組織神學 序論
강의 이현채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연구원
제 1장 서론
1. 신학의 개념과 역사
(1) 교의의 명칭
교의학 또는 조직신학은 교회가 받은 교의를 다룬다.
* 용어의 유래와 뜻
헬라어 도케인에서 유래된 것으로 "내가 보기에 어떻다". "내 생각에는 어떻다". "내 결론으로는". "내가 확신하기로는". "나는 확신한다". 라는 뜻이 내포외어 있다.
a. 주 자료는 성경에서 나온다.
b. 교의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진리를 교회가 숙고한 결과라는 점
c. 교의는 어떤 권위 있는 교회 집단이 공적으로 채택한 것이라는 점등이다.
A. 교의의 형성 과정
진리를 가능한 전체적으로 보기 원하는 인간 마음의 충동은 오래 억제 될 수 없었다. 이성을 가진 존재들로서 개별적인 진리들을 수집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그 진리들을 상호 관계 속에서 봄으로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고 싶은 본능적 행동은 진리를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보고자 하는 지속적인 노력은 신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3세기 초부터 성경의 교리적 진리들을 완전하게 제시하고자 한 저작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런데 의도는 비슷했어도 성격상 많이 달랐다. 교부들 중에는 오리겐이 처음으로 교리적 신학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이 책의 이름은 "원리에 관하여" 이었다.
오늘날 원 저작은 단편으로 남아 있는데, 4세기경 루피누스의 번역본으로 전해진 이름은 "원리론"이다.
신앙의 근본 교리들과 주된 항목들이라는 성격의 글을 두 번째 쓴 인물은 락틴티우스이다. 그는 "신성 강요집"이란 이름으로 7권을 저작했는데, 격조 높은 문제의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한 변증이었다.
그 뒤에 쓴 사람은 어거스틴으로 "신앙 헨드북"으로 쓴 그는 "믿음 소망 사랑에 관하여"라는 부제를 붙임으로 책 내용을 소개했는데, 이 책은 사도신경만큼 권위 있는 것이었다.
그 후 교부시대 말기에 다마스커스의 요한이 "정통신앙에 대한 정확한 해설"이라는 책을 내었는데, 이 책은 현대의 교의 학에 가까우며, 전 4권으로서 1권은 하나님과 3위 1체, 2권은 창조와 인간의 본성, 3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육신, 죽으심, 음부에 내려가심, 4권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통치 및 신학의 다른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중세 동안에는 이전 만큼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주로 이전의 교부들이 쓴 글에 기초했기 때문에 명제 혹은 대전이라는 말을 점차 쓰게 되었다. 이때 가장 유명한 로마 교회의 권위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책을 완성치 못한 체 죽었다. 그 후 루터파의 교의 학자 멜랑크톤이 신학 통론을 썼는데, 로마서 강좌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후 쯔빙글리는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한 주석을 썼는데, 이 책은 개혁주의 신앙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해설이라 불렀다.
또 칼빈은 "기독교 강요"란 이름을 붙였는데,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이 명칭을 채택했다.
19세기에도 이 명칭은 모양만 약간 바뀌어 리차드 왓슨의 신학 강요로 나타났고, 게르하르트는 그대로 기독교 강요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신학적 저작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이름을 교육적, 이론적, 실증적, 교의적 등의 형용사가 사용 되었다.
교의적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자는 라인 하르트(1659)이다. 그는 자기 책에 "교의 신학 개요"라는 이름을 붙였다. 같은 말이지만 조직신학이란 말은 레이몬드와 하지와 밀리와 스트롱 등이 사용했고, 미국에서는 조직신학이라는 용어가 더 널리 사용되었다.
a. 성경적 인출 : 성경에서 인출되지 않은 교리가 교의가 되지 못하며, 성경에서 발견되는 진리들의 조직화한 신조들만이 진정한 교의의 가치를 가진다.
b. 교회의 반성 : 교의는 교의들을 완성된 형식으로 성경의 본문 중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계시된 신적 진리들의 반성에 의하여 그것들을 획득한다.
c. 교회의 공적 각식 : 교의는 교회의 공적 정의에 의한 각식과 신적 권위의 선언을 통한 정신적 수납으로 완전한 형성을 본다.
B. 교의의 요소
a. 사회적 요소 : 진리를 바로 이해하고 옳게 전파하여 사람들을 결속시키는데 있다.
b. 전통적 요소 : 오늘의 역사적 신조들은 여러 시대 교회의 사유의 결과인 유물이다.
c. 권위적 요소 : 계시된 말씀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교의 그 자체에 권위적 요소가 있다.
d. 문화적 요소 : 교회는 현실적으로 문화 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C. 교의의 필요성
a. 역사적 근거 때문에
(a) 이단에 대한 교회의 저항
(b) 학습적 교훈이 있음
(c) 성경 석의(釋義)
b. 인성의 요구 : 사람의 마음은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것을 요구한다.
c. 전도상의 필요 : 교리를 모르고 전도할 수 없으며 전하는 이마다 그 내용이 다를 때
d. 청중의 혼돈은 듣지 않은 것이 나을 것이다.
D. 교의가 교회에 필요한 조건
a. 교회는 교리를 근본으로 한다.
b. 교회의 통일은 교의적 일치를 요구한다.
c.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고 보호하는 의무를 지닌다.
d. 세상에서의 교회의 입장은 통일된 증거를 요구한다.
e. 교회마다 교의를 가지고 있다.
f. 교회의 안전과 진취력은 진정한 교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E. 교의 신학의 분류
a. 서 론 : 성경론이라고 말 할 수 있다.
b. 신 론 : 하나님의 존재를 논함
c. 인죄론 : 인간의 기원과 타락등을 논함
d. 기독론 : 그리스도의 신분 및 직무를 논함
e. 구원론 : 구원의 서정 및 성령님의 공작용을 논함
f. 교회론 : 교회의 성질 및 정치들을 논함
h. 내세론 : 육체적 죽음, 부활과 심판, 최후의 상태를 논함
F. 개혁파에서 말하는 교의 신학의 임무
a.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를 학문적인 형식으로 서술하여 기독교 진리의 전부를 포용하는 것임
b. 성경의 사실들을 취하여 그것들의 상호간과 기타 같은 종류의 진리들과의 관계를 결정하고 또 그것들의 정당성을 변호하며 그것들의 조화와 논리적 일치성을 보여주는 것임
(a) 건설적 임무
(b) 증명적 변호적 임무
(c) 비평적 임무(변증학적인 임무)
(d) 교회적인 임무
(e) 전도적인 임무
G. 교의 신학의 원천
a. 성경의 독특한 지위는 유일한 진리의 원천이며 66권으로 되어 있다.
b. 로마교회에서는 교회의 교훈과 신경도 원천으로 생각 함
c. 잘못된 교의 신학의 원천의 내용
(a) 그리스도인의 의식, 즉 신앙적 체험을 원천으로 생각하는 것은 슐라이허 막허와 릿출의 영향의 때문이다.
(b) 스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은 자들은 인간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만을 신학의 원천이라 한다.
(c) 신비주의자들은 신비를 경험한 것을 원천으로 내세운다.
H. 교의 신학의 방법
a. 기독교 유신론적 방법 :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도 경배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경만이 유일한 기준이다.
b. 사색적 방법 : 이는 인간 이성을 기준으로 하는 방법으로 인간 이성에 어긋 날 때는 받아 들이지 않는 차원 낮은 방법이다.
경험과 관찰에 준한다.
c. 경험적 방법 : 이는 신학적 지식을 인생 종교 경험에서 탐구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관찰하는 일과 경험의 감시아래 두어 실험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시 잘못된 방법이다.
d. 신비적, 교권적 방법 : 이는 종교 지식이 하나님의 직접 시달과 인생 활동의 신적 활동에 흡수에 의해 획득 된다고 주장하는
방법이다.
e. 종합적 방법 : 이는 하나님을 신학적 지식의 근원으로 높여 진리를 탐구하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신적 계시에서 신학을 연출하는 방법을 말한다.
(2) 교의 신학의 인식론
A. 교의 신학 중 지식의 3 원리
a. 실유의 원리 : 하나님이 절대적 자의식으로 모든 인생들에 지식의 원천이신 하나님이다.
b. 외적 원리 :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성경)
(a)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 창조물을 통해서 당신을 계시하심
(b)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 계시 : 성경에 있는 자기 게시만이 순수한 하나님의 지식을 전달한다.
c. 내적 원리 : 이성과 신앙
(a) 일반적 학문에서는 이성을 중점으로 한다.
(b) 그러나 교의학에서는 신앙을 중점으로 한다.
제 2장 종 교
종교와 신학의 사이에는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종교학으로 보고 있는 사실을 보아도 명백하다.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참 되고 살아 있는 의식적인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의해 결정되고 예배, 교제및 봉사의 삶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종교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그분께 인간으로 하여금 이 계시를 받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종교한 신에 관한 지식과 관련되는 모든 것을 계속적이고 성실하게 지키는 것으로 여긴다. 이는 거룩성으로 인하여 세속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가리킨다.
1.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종교
종교란 인간의 보편적 현상이며,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현상 중의 하나이다. 옷을 벗고 사는 인간이나, 입고 사는 인간들이나, 개인과 민족들에서 볼 수 있는 종교의 탁월한 의의와 그 놀라운 감화를 부정할 수 없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 같이 종교성이 있고 그 종교심이 약화되기는 하여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문제는 기독교가 들어 있어야 될 자리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 종교가 될 수 없어서 잡다한 종교가 대신 한다. 그러나 이방 종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
* 종교성은 왜 없어지지 않는가?
이는 하나님께로 창조를 받을 때 신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그 안에 종교의 씨앗은 소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심은 항상 있 는데, 그것은 신을 섬기고, 신과의 인격적, 생명적인 관계라고 한다.
참된 신앙은 전인적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부분적인 감정의 일로 종교 의식을 혼동하면 안 된다. 선과 악이 분명히 서지 않으면 참 복음이 없고, 복음이 없으면 의식적인 종교 생활만 있는데, 이는 종교성을 발휘하고 싶기 때문이다. 창조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되었고 종교는 창조의 원리이다.
* 종교가 타락하면 어떻게 되며, 무엇 때문에 타락하는가?
무당 종교로부터 시작하여 변질된 기독교까지 저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서 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하나님에게서 해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타락하여 피조물을 섬길 때, 종교의 힘으로 피조물을 향한 자들을 돌이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 종교가 있다. 이는 십자가의 구속으로 본래의 목적인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이것을 기독교 윤리의 영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가정을 희생시키면 안 된다.
(1) 종교의 본질
종교라는 용어의 뜻은 아직 확실하지 않으며, 다만 신들에 관한 지식과 관련되는 것을 계속적이고도 성실하게 지키는 것이며, 지킬 때는 그 거룩성으로 인하여 세속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가리키며 한 마디로 말하면 신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섬기는 것이다.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는 이방 종교라 하고 참 종교는 신이 사람을 찾아오시는 종교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는 유일한 종교이다.
A. 참 하나님을 지식하며 봉사하는 바른 양식이다.
B. 사람이 하나님에게 봉사와 존영을 드리는 덕행이다.
C. 존중하는 경외를 하며, 감사하는 예배와 사람의 봉사로 나타나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다.
D. 순수하고 참 된 종교는 엄정한 경외를 하는 하나님의 신뢰이다. 그리고 그 경외는 자원적 존경과 율법이 요구하는 바와 같은
합리적 예배를 포함하는 것이다.
E. 종교의 기원은 원시적 초자연적 계시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설명은 하나님의 계시에서만 발견된다.
더 많은 연구를 위하여 "학"을 하려면 현상을 연구해야 하고 현상을 모아다가 비교하고 거기서 무엇이 본질인지 알아야 할 텐데, 종교의 본질은 독단적인 학적 방법이 아닌 성경으로부터 잘못된 종교성을 발견 해 낼 수 있다.
기록된 말씀은 성경이요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며 말씀이 하나님의 해석이다. 따라서 창조와 인간에 관한 모든 해석이 성경에 있고, 성경에서만 바른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전제론 적인 논증으로 기독교만이 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올바른 정의는 하나님의 해석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면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이며 신인의 인격적 관계로서 생명적 관계이다. 한마디로 종교라는 것으 지으신 분을 섬김인 것이다. 그리고 종교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봉사 받을 예배 모범을 정하신다. 피조물은 최선을 다하는 예배와 찬양과 봉사가 포함된 경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참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구약의 예배에 관한 긴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이유들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 계시, 특별 종교는 기독교요, 그러한 의미로 종교란 기독교를 의미한다.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성경 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는데 이방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심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임을 알고 자신을 내어 맡김이 신앙이다.
(2) 종교의 3 요소
A. 지식은 신앙의 대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의 첫 번째 요소이다.
신앙의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 지식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되면 그 지식에 의해 우리의 모든 생이 지배되고 주장되는 실존적 지식이다.
B. 지식 후에 찬동과 동의로 시인하는 것이다.
신을 아는 지식을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만족함이 아니라, 그 지식이 나를 사로잡아 끌어 들인다.
C. 알고 동의하고 나를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신뢰이다.
신앙에는 신뢰가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이제 하나님께서 맡으셨으니 내어 맡기는 것이다. 세상적인 축복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하나님이 나를 영생에 이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을 확실히 기대하는 것이다.
슐라이허막허 이후에 지식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감정의 일이나 절대 의존이 중시되고, 의식의 영역, 지식은 경시 되었다. 심지어는 신학이 무슨 "학"이냐고 했다.
그러나 신학을 해서 복음으로 가르쳐 복음의 능력으로 새 사람이 되었으니 새 생명의 원리로 살게 하는 것이 종교의 일이다. 종교는 교회당에 만의 일이 아니고 감정의 일만도 아니다.
종교는 전인의 일이요 전 창조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종교는 항상 개인의 영역과 가정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내 인간 속의 "지,정,의"전체를 사로잡아 말씀대로 살게 만든다. 즉 새로운 실재가 되어 새로운 법으로 산다. 이러한 일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까지 변화시킨다. 우리는 예배만 하고 사회는 불신자가 하는 식은 잘못된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이니 이 모든 영역을 예수님의 것으로 성별대 드려야 한다.
(3) 종교의 자리
A. 종교의 자리에 대한 일방적 견해
종교는 전인의 일이다. 이것이 우리의 성경적 견해인데 반해 헤겔은 종교를 지식의 일이라고 했다. 헤겔에 있어서 지식의 최고 단계는 철학적 지식이고 종교나 신학은 아직도 상징을 많이 사용함으로 그러한 면에서는 아직도 직접적인 최고의 지식과 말을 표현치 못하며 중간 과정에 있으니 종교는 지식의 일이라고 한다.
종교를 감정이라고 말한 사람은 슐라이허막허인데 그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쓴 이후의 신학을 함으로서 종교지식의 영역으로 하나님의 대상을 세워두지 못했다. 대상은 우리가 쉽게 알지 못한다.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써서 하나님과 세계와 영혼 같은 것은 우리가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이거나 칸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재래의 신학처럼 초월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신학을 시작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경험의 대상이 못되니 우리는 현상계만 알 수 있다. 시공 세계만 우리의 지식이 성립하고 그 이상은 성립하지 않는다.
세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는가?
오예베르트, 폴렌호벤(암스텔담)에 의해서 이루어진 기독교 철학은 실재 전체를 다루는 학문이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사람의 경험을 종합한 것을 세계라고 한다. 세계는 한계 개념이지 구체적인 지식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슐라이허막허가 하나님은 경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초월 세계와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시작 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슐라이허막허는 사람은 연약한 존재이어서 절대자이게 의존하려는 감정이 있는데 그것이 종교라고 말한다.
여자는 감정이 예민하다. 그래서 종교는 여자가 열성이다. 남자는 종교와 멀어지고 독일은 주로 종교의 자리에 예술이 차지하였다.
칸트가 말하기를 윤리 의식을 가짐이 신 의식을 가짐 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내가 도덕적 지상 명령을 가짐을 말한다. 그래서 윤리적인 명령을 무상명령, 무제약적으로 해야한다는 당위로 알아야 한다.
B. 종교의 자리에 관한 성경적 견해
유일하고 정당한 성경적 견해에 의하면 종교는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성경 심리학에 있어 마음은 인간의 전 도덕적 생활의 중심이요 초점, 곧 영혼의 인격적 기관이라고 한다. 마음을 몸의 장기로 표현하면 심장이다. 몸의 피를 순환시켜 모든 기관에 보내어 사람의 생명을 살게 하는 구심기관이요 생명의 원천이며, 인격의 중심자리이다. 마음이라는 이 곳에서 지, 정, 의가 나온다. 이곳에 종교가 자리를 잡고 있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의지의 일이다. 종교의 자리는 마음은 전인적이며,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겨 모든 영역이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다.
(4) 종교의 기원
많은 사람들이 진화설에 기초하여 종교가 무종교에서 기독교 최고급 종교까지 진화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종교가 진화 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존재로 인간이 창조 되었다.(신의 형상으로 창조 됨) 그 속에 종교의 씨가 숨겨진 것이요 파괴되지 않은 영원성이다.
그렇다면 종교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과 절대자에게 섬기고 의지하려는 성향이 무지함에 대한 공포로 두렵게 하거나 매혹해서 끌어 당긴다. 자유주의자는 통치의 수단으로 종교가 있었기 때문에 정치를 겸했다. 부족들은 지금도 통치와 제사장을 겸한다.
종교의 기원에 관한 성경적 견해는 하나님게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바르게 섬기도록 법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심인 것이다. 우리들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태어났다. 이러한 섬김이 곧 사람의 생명이요, 섬김이 없으면 생명이 없으므로 현세와 내세의 의미가 없다. 즉 종교성에 대한 바른 기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그 안에 종교성을 가짐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밖에 없다는데 있다.
A. 지성설 : 종교의 본질을 지식에서 찾고 이것의 심리적 기초를 지성에 지적함
B. 의지설 : 종교를 도덕적 행동으로 정의함(칸트)
C. 감정설 : 종교를 감정으로 정의함(슐라이허 막허)
D. 심정설 : 이것이 유일하고 정확한 성경적임, 즉 인격이 종교의 좌소이다.(지,정,의)
종교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형상이 중심인 것이다.
2. 조직 신학 입문
(1) 기독교 신학의 구분
주경 신학 : 어학(히브리어와 아람어, 희랍어, 라틴어), 총론, 구약사, 신구약 중간과 유대교 역사, 본문비평, 해석학, 구약 신학, 주석, 복음 및 사도사, 본문비평, 총론, 신약신학
(2) 조직 신학과 성경 신학의 차이점
성경신학에서 성경의 내용을 배우는데 왜 조직신학을 또 배워야 하는가? 성경 신학이나 조직신학은 모두 계시를 다룬다. 그러나 성경 신학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역사적 유기적 발전 과정을 시대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중점하고, 조직 신학은 계시를 논리적이며 조직적이고 포괄적으로 계시한다. 즉 하나님의 전 경륜을 취급한다. 성경 신학은 역사적인 사실을 유기적 발전 과정에 강조점을 둠으로 성경신학만 강조하면 하나님의 전 경륜을 포괄적으로 함께 볼 수 없어서 중요한 핵심 진리를 놓칠 수 있다.
(3) 조직 신학의 필요성
조직 신학은 성경을 기초로 하여 건설된다. 주경해서 나타난 결과로 조직신학이 세워진다. 그러나 주경을 할 때에 조직신학의 안내와 배경이 없으면 곁길로 갈 수 있다. 확실한 해석과 이해를 하려면 전 경륜을 나타내는 조직신학의 훈련이 있어야 한다. 조직신학이 주경하는데 안내와 방향을 제시한다.
성경신학도 학으로 성립시키려면 통일성, 조직성에 의해 논리적인 전개가 필요하므로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성경적으로나 복음적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지만, "복음", "구원", "부흥", "성화"만을 강조하면 이단의 교리를 막지 못한다. 은혜만을 강조하면 성경을 들고 나오는 이단이 들어올 때 막을 수 없다. 이는 성경신학에서 일부분만의 계시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신학을 하면 하나님의 전 경륜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주석도 가능하고, 바른 복음은 설교 할 수 있다. 믿음이 균형있고, 바른 성장을 원하면 조직 신학이 필요하다.
(4) 조직 신학과 교의 신학의 비교
연구의 범위는 같지만 조직신학은 성경 계시 전체를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정리한 것을 제시한다.
교의 신학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에 의해 우리의 믿는 내용을 개진한 것이다. 초보적인 교의 신학의 표준은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은 서방 교회에서는 체택했으나 동방 교회에서는 채택하지 않았음으로 보편 교회의 신앙고백은 못 된다. 사도 신경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란 신론부터 시작하지만 모든 조직신학의 출발은 계시, 곧 말씀에서 시작한다.
박형룡 박사는 교의 신학을 처음에 조직 신학이라 했고, 내용은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번역했는데, 천년기론에서는 미국의 근본주의의 영향을 벋어나지 못해서 벌코프와 그의 스승인 바빙크가 지지하는 무천년기를 떠나고 천년전 기론을 수납했다. 이는 세대론으로 갈 수도 있다.
(5) 신학은 어떤 태도로 해야 하는가?
모든 신학은 이성으로 조직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 법칙의 개념과 가설을 세운다. 우리가 신학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변적이 아니고 우리의 전 인격과 관련되는 지식이므로 겸손(신앙의 겸손)과 두려움으로 학문해야 한다.
(6) 신학을 하는 방법은?
일반 학문에서는 실재를 대상으로 탐구하는 방법과 신학에서 신학의 대상을 탐구하는 방법이 전혀 다르다. 일반 학문은 이성에 의해서 귀납적 방법으로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정리하여 학을 이룬다. 그러나 신학은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인도된다. 신학에는 신앙과 계시와 하나님의 3대 원리가 있는데, 그 방법은 말씀의존사고에 의하여서이다.
특별계시 내에 자연계시도 포함되어 있으나 자연계시를 전체를 성경에 편입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계시가 말씀 계시보다 범위가 넓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빙크가 주로 사용한 "계시 의존적 사고"라는 표현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말씀 의존적 사고"라고 함이 좋다(창조론부터 조직 신학을 배우면 혼돈 되지 않으나 종교 계시부터 다루기 때문에 악령을 섬기는 자들이 계시를 받는다고 하니 "말씀 의존적"이 훨씬 바르다.)
(7) 우리의 신학은?
세상에는 많은 신학이 있다 대표적으로 로마교회, 루터교회, 알미니안, 복음주의, 개혁신학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하나님의 계시하신 의도대로 나타난 신학은 개혁신학이다. 개혁신학은 칼빈, 카위퍼, 바빙크, 벌코프로 내려왔다. 특히 카위퍼는 25세 때에 자유주의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시골 교회에서 빠트라라는 하녀에게 말씀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으로 하녀의 복음을 받아들여 칼빈주의로 개종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에게 해를 끼친 것을 가슴을 치면서 회개한다"라고 말하고 암스텔담에서 개혁신학을 뜨겁게 가르쳤는데 여기서 칼빈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그의 영향을 바빙크가 받았다.
3. 조직신학의 서론
(1) 서론의 내용
조직신학의 첫 머리에서는 기독교회의 교의들이 왜 고금을 통하여 신뢰할 만한 진리들인가? 그리고 이것들을 처음 부터 끝까지 권위있게 하는 규범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고 해답하여 서론을 삼고 본론에서는 그 해답을 전제로 하고, 기초하여 논술을 진행한다. 그러나 서론은 주로 말씀 계시의 내용을 다루는 조직신학 전반의 개요이어야 한다.
(2) 서론의 접근 방법 : 재래 신학의 오류와 바른 출발점
바빙크가 종교와 계시를 논 할 때 재래적인 방법으로 종교 일반에서 계시에로 나아가는 경험적인 방법에서 시작했다. 이는 바른 접근 방법이 아니다. 거의 조직신학 교과서가 종교 일반에서 계시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접근 방식이다. 이는 기독교가 어디에 설 수 있는 가를 따지기 위해 종교 일반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서 계시에로 나아가고 거기서 기독교 신학을 논한다.
신학대학에서 조직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계시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모든 종교는 다 계시에 의존을 하는데 그 계시가 어디서 왔느냐"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주로 나타나신 그 하나님에게서 온 특별 계시에서 시작한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그 계시는 신들에게서 왔으니 모든 종교는 다 신들의 계시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이는 이방 종교들도 귀신들의 계시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교수가 독특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한 것이 아니고 바빙크의 개혁 교의학 제 1권 계시론에 보면 그와 비슷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바빙크가 개혁신학의 완성이라도 신학의 출발점에 있어서 그 접근 방식에 있어서 바른 이해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틸레란 학자는 "모든 일반 종교들이 다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고 인용한다.
창조 계시, 죄로 타락되어 있는 상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 계시와를 바로 구분하지 못하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빙크가 모든 종교는 다 신들을 경배의 대상을 가지며 그 신들에게서 계시가 온 것처럼 논의를 전개하지만 신들의 계시에 의존한다는 그 이야기는 대단히 그릇될 뿐만 아니라 계시의 유래와 본질에 대한 오해에서 그러한 추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귀신은 계시하지 못한다. 모든 종교가 서 있는 곳은 그와 같은 귀신들의 계시가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계시에 의존하고 있다. 종교 일반을 말 할 때 종교는 초자연적 세력이나 존재와 관계를 맺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정의는 물론 성경적인 정의가 아니다. 종교는 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는 초자연적인 존재로부터 오는 계시에 의존한다고 주장한 것이 잘못이다. 어떤 종교든지 모든 종교들이 자기들 속으로부터 끌어내서 저들이 주장하는 진리가 이루어졌다고 하기보다는 외부로부터 특별한 방법으로 오는 계시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론들은 기독교 신학의 서론이 종교 일반에서 출발하여 계시에로 진행하는 그와 같은 접근 방식을 갖는다. 재래신학이 다 이 접근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바빙크와 같은 개혁신학의 완성자라 하는 신학자도 종교 일반에서 출발하여 계시에로 진행하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다. 종교 일반에서 시작하여 그 종교들이 주장하는 계시를 다루는 것을 신학의 바른 접근 방식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종교들이 주장하는 그들이 의존하는 자기 신들의 계시를 사실로, 즉 계시가 신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을 하고 그렇게 인정을 해 준다. 그래서 신들은 계시하는 가능성이 있고, 그 신들로부터 계시한 것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바빙크의 스승 카위퍼와 비빙크를 비롯한 신학자들이 현금까지 재래의 접근 방식에 의한 신학의 접근시도 곧 종교 일반에서 계시에로 나아가는 시도는 개혁신학의 출발점을 바르게 인정하지 못한 떼서 비롯된 것이다.
즉 신들의 계시라는 단어는 기독교 신학의 초보도 바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그릇된 논리이다.
잘못된 출발은 기독교가 많은 종교 중의 하나이므로 종교라는 것이 어떤 지반 위에 서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 재래 신학자들의 생각이다. 이러한 재래 신학은 여러 많은 종교들이 어디에 근거하고 서 있는가를 따지는 방식으로 접근하여 기독교로 가는 길을 찾는 것으로 생각했다.
문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계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도 종교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기독교라는 특별 종교에 접근할 수 있는가를 따지기 위해 모든 종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그것을 연구해 볼 때 모든 종교가 게시에 의존한다는 귀결에 이른 것이다. 이 때 계시의 유래가 어디냐고 할 때 이제까지 바빙크를 포함한 신학자들은 계시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 종교가 믿는 대상인 여러 신들이 여러 종교들에게 계시를 주었다는 것이 재래 신학의 접근 방식이고 벌코프도 그 선에 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기독교 역시 세계 모든 족속에 흩어져 있는 종교 중의 하나이며, 계시는 그 종교가 서 있는 기반 즉 그 근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기독교와 일반 종교들도 계시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그 계시의 유래를 성경적으로 모든 이방 종교들까지도 창조하시고 에덴에 있었던 그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종교들의 대상인 그 신들이 계시를 한다고 이해한다. 하나님 외에 귀신들도 계시를 한다면 직접 받은 그 계시는 그들의 나름대로 특별계시가 된다는 오류에 빠진다. 이러한 이론은 기독교 신앙의 초보도 이해하지 못한 그릇된 논제이다.
계시란 창조주의 창조계시에 의존한다. 모든 종교가 다신론을 섬겨도 그들의 주장한 계시는 그들의 경배 대상에서 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출발하며 자신을 우리의 구속주로 나타내신 그 하나님에게서 온다. 일반 종교의 계시를 인정할 때 그 계시의 유래는 신들이 아니라 창조주로부터이다. 그렇다면 종교들이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천태만상일까?
이는 타락으로 인해 파괴되고 죄로 인해 올바른 식별을 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온 계시(자연계시, 특별계시)가 변질된 것을 모른 체 의존한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첫 부분에서 사람에게 종교의 씨가 하나님의 형상과 함께 우리 안에 생래적으로 영구히 심겨져 있다. 칼빈은 종교의 씨가 소멸되지 않도록 하나님게서 계속적으로 종교의 씨를 공급하신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로 돌이킴 보다 핑계 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롬1:20~23).
이 종교의 싹이 창조계시에 근거함에도 왜 우상종교로 변했는가?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을 보면 외적 계시의 첫 번째가 창조이다. 창조란 하나님이 자신을 밖으로 나타내신 자기 계시의 시작이다. 이 계시는 동시적이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창조계시가 종교심에 선행 한다. 왜냐하면 창조의 순서에 우주 창조 후 사람이며 사람 창조 전에 하나님 자기 계시는 거의 다 이루어져 있었고 그 자기 계시가 먼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나타난 계시에서 시작해야 일반 종교도 바로 볼 수 있다. 종교의 씨라는 싹은 타락 때문에 조악 된 본성으로 아무리 고차원 적인 종교라 할지라도 타락한 인성과 본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식별치 못해 우상 종교화 된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종교 일반에서 기독교 신학에로 승귀의 기능성을 찾을 수가 없고 만일 찾으면 언젠가는 우상 종교가 된다. 우리는 성경 계시에서 종교에로 접근을 해야 한다.(기독교에서 일반종교로의 접근)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 계시에서 시작해서 종교로 가야 한다. 창조는 최초의 계시이며 자기 능력의 표현이며 자기 계시의 길이다. 자연 계시는 명료하다고 해도 우리는 그와 같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 계시의 절정은 성육신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종교성이라는 것에서 출발하는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계시에서부터 출발함으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첫 장에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시작한 신의 계시와 신지식으로 창조계시와 특별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신 계시만이 바르고 합당한 계시이다. 마호메트만이 선지자이며 그를 통한 계시가 특별계시하고 주장 할 때 우리의 답변 어떻게 할 것인가? 유대교도 특별계시를 말하며 유일신과 특별계시가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는 계시가 합당한 계시이다. 종교를 의인화 한다면 서로 아들이라 주장해도 참 아들은 하나뿐이다. 계시를 반지로 비유하면 하나밖에 없는 반지를 알게 학 위해 낮은 차원의 것들을 보여 주셨는데, 제각기 자기가 받은 것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 것과 같다. 선택받은 우리들은 진짜인 창조의 계시인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로 그리고 구원의 계시로 종교를 말해야 한다.
4. 교의 신학의 원천
* 성경이 교의학의 유일한 원리와 표준과 척도이다.
교회가 계시 진리를 이해하는 시작이 교회의 교리로 확정되었으며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교회는 성경에 나타난 구원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 사투한 결과 교리로 확정되었다. 즉 교회의 존립의 기초로 그것 없이는 기독교가 안된다는 신앙고백의 교의이다. 조직신학은 교회 전통과 교리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의미로 성경이 원리이고 원천이나 조직신학의 전 재료는 아니다. 때문에 우리가 교리신학과 역사신학을 배운다. 이렇게 교리에서 출발하고 교의가 교회가 갖는 표준과 길을 제시대호 성경만이 궁극이므로 교의도 성경에 의해 최종판결을 받아 교리로 성립되거나 수정되고 배척된다(공회의 교리들을 받고 로마 교회의 결정들은 성경적인 기초가 약해서 배척한 것이다.)
(1) 성경 계시와 자연 계시
자연계시가 죄에 의해서 재검토, 교정, 해석되어도 특별 계시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죄로 어두워진 것을 다시 밝혀서 성경에 기록되게 하신 것이 특별계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남아 있는 도덕성이 표준이 아니며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한 것이 표준이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 계시와 이방 유사 종교들과의 유사성에 대해 해답하지 못하는가? 이는 자연계시가 죄로 인해 타락한 것을 하나님께서 회복, 재조정 하셔서 성경에 다시 편입하여 분명히 하셨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처음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자연 계시와 유사성을 가질 수 있따. 이런 의미에서 고대 민족들의 도덕률과 성경에 나타나 있는 도덕률과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면 자연을 보면 신지식을 알 수 있느냐?에 성경에서만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요 자연 계시에서 성경 계시를 추론할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모든 조직 신학들이 자연계시에서 출발하여 특별계시로 온다. 자연이 특별게시에 의해서 자연계시로 성립될 수 있고 특별계시를 바로 해석할 수 있다.
(2) 성경 전체가 조직신학의 원천이다.
성경신학은 계시의 점진적, 유기적 발전에 강조를 두지만 조직신학은 성경 전체를 표면에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계시에 의해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발전시킨다. 그렇다면 성경과 조직신학이 같은가?에 그렇지 않고 말씀으로서의 권위는 동일하다.
성경이 윤리적인 면에서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규제성에서 볼 때 둘로 나눈다.
A. 역사적 권위 :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부분들이 역사적인 권위로서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행사하나 지금 우리에게
구속력을 행사하는 면에서는 역사적인 권위가 앞서지 못한다.
B. 규범적인 권위 : 지금도 우리에게 구속력을 행사하는 부분을 규범적 권위라 한다. 모든 성경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의 사역이다. 거기서부터 어떻게 하나님의 전 경륜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다 함께 살핀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구속이 모든 성경 계시의 중심이다. 초기에는 계시의 유기적 전개 때문에 구속 계시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낙원에서 구속 계시가 씨의 형태로 와서 점점 자라나 나무가 되며 꽃이 피고 열매를 거둠과 같이 전개 된다. 조직신학이 계시의 점진성이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살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구속의 완성까지의 과정 전체를 예수님의 구속 계시에 어떻게 연관되었는가를 살핀다. 그러므로 초기 계시들은 후기 계시들만큼 명료하지 않았다.
5. 다른 원천
(1) 교회의 교훈 혹은 신경
생각 없이 성경을 다독하고 꿰어 맞추면 조직신학이 나온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구원계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옳은가에 대한 사투를 전개하여 결정으로 나타난 것이 교리이다. 교리를 세울 때 그것이 교회 존립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조직신학의 안전한 길은 교회의 교리들을 좇아 전개함이다.
로마 교회에서는 오히려 교회가 "무엇이 권위인가"를 결정하며 성경과 유전의 가르침이 동등한 교리의 원천이며 동등한 권한을 갖는다.
개혁신학은 궁극적인 표준과 권위를 성경에서 찾는다. 아무리 교리가 좋아도 성경의 표준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고 수정한다.
현금 교회가 사명에 생명을 걸고 교리의 진전성을 인식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교회의 외적인 세력(인원, 건물, 물질)에 의해 그 내용과 관계없이 권세를 입는 경우가 많다. 지도자들의 모임도 바른 교리와 진리의 수호를 위함이 아니라 대개가 명예와 권세에 관심이 많지 않은가? 설교가 하나님의 전경륜을 말하지 않고 진리보다 부흥과 물질 축복에 더 관심이 있지 않은가?
(2) 그리스도인의 의식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부터 개신교 신학에는 큰 분수령이 그어져 신학을 근세신학과 현대신학이라 한다. 중요한 인물로 칸트가 등장하였다. 믿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은 조사, 검증, 증명해서 안다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은 현상계(감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영역, 직관으로 들어올 수 있는것) 뿐이다. 아는 것은 감각, 경험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지식은 진리란 우리의 지식과 사물이 일치하는 것이다. 칸트는 세계를 현상계와 예지계로 나누며 위는 예지계, 아래는 현상계의 이층 세계이고 지식의 영역은 현상계 뿐이다. 그 외에 초월의 세계, 형이상학적 세계가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은 착각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우리의 감각 경험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예지계에 속한다. 칸트가 이러한 철학을 정립하니까 그 뒤에 술라이허 막허(개신교회 근세 신학의 큰 신학자)가 칸트를 이해하여 신의 세계를 예지계 여역으로 지식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므로 신학을 여기서 시작할 수 없다. 술라이허 막허는 아버지가 개혁교회 출신이지만 경건주의 계통 모라비안파와 낭만주의 영향을 받아 칸트 철학의 지배아래 있었기에 전통적인 말씀에서 시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시작을 하는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어디서 만나는가?
루터의 경험에서 제일 중요한 중생 체험이 있다. 웨슬레도 그렇다. 이들의 두드러진 현상은 감정이다. 그는 이 중생의 체험이란 감정으로 되돌아 갔다. 슐라이허 막허에 있어서는 신학이 무엇인가?에 그리스도인의 혹은 인간의 종교감정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19~20세기까지 계속 이러한 영향을 받았다. 종교가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다. 감정 체험을 표준으로 삼는다. 이것이 근세 자유주의 이다. 이성으로 출발한 현대 자유주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비주의도 마찬가지다. 항상 개인의 감정, 체험을 중시하면 귀결점은 같아진다. 근세 자유주의 신학으로 넘어 갈 때 체험을 강조한 신비주의가 제일 먼저 넘어갔다.
근세에는 그리스도인의 종교적인 경험이 신학의 기원이 되어 모든 것을 경험에서부터 재 구성했다. 슐라이허 막허가 모든 신학을 인간의 종교적인 체험을 기초로 출발하여 재구성함으로 칸트 이전과 이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중생,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교회를 말하나 그 거리에는 큰 차이가 있다.
(3) 이성적 사유
근세 이후에 이성이 계시의 진위와 수납성 여부를 결정 하도록 했다. 이성의 표준에 맞으면 진리이고 수납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배척한다. 이성을 표준으로 한다는 말이나 감정을 표준으로 한다는 말은 같은 것이니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무조건 이성을 배척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도 이성을 활용하지만 자연 이성이 아닌 중생한 이성을 활용할 때 이성은 도구일 뿐이며 최종 권위는 계시이고 진위의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이 한다. 우리는 말씀의 권위에 순종한다.
칼빈은 우리가 신지식을 어떻게 얻는냐에 기본적으로 유한은 무한을 파악하지 못하므로 성령님께서 손을 펼치시사 우리의 지각을 열어 주신다. 중요한 것은 자연이성이 아닌 성령님께 순종할 수 있는 중생한 이성을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받아 드릴 수 있으며, 가부의 결정을 내가 하지 않고 결정을 도우실 때 말씀의 권위에 입각해서 받아 드린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지식은 믿음의 영역이지 자연이성의 영역이나 앎이란 지식에 근거하지 않는다. 일반 학문은 자연이성으로 하지만 신학은 믿음으로 출발한다. 우리가 그 말씀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선다.
종교적인 경험을 보편화 할 수 있는가?
누구든지 이성이 있으면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하느냐에 우리의 답은 "없다" 이다. 기독교는 믿음으로 출발하되 믿음은 중생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가 이성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모든 것의 최고 결정권을 갖는다는데 반해 우리는 이성을 도구로, 이성을 말씀의 권위 아래에 둔다.
(4) 신비의 경험
퀘이커 파와 그 외의 신비주의자들에 의하면 내적 광명으로 새로운 내적 광명으로 새로운 내용의 계시가 온다. 그들은 외적인 성경계시를 충족한 것으로 믿지 않고 하나님의 내적, 성령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새로운 내적 광명에 의해서 새로운 계시 내용이 온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 계시가 어디로 오는가? 이성에서 온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도 자연스럽게 자유주의에 귀착하여 근세 사상으로 넘어가는데 선두 역할을 했다. 종교적 경험을 최고로 볼 때 내적 광명이 이성에 온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성경이 원리(원천, 척도)이다.
6. 자연과 은혜에 관한 로마교회와 개혁교회의 견해
로마교회는 본래 기본으로 자연이 있고 그 후에 추가적, 혹은 추후적으로 은혜가 보충된다(원시 의는 추가적 은사로 초자연적으로 본다). 즉 은혜가 옴으로 자연이 모바라는 것을 보충시킨다. 결국 자연을 은혜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린 것이다.
개혁교회는 은혜가 자연을 회복하는 것으로 본다. 원시 의는 자연적이며 동시적이지 추가적이 아니다. 로마 교회가 은혜가 오면 자연을 회복하는 것으로 알지 못하고 보충하고 앙양하는 것으로 안다.
개혁교회는 은혜가 자연을 억압하거나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한다. 한국 교회는 은혜를 강조하니까 은혜가 오면 자연질서를 억압해도 되고 능가할 줄로 안다. 그런 식으로 은혜만 강조하니까 은혜가 없어지고 문란해 무법해지고 자연 질서가 파괴되는 것이다.
은혜가 옴으로 자연 질서를 넘어 설 것으로 아는 것은 큰 착각이다. 더 큰 위험은 은사가 초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은혜를 받으면 일반적인 자연 질서를 모두 무시해도 되는 것으로 안다. 금식을 많이 하고 찬송도 많이 하고 그러면 가정의 의무는 안 해도 되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의무는 안 해도 되고, 청소나 가사 활동도 예배하고 오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자연을 피곤하게 한다. 은혜는 본래의 자연 질서로 되돌아가는 것이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구속은 새 창조가 아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지 말고 재창조를 해야 한다. 구속은 재창조이지 새 창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곳마다 더 많은 자연질서가 무너지되 시간까지도 지키지 못한다. 자연을 능가하려고 애를 쓰면 은혜가 와서 그것을 다 해결해 주는 줄로 알지만 자연이 파괴되면 생명이 끝난다. 자연질서가 파괴되면 그렇다는 것이다.
즉 은혜가 있는 곳에 법이 잘 지켜져야 은혜다운 은혜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아니고 무법사회이고,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회복이 아니고 보충이기 때문에 구원의 과정에 피조물의 수준을 넘어 신화 되는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도 피조물의 한계를 벋어나는 것이다. 현대 모든 자유주의와 로마 교회가 일치한다. 바르트도 이를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의 견해에 의하면 신화 되는 것이 아니라 회복이다. 피조물의 본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다가 마지막 종국에 영화가 되어 주님과 같이 되지만 피조물의 한계는 벋어날 수가 없다. 영원히 피조물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것이다.
7. 교의 신학의 인식론
(1) 존재의 원리 : 하나님
일반적 학문에서 모든 학문이 연구의 대상이 있다. 실은 대상을 연구하지만 결국은 법칙을 추구한다. 법칙의 추구는 결국 지식의 획득이다. 교의학에서 하나님을 지식의 원천과 그 대상으로 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신지식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이 하나님은 보통 존재가 아니다. 다른 존재는 고찰, 참구 등으로 알 수 있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경에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그렇게 알 수 없다.
이유는 무한한 존재이시고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연구의 대상이 아닌 믿음의 대상이시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시하셔서 알려주신 것만 알게 된다. 그러므로 계시만이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물과 존재의 근원이다.
있다는 것은 지식도 있는 것이고 그 지식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연구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되 그분이 모든 만물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하나님에게서 나와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계시를 통해서만 안다. 하나님은 존재의 원리이시며, 계시로 하나님을 안다. 주관적으로 앎이 아니라 계시인 지식의 외적 원리로 안다.
모든 학문은 자기의 이성을 활용함으로 대상을 탐구하지만 하나님은 이성으로 알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있다고 믿으면 하나님이 계셔지는 것인가?", "하나님이 계심을 믿음으로 알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집이 천국으로 변한다고 믿으면 천국이 되는가?", 등의 신 존재 증명을 토마스 아퀴나스와 그 후 사람들이 많이 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이용한 신 존재 증명을 많이 했는데, 이것을 칸트가 모두 깨뜨렸다.
그러면 지금은 신 존재 증명을 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믿으며, 성령님을 받은 증거가 있어야 믿지 않겠는가?
그래서 성령님의 세례, 성령님의 충만이 계속해서 인기가 있다. 바른 신지식을 따르지 않고 방언이라도 받아 보아야 확실한 것이지 예수님을 믿을 때 그 한번으로는 이것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러면 지식의 외적 원리인 계시가 있지만 그 게시가 자연이성으로 받아 가지고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럿은 믿음으로 받는다. 이는 인간에게 이성이 있어도 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으로 한다. 그 신앙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계심을 전제한다. 이는 벤틸이 말한 신 존재 증명의 최선이다.
신 존재의 최선은 그가 계심을 전제한다. 어떻게 전제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신 존재 증명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가 참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개혁교회가 말하는 기독교가 참이면, 가르친 진리가 참이며 모든 인간은 다 피조물이다. 그리고 참 진리를 만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언약을 파기한 언약의 파기 자로서 모두 죄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자기가 언약의 피조물임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언약의 파기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죄 때문이 아니라고 우겨대지만, 다 피조물임을 본성적으로 안다.
로마서 1장19~20절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되 자연이성(누구든지 출생과 함께 지닌 이성)으로 다 알 수 있는 그런 지식이 아니고 믿음으로 그리고 중생한 이성이 바로 계시에 의존해서 안다. 이성은 신앙에 종속적이다.
하나님, 계시, 신앙, 이것이 우리가 신학을 하는데 기본이다. 만물 지식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지식이 사물에 선행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물 지식이 창조를 이룬다.
(2) 교의학에서
사람의 신지식은 하나님의 자기지식에서 나온다. 이를 유비적 지식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는 지식을 우리가 따라서 아는 것이다. 말씀을 따라 하고, 하나님이 해석한 것을 따라 해석하고, 하나님이 참이라 한 것을 우리가 참이라 말한다. 그래서 유비적이다. 그리고 유비적이기 때문에 원 지식이 아니고 도출적 지식이므로 참 지식이나 포괄적은 못 된다(신 만큼 알지 못함). 하나님은 자기 지식과 사물을 어떻게 아시느냐? 하나님의 지식을 어떤 의미에서는 직관적 혹은 분석적이라 말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한 지식 행동으로 자기 자신과 사물 전부를 아시는 전능하신 분이다. 우리는 어떻게 전공지식을 얻는가? 비량적으로 얻는다.
자꾸 실험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확대하고 확대한 축적으로 누적된 반복과 추론을 통해서 얻는다. 사람 중에 자기 지식을 다 아는 사람이 있는가?
지금 없던 재능도 잠재능력에 있고 연습과 연구로 얻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른다. 있는 가능성도, 노력과 개발 전에는 잘 모른다. 자기 뿐만이 아니라 사물의 지식고 비량적으로 축적해서 반복적으로 얻는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3) 외적원리, 하나님의 계시
A. 일반적 학문에서 자연에 하나님의 계시
자연 계시와 자연 법칙은 일반 학문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피조물에 현현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은 신 계시적이며, 창조는 신지식의 제 2의 영역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을 연구하면 자연의 바른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학문을 대학 수준까지 교과서에 쓰인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되지만 많은 곳에서 허구이다. 문장이 되며 체험 된다고 다 지식으로 받아들이지만 지식을 얻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 아래서 만이 자연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는 개셕신학의 입장이요 하나님만이 모든 만물의 원천인 동시에 지식에 근본이시요, 말씀의 권위 아래 모든 것이 다 메이는 것이다.
B. 교의학에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
무한하신 이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알려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계시는 하나님의 의지의 일이며 본성의 일이 아니다. 본성은 필연적이요, 의지는 비 필연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하나님이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자동적으로 계시되면 유출설이 되고 본성에 속한 일이라고 하면 계시가 자동적으로 흘러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의지의 일이다. 그분은 계시 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는데, 기쁨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특별계시인 구속계시가 왔는가?
문제는 낙원에 있을때 타락전 말씀의 계시가 왔다. 그러나 그 말씀은 비 구속적 특별계시이다. 이것으로 언약은 체결되었으며 이 일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그렇다면 왜 구속적인 특별계시가 필요했는가?
타락으로 구속적 특별 계시가 필요했다. 그리고 특별계시가 곧 말씀 계시였다. 타락 때문에 말씀의 빛 아래서만 자연이 바르게 해석된다. 학문도 모두가 연구를 잘 하니까 정확하고 좋은 것 같은데, 역사나 기원의 문제들은 가설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은 자기 의식을 소유하신 이가 자유의지로 계시를 주셨다.
범신론에서는 신이 어떤 존재인가?
자연이 범신론에서는 신이다. 즉 계시가 신의 본성에 속하며 신이 자연과 일치해서 인격적 존재가 못 된다. 이럴 때 성경적 구속계시가 불능하다. 그들의 자연 계시는 자동적으로 왔으나, 하나님은 자유이시니 계시가 필연적이 아니다. 신이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계시하셔야 한다. 정체를 드러내 보여 준 것이 계시이다.
자기 지식을 드러낸 최초의 계시가 창조이다. 창조도 비 필연적이다. 본성이 아니고 의지의 일이다. 이것이 많은 이교도 철학과 로마교회와 구분된다(계시와 창조는 본성의 일이 아니라 의지의 일이다).
(4) 내적원리, 이성과 신앙
A. 일반적인 학문에서 이성 중점
일반 학문에서는 이성으로 자연계시를 포착한다. 그리고 이성으로 자연을 탐구할 수 있음을 창조라는 로고스성의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왜 사물을 탐구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이성이 있어서도 그렇지만 자연 혹은 창조 속에 있는 로고스적 성격 때문에 자연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전적 부패가 나온다. 즉 전적 타락했는데, 어떻게 학문이 가능한가? 이에 대해 칼빈은 하나님이 타락으로 은사를 박탈했으면 우리가 재능을 갖고 말을 하고 연구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우리가 타락으로 받은 보응으로 천치와 바보의 자리에서야 하는데 우리에게 있는 일반적 은총 때문에 학문 활동이 가능하다고 한다(영적 은사들 : 의지, 도덕, 합리적인 것들은 고유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로마 교회가 공격하기를 개혁교회는 전적 타락을 주장하면서 어떻게 왜 학문이 가능하냐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령님의 보통 은혜의 역사로 학문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B. 교의학에서 신앙 중점
하나님 지식은 믿음으로만 수납된다. 우리의 머리인 이성에서 탐구한 신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온 지식이며 이것은 믿음으로만 수납된다. 그렇다면 이성의 자리는 어디인가?
중생한 이성을 도구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안다. 하나님의 말씀 권위에 종속함으로 중생한 이성을 수단으로 한다. 중생한 이성이라 할 지라도 이성 자체가 아니고 성령님의 조명하신 역사로 알게 된다.
중세 종교개혁의 큰 원리도 유한은 무한을 알 수 없다는 것으로 출발했다. 즉 자연을 아는 것도 참 신앙으로, 중생한 이성으로 알게되고, 신앙 인식으로 신지식을 획득한다는 것이 칼빈의 견해이다.
성령님의 조명이 없으면 타락으로 인한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아서 식별이 어렵고 조명 후에 시력과 인식할 수 있도록 신지식을 수납케 되는 것이다.
(5) 종교와 신학의 관계
A. 신학의 의의
종교와 신학은 같지 않다. 그렇다면 종교와 신학의 영역이 어떻게 다른가?
종교는 신과 인간간의 살아 있는 인격적인 관계이며, 그리고 종교는 예배 생활의 전체를 포함한다. 신학은 계시 발전의 통일과 조직을 하는 종교 생활의 지적인 작업이다.
즉 신학이란 믿음의 내용, 종교 생활의 내용을 학적으로 살피고 정립한 것이다. 종교가 우리의 옆에 넓게 퍼져 있다면 신학은 좁게 초월하신 신을 향하여 가며 지적인 확립과 이론적인 체계 없이 성립 될 수 없다.
유대교의 교의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뿐이었다(신6:4). 그러나 교회가 존립되려면 믿음의 내용이 세워진 신학적인 과정이 있어야 한다.
B. 유일한 참 종교는?
종교를 논 할 때는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논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다른 종교를 논해야 한다. 그렇다면 수 많은 종교의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에게는 종교의 씨가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 모든 종교의 씨가 없어지지 않도록 역사하신다. 문제는 종교의 씨가 역사의 밖으로 나타날 때 우상 종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종교는 예수님 안에 나타난다.
칼빈은 종교의 시가 계속해서 없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역사하신 다는 것이다. 유일한 종교는 기독교이며 축복 종교와 민생 문제를 위해 있는 종교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을 잊어서도 안 된다.
C. 종교의 내용은 신학의 것 보다 크다.
종교란 신앙의 대상과(신과 절대자), 경전이나 진리가 있고, 신앙의 공동체가 있어야 종교가 성립된다.
제 3 장 계 시
계시라는 말은 라틴어 레벨라티오에서 나온 말로서 드러냄, 계시함 등을 나타낸다. 계시란 정체를 드러내어 보여 준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거나 혹은 진리를 시달하시며 다른 방법으로는 알려 지지 못할 것을 그의 피조물들에게 보여 주시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계시로 능동적인 지식을 전해 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신적인 계시가 없으면 알 수 없는 진리들, 사실들 및 사건들이 있다는 것과 이 계시의 대상이며 계시를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1. 이중 계시관
(1) 자연 계시(일반)
이는 창조에서 기초하고 모든 지성 있는 창조물들에게 발언하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인류가 접수할 만하다(죄의 결과로 그들이 이것을 바로 보고 해석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일반 계시는 언어의 형태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들은 자연 현상들 속에 인간의 의식 속에 그리고 경험 및 역사의 사실에 나타나고 있다.
(2) 초자연 계시(특별)
성경적 계시 개념이다. 인격적인 계시로서 인간 가운데 나타내시며, 의사전달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며, 기적을 통해서도 나타내신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특별계시 내용은 역사적이요, 말씀 및 사실의 계시이며, 구원론적인 계시이다.
A. 이 특별 계시는 재 창조에 기초하고 죄인들에게 구속의 목적으로 발언되고 영적인 불만이 정해(正解) 될 수 있다.
B. 이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한편에는 거룩하고 의로우심, 그리고 다른 편에는 긍휼과 인자하신 하나님을 알려 주며 특별한 은혜에 의한 구속의 종교 곧 기독교를 구원의 방도로 지시한다.
2. 일반계시의 불 충족성 및 타락에 미친 영향
(1) 불 충족성
A. 미확실한 지식이다[하나님과 영적 사물을 바로 이해 할 수 없다].
B. 막연한 구원의 길이다[구원의 방도인 그리스도를 알여주지 못한다].
C. 불 충족한 종교의 기초이다[일반 계시는 종교의 기초가 될 수 있다].
(2) 타락에 미친 영향
A. 사람의 악화
범죄한 인간은 영안을 잃은 까닭에 일반 계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다.
B. 자연의 문란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정죄를 받을 때에 자연도 저주 아래 들어 문란하여 지고 허무한데 굴복하여 부패의 노예가 되었다(창3:17~18 ; 롬8:20~22)
3. 특별 계시의 방식
(1) 신의 현현
A. 에덴 동산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창3:8)
B.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의 거주 : 그룹 사이의 좌정(시119:1)
C. 천사를 통하여 나타나심 : 여호와의 사자, 제 2위의 현현하심
D. 성육신과 교회이다(골1:19 ; 2:9).
(2) 예 언(구약에서의 여러 방식)
A. 인생 언어로 예언하심
B. 꿈과 이상으로 예언하심
(3) 이 적
A. 이적중 최고의 이적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B. 하나님의 창조와 보전 역사의 이적이다.
C. 성경에서의 이적은 구속사역에 관계 되어 있다.
4. 특별 계시 내용의 특징과 목적
(1) 특별 계시의 내용과 특징
A. 역사적이다 : 하루 아침에 즉시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B. 언사적 사실이다 : 말씀과 교리로 구성되어 전 인격에 발언한다.
C. 구원론적 이다 : 특별계시는 구원의 계시이며 이것이 특징적이다.
(2) 특별 계시의 목적
A. 특별 계시는 구원의 계시이므로 죄인의 구원이 그 목적이다.
B.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C. 죄인들을 완전히 갱생시켜 하나님의 완성들을 반영시키기 위함이다.
D. 전 인류 뿐 아니라 전 창조계를 새롭게 하는데 있다.
E. 하나님의 자기 현현이다.
5.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내면적 및 외면적 논증
(1) 내면적 논증(통일성)
A. 다양한 중에 통일이다.
B. 조화적으로 통일이다.
C. 한 인격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예수 그리스도).
D. 모순과 폐기가 없다.
(2) 적 응 성
A. 영혼을 잘 안다.
B. 영혼을 판단한다.
C. 영혼의 깊은 수요(需要)에 응수한다.
D. 모든 영혼에게 동등으로 적응 된다.
(3) 우월한 윤리 체계
A. 성경은 도덕적 교훈으로서 가장 고상하다.
B. 성경의 윤리는 인생의 모든 의무를 다 포함한다.
C. 정신적이며 철저하다.
D. 단순한 원리들을 가르치고 있다.
E. 성령님의 신적인 조력으로 율법, 순종의 가능성을 가르친다.
(4) 외면적 논증
A. 이적과 예언의 신증
B. 역사적 실천적 결과
* 초대에 복음이 단 기간에 신속히 진보한 것
(5) 특별 계시와 성경
교부시대에는 영지주의자들 및 말시온은 성경에 잘못 된 관점들을 가졌으나 초기 교부들은 성경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인정하였으나 영감에 대해 명백한 개념은 희박했으나 저자를 성령님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신적인 계시와 동일시 하였다.
제 4 장 성 경
타락한 인간의 구속을 목적으로 수 많은 특별 계시가 주어졌지만 특별 게시의 절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의 원천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창조사역이요 다른 하나는 성경이다. 창조사역과 관련해서는 주관적 내적인 원천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종교의 씨 또는 신 의식을 주신 본성의 빛이 있고(롬1:19) 객관적 외적인 원천으로는 창조하신 우주와 세계와 섭리의 사역이 있음으로 아무도 하나님이 없다고 핑계 할 수 없다(시14:1~3).
그러나 죄로 인하여 충분치 못한 우리를 위해 특별한 원천이 성경을 주셨다.(히1:1~2)
이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하여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다. 성경은 내용뿐만 아니라 문자와 사상까지 전체적으로 영감 되었다. 따라서 성경은 사상과 내용만 무오한 것이 아니라 문자적으로도 오류가 없다. 그러므로 신학적 논쟁이나 교리를 확정하는 최고의 권위는 성경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성령님이시다. 즉 로마 교회의 교황이나 다른 최고의 재판관이 아니라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항상 검토되어야 한다.
1. 특별 계시와 성경과의 관계
(1) 계시 이해의 논리적 순서
먼저 순서에서 일반 계시에서 특별 계시인 성경에로 오는 것은 바른 법이 아니다. 이제까지 재래 신학들이 모두다 종교나 일반계시도 성경에서 시작하지 못했다. 시간적 순서를 하지 않고, 반듯이 특별 계시에서 자연 계시를 해석해야 한다.
(2) 특별 계시의 기록과 전승
특별 계시가 무엇을 위해 왔는가?
치료하는 빛으로 우리에게 먼저 왔고, 성경 또한 계시의 말씀 형태로 기록된 특별 계시이다. 구원의 계시로 온 특별 계시가 영속한 세대에 타당한 것을 받아 기록된 것을 성경이라 하며, 예수님의 생애인데 기록하지 않은 계시는 특별계시로 남는다.(요한은 낱낱이 기록했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일부가 기록되어야 했는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사본까지라도 성령님의 간섭 속에서 수 천년 동안 계속 보존케 했을 것이다. 그러한 말씀을 주후 100년경 잠니아 회의에서 정경의 범위를 확정할 때 그 이전의 표준이 무엇이 있었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구약 본문비평이 마쳤는가? 그렇지 않았다. 사해 사본이 발견되었으므로 이제는 쿰란 공동체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을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맛소라 사본하고 차이가 있어서 구약 본문 비평에서 정확하고 새로운 연구가 펼쳐지게 되었다.
(3) 성경 기록의 완결
성경은 기록된 특별 계시인데 어디서 종결되었는가?
그리스도의 게시의 효능은 재림때 끝나지만 구원 계시가 그리스도와 그의 해석으로 끝났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계시가 궁극적인 계시이다. 더 이상 다른 계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종말론적인 계시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그 이상 더 큰 구원이 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구약이라는 구원의 섭리가 어디로 집중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집중한다.
구약은 왜 있었는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었다. 만일 성경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큰 구원의 길이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이 내신 유일한 구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해석이 마쳐졌고, 성경은 완결 되었으며 더 이상 성경 기록이 필요 없는 종말론 적인 것이다.
(4) 특별 계시(시간적으로 앞)와 성경의 다른 점(기록)
성경은 66권으로 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이다. 옛날에 일어났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으로 구원을 주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66권 전체가 성령님의 감동과 감화로 말미암아 무오하게 영감 되었다는 사실에서 특별계시는 그 신적 보증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옛날의 계시가 어떻게 지금 나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되는가?
이는 해석과 선포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이 된다. 많은 보수주의 목사와 성도들이 성경대로 믿는다는 목사님들이 해석 없이 옛날 이야기만 반복한다. 해석, 선포가 없으면 옛날 이야기나 스토리만 말하는 반쪽이 된다. 지금도 그 말씀이 나와 우리의 것이 되게 하려면 우리의 상황에서 해석되고 선포되어야 한다. 해석과 선표가 없으면 예수님 이야기도 성경 동화나 옛날 이야기가 된다. 성경은 시대에 관계없이 듣거나 읽을 때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신다. 성경을 동화로 만들어 이야기 하는 자는 후퇴한 것이며 복 받는 이야기를 해야 은혜가 된 줄 알면 바람직하지 않고 성령 충만에 관심을 가진다면 사도행전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사도행전 이후에는 성령충만이 없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바울이 유의 일과 영의 일을 대조시켜 말한 것이지 성령님에 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 성경의 영감성
성경이 인간에 의하여 기록되었음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기록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인간적 오류를 막기 위하여 그 저자들에게 성령님께서 영감하셨다.
(1) 성경의 영감과 무오
하나님의 계시를 소멸하고 파괴하려는 세력들이 계속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화 할 필요성이 생겼고, 기록된 말씀을 정확하게 기록해야 할 필요성이 성립된다. 그리고 영감과 무오성 교리의 필요성이 나온다. 영감은 기록과 보존에서 영감 됨을 쉽게 공감하고(착오와 오류 없이 전체가 영감 됨), 영감 된 소설만 읽어도 감동이 되기 때문에 성경의 영감은 인정하지만 무오가 문제가 된다.
한철하 박사는 그의 저서 "나의 신앙과 신학사"에서 궁켈의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이 고대 원시 형태를 거쳐서 성경으로 들어왔다고 말하는데, 문제는 무오를 반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합당한 변증이 있어야 되는데, 보수 신학계에서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다 막으려고 하며 연구를 하지 않는다. "학"을 뒤로하고 믿음으로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진리이면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영감이니까 무오하다는 식에서 영감은 왜 무오한가? 신앙과 행위만의 무오한 법칙이라고 하는데 약간 잘못된 말이다. 우리 행동과 신앙의 무오한 규범과 학문도 성경에 입각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학문이란 자연에 대한 해석 활동이기 때문에 특별 계시인 성경과 빛과 조명 아래 다루어야 한다.
신앙과 행위에서만 무오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과학적 사실에서도 무오하다. 성경은 일반 학문의 최고의 경지를 열어주는 열쇠이다. 성경을 통과하지 않은 학문은 학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성경에 담겨 있는 역사적, 과학적 사실도 무오하다. 영감은 믿음의 일이며, 성경의 영감은 신앙의 항목이다.
영감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 이는 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무오를 증명함으로 영감의 증명은 올바른 귀결에 이른다(기록된 사실과 그 때 시대적 상황하고 일치하는 그것이 무오이다).
(2) 영감에 대한 성경적 증거
디모데 후서에 영감 되었다는 말은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로 표현했는데, "하나님이 호흡하시다."라는 뜻을 가진다(딤후3:16). 이는 영감보다 더욱 강한 의미로 기록됨을 바울이 증명함으로 구약의 영감을 인정한다.
3. 영감의 성질
(1) 성경 영감의 방식 및 범위
A. 성경 영감의 방식
a. 기계적 영감설
필기자로 불러줌을 받아쓴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계적으로 필기자들을 사용하셨다는 뜻인데 문제는 신언 전달에 동일 재생산이냐(본 대로를 그대로 옮김), 즉각적의 기록이냐의 문제가 제기 된다. 완전 동일의 재생산도 기록도 아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받은 자의 관점에서 이해 된 다음에(기록은 성령님의 감동, 성령님의 충만은 최고의 지식이요 경험보다 승함) 기록하였으며 일반 의식 수준에 이해되었기 때문에 저자의 특성이 살아있다.
b. 동력적 영감설
영감을 믿지만 기록의 지적 능력과, 영적 지각력을 극도로 향상시킨데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령님의 초자연적 영감을 부인하는데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사상이나 말을 영감한 것이 아니고 그 저자를 영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근본 진리는 무오하지만 역사적 사실들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은 기계적인 영감에 반대하여 나왔따.
c. 직관적 영감설
모든 사람이 보통으로 소유하고 있는 진리의 통찰력이 고등하게 발전했다고 하는 설이다.
d. 감력적 영감설
이 이론은 성경의 기록들이 영감된 것이 아니라 기록자들이 영감 되었으며 그 영감은 각 신자의 조명과 정도는 다르되 종류로는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e. 유기적 영감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영감 방식이다. 하나님과 저자와의 관계가 유기적이며, 죄의 영향을 제거 하여 하나님의 뜻이 추호의 오류 없이 기록되게 하신다는 견해이다.
역사적으로 특정 시대 사람들을 등장시켜 만제에 공통될 수 있는 영원한 진리,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 말씀은 시대와 상황에 성육신 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즉 그 시대의 문제와 느낌과 언어와 그 시대 풍속으로 말씀하셨다.
B. 성경 영감의 범위
a. 사상만의 영감
성경의 사상은 신적으로 영감 되었으나 그것을 옷 입은 문자는 저자들이 아무 신저 지도가 없이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영감뿐 아니라 신앙의 영감을 말하며, 사상의 담지자인 문장과 글까지도 영감 되었는데, 이는 사상이 언어에 담기기 때문이다. 좋은 언어는 좋은 사상이 표현된다. 문학은 철학보다 앞서며, 철학이 발달하기 전에 문학이 발달해야 한다. 좋은 시를 쓸 때 사상도 중요하지만 단어 선택을 잘해야 한다. 사상과 문장은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이니까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b. 부분적 영감설
성경의 어떤 부분은 영감 되고 어떤 부분은 영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심적 교훈이 영감 되어서 무오하다는 것이다(역사적 사실에는 오류가 있다).
랍비들은 영감을 콤마와 엑센트까지 영감 되었다고 한다(기록할 때 글자의 모음 부호들이 없어서 맞지 않음) 맛소라 텍스트가 자음으로 된 성경인데 자기들의 전통에 의한 읽는 것을 갖다 붙인 것이 지금의 맛소라이다.
그렇다면 무오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성경 그 자체와 기록된 사실과 지시하는 역사적인 사실하고 일치한 그것이 무오인 것이다. 역사적 부분의 오류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파괴적이다. 예수님의 인격과 구속을 변조하면서 영감을 주장하고, 사본에 대한 본문 비평을 통해 원본을 복원할 지라도 성경은 반듯이 무너질 것이다.
영감을 변홀 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사본을 통한 원문을 복원하는 것과, 기록과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며, 본문 전체의 증거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습니다"로 안되니까 "보수, 보수"하는데 무엇을 보수하는가? 현재하고 있는 것을 보수한다는 것인데, 무엇을 보수 하느냐는 내 것으로 받아드려진 것이다. 그것을 보수 할 때 이는 근본주의의 위험이 있다. 우리는 내가 아는 것은 좋지만 주장하지 말고 칼빈주의로 나와 성경 앞에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할 것이다.
c. 완전 축자 영감
성경 각 부분 및 문자들까지 영감으로 완전 축자 영감은 별개의 명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동등의 어구(語句)들이므로 연합해서 완전 축자 영감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로 성육신(하나님의 말씀이 이성적인 진리로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언어로 구체적으로 형체화 되어 있다). 한 것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사상과 언어와 모든 경우에 영감 되었다.
하이덱거는 말하기를 언어가 진리의 집이다라고 했다. 시를 읽을 때 언어를 빼고 시적인 사상을 생각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이 만인의 공통된 언어로 기록되지 않고, 그 시대의 언어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주어 졌으며, 또한 예언된 약속이 성취되지반 모든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지 않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에게서 성취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나라에로 약속과 성취의 도식으로 간다(구약의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
옛 언약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로 주었던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으니까 더 이상 우리를 규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권위로 서 있다. 지금 우리에게 규범적으로 역사하지 않는다.
d. 축자 영감설
성령님께서 성경을 기록할 때 죄와 오류가 개입하지 않도록 감동하고 보호하셨다. 문자의 선택과 문장의 오류가 없도록 하심이 축자 영감이다.
4. 성경의 속성
성경은 성도들에게 완전한 신앙 생활의 규범이 될 수 있다.
* 성경이 왜 신적인 권위를 가졌는가?
그것은 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이 직접 저술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와 일치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자이시니 우리가 성경을 받을 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로마교회는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결정한다(바티칸 제 2 공의회로 1966년 교황 요한 23세가 로마 교회를 바꾸어 놓았는데, 성경을 읽게 했다).
교회의 결정들이 전승되어 오는 것이 유전이라고 하는데, 성경과 교회 유전을 동등한 신앙의 원천으로 삼는다. 마치 한국 교회의 100년 전통들이 미국에서 와서 이를 누가 쉽게 바꿀 수 없듯이, 하지만 성경과 유전을 동등하게 생각지 않은 우리의 결정적인 입장은 성경이 자기가 신성에 의해서 믿게 하는 것이다. 성경의 해석은 우리 말 성경을 다독하고 원어를 잘해야 한다. 성경을 많이 암송하고 암송된 성구로 복을 축복함이 목회라면 신학은 왜 하는가?
성경을 역사적 권위와 규범적 권위로 나눠보자.
(1) 역사적 권위
제사법과 같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심으로 역사적 권위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렇다면 성취된 후 가치가 없는가? 역사적 권위가 없으면 구속을 이해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했다(요4:22).
(2) 필요성
성경은 신학의 원천이며 신앙과 생활의 법칙으로서 절대 필요 하다. 재세례파, 몬타누스파, 자유주의는 기록된 성경은 의문에 속하며, 영이 살리는 것으로 성령님의 직접적 사역을 강조한다. 직접 하시는데 무슨 문자가 필요한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로마 교회도 성령님이 교회에 계신다고 말하면서 문자를 무시하며 교황의 교서를 중시한다(무오). 그러나 그들의 무시는 직접 저자이신 성령님을 무시한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성경을 떠나서 역사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면 왜 성경이 기록되어야 하는가?
죄의 파괴성은 전 인격에 임하기 때문에 문자로 되지 않고는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얻기에 불가하여 문자화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특별게시는 성경과 함께 치료하는 계시인데 언제까지 필요한가?
그것은 구속이 완성 될 때까지이며, 직접 예수님께 의존할 때까지 일것이다. 그 이후는 연구의 과제이다.
(3) 명료성
성경은 상당히 명료하여 무식한 사람도 읽을 수 있다.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성령님의 조명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교회사가 알고 보면 성경사 혹은 성경 이해사이다.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 왔는가를 살피는 것이 교회사의 본 임무이다. 때문에 교회사가 기독교 신학에 필수적이다. 성경이 명료하다고 해도 자기 주관으로 보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것 만을 받을 수 없어서 공 교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았는가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을 볼 때 모르는 부분도 없고 어렵지도 않으면 소경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명료성은 필요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4) 충족성
성경은 신앙의 법칙으로서 완전히 충족하다. 성경의 충족성은 로마 교회의 유전이라는 전통 고수와 재세례파의 내적 조명(성령님을 강조함)에 대한 반대로 구원의 필수적인 내용을 모두 성경에 담고 있으니 더 이상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계시와 유전이 필요치 않다. 성경으로 충분한 것이다.
칼빈은 성경과 성령을 일치시켰다. 이것이 종교 개혁인 것이다. 한국 교회는 충족성을 넘어서 문제가 많고 괴로우니 금식하고 산에 가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무슨 말씀을 주실 것을 기대한다. 직접적인 말씀을 원한다. 이를 신비주의 시초라고 한 것은 사람의 경험이 항상 객관적이어야 한다. 주관적인 신비로 갈 위험을 내포한다. 우리의 체험은 항상 객관적 표준에 종속함이 개혁의 기본 원리임을 잊지 말자.
우리가 기도 생활은 계속해도 새로운 계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조명과 가르침과 인도를 받아야 한다. 구약의 모든 역사가 그리스도 예비의 역사이다. 그리고 구약이 그리스도에게 성취되었다. 구약에서 예수님을 빼버리면 율법주의가 되며, 성취됨이 없는 구약은 의미가 없다. 이렇게 구원은 성취되고 해석이 끝이 났다. 이제 더 이상 구원계시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성경이 다시 기록되어야 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구원이 아니고 그보다 더 큰 구원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성령님의 역사가 강하고, 기도하면 성령님이 오시니까 그렇다는 것인데, 문선명은 40만이요, 박태선은 60만이다. 더 많이 기도하면 더욱 강한 성령님이 오신다는 논리는 성경전체를 허는 것이다.
성령님은 기본적으로 에수님을 알게 하며, 믿게 하고, 닮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역이 성경에 충분하게 기록되었다. 또 다른 계시나 유전이 필요없다. 이 성경 만이 구원과 인생의 길을 인도하며, 이루려는 사업에 힘이 되며,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한다. 즉 내 인생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 믿어서 잘 되는 것만 가르치며 축복의 비법을 설교하는 교회와 같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종으로 살며, 순종케 하여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일에 부름을 받았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믿음대로 실천에 옮길 때 교회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5. 성경 무오에 관한 고찰
교회사에는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자들의 출현이 빈번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어떠한 오류도 없다.
(1) 과학적 오류
성경은 과학적 상식으로 상충되거나 오류를 나타내지 않는다. 성경은 과학적 설명이다(욥26:7 ; 전1:7) 이는 성경 저자가 당시의 과학적 수준으로 모든 현상들을 언급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성령님의 영감으로 오류를 방지했다.
(2) 역사적 오류
역사적 고고학적 발견은 성경 역사의 정확성을 증명하고 있다. 성경의 기록이 세속 역사서나 세속 문헌의 기록과 상이 할 수 있는데, 이는 세속 문헌의 자료 수집의 오류로 말미암았을 가능성이 많다.
(3) 도덕적 오류
성경에 부도덕하게 보이는 행위가 인용된 것은 그 시대의 도덕 정도를 보아서 임시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허락과는 상이한 것이다. 특히 구약의 내용 중 노예, 일부 다처, 이혼, 복수 등의 부도덕한 측면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으로 신적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비록 그런 내용의 언급에도 성경은 부도덕한 측면을 옹호하지 않는다. 다만 그 시대의 도덕적 혹은 영적 연약성을 반영할 뿐이다.
(4) 인용 혹은 해석에 대한 오류가 없다.
구약 성경을 신약에서 해석 할 때 본 의미와 다른 것은 영감 된 성구를 영감에 의해 주해한 것이지 오류가 아니다.
(5) 보도의 불 통일에 오류가 없다.
진술의 생략이나 부분적임에 기이한 상이 뿐이며 진술의 형식이 변한 결과의 상이 뿐이다.
(6) 기타 오류가 없다.
자세히 연구하면 모든 오해는 풀린다.
(7) 남은 난관에도 오류가 없다.
과거를 보아서 미래 해결을 대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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