에 칼빈이 제네바에 아카데미를 설립한 것은 역시 스트룸의 영향으로 평가되고 있다. 1566년 그의 김나지움은 아카데미로 평가되었고, 1621년에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528년 루터파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그의 인문주의적 기본입장이 의심을 받게 되어 김나지움의 총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스트룸의 의미는 독일 남부지역과 스위스 지역에서 새로운 프로테스탄티즘의 교육에 대한 호감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에 있다. 즉 그의 학교조직과 교수학에 대한 관점들은 말씀의 가장 참된 의미의 학교를 만드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6. 볼프강 라트케(W.Ratke: 1572-1635)
1642년 그의 영향은 고테르(Gothaer)의 “학교방법론”(Schulmethodus)에서 가장 분명하고,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해석방식인 “교수법”(didactia)이 문서회 되고, 그러한 교수법에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1612년에 발표된 프랑크프루트의 기념물이며, 인쇄되지 않은 글 “도판”(Tafelwerk)이 있다.
라트케는 기독교교육적으로 루터가 남긴 교육적인 우산에 집착하였고, 요리문답교육과 기도와 예배를 통하여 신앙을 배우고 경험하게 하는 방식을 발전시켰다. 물론 루터가 번역한 성경에 의한 성경공부를 매우 강조하였다.
7. 필안드로폰과 계몽주의 신앙교육
1762년은 교회의 “요리문답교육방식”에 하나의 변화를 불러일으킨 해로 이해된다. 당시 루소의 “에밀 또는 교육에 대하여”는 20세기 교육개혁과 비교할 수 있는 교육운동을 일으켰다. 루소의 교육학은 신체적이며 정신적인 아이의 성장발전에서 출발되는 변화였으며, 이를 지지하고 수용하는 전제에서“박애주의”(Philanthropinismus)의 교육운동이 일어났다. “박애주의”란 1774-1793년 이후에 독일 데사우에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단체의 학교들을 불렀던 이름이다. 박애주의의 창시자들은 바세도브와 잘쯔만이었다.
신앙의 교리문답법은 전통적으로는 가정의 아버지가 요리문답서를 질문하고, 성찬에 참여를 허용하기 전에 공적으로 목사를 통하여 신앙테스트를 받았는데, 박애주의자들은 아이의 자연적인 종교이해에 따라 신앙의 교리적인 체계를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요리문답서를 요구하였으며, 교리교육방법은 더 이상 신앙을 시험하는 일이 아니라, 자연적 상태로서 아이의 종교가 되도록 하기 위한 방법론이 환영되었던 것이다.
8.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1509-1670)
1631년에 발표한 “보헤미아 교수학”은 교사들에게 교육정신과 교수방법에 도전을 주는 유명한 책이었다. "범교육학"(Pampaedia)에서는 인간의 생애를 7단계로 구분하여 전 인류를 교육하려는 평생교육과 전인교육론을 다루고 있다. 범지혜(Pansophia)를 배우게 하려는 범교육론은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는 실천신학이며, 교육목회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평생교육과 전인교육의 교육과정론으로 이해된다.
코메니우스의 교육론은 근본적으로 성경과 신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교육적인 통찰에 큰 의미를 제공해 준다고 할 것이다. 특히 “인간사의 관계개선에 대한 보편적인 제언”이라는 책의 발견으로 그은 20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으며, 현대교육학의 아버지로서, 교육신학자, 실천신학자로 새롭게 평가되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의 교육신학적인 관점들은 교육이론의 배열 원리로서 인간의 삶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게 드러나며, 가르침과 배움의 기술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유아기에 있는 아이들의 종교적인 교육의 가능성을 제시해주었으며, 자연의 모방으로서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교육적으로 교육과 신학을 분리시켜 놓은 계몽주의의 모순을 회복하고, 그는 종교와 교육이 다시 통합적인 시각에서 새롭게 회복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고 있다.
9.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H.Franke,1663-1727)
프랑케의 공적활동은 글라우카에서 사회교육적인 일에 관심을 두고 심혈을 기울여 영적으로 사람들을 돌보기로 시작되었다. 그전에 프랑케는 함부르크의 가난한 자들의 학교에서 처음으로 간략한 학습의 행위를 경험하였다. 글라우카의 교회생활에서 프랑케는 1693년에 모든 가정들에게 주일을 거룩한 날로 보내는 방법을 가르치려는 책자를 나누어 주었다. 토요일 저녁은 주일준비를 위하여 매일의 저녁 기도시간을 갖도록 권고한다. 그 일은 먼저 목사관에서 시작되어, 후에 신앙학습시간과 함께 연결하여 교회 안에서 계속 유지되었다.
1692년에는 어린이 양육의 물음에 대하여, 1693년에는 아른트의 참된 기독교에 대하여 주간설교를 행하였다. 교회의 개혁은 내용적으로 그리고 형식상으로도 교육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교회와 신앙교육과 관련하여 이러한 교육화 작업은 역사적으로 할레에서 일어나 경건운동영성의 열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0.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
루소는 “에밀”에서 아이의 교육과정을 제시한다. 1-5세까지는 신체의 성장, 5-12세까지는 감관의 발달, 12-15세까지는 두뇌의 발달, 15-20세 사이에 종교적인 마음에 관한 것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거나, 적어도 신인동형인 이해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의 생각을 모방하여 흉내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루소는 교회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요리문답교육은 전적으로 거절하였으며, 아이들의 조기 신앙교육을 강조했던, 루터, 코메니우스, 프랑케와 정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종교교육은 감정형성의 기간을 지나 청소년 나이에서 시작하게 하고 있으며, 신앙고백도 청소년 나이에 이루어지게 하는 합리주의에 의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1. 크리스찬 곧힐프 잘쯔만(Ch.G.Salzmann,1744-1811)
잘쯔만의 종교교육에 대한 의도와 방법은 1)성경의 역사이야기, 2)경험된 신앙, 3)자연적인 종교, 4) 요리문답교육의 4단계 교육과정에 나타나있다. 그의 교육의 목표는 “성향”(Gesinnung)을 형성하게 하는 일에 두었다. 그의 성향교육론은 일반적인 것에서 나이에 적절한 종교적인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종교를 보편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나이에 상응하게, 개체의 발전에 적합하게 배운다고 본 것이다. 이런 잘쯔만의 종교교육의 관점은 신앙의 발달을 교수방법적으로 취하는 상황에서 보면, 현대종교교육의 선구자였다고 볼 수 있다.
잘쯔만의 종교교육은 1) 아이는 성장과 발달하는 과정에 있다. 2) 종교란 개념은 지적인 이해 대신 강한 감성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3) 교사가 어떻게 신앙을 가르치고 배우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교수방법론을 제안하였다. 성경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먼저 교사는 아이의 본성에 대한 심리적인 통찰이 요구되며, 그 심리적인 경험을 전제하여 가르칠 것을 제시하였다. 그는 현대적으로 볼때 학생중심의 교육론, 또는 소비자 중심의 교육을 말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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