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연구소 : 김 인 철 목사
유대교 종파들 - 신학적 배경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교는 종교적 민주화를 이룩했다. 포로기 이전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자들을 통해 해석되거나 선포되었고, 토라 연구와 정결한 생활방식 또한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 더 이상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없게 되면서 유대인들은 기록된 말씀-토라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곳곳에 세워진 회당을 통해 토라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일반인들도 성서 연구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성전 영역과 성직자들에게 제한되던 정결 규례가 유대 땅과 유대 사회 전체로 확대 적용되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예전처럼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렀지만 토라의 실천을 통해 유대인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자발적 노력들은 종파 운동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종파들이 표준적이고 단일한 형태의 유대교를 지향하며 각축전을 벌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종파들은 각자 자신들의 믿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데 힘썼으며, 주후 70년 성전 파괴이후 바리새파 유대교가 대중 속에서 일반화되기까지 공존했다. 주후 1세기유대 사회에서 기독교 또한 나사렛파로 불러지는 하나의 종파였다. 따라서 유대교 종파에 대한 연구는 초기 기독교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 시각을 제공해준다. 물론 종파들은 본토 유대 사회에서 시작되어 꽃을 피웠고 해외에서는 활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해외에서는 성전 제도 뿐 아니라 정결 규정조차 본토에서처럼 제대로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파운동의 배경
1. 종파의 정의
유대교 역사 연구가 샤이 코헨의 정의에 의하면 종파란 ‘좀 더 큰 집단으로부터 이탈하고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때문에 좀 더 큰 집단의 이상을 자신들만이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소규모의 조직된 집단’이다. 다시 말해서 종파(sect)는 아직 대규모 교단(denomination)이 되지 못한 채 조직화 되어 있는 배타적 종교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조직으로 들어온 구성원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경계를 긋고 교류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종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과 분리되기 위해 사막이나 외딴 지역에 집단 거주하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고, 도시나 마을에 그냥 살면서 비종파인들과 교제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종파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의로운 자, 선택된 자, 순수한 자 등의 용어를 적용하여 우월감을 갖게 한다. 반대로 일반인들을 사악한 자, 저주받은 자(요 7:47-49), 어둠의 아들들, 박해하는 자 등의 용어로 지칭한다. 이런 용어의 사용은 일반 종교인들로부터의 분리와 구성원만의 배타적 교제를 영구적인 것이 되게 한다. 한마디로 종파주의자들은 분리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종파(sect)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야 할 단어는 이단(heresy)이다. 이단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이레시스(ai`re,sij)는 신약 성경에서 네 번 나온다(행 24:5,14, 갈 5:20, 벧후 2:1). 그런데 교부들에 의해 이 단어가 이단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 전에는 단순히 분파 혹은 사상적 학파를 가리켰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26:5에서 바리새파가 “엄한 파(하이레시스)”로 번역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주후 90년대에 완성된 글에서 요세푸스가 유대교 종파들을 소개하면서 ‘사상적 학파(하이레시스)’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가 종파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하이레시스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더라도 정죄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신구약 중간기 유대교는 정통(옳은 것) 혹은 표준(보편적인 것)의 개념이 없는 채 다양한 모습을 모두 포용했기 때문이다. 또 그런 토양 속에서 기독교가 탄생하고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2. 역사적 배경
종파 운동은 에스라 느헤미야의 개혁운동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전 537년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브네이 하골라)들은 그 땅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암 하아레츠)의 성전건축 참여제의를 일축했다. 그것은 혼혈이든 아니든 그 땅 백성들(암 하아레츠)들이 유대 사회에 들어올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성전 재건을 독려했던 학개는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는 모두를 남은 백성(쉐에리트 하암)으로 취급하고 있다(2:2). 다시 말해서 성전을 재건하지 않는 자들은 경멸조로 ‘이 백성’으로 치부하며(1:2), 성전 재건에 순종하는 자들은 남은 모든 백성(1:14)으로 간주한다. 마침내 학개는 성전 재건에 참여하는 유대인 모두를 ‘이 땅의 모든 백성(콜 암 하아레츠)’으로 부르며(2:4) 사로 잡혔던 자의 자손들(브네이 하골라)과 땅의 백성들(암 하아레츠)을 하나로 간주한다. 그들은 함께 성전을 재건하고 유월절도 지켰다(에 6:21). 그러나 주전 458년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는 사로 잡혔던 자의 후손들이 국제결혼을 통해 혈통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을 보고 개혁을 단행했다. 이미 유대사회의 국제결혼 역사가 80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과 레위인일지라도 유대사회로부터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그는 유대사회를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브네이 하골라)’로 불렀다(에 10:7,16). 에스라는 일반 유대인의 결혼 기준을 제사장들에게 요구하는 수준 이상으로 높였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전유물이었던 토라를 백성들이 직접 이해할 수 있도록 힘썼다. 그가 토라를 읽고 해석해주었던 장소도 성전 마당이 아닌 수문 앞 광장이었다. 주전 444년에 돌아온 느헤미야는 에스라의 결혼 정책에 토라에서 요구한 십일조와 제물에 관한 규정을 보강했다. 그는 토라에 재 헌신한 사람들을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다(느 9:1, 10:1-39). 중요한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가 혈통적인 유대인들일지라도 토라를 지키지 않을 경우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기로 한 것이다(에 6:21, 느 10:28). 이것은 앞으로 진정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 토라를 지켜야 하며, 자신을 오염된 사회로부터 분리시켜야 하는 분파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진정한 유대인-하나님의 백성 논쟁은 마카비 항쟁으로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소위 하시딤(경건한 자들)으로 불러지는 유대인들은 성전을 제우스신전으로 대체하고, 토라를 불태우며, 할례와 안식일과 정결음식을 금지시키는 안티오쿠스 IV및 그를 추종하는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안식일에도 전투를 고집하는 마카비 형제들의 주장 때문에 일부 하시딤들은 군사적 행동을 중지하고 은둔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요단 강 동편 베레아 지역으로 물러나 에세네 혹은 세례 공동체를 형성했고, 멀리 다메섹으로까지 가서 경건주의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하시딤 가운데 마카비의 군사 조직에서 탈퇴한 일부는 바리새파라는 이름으로 불러지며 토라의 해석과 실천에 몰두했다. 하시딤이 아닌 유대인들 가운데는 사두개파와 셀롯파(열심당)이 있었다. 사두개파는 마카비 가문에서 대제사장직을 탈취하므로 밀려난 사독 계열 제사장 가운데 헬라파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마카비 가문에 맞서 싸우는 대신 마카비 가문의 정치적 헬라화에 동반자가 되기를 원했다. 귀족 계층을 형성했던 그들은 서민 계층 위주의 바리새파를 견제하므로 반사이익을 누렸다. 사두개파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셀롯파는 외세와 외세 협력자들에 맞서 무력 항쟁을 시도하며 정치적 불안정기에 주로 활약했다. 요세푸스는 네 개의 이들 종파 가운데 바리새, 사두개, 에세네가 이미 주전 요나단의 통치시기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종파운동은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신학적 배경과 핵심 쟁점
마카비 항쟁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종파운동은 이 시기에 기록된 묵시문학과 종파들의 문헌에서 그 신학적 배경과 핵심 쟁점들을 찾을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신구약 중간기의 사회 분위기는 포로기 이전의 것과 사뭇 달랐다. 예언자를 통해서 알 수 있었던 야훼의 명령은 토라 읽기를 통해 이해되었고, 성직자의 전유물이던 토라는 회당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확산되었다. 따라서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고, 개인의 책임 또한 강조되었다. 일찍이 에스겔은 혈통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시대가 끝나고 선악 간 개인의 행위에 따라 상벌이 시행될 것으로 예언했었다(겔 18:19-35, 출 20:5중-6하). 여기에 이방인들의 개종과 혼혈족들의 유대 사회 진입도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는 것에 일조를 했다. 유대 사회의 진정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혈통은 더 이상 필요충분조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토라의 실천 여부가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가되었다. 그와 함께 어떤 토라가 진정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명이냐 하는 것이 논쟁의 대상이었다. 사두개파는 성문 율법(토라 베크타브)만을 토라로 본 반면, 바리새파는 구전 율법(토라 베알페)까지 토라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바리새파는 자신들만이 진정한 계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비의 전승 방식으로 성문 토라의 해석을 강화시켰다.
유대교 종파 운동의 신학적 배경 두 번째는 제 2 성전에 관한 것이다. 소위 스룹바벨의 성전은 이방 왕의 명령으로 지어졌으며, 낙성식 때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만큼 세키나의 구름도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그 성전은 안티오쿠스 IV와 폼페이우스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므로 심각하게 권위가 손상되었다. 그리고 사독 계열만이 맡을 수 있는 대제사장 제도는 마카비 가문에 의해 탈취되었으며, 셀류오쿠스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발라스 왕에 의해 임명되었다가 이두메 출신 헤롯 왕과 로마 정부에 의해 임명되는 등의 제도로 고착되어 정통성을 의심받았다. 따라서 제사장 공동체를 형성했던 쿰란 에세네파는 사악한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을 만큼 오염된 것으로 보았다. 더구나 성전 제도를 장악한 사두개파가 최초에 사용했던 태음력은 일 년이 355, 354, 353일이 될 수도 있고, 19년에 일곱 번 들어가는 윤달 계산에 착오가 발생하기도 했다. 따라서 언제나 고정된 날짜에 절기를 지킬 수 있도록 일 년 364일의 태양력 사용을 주장했던 바리새파가 볼 때 문제가 많았다. 비록 바리새파가 성전 제도를 전면 부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포함한 모든 유대인들이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수준의 정결을 유지하도록 주장한 것은 성전 제도에 대한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갈 때 요구되었던 정결 목욕을 일상에서 요구한 것도 유대 땅 전역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성전과 같은 곳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같은 정결을 유지하지 않는 자들과 악수하거나 함께 식사하는 것도 불결에 오염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만의 식사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신학적 배경 세 번째는 부활과 내세에 관한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선악에 대한 상벌이 현세에 시행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집트가 주전 1,000년경에 벌써 내세에 관한 가르침을 발전시킨 것과 대조적이다. 그런데 포로기와 헬레니즘 시대를 거치면서 현세적 보응에 대한 가르침은 회의적이 되었다. 예를 들어 마카비 항쟁에 참여했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무참하게 살육 당했음에도 현실적인 보상은 없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사두개파와 에세네파 사이에 있던 바리새파는 부활과 내세 보상에 관한 가르침을 이 시기에 발전시켰다. 그리고 일부 묵시 문학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그러나 에세네파는 하나님의 현세적 보응이 예정대로 시행될 것으로 믿었고, 사두개파는 현실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며, 내세도 부활도 예정도 운명도 없는 것으로 보았다.
유대교의 종파들
제 2 성전 시대 유대교 종파들에 대해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에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같은 사상적 학파가 있으며, 제 4의 철학파로서 열심당(셀롯인)이 있다고 소개했다. 물론 요세푸스는 헬라주의적인 로마 제국에 이 종파들을 철학적 관점에서 소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바리새파를 스토아학파에 비교하고, 에세네파를 피타고라스학파에 비교한 것이 그 예가 된다. 이외에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가 쓴 <유대인을 위한 변증서>에 에세네파에 대한 기록이 있다. 물론 주후 2세기 이후 수집되기 시작한 랍비 문헌에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쿰란에서 발굴된 문헌에는 에세네파의 사상과 삶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들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약 성서에는 에세네파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전혀 없고, 열심당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한 사람 시몬이 그쪽 출신이었다고 말할 뿐이다(눅 6:15). 그러나 랍비 문헌보다 먼저 기록된 신약성서는 제 2 성전 시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에 대해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와 에세네파와의 신학적 공통점에 대해서도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요세푸스가 언급한 4대 종파 외에 다른 종파도 있었으며, 조직적 종파로 발전하지 않은 운동들도 있었다. 종파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과 위계질서, 규칙, 입회절차, 신학적 입장 등이 분명해야 한다.
1. 바리새파
1)기원과 구성원 ; 바리새(פרושים)라는 이름은 “분리하다” 혹은 “떨어져 서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파라쉬(פרש)에서 파생되었다. 그들이 어디로부터 왜 떨어져 나왔는지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카비 항쟁 때 안식일 전투 문제로 등을 돌린 하시딤이었을 것으로 본다. 랍비 문헌에 의하면 대제사장 사독의 혈통으로서 마카비 가문이 아닌 의인 시몬이 바리새파의 시조이다. 이들을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마카비 상 7:13과 마카비 하 14:6에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단체’ ‘용감하고 율법에 온전히 헌신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체’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의 출현에는 에세네파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에세네파의 엄격한 정결 규정들과 성별을 위한 노력은 바리새파에서도 발견되며, 다메섹의 하시딤 공동체에 보내진 쿰란 공동체의 편지에서 에세네파의 조직이 바리새파의 조직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또한 바리새파의 공동체였던 “하베로트”와 에세네파의 공동체였던 “야하드”가 비슷한 이름을 사용한다는 점도 그런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바리새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시험 기간을 통과해야 했다. 요세푸스가 에세네파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규정을 모두 살펴본 다음 19세 때 바리새파에 입단했다고 하는 표현이 이를 말해준다. 입단 자원자는 시험 기간을 거쳐야 했으며, 공동체의 규칙을 모두 지키겠다는 맹세를 율법학자 앞에서 한 다음 입단했다. 바리새파 회원들이 지켜야 하는 규칙들은 주로 정결 규례, 십일조, 금요일 저녁 공동식사와 금식에 관한 것들이었다. 대부분 소도시 상공인들로 구성되었던 바리새파는 반드시 시골 사람이나 평민들만 입단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에도 “거룩한 공동체(하베로트)”라는 이름의 바리새 공동체가 있었고, 성전 제사장들 중 상당수가 바리새파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수의 율법학자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바리새인이 다 율법학자가 아니며, 모든 율법학자가 다 바리새인도 아니었다. 율법학자들 중에는 사두개파도 많았으며, 바리새인 중에는 율법학자가 아닌 사람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 연구에 열심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 대왕 시절 바리새파의 숫자는 약 6,000 명이었다고 한다.
2) 신학 사상과 생활 방식 ; 요세푸스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영혼의 불멸과 부활을 믿으며, 예정과 자유의지 모두를 인정했다. 신약 성서도 바리새인들의 부활과 영생의 신학에 대해 같은 증언을 한다(행 23:6-9). 바리새파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구전 율법 즉, 조상들의 유전을 성문 율법과 같은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13권 10: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리새인들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으나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지 않은, 이로 인해 사두개인들이 배척한 어떤 규정들을 백성들에게 전해주었다. 사두개인들은 단지 기록된 규정들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해야 하고, 조상들이 전해준 것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두 집단이 서로 논쟁을 하고 심각한 견해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로들의 유전을 성문 율법처럼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마 15:1-3, 6하)
복음서의 곳곳에는 바리새인들이 조상의 유전-안식일 규정, 정결 규정을 지키지 않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정결 규정과 안식일 규정을 엄격히 지켰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바리새인으로 살았을 때 조상의 유전에 나오는 엄격한 규정대로 살았음을 자주 고백하고 있다(행 5:34, 빌 3:5-6). 바리새인들의 강조점을 요약하면 십일조, 안식일, 정결 규례 준수가 된다. 마 23에 나오는 설교에서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의 이방인 개종이 오히려 위선자를 양산하며(13-15), 각종 맹세 규정의 경중이 뒤바뀌어 있고(16-22), 십일조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큼 율법의 근본정신에 충실하지 않으며(23), 정결 규정을 겉으로만 지켜 자기 위안을 삼는데 그친다고 비난했다(24-28). 그리고 결혼 제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바리새인들과 관점을 달리한다. 바리새인들은 여자가 음식을 잘 못하거나, 심지어 남편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선언하기만 해도 이혼이 성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배우자의 부정이 아닌 어떤 문제도 이혼을 성립시킬 수 없다고 선언했다(마 5:31-32). 쿰란 공동체가 만든 나훔 주석에는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듯 ‘부드러운 것들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묘사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에 대해, 로마의 지배에 대해 그들이 중간적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붙여졌거나, 명예와 부와 종교적 권력을 함께 추구하는 그들의 엘리트주의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다.
3) 사회적 지위 ; 바리새파는 헤롯의 통치 이후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 헤롯이 하스몬 왕가 시절 수혜집단이었던 사두개파를 견제하기 위해 바리새파의 위상을 높여준 탓이다. 산헤드린 공회의 절반은 바리새파가 차지했으며, 성전 제도를 장악했던 사두개파였음에도 바리새파가 만든 규정대로 의식을 집행해야 했다. 예를 들면 성문 율법에 없는 초막절에 제단위에 물 붓는 의식은 바리새파의 규정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요하난 벤 자카이는 성적 부정을 의심받는 여인에 관한 법(민수기 5장)과 암송아지의 목을 꺾는 법(신명기 21장)을 중지시켰다. 바리새파는 저명한 율법학자들 덕분에 토라에 정통한자들로 대중의 존경을 받았으며, 까다로운 규정 준수 때문에 경건한 자들로 인정받았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자들로 비난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마 23:6-7). 그러나 그들은 하스몬 왕가의 얀네우스 통치 시절 800명이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정도로 한 때 정치적 박해를 받기도 했다. 바리새파가 가지고 있던 이중성은 서민들로 구성된 종파이면서도 서민들에 대해 엄격주의 혹은 엘리트주의를 고수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조상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 암하아레츠와 자신들을 엄격히 구분하여 율법을 모르는 자들의 지도자로 행세했다. 그들은 서민 대중들이 율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여겼다(요 7:49). 바리새인들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4대 종파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이들은 바리새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채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갈릴리 티베리아로 진출하여 교세를 확장했기 때문에 갈릴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나사렛파와 경쟁관계가 되었다. 오늘날의 랍비 유대교는 바리새파 유대교의 후신이다. 신구약 중간기의 종파 가운데 바리새파가 대중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단적인 예로 농촌 지역을 포함 전국에서 정결 예식용 욕조가 300 여개나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결 규례를 강조하던 바리새파의 영향으로 보아야 한다.
4) 기독교와의 관계 ; 복음서에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어느 곳을 가든지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부딪쳤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바리새인들이 가장 위협적인 집단이었던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에 일절 관여한 바 없다. 오히려 바리새인이었던 니고데모는 동료들의 비난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변호했으며, 장례를 치르기 위해 향료를 준비해왔다. 그리스도의 승천 후 사도들이 사두개파에 의해 곤경에 처했을 때 지혜로운 말로 건져주었던 가말리엘도 바리새파 학자였다(행 5:33-40). 그리고 부활과 영생과 천사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바리새파는 그리스도와 신학적 입장을 같이한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가 목수의 아들로서 랍비로 존경받았다는 사실이 상공인들로 주축을 이루었던 바리새파와 정신적 공감대를 형성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 대부분이 율법에 대한 해석-할라카(실천적 가르침)라는 점에서 바리새파의 지향점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제자 육성 방식, 개종자를 얻어 제자로 육성하라는 명령은 바리새파와 활동 방식을 같이 한다.
2. 사두개파
1) 기원과 구성원 ; 사두개인을 가리키는 헬라어 자두카이오스는 히브리어 ‘짜도킴(צדוקים)’의 음역(tranaliteration)이다. 사독 자손들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사두개인들이 사독의 자손을 표방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메넬라오스와 마카비 가문에 의해 대제사장직을 강탈당했던 사독 자손들은 세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프톨레미 왕가의 후원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경쟁하기 위해 이집트 레온토폴리스에 성전을 세운 오니아스 IV 그룹이다. 둘째는 유다 광야의 쿰란 폐허로 들어가 에세네파 제사장 공동체를 세운 ‘의의 스승(모레 하쩨데크’ 그룹이다. 셋째는 예루살렘에 남아 하스모니안 왕가의 정치적 동반자로 헬라주의적 실용노선을 걸었던 그룹이다. 이들은 하스모니안 왕가의 후원을 등에 없고 바리새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들은 정통 종교지도자들과 성문 율법의 수호자로 자처했으며, 명문 귀족계층들로 구성되었다.
2) 신학 사상과 생활 방식 ; 사두개파가 부활, 영생,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는 것은 신약성서의 증언과 요세푸스의 기록이 일치한다.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 규정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부활 논쟁을 벌이려고 했던 그들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마 22:23-33).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들은 예정이나 운명 같은 것도 믿지 않았으며, 세상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사두개파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성문 율법만을 모세가 받은 하나님의 계명으로 본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두개파의 입장이 같다. 그런데 사두개파가 성문 율법을 강조한 것은 제사장 제도를 통한 신정정치(theocracy)의 원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민들의 성서연구와 해석과 가르침을 강조하는 바리새파의 설 자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다. 식자층이었던 그들은 헬라 문화를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였으며, 토지를 많이 소유한 대지주 계급이었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13권에서 사두개파가 “부유한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었으나 대중의 지지를 받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민중들 가운데서 추종자가 없다”고 했다.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이 성문 율법만 고집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흐르는 물(마임 하임)이 다 정결하다면 묘지에서 흐르는 물도 정결한 것인가”를 물었다(미쉬나 야다임 4:6-7). 예수 그리스도는 바리새인과 함께 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을 본받지 말도록 제자들을 경계했다(마 16:5-12). 에세네파 쿰란 공동체는 성문 율법만을 토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사두개파와 신학적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사두개파가 절기의 계산을 태음력에 맞춘 반면 에세네파 쿰란 공동체는 태양력에 맞추었다.
3) 사회적 지위 ; 권력 지향적인 사두개파는 성전 제도를 장악했으며, 산헤드린 대 공회의 절반을 차지했다. 하스모니안 왕가의 비호를 받아 한때 바리새인들을 박해했으나, 얀네우스가 죽은 후 정치적인 보복을 받아 많은 수가 희생되기도 했다. 사두개파는 주후 70년 성전 이후 유대사회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까지 종교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언제나 외세를 등에 없고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힘썼던 것이다.
4) 기독교와의 관계 ;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 20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 야고보를 정죄하기 위해 최고의회를 소집했던 대제사장 안나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다혈질이고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재판석에 앉으면 어떤 유대인들보다 범인을 가혹하게 다루는 사두개파를 따랐다” 그것은 사도행전에서 사두개파들이 사도들을 박해했다는 기록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행 5:17).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들 -가야바와 안나스도 사두개파이었다.
3. 에세네파
1) 기원과 구성원 ; 에세네라는 단어가 어느 나라 말인지 조차 불분명한 가운데 이 종파는 수도생활에 초점을 맞춘 경건주의자들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쿰란의 제사장 공동체도 에세네파라고 할 수 있다. 엄격한 공동체 규율과 극도의 성별을 강조하는 에세네파도 다른 종파와 마찬가지로 마카비 통치에 불만을 품은 하시딤의 일부 회원들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요세푸스의 글에서 설명한 종파 가운데 가장 지면을 많이 할애했을 만큼 에세네파의 영향력은 광범위한 지역과 계층에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와 필로가 전국적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고 묘사한 에세네파는 주로 유다 광야와 요단강 동편 베레아 지역에서 발견되는 세례 공동체와 맞물려 있다. 쿰란 공동체가 본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에세네파는 지역마다 지부를 두었다. 예를 들어 에세네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할 무렵 예루살렘 성내 남쪽에 집단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 에세네파는 최고 지도자 감독(메바케르) 아래에 12 명으로 구성된 회의에 의해 운영되었다. 감독은 30세 이상 50세 미만인 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집단 내의 범죄 신고를 받았으며, 오직 그만이 신규 회원의 가입결정권을 가졌다. 그는 지원자들을 심사하고 등급을 매겼으며,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자비를 베푸는 공동체의 목회자였다. 신입회원이 되려면 20세가 지난 성년이어야 했으며 일 년을 공동체 밖에서 메바케르로부터 공동체의 비밀 규칙을 배웠다. 심사에 합격한 자들은 입단서약을 하고도 공동체 안에서 2년의 수련 기간을 거쳐야 했다. 그들은 입단 시 서약한 대로 지식과 노동력과 재산을 공동체에 바치며, 상위 계급에 복종해야 했다. 일단 회원이 된 자는 하루 두 번의 공동체 식사와 식사 전 정결 예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쿰란 공동체의 설립자 ‘의의 스승’은 아마도 대제사장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각 지부의 수장들도 대부분 제사장들이었다. 쿰란 연구학자 쉬테게만(Hartmut Stegemann)에 의하면 ‘의의 스승’은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에 의해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한 후(요세푸스는 주전 159-152년 사이의 대제사장이 공석이었다고 말한다) 주전 150년경 에세네파 공동체를 만나 수장 노릇을 하다가 주전 110-100년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다. 쿰란 공동체에서 발견된 문서에는 구성원들의 서열이 제사장, 레위인, 이스라엘인, 개종한 이방인으로 되어 있어 위계질서가 분명한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쿰란 공동체 에세네파는 주후 68년 예루살렘 주변 지역에 대한 로마 군대의 대대적 소탕작전으로 사라졌다.
에세네파와 함께 생각해볼 점은 사마리아 종교이다. 1세기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모세 오경만을 경전으로 간주했는데, 쿰란 공동체의 것과 같았다. 그것은 쿰란 공동체가 사마리아 종교의 영향 아래 있었음을 말해준다. 사마리아 종교와 쿰란 공동체의 공통점은 둘 다 제사장 공동체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주전 3세기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지었으나, 주전 126년 유대 하스모니안 왕가의 요한 히르카누스에 의해 파괴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요 4장의 수가성 여인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사마리아인들이 비록 유대인들에 의해 이방인 취급을 받았지만 메시아(타헤브)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가 구원하고자 하셨던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는 사마리아를 자주 왕래 하셨으며, 사마리아인들을 칭찬하셨고, 행 8장에는 성령이 사마리아에 내려온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3) 신학 사상과 생활 방식 ; ① 쿰란 공동체가 보여주는 에세네파의 자기 이해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준비 공동체라는 것이다. 빛의 자녀인 그들 이외의 모든 유대인들은 어둠의 자식들이다. 그들의 문헌인 전쟁 두루마리에 의하면 최후의 날에 하나님이 빛의 아들들로 하여금 어둠의 자식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는다. 그것은 그들의 이원론-세상은 선과 악의 투쟁 장소라는 것과 이중 예정론-악인은 악인의 길을 가며 의인은 의인의 길을 가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설을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② 쿰란 공동체는 이미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 성령을 통하여 의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자체 제작한 감사시편(호다욧)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저는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당신께서 저를 당신의 힘으로 받쳐주시고, 당신의 성령을 저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저를 악한 전쟁 앞에서 강하게 하셨습니다”(1QH 7:6)
③쿰란 공동체는 3 종류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는 종교적 지도자로 제사장인 아론의 메시아이며, 둘째는 정치적 지도자로 왕격인 이스라엘의 메시아이고, 셋째는 종말론적 존재로서 ‘그 예언자’로 소개되었는데 모세와 같은 대언자로서 율법을 보완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계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④ 성전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부정적이다. 즉, 사악한 제사장들로 인해 성전 제도가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쿰란의 성전 두루마리 문헌에는 최후의 날에 성결한 영역이 에스겔의 환상처럼 지극히 거룩한 성전 본체에서부터 동심원을 그리며 이스라엘 전역으로 확대될 것이 그려져 있다. 마지막 날에 성전이 정결케 되어 자신들이 제사장 직무를 맡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 날이 오기까지 그들은 오염된 성전에 가서 제사 드리는 대신 자체 제의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첫째는 매년 대속죄일과 비슷한 연례축제를 행했다. 둘째는 매일 아침 해뜰 무렵 동쪽을 향해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셋째는 매일 두 번 식사 전 정결 예식을 행하고, 공동 식사를 통해 정결 음식 섭취를 준수하고, 식사를 전후해서 하루 네 번 기도를 드렸다. 넷째는 개인 성서연구의 시간을 가졌다. 이것은 모두 성전 제의를 대신하는 종교적 행위였으며, 그들의 공동체를 임시적 성전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최후 승리의 날은 오지 않았고, 그들과 예루살렘 성전이 함께 사라졌다.
⑤ 결혼에 관한 관점은 근본주의적이다. 에세네파가 독신 남성으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설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의 <유대인을 위한 변증서>에 에세네파를 독신 집단으로 기록한 것은 오류이다. 요세푸스도 유대 고대사에서 에세네파를 독신집단인 것처럼 묘사한 것을 전쟁사 2권에서 수정하여 그들의 혼인상태를 묘사했다. 혼인이 창조의 원리인 만큼 에세네파가 금욕주의를 채택한 것은 아니었다. 도시에서 살았던 에세네파는 결혼하여 자녀를 양육하고 살았다. 쿰란 공동체가 독신 남성 집단으로 비쳐진 것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아내들이 25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거나, 이혼으로 인해 홀아비들이 많아졌기 때문인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거기에는 에세네파의 일생 한 번 결혼 원칙(재혼불가), 임신 확인 후 성교금지 원칙,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의 부부간 성교금지 원칙, 성교로 인해 부정한 상태에서 정결 예식과 기도회 참여 금지 원칙이 작용했다.
⑥ 삶의 방식은 공동체 중심이었다. 그들은 모든 재물을 공동으로 소유했으며, 사유물을 숨기거나 거짓말을 했을 경우와 상급자에게 반항했을 경우 가혹한 벌을 받았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집단에서 추방형을 받을 경우 아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일반인이 만든 부정한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죄를 범한 자는 회개하기 전 정결 예식을 행할 수 없었는데, 공동체의 정결한 물을 오염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오직 의로운 영혼의 소유자만이 미크베(욕조)를 통과하여 의식상의 불결을 씻을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이 공동체 이외의 사람과 상종하지 않았던 이유도 불결과 죄악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직 그들은 공동체 구성원들과 상종하며 함께 살았던 것이다.
⑦ 쿰란 공동체의 특징은 방대한 문헌의 수집과 필사에 있다. 쿰란 공동체가 소장했던 문서는 세 종류-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문서, 외부 종파의 문서(토비트, 희년서, 벤 시라, 레위의 증언, 에녹), 창작 종교문서(시편, 전쟁 두루마리, 성전 두루마리, 다메섹 계약서, 공동체 규범, 나훔 주석, 하박국 주석)이다. 이 중에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문서에는 에스더를 뺀 구약 성서 전권이 들어 있는데, 에스더는 원래 소장되었으나 좀이 먹어 분실된 듯하다. 1947년부터 1956년까지 11 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900 여점의 문서는 일부 아람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것을 빼고는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쿰란에서 발견된 성서 두루마리가 가지는 가치는 말로 다할 수 없다. 그전까지 알레포 사본(주후 925년경)과 레닌그라드 사본(주후 1008년경)이 가장 오래된 사본이었다. 그런데 주전 2세기에 제작된 쿰란 사본이 발견됨으로써 늦게 잡아도 1000 년 이상 더 고대의 사본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동안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표준으로 사용하던 맛소라 사본과 쿰란 사본이 거의 일치했다는 점이다. 쿰란 공동체 문헌 작업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페세르 방식으로 기록된 주석이다. 주제별 주석인 미드라쉬와 달리 장별 주석인 쿰란의 나훔과 하박국 페세르 주석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모든 메시아 예언이 에세네파의 시대에 성취되고 있다고 가정하는 해석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4) 기독교와의 관계 ;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에세네파를 언급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세네파의 조직이나 가르침은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성전, 교회는 성령 받은 집단, 부당한 이혼으로 인한 재혼 금지, 공동 식사와 성찬 예식, 입회 예식으로서의 세례, 빛과 어두움 혹은 멸망의 자녀와 구원의 자녀라는 용어 사용, 악인들과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 몸으로 드리는 제사, 메시아 시대, 성서 연구, 죄 사함과 구원 등은 비록 에세네파와 기독교가 신학적 관점을 달리하지만 용어와 개념이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 16:8)이라고 했고,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에세네파의 용어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6-11)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 지라도”(롬 9:22-23)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2-13)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4. 젤롯파(열심당)
요세푸스가 제 4의 철학파라고 묘사한 젤롯파(카나임)는 혁신과 혁명의 방식이었다고 한다(유대 고대사 18권 11:9). 이 종파의 기본 주장은 “하나님 외의 왕이 없다”였다. 셀롯인들은 주후 6년 로마의 총독 퀴리니우스의 인구조사에 반발해서 갈릴리의 유다를 중심으로 항쟁을 일으켰다. 그들이 항쟁을 일으켰던 이유는 인구조사의 명령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윗도 자의적으로 인구조사를 행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샀으므로 이방 정권의 인구조사는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곧 진압되었지만(행 5:37) 새로운 사람들이 일어나 항쟁을 계속하면서 종파의 맥을 이어갔다. 이 종파를 젤롯파로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간음하던 모압 여인과 이스라엘 남자를 하나님의 질투(열심)로 죽인 것을 표방했기 때문이다(민 25:5-13). 그들은 외세와 연합한 유대인(부자, 귀족, 고위제사장)을 죽여야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을 시카리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품고 다니는 단도(시카르)에서 파생된 단어였다. 종종 그들은 강도와 혼동되었는데, 군자금 확보를 위해 마을들을 습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함락 때 젤롯파들은 모두 죽었으며, 마사다에서 끝까지 항쟁한 자들은 일부 시카리들로 알려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젤롯파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눅 6:15). 야고보서에는 예루살렘이 패망하기 전 그들의 활동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2:11)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젤롯)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자랑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젤롯)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3:14-16)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젤롯)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4:1-3)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4:11-12)
5. 테라퓨타인(Therapeutae)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필로에 의하면 이집트에는 테라퓨타인(치유자)으로 불리는 유대인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엣세네파와 비슷한 유대인 공동체였다. 그들은 결혼을 금하는 등 극도의 금욕적인 생활을 했으며, 공동식사와 기도와 성서 연구를 주된 과업으로 삼았다. 그들은 매일 아침 기도를 드렸고, 안식일에는 찬송을 부르고, 공동식사를 하고, 탈혼적인 춤을 추고, 성서 연구 중심의 정교한 예배를 드렸다. 구성원들은 연령에 따라 구분되었고, 연장자를 공손히 대했으며,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명상(contemplation)하는데 전념했다. 그들이 에세네파와 달랐던 것은 식사에 고기와 포도주를 금한 것과 여자들도 의식에 참여시킨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
기독교는 처음부터 새로운 종교로 출범하지 않았으며, 유대교의 한 종파로 받아들여졌다(행 2:14-47, 24:5, 28:22-23) 처음에 사도들이 대제사장들에 의해 박해를 받은 것은 정치적 이유였으며(행 4:1-22, 5:17-42, 12:1-4), 스데반 순교 사건으로 촉발된 박해는 헬라파 유대인들에 대한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반감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행 6:1-7, 7:54-60, 8:2-4, 11:19-20) 그러나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포위되기 시작할 때 나사렛파 유대인들이 펠라로 이주한 사건은 비 나사렛파 유대인들의 반감을 샀으며, 주후 80년대에 디베랴를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던 바리새파들이 이단에 대한 저주 기도문을 나사렛파에 적용시키면서 회복 불가능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133-135년에 일어난 바르 코크바의 항쟁 때 예수 이외 누구도 메시아로 부르기를 거절한 나사렛파 유대인들이 동조하지 않으므로 유대 사회로부터 축출되면서 각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더 읽으면 좋을 책들>
김창선, 한국성서학연구소, 쿰란문서와 유대교
마빈 윌슨, 기독교와 히브리 유산, 컨콜디아사
김판임, 비블리아아카데미아, 쿰란공동체
허셜 생크스, 한국신학연구소, 고대이스라엘
요세푸스, 생명의말씀사, 요세푸스 I, II, III
요아힘 예레미아스, 한국신학연구소,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샤이 코헨, 은성, 고대 유대교 역사
JC 판데어캄, 성서와 함께, 초기 유다이즘 입문
폴 존슨, 살림, 유대인의 역사 1
Judith Fain, Paul and the Hellenistic World, Jerusalem University College, Prototype Version,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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