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전신갑주를 입어라

안명애 2018. 2. 16. 11:45

전신갑주를 입어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놀이터가 아니라 사탄과 치열하게 싸우는 전쟁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그 싸움에서 이기고 싶다면, 당신의 적을 알고 그를 공격하기 위해 힘과 장비를 갖추고 또한 그의 공격을 막을 보호장비가 있어야 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6:10-18)

그럼 그리스도인 군사의 여러가지 장비들을 살펴보고 나서 우리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갑옷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진리의 허리띠


사탄은 언제나 거짓말장이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로 사탄을 대적해야 한다.
동양에서는 흘러내리는 옷을 묶고 물건을 허리에 차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허리띠를 띠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삶 가운에 모든 것을 꽉 붙잡고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요삼4절).

허리는 활동과 기동성과 지휘의 근원이다. 허리를 다친 군사는 별로 쓸모가 없다. 만일 우리가 진리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지 않는 다면 우리는 적에게 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삶에 스며드는 어떤 속임을 허용한다면 우리는 우리 위치를 약화시켜 그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진리의 허리띠는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방어하는 무기이다. 신자가 그의 삶에 진리의 장비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사탄의 공격에서 그를 보호할 것이다. 이 장비가 사탄의 공격을 예방하지 못하지만 공격으로부터 상처를 입지 않게 신자를 보호해 줄 수 있다.



의의 흉배


갑옷에서 흉배는 목에서부터 허벅다리 위까지, 병사의 상체 앞 부분을 덮는다. 흉배는 중요한 내장 기관들을 보호한다. 바울을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받는 그분의 의를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사탄은 고소(참소)하는 자로서 우리가 우리 죄를 기억하도록 하여 우리를 공격한다. 우리가 그분의 의를 전가받고 우리 것으로 삼게 됨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전가된 의와 분여된 의를 구별해야 한다. 죄인이 전가되며 이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신자가 주님과 동행하고 성령께 굴복할 때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분여되고 그는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4).

모든 신자는 칭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칭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주를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일단 하나님이 당신을 의롭다고 선포하셨다면 당신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 확고하게 서게 된다. 그러나 당신의 상태, 곧 당신의 생활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께 굴복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의 생활도 변한다.

흉배는 가슴을 덮는다. 이 점이 우리의 감정은 그리스도의 의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사탄이 우리를 고소할 때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사탄은 종종 우리를 중상 하고 비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들을 이용할 것이며 역습을 하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그러나 이 화전들은 우리의 중요한 기관들을 명중시키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을 의지하라. 당신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완성하신 사역을 의지하라. 당신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여졌다"(엡1:6)는 사실을 깨닫고 당신에세 전가된 하나님의 의는 결코 제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라.





사탄의 공격


고대 유대인들은 심장을 마음의 자리라고 생각했다. 가슴은 곧 그의 마음이요 생각이며 사상인 것이다. 사탄은 성도의 마음을 공격하기를 좋아한다. 이 부분이 의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의란 곧 칭의를 의미하고 있다. 성도를 비방하고 참소하기를 좋아하는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우리를 비방하여 마음에 상처를 안겨다 준다.

우리는 범죄한 자로서 본성적으로 불의 가운데 살았던 자들이다. 그래서 의인은 없고 한 명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의와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내가 누구보다 더 낫다"는 비교의식과 교만이 사람을 더욱 추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들의 의는 하나님의 기준에 도저히 이를 수 없고 사람 속에서는 전혀 의를 찾을 수 없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의를 선물로 주셨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 속에 그의 의를 심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불러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러므로 이제 사탄이 우리를 정죄하고 비방하는 화살을 쏘아 우리 마음에 절망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자포자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롬8:33,34) 하신 말씀을 힘입고 하나님의 의를 흉배 삼아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함을 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성도로서 의로운 삶을 힘쓰면서 스스로 자랑할 것이 있다면 다만 "예수님 때문에" 라고 고백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가슴에 담은 의는 나의 의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이다.



평안의 신


로마 병사들은 안정성과 기동성을 위해 징을 박은 신을 신었다. 당신이 어떻게 잘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당신이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결정한다. 만일 전사가 발을 헛디딘다면 그는 싸움에 질 것이다. 견고한 발판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적을 대할 때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진다. 또한 그는 비록 원수 사탄이 전략을 바꾼다 할지라도 사탄의 다양한 공격에 잘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에 기초하여 서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고전15:3-5).

바로 그리스도의 이 승리가 우리가 마귀와 싸울 때 우리에게 안전하고 굳건한 발판이 된다. 우리가 어디로 걸어가든지 우리는 승리의 발판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2).

예비한 것(엡6:15)이라는 단어는 장비를 갖춤,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자가 마귀의 공격에 대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 있는 신자는 싸울 수 있다. 그의 구세주는 이미 승리하셨으며, 그는 그 승리에 기초해 서 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 병사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수행한다. 그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사탄과 싸운다. 사탄은 세상에서 죄와 불안과 분열의 원인이다. 그리스도인 병사는 사탄을 대적함으로서 평화를 추구한다. 복음은 평화의 메시지지만, 사탄에 대해서는 선전 포고이다.





평안의 복음


영적 싸움터에서 그리스도의 군사들도 이런 준비가 있어야 한다.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된 신을 신고 있어야 한다. 평안의 복음은 '평화' 또는 '화해'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평화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리에서 막힌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평안의 복음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주안에서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만나게 하였다.

이제 평안의 복음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 성도들은 이웃과의 하나됨을 위하여 '화해'와 '평화'로 준비된 신을 신고 행동하는 화해자 들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신발은 행동을 의미한다. 발이 편하면 활동하기에 수월하다. 하나님과 화목함을 누리고 평안함으로 살아 가는 사는 성도는 이웃과의 화목을 이루어나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사탄이 성도들에게 다가오는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려는 것 이다. 가정의 평화를 무너뜨리고 교회의 질서를 혼란케 하며 성도간의 사랑을 깨뜨려 결국에는 갈리고 나뉘게 함으로써 복음전파를 의도적으로 방해하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주심으로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셨는데 사탄은 십자가의 능력을 무의미하게 하려고 온갖 중상과 모략으로 평화를 깨뜨리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을 이간질하고,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들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것은 모두 사탄의 궤계이다. 이러한 사탄의 계략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들이 신어야 될 신은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된 신이다. 곧 화해자의 신이다. 우리들이 가는 곳에 불화가 물러가고 화해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세상 전쟁에서는 휴식도 있고 휴가도 있어서 신을 벗고 쉴 수도 있지만, 영적 전쟁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날이 없다. 주님 오실 그 날 에 완전한 승리를 선포하시는 그 날까지 사탄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언제나 착용하고 있으면서 구두끈을 단단히 조이고 준비해야할 것 은 바로 '평안의 복음'이다. 이 신을 신고 말씀 위에 굳게 서는 영적 군사로 살아가길 바란다.



믿음의 방패


로마시대에 쓰던 방패는 세로 120, 가로60센티 크기의 나무로 만들어 졌다. 그 위에 가죽과 금속을 입혔다. 이 방패는 적이 쏘는 불화살(화전)을 피하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움직이는 성벽 역할을 했다. 이 불화살을 끄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당신의 믿음이다. 당신이 그분을 신뢰하는 만큼 당신은 그분이 이루신 승리를 함께 누릴 것이다.

사탄이 우리에게 쏘는 화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의심과 두려움과 염려와 같은 온갖 잡념이라고 생각해본다. 문득 우리 마음에 무서운 생각이 엄습할 때 때때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물론 사탄은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임은 사탄에게 있다. 만일 우리가 이 화전을 끄지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다 타 버릴 것이며 우리는 그 불의 파괴력으로 고통당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과 하나님 말씀에 매달리는 것이 이 화전들을 소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인 병사는 반드시 성경교리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이나 믿음에 대한 믿음이나 인간의 어떤 신조에 대한 믿음이니 믿음에 대한 것들도 이 화전들을 소멸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탄이 화전을 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만 화전이 불을 붙이지 못하게 할 수는 있다.

중요한 일은 즉시 화전을 소멸하는 것이다. 당장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말씀에 기록된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믿으라. 그렇지 않다면 그 불이 번지기 시작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거기에 기름을 붓는다면 그 불은 당신이 끌 수 없게 번질 것이다. 당신의 감정은 자극되어 화를 낼 것이고 머지 않아 사탄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다.





사탄의 불화살


우리 삶에도 무서운 공격이 언제나 있다. 사탄은 성도들에게 의심, 불순종, 배반, 탐욕, 두려움, 절망이라는 불화살을 쉴 틈 없이 쏘아댄다. 순전한 믿음을 빼앗아 가고 부패시키려는 음란이 어느 곳에 가든지 가득 차있고, 어둠과 타협하게 하는 유혹이 하루 종일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우리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는 사탄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향해 불화살을 쏘아댄다. 이런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를 잘 말씀했습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 믿음이 이 세상의 악한 풍조와 사상을 이길 수 있고 세상에서 성도가 당하는 핍박과 오해와 누명과 조롱을 막을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작은 핍박에도 넘어지고 만다. 조그마한 오해와 누명을 참아내지 못한다. 믿음의 사람 노아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조롱을 이기고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에서 건짐을 받았으며,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었고, 요셉 역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타국에 종으로 팔려 가서도 꿈과 소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승리의 삶을 살았고,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 궁전에서 누리는 세상 쾌락보다 자기 백성을 위해서 고난 당하는 길을 택하였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어떤 사람은 핍박과 고난과 비난을 받아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 믿음이 있었기에, 어떤 사람은 비겁하게 사는 것보다 용감하게 순교하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여러 번 "하나님은 나의 방패" (시18:2) 라고 노래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피난하는 것이다. 사탄이 의심과 낙심으로 공격해 올 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도록 하는 것이 이 믿음이며 유혹을 당할 때도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도록 하는 것이 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방패를 굳게 붙들고 다가오는 사탄의 모든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기 바란다.



구원의 투구


영적 전투에서 투구는 구원의 확신을 의미한다. 머리는 사고하는 부분이다. 모든 행동은 이 머리에 의해 조종된다. 그리고 신체의 다른 부위보다 노출이 잘 되어 적의 공격을 받기 쉽고 작은 충격에도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부위이다. 따라서 머리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사탄의 주요 공격대상이기도 한다. 사탄은 온갖 거짓된 이론과 사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지성을 공격한다. 사탄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심을 가지도록 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탄의 공격을 막기 위해 구원의 투구를 어떻게 쓸 수 있는가?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 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는 말씀을 확실히 나의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 기 바란다. 그리고 죄와 사망과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약속의 말씀들을 아멘으로 받기를 바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8:1) 라고 하셨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8에서는 구원의 투구를 '소망의 투구' 라고 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얻은 것이며 주님 께서 오시는 그 날 완성될 것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사는 것이다. 전쟁에 나간 군인이 승리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비록 지금 밀고 밀리는 접전이 벌어질지라도 기어코 승리의 그 날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소망이 군인의 사기를 높이는 것이다.

이 구원은 나의 노력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수양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거저 받는 선물 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하셨다. 이 구원을 확신하며, 죄 용서받은 믿음과 기쁨으로 살 때에 우리의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가 씌워져 있는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의 영생을 보장하신다. 나의 머리에는 예수의 보혈을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투구가 있는가? 맨 머리로 지내면서도 투구가 씌어져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지는 않는가? 구원의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승리의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소망의 투구


우리는 이 구원의 투구를 데살로니가전서5장8절 말씀과 확실하게 연결시켜야 한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바울은 여기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갖고 있는 소망을 언급하고 있다. 사탄은 종종 우리를 대적하기 위하여 낙담과 절망을 무기로 사용한다. 우리가 공격받기 가장 쉬운 때는 바로 우리가 낙담할 때이다 우리는 낙담해 있을 때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 온갖 유혹에 빠지기 쉽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복된 소망이 마음을 방어할 때 사탄은 우리를 낙담시키지 못한다.

낙담은 적의 손에 있는 치명적인 무기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낙담하여 하나님께 자신들을 죽여 달라고 간구하였다. 시편의 시들은 다윗이 낙담 속에 깊이 빠졌으나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소망할 수 있었던 여러 경우들을 기록하고 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43:5).

우리의 마음과 소망이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다면 헌신한 신자의 삶에 파고드는 절망과 낙담은 당신을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에서 마지막으로 투옥당하여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로마에 함께 있던 많은 신자들이 바울 곁을 떠났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소망으로 자기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았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




성령의 검


갑옷의 다른 부분들은 방어를 위한 것이었는데 성령의 검만은 공격하는 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4:12).

하나님의 말씀, 곧 영적인 검은 인간이 휘두를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검과는 다르다. 물질적인 검은 사용함에 따라 무디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예리하다. 물질적인 검은 육체의 힘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영적인 검은 그 안에 생명과 능력이 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 주님은 광야에서 사탄을 만나 유혹을 받고 그를 물리칠 때 성령의 검을 사용하셨다. 그분은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 구약성경을 인용하셨다.
마틴 루터는 이 교훈을 잘 알아 위대한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지었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데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하나님의 말씀


사탄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것은 이 말씀의 칼은 성령을 통하 여 우리에게 주어지고 성령께서 이 칼을 날카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로마군사들이 사령관으로부터 검을 받아 충성을 맹세하고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을 받아 악한 세상에서 적과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승리의 필수적인 요건은 이 말씀의 칼이 예리하고 강력하도록 성령을 통해 날마다 갈고 닦는 것이다. 만일 칼 이 녹이 슬어 깨어지고 둔한 검이 된다면 그리하여 아무 것도 자를 수 없고 부서져 버린다면 그것은 곧 패배와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복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부르심을 받은 십자가의 군사들이다. 한가하게 세상 즐거움에 젖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의 검을 한 쪽 구석에 방치하여 녹슬게 하면서 무책임하게 인생을 허비할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기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고 있다.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말씀을 읽고 들으며 공부하시기 바란다. 그 말씀을 암송하시기 바란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신 것처럼 (마4:1 이하) 말씀의 검을 즉시 빼어 사용할 수 있도록 날마다 묵상하며 사용하길 바란다.



기도의 갑옷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6:18).

우리는 기도로 갑옷을 입고 성령으로 기도한다. 우리 자신들은 아침 묵상 시간이 갑옷을 이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과 뜻을 하나님께 드린 후 성령이 우리를 충만케 채워 주실 것을 구하고 믿음으로 갑옷을 차례차례 입는다. 바울은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종류 네 가지를 기술하고 있다.

1. 꾸준한 기도
곧 무시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날을 시작하면서 몇 마디 경건한 말을 중얼거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하는 기도는 결코 사탄을 이기지 못한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눅18:1).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7).
이 말씀은 우리가 숨을 쉴 때마다 기도를 끊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기도와 신뢰의 자세를 계속해서 취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2. 조화있는 기도
곧 모든 기도이다. 그럼 모든 기도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모든 기도는 예배와 경배와 죄의 고백과 간구와 감사를 포함한다. 만일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가 어떤 것을 구하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조화있는 기도의 참된 축복을 놓치고 말 것이다. 오직 구하기만 하는 기도는 이기적인 기도일 수 있다. 사탄을 이기려면 모든 기도가 필요하다.

3. 성령의 권능을 입은 기도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이 말씀은 성령이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어 계속해서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기도는 쉽지 않다. 만일 우리가 육체의 정욕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머지 않아 포기할 것이고 사탄이 승리할 것이다.

4. 깨어 있는 기도
병사는 적에게서 눈길을 땔 여유가 없다(눈을 감고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잡고 기도하는 자세는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뜨고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든 채로 기도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하신 권고 였다(막13:33). 마귀가 하고 있는 일을 경계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기도할 때 마귀가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이러한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군대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장비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 서서 버티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복음의 갑주를 입고 기도로 갑옷을 차례차례 입으라.





사탄을 공격하는 법


역사를 살펴보면 부흥 운동이 사회 전체에 일어났던 기록들을 여러 가지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부흥 운동이라 하면 일련의 집회로 생각하기 쉬운데 진정한 부흥 운동은 전 국민에게 파급되어 영향을 미쳤을 때를 말한다.

어느 지역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충분히 많은 수가 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고 더불어 이웃과도 올바른 관계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지역에 축복을 부으실 만한 여건이 마련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교회에서 퍼져나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미치게 될 것이다.

1. 지역사회를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이 영적 전쟁을 함으로써 지역사회를 위해 더욱더 기도하도록 인도하신다. 그 지역의 상황과 특성에 따른 하나님의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과거의 죄와 습관들이 악의 잔재물로 남아있는 곳에서는 그 지역이나 건물에 대한 영적인 씻음이 필요하다. 유령이 나오는 집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령을 몰아내야 하는 곳들이 많이 있다.

2. 전도하는 것

전도는 영적 전쟁과 분리될 수 없다. 어둠을 몰아내는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은 불을 켜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바로 어둠 가운데 불을 켜는 것과 같다. 교회가 받은 부르심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3. 의로운 마음으로 반응하는 것

모든 역경을 겪을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리어 의로운 행위로 반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고 마귀를 격퇴시키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원수 마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닥치는 역경에 대해 의로운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견디어 나가야 한다.

4. 포로를 자유케 하는 것

때때로 귀신들린 사람과 정면 대치하는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모든 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실 때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더 많은 속박을 만들어 가는데 이것들을 쫓아내 자유케 해야 한다.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요인들이 복합되어 있는 경우가 흔히 있다. 가령, 귀신의 세력이 들어와서 고질적인 질병에 걸리는 수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악령들을 쫓아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질병도 고쳐야 한다.

5. 나누어 주는 것

사탄은 재정에 관심이 많다. 사탄은 사람의 이기심이 돈에 의해 조장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라고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 실종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것이다. 탐욕은 바로 사탄의 경제적인 궤계의 근간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근간이 되는 것을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나눠주는 정신인 것이다. 사람이 나눠주면 이기심으로 사람을 옭아매려는 사탄의 시도가 완전히 좌절되고 만다. 단지 한 사람의 주는 행위 이상으로 마귀의 역사를 꼼짝 못하게 만든다. 나눠주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순환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6. 연합하는 것

연합은 영적 전쟁의 강력한 무기이며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다. 마귀는 연합을 싫어한다.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분열의 씨를 뿌리고 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깨어지는 경우, 우리는 마귀를 크게 유리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리는 언제나 양을 잡아먹기 위해 언제나 양떼를 흩어놓고 잡아 먹는다.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마귀에게 문을 굳게 닫아 놓게 되는 것이다.

7. 섬기는 것

사랑의 섬김을 통하여 이길 수가 있다. 만일 우리가 전쟁과 재난과 다른 비극적인 일로 재산과 건강과 집을 잃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와 있다면 우리는 마귀의 일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단지 사회적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명령이며 영적 전쟁과 직결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절망 속에 빠지게 하고 마침내 죽음으로 몰아넣는 멸망시키는 자를 물리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굶주린 자를 먹이고 집 없는 사람들과 난민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지원해야 한다. 이것이 영공을 통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원수 마귀와 대항하는 효과적인 영적 전쟁이다.

8. 찬양을 통한 것

성경은 어둠의 세력을 무찌르는 찬양의 역사에 대해 많은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성경적인 찬양은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천사들이 전투를 벌이고 매상황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와 설교에 헌신하는 이유는 축복을 받는다거나 충족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통해 우리는 어둠의 왕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내리며 결박할 수 있다.

9. 입술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

우리의 입술로 마귀를 꾸짖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입술로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공격을 받아친다.

10. 마지막 무기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승리자이다. 우리가 끈기를 가지고 견디어 내면 마귀는 꼼짝 못한다. 우리가 인내하는 사람인 줄 마귀가 안다면 이내 자기가 포기하고 만다.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영적 전쟁은 삶이다. 그것은 진리를 품으면서 원수를 분별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매일의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처분을 맡기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어둠의 세력은 물러가지 않는다. 우리가 원수 마귀를 질책하지 않는다면 마귀는 질책당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있는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악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영적 전쟁은 기독교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 가운데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다 포괄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영적 전쟁의 용사가 된다는 말이다. 영적 전쟁의 용사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지속적인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이다.





 

전신갑주란?

 

본문 /엡6:14-17

심한추위와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 쌓인 산길을 헤쳐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옷도 부실하게 입고, 신발도 얇고, 방한모도 쓰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았다면 체온이 급격하게 낮아져 결국은 동사를 면치 못할것입니다. 이처럼 마귀의 거센 폭풍 앞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전신갑주를 입지 않은 성도들이 있다면 분명히 악한 귀신, 추한 귀신, 거짓말하는 귀신, 억압하는 귀신, 점치는 귀신, 허약하게 하는 귀신, 각종 질병의 귀신의 공격을 받아서 혼절하게 되고 결국은 신앙을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로 8절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도들은 매일 주님이 주신 전신갑주를 입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전신갑주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1.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허리는 몸의 기둥이요, 중심입니다. 때문에 허리를 다치게 되면 온몸을 쓸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성도들의 신앙의 기둥이요, 중심인 허리를 공격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노예로 삼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철학이나 지식, 과학, 종교 등으로는 결코 마귀의 공격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유혹의 `강풍이 휘몰아치면 이와 같은 것들은 순식간에 흔들리고 뿌리채 뽑히고 맙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에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참 진리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로 마음의 허리를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삶의 기둥이요, 중심에 모시게 되면 이 사람은 어떠한 형편에도 요동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세상 바람이 아무리 불어와도 예수님을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예수님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허리띠를 띠고 이 세상을 살면 어떠한 세상 바람이 불어도, 어떠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도 조금도 요동치 않고 굳건하게 서서 살아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샤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허리를 동여매고 있으면 우리는 그대로 천국으로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방황하지 않습니다.
또 에베소소 1장 13정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로 허리띠를 띠면 구원을 받고 성령님께서 늘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들을 세상 풍파로부터 보호해 주십니다.
2.의의 흉배를 붙이고
흉배는 가슴을 보호하는 판을 말합니다. 인간들은 도덕적인 행위로 가슴에 흉배를 붙이지만 마귀의 죄책감이라는 공경을 받게되면 순식간에 넘어지고 맙니다. 심리학자들은 `신경 쇠약이나 정서불안, 정신이상 등의 질병 뒤에는 반드시 죄의식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라서 언제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삽니다. 불완전한 인간들은 세상에서 늘 양심의 고통과 가책을 느끼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심에 쌓여진 죄책감이 우리의 마음을 공격할 때 우리는 그 앞에서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죄가 더 드러나고,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부도덕한 생애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장 24절)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로써 마귀의 공격을 방어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늘 의의 흉배를 가슴에 붙이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의의 흉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주고 산 용서와 의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흉배를 가슴에 붙이면 마귀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죄를 짓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리셔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를 모두 청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가 너희들의 죄를 영원히 다 갚아 버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면 우리의 가슴에 튼튼한 의의 흉배를 붙이게 되는것입니다.
3.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을 신도
인본주의로 신을 삼고 자기 능력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늘 불안과 고통과 절망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늘 불확실성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의 평안히 살 수 있는 길을 예비해 놓았습니다.
디도서 3장 6절 7절에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용서를 받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되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신을 신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황페한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범사에 잘 되게 하시는 신발을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저주와 가난에서 해방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하나님의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8장 9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로마서 8장 28절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범사에 잘 되신 신발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저주에서 해방되어 형통하게 되고 가난에서 해방되고 굶주림에서 해방되도록 주님께서 평안의 신발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강건하게 살 수 있는 신발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심으로 우리들이 질병에서 자유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우리가 힘차게 기도하면 병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를 강건케 하는 신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을 신고 살아가라고 말한 것입니다. 행복의 가장 큰 조건을 평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통해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발을 신고 우리는 믿음으로 당당히 살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4. 구원의 투구를 쓰고
머리는 모든 생각과 사상의 근원이 됩니다. 머리를 보호하지 않으면 마귀는 우리들의 생각과 사상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세속적인 사상의 홍수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 우리의 생각을 보호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세상적인 것으로 오염되면 우리의 생명은 엉망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 마귀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투구를 써야 할까요?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이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용서받은 사람, 성령 받은 사람, 치료 받는 사람, 복 받은 사람, 영생 얻은 사람임을 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새 사람이 된 사상을 머리 속에 확실히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구원을 받아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투구를 쓰고 사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품고 요동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5.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우리들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시험의 화살을 쏩니다. 불붙은 화살을 쏘기 때문에 이를 막을 수 있는 방패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감각적인 지식으로 인생을 살면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감각은 현실적인 체험적입니다. 그러나 환경은 변화무쌍합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따라 살면 마음이 한시도 편하지 못합니다. 호수에 바람이 불면 물결이 치는 것처럼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늘 요동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지식으로는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을 따라 사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환경과 함께 변화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20절로 21절에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이것은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 났으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야고보서 1장 6절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감각적인 지식에 의해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요동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계시적인 지식을 통한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에도 말씀에 서고 하나님의 바라보고 믿음에 서면 환경에 요동치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로 주신 것입니다. 환경적으로 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지 밑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먹고 그 말씀을 믿고 살아야 믿음을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으며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편 1, 2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역사는 변하고 사회도 변화하지만 하나님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때문에 태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그것이 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감각적인 지식으로 사람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6.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전신갑주의 마지막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병사들이 전쟁터에 나갈 때 무기를 가지고 나가듯 우리의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검인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이나 공격이 아무리 강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은 인간적인 논리로 대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굳게 서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말씀 대신에 마귀와 논쟁하다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우리들을 논쟁으로 끌어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논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이유를 달고 논쟁하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는 논쟁을 걸어온다고 하여도 성령의 검으로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7절로 8절에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니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히브리서 4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다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논쟁하자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마귀와 논쟁을 해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두꺼운 방한복과 방한모를 쓰고 털신과 털장갑을 낀 사람은 어떤 추위와 눈보라도 겁날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들은 어떠한 마귀의 공격이 있다고 하여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용서와 의를 얻었다는 그 믿음의 흉배로 가슴을 무장하며, 구원의 투구를 쓰고, 복음의 신을 신으며, 믿음의 방패를 가지며, 말씀의 검으로 무장할 때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역사를 받아서 사는 우리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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