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 2 1.~1950년
․1919년 평남강서 3․1독립만세 운동 지도자
․1920년 조선물산장려회 조직(평양)
․1927년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 및 평양지회장
․1945. 11월 조선민주당 창당
․1970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민족의 사표(師表)로서 그의 열렬한 애국정신과 숭고한 독립정신은 이 시대를 사는 후손들의 참 귀감이 되고 있다. 일제하에서 선각의 교육자요 국산품애용의 열렬한 실천자였으며, 광복후 반탁운동과 민족자주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平南 江西에서 출생
선생은 1883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엄친 창녕조씨(昌寧曺氏) 경학(景學)과 자친 경주 김씨 경건(敬虔) 사이에서 외아들로 출생했다. 선생은 7세 때에 한문공부를 시작해 10년에 걸쳐 사서삼셩 등 기초과정을 배웠다.
15세 때부터 평양에서 포목상과 지물상을 경영하며 가계를 꾸려온 선생은 5척단구의 이름난 술꾼이었다. 그러다가 서당의 동기선생인 한정교(韓鼎敎)의 인도를 받아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후 새학문에 대한 동경이 불같이 일어나서 23세의 만학으로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했다. 1906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먼저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고 1910년 명치대학 전문부 법학부(明治大學 專門部 法學部)에 입학했다.
五山學校에서 후진 양성에 헌신, 사치와 허영을 배척
1913년 명치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한 선생은 남강 이승훈(南崗 李昇薰)의 초청으로 민족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동경에서 견문을 넓히고 또한 세계 속의 조선을 바라보며 교육의 방향과 포부를 가졌던 이념과 선구자적교육을 인정받아 2년 후에는 교장으로 승진하게 되었으며 사감을 겸하여 주야 24시간을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했다. 선생의 풍모는 매우 독특해서 5척단구에 머리를 빡빡 깎아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갓신을 신었다.
이때부터 선생은 국산품을 애용하여 허영을 배척하는 모범된 삶을 보여주어 항일의 표징으로 나타났으며 민족적인 긍지를 가지고 실천했다. 선생의 교장생활은 스스로 학생과 똑같은 규율을 지키고 민주적 자치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지도하면서 장차 이 나라의 큰 일꾼을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교장직을 사퇴하고 강서군 사천(江西郡 沙川)장날의 독립만세운동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그후 특별한 사명을 띠고 상해(上海)로 망명하려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게 되어 교육계를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조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한편 선생은 항상 조선 사람의 약점과 결점을 뚜렷이 지적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데 앞장섰다.
『우리는 먼저 조선 사람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는 철저한 신념의 소유자였다. 언제나 애국애족하는 정신을 고취하고 무엇보다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나라 사랑의 지름길이며 민족자립경제를 촉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정신보급에 힘썼다.
1920년 평양에서 조선 물산장려운동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운동이 시작되자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가서 각 지방에서는 물산장려회 또는 토산품장려회 등으로 단체조직이 속출되고 금주․금연동맹과 같은 도덕적인 성격의 운동으로가지 파급되었다.
1923년에는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조선 민립대학기성회를 주축으로 벌어진 조선민립대학설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2년에는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 언론창달에 힘쓰고 민족계몽에 앞장섰으며 그후 1937년에 수양동우회 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1921년부터 11년 간에 걸쳐 평양 YMCA 총무로서 기독교정신과 민족부흥의 정신을 일체화 함으로써 항일의 선봉에 서서 일제 말기에 소위 신사참배, 궁성요배 등 강요에 결연히 반대했다.
民族唯一黨인 신간회의 중앙위원 및 평양지회장으로 활동
1927년 민족의 좌우합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가 서울에서 조직되자 선생은 신간회 중앙위원과 평양시 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민족단일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항일투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려는 대전제와 민족과 사회가 한덩어리가 되어 항일 공동전선을 펴나가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
선생은 이 무렵 청년회 조직과 강연회 토론회 등을 육신의 곤고함을 잊어버리면서 활동했는데 이때의 별명이 「무주랑 빗자루」였다.
키는 작았으나 담대하고 얼굴 빛과 흰 머리카락은 청초한 모습이었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열띤 웅변을 할 때는 듣는 사람마다 공명을 얻어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광복후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평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
1945년 8월 17일 평양에서 조선건국준비평남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동년 8월 18일 평남 도청에서 있었던 일본군 항복조인식에 입회하는 형식으로 참석 하였다.
8월 26일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공산당을 평양 호텔로 초청하고 연립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선생이 위원장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 측에서도 수명이 조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립정권의 수립은 이때까지는 선생의 지도력을 배제할 수 없어 이뤄진 부득이한 방편이었다.
이에 반해서 공산당의 위상은 날로 부상되고 소련군정과 김일성을 중심한 인민위원회는 날치기 행정으로 판을 쳤다.
1945년 11월 평양에서 조선민주당 창당
1945년 11월 3일 선생은 평양에서 조선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5년 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1946년 1월 2일 소련군정에 신탁통치 불찬성의 뜻을 통고하고 한편으로는 반탁 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소위 인민위원회 위원장직도 사퇴했다.
1946년 1월 6일 마침내 소련군장과 김일성 일파와의 최후 담판은 결렬되고 선생이 인민위원회 건물 현관을 나서자 이미 소련군에 의해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실려 고려호텔로 연행되어 갔다.
그 후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생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월남을 권하는 인사들에게 『나의 일신을 염려하지 마시오. 나는 북한의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이미 굳게 결심하였고』라며 오직 애국애족과 민주주의를 위하는 굳센 신념으로 끝내 권유를 거부한 민족수호의 정치가였다.
북한동포의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분, 공산당원도 그 인격 앞에 겸손하게 절을 하였던 분, 월남동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선생, 오늘도 우리 민족의 가슴가슴 마다에 살아 있으며 선생의 높은 유덕을 기리는 소리는 지금도 끊임이 없다
조만식 선생.
1. 지도자로서의 준비 ; 조만식은 1883년 평양 강서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살에 한문 수학, 13세에 결혼, 17세에 아들을 얻었으나 지체 불구아로 일찍 사망하였다. 20세에는 불행히도 아내를 잃고 이의식 여사와 재혼하였다. 조만식은 이 때에 뜻을 새롭게 세워 장사를 집어치우고, 23세 때인 1905년에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고,?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게 되었다. 특히 숭실학교 설립자이며 교장인 배위량 목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배 교장은 성품이 강직하고 대담하며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조만식은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운동에도 뛰어난 학생으로 특별히 배 교장의 사랑을 받았다. 졸업할 무렵에는 독실한 신앙인이요 애국자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민족지도자로서의 기틀을 형성했다. 조만식이 숭실학교에 입학한 1905년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해였다. 그는 민족을 구원하려면 자신부터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여기고,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26세에 동경 세이소꾸(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하고, 1910년에는 명치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여름방학이 되어 귀국했다가, 한일합병이 되자, 평양은 온통 비통에 잠겨 있었다. 조만식도 울분을 참을 길 없었다. 민족을 위해 몸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동경으로 돌아가 김정식과 함께 YMCA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김정식의 제의로 백남훈과 함께 동경 한국인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렸다.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가 와서 교회 담임을 했다. 당시 동경에는 500여 명의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김성수, 송진우를 비롯하여 조소앙, 신익희, 장덕수, 김병로, 김준연, 현상윤 등이 당시의 유학생들이었다.
2. 교육자 조만식 ; 1913년 조만식이 명치대학을 졸업하자, 서대문 감옥에 있던 이승훈의 부탁을 받고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역사와 지리 등을 가르치다가 2년 후에 교장으로 취임하여 9년간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무보수로 일하였다. 가족은 평양에 두고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하였다. 머리는 박박 깎고 언제나 한복 바지저고리에 무명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소금으로 이를 닦고 팥비누(팥 껍질을 벗겨 만든 비누)로 세수하였다. 이는 국산품 애용운동의 실천이었다. 조만식 교장은 기독교의 사랑을 교육의 기본지침으로 삼고 모든 일을 솔선수범하여 학생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그는 1인 4역으로 교장, 교사, 사감, 사환 일까지 맡아서 화장실 청소도 손수 하였다. 일본인의 죄악은 미워하였으나 일본인을 사랑하여 저들을?왜놈?이니?쪽발이?니 하여 폄하하여 부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적을 사랑하면서도 그 악과 싸운 종교인이요, 참다운 민족지도자였다. 주기철, 한경직, 김홍일, 김억, 김소월 등의 인재를 길러내었다.
3. 민족운동과 투옥 ;3 ․ 1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 전, 그는 오산학교를 사임하였다. 평양의 3 ․ 1운동은 이승훈이 지휘하고, 조만식이 협조하여 전개되었다. 천도교인이 합세하여 1주일 가까이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만세운동이 계속되었고 이는 평안도 방방곡곡에 번져나갔다. 만세 소리와 일경의 총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시민들이 검거되어갔다. 조만식은 이승훈과 협의하여 후일을 위해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다. 상해임시정부와 앞으로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탈출 직전 일본 헌병대에 연행되어 3 ․ 1운동 주동과 망명 기도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1년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조만식은 옥중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기도와 찬송으로 지내다가 형기를 두 달 앞두고 가석방되었다. 조만식은 민족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을 규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평양 YMCA 총무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4. 물산장려운동 ;조만식은 한일합병 후 밀려들어오는 일본 자본의 예속을 막고 경제자립을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1922년에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하였다. 일본 물건을 사용하지 말고 우리의 토산물 사용을 권장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평양에는 일용품의 80%가 일본 제품이었다. 조만식 회장이 이를 호소하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왔다. 그러자 일제의 압력이 커져갔다. 그러나 조만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개해나갔다.?산에서 금이 나고/바다에서 고기/들에서 쌀이 나고/목화도 난다.
이처럼 물산장려가를 부르면서 평양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작달막한 키, 까까머리에 말총모를 쓰고, 짧은 무명 두루마기를 걸치고 앞장서서 무리를 이끄는 조만식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일제는 눈꼴이 사나웠지만, 명색이 토산품 장려이므로 법으로 처단할 수가 없었다. 이 물산장려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고, 물산장려가는 차츰 국민의 민요처럼 불려졌다. 조만식은 자신부터 철저히 실천하고자 명함도 한지로 만들어 사용하였다.?오늘날 우리 민족이 이렇게 가난하게 된 원인은, 자기 것을 천시하고 남의 것을 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외국의 침략을 당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우리 손으로 좋은 물건을 만들어 애용하면 자연히 생산이 증대되어, 산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면, 일본경제의 침략을 막을 수 있습니다.?이런 조만식장로의 호소는 화류계에까지도 파급되어, 기생들이 비단 대신 무명 치마저고리로 바꾸어 입었고, 원근 각지의 직물공장과 거래 상가들도 분발하여 평양의 양말, 고무, 메리야스 공업은 크게 발전하여, 일본의 유수한 기업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자본 형성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5. 오산학교 동맹휴학사건 :이승훈은 자신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키려고 평북도지사와 교섭하였더니, 일제는 조만식을 교장직에서 물러가게 하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700여 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일제는 배일사상을 지닌 조만식을 그대로 둘 수 없는 입장이고 이승훈도 양보할 수 없었다. 이승훈은 도지사에게 말하기를,?이보쇼, 도지사 영감, 우리 고장이 애국심이 강해서 꺼리는 모양인데, 조선인이 조선민족을 사랑하는 건 당연하지 않소? 또 그의 신앙이 못 마땅한가 본데, 사랑의 종교가 어째서 교장해임의 사유가 될 수 있는거요??라고 했다. 일제는 배일사상의 바탕에 기독교 신앙이 깔려 있다고 보고, 이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이를 잘 아는 이승훈은 끝까지 버티며 말하기를,?학생들이 자치회에서 결정한 일을 난들 어떡합니까??라고 했다. 이렇게 팽팽하게 맞서다가 결국 도지사가 양보하여, 조만식의 해임방침이 철회되었다. 그 대신 동맹휴학의 주모자를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이승훈은 이 문제를 놓고 조만식과 상의하였다.?고당, 아무래도 형식적이나마, 무슨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 같소.? ?……?, 그래서 다섯 명의 학생을 퇴학시키되, 고등보통학교 인가를 받은 후, 편입시험이라는 절차를 거쳐서 다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 후 일제는 여전히 조만식에 대한 감시를 않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마펫 교장이 찾아왔다. 조만식을 강사로 초빙하기 위해서였다. 조만식은 오산학교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마펫 교장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수락하였다, 그래 숭실전문학교에 가서 법학개론과 경제원론을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산정현교회 오윤선 장로가 설립한 숭인중학교 교장을 겸임하였으나, 일제가 승인해주지 않아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직접 학원을 경영하려는 생각에서 숭인중학교를 상업학교로 개편하여 민간인 힘으로 경영해나갔다. 일제는 실업학교에 대해서는 쉽게 인가해 주었다. 조만식은 오산학교 제자 이 항복을 교장으로 앉히고, 교사로 한경직, 김재준, 김효록, 원흥균 등 쟁쟁한 멤버를 끌어들였다.
송삼용 지음/ 생명의말씀사
서점가에서 관심이 있는 주제 중에 하나가 '리더십'이다. 사람들은 지도력을 발휘해서 조직을 잘 지도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마음에 리더십에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 보면 진정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없는 시대에 존경하고 따를 리더를 갈망하는 데서 오는 관심이기도 하다.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그런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고당 조만식>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고당 조만식>은 그의 삶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진정한 지도자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당 조만식은 민족의 큰 스승이요 시대의 등불이다. 그는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따랐지만 결코 자만하거나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말만 앞서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행동하는 지도자였다. 고당은 정치적인 것에 처음부터 관심을 두고 살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때 그는 민족을 깨우고자 교육에 먼저 열정을 쏟았다. 그러나 그는 교육은 물론 경제, 언론, 체육, 종교, 농촌운동, 청년활동, 반공 등 각 분야에 손길을 뻗쳤다.
그가 각 분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선각자였기 때문이다. 선비 집안에서 한학을 배웠고 나중에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배웠던 고당은 자신이 명예나 영달을 위한 목적으로 살지 않았다. 기독교를 젊은 나이에 소개 받고 믿게 되었던 그는 자신의 배움의 목적을 오직 하나님과 민족을 위한 것으로 삼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음성과 뜻에 관심을 두셨으며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다. 고당은 그리스도를 안 뒤에, 그의 삶의 근간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삶의 주권을 그리스도께 내어 드렸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보거나, 권력을 지향하지 않고 낮아지고 섬기고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 또한 오직 나라를 생각하고 젊은이들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썼다. 그는 민족의 십자가를 스스로 진 사람이었다. 옳은 것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고당은 한정교라는 친구에게 예수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신학문의 권유도 한정교로부터 받았다. 그가 신학문을 결심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술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염려했다. 고당은 술을 끊기로 작정하고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술자리를 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금주는 물론 결별을 선언했다. 더구나 그 다음날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숭실학교 초대교장인 배위량을 찾아가 입학 의사를 밝혔다. 술냄새를 풍기는 청년을 쳐다본 배위량은 "공부는 무엇하려구 하나?"고 물었다. 고당은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소"라고 했다.
▲ 고당 조만식
그의 말은 그 이후 변함이 없이 지켜졌다. 우리와 성정이 같았던 고당이지만 그는 심지가 굳었다. 약속대로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의 행적 가운데 보이는 것들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가 일본 유학시절 유학생들이 감리교와 장로교로 나뉘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자 그는 한 민족 사람들이 나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며 장감 초교파 연합교회를 설립해 예배를 드렸다. 또한 그는 지연 중심의 사람 차별을 하지 않기 위해 출신 지역을 묻지 않을 만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었다.
민족적 화합을 강조했던 고당은 민족 공동체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사분오열된 정당과 정치인들의 모습에 가슴 아파했다. 저자는 책에서 고당의 이런 모습을 두고 "고당의 한 민족 공동체 사상은 '하나님도 한 분'이요, '교회도 하나'요, '민족도 하나'라는 성경의 정신을 실현한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
<고당 조만식>에서 우리는 그의 사상이 성경과 한문학, 그리고 비폭력의 삶을 살았던 간디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는 결코 정치적인 제안에 현혹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3.1 만세 운동을 통한 비폭력의 삶을 철저하게 따랐다.
역사의 인물을 탐구한다는 일은 쉽지 않다. 전기를 구성한다는 것은 특별히 역사적 사실과 증거자료를 철저하게 고증할 필요가 있다. <고당 조만식>은 저자의 근면성을 잘 드러나게 한다. 또한 목회자답게 고당의 이야기를 신앙적 측면에서 잘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고당의 면면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감동을 받는 것은 고당의 삶이 철저하게 살신성인적이라는 점이다. 시대의 어두움 가운데 그의 삶은 군림하여 자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삶에는 자기희생의 그리스도의 정신이 짙게 배어있다. 그는 북한에 공산당이 지배하면서 정치일선에 들어선다. 그리고 소련에 의한 신탁이 진행되자 단호하게 신탁을 반대한다. 고당의 제자가 열아홉 번을 찾아와서 설득했지만 그는 고개만 저었을 뿐이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남쪽에 있던 이승만 일행이 밀사를 보내 그를 남쪽으로 내려 오도록 요청한 일이 있다.
그러나 고당은 결국 남한 행을 마다하고 평양에 남기로 결심한다. 그의 결심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는 공산당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불쌍한 동포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 남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결심은 마치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고자 결심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다. 죽음을 택한 고당의 순결한 신앙은 오늘날 권력에 최선을(?) 다하는 정치인들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다.
권력을 탐하더라도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는 지도자가 이 땅에 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특별이 <고당 조만식>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들었다. 나라가 뒤숭숭한 가운데 고당이 그리운 것은 그의 사심없는 나라 사랑과 사람을 사랑한 그의 삶의 모습이 아른 거리기 때문이다.
[출처: 교회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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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봄, 조만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31세의 나이로 오산학교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과 동시에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동거동락했다.
매일 삶으로 보여준 조만식의 실천적인 교훈은 학생들에게는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추운 겨울 이른 아침, 조용하던 기숙사 주변에서 쨍쨍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학생들이 기숙사 방에서 나와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화장실에서 바닥을 내리치고 있는 조만식 선생을 발견했다.
“아니, 선생님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아무 것도 아니야. 화장실 배설물이 넘쳐 울려서 꽁꽁 얼어버렸구먼. 이걸 좀 깨야 용무를 보지 않겠어. 허허허!”
학생들은 몸 둘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그 중 한 학생이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아니야. 다 됐어.”
선생님이 자신들을 위해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자 학생들은 큰 감화를 받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눈 때문에 학교 정문이 막히곤 했다. 그 때도 고당은 꼭두새벽부터 나가 정문에서부터 운동장까지 모두 쓸었다.
당시 오산학교에서 고당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던 한경직 목사는 고당에 대해 이렇게 피력했다.
“나는 일생동안 여러 은사들에게 배워왔지만 학생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실제로 모범을 보여주며 그의 전 생애를 희생한 교육자는 오직 고당 한 분뿐이라고 생각한다.”
고당은 무슨 일이든 말없이 실천했다.
‘고당 조만식’(생명의 말씀사)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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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曺晩植 1882∼1950) 설명>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昌寧). 평안남도 강서(江西) 출생.
출생지 : 평남 강서(江西)
주요수상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70)
1905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정칙영어학교)]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년간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그 무렵 인도의 독립운동가 M.K. 간디의 무저항주의· 인도주의· 민족주의에에 공감하여 이를 독립운동의 본보기로 삼았다.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3년 귀국하여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있다가 2년 뒤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에서 물러난 뒤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1년간 복역하였다.
1921년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1922년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평양기독교청년회총무, 산정현교회 장로를 지냈으며, 1923년 송진우(宋鎭禹)·김성수(金性洙) 등과 연정회(硏政會)를 발기,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 활동에 참여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 그 후 숭인중학(崇仁中學)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장을 지내고 1932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높이는 동시에 비폭력·무저항·불복종의 민족주의운동을 호소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도에 반대하여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평양에서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당수로서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연금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소련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부하였다.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내세우고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소련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월남(越南)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도 거절하였다. 그 후 6·25전쟁 때 평양형무소에서 끝내 월남하지 않고 있다가 1950년 10월 18일에 공산당에 의해 총살당했다고 전해진다. 1991년 유발(遺髮)을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평생을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살았으며, 민족주의자로서 일관된 삶을 유지하였다
♤조만식 장로님의 겸손 ♤
주기철 목사님과 사제지간이 되고 주 목사님 교회의
장로로 시무 하시던 조만식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조 장로님은 오산 학교에서 교장으로 있을 때,
주 목사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조 장로님이 예배시간이 지나도록 손님과 이야기 하다가
교회에 들어 오셨습니다.
주 목사님은 설교를 하다가 "조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마시고 서서 예배를 드리시오"하고
호령을 했습니다. 이럴 때 보통사람 같았으면
그냥 나가든 가, 의자에 앉아서 목사에게 욕을 하며
험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 장로님께서는 그대로 서서 예배를 보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주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는 "서 계시는 조 장로님,
기도해 주십시요"하니 기도하시는데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거룩한 주일 에 하나님 만나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요시 한 죄를 용서하옵소서"하고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서서 예배를 드리신 장로님을 본 교우들은
큰 감동을 받고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장로님의 신앙을 우리는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자존심과 인격의 손상을 당하셨을까?
그러나 기도와 순종으로 극복했을 때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빛날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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