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앙인물

성경번역가 이 수정

안명애 2015. 4. 14. 20:39

이 수 정

김 경식 목사

   1882년 9월19일.제물포항을떠나는 배(明治丸)의 갑판 위에는 일본 수신사로 가는박영효 일행과 함께 이수정(1842~1887)이 타고 있었다.정부의 관리였던 그는 1882년 임오군란 때 위기에 빠진민비를 구한 공로로 고종황제의 특별배려를 받아 일본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그는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친구 안종수(安宗洙)의 말을 떠올렸다.“…예수교는 사교가 아니야. 산상수훈만 보아도 평등주의 사상이잖아.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며 형제라는 거야. 서구의 열강들이 모두 기독교문화 위에 세워진 나라들이지…

   ” 도대체 기독교가 뭐길래 그 친구가 그렇게 미쳐 있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 초기 한국기독교 선교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리라고 전혀 생각치 못했다.

   그는 배가 요코하마항에 도착하자마자 안종수가 소개한 농학자 츠다 박사의 집을 방문했다. 이수정의 유학 목적은 새로운 농사법을 연구해 농업조국의 미래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독교인이었던 츠다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기독교에 빠져 버렸다. 농학을 논하고자 했던 자리는 기독교를 토론하는 자리로 바뀌었고 츠다 박사로부터 한문성서를 얻어 성경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결국 그는 1883년,일본에 건너온지 7개월만에 도쿄 노게스죠교회에서 미국북장로회의 일본인 녹스 선교사와 일본인 야스가와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그 당시 조선에서는 기독교 신앙과 전파를 금지하고 있을 때였다.

   그해 5월8일부터 5일 동안 `일본전국기독교도대친목회'가 열렸다.이수정은 흰도포를 차려입고 정자관을 쓴 근엄한 조선 선비의 모습으로 참석해 최초의 한국어 공중기도로 기록되는 대표기도를 했다.뿐만아니라 집회 둘째날 요한복음 15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공개적인 신앙고백까지 했다.

   이수정은 금단의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최선의 방법이 그 나라 말로 성경말씀을 담아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때마침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로 있는 루미스 목사가 그에게 한국말로 성경을 번역해 줄 것을 요청했다.조선선교를 위해 한글성경의 제작이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이수정은 한국의 양반식자층을 의식했다.한문문장에 `이두'식 `토(吐)'를 달아 한국어 어법에 맞게 읽도록 한 것이다.이 방식을 적용해 만들어진 성서가 이른바 `현토한한신약성서'이다.그의 성서사업은 한국의 유식자 계층과 일반 평민을 함께 염두에 둔 합리적인 계측이었다.

   성서번역 사업은 그 자체로 초기 한국교회 복음수용사의 중요한 일획을 점유하고 있다.이 `현토한한신약전서'는 이후 한국의 국한문혼용성서의 번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글성서번역의 첫번역 대상은 마가복음.이 책은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초기 한국 복음선교사들이 입국할 때 가지고 들어온 성서로 초기 공식적인 한글성서의 역할을 했고 이후 한국선교사들에 의해 조직된 성경번역위원회에서 간행된 한글성서의 기초가 됐다.

   이수정은 이에 힘입어 신약성서마태전,신약성서마가전,신약성서누가전,신약성서요한전,신약성서사도행전을 1883년 탈고해 84년 미국성서공회의 자금지원으로 요코하마에서 인쇄 간행했다.

   이수정은 성경번역과 함께 동경에 와서 공부하는 한국유학생들과 거주하는 교포들을 전도했다.1883년 가을에는 이수정이 주재하는 한국인 주일학교가 발족됐다.1884년에는 한국인 교회가 창립돼 그는 선교사의 역할을 했다.1883년 7월 12월 두번이나 미국교회에 한국의 선교사 파송 청원서를 보냈고 선교잡지에 한국선교에 대한 논문도 여러차례 기고했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에 선교사가 파송되기 전에 미국에서 직접 복음이 전해지길 소망했다.

   그러나 이수정의 일본에서의 활동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임오군란 후 득세한 민비파 중에서도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이끄는 보수파에 속해 있었다. 일본에 오기 전까지 그는 보수파의 대변자로 김옥균 박영효가 리더인 급진파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양파는 2년 후 갑신정변이라는 피를 보는 극한 상황으로까지 치닫는다.

   3일천하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김옥균 박영효 등 주도자 9명이 일본으로 망명해 왔다. 조선 당국은 이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고자 대표단을 파견,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했다. 본국에서는 청나라를 업고 민영익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민영익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이수정은 곤혹스러웠지만 대표단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옥균 일파는 그런 그에게 두번씩이나 자객을 보내 암살을 시도했다.

   1886년 5월28일 이수정은 본국으로부터 귀국 종용을 받고 몇몇 유학생들과 함께 귀국길에 오른다.

   일본의 비호를 받으며 망명해 있는 개혁파 인사들과 유학생들을 분리시키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또 당시 국법으로 금하고 있는 기독교를 믿고 유학생들에게 전파한데다 한글성경을 번역까지 하였다는 문책도 귀국조치의 한 이유로 추측되고 있다.

귀국후 이수정은 곧 죽는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세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자연사했다는 것이고, 둘은 자객의 칼에 찔린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순교했다는 주장이다.

   순교설은 귀국 즉시 체포 처형됐다는 것이다.갑신정변전까지 김옥균과 일본에서 교류한 까닭에 개화당 일파로 몰려 처형당했다고 하고 국가에서 금하는 기독교를 믿고 성경을 번역하고 전도한 까닭에 처형을 당했다고도 전해진다.

   또 일본에 있을 때 자객의 칼에 찔린 후유증으로 병석에 있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이수정의 귀국길에 동행했던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이수정이 귀국 후 처형되지 않고 칼에 찔린 상처가 회복되자 고종으로부터 쌀과 돈을 하사받았다는 글을 남기고 있다.

   기독교사학자들은 이수정이 당시 국법이 엄금한 기독교를 믿고 이를 유학생들에게 전했을 뿐아니라 성경을 번역한 큰 죄를 범했기에 죽음을 당한 쪽에 무게를 두는 쪽이 많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현시점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기독교사적으로 한반도가 암흑에 잠겨있던 한 시대에 한국선교와 한글성경번역의 개척자로서의 순교자적인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그가 그토록 혼신을 다했던 한글성경은 한국 기독교 1백10년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

   

이수정의 개종과 최초 세례자

이수정은 임오군란(1882.6.9)의 위기에서 민비를 충주로 피신시켰다가 무사히 환궁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에 명성황후는 생명의 은인인 이수정에게 벼슬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대신 일본의 신사

유람단 2진에 편승하는 고종의 특혜를 입어 박영효의 비수행원으로 일본행에 오른다.

그리고 일본에서 농학자인 쓰다젠을 만남으로 생의 놀라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쓰다젠은 이수정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며 공자의 빛이 이 방안을 비취는 등불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분의 빛은 이 세상을 비치고

도 남는 태양보다 더 밝고 위대한 빛이라고 소개하였다.

성경을 읽다가 예수를 영접한 이수정은 7개월 만에 야스까와 목사로부터 엄격한 세례문답을 거쳐 1883년

4월 29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의 입회아래 로월정교회에서 야스까와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아 조선

사람으로는 최초 세례교인이 되었다.

 

최초 한글성서번역

이수정의 꿈은 조선도 복음을 받아들여 일본처럼 개화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한자로 된 성경을

조선의 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번역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루미쓰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마침내 1884년 12월에 한글성경 마가복음서

1,000부를 발간하였는데 이것이 한국기독교역사상 최초로 번역된 한글성경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한국선교사로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디딜 때 그 성경을 들고 들어왔

는데, 이는 세계선교역사에 유래가 없는 역사적이고도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선구자 이수정 기념비

 

기념비 사진

 

기념비에 새겨진 사진  

1883년 이수정이 일본 기독교도 친목대회에 참석한 후 찍은 기념 사진이다. 아래줄 가운데 한복을 입은 이가 이수정 선생이다.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은 일본에 유학중인 국비유학생30여명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면서, 1884년 7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에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루미쓰 선교사의 번역으로 『미셔너리 리뷰 오브 더 월드(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라는 미국선교잡지사에 보내졌고, 그의 간절한 호소는 미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마침내 미국의 실업인

맥 윌리엄스가 조선선교에 쓰라고 5,000달러를 보내겠다고 연락을 하였으며 최초 미국방문 을 하던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이 시카고, 워싱턴을 시찰할 때 동행하였던 감리교 목사 까우처 박사도 2,000달러를 흔쾌

히 내놓겠다는 편지를 감리교선교사 맥클레이에게 보내오기도 하였다.

   

▲ 총신대 신대원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

   "한국기독교 선구자 이수정"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손짓하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바울의 선교로 유럽에 찬란한 기독교문화를 꽃피

울 수 있었던 것처럼, 이수정은 ‘조선의 마케도니

아 사람’ 의 역할을 함으로 한국기독교역사의 빛

나는 초석을 놓았다.

 

마침내 총신대학교 신대원캠퍼스 안에

“한국기독교 선구자 이수정” 의 기념비가

건립되어 그의 자랑스러운 업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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