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앙인물

구약에 나타난 영적지도자 10인의 인격

안명애 2015. 3. 12. 08:02

1.  아브라함 - 영적 지도자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창세기 12:1-3은 그 유명한 아브라함을 부르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말씀을 좇아갔고, 믿음으로 즉각 순종했습니다. 그가 믿었던 약속의 말씀은 자기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과 그를 만민 구속 역사의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태가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라를 통해서는 자식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처음에 몇번 불신의 늪에 허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에게 뭇별의 소망을 보여주시며, 모래알과 같이 수많은 후손을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으며, 반드시 그 약속은 성취되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25년만에 이삭을 잉태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25년만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는 지난 25년간의 시간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생각할 때 바랄 수 없는 중에 소망할 수 있었고, 때론 넘어지면서도 다시 소망을 놓치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라의 태가 마를 뿐 아니라, 자신의 몸도 죽은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런 상황속에서도 믿음이 조금도 약하여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25년만에 하나님의 약속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에게 있어 때로는 낙심의 때, 절망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뛰고 날아보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현실앞에서 깊은 낙담의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이런 상황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아니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절망의 때를 빨리 벗어나 단순히 약속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복종시키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지도자로서 소유해야 할 인격입니다.

2.  모세 - 영적 지도자는 온유한 성품을 소유해야 합니다. (참조. 딤후 2:24,25)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권능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인생을 확실히 보장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그후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수르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백성들은 메마른 사막에서 물이 없이 3일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백성들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는 이유로 3일만에 마음이 돌아서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고, 목마른 백성들의 목을 축여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다시 신광야에 이르자 먹을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다며 이 모든 책임이 모세에게 있는 양 모세를 다시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또 다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비록 광야길을 행했지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여 주셨고, 옷과 신발이 헤어짐이 없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광야를 지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다시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계시는지 아니 계시는지 의심하였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모세는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했지만, 백성들은 도리어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를 향하여 돌로 칠 기세였습니다. 무리들은 지금까지 자기를 인도해 준 목자에 대한 감사가 없고, 도리어 자기 인생을 말아 먹는다고 대적하고 돌로 쳐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들 속에서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함께 혈기로 마주 싸웠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목자로서 권위를 부리지도, 그들을 징계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부족함을 기도로써 채워주었고, 다 받아주고 품어 주었습니다. 만약 모세가 젊은 시절 출애굽역사를 섬겼다면 이런 상황에 은혜도 모르는 양떼들을 생각할 때 화가 치밀어 올라 그 많은 혈기로 많은 백성들을 패 죽였을 것입니다. 그는 과거 자기의 동족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 충동으로 애굽인을 죽였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때 완전 혈기로 똘똘 뭉쳐진 때였습니다. 그러나 40년 미디안 광야 훈련을 통해, 40년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통해 온유한 성품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의 특성과 생태를 깊이 파악하였습니다. 그는 연약한 양들에게 요구하지 않고 양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섬겨 주었습니다. 백성들은 힘든 출애굽의 여정속에서 목자에게 마음대로 불만과 불평을 터뜨리며 그들의 고난을 위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온유한 내면으로 양들의 모든 불평, 불만을 걸러주고 삭혀 주었습니다. 후에 하나님은 이러한 모세를 가리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200만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쉼과 위로를 줄 수 있을 정도로 넓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많은 양떼들을 품을 수 있는 온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가 담을 수 있는 영혼은 목자의 온유함의 넓이에 달려있다고 여겨집니다. 온유함은 어떤 완악한 영혼도 변화시키는 무기입니다.

3.  여호수아 -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도전하는 사람

여호수아는 믿음과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세로부터 가나안 정탐 명령을 받고, 10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그러나 정탐후 이들의 정탐보고는 각기 달랐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며, 영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가 그러한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형편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고, 그 가나안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도전정신이 충만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축복은 도전하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이 도전정신은 여리고성을 점령하는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 성은 버스가 두 대나 지나다닐 수 있는 인간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도전정신으로 충만한 여호수아는 요단강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생명을 걸고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자 눈에 불을 켰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3을 보십시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그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난공불락의 성을 믿음으로 밟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데 썼던 방법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방법이었습니다. 보통 인간의 방법은 무기를 사용할 것이며, 성 밑에 구멍을 파는 공병을 배치시켰을 것이며, 기습으로 습격할 병력을 배치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복자 여호수아가 취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나팔을 불며 매일 성을 돌았습니다. 마지막 제 칠일에는 일곱 번 성을 돌았습니다. 다시 말해 여호수아는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를 함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난공불락의 성도 정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힘을 힘입어 무서운 정복자로서의 투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난공불락과 같은 문제를 믿음으로 도전하는 용기있는 지도자, 정복자의 기질을 소유한 지도자, 그가 바로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4.  사무엘 - 영적 지도자는 말씀과 기도생활에 있어서 남달라야 합니다.

사무엘이 죽었을때 모든 백성들은 그를 사랑함으로 슬퍼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사무엘의 죽음은 모든 이들에게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선지자로서의 너무나 고결한 삶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삶의 증인들이 바로 하나님과 양떼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삶에서 나타나는 인격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말씀과 기도생활일 것입니다. 사무엘상 12:23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그는 백성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쉬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으며, 항상 백성들에게 의로운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앞에 나아가 줄기차게 중보기도를 감당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책망하고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믿음을 심었습니다. 그는 하얀 백발을 날리며, 마지막 순간까지 고별의 메시지가운데서도 백성들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했으며, 정말 참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섬길 것을 호소하는 모습속에서 진정으로 백성들을 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양떼들을 영적으로 사랑하는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 이처럼 영적 지도자는 말씀과 기도생활이 남달라야 합니다. 양떼들을 위한 중보기도로 날마다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성실함과 양떼들을 진리의 말씀위에 굳게 세우기 위해 말씀으로 자신을 채워나가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5.  다윗 -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로 말미암아 10년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이 오직 사울의 시기심 때문에 그렇게 비참한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그는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니면서 몇편의 시편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통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그는 사실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기름부은 받은 사울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영접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용서하는데 인색함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사울 때문에 지난 10여년의 시간을 손해보며 고통받아야 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한이 맺힙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사울을 죽이기에는 합당한 근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까지도 품고 용서하는 내면을 통해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내면성을 키워가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아픔이 훈련제목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인간문제가 자신의 내면을 찢어넓히는 계기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고통속에서 위로하시며, 피난처가 되시며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즐거움으로 살아갑니다.

6.  엘리야 - 영적 지도자는 열정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엘리야 그는 어떤 사람인가? 한마디로 불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나타난 시기는 이스라엘의 영적 위기의 때였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합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아내인 이세벨이었습니다. 이세벨은 아세라를 숭배하는 사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아합은 이세벨에게 눈이 멀어 하나님을 져버리고, 우상을 용납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엘리야는 말틴 루터와 같이, 세례 요한과 같이 대담하게 배교한 왕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는 그가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힘입어 불같은 열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 선포하고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아합왕과 이세벨에 대한, 그리고 우상숭배에 대한 분노의 열정으로 타올랐습니다. 또한 그는 기도의 열정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으로 타올랐습니다. 그는 스스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바알 선지자들과 이세벨에 대하여 맞설 때에 결코 허리멍텅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거짓 제단이 허물어지고 하나님의 제단이 세월질때까지 쉬지 않고 맞서 나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사건은 홀로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겨루어 하나님을 높이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그의 용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의 용기는 여호와를 향한 열정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단순합니다. 단순했기에 그는 죽은 아이를 기도로 도전하여 살렸습니다. 그는 단순했기에 비를 오게도 하고, 오지 않게도 했습니다. 그는 단순했기에 여호와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불같은 선지자이며,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역사에 있어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여호와를 향하여 열정적인 사람, 사단의 역사에 대한 분노의 열정으로 타오르는 사람, 단순하게 믿음의 역사에 도전하는 불같은 사람, 바로 이러한 불같은 열정이 지도자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이 불같은 열정이 기적이 낳습니다. 기적에 도전하는 열정, 믿음의 역사에 도전하는 열정을 우리 모두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  느헤미야 - 영적 지도자는 무너진 하나님의 역사앞에 책임을 통감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 하면 “아하!” 하며 나오는 한마디, 그것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훼파된 예루살렘 성의 소식을 접하고 그는 수일을 울고 슬퍼하며 통곡했습니다. 그는 훼파된 예루살렘 성앞에서 책임을 통감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방의 조롱거리가 되어 포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환란과 능욕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없이 무참히 깨어져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현실앞에 영적인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그는 재건하길 원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재건되기를 소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진 현실앞에서 다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함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재건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지도자는 무너진 역사, 훼파된 믿음의 역사를 지켜보며 영적분노를 느껴야 합니다. 무너진 역사 앞에서 책임을 통감하는 지도자가 진정한 지도자인 것입니다. 그는 내 일이 아니라며 방관할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맡은 관원으로 있으면서 신임을 받고 있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위치에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현실속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기의 편함을 추구하지 않고, 민족의 슬픔에 동참했습니다. 자기의 안락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에 책임을 통감하는 한사람을 통해 역사의 새벽을 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 한사람을 이스라엘 역사의 새벽을 여는 사람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는 무너진 하나님의 역사앞에 가슴아파하며, 책임을 통감하는 사람입니다.

8.  이사야 - 영적 지도자는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시대의 예표와 기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 의해 멸망되리라는 예언을 하기 위해 이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20:2) 이 말씀은 벗은 몸, 벗은 발로 다니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애굽과 구스의 멸망을 이사야의 스트립쇼를 통해 보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하기 힘든 순종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루도 아닌 3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비록 사람들 보기에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순종하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벗은 몸, 벗은 발로 행한 것은 애굽과 구스에 대한 예표와 기적을 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애굽과 구스의 멸망을 예언하시기 위해 스트립쇼를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과 함께 반앗수르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을 하나님보다 더 굳게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굳게 의지하고 있던 애굽과 구스가 장차 포로가 되어 발가벗겨져 큰 수치를 당할 것을 이사야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지도자는 그 시대의 예표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이 모든 사람들에게 예표가 되어야 합니다. 과연 나는 나의 삶이 이 시대가 아니라 하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예표가 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바로 영적 지도자는 자신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고,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긴 삶이 되어야 합니다.

9.  예레미야 - 영적 지도자는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눈물을 쏟아붓는 사람입니다.
     (참조. 사 20:9)

우리는 예레미야,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쇠퇴에 대해 슬퍼하며, 가슴아파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용기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용기있게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멸시했고, 핍박했습니다. 그는 반역자로 몰려 감금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궁전에서나 길 모퉁이에서나 어디에서나 임박한 심판을 끊임없이 증거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했고, 그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애국자였습니다. 패망해 가는, 쇠퇴해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지도자, 그는 사랑을 가진 용기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른 선지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 살길이 바빠 왕의 비위나 백성들의 비위나 맞추는 자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살길을 추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함으로 도리어 능욕 당하고, 사람들의 멸시와 조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앞에서 자기가 해야 할 도리를 믿음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는 영혼들을 향하여 지칠 줄 모르는 연민의 마음,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혼을 향한 뜨거운 눈물을 쏟아붓는 지도자였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멸망의 구덩이에 빠져가는 저 영혼들을 바라보며 냉냉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불타는 사랑의 눈물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영혼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그가 진정한 영적 지도자인 것입니다.

10.  다니엘 - 영적 지도자는 뜻을 정하여 굽히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젊었을 때부터 굽히지 않는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되는 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1:8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그는 하나님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바대로 뜻을 정하여, 그 뜻을 결코 굽히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에게 죽음이 와도 굽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의 친구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금신상앞에서 절하지 아니하고, “그리아니하실지라도”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은 자신에게 죽음이 올지라도 뜻을 정한바는 그대로 순종하고,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특히 인상깊은 사건은 그가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하루 세 번 기도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감당하였던 사건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기도하는 모습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예전대로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바라보며 기도하기를 정확하게 감당했던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다니엘과 같이 하나님앞에서 뜻을 정한바 내게 어떤 손해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절대 굽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소감과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앞에서 잡은 바 방향을 어떤 순간에서도 100% 순종하는 그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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