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앙인물

존 위클리프

안명애 2015. 3. 20. 19:21

개혁의 선구자 위클리프

 

종교개혁 이전에는 극히 적은 부수의 성경밖에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완전히 없어지도록 허락지 아니하셨다. 성경의 진리가 영원히 숨겨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감옥의 문과 철문을 열어서 당신의 종들을 쉽게 해방시켜 주실 수 있었던 것처럼 그분께서는 생명의 말씀도 쉽게 해방시킬 수 있으셨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감추인 보화를 찾듯이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성령의 지도를 받고, 비상한 흥미를 가지고 거룩한 말씀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빛을 받고자 하였다.

그들은 모든 것을 분명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오래 묻혀 있었던 많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늘의 사자들로 파견되어, 오류와 미신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오랫동안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얻으라고 부르짖었다.

 

왈덴스인들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유식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언어로 여러 시대 동안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이 번역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국어로 된 성경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세상은 깊은 밤중을 지냈다.

흑암의 시대는 지나가고, 많은 나라들에서는 날이 새는 징조들이 나타났다.

 

14세기에 영국에서 종교개혁의 샛별이 나타났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영국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국을 위한 개혁의 선구자였다.

그가 허락을 받아 로마교에 제기한 큰 항의는 결코 침묵시킬 수 없을 것이었다.

그 항의는 마침내 개인과 교회와 국가의 해방을 초래하게 될 투쟁을 빚어냈다.

 

 

위클리프의 청년 시대

 

위클리프는 고등 교육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에 이미 놀라운 재능과 학식뿐만 아니라 그의 열성 있는 신앙으로 명성이 높았다.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그는 모든 방면의 학문에 통달하고자 애를 썼다.

그는 스콜라 철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교회법과 국법, 특히 자기 나라의 법률을 공부하였다.

이와 같이 닦은 청년 시대의 교육이 후년에 가서 그 가치를 크게 드러내었다.

 

그는 당시의 사변 철학(思辨哲學)에 정통하였으므로 그 오류를 지적할 수가 있었고, 국법과 교회법을 공부하였으므로 국가와 종교의 자유를 위하여 크게 활약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은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지적 훈련을 쌓았기 때문에 학자들의 수법(手法)도 알고 있었다.

 

그의 천부(天賦)의 재능과 깊고 넓은 지식은 동료들과 원수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투사가 당시의 국내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첫째가는 사람인 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있었고, 그의 원수들은 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약점을 폭로함으로 감히 개혁 사업을 멸시하려고 하지 못하였다.

 

위클리프는 대학에 있을 때 성경 연구를 시작하였다.

초기인 당시에는 성경이 고어(古語)로만 되어 있었으므로 학자들은 진리의 근원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나 무식한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 길이 막혀 있었다.

그와 같이 개혁자로서의 위클리프의 장래의 사업에 대한 길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학식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으로 그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큰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 진리를 가르침으로, 그들은 진리의 지식을 전파하였고, 다른 사람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도록 인도하였다.

 

위클리프는 성경 연구에 뜻을 두고 학교에서 학과를 공부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그것을 연구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스콜라 철학이나 교회의 가르침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항상 부족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이전에 얻지 못했던 것을 찾아내었다.

거기서 그는 구원의 계획을 깨달았고,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업에 바치고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전파하기로 결심하였다.

 

 

폐습의 타파(打破)

 

위클리프는 후세의 다른 개혁자들처럼 그의 사업의 초기에는 자기가 어디로 인도될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는 고의적으로 로마교에 반대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리에 투신하게 되자 그는 필연적으로 거짓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법왕권의 오류가 분명해지면 질수록 더욱 열렬하게 성경의 교훈을 설명하였다.

그는 로마교가 사람의 유전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을 보고 성경을 저버린 신부들을 담대하게 질책하고 성경을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과 성경의 권위를 교회 안에서 다시 한 번 확립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재간 있고 열성 있는 교사요 웅변적인 설교자였으며, 자기가 전한 진리를 자기의 일상 생활로써 실증했다.

 

성경 지식, 그의 논증의 설득력, 그의 깨끗한 생애, 그의 변함없는 용기와 성실성 등은 일반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다. 그러므로 로마교에 편만한 불법을 눈으로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래의 신앙에 불만을 가졌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위클리프가 밝히 제시한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그 개혁자가 그들 자신들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고 심히 분노하였다.

 

위클리프는 오류를 발견하는 데 예민한 사람이었으므로 로마교의 권위로 승인한 여러 가지 악폐에 대하여 기탄없이 공격하였다.

 

그는 국왕의 왕실 목사로 재직할 당시에 법왕이 영국 국왕에게 요구하는 조공에 대하여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에 섰으며, 법왕이 세속적 통치자를 지배하는 권위를 가지는 것은 이성과 계시에 어긋나는 일임을 보여 주었다.

 

법왕의 요구는 심한 의분을 일으켰었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그 나라의 지도층 인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왕과 귀족들은 속권에 대한 법왕의 요구를 부인하고 조공의 지불을 거절하는 일에 결속하였다.

 

이와 같이 영국에서는 법왕 최상권에 효과적인 타격을 입혔다.

 

 

승단(僧團)의 부패와 타락

 

이 개혁자가 오랜 시일을 두고 단호한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온 또 하나의 악폐는 탁발승단(托鉢僧團) 제도였다.

 

이 탁발승들은 영국 안에 너무 많이 있었으므로 국가의 번영에 큰 장애가 되고 있었다.

산업, 교육, 도덕이 모두 그 쇠퇴의 영향을 입고 있었다.

 

승려들의 게으른 생활과 구걸은 사람들에게 재정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주었을 뿐 아니라 유용한 노동을 멸시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청년들은 부도덕하고 타락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탁발승의 영향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은둔 생활(隱遁生活)에 몸을 바치도록 권유를 받았다. 그들은 부모와 합의하지도 않고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들의 명령을 거스르고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초대 로마교의 어떤 교부(敎父)는 자녀로서의 사랑이나 의무에 대한 의리보다도 수도 생활(修道生活)이 더욱 중요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비록 너의 아버지가 너의 문 앞에 누워서 울고 슬퍼할지라도, 너의 어머니가 너를 낳았던 몸과 너를 젖먹이던 가슴을 보일지라도, 너는 그들을 발로 짓밟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로 곧장 달려가야 한다.” 후일에 루터는 이에 대하여 이런 “무서운 비인도적 행위는 그리스도인과 사람의 행위라기보다는 차라리 이리나 폭군의 행위”(Barnas Sears, The Life of Luther, pp.70, 69)로 생각된다고 말하였다.

 

이런 일들이 자녀들의 마음을 부모에 대하여 무정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옛날 바리새교인들처럼 그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가정들은 황폐되었으며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과의 교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심지어 대학교의 학생들까지도 승려들의 거짓된 말에 속아서 그들의 대열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런 후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애를 해롭게 하고 부모에게 슬픔을 안겨준 것을 알고 후회하게 되었으나 일단 올무에 단단히 걸린 다음에는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없었다.

 

많은 부모들은 승려들의 영향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아들들을 대학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문의 위대한 중심지에 모여드는 학생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학교들은 쇠퇴하여 갔고 무지(無知)는 편만하게 되었다.

 

법왕은 승려들에게 사람들의 자복을 듣고 용서해 주는 권세를 주었다.

이것이 또한 죄악의 큰 원인이 되었다.

 

승려들은 그들의 사복을 채우기 위하여 사람들이 어떠한 죄악을 고백하든지 곧 사면하여 주므로 그 결과로 가장 악한 죄악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병자와 가난한 자들은 돌아보지 않으면서 마땅히 그들의 궁핍을 제거하는 일에 쓰여져야 할 선물들은 승려들에게로 넘어갔다.

 

승려들은 위협으로 사람들의 시여(施與)를 강요하였고, 그 일을 거절하여 기부하지 않는 자에게는 불온한 말을 하며 비난하였다.

 

표면상으로는 빈곤하다고 말하지만, 승려들의 재산은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그들의 훌륭한 저택과 사치스러운 식탁은 백성들의 빈곤을 더욱 심하게 해주었다.

그들 자신은 향락과 사치에 빠져 시간을 보내면서, 기괴한 이야기와 옛 전설과 백성들을 경박하게 만들어 주는 농담들밖에 할 수 없는 무지한 사람들을 그들 대신 보내어 사람들을 더욱 완전히 승려들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신적인 일반 사람들은 그러한 승려들을 지지하고, 법왕의 절대권을 인정하고, 성도를 숭배하고, 승려들에게 선물을 드리므로 종교적 의무를 완전히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함으로 천국에 들어가기에 넉넉한 자격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학식 있고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탁발승의 제도를 개혁하고자 수차 시도하였으나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예민한 통찰력을 가진 위클리프는 그 제도 자체가 거짓된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선포하면서 악의 뿌리를 공격하였다. 토론과 의문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승려들이 법왕의 면죄부(免罪符)를 팔면서 각처로 돌아다니는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과연 돈으로 죄사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로마 법왕에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죄사함을 구하여야 할 것이 아니냐고 질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탁발승(托鉢僧)들의 탐욕에 놀랐다.

 

그들은 “로마의 승려와 신부들이 암(癌)처럼 우리를 좀먹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으면 백성들은 멸망할 것이다”(D’Aubigne, b.17, ch.7)라고 말하였다.

 

구걸하면서 다니는 그 승려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감추기 위하여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백성들의 자선에 의하여 생활하였다고 주장하므로 그들은 구주의 모본을 따라가고 있노라고 하였다.

 

그와 같은 주장은 그들의 사업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기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어떤 일보다 로마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바로 로마교가 숨기고자 하는 진리의 근원을 찾아 나아가게 되었다.

 

위클리프는 탁발승단을 반대하는 소책자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그들과 논쟁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을 성경과 그 저자 되시는 하나님의 교훈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법왕의 사면하거나 파문하는 권세가 보통 신부 이상의 권세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정죄의 선고를 받지 않는 한 아무도 참으로 파문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일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속박하기 위하여 법왕이 제정한 영적 및 세속적인 거대한 조직체를 파괴하는 데 있어서 더할 수 없이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영국 국왕과 위클리프

 

위클리프는 로마 법왕의 침략적 세력에 대항하여 영국 국왕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다시 부름을 입었다. 그는 국왕의 사신이 되어 네덜란드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법왕의 사절들과 회의를 하였다.

 

거기서 그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승려들과 교제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그들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영국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장래 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많이 배웠다.

 

이 법왕권의 대표자들을 통하여 그는 그 교직 정치(敎職政治)의 참된 성격과 목적을 알았다.

 

영국에 돌아간 후에 그는 종래의 가르침을 더욱 담대하게 되풀이하였고, 더욱 큰 열성으로 탐욕과 교만과 기만이 로마교의 신(神)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는 자기가 저술한 소책자에서 법왕과 법왕의 모금자(募金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비를 빼앗고, 해마다 수천 마르크의 돈을 성직 매매의 저주받은 이단에 불과한 성물과 신령한 행사를 위하여 빼앗아 가며, 모든 그리스도국으로 하여금 그 이단을 찬동하고 지지하도록 만든다. 참으로 우리나라에는 금으로 된 거대한 산이 있는데 지금껏, 그것을 가져가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저 교만하고 세속적인 신부라는 모금자가 가져가고 있으므로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산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나라에서 돈은 가져가고 성직 매매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만을 남겨 놓기 때문이다”(John Lewis, History of the Life and Sufferings of J.Wycliffe, p.37).

 

위클리프가 영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그는 칙명(勅命)으로 루터워드의 교구장(敎區長)이 되었다. 이 사실은 적어도 국왕이 그의 솔직한 말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증해 주는 일이었다. 위클리프의 감화는 긍정의 태도를 결정하고 국민들의 신념을 형성하는 일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곧 법왕의 진노와 위협이 그에게 다가왔다.

대학과 국왕과 감독들에게 보내는 세 가지 교서가 영국으로 급히 전달되었다.

그 내용은 모두 그 이단의 교사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즉각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이었다(Augustus Neander,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Religion and Church, period 6, sec.2, pt.1, par.참조).

 

이 교서가 하달되기 전에 이미 감독들은 격분한 나머지 위클리프를 법정으로 소환했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가장 세력 있는 두 왕족이 그를 동반하여 법정에 임석하였고, 군중들이 법정 밖을 에워싸고 마침내 법정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소동까지 일으켰으므로, 재판을 진행하던 법관들도 이를 두려워하여 심문을 잠깐 중지하고 그를 놓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감독들이 나이 많은 에드워드 3세로 하여금 그 개혁자를 배척하도록 하고자 꾀하였으나 얼마 후에 그 왕은 죽고, 전에 위클리프를 보호하던 이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서가 도착되자 이단자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라는 엄한 명령이 온 영국에 선포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분명히 화형주(火刑柱)를 의미하였다.

 

위클리프는 오래지 않아서 반드시 로마의 보복의 희생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옛날의 노독 중의 한 사람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라”(창 15:1)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손을 펴사 당신의 종을 보호하셨다.

 

죽음이 다가왔으나 그 죽음은 개혁자에게가 아니고 도리어 개혁자에게 죽음을 선고한 법왕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레고리우스 Ⅱ세는 죽었다. 그러므로 위클리프를 심문하기 위하여 모였던 교직자(敎職者)들은 부득이 산회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섭리와 개혁 사업의 발전

 

하나님의 섭리는 여전히 여러 사건을 지배하여 개혁 사업이 발전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레고리우스 법왕이 죽은 후에 두 법왕이 대립하여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각각 자기가 절대로 무류하다고 공언하고 사람들의 복종을 요구하였다.

 

두 사람은 각각 자기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소집하여 상대편에게 도전하게 하고,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는 심한 저주를 하는 한편, 자기를 지지하는 자에게는 하늘에서 보상을 받을 것을 약속함으로 자기를 지지해 주기를 강요하였다.

 

이러한 사태로 말미암아 법왕권의 세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두 파는 각각 있는 힘을 다하여 상대방을 공격하였으므로, 그 틈을 타서 위클리프는 얼마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서로 저주하고 비난하는 투쟁이 두 법왕 사이에 전개되었고, 각자의 주장을 세우기 위하여 유혈 참극까지 벌였다. 교회 안에는 범죄와 추문이 차고 넘쳤다. 이러는 사이에 개혁자 위클리프는 루터워드에 은거하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 법왕들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평화의 임금이신 예수님께로 돌리고자 애를 썼다.

 

온갖 투쟁과 타락을 자아낸 분열은 사람들로 하여금 법왕권의 진상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어 도리어 개혁의 길을 열어 주었다.

 

위클리프는 자기가 저술한 “법왕의 불법”이란 소책자에서 서로 상대편을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하고 있는 두 승려의 말이 참말인지 생각해 보라고 백성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악마와 같은 그들 중의 하나로만 통치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고…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더욱 쉽게 이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둘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셨다”(R.Vaughan, Life and Opinions of John de Wycliffe, vol.2, p.6)고 말하였다.

 

위클리프는 그의 주님처럼 빈곤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루터워드의 교구 안에 있는 비천한 백성들에게만 빛을 전하는 것으로 흡족히 여기지 않고, 영국의 각 곳에 전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그 목적을 위하여 진리를 사랑하며 그것을 널리 증거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아끼지 아니하는 단순하고 경건한 선교사들로 구성된 하나의 조직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어느 곳이든지 가서 시장(市場)에서나 대도시의 거리에서나 시골의 길가에서 설교하였다.

그들은 늙은이들과 병든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은혜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위클리프는 옥스포드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서 그 대학의 강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의하였다.

그는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에게 진리를 너무도 성실하게 소개하였으므로 복음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위클리프의 온 생애를 통하여 최대의 사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는 “성경의 진리와 의미”라는 저서에서 자기가 성경을 번역하여 영국 국민으로 하여금 모두 자국어로 하나님의 놀라운 업적을 읽을 수 있게 할 뜻이 있다는 것을 표명하였다.

 

 

영역 성경의 완성

 

그런데 갑자기 그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아직 60세도 안 되었지만 끊임없는 수고와 연구와 원수들의 공격이 그의 기력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는 신속히 노쇠하게 되었다. 그는 위험한 병에 걸렸다. 이 소식은 탁발승들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야 그가 교회에 대하여 범한 악행을 깊이 뉘우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자복을 듣기 위하여 그가 거처하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네 종교 단체에서 온 대표자들과 네 사람의 정부의 관리들이 임종이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는 그의 주위에 모여 있었다.

 

“그대의 죽음이 임박하였으니 이제 과거의 모든 죄과를 뉘우치고 일찍이 우리에게 손해를 주기 위하여 말한 모든 것을 우리 앞에서 취소하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그 개혁자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시중드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침상에서 일어나, 신앙의 취소를 들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처럼 자주 떨게 해주었던 분명하고 큰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너희 탁발승들의 악행을 공개할 것이다”(D’Aubigne, b.17, ch.7).

 

천만 뜻밖에 질책을 받은 승려들은 그만 놀라고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서 급히 나가 버렸다.

 

위클리프의 말은 성취되었다. 그는 로마를 대항하는 모든 무기 중의 가장 강력한 무기, 곧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들을 계몽시키고 교화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성경을 자기 동포들의 손에 쥐어 주기까지 생명이 연장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업의 완성을 보기까지 여러 가지 큰 장애를 겪었다. 위클리프는 건강이 대단히 좋지 못하므로 자기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불과 몇 년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았으며, 또한 반드시 반대를 만나게 될 것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허락으로 힘을 얻어서 그는 결코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지금껏 왕성한 지력(智力)과 풍부한 체험 속에서 그의 사업 중의 가장 위대한 사업을 위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하여 보호를 받고 준비하여 왔다. 모든 그리스도교국이 온통 혼란 중에 빠져 있는 그 때에, 이 개혁자는 루터워드의 목사관(牧師館)에서 외부의 폭풍과는 상관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그 사업에 몰두하였다.

 

드디어 사업이 완성되어 최초의 영어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국에 공개되었다.

개혁자는 이제 감옥이든지 화형주든지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그는 결코 꺼질 수 없는 빛을 영국 국민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자기의 동포들에게 성경을 줌으로 무지와 죄악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것 이상의 것, 자기의 나라를 해방시키고 향상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전쟁터에서 빛나는 승리를 얻은 것보다 더욱 위대한 일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도 인쇄기가 발명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성경의 부수를 증가시키려면 더디고도 번거로운 수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성경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복사하는 일을 자원하여 담당하고자 했다.

 

그러나 요구되는 만큼의 부수를 공급하기는 어려웠다.

그 중에 돈이 많은 부자들은 성경전서를 사고자 욕망하였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일부분만을 샀다. 많은 경우에, 여러 가정들이 합하여 성경을 샀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성경은 많은 사람들의 가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이성(理性)에 호소한 결과, 사람들은 법왕교의 교리에 맹종하던 상태에서 각성하였다.

 

위클리프는 이제 개신교의 명확한 교리,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성경의 절대적인 확실성에 대하여 가르쳤다.

 

성경을 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전도자들은 이 개혁자의 저서도 전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영국 국민의 약 절반이 이 새 신조를 받아들이게 되리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위클리프의 만년(晩年)의 대활동

 

성경이 나오게 되자 교회의 당국자들은 당황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위클리프보다 더욱 강한 것, 곧 그들의 무기도 거의 소용없을 정도의 큰 힘과 대결하게 되었다.

 

그 당시 영국에는 자국어로 된 성경이 출판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아직까지 성경을 금지하는 법령이 생기지 아니하였다. 그런 법령들은 그 후에 제정되어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승려들의 반대는 있었을지라도 얼마의 기간 동안 성경이 배포(配布)될 기회가 주어졌다.

 

법왕교의 지도자들은 개혁자의 소리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다시 음모를 꾸몄다.

개혁자는 세 번이나 심문을 받기 위하여 법정에 소환되었으나 방면되었다.

 

그러나 첫째로 감독들의 종교 회의에서 그의 저서를 이단이라고 선고하고, 그들은 젊은 왕 리챠드 2세를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누구나 금지된 교리를 지지하는 자는 투옥시킬 것이라는 칙령을 반포하게 하였다.

 

위클리프는 종교 회의로부터 국회에 호소하였으며, 그는 국회에서 두려움 없이 교직 정치를 비난하고, 교회가 시인한 무서운 악폐들을 혁신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법왕측의 참람과 타락을 폭로하였다.

그의 원수들은 혼란에 빠졌다.

이미 위클리프의 친구들과 지지자들은 부득이 굴복하도록 강요되었다.

 

그러므로 고립무원(孤立無援)한 늙은 개혁자도 임금과 법왕의 연합된 권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대신에 법왕교도들은 자기들이 패배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의회는 위클리프의 감동적인 호소에 감화를 받고, 핍박하는 칙령을 철회시켰다.

그리하여 개혁자는 다시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세 번째의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국내의 최고 종교 재판소에서 받았다.

이곳은 이단자에게 아무런 유리한 판결이 내릴 수 없는 곳이다.

여기에서 로마교는 최후의 승리를 얻고, 개혁자의 활동은 정지되리라고 법왕교도들은 생각하였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그들의 목적을 성취할 수만 있다면 위클리프는 하는 수 없이 자기의 교리를 버리든지 화형의 선고를 받고 법정을 떠나가든지 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자기의 교리를 철회하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았다.

그는 두려움 없이 자기가 가르치는 바를 주장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비난을 반박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위치와 자기의 환경을 다 잊어버리고, 그의 청중들을 하나님의 심판정에 세워 놓고, 그들의 궤변과 기만을 영원한 진리의 저울로 달았다.

 

성령의 권능이 그 법정 안에 충만하였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상한 힘이 청중들에게 임하였다.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나갈 힘이 없는 듯이 보였다.

개혁자의 말은 마치 하나님의 전통(箭筒)에서 나온 화살처럼 듣는 이들의 마음을 찔렀다.

그를 이단이라고 비난했던 그들의 고소를 그는 설복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이제 그 사람들에게 되돌렸다. 어찌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오류를 퍼뜨리고자 하였는가라고 그는 부르짖었다. 

 

“이(利)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상품화하고자?”

 

그는 또 마지막으로, “그대들은 누구와 더불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늙은이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대들은 진리, 곧 그대들보다 더욱 강하며 마침내 그대들을 이기고야 말 진리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이다”(Wylie, b.2, ch.13)라고 말하였다.

 

그렇게 말한 다음에는 법정을 나왔으나 그의 원수들 중에서 한 사람도 그를 막는 자가 없었다.

 

 

법왕에 대한 최후의 경고

 

위클리프의 사업은 거의 마쳐졌다.

오랫동안 쥐고 있던 진리의 깃발은 곧 그의 손에서 떠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복음을 위하여 증거할 것이었다.

그 진리는 바로 오류의 왕국의 본거지에서 선포되어야 할 것이었다.

 

위클리프는 심문을 받기 위하여 너무도 자주 성도들의 피를 앗아간 로마법왕의 재판정에 호출되었다. 그는 자기를 위협하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그 소환에 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마침 그 때 그는 중풍으로 여행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육성으로는 로마에서 말할 수 없었을지라도 편지로는 말할 수 있었으므로, 그는 결국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자기의 목사관에서 법왕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는 예의바른 언사와 그리스도인적 정신이 나타나 있었으나 법왕청의 허식과 교만을 날카롭게 견책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모든 사람, 특히 로마 주교(법왕)에게 공개하여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이 신앙이 건전하고 참된 줄로 믿기 때문에 그는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내가 주장하는 신앙에 동의할 줄로 믿으며, 만일 그 신앙이 잘못된 것이라면 역시 교정하여 줄 줄로 믿는다. 나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전부라고 믿는다. …로마 감독이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면,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복음의 율법에 결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서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세속적 위엄이나 명예에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태도에 가깝게, 또한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는 점에서 그러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을 당시의 생애는 가장 빈곤하고, 모든 세속적 권력과 명예에서 떠난 생애였다. 어떤 신실한 사람도 법왕이나 어떤 성인을 따라갈 때, 그들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간 그 점에 있어서만 그를 따라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대신에 세속적 명예를 사모함으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와 같은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 법왕은 자기의 모든 영토와 통치권을 세속적 권력에게 마땅히 넘겨주고, 또한 자기에게 속한 모든 교직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고, 특별히 그분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점들에 있어서 내게 잘못이 있으면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이를 정정(訂正)할 것이며, 만일 필요하다면 죽음이라도 사양치 아니할 것이다. 내 자신의 뜻과 소원대로 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로마 감독 앞으로 달려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와 반대로 다른 일이 내게 생기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사람을 순종하기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가르쳐 주셨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를 마쳤다.

 

“우리 하나님께서 법왕 어반 6세의 마음을 감동하사 그가 친히 본을 보여 그의 교직자들과 함께 그 생활과 태도에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또한 그들이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쳐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신실히 주님을 따르게 되기를 우리는 기도하는 바이다”(John Foxe, Acts and Monu-ments, vol.3, pp.49, 50).

 

이와 같이 위클리프는 법왕과 그의 추기경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나타내 주었고 이들이 대표하고 있노라고 공언하는 주님과 그들 자신과의 현저한 차이를 그들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국에 나타내 보여 주었다.

 

 

위클리프의 신앙과 성경

 

위클리프는 자기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충성한다면 자기의 생명이 희생당할 것이라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왕과 법왕과 감독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그는 늦어도 수개월 후에는 틀림없이 화형에 처하게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순교자의 면류관을 멀리서 찾고 있노라고 말하느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 교만한 주교들에게 전하라. 그리하면 순교는 틀림없이 오고 말 것이다. 살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결단코 안 될 말이다. 탄압하려거든 해보라. 나는 그 일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다”(D’Aubigne, b.17, ch.8).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여전히 당신의 종을 보호하였다. 자기의 온 생애를 통하여 날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담대히 진리를 옹호하고 있는 이 사람은 원수들의 증오의 희생물로 쓰러질 것이 아니었다. 위클리프는 전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지 아니하였지만 주님께서 그의 보호자가 되셨다.

 

바야흐로 그의 원수들이 틀림없이 그를 희생 제물로 삼을 수 있다고 느낀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손은 그들의 손이 미치지 못할 곳으로 그를 옮기셨다. 그는 루터워드에 있는 자기의 교회에서 성찬식을 집례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중풍병으로 쓰러졌는데 그 얼마 후에 사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위클리프에게 그의 사업을 지정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에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이 백성들에게 전해지게 하시고자 그의 신변을 지키셨다. 그리하여 개혁의 위대한 사업을 위한 기초가 놓일 때까지 그의 생명은 보호되고, 그의 활동은 연장되었다.

 

위클리프는 암흑시대의 흑암 속에서 나타났다. 그와 같이 개혁 사업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 그 전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침례 요한과 같이 그는 특수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일어난 새 시대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그가 밝혀낸 진리의 체계는 그 후의 개혁자들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것들은 그 후 백년이 지나서도 미칠 수 없을 만큼 통일성과 완전성이 있었다. 그 기초는 넓고 깊으며, 그 구조는 튼튼하고 완전하므로 그 후에 나타난 사람들이 그것을 재건할 필요가 없었다.

 

위클리프가 착수한 위대한 운동, 곧 양심과 지성을 해방시켜 주고, 질곡(桎梏)에 속박되어 있던 여러 나라들에게 자유를 준 운동의 근원은 성경이다.

 

14세기 이래 각 시대를 통하여 마치 생명수처럼 흘러내린 축복의 근원은 바로 성경이었다. 위클리프는 단순한 마음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영감의 계시요, 믿음과 행실의 완전한 표준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일찍이 로마교회를 거룩하고 절대 무류의 권위를 가진 교회로 여기고, 천여 년 동안에 걸쳐서 확립된 그 교리와 관습을 절대적인 존경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돌아섰다.

이 거룩한 말씀은 그가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자 역설한 권위의 말씀이었다.

 

유일의 참 권위는 법왕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뜻의 완전한 계시인 동시에, 성령께서 성경의 유일한 해석자이므로 모든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연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본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하여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법왕과 로마교회로부터 성경 말씀으로 돌이켰다.

 

 

위클리프의 인격과 사업

 

위클리프는 가장 위대한 개혁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 명석한 사고력, 진리를 주장할 때 보여준 확신, 그리고 진리를 옹호하기 위한 담력 등은 그보다 후에 나타난 사람들 중에서도 그와 필적할 사람이 별로 없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지적으로 몽매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한 시대였지만, 이 최초의 개혁자의 봉사는 생애의 순결, 연구와 활동에 있어서의 근면, 매수되지 않는 청렴, 사업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과 충성 등으로 특징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위클리프의 인격은 성경이 사람을 교육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을 증명해 주는 좋은 예증이 된다.

과연 성경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인물이 되게 하였다.

계시에 나타난 위대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노력은 모든 기능에 새로움과 활기를 준다.

그것은 마음을 넓혀 주고, 이해력을 예민하게 해주고, 판단력을 성숙하게 해준다.

 

성경 연구는 어떤 연구보다도 사상과 감정과 욕망을 더욱 정화(淨化)시켜 줄 것이다.

그것은 견인불발의 정신과 인내와 용기와 굳센 마음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품성을 세련시켜 주고, 심령을 거룩하게 만들어준다.

 

성경을 존중하고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의 마음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직접 접촉하게 되므로, 어떠한 인간적인 철학이 가져다주는 가장 훌륭한 결과보다 더욱 고상한 원칙은 물론이요, 더욱 강하고 적극적인 지성을 갖춘 인물이 되게 해줄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고 말하고 있다.

 

위클리프가 가르친 교리는 그 후에도 얼마 동안 널리 전해졌다.

 

그를 따르는 자들, 곧 위클리프 교도와 롤라드 교도라고 불리는 무리들은 영국에 복음의 지식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도 그것을 가지고 나아갔다.

 

이제 지도자는 없어졌으나 그 전도자들은 전보다도 더욱 큰 열성으로 일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듣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한 사람들 중에는 귀족도 있고 왕비도 있었다.

많은 곳에서 사람들의 생활 상태가 현저하게 개혁되었고, 로마교의 우상적 상징은 교회에서 제거되었다.

 

그러나 무자비한 박해의 폭풍이 성경을 그들의 지도자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곧 몰려왔다.

 

영국의 국왕들은 로마 법왕의 지지를 얻어 자기들의 권세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개혁자들을 희생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영국 역사상 최초로 복음의 사도들에 대하여 화형의 선고가 내렸다. 순교자가 계속하여 뒤를 이었다.

 

법률의 보호를 박탈당하고 고문에 시달리는 진리의 옹호자들은 만군의 여호와께 부르짖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들은 교회의 원수요 국가의 반역자로 누명을 쓰고 추격을 받으면서도 몰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빈궁한 자들의 집을 그들의 가장 좋은 은신처로 삼았고, 때때로 굴 속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기도 하였다.

 

격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타락한 종교의 세력을 대항하여 전개한 조용하고, 경건하고, 열렬하고, 꾸준한 반항은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일부분밖에 알지 못하였다.

마치 사도 시대의 제자들과 같이 여러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하여 세상의 재물을 희생하였다.

 

다행히 가정에서 살도록 허락 받은 사람들은 추방당한 형제들을 기꺼이 숨겨 주었고, 그들 역시 추방을 당해야 할 경우에는 즐거이 그 운명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 중에는 박해자들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신앙을 희생하여 자유를 얻고, 참회자의 옷을 입고 감옥에서 나와 신앙의 취소를 선언한 자들도 수천 명이 있었다.

 

그러나 감옥과 롤라드탑(塔)에 갇히든지, 심지어는 고문과 화형을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두려움 없이 기쁨으로 진리를 위하여 증거한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빈궁하고 비천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귀족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종말 법왕교도들은 위클리프가 살아 있을 동안에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몸이 무덤에서 조용히 쉬고 있을 동안에도 그들의 증오심은 충족되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지 40여 년 후에 열린 콘스탄스 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그 근처에 흐르고 있는 시냇물에 던져 버렸다.

 

그 사실에 대하여 옛날의 한 저술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시냇물은 그 재를 아본 시내로, 아본 시내는 세버언 강으로, 세버언 강은 영국 해협으로, 영국 해협은 대양으로 옮겨 주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의 재는 오늘날 온 세상에 퍼져 있는 그의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T.Fuller, Church History of Britain, b.4, sec.2, par.54).

 

그의 원수들은 자신들의 악의에 찬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거의 깨닫지 못하였다.

 

보헤미아의 얀 후스(John Huss)가 로마교의 많은 오류를 버리고 개혁 사업을 착수한 것은 위클리프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그 두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진리의 씨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뿌려졌다.

 

그 사업은 보헤미아에서 다른 나라로 확장되어 나갔다.

 

사람들의 마음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손이 위대한 종교개혁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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