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앙인물

존 번연의 생애와 사상

안명애 2015. 3. 13. 20:55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을 꼽으라면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주저 없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들 것이다. 신학자들 중에는 존 번연이 조금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청교도혁명’을 ‘번연혁명’이라 불렀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 존 번연이 위치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침례교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존 번연의 삶과 사상을 통해 오늘의 침례교가 나갈 방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초기 생애


   존 번연은 1628년 잉글랜드의 베드포드에 있는 엘스토우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놋쇠 세공사, 즉 떠돌이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항아리와 주전자 등을 만들기도 하고 수선하기도 하는 사람으로 가난했으나 정직했다.

    번연은 중부의 오지 농촌에서 수많은 빈민 소작농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났다. 시골의 그래머 스쿨에서 읽는 법과 쓰는 법을 배웠지만, 가업을 전수받기 위해 10살의 어린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고 17살까지 아버지 밑에서 땜장이 일을 배운다. 번연의 정신과 상상력은 제도적인 교육보다는 이렇게 어린시절에 받은 영향들로부터 형성되었다. 그는 싸구려 책에 나오는 모험담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그런 책들은 케임브리지 근처 스타워브리지에서 열리는 큰 시장 같은 곳에서 구했다(〈천로역정〉에 나오는 '허영의 시장'은 여기서 영감을 얻은 것). 이때 읽은 〈햄프턴의 베비스 Bevis of Hampton〉와 〈그리스도교의 7용사 The Seven Champions of Christendom〉 같은 책에는 중세 기사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일반 민중의 삶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번연은 또한 당시 영국 청교도들에게 인기가 있던 여러 가지 책들을 읽었다. 예를 들면 쉬운 말을 사용한 설교집, 일상의 도덕적인 대화록, 하나님의 인도에 관한 감상적인 판단과 행위를 다룬 책들, 보기에 흉측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목판본으로 인쇄된 폭스의 〈순교자열전 Book of Martyrs〉 등이었다. 무엇보다도 번연은 영어 성서에 빠져들었다. 그가 12세 때 '킹 제임스 영역 성서'는 발행된 지 30년밖에 되지 않았었다. 국교도 부모 밑에서 자라났지만 그는 편협한 신앙에 의해 단절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 지방의 방대한 민담과 전승을 접하게 되었다. 총에 맞은 새가 나무에서 곤두박질하는 것을 보면서 그의 정신은 격언들로 채워졌다. 이러한 시각적인 경험과 일반적인 격언은 모두 훗날 그의 저서들에 담기게 되었다.

번연은 자서전에서 무서운 꿈 때문에 당한 고통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극심한 두려움을 겪은 데에는 병적인 까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청년시절 초기에 종교적인 위기를 겪는 가운데 그의 죄책감은 망상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모든 형태의 악과 불신에 붙잡아두었던 가장 큰 요인'은 과장이 심한 성향과 관련된 번연 자신의 비정상적인 감수성이었던 것 같다.

    1644년 몇 차례 계속해서 불행한 일을 겪으며 이 시골 소년은 가족과 헤어져 세상으로 떠밀려나갔다. 6월에 어머니가 죽었고, 7월에 누이동생 마거릿이 죽었으며, 8월에는 아버지가 3번째 아내를 얻었다. 그리고 내란(청교도 혁명)이 터져 11월에 의회군으로 징집되어 뉴포트의 파그넬에 있는 수비대의 보충병으로 배치되었다. 그곳 사령관은 새뮤얼 루크 경으로 새뮤얼 버틀러의 〈휴디브라스 Hudibras〉에 나오는 똑같은 이름의 장로교인 기사(騎士)처럼 불후의 명성을 갖고 있었다. 번연은 뉴포트에서 1647년 7월까지 있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전투를 치러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한번 '한 지역(아마 레스터셔인 듯함)을 포위 공격하는 임무를 받고 선발되어나갔다가' 바로 앞에 있던 동료가 총에 맞는 일이 생겼는데, 훗날 그는 이때의 일을 회상하며 하나님의 섭리로 살아남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군복무는 무사 평온했지만, 이때 그는 크롬웰 군대 내의 급진적인 소종파들, 설교하는 중대장들, 개인 양심을 제외한 모든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퀘이커교·구도파(求道派 Seekers)·랜터파(Ranters)의 열정적인 종교생활을 접할 수 있었다. 루크가 자기 수비대에 드나드는 이러한 수많은 종교적 선동자와 갈등을 겪고 있었던 것에 비해, 번연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크롬웰과 그의 초라한 기병들이 갖고 있던 청교도 분파들의 주요사상을 잘 알게 되었다. 그들의 신념에 따르면, 종교적 진리를 위한 투쟁은 각자에게 아무 대가 없이 계시된 은혜에 의지하면서 모든 형태의 공적인 조직을 단죄하는 끈질긴 노력을 뜻했다.

   신형군(新形軍 New Model Army)의 경건한 생활모습은 번연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겨놓았다. 그는 이들에게서 받은 인상을 〈거룩한 전쟁〉에서 설교와 훈련에 매진한 크레던스와 보아너게스라는 에마뉴엘 군대의 중대장들을 통해 재현해놓았다.

    번연은 1647년 7월(제대)부터 1649년 사이에 결혼했다. 그는 자서전 〈넘치는 은혜〉에서 자기와 자기의 첫째 아내가 '접시나 숟가락 같은 가재도구도 없을 만큼 매우 가난한 상태에서 서로 만났다'고 말한다. 아내는 경건한 가정 출신으로, 번연에게 결혼지참금 대신 아더 덴트의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 The Plain Man's Path-Way to Heaven〉과 루이스 베일리의 〈경건 훈련 The Practice of Piety〉이라는 2권의 책을 주었다. 번연은 첫번째 책에서 신앙 소책자라 할지라도 통렬한 표현들을 사용할 수 있고, 친숙한 격언들을 가지고서도 훈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 부부는 메리라는 눈 먼 딸을 첫아이로 낳고 1650년 7월에 세례를 받게 했다. 번연의 첫째 부인은 그 뒤 엘리자베스·존·토머스를 더 낳고서 1658년에 죽었다. 엘리자베스도 1654년 그곳에 있는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 무렵 번연은 이미 세례를 받고 '베드포드 분리파 교회'에 가입했다.



개종과 목회



    번연의 개종은 결혼한 뒤 몇 해(1650~55)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이 자서전에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 '사제'와 '성직복'(이 시기의 성직복은 제네바 가운으로 추측됨)을 경외심 어린 눈으로 보았던 초기의 국교도 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평소에 즐기던 춤, 종치기, 시골 들판에서 벌이는 운동경기 등의 오락들을 마지못해 서서히 포기하고 내면적인 생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뒤 몇 해에 걸쳐 신앙을 버리고 싶을 정도의 괴로운 시험이 닥쳤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시험의 '태풍'이 거의 물리적인 폭력으로 그를 강타했고, 신을 모독하기를 강요하는 음성들이 들려왔으며, 그에게 저주의 위협을 가하는 듯이 보였던 성서 본문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아픈 곳을 찔러댔다'.

마침내 어느 날 아침에는 자신이 이러한 사탄의 음성에 굴복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해버렸다고 믿기까지 했다. "나는 총에 맞아 나무에서 떨어진 새처럼 쓰러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신질환에 가까운 고립상태에 있던 시절, 그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겪는 정신분열의 모든 특성을 나타내 보인다. 이런 정신분열의 특성은 20세기에 와서야 분석되었지만, 번연은 자기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그 시대 나름의 심리학적 도구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17세기 칼뱅주의 목회신학이었다. 이 목회신학은 영혼의 진정한 필요와 영적 성장의 증거, 하나님의 은총의 계약 등과 같은 용어를 통해 선택과 예정의 냉혹한 교리를 해석하는 신학이었다. 현대 정신분석학자들의 기법과 청교도 설교가들의 기법은 모두 자아를 흠 없는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것을 공동 목표로 하고 있었다.

번연은 영적인 암흑기에서 벗어나면서 점차 자기 죄가 '죽어 마땅한 것이 아님'을 점차 느끼기 시작했고, 두려움을 주는 본문들뿐만 아니라 위로하는 본문들도 있음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이 회복기에 번연은 베드포드 분리파 교회와 이 교회의 강력한 지도자 존 기퍼드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1655년경 이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었다.

    베드포드 공동체는 침례에 의한 성인 세례를 실행했으나, 엄격한 침례교도들과는 달리 침례를 교인이 되는 자격으로 고집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입장은 침례교회보다는 오늘날의 회중교회의 입장과 더욱 가까웠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거룩한 생활'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성찬식'(open-communion) 교회였다. 번연은 곧 평신도 설교가로서 재능을 나타냈다. 영적인 고민에서 해방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경고하고 위로하는 일에 적임자였으며, 이는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나 자신도 쇠사슬에 묶인 채 그들에게 갔고, 그들에게 주의하라고 설득하기 위해 내 양심에서 얼마 전에 타오르던 불을 담아 갔습니다"라는 그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교인들을 방문하고 권고하는 활동도 활발히 했으나, 1655~60년의 그의 주요활동은 초기 퀘이커교도들과 논쟁을 벌인 일이었다. 번연장이 서는 베드포드셔의 읍들을 찾아다니며 공개 논쟁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몇몇 열린 복음 진리들 Some Gospel Truths Opened〉(1656)·〈몇몇 열린 복음 진리들을 옹호함 A Vindication of Some Gospel Truths Opened〉(1657)이라는 최초의 저서들을 펴내기도 했다. 개방적인 성찬식을 실시한 침례교도들과 퀘이커교도들은 도시와 시골에 있는 '직공들', 즉 소규모 숙련공들과 기술자들을 자기 교인들로 만들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이 두 교파는 계급에 대한 태도, 대가 없이 은혜로 얻는 구원에 대한 강조,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등에서는 매우 비슷했으나, 전도를 하느라 경쟁을 벌인 것은 차치하더라도 퀘이커교의 내적 광명의 교리 때문에 서로 분열되었다. 번연의 열렬한 확신은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에 분명한 경계선을 긋는 정통적이고 객관적인 신학으로 표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퀘이커교 설교자 에드워드 버러의 위험할 정도로 모호하고 자기중심적인 신비주의를 맹렬히 비판했다.

    찰스 2세의 왕정복고로 분리파 교회들이 예배의 자유를 향유하고, 정부 정책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20년 세월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번연은 1660년 11월 12일 사우스베드포드셔에 있는 로어삼셀에서 지방 치안판사 앞에 끌려가 과거 엘리자베스 시대에 포고된 법령에 따라 영국국교회와 일치하지 않는 예배를 집행한 혐의로 기소 당했다. 기소당한 뒤 같은 범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아 1661년 1월 순회재판소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주(州) 감옥에 갇혔다. 2번째 아내(1659년에 재혼함)가 순회재판소에 항소하기 위해 여러 차례 용기 있게 노력했지만 번연은 1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넘치는 은혜〉의 초기판본들에 첨부된 전기에 따르면,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긴 레이스'를 만들어 팔아 가족을 부양했다고 한다. 수형조건은 관대한 편이어서 그는 때로 친구나 가족을 찾아가고 모임에서 연설하기 위해 나갈 수 있었다.



문학 활동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번연은 영적인 자서전 〈넘치는 은혜〉를 쓰고 출판했다. 자기 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그리고 정직하게 희상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그는 주체적인 분석에 적합한 놀라운 산문체를 얻었다. 그는 힘이 넘치는 신체적 이미지가 풍부한 문체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묘사한다. 그것은 자신을 저주하고 있는 것 같은 성서 본문을 "풍차 기둥처럼 내 등을 무겁게 짓눌렀다"고 표현하는 식이다. 그 뒤에 쓴 상상력 넘치는 〈천로역정〉에는 꿈과 같이 음악적이면서 내성적인 문체와 시골의 평범한 생활과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직공 설교가'의 대중적인 설교체가 서로 뒤섞여 있다. 그는 언제나 일상의 경험을 비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1672년 3월 찰스 2세가 비국교도들에 대해 관용선언을 공포함에 따라 번연은 석방되었다. 베드포드 공동체는 '하나님께 기도로 많이 간구한 뒤' 1월에 이미 그를 자기들의 목사로 선출해놓았고, 새로운 집회장소도 얻어놓았다. 5월에 번연은 25명의 다른 비국교도파 목사들과 함께 베드포드와 주변 마을들에서 설교하도록 허락받았다. 그의 별명 '주교 번연'은 그가 그 지역에서 탁월한 조직력을 발휘했음을 암시한다. 박해가 다시 시작되자 그는 불법적인 설교를 한 혐의로 다시 감옥에 갇혔다.

2번째 감옥생활은 비록 6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았던 듯하나, 어떤 정황에서 그가 투옥되었는가는 첫번째 감옥생활 때보다도 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를 석방시키기 위한 1677년 6월의 신원보증서가 다행히도 남아 있어 2번째 투옥은 그해 상반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로역정〉은 2번째로 석방된 직후, 즉 1678년 2월에 출판된 것으로 보아 번연은 첫번째 투옥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것은 〈넘치는 은혜〉를 완성한 직후였으며, 이 책에 담겨 있는 내면생활에 대한 검토가 여전히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을 때였다.

    〈천로역정〉은 1678년 너새니얼 폰더가 출판했다. 이 우화적인 작품의 첫 부분에는 그리스도교도가 위험과 혼란을 겪으며 하늘의 도성을 향해 순례를 하는 이야기가 '사느냐 죽느냐'처럼 강렬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개인적인 경험을 다음과 같은 등장인물과 무대로 나타냈다. 학자인 체하는 세속적인 현자, 마귀 아폴리온, 허영의 시장,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대는 계곡, 독선적인 청년 '무지'(Ignorance), 순례자들이 최후로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에 쉬는 유쾌한 산 등, 이 모든 등장인물과 배경은 번연의 깊은 영적 성숙에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이고도 날카로운 눈으로 일상생활에서 관찰한 것들이기 때문에 영국인의 상상력과 쉽게 부합될 수 있었다. 이 책은 즉시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은 근대 계몽주의 교육이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전, 일반 대중의 민간전승을 표현한 최후의 걸작인 듯하다.

    번연은 계속해서 베드포드 교회 및 이 교회와 결연을 맺은 동부의 늘어나는 국교회들을 돌보았다. 문학작품에 힘입어 갈수록 명성이 커지자 런던에 있는 회중교회에서도 설교를 하게 되었다. 1672~73년 윌리엄 키핀과 그 외의 런던 침례교도들과 함께 자신의 '개방적인 성찬식'의 원칙들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악인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Mr. Badman〉(1680)은 우화라기보다는 사실적인 소설에 더욱 가까운 작품으로, 박해의 시대가 끝난 뒤 청교도들이 도시 중간계급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찾기 시작할 당시에 돈과 혼인의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번연의 2번째 우화인 〈거룩한 전쟁〉은 조심스러운 서사시 구조를 이루고 있고, 따라서 〈천로역정〉에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내면적 특징은 찾아보기 어렵다. 맨솔의 도시는 마귀의 군대에게 포위를 당하나 에마뉴엘의 군대가 와서 구해주며, 훗날 마귀의 군대가 에마뉴엘의 통치에 대해 여러 차례 공격과 음모를 가함으로써 약화되었다. 이 은유는 타락 때부터 구속(救贖)과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의 이야기를 재현할 뿐만 아니라 개인별 영혼의 회개와 타락을 묘사한다. 이 은유에는 찰스 2세 때 비국교도들이 당한 박해를 암시하는, 보다 명확한 역사적 차원까지도 담겨 있다.

〈속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Second Part〉(1684)은 그리스도인의 아내 크리스티나가 자녀들을 데리고 순례하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대체로 전편에 비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좀더 사교적이고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지만, 순례자들에게 '죽음의 강'을 건너도록 부르는 내용의 장엄한 결론부는 아마 번연의 문학에서 압권일 것이다. 번연은 목회자로서 맡은 책임이 컸지만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시간을 내어 수많은 교리 및 논쟁서를 펴냈다. 또한 거칠기는 하지만 신앙교훈을 내용으로 하는 훌륭한 시를 썼는데, 이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말년의 작품집은 어린이들의 책인 〈소년 소녀들을 위한 책 A Book for Boys and Girls〉(1686)으로서 상징적인 삽화들과 함께 활기찬 시들로 엮어졌다.

    제임스 2세 치하에서 비국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번연은 '내 사랑하는 아내 엘리자베스 번연'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줌으로써 가족을 보호했다(1685. 12). 제임스가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기 위해 개신교 비국교도들을 회유하려고 했을 때, 번연은 관직을 제의하는 왕의 대리자 에일즈버리 경의 감언이설을 지혜롭게 물리쳤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기 교회의 교인들이 재조직된 베드포드 법인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해주었다. 번연은 1688년 설교를 위해 여러 지역을 방문하다가 런던에서 죽었다. 런던에 오기 전에 그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벌어진 불화를 무마하려고 심한 비를 맞으며 리딩으로 달려갔다가 열병에 걸렸던 것이다. 죽은 뒤 비국교도들의 전통적인 묘지로 알려진 번힐필즈에 묻혔다.



평가



    19세기에 종교적 신앙이 쇠퇴하고 대중적인 교훈서들이 크게 늘어나기 전만 해도 번연의 저서는 성서처럼 모든 영국인 가정에서 찾아볼 수 있었고 모든 일반 독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문학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18세기 내내 순수문학의 반열에 끼지 못했다. 그의 위대성을 인정한 것은 스위프트와 존슨뿐이었다. 낭만주의 운동이 끝난 뒤에야 선천적인 재능을 지닌 작가로 인정을 받았고, 호메로스나 로버트 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번연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그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이미 발전해 있었던 설교체 산문의 전통과 청교도 문학 장르들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가를 알게 되었다. 비록 예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탁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천로역정〉의 천재성은 여전히 인정받고 있다. 크게 다른 문화 전통에 속한 독자들에게까지 번역서를 통해 꾸준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이 유명한 책이 얼마나 심오한 상징적 진리를 담고 있는가를 입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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