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밧모 섬의 비밀
제 1권
강의 이현채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연구원
요한 계시록 밧모 섬의 비밀
제 1권
차 례
서 론 ............................................................................................... 2
제 1 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 3
제 2 장 교회에 보낸 편지 .................................................................. 21
제 3 장 교회에 보낸 편지 ................................................................ 33
제 4 장 네 생물 ................................................................................. 37
제 5 장 안팎으로 쓴 인봉한 책 .................................................... 40
제 6 장 일곱 인의 재앙 ...................................................................... 52
요한계시록
(밧모섬의 비밀)
요한계시록은 모든 사건과 사물을 통해서 교회와 목회자들에 관한 교훈을 계시로 보여준 것이다. 계시록 1장 19절로 20절과 이사야 56장 9절로 12절의 말씀이다.
계시록의 내용은 요한이 보았던 것이다. 바울도 천국을 삼 층천까지 보았지만 기록의 은사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보았던 3층천을 설명하려면 계시록으로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말세의 종들은 비유와 비밀과 암호들을 분석하여 옥석을 가려내는 작업을 통하여 바른 종이 되는 길과 교회가 부흥할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기주의의 목회자는 사단의 종이 된다는 엄숙한 경고를 보여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이 책을 요한계시록이라 했으나 사실은 1장 1절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 것이다. 계시란 베일을 벗기다 혹은 드러나게 하다를 뜻하는 ‘아포칼립토’로부터 나온 말이다. 즉 에베소서 3장 3절의 말씀과 같이 계시로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이다. 창세전부터 신비이었던 것을 드러내신다고 해서 구약과 신약의 성경과 별도로 취급된 것이 아니라 신구약의 말씀들을 통해 주신 종들에 관한 비밀들을 요한에게 종합적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 중에 마태복음 24장이나 마가복음 13장은 같은 내용으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말세 사건 중 많은 부분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드러내어 폭로하신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전에 많은 선지자들 을 통하여 예언된 부분을 예수님께서 다시 예언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29절과 마가복음 13장 24절은 말세 사건을 우주의 대변혁으로 묘사해서 몇 마디로 요약해 놓은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도 같은 것이다. 이사야 24장 21절로 23절과, 34장 2절로 5절과 51장 5절로 6절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세 사건과 같은 내용으로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의 대혼란으로 묘사한 구절들이다.
하늘의 징조
마태복음 24장 29절의 환란은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린다고 했다. 계시록 6장 12절로 14절 말씀도 같은 예언이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주의 날(재림의 날)이 임하는데 도적같이 오며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했다. 이사야 24장 21절로 23절에 여호와께서 만왕의 왕이 되실 때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되 죄수가 되어 옥에 갇혔다가 형벌을 받은 후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장로들 앞에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제 1 장 예수 그리스도이 계시
1장 1절: ‘지시하신 것’은 “에센 마넨”은 “세마이노” 알린다, 혹은 전달한다는 것으로 미래를 지시하신다. 예고한다는 제 1과로서 미리 알리신 것을 말하며 변경이나 취소치 않음 을 분명히 하신다. 계시란 뜻하고, 표징, 증거, 이적, 상징, 징조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지시 하신 것이란 결국 상징적으로 보이셨다는 뜻이다. 즉 문자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는 계시를 한꺼번에 확실하게 보이시고 요한으로 하여금 천천히 그리고 문자적이 아닌 상징적으로 풀어야할 것으로 주신 것이다. 예를 들면 재림의 때를 밤, 낮, 새벽 등으로 말씀하셨다. 문자적 해석은 엄청난 천재지변의 환난으로 무정부 상태를 연상케 하셨지만 이는 영적인 면이요 육적인 면은 아니다. 현재의 사회보다 조금 낳은 상태일 것이다(살전 5:1-3; 암 8:11-13). 이렇게 계시록은 상징과 암호로 기록되었는데 암호는 비유이다.
영적 환란이란 교회 안에서의 비진리가 진리와 싸우는 것을 말하고 땅의 임금이란 교회의 지도자가 제외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창세로부터 감췄던 비밀을 비유로 들어 내주셨다(마 13:35; 시 78:2). ‘입을 열어’와 앞에 ‘내가’는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고 암호를 주신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며, 비유로 감추인 것을 드러내실 때 하나님의 뜻을 밝히신다. 이는 구약성경을 인정하시고 구약 성경의 잣대로 신약을 기록해 가시는 과정에서 구약의 예언들을 신약에 와서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사실 설명을 그와 거의 근사한 값에 해당하는 비슷한 것을 설명함이셨다. 즉 하늘나라인 천국을 가지고 오신 분께서 천국은 이렇게 생겼다고 설명하실 때 깨닫는 자의 복이다. 불가견적인 천국을 말씀하실 때 아하 이것이 천국이다. 라고 깨달을 수 있도록 주신 말씀이 비유이다.
마태복음 13장 10절로 16절의 내용의 복은 보고 들음이 복이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하였느니라”(마 13:14-15). 예수님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들음이 복이다. 성령하나님의 역사로 비유와 말씀이 선포되어 정확하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자는 예수님을 영접치 않아서 세상의 방법으로 해석하니 미래가 염려되어 자기를 고치지 못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외면하게 되며 새로운 사람으로 자기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마 13:13,15; 시 78:2; 마 4:34). 한마디로 믿는 자는 세상에서 망해야 살고 흥하면 죽는다지만 불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설익은 믿음도 세상에서 흥하고 천국에서도 흥하려고 하니 혼란이 온다.
보지 못한 자는 누구인가?
요한복음 9장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한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의 말씀은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성경과 하나님의 일을 보고 거기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 으면 아래 세상의 눈만 있는 영적인 맹인인 이방인이다. 예수님을 믿고서 예수님을 보면 영적인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예수님 시대까지는 성경으로 내세와 메시야를 보던 사람들이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내세와 예수님을 가르치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지는 못했다. 봉한 성경은 겸손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사야 8장 16절에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고 하셨다. 서기관들과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몰라보니 소경이라는 것이다. 이사야 29장 10절에 “대서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하셨다. 여기 눈과 머리를 덮으신 이유는 사람의 계명을 가르침이다. 이사야 29장 13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ㄹ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셨다.
여기 사람의 계명을 긍정적으로 말하면 간접 신성 론을 보이신다. 이사야 9장 6절에 이름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하셨고 요한복음 14장 10절과 11절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 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고 말씀하셨다.
또한 요한복음 10장 29절로 30절은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셨다. 복음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많이 나오는데 마태복음에 36회, 마가복음에서 4회, 누가복음에서 13회, 요한복음에서 16회, 복음서 외에 72회가 나오고 성경에서 232회이다.
1장 2절로 3절의 세 가지 복
본문은 요한이 예수님의 대한 증거를 다 보고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말씀 속에 감추어진 그 내용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눈을 가진 자와 지킬 수 있도록 허락된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1장 4절로 6절의 교회에 대한 문안
초대 교회의 일곱 교회에게 문안하는 인사의 형식을 갖춘다. 7은 완전 숫자로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이는 초대교회 당시 아시아에는 7교회 외에 밀레도, 아드라믓데노, 앗고, 드로아, 골로새, 히아라폴리스 등의 교회가 있었다고 하니 완전 숫자의 의미로 완전한 교회의 문안이다.
1장 5절의 해방
인류의 참 평화와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임하는 줄로 믿는다. 그 분의 사랑은 그의 피를 흘리 기까지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죄와 사망이 영원히 상관없는 참되 자유를 누린다.
1장 6절 귀한 직분
우리 같이 죄 많은 종들을 하늘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사명을 감당하는 길을 향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최선이 나를 위함이 아니라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원한 제사장으로 남아 있을 때 귀하다.
1장 7절 감추어진 예언
본문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의 말씀은 구약 다니엘서 7장 13절의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 이 말씀은 구약 다니엘 7장 13절의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의 배경이다. 예수님께서도 구름타고 오시겠다고 하셨다(마 24:30, 26:64; 막 13:26, 14:62; 눅 21:27). 그런데 상징적인 말씀들은 암호이기 때문에 구름이 아닐 수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지만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재림주로 불꽃 중에 강림하시고 심판하시며, 천하의 왕이 되시고 모든 성도의 신랑이 되시겠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그 말씀의 주제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본래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예를 든다면 구약에 여호와 하나님이 강림하신다는 예언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성취된 것은 근본대로의 재림이다.
1장 9절 말씀과 증거의 밧모 섬
8절은 4절을 참고하고 9절에서 사도 요한이 밧모라는 섬에 있음이 말씀과 증거로 확인된다. 2절의 말씀과 같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본 계시록과 증거 때문에 옥살이를 한 것이다. 사람의 삶에는 고난이 따르지만 믿음의 자녀들은 환란이나 핍박이 온다고 마가복음 4장 17절에 말씀하신다(요셉이 어릴 적에 받은 약속이 응할 때까지 갖은 고초를 당함과 같이 시련을 이겨야 한다. 예수님도 고난으로 온전하신 인성이 되셨다(히 5:8-9).
1장 10절 나팔 소리 같은 음성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은 “포넨 메갈렌 호스 살핑고스”인데 나팔 소리 같은 숭고한 음성을 뜻한다. 민수기 10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팔을 불어야 할 규례를 주셨다. 회중을 모을 때나, 진군할 때, 대적과 싸울 때와 즐거운 날이나 각종행사의 절기에 나팔을 불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되 이 규례는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출애굽 신앙에서 출발한 사상으로 사단의 지배아래 있던 이스라엘의 죄가 영원히 속죄되고 자유가 선포되며 어떤 노예라도 모두 해방을 받는 날을 기념하는 나팔을 불어라고 하셨다.
본 절의 나팔소리의 암시는 안식일을 확대하여 안식년을 지키며 더 나아가서 희년(천년왕국에서 이루어질 모든 약속이 모형 적으로 이루어지는 해)이라는 기쁜 해를 정점으로 하여 거룩한 해라고 하셨던 그 모든 안식일에 대한 약속을 이루어주신다고 하신 그 해에 나팔을 불게 하신 것이다. 하늘의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 때 들리는 소리이기도 하다(출 19: 16, 19).
1장 13-16절 인자 같은 이
인자란 복음서에서 예수님 자신이 자칭 사용하셨는데 본문에서는 그 ‘인자’와는 다른 인자이다. 비슷한 이란 말씀으로 인자를 방불한 이를 말한다. 히브리서 7장에서 멜기세덱을 설명할 때 의의 왕, 살렘 왕, 평강의 왕,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어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이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분이라 했다. 필로는 이분이 예수님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는 방불하지만 다른 분이다. 히브리서 6장 20절에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라고 하셨다. 본서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서 7장 13절로 28절의 말씀을 보면 세분이 나온다. 인자 같은 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13절, 지극히 높으신 자 18절과 22절에서 세분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영광과 권세와 나라를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때의 시대적인 배경이 계시록 11장 15절의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 되시는 때를 말씀하는 것 같다.
세 분의 관계
다니엘서에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권 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게 되는데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사역자임을 볼 수가 있다. 말세에 짐승이 나와서 성도를 괴롭히고 싸워서 이길 때(21-22)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원통을 풀어줌)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성도를 위한 싸움의 사역자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일을 대행하는 사역자이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는 원어로 “아티크 요민”인데 영원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이가 많은 매우 늙은 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분이 땅에 내려와 만인의 죄를 대속 하신 제 2위의 성자 예수님으로 볼 수도 있으나 사역자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인자 같은 이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께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상속 받는 또 다른 인자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보혜사를 말씀하실 때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다(요 14:16). 예수님께서 다른 인자와 구별하시기 위하여 인자 앞에 정관사를 붙여 그 인자라고 하셨던 것을 알 수 있다. 계시록 14:14-16절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 즉 인자 같은 이가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쓰고 손에는 이(利: 날카로울 이) 한 낫을 갖고 추수 심판을 하려고 구름 위에 앉았는데 또 성전으로부터 나온 천사가 인자 같은 이에게 낫을 휘둘러 추수할 것을 명령 한다. 그렇다면 그 인자 되신 예수님이 심판하려고 낫을 가지고 오셨다면 그 어느 천사가 감히 명령을 할까? 그러므로 그 인자 같은 이가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천사가 인자 같은 이에게 추수할 것을 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6:2절의 흰 말 탄자와 계 19:11절의 백마를 탄자는 심판주의 모습이 아니다. 심판 주께서 싸우며 또 이기려고 한 표현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는 말로 신성 모독이다. 모든 것의 생사화복이 그분께 있어야 전능자이다. 그러나 계시록 19장 12절에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는 아는 자가 없고”를 보라 재림 메시야 우리 주께서 친히 오셨다면 이름을 숨기거나 자기 밖에 모를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인자 같은 이’는 백번 양보해도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 그 사역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스가랴 14장 1절로 9절에 예수님이 오시는 배경과 천하의 왕이심을 드러내셨다. 이사야 63장 1절로 6절에서는 에돔에서 오시는 심판주로 화려하고 큰 능력으로 오심을 말한다.
계시록 1장 6절과 짝이 되는 말씀은 하박국 3장 3절에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또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신다는 말씀은 이사야 63장 1절의 “에돔 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하실 때와 같이 양쪽 다 심판 주께서 두 장소에서 오시는 것과 같은 그런 표현 형식을 취하고 있다. 데만, 바란 산, 에돔, 보스라가 갖는 각각 그 지역의 뜻이 하나의 예언의 암시로, 예언의 폭을 더 넓게 간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장소가 같은 나라인 에돔이라는 데서 심판 주께서 오신다는 것은 심판 주께서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실 수도 있다.
스가랴 6장은 계시록 6장과 짝이 된다. 말세에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얼룩진 말 등을 탄자들이 말세를 심판하는 모습이 나온다. 스가랴에는 말에 탄자들은 없지만 이들은 온 세상에 주 앞에 모셔셨다가 나가는 것이라고(슥 6:5-6)했다. 이 네 필의 말을 스가랴 6장 9절 이하에서는 네 사람을 예표한 사람에게 금 면류관을 씌우고 예언을 하게 하셨는데 그 내용은 ‘순’이라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게 되는데, 그는 결국 ‘다스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위의 1절에 에돔에서 오는 심판 주와 여호와 하나님과는 본문에서 엄연히 구분하면서도 ‘그는 내니’라고 하시는 것은 심판 주 인자 같은 이가 주 하나님의 사역자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노하셔서 만민을 밟는(6) 전 세계적인 심판의 때, 심판의 방법은 포도주 틀을 밟는 것(욜3:13; 계 14:19, 20과 병행 구절) 그 심판주가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인 에돔의 큰 도시 보스라에서 온다는 점, 하박국 3장 3절에도 심판 주께서 데만(에돔의 주요 도시)에서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돔과 시내 산 사이의 산이 많은 지역)에서 오신다고 했다.
그래서 예레미야 4장 11절로 13절에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베풀 것이라 보라(똑똑히 두고 보라는 뜻) 그가(심판주) 구름같이 올라오나니 그 병거는 회리바람 같고 그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도다.” 는 심판 주께서 이방 지대에서 오시기 때문에 저 하늘에 있는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다니엘 7장 13절을 성경 원어를 살피면 재림 메시야께서 ‘구름 타고’가 아니라 “하늘 구름으로 한 인자 같은 이가 오시리라”이다. 즉 구름과 관련된 사건으로 말씀 하신다. 이때 구름은 인봉된 또 하나의 암호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가 구름 같이 올라 온다.’ 는 말씀을 한 것이다.
하박국 3장 3절로 15절은 이사야 63장과 짝이 되는 말씀이다. 9절에 주께서 활을 쏘시는 모습도 스가랴 9장 14절의 심판 때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같이 쏘아내실 것이라”고 한 말씀과 병행된 구절이다. 악인의 집 머리를 치시며(13)와 천사의 머리를 창으로 찌르셨다(14)는 말씀은 에덴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게 한 후에 하나님께서 옛 뱀(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에게 하신 저주의 예언이 성취되는 때이다. 15절에서 주께서 심판하신 그 대상을 바다라고 하셨다. 왜 바다를 밟아서 심판하셨는가? 파도가 일어나기 때문에 파도를 밟으신 것이다. 이는 심판이 불신자와 신자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고 인봉된 암호의 말씀이다(물=말씀 파도=변질된 말씀).
그 선지자(요 1:21, 25, 6:14).
요한복음 1장 21절에 “또 묻되 그러면 네가 엘리아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부터 모세에게 약속한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다(신 18:18).
첫째 그리스도냐? 둘째 엘리야냐? 셋째 그 선지자냐의 물음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에게 약속한 예언이다. 이 세분에 관한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성취되었고, 엘리야 역시 길을 평탄케 하려고 왔고(눅 1:13-17, 24-31), 세례 요한이 그 사명을 다했다(마 11:11-14). 그런데 그 선지자는 아직 오시지 않았다. 계시록 11장 3절로 12절에 그 선지자의 활약이 기록되었는데 1260일 동안 예언을 한다. 환란 기 삼년 반 동안 전하면 누구든지 해하려고 한다. 성경은 이들을 두 증인이라고 하며 이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귀한 분들이라고 하였다. 혹은 두 감람나무와 두 금 촛대라고 한다(슥4:1-14).
엘리야의 환생
선지자 중의 한 분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말라기 4장 5절로 6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이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들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셨다. 구약에 엘리야가 예수님의 증언대로 세례 요한으로서 다시 와서 사명을 다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본문에 말씀한 내용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아니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본문 1절에 말씀한 대로 교만한 자와 악한 자를 마른 풀같이 살라버리는 그런 심판의 때를 말씀하신 것인데 초림 메시야 때는 그러한 극렬한 풀무 불같은 심판의 때는 아니었다. 말라기 4장 1절 도 풀무 불같은 날에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초개로 비유했지만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셨다. 말라기 4장 5절로 6절의 배경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인 말세 대 심판 때의 일이다. 그 때에는 요엘 2장 31절의 말씀같이 두렵고 떨리는 여호와의 날이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초림 메시야 때는 그런 무서운 심판이 아님이 확실하다. 예언의 특성은 깨닫지 못하면 반복적으로 예언하는데 시대를 따라 예언하셨던 것이다.
어린 양
계시록에서 두 선지자 중 한 분이 출애굽 당시 모세가 애굽에서 그 재앙을 행하던 것과 같은 물이 변하여 피가 되게 하는 것은 모세의 심령과 능력으로 오신 분인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도 인정하실 때 요한복음 5장 4절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로 언급 한 바 이스라엘이 그 선지자를 기다리는 사상이 있다. 누구인가? 계시록 15장 2절로 3절에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 하시 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 되시도다”의 말씀에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라는 사실을 말씀하는 것이다. 여기 어린 양은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과 다른 양이다. 복음서의 어린 양(암노스)=보통 양, 계시록의 어린 양(아르니온)=보통 양에 미치지 못한 아주 어린 양이다. 이를 두고 어떤 학자들은 요한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요한복음과 다른 양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니온 이라는 단어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직접 통치가 아닌 사명을 받은 ‘인자 같은 이’의 사역이다. 히브리서 11장 24절에 모세가 애굽에서 공주의 아들의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을 설명하기를 11장 26절에 “그리스도의 능욕”이라고 하였다. 우리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 했으니 잘못된 것이다. 오실 그 선지자를 모세가 그리스도의 능욕을 받은 그 심령과 능력으로 왔다는 것이다.
인자
시편 80편 17절에 보면 “주의 우편에 앉은 자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가 나온다. 이분은 주의 우편에 앉은 제 2위의 하나님이시다. 잠언 8장 31절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했는데 여기 ‘내’는 지혜이요 인자들이 함께 있었음을 밝힌다. 그러니까 창조 전에 인자라는 사람들이 여려 명이 있음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 인성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말 한다. 욥기 38장 7절도 하나님이시며 인자이신 예수님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인자가 많이 있거나 천사 혹은 예수님으로 통하는 고급 천사가 있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심
다니엘 7장 13절로 14절에 인자 같은 이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게 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5장 27절로 28절에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의 해석의 요지는 예수님이 심판하시지 않고 인자됨을 받은 사명 자가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직접 하시면 이상하거나 기이히 여길 필요가 없다. 요한복음 12장 47절에서도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 하노라’고 분명히 하신다.
1장 17-18절 죽은 자 같이 되는 경우
사도 요한이 ‘인자 같은 이’를 대할 때 그 발아래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된 것은 흙으로 만든 인간이 거룩하고 귀한 영체를 대할 때 하나같이 감당하기 어려워 죽은 자 같이 된다. 다니엘도 힛데겔 강가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뵈옵고 죽은 자 같이 되었다(단 10:8-10).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사도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창조의 근본”이라고 할 때 이 근본이라는 말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태초가 아니라 먼저 있었던 선재의 함축으로서 시작을 뜻하는 것과 같이 인자 같은 이가 나는 처음이요 라는 말씀 역시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그런 처음과 나중을 뜻하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단지 유구한 세월을 지나오다가 어느 지점에 와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처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인자 같은 이는 계시록 21장 1절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으로서 나는 처음이요라고 하는 것이며 또 나중 이니라 는 말은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가신 것과 같이 인자 같은 이도 전도서 1장 4절의 말씀대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라는 말씀 따라 그 언젠가는 또 한 세대가 지나가는 그 끝에 가서는 인자 같은 이도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들어갈 때를 나중이니 라고 이르는 말이며 하나님께는 나중이 없고 영원만 있다. 그래서 주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 받는 장자들이 그 차례를 따라 생기는 현상들이다. 사람들의 가정에는 장자가 둘이 있을 수 없다. 우리 주 하나님에게는 이상하리만큼 장자들이 수없이 많다. 히브리서 12장 22절로 24절에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의 말씀은 하나님의 도성에 있는 구조와 및 그 구성원들을 설명하는 말이다.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 장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곧 산 자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산 자의 의미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나는 처음과 나중이니 곧 산 자라’고 할 때 ‘곧’이라는 뜻 앞에 있는 말과 뒤에 있는 말이 같은 뜻으로 연결지어지는 말이므로 산 자라는 뜻은 곧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산 자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 하였도다 하시니라”로 정의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본문이 말씀하시는 산 자라는 뜻은 숨을 쉬고 활동하는 자체를 ‘산 자’라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온 장자들만이 산 자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고 하셨던 것이다. 문자대로 직역하면 영혼들이 장사(초상)하겠는가? 예수님이 호흡 있는 자들을 보실 때 죽은 자와 산 자가 있는데 구원받지 못한 자로 장사 하게 하고 너는 생명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는 하늘의 기업을 이어받은 산 자의 행위요 그러한 자가 산자이다.
1장 19-20절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
일곱 별=일곱 교회 사자, 일곱 촛대=일곱 교회로 요약되지만 문자적인 의미로는 하늘의 별과 땅의 목회자와 상관이 없다. 그리고 촛대도 마찬가지이다. 혹시 등불과 교회라면 시 적으로 표현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별과 촛대로 말씀하시면 종들과 교회의 암호로 알자. 비밀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계시록의 핵심열쇠이다.
계시록의 핵심
첫째: 1장 19절의 ‘본 것’과 ‘기록하라’를 실천하니 계시록이 되었는데 저자 이름을 붙이니 요한 계시록이 된 것이다.
둘째: 본 것은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시간적으로 구분해서 기록한 것이다.
셋째: 1장 20절에 19절에서 본 것을 한 꺼풀 벗겨서 그 내용물을 보이신 것인데 예를 들면 밤송이를 보았다면 이제는 입에 들어갈 수 있는 밤을 보이신 것이다. 즉 네가 본 것은 내 오른 손에 일곱별과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느니라. 의 말씀이다(19절에서 볼 것이 아닌 본 것이다). 이를 요약한다면 교회와 목회자의 비밀에 관한 기록이다. 그런데 이를 세계 정치로 풀거나 3차 전쟁으로 해석하면 되겠는가?
그렇다면 주의 종들의 비밀이 무엇일까? 목회자의 활동사항이다. 문제는 활동이 모두 암호이기 때문에 재림 때까지 각기 제 길로 가고 고치지 못하므로 심판에 이르게 된 무서운 말씀이다. 암호가 아니면 종들은 선택교리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편의 사자들도 사단편의 사자와 같이 암호라는 비밀이 붙어 있다. 계시록에서까지 누가 참 종이고 사단으로부터 온 종임을 구분할 수 없기에 비밀이다. 예레미아 23장 21절로 22절에 보내시지 않은 종들이 있다고 했다. 뿌리지 않았는데 싹이 나온 가라지가 있다. 문제는 그들이 시 들어 버리면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도하고 열심을 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참 뜻을 모르기 때문에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1장 15절에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종교 지도자들의 소속을 밝히실 때 ‘너희의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 마귀의 행실을 한’(요 8:44)다고 말씀하셨다. 무섭고 놀라운 말씀이다. 회개나 고칠 생각이 전혀 없는 저주 상태이다. 그들에게 마귀의 종이라는 비밀이 붙어 있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요즘 성공적인 목회자, 세계적인 성공자로 존경 받는 종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암호는 마귀니라(요 6:70)하셨다. 택함을 받지 않으면 예수님께 직접 3 년 동안 배웠어도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음을 깨닫자. 결론은 말세에도 초림 예수님 때와 같이 재림 때에 주의 종들 중 상상을 초월할 위대한 종들 중에 마귀의 사자가 있다고 교훈해 주신 것이 일곱별의 비밀이다.
제 2 장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먼저 일곱 교회가 실재한 교회인 것은 많은 문헌들에서도 입증이 된 사실이다. 핵심은 세계적으로 흩어진 교회인 개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벗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신, 불신자).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도와 주의 종이 되는 기준이요 본인들의 신앙상태를 점검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에베소 교회(1-7)
칭찬 받은 것은 행위의 수고이다. 인내, 악한 자를 용납지 아니한 것, 거짓 사도를 가려낸 것, 주의 이름을 위하여 참고 견디는 것,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품고 게으르지 아니함 등이다. 우리가 부끄러울 만큼 장점이 많은 교회이다. 2절에 악한 자와 자칭 사도를 드러냄은 어려운 일이다. 물리적으로 악함이 아니다. 성격이 포악하거나 나쁜 죄를 짓는 자는 스스로 드러내니 어려울 것이 없다. 우리 같으면 악한 자를 용납지 않으려면 산 속에서 혼자 살기 전에 좋은 수가 없을 것이다. 에베소 성도들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으면 양의 탈이 가짜임이 밝혀졌을까? 이리를 드러냄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리에게 찢기고 상하여 죽을 때에 드러냄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린도 후서 11장 13절로 15절을 읽었어도 누가 나는 가짜 종이다. 마귀의 종임을 알릴 자가 있으며 양심적일 수 있을까?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이일을 해낸 것이다. 6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속셈을 알았다. 1장에서 3장에 이르는 일곱 교회를 타락시키는 악의 세력이 인격체이거나 비 인격체를 막론하고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나타날 또 다른 이름들이다. 즉 니골라 당이나, 발람의 교훈이나, 이세벨이 주는 교훈 등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게 하며, 일곱 교회를 타락시킬 요인을 말씀하고 있다. 십계명과 율법을 볼 때 하나님께 범한 죄가 무서운 것 같이 크고 무서운 죄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 행위이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예배를 대신 받으려는 악한 범죄를 성경의 지식과 신령한 안목으로 물리쳤다.
그렇지만 에베소 교회가 잘못이 있으니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 처음 사랑이란 원문을 살피면 “텐 아가펜 수 텐 프로텐”으로써 ‘그대의 처음 사랑’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가페의 처음 사랑을 소유했다가 버렸다는 말씀이다. 중생의 기쁨이 삶의 원동력이 되어서 촛대를 옮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촛대가 무엇인가?
촛불을 꽂아 받쳐 놓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만 계시록의 제목과 같은 19절로 20절의 말씀을 비춰보면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를 옮긴다는 것이다. 즉 말세론적인 의미로는 타락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교계에서 불러냈지만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리므로 나도 너를 버려 영광스러운 그 자리에서 옮긴다는 말씀이다. 처음 사랑을 영원까지 있게 하자.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겨야 할 사항들이 많지만 본서에서 말하는 이김과 상대와 보상을 알아보자.
생명과를 주심(7)
계시록 22장 2절에 생명수 강가에 있는 생명과가 12가지 열매를 맺는데 이기는 자는 그곳에서 살며 그 과실을 먹게 된다는 말씀이다(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1)
계시록 20장 14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이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는 사망과 음부의 권세까지도 집어 삼키는 마지막 불 못인 지옥을 일컬어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된 자만 이 곳을 면하게 된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심(2:17)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좋은 것을 주셨는데 받은 자만 안다는 것으로 출애굽 때 광야에서 먹었던 양식이 소개되었다. 이 양식을 먹은 자가 가나안에 입성한 것처럼 만나의 암호인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 영의 양식인 말씀이 지시한 ‘호 로고스’가 만나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열매를 먹고 영생할 것과 그 성에 들어갈 조건이 계시록이 이루어지는 때에 믿는 자 안에서 예언의 계시록을 제하는 자인가? 모두 소유한 자인가에 따라서 죽고 사는 심판이다. 계시록 자체로도 생명의 말씀으로 감추어진 만나인 것이다.
흰 돌을 주심
스가랴 3장 6절로 9절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며 지킬 예표의 사람을 ‘순’이라고도 하며 또 바꾸어서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는 그런 예표의 사람’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그 돌 위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고 했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그 때에 한 돌이라고도 하고 또 그 돌에 일곱 눈이 있는 그러한 신령한 분이 나온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말하기를 반석 즉 돌이라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18절로 19절에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천국 열쇠를 맡은 자는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며, 또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그런 권세 자를 이름 하기를 ‘베드로’라고 하셨다. 원문은 ‘페드로스’인데 이는 큰 암반이나 암벽에서 떨어진 작은 바위 돌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한 것과, 로마서 9장 33절에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하실 때 반석은 ‘페트라’이다. 이 페트라는 암반이나 암석을 말 할 때 사용하는 단어로 예수님을 상징하고 베드로는 큰 반석에서 떨어진 작은 바윗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실 때의 반석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페트라’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반석은 베드로의 반석이 아니라 ‘페트라’인 말세에 나타날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을 받은 자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이다(베드로의 신앙고백 보다 확실한 흰 돌). 그런데 이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을 받은 자 외에는 알 사람이 없다(계 2:17)고 했다. 이는 계시록 19장 1절로 16절에 심판 주이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되신 분께서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는데 마치 흰 돌 위에 새긴 새 이름의 경우와 같이 재림 메시야도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다고(19:12)했다. 그래서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을 받은 사건이나 심판 주께서 가지신 이름을 자기밖에 모르는 안타까운 사정이 모두 한 분을 가리키는 “인자 같은 이”의 사역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심판을 하신다면 어찌 모든 성도들이 모르겠는가? 하나님께서 감추신 메시야의 사건이라 인자 같은 이 외에는 심판 주가 누구인가를 아는 자가 없는 것이다.
베드로의 반석과, 천국의 열쇠와, 풀기도하고 매기도 하는 절대자와 같은 권세는 어디까지나 베드로를 예표 하여 말세에 나타날 사건이다.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는 돌
눈이 달린 이 돌은 어린 양을 상징한 돌이다.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말씀하신 본문의 양이 갖는 성품을 이사야 9장 6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 존 하신 아버지, 평강의 왕 등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인 것과 같은 경우이다.
일곱 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다. 그러니까 ‘페트라’인 반석에 박힌 일곱 눈으로 상징된다. 에스겔이 하늘의 신령한 영체를 설명하면서 그들의 소리를 ‘전능한 자의 음성과도 같으며’라고 했다(겔 1:24). 곧 하나님의 음성과 같은 어마어마한 분들이다. 그런데 그 분들의 둘레에는 눈이 가득하다고 했다(겔 1:18). 계시록에서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히 갖춘 성수라는 뜻과 같이 여기 일곱 눈도 하나님을 뜻을 완전히 볼 수 있는 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눈이 가득하다는 것 역시 일곱 눈을 가진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신령한 눈을 가진 분이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서 보내심을 받고 이 땅에 오게 된 어린 양인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일곱 영은 어린 양이라고 했는데 계시록 1장 4절에서 5절 사이에 살펴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일곱 영은 서로 다른 신령한 영체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 메시야는 그 인자가 아닌 즉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인자 같은 이”가 대신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거듭 말씀하신다. 사도요한도 요한1서 2장 1절에서 예수님을 대언 자 즉 보혜사 ‘파라클레톤’이라고 했다(본문과 요14:16, 26, 15:26, 16:7에만 파라클레톤이라고 기록함).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한 ‘또 다른 보혜사’가 파라클레톤이다. 예수님과는 다른 또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성령님이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 일이 있는가? 요한복음 16장 7절로 8절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감동과 감화라기보다 일곱 눈이라고 하고 일곱 영이라고도 하는 계시록의 어린 양의 표현이다.
만국을 다스리는 철장 권세를 주심(2:26-28)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위의 권세를 받으려면 이기는 자가 되고, 맡기신 말일 역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이 놀라운 약속은 만왕의 왕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27절은 마치 심판 주를 삼겠다는 말씀이다. 시편 2편 5절로 9절에도 철장 권세 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특별히 7절에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셨는데 이는 말세지 말에 만왕의 왕을 나타내시는 그 날이 오늘 날이다. 왜냐하면 계시록 12장 3절 이하에 큰 붉은 용이 머리가 일곱이며 뿔이 열이나 되는 사단이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짐은 주의 종들이 변질되어 사단에게 굴복할 때 해를 입은 여자(계 2:1)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심판 주께서 사단이 말세 교계를 짓밟는 그 때에 해를 입은 여자를 통하여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 아이를 낳는 그 때가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그 때인 것이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28)
새벽 별은 계시록 22장 16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새벽 별을 주신다는 말은 예수님이 가지신 여러 이름 중에 하나를 주신다는 데 곧 예수님의 이름을 받은 자를 뜻 한다. 인자 같은 이가 예수님의 이름 중 하나로서 새벽 별의 이름을 받고 예수님께서 하실 그 사명을 수행 한다는 말씀이다.
흰 옷을 주심
계시록 4장 4절에 하늘 보좌에 둘러 서있는 24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주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7장 9절로 14절에 구원 받은 큰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여러 종려 가지를 들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옷은 7장 14절에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한 옷이라고 했다. 이 옷은 사람의 옷과 다르게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된 옷이기 때문에 그 흰 옷은 구원의 옷을 말한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여섯 번째 약속
계시록 3장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인데 하나님의 집을 지탱하는 귀한 몫을 함과 같이 귀한 사역자를 삼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신다는 말씀이다.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일곱 번째 약속
계시록 3장 21절에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심이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계심과 같이(눅 22:69, 20:43; 막 16:19, 14:62, 12:36; 마 26:64, 22:44) 이기는 자를 자기와 같이 보좌에 앉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보좌는 왕의 권세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 권세의 자리에 함께 앉게 되면 그 이기는 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자 같은 이가 이기고 이겨서 그 권능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되는 것이다.
서머나 교회
2장 9절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부요한 자 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의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부요하다는 말은 고린도 교회와 상통한 말씀이다(고후 6:9-10).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았으므로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천국을 소유했기 때문에 부요하다는 것이다.
십일 동안 환란을 받음(8-11).
다니엘이 우상 종교에 더럽히지 않으려고 왕의 진미를 거절하는 열흘간의 시험 같이 말세에 교회의 삼분의 일이 우상 종교로 변질될 때 그들로부터 나오는 변질된 만나를 안 먹는 기간이기도 하며, 열흘이라는 수는 땅에 속한 숫자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최소한의 성수를 열이라 정 한다(소돔의 최소한 의 성수인 ‘열 명’이 없음과 리브가를 선택할 때 ‘며칠을 머물게 할 때 적어도 열흘’이었다( 창 18:32; 느 4:12; 창 24:55 ). 그러므로 십일 동안 환란을 당하는 다니엘서의 표현은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일을 지낼 것이요 기다려서 일천삼백 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는 그 환란의 정한 기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버가모 교회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시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좌우에 날선 검
에베소서 6장 16절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씀하셨다. 계시록 1장 16절 “그 오른 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하셨고 또한 계시록 2장 16절과 19장 15절과 21절에 ‘입의 검’을 말한다. 이는 전쟁 때 사용하는 검이 입에서 나오니 더욱 말씀의 검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싸움 자체가 일반 세상적인 전쟁으로 세계 제 3차 전쟁의 싸움이 아니라 진리와 비 진리의 싸움이라는 사실이다.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
버가모 교회는 우상의 도시에 세워졌고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본문 9절에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나를 현대로 바꾸면 자칭 성도라고 하나 실상은 성도가 아닌 사단의 회라고 하신 것이다. 13절에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시게 된 것이다. 말일 교회는 결국 사단과 함께 거처하는 혼합된 교회란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 사단이 자기의 보좌를 놓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데 변질된 교회는 사단 편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섬김이 아닌 사실상 자기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는 축복 사상으로 빠지도록 유혹하고 있다. 축복 사상은 하나님과 더불어 금송아지를 자연스럽게 섬기도록 유도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때 아침과 저녁에 제물을 바치며 많은 고생을 했지만 우상을 섬겼던 것이지 하나님을 섬김이 아니다(암 5:25; 행 7:42).
금송아지 신앙
성경이 말한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예배는 불신앙의 생활로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복지라고 하는 천국을 향한 노정기를 모형 한 것이다.
금송아지 신앙이란 출애굽 한 성도들이 시내산 밑에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과 송아지를 함께 섬기던 그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출애굽 성도들이 금으로 만든 사실은 다른 이방신상을 만들려고 목적하는 데서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섬기던 여호와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격하시킨 변질된 하나님으로 만든 것이다. 그 동기는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아 마음이 초조한 나머지 자기들을 보호할 하나님을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그 욕구를 표현한 것이 금송아지이다. 주변에 이방인들이 소를 섬기는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은 금으로 만든 차원 높은 것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소’하면 생각나는 잘못된 우상 신을 확실하게 잊어버리고 ‘소’하면 우리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생각나도록 바꾸고 싶었던 발상이었다(출 32: 4). 그리고 아론은 금송아지 앞에 단을 쌓고 내일은 송아지의 절일이 아니라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공포까지 했지만 그들이 알지 못한 다른 실재의 악한 영이 마음속에 침투한 것이다. 이 사상은 여로보암에게 이어져 날로 확장되었다. 이는 신약에 예수님을 찾던 민족들이 떡을 먹고 배부른 연고로 예수님을 찾음과 같다. 오늘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아래 육신의 부와 행복을 추구한 사상이 담긴 금송아지 예배로 전락할 때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예배를 받으실 전을 건축할 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지으라고(출 25:8)” 하셨던 것이다. 이는 인간 창조의 뜻이다.
본문의 버가모 교회는 혼합주의 예배인 금송아지를 섬겼던 그 결과로 희생과 제물을 사단이 받은 것이다. 이와 같이 말일의 교회가 니골라 당과 발람의 교훈과 자칭 선지자 이세벨의 사상이 순수한 신앙을 변질시킨 결과로 교회 안에 사단의 위가 있다는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
이 교회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고루 갖춘 모범적인 교회인데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므로 책망을 듣게 되었다. 두아디라 교회도 황금주의 축복사상에서 하루속히 빠져나와야 한다.
성경에서 교회를 여자로 말씀하고 있다. 즉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와 매를 가는 여자와 시온의 딸들로 상징하는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신부로 데려감을 받고, 어떤 사람은 버려둠을 받는데 이는 신앙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자칭 선지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아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자들을 모형 하는 것이며 실상은 그 영적 근본이 다른 세계의 사단의 사역자로서 원수 마귀가 이세벨이라고 하는 거짓 교역자를 교회 위에 덧뿌린 계시록 12장에 해를 입은 여자와 대조를 이룬 사단 편의 여자로 내세운 이세벨이다.
사단의 깊은 것을 모르는 두아디라 교회(계 2:24-25).
본문 중 사단의 깊은 것은 사단의 행동이 있기 전의 전략을 말하고 에베소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는 니골라당으로 말씀하셨다. 버가모 교회에게는 발람의 교훈이라고 하셨는데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차칭 선지자 이세벨이라고 하셨다. 모두 다 사단의 전략을 표현하지만 영의 눈은 캄캄해도 충성된 교인들은 큰 환난을 통과하면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 있는 것이라도 굳게 잡으라는 당부의 말씀이다.
계시록 제 3 장 사데 교회
3장 1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로 표현할 만큼 소망이 없는 교회이었다. 서머나 교회는 토몰루스(Tmolus) 산의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요 부요한 도시에 성도들이 많아 명예와 명성을 좋아 하지만 진실과 참된 신앙은 찾아볼 수 없는 교회이었다.
1. 죽은 교회이다.
여기 죽었다는 말은 이름만 교회이지 세상의 기준에 맞춘 교회이며 외적으로 성도이지 내적인 상태는 성도가 아님을 말한다. 조직교회에서 형식적으로 세례교인과 유형적인 직분들이 있을 뿐이지 신령한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권속이 아니었다. 기도에 있어서도 골방기도가 없으며, 구제는 강조되어 돕고 있으나 탐욕이 많고, 예배는 있으나 의식과 형식에 그쳤으며 세상과 하나 되니 하나님과 단절되어 죄악도 합리와 하는 교회가 사데 교회이다.
2. 회개하라
하나님은 아주 버리신 것이 아니다. 이제라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듯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희미한 신앙 속에서 회개의 역사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이는 뜻을 스스로 돌이키라는 것이요 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전환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3. 승리자도 있는 교회이다.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예복을 더럽히지 않고 주와 동행자가 있었다. 죄악을 이긴 자는 영광의 흰 옷을 입는다는 약속이 있었다.
결론
물질에는 부요한 자요 부족함이 없었지만 신앙생활은 미온적이요 헌신도 예리한 감각도 없었다. 책망과 경제적 권면을 받은 교회이다.
빌라델비아 교회(3:8-10).
사데 동남쪽 28마일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업의 도시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는 작고 연약한 듯 보이지만 질적으로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만한 교회이다.
1. 칭찬받는 성도들(마음, 행실. 생활).
적은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으며 마태복음 25장에서도 작은 일에 충성한 자를 칭찬하시고 축복을 약속하셨다. 끝까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으며, 마태복음 5장 10절의 말씀과 같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이었다. 그리고 인내의 말씀을 지키되 환란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 궁핍한 중에 그리고 유혹이 많아도 진리 위에 서서 말씀을 지켰던 교회이다.
2. 받은 약속이 있는 교회이다.
열린 문을 두셨는데 충성된 종들에게 주신 축복의 문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주신 문인데 양의 문, 은혜의 문, 전도의 문, 천국의 문과 달란트를 주셨으니 잘 감당하자.
의인에게 승리와 개선을 주시지만 악인은 하나님께서 망하 게 하시고 그 끝이 비참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곧 의인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시겠다는 굳은 약속이다. 시험의 때를 면케 하리라 혹은 시험을 만나도 베드로가 옥에서 나온 것처럼(행 12:7-이하) 혹은 바울과 실라가 옥에서 당당히 나온 것처럼(행 16:26절 이하) 시험의 때에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성전 기둥 되게 하심(3:12).
이는 하나님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며 흔들리지 않고 든든한 교회가 될 것을 약속하심이 기둥이다. 솔로몬의 성전처럼 두 기둥에 야긴과 보아스가 있는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이다. 성전에 모든 것을 갖추고 천국과 이 땅에서 인정하는 자가 되고 기둥의 사명을 잘 감당하자.
결론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 곳이니 항상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이단들을 배격하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아니하고 진리에 순종하여 봉사해야 한다. 성경대로 살아서 예수님을 본받고 닮아가는 교회는 영원무궁토록 보장해 주신다.
라오디게아 교회(계 3:15-19).
현대 교회에 심각한 교훈을 주는 교회이다. 이는 신앙적 빈곤과 외적인 요소와 오만함으로 가득 채워진 교회이다. 그러므로 부패, 타락한 교회로서 신앙적으로 병들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신적으로도 깊은 잠에 빠진 교회요 생명력을 상 실한 교회이다.
1. 토하시겠다는 교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기회주의자도 아니요 이중성격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병들어 죽게 된 시체와 같은 교회이며 환자와 같은 교회로서 진리의 예리한 칼도 상실하였고 뜨거운 충성도 상실하였고 환난에서 일사각오나 생동력도 상실한 무기력한 교회는 토하시겠다는 것이다.
2. 회개할 줄 모르는 교회(17).
자신들의 부족한 신앙생활을 가장 위대하고 독실하게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교회이다.
1. 곤고를 알지 못함: 죄와 싸워 이길 능력이 없다(롬 7:24). 불의와 짝하는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한 증거이다.
2. 가련한 것을 모른다. 신앙생활이 죽어가는 상태에 빠졌는데(사 41:17)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3. 가난한 것을 모른다. 영적 가난으로 믿음, 소망, 사랑이 없다. 이는 육적인 부요가 준 신앙의 빈곤이다.
4. 눈이 소경된 교회이다: 영안이 없어서 분별력을 상실한 신앙상태를 말한다. 곧 죄악을 통찰할 수 있는 기력을 상실한 교회이다.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신앙은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고 마음이 청결하지 못함이다(마 5:3, 8).
5. 벌거벗은 교회이다: 회개하지 않아 죄 사함을 받지 못하여 부끄러운 죄악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교회이다. 죄의 수치를 모르는 교회요 하늘의 천국 백성의 신분을 상실한 교회이다.
모두는 죄를 용서 받아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입는 옷으
로 새롭게 갈아입어야 한다.
3. 최후의 사랑을 권면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고 흰 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했다. 이는 예수님만을 의지하고(고후 1:9) 살아가므로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로 돌아오라는 말이다. 시 19편 8절에 계명=순결, 눈=밝게 하여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므로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결론
칭찬이 없는 책망의 교회는 믿음과 행위와 생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예수님의 뜻을 좇아가는 생활인 것이다. 우리는 겸손과 부족감에 가득한 생활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벗어나자.
계시록 제 4 장 네 생물
지금까지 1장에서 3장까지가 요한 계시록의 서론 부분으로 만일에 교회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부분이다. 그리고 4장은 사건이 마친 이후에 있을 천상의 승리의 축제와 및 그에 따르는 상급과 서열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현재가 아닌 세상의 모든 환란이 끝나고 그 이후에 영계에서 ‘마땅히’ 될 일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말세의 사단의 전략과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을 밝히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계시록과 에스겔서는 많은 부분이 짝을 이루고 있다. 본문 4장 6절로 8절의 ‘네 생물’은 에스겔 1장과 3장과 10장
에 나오는 ‘네 생물’과 같은 생물을 소개한다.
네 생물
이 생물들의 이름을 에스겔서 10장 15절과 20절에 ‘그것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본 바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래 있던 생물이라 그들이 그룹들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기록했다. 그러므로 네 생물의 또 다른 이름이 그룹들이다. 이들은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를 덮고 있는 그 그룹을 말한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그룹들 사이에 계시는 만군의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서에 나오는 네 생물은 네 개의 날개를 가졌는데 계시록의 생물은 여섯 날개를 가짐으로 서로 다른 생물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네 생물의 얼굴이 첫째는 사자, 둘째는 송아지, 셋째는 사람, 넷째는 독수리 같다고 했으나 에스겔서 1장 10절의 생물의 얼굴과 같다. 하지만 에스겔 41장 18절로 19절에서는 두 얼굴을 가진 생물(그룹)로 되어 있다. 통일성이 없는 사실 속에서 부정할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를 이해 못한 우리들에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이나 또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여러 가지의 설화까지라도 자료로 삼아서 신령한 세계를 설명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사자라 함은 땅의 왕, 송아지는 순종으로 주인에게 필요와 강인함, 독수리는 공중의 왕, 얼굴이 사람 같다는 뜻은 에스겔 1장 5절은 사람의 형상으로 표현 했다. 사람의 형상인데 기능을 말하자면 이러이러한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에스겔 1장 13절에 와서는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의 표현과 계시록 4장 7절 은 “사자 같고, 송아지 같고, 사람 같고, 독수리 같은데” 라 함은 보기는 했어도 바르게 묘사할 길이 없어서 같으며, 또는 같고, 혹은 모양이라는 용어를 반복해서 사용한 것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보았지만 세상의 무엇과 비교할 수 없어서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생물들이 모두 입이 있다는 사실과 말을 할 때에는 입을 사용치 않다는 사실이다(겔 3:12-13).
계시록이나 에스겔에서 다루는 말세의 사건 중에 천국 인을 칠 때 사람과 천사가 인을 치는 것으로 기록되었다(겔 9:1-7; 계 7:1-4).
생물의 직능
에스겔의 생물은 폭풍과 큰 구름 속에서 불이 번쩍 번쩍이고 그 빛이 사면에 비취는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곧 이렇다고 했다(겔 1:4-5, 24, 10:5). 즉 사람은 사람인데 아직 인간계에 나타나지 않은 영계에 속한 사람이다.
생물이란 장엄한 영계의 거성이 말일 역사에 계시록 6장에서 어린 양이 인봉된 말씀을 떼실 때마다 이 생물이 명령을 내리는데 그 명령에 의하여 네 필의 말과 그 말에 탄자들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 입장에서 말일의 역사를 설명한다면 그룹이라고 하는 네 생물들이 말일 역사의 주역이다. 이는 계시록뿐만 아니라 에스겔의 대부분이 생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생물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 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는데 사람의 모양 같은 분이 앉 아 계신다고 할 때 하나님은 아니신 것이 분명한데 에스겔은 이분을 가리켜 ‘주의 신’이라(3:12-14) 함을 볼 때 주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신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분의 형상이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의가 불같고 사면에서 광체가 나며 그 사면의 광채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은데 이는 마치 여호와의 형상이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구원받는 성도인 우리들이 속히 갖추어야할 본분인 것이다.
말일 사건이 두 가지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인데 그룹들이라고 부르는 생물의 사역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영의 세계에서 보고 설명하는 것이다.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선지자라고 하는 두 증인과 구름 타고 오시는 재림 메시야는 인간의 세계에서 식별된 사역자들의 이름이다. 즉 하나의 사건을 두 가지 형태로 설명하였다. 처음은 영의 세계에서의 형태로 설명하고, 다음은 인간 세계의 사물로 설명할 비유와 상징으로 했다.
제 5 장 안팎으로 쓴 인봉한 책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의 인봉된 책을 어린 양이 되시는 재림 메시야가 6장에서 떼시는데 책의 내용이 공개되어 사실로 옮겨질 때 지구상에 대 환란이 몰아닥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인봉된 책의 내용에 앞으로 일어날 대 환란에 관한 일들을 일곱의 인으로 봉합한 것이다. 이 말씀과 짝이 되는 구약의 배경은 에스겔 2장 9절로 10절이다. 에스겔이 설명할 때 첫째 애가, 둘째 애곡, 셋째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고 했다. 즉 슬픈 심정을 읊은 노래이며, 큰 소리로 우는 것이고, 재앙은 하늘의 변동과 땅의 이상으로 인한 온갖 불행한 변고를 말하는 것이다.
안팎으로 쓰인 책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책은 문명의 발달이란 혜택으로 좋은 종이 위에 안팎으로 글을 인쇄하여 사용하지만 그 때는 글을 기록하는 것이나 보관이 어려웠다. 양피나 파피루스로 두루마리 형상인데 한 쪽만 있다. 그런데 본문에 책은 양쪽에 가득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 말씀의 책은 통상적인 예를 벗어나 안과 바깥에 글이 기록되었다는 말씀이고 이는 가리워진 뒷면에도 글이 있어서 한쪽만 보는 자들에게 인봉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곱인 으로 봉합하여 놓으셨기에 세상 적으로는 풀어질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풀리지 않을 말씀으로 인봉될 수 있다는 것이다.
힘 있는 천사
힘 있는 천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상대적으로 힘이 적은 천사도 있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과 마리아와 다니엘에게 말세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여 소식을 전했던 가브리엘 과 같은 천사도 있다(눅 1:19, 26; 단 8:16, 9:21-27). 그리고 다니엘에게 말일 사건을 알리려고 온 사자가 곤경에 처할 때 천사장 미가엘이 말세에 활약할 것을 말씀하셨다(단10:12-14, 12:1,) 다니엘의 예언은 계시록에 하늘의 전쟁으로 성취된다(계 12장 7-9).
이와 같이 말일 사건이 영의 세계의 안목으로 볼 때는 천사 장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사단과 그의 사자들과의 싸움인 것이다. 이와 같이 천사 장 미가엘에게는 그의 사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알게 된 것이다.
천사
성경에 나온 천사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요한 계시록에 나타난 천사만 해도 한 계층의 천사가 아니고 여러 계층의 천사들이 등장함을 볼 수 있다. 7장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네 천사가 있는데 땅이나 바다나 각종 나무를 해롭게 할 권세를 가졌는가 하면 같은 7장에서 또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오는 천사도 있다(계 7:2). 이 천사는 땅이나 바다를 해롭게 할 네 천사에게 명령을 하는 천사인 것을 보게 된다(계 7:1-3). 또 19장 10절과 22장 8절에 나오는 천사는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 허다한 천사를 만나보았지만 이 두 곳에서 만난 천사는 어떤 천사와도 달라서 감히 우러러볼 수가 없어 사도 요한이 땅에 엎드려서 경배를 하려 했다.
사도 요한이 어찌 1계명과 2계명을 모르겠으며 아무에게나 경배를 하겠는가? 이는 천사가 다른 천사보다 분명하게 뛰어 나서 엄청나게 존귀하여 경배할 만하기에 스스로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
구약 성경에 천사라는 원어는 ‘말아크’인데 대리로 파견한다는 의미의 사자를 뜻한다. 헬라어로 쓰여 진 신약의 천사 ‘앙겔로스’는 소식을 가져오다 에서 유래된 말로서 이 역시 사자, 특히 천사를 의미한다. 특별한 것은 구약 성경에 시편 8편 5절에 나오는 천사만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같이 ‘말아크’ 즉 사자와 천사를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지금부터 천사와 사자의 활동을 살펴보자.
1. 축복을 주는 여호와의 사자(창 16:7-10).
위의 본문 중에 말하는 ‘내가’란 누구일까? 분명히 여호와의 사자인데 하갈에게 그의 자손을 축복할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사자로서의 언행이나 심부름 하는 전달자로서의 태도가 아니라 전능자로서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 ‘내가’ 즉 사자 자신이 직접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있는 태도를 찾아 볼 수 있다. 사자의 언사가 마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 선지자가 자신이 여호와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이 대언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를 분별하려면 말씀 전체를 살펴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이란 말씀을 하고서 대언을 하고, 사자 자신의 의사를 말씀하는 것과는 구별하고 있다. 사자가 대언하는 장면은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 ’ 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대언할 때는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이라고 구분한다. 또한 하갈이 창세기 16장 13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뵈옵고는 혼자 하는 말이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즉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가 11절 하반에서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는 말씀을 듣고 감격해서 그녀가 하는 말이 나 같은 여종은 아무렇게나 내버려두신 줄 알았더니 여호와께서는 나 같은 종의 사정도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말씀을 전해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할 때 나의 사정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다. 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사자라고 하는 하나님을 뵈었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예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생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2. 벧엘에서의 하나님(창 31: 11-13).
여호와의 사자가 인간들의 입을 빌리지도 않고 직접 말씀하시기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를 뵈옵고 하는 말이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그 아내에게 이 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1- 22).’ 하심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여호와의 특별한 사자를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익숙한 사상이었을 것이다.
3. 야곱의 신앙고백 속의 사자(창 48:15-16).
야곱이 애굽에 내려가서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자손인 손자들에게 축복을 비는 엄숙한 장면인데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한 사실이 그대로 이루어져 장자권이 므낫세에서 에브라임에게로 옮겨가는 중요한 장면에서 야곱이 지금까지 기르시고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사자와 동일시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야곱이 알고 있는 보통 사자라는 일반적인 사자가 아닌 ‘벧엘의 사자’ 곧 벧엘의 하나님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손자들의 축복을 간청할 때 사자에게 간청한 사실이 잘못 말한 것이라면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야곱이 축복하는 장면에서 현대 성도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례도 있음을 알자(사자가 하나님과 동시에 역사하시는 과정이 아닌가로 추리할 수 있다).
4. 모리아 산의 여호와의 사자(창 22:11-12).
위의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의 아들인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게 한 것으로 모리아 산에서의 아브람에게 대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한 말씀이다. 그 사자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럼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할 때 ‘내게’가 누구인가? 여호와의 사자가 아닌가?
이와 같이 여호와의 특별한 사자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천사와는 다른 분이며, 자신이 하나님 중의 한 분이라고 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본문의 모리아 산의 제물은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고 그의 사자는 단지 심부름하는 정도로 알았는데 본문에서는 여호와의 사자가 그 제물을 자기가 받은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도 물론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으신 것이 분명하겠지만 제사 행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신다. 이는 그분이 하나님과 동시에 행동을 취하거나 하나님 같이 행동한다는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분은 22장 1절로 2절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같이 있었던 고급 사자일 것이다. 혹 ‘여호와께서 가라사대’의 말씀도 위임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구약 성경의 원문에서 하나님의 호칭이 ‘엘로힘’이다. 이는 신들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 호칭할 때는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들이 되는 것이다(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이신 성부, 성자, 성령님을 말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번민은 유일신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매우 힘든 것은 ‘태초에 하나님(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이신데 복수로 하나님들로 해석해야 한다)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의 의문점이 풀리지 않는다. 천지 창조를 엘로힘이라 하여 하나님들의 창조가 의문이고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옛날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익히 아는 그 하나님이신 것이다.
5. 발람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여호와의 사자(민 22:31-33). 불의의 삯을 받고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가던 선지자 발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사자가 있었다. 여호와의 사자를 따르지 않아 패역한 선지자라 할 때 여호와 앞에서 패역하다고 말하지 않고 사자 앞에서 패역하다 함이 우리 상식에는 옳은 것이다. 우리가 범죄 하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세상 법이 있고 그 법을 범하면 그 나라 제도에 대하여 범죄 한 것이며, 임금이 법이면 그 임금께 범죄 함이 되는 것이고,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면 형제와는 상관이 없고 아버지께 죄를 짓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 패역했으면 여호와께 패역함인데 어찌하여 그 사자를 말할까? 밝히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본문의 사자가 기존 상식을 뛰어넘는 특별한 분이라서 위임받은 하나님 같이 처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볼 때 루시퍼라는 사단이 얼마나 고급 천사이며 그의 권한이 얼마나 큰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은사를 잘못 사용하여 넘어진다면 받은 자의 교만일 것이다. 우리에게도 각양 은사가 있는데 더 좋은 것을 바라보며 이미 주신 은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6. 선민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의 사자(삿 2:1-4).
본문의 사자가 선민 이스라엘을 자기가 애굽에서 구원해 주웠고, 언약도 그 분이 세우고 그분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고 한다. 여호와의 사자 혹은 천사라고 하면 단순히 우리를 돕는 직분을 가진 천사만 생각할 수 있지만 특별한 사자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알거나 대접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의 권세를 인정한다고 칭찬 받을 수 있음을 알자.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아닌 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계실 수는 없으며 피조물인 천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급 천사가 나타나면 성령님께 사로잡힌 사도 요한도 경배하는 실수를 하는 것이다.
7. 모세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출 3:1-8).
주석 가들은 본문의 사자를 어떻게 보았을까 살펴보자.
1. 여호와의 사자
문자적으로는 여호와의 한 천사이다. 풀빛 주석은 언약의 사자 또는 삼위일체의 제 2 위의 하나님으로 본다.
2. 하나님을 대리하신 분
여호와의 사자란 말은 하나님을 대리하신 분인데 동시에 역시 하나님 자신으로 자처하셨다. 그리고 나타나신 모습은 사람의 모습으로 장차 신약에 나타날 성육신하실 그리스도 자신의 계시라고 생각된다(영음사 판 박윤선 저, 성경 주석 창세기 출애굽기 433페이지)고 말했다.
위의 주석 가들도 여호와의 사자를 ‘언약의 사자’로 또 제 2위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도 귀한 분이 천사로 활약을 하느냐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그리스도라고 하면 이단으로 몰린 수 있어서 피한 것 갔다. 본문에서 그렇게 분명하게 밝혔는데도 왜 명백한 사실을 확신 있게 말하지 않고, 그렇게 본다. 혹은 생각된다. 라고 했을까? 천사 중에는 축복을 주기도 하고 예배까지 받는 사자도 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계 5:5)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의 책은 일곱의 인으로 인봉 되였는데 그 인봉된 책을 떼시는 이는 오직 유대 지파의 사자인 다윗의 뿌리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일까? 요한계시록 22장 16 절에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단순한 육적인 혈통 관계에서 일어날 사건을 말한 것이 아니다. 다윗의 뿌리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한 말씀인데 그 예언을 분석해 보면 초림 메시야와 재림 메시야의 두 시대의 사건을 하나의 예언 속에 겹쳐서 예언하신 말씀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사 11:1-5).
본문의 시대는 다윗 왕의 아버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새의 뿌리나 다윗의 뿌리나 육적인 혈통으로 볼 때는 같은 뿌리가 된다. 사도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윗 글을 종합적으로 해석할 때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롬 15:12)”고 하였다. 이사야 11장 1절에 두 가지의 예언이 있는데 ‘줄기에서 한 싹’과 ‘그 뿌리에서 한 가지’이다. 이는 초림의 메시야(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성취하심)와 재림의 메시야(낮은 상태의 몸을 하나님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심)인 것이다(빌 3:21; 롬 8:23; 요1서 3:2; 고후 3:18). 이렇게 싹이나 가지의 두 사건이지만 결실은 가지에서 결실할 것을 말하고 있다(요 4:36-37). 그러므로 결실은 땅 속에 묻혀 보이 지 않다가 그 어느 때인가 작정해 놓으신 그 때에 그 뿌리에서 나온 가지로 결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뿌리는 보이지 않은 가지이다. 그리고 뿌리가 땅에 감추어진 것 같이 하나님께서 4천년 동안 감추셔서 찾지 못했던 혈통(아담 같이 창조되지 않고 동정녀를 통한 출생을 말함)을 드러나게 하셨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초림이다.
멜기세덱의 혈통(히 7:1-3)
여기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놓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역사적으로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의 일로 자기 사병을 거느리고 연합군을 치고 돌아오다가 멜기세덱을 만나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던 일이 있었다. 본문에서 소개된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며, 또 살렘(시 76:2)왕인데 평강의 왕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분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서 마치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분이라고 했다. 이 분은 신의 세계에 존재이면서 이 세상에 동시에 있는 양면의 삶을 사시던 분이다. 그런데 이분은 아브라함 당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고 하였다. 여기 항상은 언제나 존재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즉 이러한 사명을 가진 자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잘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의 안목으로 볼 때 항상 있는 것이다. 또한 히브리서 2장 11절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예수님)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성도)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의 말씀은 육체를 따라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육적이든 영적이든 모두 거룩함을 입어야 된다. 육의 자랑이 없어지고 뿌리의 용어를 사용하심은 다윗을 지으신 이를 알고 예수님이 뿌리이심을 믿어야 한다.
계시록 5장 6절 어린 양이 섰는데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보좌 사이에의 원문은 “엔 메소 투 드로누”인데 ‘그 보좌 가운데’ 이다. 그리고 ‘섰는데’의 ‘헤스테코스’는 ‘히스테미’인 ‘두다’ ‘놓다’ ‘세우다’ ‘고정시키다’ ‘확정하다’ 임명하다의 현재 완료 분사로서 본문이 말씀하시는 그런 분위기 때에 어린 양이 여러 보좌들이 있는 중에서도 가장 중앙에 있는 그 보좌에 임명되어 확정되는 순간을 말씀한다. 그리고 네 생물과 장로들의 중앙에 자리를 하고 계시는 것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어린 양은 하늘의 신령한 영체들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자리를 하시게 된 것이다. 그 다음에는 네 생물들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는 데라는 뜻은 생물들과 장로들 사이에서 나오셨다는 뜻도 된다. 이때의 환경이 4장 1절 하반절의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이라 했으니 현재가 아니고 미래인 이 후에 확정되는 때인 것이다.
어린 양이 책을 취하심
4장에 이어 5장도 역시 대 환란을 앞에 두고 천상의 일들이 전개되고 있다. 폭풍 전야는 음산하지만 대 환란을 앞둔 천상은 재림 메시야이신 어린 양을 위하여 새 노래를 거문고에 맞추어 24장로들과 4생물들이 함께 부르는 축제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 어린 양이 인봉된 책을 떼실 때 말일 역사는 시 작되게 되고 사단의 세력을 멸하신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앞둔 천상에는 축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린 양이 인봉을 떼어 감추어진 말씀이 공개될 때 말일 역사가 전개되는 것은 결코 심판으로 죽음만을 전제하는 그런 참혹한 것이 아니라 참 성도들과 더불어 천상천하에 가장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5장 1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인봉된 책을 어린 양이 취하신다. 이때에 비 로서 어린 양도 말세 비밀이 기록된 책을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서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즉 어린 양도 그 책을 받기 전에는 그 책의 내용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어린 양’이 인봉된 책을 취하시는데 이 내용과 짝이 되는 에스겔 2장 8절에서 3장 3절에 이르는 말씀에는 인자라고도 칭하는 에스겔 선지자가 그 책을 취하여 먹고 그 내용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서와 동일하게 병행된 요한계시록 10장에서는 사도요한이 그 책을 가져다가 먹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와 같이 그 내용 을 다시 예언하는 것을 보여 주신다. 즉 어린 양이 인봉된 책의 인봉을 떼고 그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나 에스겔 선지자나 사도요한이 그 내용을 먹고 다시 예언하는 것이 실상은 말일 사건을 전하는 모형으로서 하늘의 비밀을 계시하는 말씀이다.
계시록 5장 8절 기도와 찬송이 열납 되는 과정
성도들의 기도는 네 생물과 24 장로들의 손에 있는 금 대접에 담겨지면 향기로운 제물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찬미를 드리려고 거문고를 가지고 있는 천상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8장 3절로 4절에 성도의 기도가 금향로에 담겨져 천사의 손에 들려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 실로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의 기도와 찬송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는 제물인 것이다. 히브리 기자는 13장 15절에서 ‘찬미의 제사는 입술의 열매’라고 하였던 것이다.
계시록 제 6 장 일곱 인의 재앙(1-2).
본문에서 대 환란이 시작되고 세상은 그 끝에 다다르려 한다. 대 환란은 일곱의 인을 때는 재앙(계 6장-7장)과, 일곱 나팔 재앙(계 8장부터 14장), 일곱 대접의 재앙(계 15장부터 18장)의 세 가지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 재앙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일곱 번째 인(계 8장 1) 일곱 나팔(계 11:15)로 발전되고 일곱 번째 나팔은 일곱 대접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재앙과 그 근본 사건의 내용은 같은 내용들이다.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등의 표현하는 형식을 달리 하면서 그 재앙의 내용을 폭넓게 암시해 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일곱 인 재앙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일곱 나팔 재앙에서 함께 계시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순서적으로 보아서 해석할 것이 아니다. 본서는 어디까지나 사건적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또한 이 재앙의 특색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있었던 책으로(계 5:1) 일곱의 인으로 봉합된 말씀인데 인을 뗄 때마다 말씀이 공개되면서 나타나는 환란이다. 즉 말씀과 관계가 있는 재앙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핵심이 되는 1장 19절로 20절의 원리대로 일곱별과 일곱 금 촛대에 관한 환란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최대의 관심은 종들과 교회이기 때문에 영계(교회)에서 일어나는 환란이요, 내용은 그 재앙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 환란들은 마지막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이 사람들을 죽이더라도(계 6:4, 8) 이는 영혼에 관계된 사건이며 문자 그대로 양식이 아니다(암 8:11). 땅의 짐승도 어린 양이신 메시야를 모방한 새끼 양(계 13:11)이 그리스도로 위장한 영계의 혼란을 말한다(계 13:11-18). 왜냐하면 다섯째 인을 떼실 때 제단 아래 순교자들이 자기들의 피 흘린 원한을 풀어주시기를 간청할 때 ‘땅에 거하는 자를 심판하시’라고 호소하는 말에서 지금까지 인을 떼실 때 있었던 재앙으로 심판을 받아 사람들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며 또 양과 염소,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를 따
로 구별하여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주시는 심 판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교자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피의 값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계시록 6장 10절은 한 집에서 참 진리 위해 흘린 피를 찾음. 둘째 인부터 여섯 번째 인으로 하늘과 땅의 각종 재앙들은 땅의 괴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처럼 기록되었으나 16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말씀을 보면 큰 재앙이 도착했다는 뜻이지 진노의 큰 날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가복음 13장 8절로 12절도 재난의 시작이라는 뜻인데(계 6:4).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버린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때이다(단 2장 41절로 43절의 느부갓네살이 꿈에 보았던 금 신상에서 열개의 발가락 시대에 분쟁을 말한다).
외형적으로 완전한 발가락이지만 실상은 하나가 될 수 없는 사상이나 인종이 섞여서 출발하므로 콩가루처럼 헤어져서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곡식과 가라지가 교회라는 집 안에 있다고 하셨으며 예수님께서 밀가루 반죽처럼 하나 되지 말고 콩가루처럼 분쟁으로 나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눅 12:49-53). 그리고 분쟁의 내용이 남과 남의 사이가 아닌 가족끼리 싸우며(52-53)싸우는 그 불을 무엇 때문에 던지기 위해 오셨을까? 불이 붙기를 원하실까? 서로 죽이는데 내어 줌을 원하실 것인가는 문자적인 환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더라도 말세에는 교리적으로 천국과 지옥에 갈 수 있 다는 말씀으로 믿음과 교회를 바르게 선택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한국 교회에 참 진리가 들어나기를 원하시고 기다리신다.
네 생물(계 6:1)
본문에 일곱 인 중에 하나의 인을 떼는데 그 인은 어린 양이 떼시고, 명령은 사역자인 네 생물 중의 하나가 한다. 육의 안목으로 사역자는 어린 양이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으로는 네 생물의 사역이다. 그들의 위대성과 그의 떼는 네 생물의 사역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네 생물의 위대성과 장엄함에 대한 설명은 제 4장에서 배웠다.
계시록의 짐승인 말
본문에 나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말세에 심판하실 때 말을 타시고 활약한 것으로서 예언서에도 말씀하셨다(합 3:2-15). 하박국 3장 8절에서 ‘주께서 말을 타시며’와 12절에 ‘밟으셨나이다.’의 말씀의 배경은 여호와께서 열국을 밟으실 때이다. 세계 각국을 심판의 포도즙 틀을 밟듯이(계 19:15, 14:19; 사 63:2-3) 심판하실 때이다. 그 때에 심판 주께서 말을 타시고 구원의 병기를 모아 주의 백성과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합 3:13) 나오신 때이다. 또한 상징적인 바다의 파도를 밟으시려고 나오심은 심판의 은어이다(합 3:12, 15).
이사야 27장 1절에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그 날’은 심판의 날이며 죽이시는 ‘용’은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를 바다에서 죽인다. 시편 74편 13절에서도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곳을 바다라고 하는 상징 된 그 곳을 여호와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이를 계시록 6장의 네 생물들이 말들과 그 탄자들에게 재앙을 내릴 장소와 그 종목들을 지시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심판 주께서 재림 심판 때 문자적으로 말을 타고 심판 하실 것인가? 현대 문명이 동물이라는 ‘말’보다 편리한 것이 있는데 꼭 말을 타야 하실까? 기록 당시 ‘말’이란 동물은 탱크와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6장에 나오는 ‘말’은 적의 지휘본부를 강력하게 폭파시킬 수 있는 핵 잠수함 같은 무기이다. 마가복음 13장과 마태복음 24장에 예수님께서 말세를 가르치실 때는 상징이나 표징이 아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과, 또한 우리 인간들의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실적인 교훈으로 가르치셨다.
예컨대 ‘그 탄자가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더라.’를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마 13:12)고 하셨다. 상징적인 짐승과 말들의 활동은 말씀하지 않았다.
말 같은 여호와의 군대
요엘 2장에도 말일에 여호와의 심판이라는 군대의 활동 사항을 말씀하실 때 두렵고 떨리는 여호와의 날은(욜 2:1-2, 11)자고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을 사건인데, 여호와의 군대의 모양이 ‘말 같고’이다. 요엘 2장 4절과 6절에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 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애졌도다.” 라고 말 했다.
이 말을 스가랴 6장과 계시록 6장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네 필의 말들을 설명하실 때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슥 6:5)고 했다. 여기 ‘네 필의 말’을 성경에 표현하기를 ‘말’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주 앞에 하나님을 모셨다가 나가는 엄청난 영체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영체들은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살피면서 보호하는 사명을 가졌고, 여호와의 사자의 마음을 시원케 한 것이다(슥 6:6-8). [5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한 분의 사역자: 네 말, 네 생물, 그 탄자들
스가랴 6장에서 네 필의 말은 하나님을 모셨던 자들이라고 했는데 네 생물 역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그룹이다. 에스겔에서 ‘그것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본바 이스라엘 하나님 아래 있던 생물이라 그들이 그룹들인 줄을 내가 아니라’(겔 10:20)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룹들 사이에 계시며(사 37:16; 민 7:89) 또는 그룹을 타시고 다니신다고 하셨다(삼하 22:11; 대상 28:18; 시 18:10). 이렇게 생물과 그룹들과 계시록의 ‘말’이 같은 사명이 있는 것을 볼 때에 같은 존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생물과 그룹들을 설명하면서 네 개의 얼굴을 가졌는데 한 면은 소 같고 또 한 면은 사자, 독수리, 사람의 얼굴을 가졌 다는 표현은 그 생물이 전능자의 위엄과 능력을 닮았다고 할지라도 피조물이라는 것과 창조주를 위하여 사명이 있다는 뜻이 매우 중요하며, 창조주를 위함에는 때와 상황에 따라 사건에 따라 기능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설명한다. 스가랴 6장 5절에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고 했고 이들이 나올 때는 1절에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 산이더라.’고 했다. 즉 네 필의 말은 이 세상에 나올 때는 네 필의 말로 나타났지만 그 전에는 ‘하늘의 네 바람’이었고, 그 사명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지 본래의 이름이나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는 것이다.
흰 말 탄 자(계 6:2)
본장 2절에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했다. 계시록에서 흰 색깔 표현은 천국에 속함을 말한다. 계시록 3장 4절 흰 옷, 5절에 흰 옷, 18절에 흰 옷을 사서 입어, 4장 4절과 6장 11절에 흰 두루마기, 7장 9절에 흰옷 입은 구원받은 무리, 14장 14절에 흰 구름, 19장 11절과 14절에 백마와 희고 깨끗한 옷을 입은 하늘의 군대, 20장 11절 에 크고 흰 보좌 등이다. 흰 색은 순결과 승리를 상징하여 개선 장군이 흰 말을 타고 들어오는 풍속이 있을지라도 본문의 흰 말을 탄자는 예수님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창조주요 권세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인데 왜 싸우고 싸우시겠는가? 그러 으로 계시록의 ‘인자 같은 이’는 인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수행 중인 피조물이다. 가 하시는 사역이다. 계시록의 어린 양은 ‘아르니온’이요(양에 미치지 못한 아주 어린 양) 복음서에 어린 양은 ‘암노스’이다(건강한 양으로 재물에 합당한 양). 계시록 19장 11절로 12절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라고 재림의 메시야를 말한 것 같으나 아니다. 머리에 이름이 쓰였는데 아무도 모르고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라는 말씀은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것이며, 그는 자기가 맡은 사명을 수행한 자로서 외로운 투쟁을 하는 중이므로 ‘이기고 또 이기려고’하는 것이다. 만약에 재림 메시아로 해석한다면 예수님과 싸울 상대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이는 창조주와 전능의 능력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와 재림 메시야의 마지막의 싸움은 없는가?
심판이라는 그 싸움은 있다. 다니엘 8장 25절에 ‘그가 꾀를 베풀어 제 손으로 궤휼을 이루고 마음에 스스로 큰 체하며 또 평화한 때에 많은 무리를 멸하며 또 스스로 서서 만왕의 왕을 대적할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을 말미암지 않고 깨어지리라’의 말씀이 있다. 곧 세상 끝에 만왕의 왕을 대적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재림 메시야께서는 ‘이기고 또 이기려고’한다고 시편기자도 2편 1절로 9절에 말씀했다. 특별히 시편 2편 6절에 ‘나의 왕’ 즉 만왕의 왕을 시온 산에 세울 때가 계시록 14장 1절에 어린 양과 144,000명의 성도들이 시온 산에 서있는 배경이다(계 7:4). 시편 2편 9절에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스리라 하시도다.’ 했고, 계시록 12장 5절에서도 만국을 다스릴 남자인 재림 메시야께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이라 했다. 그리고 계시록 19장 11절로 16절에도 만왕의 왕께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러한 만왕의 왕이신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할 것이라고 시편 2편 2절에 기록되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이론을 전개할 때 하나님께 불리한 이론은 이론적 이단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셋째 인의 가격 결정(계 6:5, 6).
어린 양이 셋째 인을 떼실 때 내 생물 중 하나가 검은 말과 그 탄자에게 맡긴 임무는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라는 가치 평가를 한다. 우리들은 모든 가격 평가가 사람들 중의 누구 혹은 자연스럽게 가격이 형성 된 줄로 알고 있으나 천상에서 모든 가격이 결정된 후 이 땅에서 그대로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밀과 보리의 가격은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온 네 생물들의 명령에 따라 결정된다. 그 생물은 검은 말과 그 탄자인데 손에 저울을 가지고 가치 평가를 책정한다. 양과 질을 확실하게 판단한 심판의 기준이 있다. 그리고 ‘감람유와 포도주는 헤치지 말라’는 뜻은 무엇일까? 왜 그 많은 것 중에 두 가지를 헤치지 말라고 하셨을까? 그러므로 계시록이 상징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기름과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는 말이다.
셋째 인의 주제는 저울이다. 본문의 저울은 말세에 재림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심판의 저울이다. 다니엘 5장에 바벨론의 왕 벨사살이 귀인 일천 명과 잔치할 때 성전의 기명으로 술을 마시다가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기록하니 모두가 놀랐고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이 때 다니엘 선지자가 세어보고 저울로 달아보니 부족하여 가른다는 뜻이다. 이 말씀의 내용대로 바벨론 왕국은 그 날이 새기 전에 페르시아에 점령되었다. 그런데 그냥 점령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어보고 달아보셨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농장에 밀과 보리를 세어보고 또 세어보고 저울로 달아보신 후에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같은 뜻을 가진 말씀으로는 계시록 11장 1절에 ‘지팡이 같은 갈대’로 성전과 제단뿐만 아니라 그 안에 경배하는 사람들까지 척량하라고 하는 말씀이 나온다. 척량은 길이와 높이와 넓이를 재는 것인데 사람까지 척량하라는 말씀은 저울로 사람을 달아보고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청황색 말과 탄 자(계 6: 8)
말세의 심판이 4가지 방법으로 드러나는데 검과 흉년과 사 망과 땅의 짐승으로 죽인다. 이 재앙은 에스겔 14장 21절에 그 배경을 둔 재앙이다. 에스겔서의 재앙과 묵시록의 재앙이 순서 배열이 약간 다르게 나타난다. 계시록의 네 필의 말은 스가랴 6장에 그 배경을 둔다. 에스겔 14장에 재앙이 내리는 원인을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기 때문’이라고 3절과 7절에 기록하셨다. 즉 눈에 보이지 않은 우상이 마음에 있음을 지적하신다. 예레미아도 6장 19절에서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고 하였다. 즉 마음에 들이는 우상! 보이지 않은 생각의 우상이 있던 것이다. 물질 축복의 우상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제단과 순교자(6:9-11).
순교자들이 당한 이유를 두 가지로 들어낸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둘째는 증거이다. 이들의 순교에는 조건이 다르게 나타난다. 일반적인 순교자들은 그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할 것인데 본문 9절에는 ‘제단 아래’ 있다. 일반적으로 제단은 성전 안에 있는 것인데 하늘나라인 성 안에는 성전이 없다고 했다(계 21:22). 이 제단은 어떤 제단일까? 제단의 원문은 ‘희생의 장소’와 ‘도살의 장소’를 의미한다. 문자대로 출애굽 시대나 솔로몬 시대에 만든 제단이 아니라 제단이 말하고 생각하는 제단이다. 무생물이 아니다. 생각과 말을 할 수 있는 생물체로서 제단이다. 계시록 16장 7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의 말씀은 제단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심판이 의롭다고 생각하고 그 사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단이 있다는 것이다. 즉 본문의 제단이 일곱의 인으로 봉합된 상 징의 제단이지 옛날 성전 안에 있던 물리적인 제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귀한 사명을 받은 자를 말한다. 제사직분이라는 것은 히브리서 6장 20절에 예수님께서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며 그 직분이 영원히 갈리지 아니한(히 7:24) 영계의 제사직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영혼들이란 용어를 왜 사도요한이 했을까? 본래 사람의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 요한은 영혼이 제단 아래 있다고 했을까? 이 제단이 하늘나라의 제단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계시록 15장 8절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순교자도 환란이 끝나기 전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데 어떻게 제단 아래 있다고 했을까? 그리고 본문 11절에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시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의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께 호소를 드렸더니 그 때 흰 두루마기를 주신 것이다. 육체를 떠난 영이 무슨 옷이 필요한가? 옷은 육을 입은 자가 추위와 더위를 위하고, 몸을 위한 수단으로 문명이 발달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속옷을 입은 연후에 입을 옷이다. 이사야 61장에 2절에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
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의 말씀 중 신원의 날이라고 하는 원수 갚는 심판의 날을 전파하는 그 때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상급으로 주시는 두루마기는 ‘의의 겉 옷’을 말씀하고 있다. 이는 하늘나라에서 참된 의인이 되었다는 거룩한 예식과도 같은 것이다. 이사야 61장 10절은 ‘구원의 옷’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본문의 순교자라는 것은 살아 있는 순교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직분을 맡은 제단 아래에서 주 하나님께 호소를 올리는 장면을 보면서 말씀한 것이다.
교회의 빛이 흑암으로 변함(6:12-14).
위의 본문과 병행 구절들을 살펴보자.
‘그날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그 때에 그 환란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막 13:24, 25).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행 2:2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 아 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13).
위의 말씀을 보면 복음서에 '달이 빛을 내지 아니 하며 를 사도행전에서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고 했고 계시록은 ‘피 같이 되며’라고 했다. 베드로후서는 복음서와 다르게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 다고 했다. 이렇게 된 이유를 이사야 24장 21절로 23절에서 계시록의 배경을 설명한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같이 모음을 입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
위의 이사야의 예언은 성격이 다르다. 신약에서 달이 피같이 되며, 혹은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를 이사야는 달이 무색 하며 라고 했다. 즉 달과 해가 대할 낯이 없어 매우 부끄러워하고 이다. 공동번역에는 달이 창백해지고 해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리로다. 라고 했다. 요엘 선지자는 이 말씀 ‘만인이 송구하여 마음에 두렵고 거북하며 미안하여 무리의 낮 빛이 하해 졌다(6)고 표현하였다(요엘 2:1-11).
요엘이 2장 10절에서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의 표현은 하늘이 무서워서 떤다는 표현을 한 것은 문자적인 하늘이 아니라 상징적인 하늘을 말씀하신 것이다. 아모스는 5장 20절에서 ‘여
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 남이 없음이 아니냐.’의 뜻은 사물을 비추는 빛은 있어도 세상이 진리의 빛이 없어서 캄캄하다는 것이다. 이사야 34장 2절로 5절은 계시록 6장의 징조와 아주 흡사하다. 특별히 4절에 보면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 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의 말씀 중 ‘하늘들’이라는 복수로 표현함은 문자적으로 저 하늘이 아니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예레미야도 4장 23절에서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라고 했다. 이와 같은 하늘들의 표현은 진리의 빛을 잃은 교회를 가리킨다.
계시록 12장 11절로 12절에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의 말씀 중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의 뜻이 무엇인가? 교회와 하늘은 그 뜻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예언서에서는 같은 뜻의 말로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시록 18장 20절에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시더라.’라고 하셨다. 하늘을 인격체로 그리고 선진들과 함께 재림의 심판으로 원통함을 풀어줌이라 했으니 그렇다면 이 하늘은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원통한 일을 당하
고 사는 인격체라는 것이 뚜렷이 나타난다.
의인화된 하늘과 땅
이사야 1장 2절에 귀를 가진 하늘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
이사야 45장 8절에 의로움을 내는 하늘(시 97:6).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예레미아 2장 12절에 놀라고 떨며 두려워하는 하늘.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시편 19편 1절 96편 11절. 148편 4절; 사 49장 13절 등이 있다. 계시록에 기록된 예언의 핵심 내용이 1장 19절로 20절인데 그 내용은 일곱 교회의 사자와 일곱 교회에 관한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확정지어 명백히 하셨다. 그러므로 비중 있는 내용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반듯이 종들과 교회로 한정된 말씀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교회와 종들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즉 말세와 말세 교회의 사자인 목회자들에 관한 비밀을 기록한 예언서이다. 결코 우주의 대변혁을 말씀한 예언이 아니다. 계시록 6장 13절 말씀에 ‘저 하늘과 그 안에 있는 별들이 무화과가 대풍에 흔들려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진다’는 말씀을 문자대 로 생각 한다면 이 지구상에는 한 사람도 살지 못 할 것이다. 계시록에 하늘의 별들이 선과일이 떨어지듯 무수히 이 땅에 떨어진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현대 과학을 전혀 모르는 어린이에게나 먹혀들 이야기이다. 지구보다 몇 배 혹 은 천배나 큰 유성들이 어떻게 지구에 떨어지겠는가? 태양은 지구보다 30만 배나 크고 별들은 태양보다 600배 이상이다. 하나의 은하계는 10.000.000억 개의 별들을 거느리고 있는 우주가 일천억 개가 있고 태양을 가지고 있는 은하계가 삼천이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별 하나만 지구에 스치고 지나가도 우리가 사는 지구는 핵분열이 일어나서 산산조각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칼세이건 저 P, 198-199).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이 땅에 별들이 무수히 떨어졌는데 아직 산과 굴과 바위틈에 사람들이 살아 있다. 계시록 7장 3절에 별들이 무수히 떨어진 후에 주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는 역사가 나온다. 인을 치는 것은 말세의 사건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와 달과 별들은 온 세상을 밝혔던 하나님의 교회의 종들을 말 한다. 참된 진리를 마지막까지 지킨 종들이 말세에 드러나게 될 때, 무늬만 종교인들인 비진리가 발견되므로 비 진리의 사명이 빛을 잃었다는 말이다.
이사야 30장 25절로 29절의 말씀에 시대적 배경은 여호와의 진노가 불붙듯 하여 멸하시는 타작마당의 키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눌 때 키로 심판하심을 ‘크게 살육하는 날(28)’이라고 하고 또한 ‘망대가 무너질 때’(25)라고도 한다. 여기 망대는 교회를 상징하고 알곡은 택한 자를 상징한다.
계시록 6장 12절로 14절에 ‘여섯째 인을 땐 후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대풍에 선과
실 떨어지듯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29절과 마가복음 13장 24절에서 교
훈 하실 때 ‘그 날 환란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하셨다. 계시록 배경 후 해와 달과 별들에게 생기는 큰 변화는 ‘그 날 환란 후에’ 즉시 발생한 사건이다. 환란 도중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마태복음 24장 7절로 29절까지의 내용이 무엇인가? 거짓 선지자들과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성도들끼리 서로 대적하며,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때이다. 그 환란으로 진리와 비 진리의 싸움으로 큰 환란이 있은 후에 거짓 방주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을 비추는 해, 달, 별들의 사명자로 자처하다가 본색이 들어나서 심판을 받게 됨을 말 한다.
흔들리는 세계(계 6:15-17).
본문에 나오는 각종 귀족들은 선민 계급 사회의 모든 계층을 총망라한 말이다. 선민을 대표하는 이들을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로 비우한 자들이다(눅23:28
-31). 즉 선민과 이방인을 구분하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푸른 나무들이 산과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대하여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낮 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 리우라고 소리를 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민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자칭 이스라엘이라 하는 자들이 재림하실 때 산과 바위의 틈에 숨어서 얼굴이 창백해지고 부끄러운 얼굴을 붉히며 하는 말이 보좌에 앉으신 이가 보시지 못하도록 자기에게 무너지기를 바라고 덮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어린양의 진노에서 피하려고 소리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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