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장 7절 다윗 왕의 생활에서 얻는 교훈
1.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와 방법
(1) 감사할 이유
➀ 구원하심(출12;14 ; 삿5:11 ; 시105:45)
➁ 대적과 환난에서 구하심(시35:10 ; 54;6, 7)
➂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시68:19 ; 100:4, 5)
➃ 각종 은사(고후9:15)
➄ 사망을 이기게 하심(고전15:57)
➅ 육체적 필요를 공급하심(딤전4:3, 4)
➆ 범사에(살후5:18)
➇ 죄악을 사해 주심(시103:3)
➈ 기도를 응답해 주심(요11:41)
➉ 그리스도의 능력과 통치하심(계11:17)
(2) 감사 방법
➀ 찬송으로(느12:38~42)
➁ 예배함으로(시50:14)
➂ 의와 인자와 겸손으로(미6:6~8)
➃ 예수님의 이름으로(엡5:20)
➄ 기도로(빌4:6)
➅ 마음으로(골3:16)
➆ 생활 중에서(롬14:6, 8)
➇ 봉사함으로(요일3;16)
➈ 헌금으로(고후9:11)
2. 다윗의 찬양 행위가 주는 교훈
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겸비케 함(삼하6:14)
➁ 온 마음과 정성으로 찬양함(삼하6:13~15)
➂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만을 생각함(삼하6:21)
➃ 사람의 체면을 의식치 않음(사하6:14, 16)
➄ 진솔한 마음으로 찬양함(삼하6:16 ; 마18:3, 4)
3. 다윗이 한 찬양의 의미
➀ 삶 속에서 찬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대상16:28, 29)
➁ 모든 만민이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쳐야 함(대상16:8, 24)
➂ 성도는 주안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선포함(대상16:10, 11)
➃ 성도는 늘 하나님의 구원을 찬미해야 함(대상16;23)
➄ 찬미 중 어려운 형제를 위해 기도함(대상16:35)
4. 어느 때에 찬양할 것인가?
➀ 예배를 드릴 때(시101:1 ; 108:1~5)
➁ 왕의 대관식 때(대하23:13)
➂ 선지자들의 종교 의식 때(삼상10;5)
➃ 승전을 축하 할 때(삼상18:6)
➄ 위험에서 구출되었을 때(출15:1~21)
➅ 하나님의 기사를 찬양할 때(민21:17)
➆ 신앙고백을 할 때(삼상2장, 시100:1~5)
➇ 각종 잔치를 할 때(사5:1 ; 암6:5)
➈ 애도를 할 때(삼하1:17~27)
➉ 훈계와 교훈을 할 때(신32:1~52)
⑪ 천국에서 하나님께 찬양할 때(계5:9)
5. 찬송의 능력
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단4:37 ; 눅2:20)
➁ 하나님의 도움을 얻음(대하20:22 : 행16:25,26)
➂ 고난을 이길 힘을 얻음(욥35:10 ; 벧전1:3, 7)
➃ 마음의 평안을 얻음(삼상16:23)
➄ 두려움이 없어짐(행16:26 ; 시56:4)
➅ 마음이 즐거워짐(시105:2, 3)
➆ 전도의 능력이 있음(시40:3)
➇ 입술로 수송아지를 드림(호14:2)
➈ 황소를 드림보다 더욱 기쁘시게 함(시69:31)
➉ 찬송을 드릴 때 전쟁을 이김(대하20:22)
⑪ 소리만 쳐도 전쟁에 이김(대하13:15, 16)
위의 소리만 들려도 주께서 좋아하심을 보여 주신 것처럼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은 기도에 대한 면을 살펴보자.
6. 기도는 막힌 담과 같은 죄를 제거하는 자세
➀ 죄를 색출해 나가야 함9수7:16~20)
➁ 죄를 분별해야 함(롬3;19, 20)
➂ 죄를 미워해야 함(시119:104)
➃ 죄의 원인부터 제거해야 함(마5:23, 28)
➄ 단호해야 함(신13:8 ; 잠1:10)
➅ 죄의 습관과 환경을 이겨내야 함(신13:6~9)
➆ 적극적으로 죄악 된 요소를 극복해야 함(약4:17)
➇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해야 함(히12:1)
이를 위해서 때로는 금식을 해야 하는데 금식의 바른 이유를 살펴보자.
금식은 일반적으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접할 때(출34:28)와 죄를 회개할 때(삼하12:16)와 탄원할 때와 슬픔의 표현으로(느1:4) 금식하였다.
7. 금식해야 할 때
➀ 하나님의 인도를 바람(삿20:26, 27)
➁ 성결(회개)을 위해(삼상7:6 ; 느9:1, 2)
➂ 깊은 애통을 표현함(삼상31:13)
➃ 기도의 상달을 위해(사58:4 ; 스8:21, 23)
➄ 건강과 치유를 위해(사58:3, 8)
➅ 시험을 이기기 위해(마4:1~11)
➆ 특별한 은사를 얻기 위해(마7:21)
➇ 육신의 정욕을 제어키 위해(고전 9:25~27)
➈ 다음은 금식에 관한 성구이다.
왕상21;9,12 ; 스8:21 ; 사58:5,6 ; 렘36:9 ; 욘3:5 ; 슥7:5 ; 8:19 ; 행14;23 ; 고전7:5 ; 렘36:6 ; 욜1:14 ; 2:15 ; 삿20:26 ; 삼상7:6 ; 31:13 ; 삼하1:12 ; 12:16,21,22,23 ; 왕상21:27 ; 대상10:12 ; 20:3 ; 대하20:3 ; 스8:23 ; 느1:4 ; 9;1 ; 에4:3, 16 ; 9:31 ; 시35:13 ; 69:10 ; 109:24 ; 사58:3 ; 렘14:12 ; 단6:18 ; 9:3 ; 욜2:12 ; 마4:2 ; 6:16,17, 18 ; 9:14,15 막2:18,19,20 ; 눅2:37 ; 5:33,34,35 ; 18:12 ; 행13;3 ; 27:9 등등
8. 선한 기도의 5가지 실례
➀ 말씀에 근거한 기도(왕상8:24)
➁ 간절한 기도(왕하20:2, 3 ; 눅11:5~13)
➂ 끈질긴 기도(삼상1:9,10,17 ; 눅18:1~8)
➃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기도(요일5:14)
➄ 의인의 기도(시10:1~18 ; 약1:16)
9. 고통 중에 기도할 것들
➀ 여호와께서 우리의 고통을 기억하시도록(시9:13)
➁ 하나님의 임재와 지지를 위해(시10:1 ; 102:2)
➂ 하나님의 위안을 얻도록(시4:6 ; 시119:76)
➃ 고통을 감소시켜 주시도록(시39:12,13)
➄ 환난에서 구속을 위해(시25:17 ; 64:9~12)
➅ 죄의 용서를 위해(시39:8 ; 51:1)
➆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키시도록(렘31:18)
➇ 주의 가르치심과 인도를 위해(욥34:32 ; 27:11)
➈ 긍휼히 여기심을 위해(시6:2)
➉ 기쁨의 회복을 위해(시51:8, 12 ; 90:14, 15)
⑪ 믿음의 증대를 위해(막9:24)
⑫ 고통의 원인을 알기 위해(욥6:24 ; 13:23,24)
⑬ 영생을 위해(롬2:7 :히5:8, 9)
10. 하나님을 찾을 때
➀ 환난 날에(시50:15)
➁ 주가 부를실 때(시27:8)
➂ 만날 만한 때에(시55:6)
➃ 가까이 계실 때(사55:6)
➄ 회개의 때(호10:12)
➅ 날마다(사58;2)
11. 끈질긴 기도의 실례
➀ 롯의 구원을 위한 아브라함(창18:22~33)
➁ 에서로부터 구원을 위한 야곱(창32:9~12)
➂ 이스라엘의 죄 용서를 위한 모세(출32:11~14)
➃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는 기드온(삿6:36~40)
➄ 대적의 복수를 위한 삼손(삿16:28)
➅ 아들 잉태를 위한 한나(삼상1:9, 10, 17)
➆ 비 내리기를 위한 엘리야(왕상18:41~45)
➇ 병 나음을 위한 히스기야(왕하20:1~7 ; 사38:2, 3)
➈ 눈뜨기를 위한 여리고의 두 소경(마20:29~34)
➉ 하나님의 뜻을 위한 예수님(마26:36~43)
⑪ 육체의 가시 제거를 위한 바울(고후12:7~10)
12. 히스기야의 기도가 주는 교훈
➀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림(왕하19:1) = 겸손한 자에게 은혜 베푸심(시9:10 ; 약4:6)
➁ 중보 기도를 부탁함(왕하19:4) = 합심된 기도의 위력을 깨달아야 함(마18:19)
➂ 편지를 펴 놓고 기도함(왕하19:4) = 모든 상황을 숨김없이 아뢰며 기도함(요14:14)
➃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왕하19:15)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는 응답됨(요일5:15)
➄ 나라의 구원을 간절히 간구함(왕하19:16,19) = 자신뿐 아니라 타인(나라)을 위해 간구해야 함(삼상12:23 ; 약5:14~16)
히스기야는 선지자의 사형선고와 같은 말씀을 들을 때에도 므낫세가 잉태되지 못함을 인하여 벽을 향했던 것이다.
제 28장 솔로몬 왕의 통치
제 1절 솔로몬 왕국의 번영
솔로몬의 왕권은 싸워서 얻은 것이 아니라 부왕이 물려준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궁중에서 호화롭게 자란 왕자로서 위에 오른 것이기 때문에 무관의 경험 없이 왕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사치에 빠진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당연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13년동안 자기의 궁전을 건축하더니(왕상7:1), 많은 세금을 거두고, 더 많은 군대를 두고 말과 병거를 수입하며, 위험이 따르면 왕비를 삼아 화평을 누리다가 마침내 타락하여 하나님의 책망을 들어야 했고, 그의 번영과 영화와 타락이 어떠함을 노래할 때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진리를 남긴 왕이 되었다.
솔로몬 왕은 왕상 11장 1~13절에서 범죄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고 끝이 좋지 않은 왕이 되어버렸다. 솔로몬의 통치에 들어가기 전에 성경에 나타난 자들 중에 처음보다 끝이 나쁜 자들을 보자.
① 가인(창4:3~8)
② 기드온(삿8:24~31)
③ 삼손(삿16:22~31)
④ 엘리(삼상4:12~22)
⑤ 미갈(삼하6:16~23)
⑥ 사울(삼상31:1~13)
⑦ 솔로몬(왕상11:1~13)
⑧ 웃시야(대하26:15~23)
⑨ 느부갓네살(단4:34~37)
⑩ 유다(마27:5)
⑪ 데마(딤후4:10)
1. 그 왕국의 번영(외교와 국방)
솔로몬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는 견고하지 못했다. 아도니야는 일단 후퇴했으나 그의 야심이 가셔지지는 않았다. 왕상2:15에 보면 “저가 가로되 당신도 아시는 바 여니 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 이다.
이제 내가 한 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얼굴을 괄시치 마옵소서. 밧세바가 가로되 말하라 가로되 청컨대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여 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얼굴을 괄시치 아니하리 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밧세바를 이용하려는 음모이었다. 그는 온 백성들이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말하며 믿고 있었으며 그밖에도 요압과 아비아달이 자기의 왕위를 보증하며 확인했으니 군부장관과 제사장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다만 밧세바로 왕권에 대한 어떤 문제가 있을 때에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아비삭은 실제에 있어서는 다윗 왕의 정첩이나 후궁이 아니었다(삼상1:4). 그러나 백성들은 후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것이다. 밧세바는 후궁으로 생각하지 않으니 허락을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관례로서는 선왕이 후궁을 계승하여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 왕좌를 계승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밧세바를 위하여 우리아를 죽임(삼하12:8) 16:21 ; 3:7, 8}. 그러므로 삼하17:21에 보면 그런 행위는 아도니야를 지지하는 자들에게는 용기를 주는 일이 된다(삼하16:21).
후궁을 탐함은 왕권이 넘어옴을 말한다는 것과 선왕의 후궁은 새 왕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지혜로운 솔로몬이 알아서 아도니야의 야심을 알아차려서 하는 말이 왕상2:22~23에서 대답하기를 솔로몬 왕이 그 모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 하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아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브나야를 보내어 죽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시므이를 처형하여(왕상2:36~46), 불순한 세력들을 제거함으로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게 되었다.
(1) 국방과 외교
솔로몬은 국방과 외교를 위하여 힘썼고, 우선 애굽과의 친선의 증표로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왕상3:1). 이는 가장 중요한 외교적 승리라고 볼 수 있다(애굽은 큰 세력이었다). 솔로몬은 공주를 위하여 궁전을 지어주고(왕상7:8), 바로 왕은 솔로몬에게 전쟁에서 뺏은 땅 ‘게셀’을 선물로 주었다(왕상9:16). 그 땅은 블레셋을 이기기 위해 꼭 필요한 땅이었다. 이스라엘의 심장부와 연결된 땅이다(왕상9:15, 17).
솔로몬이 국방에 힘쓴 것은 국가의 판도를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더욱 견고케 하기 위해서이다. 하솔 성은 북방의 원수를 막기 위해, 므깃도는 남북을 연결하는 도로선상의 요충지대요, 게셀은 서부 블레셋 지역으로부터 침략을 막기 위해 그리고 예루살렘 성과 밀로(요새부분의 축대)를 건축했다{다윗 때 건축, 솔로몬 때 재건(왕상9:15, 24 ; 11:27 ; 대상11:8).
그리고 군사력의 강화에 힘을 썼는데 병거 성을 건축하고(왕상9:18, 19), 병거 1,400과 마병 12,000을 두었다(10:26). 말을 매는 마굿간은 4,000이었다고 한다(대하9:25). 이러한 말들은 애굽에서 수입해 왔다(왕상10:28). 솔로몬의 이러한 외교와 국방은 율법을 떠남인 것이다.
(2) 재정과 경제
솔로몬의 많은 건설과 국방을 위한 재정은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자원에서 이루어졌다.
① 세금과 공물
세금과 공물 징수를 위하여 온 이스라엘을 12지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에 따라 관장을 두어 왕과 왕실을 위하여 식물을 준비케 하되 각 지역마다 1개월분씩을 분담케 했다(왕상4:7~28). 솔로몬의 왕실에서만 쓰는 식물도 “가는 밀가루가 30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60석이요, 살찐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1백이요, 그 밖에도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찐 새들이라”(왕상4:22, 23)고 했고 밀가루만 하더라도 연간 소비량은 3만 석이 넘고 소와 양이 4만이 넘는다. 이러한 과중한 소비는 많은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호보암 대에 와서는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는 청원을 하게 되었다(왕상12:3, 4).
② 노력 동원
솔로몬은 백성들이 지치도록 노력 동원을 했고 많은 이방인들을 종으로 썼다(왕상9:21, 22)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의 역군도 3만이나 일으켜 번갈아 매달 1만 명씩 레바논에 보내어 재목을 채벌케 했고(왕상5:13, 14), 그것들을 운반하는 담군(擔軍)만도 7만이요, 돌을 뜨는 자가 8만이요(5:14, 15), 감독관이 3천 3백이라고 했으니(5:16), 일반 노무자들은 얼마였는지 알 길이 없다. 이들은 왕실과 국가를 위한 동원이요, 임금 노동자들은 아니었다.
③ 외국의 조공 물
많은 조공 물들은 금과 은의 그릇들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들이 해마다 정한 수대로 들어왔다. 그 명확한 수는 알 길이 없다. 스바 여왕이 가져온 선물을 보면 금 120달란트요 심히 많은 보석과 향품이었다고 했다(금 1달란트는 30Kg이다).
④ 외국 무역
무역을 위한 통로로서 가장 중요한 길은 홍해를 통하여 남으로 뻗치는 그 길이었다. 그는 두로왕 히람의 도움을 받아 홍해 연안 에스엔게벨에서 배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보내주는 익숙한 선원들을 이용하여 멀리 오빌에 까지 내왕하면서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을 실어왔고(왕상9:26~28), 진귀한 백단목과 보석들을 수입하였다(왕상10:12). 또한 솔로몬은 히람 왕의 배와 함께 바다에 배를 두고 다시스에 내왕하면서 3년에 1차씩 그런 보물들을 실어 왔다고 한다(왕상10:22, 23 ; 겔27:12).
그는 애굽에서(왕상10:28) 많은 말들과 병거를 수입하여 그것들을 자기만 사용할 뿐 아니라 헷 족속의 모든 나라와 아람 왕들에게도 팔았다. 그는 그런 중개상을 하는데도 좋은 위치에 있었고, 또 남북을 연결하는 좋은 상로(商路)들을 독점하고 있었다(왕상 10:28~29).
스바 여왕의 방문(왕상10:1~10, 13)도 솔로몬 무역 정책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본다. 스바 왕국은 본래 유목민으로서 지금의 아라비아 남쪽의 예멘은 스바 왕국의 중심지이었다.
스바 여왕의 방문도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함만 아니라 독점된 아라비아의 서남부는 향품의 산지였다. 여왕은 많은 향품과 금과 보석을 솔로몬에게 드린 대신에 그가 원하는 것을 주었다고 했으나(왕상10:10, 13) 통상조약(通商條約)도 성립되었을 것으로 본다.
스바 여왕은 이러한 협상을 위하여 예루살렘까지 약 1,200마일의 거리인 멀고 괴로운 여행길을 많은 수행원과 많은 선물을 가지고 온 것은(왕상10:2) 그 여왕의 지식 욕이나 호기심만으로 보기에는 어렵다. 왕상 10:15에 보면 “아라비아 왕들과 나라의 방백들”과 더불어 크게 무역이 이루어진 것을 본다.
이처럼 많은 무역을 통하여 얻어진 재물과 보화는 솔로몬의 영화의 극치를 보게 한다. 왕궁의 모든 그릇이 금이었고 레바논의 별궁에서 쓰는 그릇까지 정금들이었고, 은은 너무도 천하여 오히려 은그릇이 없었다고 한다(왕상10:21).
그의 호화로운 생활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겠다. 이처럼 솔로몬 시대는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이다. 국가의 정치적 안정과 물질적 번영은 과거에 상상도 할 크고 작은 남방의 모든 성읍들을 점령하고 길갈의 본부로 왔다(수10:43).
이러한 소식을 들은 북부 가나안의 하솔(갈릴리 북쪽으로 9마일 지점에 있는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알려진 그 크기는 약 200에이커에 이른다고 한다. 여리고 성이 8에이커인데, 그 세력은 굉장했을 것이다(수11:10). 야빈 왕은 북방의 모든 왕들과 연합하고 동맹군을 조직하여 해변의 수다한 모래 같고 병거도 심히 많았다(11:4).
그들이 물가에 진을 쳤을 때에{메롬에 진을 치고 있었음(수12:24)},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공격할 것을 명했고, 습격할 때에 흩어지자 추격하여 진멸하였다. 도망하면 등을 보이니 질 수밖에 없다. 이때 죽은 왕의 수는 남북 도합 31명이었다(수12:24). 이는 가나안이 얼마나 밀집상태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수11:18을 보면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과 싸운 지는 여러 날이라”고 했는데, 이는 약 6년을 말한다. 그 증거를 갈렙의 나이 계산에서 나오는데 그가 정탐을 갔었을 때 나이가 40세(14:7)이었는데, 헤브론을 점령했을 때에는 85세라고 했다. 그래서 39년의 광야 생활을 빼니 약 6년이다(14:10).
서남쪽으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점령해야 할 땅들이 있었고 서북쪽으로는 시돈과 그발등과 같은 베니게의 도성들이 남아 있었다
제 28장 2절 성전 건축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부왕인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거절당한 후에도(삼하7:5 ; 대상22:7~12) 성전건축을 위한 많은 물자를 준비하였다.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한 그 정성이 얼마나 컸던가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다윗이 명하여 이스라엘 땅에 우거하는 이방 사람을 모으고 석수를 시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돌을 다듬게 하고 다윗이 또 문짝과 못과 거멀못에 쓸 철을 한 없이 준비하고 또 심히 많아서 중수를 셀 수 없는 놋을 준비하고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대상22:2~4)라고 기록 하셨다.
다윗은 솔로몬이 어리고 연약함을 생각하여 그처럼 많은 재료를 준비하였고, 자기가 성전을 건축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준비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전건축을 안 했던 것이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자료 수집에서 그친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실제로 그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즉위한지 4년째 되는 봄이었다{주전 약 966년(왕상6:1)}.
성전이 완공된 것은 7년 후인, 즉위 11년 되던 가을이었다(왕상6:38). 그리고 성전의 규모는 장이 60규빗에 광이 20규빗, 높이가 30규빗이었다(왕상6:2).
그러나 성전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3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고대의 “규빗”을 세 가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보통의 것으로는 17.6인치이며, 궁중에서는 20.9인치, 또한 21.6인치가 있었다. 통상적으로 약 20인치를 이분의 일 미터로 보고 있다{“솔로몬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놓은 지대는 이러하니 옛적 재는 법대로 장이 60규빗이요 광이 20규빗이며”(삼하3:3)}.
그리고 성전의 장소는 다윗이 인구조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산 후 그는 곧 여부스(예루살렘)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가서 그 곳을 사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재앙을 그치게 한 그곳이 성전이 서게 된 장소이다(삼하24:10~17).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장소가 바로 모리아 산이요, 다윗이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에다가 성전을 건축했다(대하3:1).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므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 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와 대상4:20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의 내용들은 창15:8의 내용과 창13:16의 응답으로서 말씀이 육적인 면에서 솔로몬에게 이미 성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 28장 제 3절 왕궁 건축과 솔로몬 왕의 타락
1. 왕궁 건축(왕상7:1~12)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마치고 이어서 왕궁을 건축했는데 규모는 4배가 되며 13년 동안 건축하였으므로 성전 보다 6년의 세월이 더 걸렸던 것이다. 그 밖에도 레바논에서 가져온 재료라고 “레바논 나무 궁전”을 건축하였고(왕상10:17), 그곳에 금으로 만든 값진 무기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자기의 왕궁 외에도 바로의 딸을 위하여서도 특별한 궁을 지었다(왕상9:24). 솔로몬이 이처럼 맨 처음 성전을 건축한 다음에는 이러한 몇 개의 궁들을 건축했다. 이러한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히람 왕의 도움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2. 솔로몬 시대의 문서 활동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는 문서 활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훌륭한 시인이었던 것 같이 솔로몬도 위대한 지혜자요 문인이었다.
국가는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번영 속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시대이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이 시대가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일에 크게 힘쓴 때였다.
다윗의 때는 그의 전시대를 예배하며 섬겼고, 솔로몬 때에는 그의 통치 절반 이상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궁중에 서기관을 두어 모든 행적을 기록케 했고, 선지자 나단은 다윗과 솔로몬의 전 행적을 기록하였으며(대상29:29 ; 대하9:29), 갓은 다윗의 행적을 기록하였고, 선지자 아히야와 잇도가 각각 솔로몬의 행장이라는 역사의 기록을 남겼는데(왕상11:41 ; 대하9:29), 이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는 시편과 잠언, 전도서, 아가서 등의 찬란한 히브리의 성문학(聖文學)의 전성기를 이룬 때이었으며 중요한 성경들이 기록된 찬란한 시대였다.
3. 솔로몬의 타락과 징계
솔로몬 왕의 출범은 영역, 평화, 통치, 공의라는 4가지의 그리스도의 왕국을 보여주었다.
① 그리스도 왕국의 영역 : 바다에서부터 땅 끝까지 천하만국을 다스림(시72:8, 19)
② 솔로몬 왕국의 영역 : 바닷가의 모래 같이 인구가 많음을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애굽까 지의 넓은 영토(왕상4:20, 22)
③ 그리스도 왕국의 평화 : 주의 평강의 풍성함이 무궁함(시72:7)
④ 솔로몬 왕국의 평화 : 모든 민족과 평화롭게 지냄(왕상4:24, 25)
⑤ 그리스도 왕국의 통치 : 만왕과 열방을 다스리심(시72:11~16)
⑥ 솔로몬 왕국의 통치 : 지혜와 자비의 통치로 만방에 이름을 떨침
⑦ 그리스도 왕국의 공의 :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심(시72:12~14)
⑧ 솔로몬 왕국의 공의 : 왕으로써 공의를 신실히 행함(왕상10:9)
이런 왕이 타락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솔로몬은 또한 성전을 건축한 위대한 신앙의 왕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기도로 준비하였고, 건축 자재를 구입하기 위한 발판으로 부를 축적하는 등, 자재와 노동력을 위해 히람의 도움을 받았고, 거대한 규모의 역군을 3교대로 나뉘어 일하게 함으로 건축한 성전이었다.
성전 건축으로 인한 영적인 교훈은 큰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랜 간구와 노력이 필요함과(대상4:10),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도 자신은 물론 이웃의 능력까지 빌어 인간적 최선을 다해야 한다.
때에도 자신은 물론 이웃의 능력까지 빌어 인간적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과(롬8:2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정성스런 준비가 필요함과(벧전2:5), 쉼 없이 그리고 근면하게 노력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다(롬12:11).
4. 솔로몬의 타락 원인 8가지
① 하나님을 버림(왕상11:9)
② 교만함(왕상10:24, 25)
③ 많은 재물(왕상10:16~18)
④ 허영심(왕상10:22)
⑤ 사치(왕상10:28)
⑥ 이방 여인들(왕상11:1~4)
⑦ 우상 숭배(왕상11:4~8)
⑧ 백성을 억압(왕상12:4)
5. 솔로몬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둔 원수 셋
솔로몬은 그의 나라를 번영시켜 부강한 나라로 이끌었지만 그의 통치 말년에는 과세와 부역이 무거워서 백성들의 불평이 높아갔다. 종교적으로 아름답게 시작하여 지혜와 총명과 부귀영화를 누렸던 왕이었지만 육신적인 부귀와 영화는 마지막까지 충성을 못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빼앗을 것을 왕상11:11에서 선포하셨다.
죄악들은 이방 여인들을 왕비로 맞은 정책적인 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었고, 그들은 우상을 자기들의 신이라고 분향하며 제사하였고, 솔로몬은 신당까지 지어 주었던 것이다.
이런 솔로몬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계는 원수 셋을 두신 것이다(왕상12:1~7).
① 다윗이 에돔 사람 18,000명을 죽이고 그곳에 수비대를 두어 다스렸던 때가 있었는데(삼하8:13~14 ; 대상18:12~13), 이때에 하닷이라는 어린 왕자를 부왕의 신복들이 애굽으로 피신시켰고, 그가 자라나서 에돔으로 돌아가서 솔로몬을 대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닷은 이제 이스라엘의 남방을 괴롭히는 원수가 되었다.
② 다메섹의 르손을 일으켜서 원수가 되게 하였다(왕상11:23~25). 르손은 본래 소바왕의 신하였던 자이었으나 소바 왕국이 다윗에게 전멸될 때에(삼하8:3~12) 그는 남은 자들을 거느리고 다메섹으로 가서 거기에서 왕이 되어 솔로몬을 대항하는 원수로 나타나 북쪽을 괴롭히는 세력으로 나타났다.
③ 결정적인 원수는 여로보암이었다(왕상11:26~40). 이 사람은 큰 용사로서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며 다윗성의 무너진 부분을 수축할 때 감독자로 그에게 선발된 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선지자 아히야를 만났을 때에 그 선지자가 자기의 옷을 찢어 열두 조각으로 나눈 후 그에게 열 조각을 주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나라를 그처럼 찢어 그가 죽으면 열지파를 그에게 주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왕상11:38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일 내가 명하는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말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주리라”라고 약속하셨으나 그는 왕이 되고 난 후에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마침내는 악한 왕의 견본이 된 것으로 모든 왕들이 죄를 범함을 말할 때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아니했다는 말씀을 들을 정도로 악한 왕이었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에 그 사실을 알고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는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의 보호를 받아 살다가 솔로몬이 죽자 귀국하여 그 아들 르호보암을 대적하여 북방 이스라엘을 건설하고 그 첫 왕이 된 것이다.
제 29장 이스라엘 왕국(호 13:11)
제 1절 북 이스라엘의 왕국(왕상 12:16-20)(왕상 12장-22장, 왕하 1장-17장까지).
1. 이스라엘 왕국의 창건 왕 여로보암(931-910)
열왕기상 11장 26절을 보면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사람이다. 여로보암이 북방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한 것은 에브라임 지파와 유다 지파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불화가 있었다. 유다는 큰 지파로 자부심이 있었고, 에브라임은 작은 지파로서 언제나 소외감을 느끼기 때문에 불만이 있었다(에브라임: 삿 8:1; 12:1-6; 민 1:33; 26:37. 유다: 민 1:27; 28:22).
그리고 북쪽에 있는 다른 지파들도 불만이 있었다. 사울 왕이 작은 지파(베냐민)에 속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 다윗이 왕위에 오를 때도 북방 족속들은 다윗을 따르지 않고 이스보셋을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2년간 통치했다(삼하 2:8-11). 이렇게 유다 지파에 대한 강한 반발 의식이 숨어 있었던 것을 짐작케 한다.
솔로몬의 위를 계승한 르호보암은 종족적인 단합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어야 함에도 오히려 선왕보다 강한 정책으로 통치한다고 억압하며 그들의 감정을 격회시킴으로 분열을 가속화 시켰던 것이다(왕상 12:16). 이 때 르호보암이 용사 18만으로 나라를 통일하려 했으나 선지자 스마야가 하나님께서 왕국을 나누셨다고 예언하여 르호보암이 돌아가고 그 후부터 분열왕국이 된 것이다(왕상 13:21-24). 이는 부왕이신 솔로몬에게 예언된 말씀이다(왕상 11:11-13). 여로보암은 솔로몬에게 죽임을 면하기 위해 애굽에 피신했다(왕상 11:40).
2. 여로보암 왕의 정책과 그 범죄 상(왕상 12:25-14:20)
여로보암은 나라의 분열을 원하지 않았다(왕상 12:1-4). 르호보암의 반발로 세워진 정권이기 때문에 모든 세제와 노무 동원 같은 것을 가볍게 하여 민심을 헤아렸다. 왕으로서의 기득권이 없었고 왕이 된 것도 감사한 것이었다. 왕위에 오르면서 세겜을 건축하여 거처로 삼고(왕상 12:25), 그 후 부느엘을 건축하고 디르사로 수도를 옮기고 거기서 22년 동안 다스렸다(왕상 14:20). 통치 기간동안 그가 불안함은 백성들이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왕상 12:26, 27). 특별히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갈 것을 염려했다. 그러므로 그는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남쪽 벧엘에 두고 하나는 북쪽 단에 두어 제사케 함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했고, 레위 자손이 아닌 자로 제사장을 삼고 절기도 유다와 비슷한 날로 정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감을 막았다(왕상 12:28-33).
3. 여로보암의 두 금송아지
벧엘과 단에 두고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왕상 12:28, 29). 하여 예루살렘을 향한 백성들을 막았다.
* 예배의 대상으로 만든 금송아지
애굽의 성우(聖牛)는 예배의 대상이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여신 ‘하돌’의 화신(化身)이라고 그들은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로보암이 여신을 믿게 하지는 않은듯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후손들은 법궤나 제단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점차적으로 우상이 된 것 같다. 하나님의 임재를 형상화시켜 보려는 인간의 방법은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4. 여로보암 왕가의 징벌(왕상 13:1-14: 18, 15:25-30)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 뿐 아니라 그가 쌓은 제단에서는 여호와를 섬김과 동시에 바알신도 함께 섬기는 혼합적인 제사를 드렸으니 악을 범함이다(왕상 14:9, 15). 이러한 행동은 아합과 이세벨이 바알 신을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끌어 들이는 길을 넓게 열어주는 근원이 되었다(왕상 16:30-33).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을 징벌하게 되었다. 즉 그가 단 곁에서 분향하고 있을 때 한 선지자가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왔다(왕상 13:1). 하나님의 사람은 단을 향하여 예언하기를 장차 “다윗의 집에 요시아라 이름 하는 아들”이 나타나서 여로보암의 제사장들의 뼈를 그 단 위에 불사를 것이라고 했고 그 예언이 그대로 응답되었다(왕상 23:15-16). 여로보암은 예언을 듣고 진노하여 손을 펴며 선지자를 잡으라고 할 때 그 편 손이 말라버려 다시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아들 아비야가 병들어 아내를 변장시켜 선지자 아히야(왕이 됨을 예언한 자)에게 보냈다(왕상 11:29-31). 그 때 아히야는 눈이 멀었으나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가르쳐 주시며 여로보암이 철저하게 망할 것을 예언했다(왕상 14:2; 10-16). 여로보암이 죽고 그의 아들 나답이 즉위하여 2년 만에 불레셋 땅인 깁브돈을 점령하려고 그곳에 출정하여 그 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그만 바아사가 일어나 반란을 일으켜 그를 죽이고 여로보암의 온 집도 그에게 전멸되었다(왕상 15:28-29).
5. 바아사 왕과 그 왕가의 몰락
이스라엘 왕국을 혁명으로 이어 받은 바아사는 24년 이라는 비교적 오래 통치하였다. 문제는 여로보암의 죄를 답습한 것(왕상 15:28-34)과 유다 백성들의 연락을 끊는 라마 성(국보급의 건축)을 건축하다가 중단 했다는 기록이 있다(대하 16:1-6). 그러나 유다 왕 아사는 다메섹의 연합군의 도움을 얻어 물리쳤다. 그리고 라마 성을 건축하다 버리고 간 돌과 나무로 게바와 미스바의 두 성을 건축하여 유다의 국경을 튼튼히 하였다(대하 16:6).
그 후 이스라엘의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죄악을 오히려 답습하므로 그와 같은 죽음을 맞는데 아들 엘라의 치세 때 전멸되었다(왕상 16:2-12). 그의 아들 엘라(886-887)는 왕위에 2년을 치리 했으나 블레셋의 점령을 위해 깁브돈을 점령하려고 군대 장관 오므리를 파송하여 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엘라는 디르사의 궁내 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취할 때 신복이었던 군대장관 시므리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왕상 16:11-12).
6. 오므리의 통일(왕상 16:8-22)
시므리와 오므리는 엘라 왕의 두 군대 장관인데 군사 절반을 가진 시므리가 반역을 일으켜 엘라 왕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오므리가 전방에 있던 군사로 디르사에 올라와 성을 포위하고 성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에 불을 놓고 자살하니 7일 동안 통치로 최단명의 왕이 되었다(왕상 16:15-18).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둘로 나누어 절반은 디브니라는 사람을 왕으로 삼고, 절반은 오므리를 좆았다(왕상 16:21, 22). 이러한 상태로 4년을 지난 후 오므리가 디브니를 이기고 전국을 다스리게 되었다(왕상 16:22).
제 29장 2절 오므리 왕가의 번영과 몰락
(왕상 16:21- 왕하 10:11).
여로보암이 북방 이스라엘 왕국을 창건한 이후 50년간 세 번에 걸친 혁명이 있었다. 초대 왕 여로보암과 3대 왕 바아사 시대를 제외하고는 정세가 불안했다. 그러나 오므리의 왕조가 들어섬으로 이스라엘은 안정 세력을 되찾게 되었고 남방 유다와의 긴장도 해소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외부적인 안정과 번영과는 달리 종교적인 면에서는 말할 수 없는 암흑시대이었다.
1. 오므리 왕가 창건까지의 북방 상태
북방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된 이후 오랫동안 남북의 긴장은 계속되었고 북조 이스라엘에는 오므리의 왕조가 서게 된 것이다. 이 왕조의 특색은 남방 유다와의 우호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2. 오므리 왕가의 번영(왕상 16:23-28).
시므리 왕을 죽인 군대장관 오므리(885-874)가 정권을 잡으면서 이스라엘 왕국은 안정 세력을 얻게 되었다. 그의 왕조는 4대(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에 걸쳐서 통치했다.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강력한 나라요 번영했다지만 오늘의 고고학적 자료에서도 이 왕조에 관한 것은 풍부하게 남아 있지만 종교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므리는 세멜에서 산을 사서 그 위에 성을 건축한 후 그 산 주인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칭했다 한다(왕상 16:24). 이처럼 오므리 왕은 수도 사마리아의 성을 견고히 하고 반석 위에 세움으로 나라의 기초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나라에서도 그 명성이 높았던 것은 그 왕조가 크게 번영해 있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오므리 왕은 다윗과 솔로몬 왕 이후 잃어버렸던 권세를 계속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잃어버렸던 모압 왕국을 다시 속국으로 삼아 트랜스 요르단의 남부를 다시 장악하게 된 일이다. 모압 땅은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지로 손색이 없고, 목양은 중요한 산업의 하나인 풀이 무성한 초지 동쪽에서 이동하고 여름철에는 서쪽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초장의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압은 이스라엘의 정치와 경제의 핵이 되었다. 때문에 다윗과 솔로몬은 계속 모압을 지배하고 있었다(삼하 8:2). 그런데 분열왕국이 되자 모압은 유다를 벗어나 독립했다. 이러한 모압을 이스라엘의 오므리가 다시 정복하였는데 성경에는 기록이 없으나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알려졌다(1886년 독일 학자 F.A. Klein에 의하여 모압 땅에 있는 해방 기념비에 의하면 모압은 오랫동안 오므리 왕에게 정복되었다가 여호람 때에 해방되었음을 기록했다. 전문 34행으로 되었는데 이를 이스라엘로 옮기려고 했는데 그 지방 아랍 사람들의 방해로 그 석비는 파괴되었으나 사진이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오므리는 40년간의 긴 세월이었다.
열왕기하 3장 4절에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이 말씀은 모압이 이스라엘을 섬김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오므리의 왕조는 강력하고 번영했던 것이 사실이나 영적으로는 크게 타락한 때이다. 오므리의 왕조도 한 때 번영한 것이 사실이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번영보다도 오히려 그들의 악이 관영되어가는 그 상태를 자세히 기록한 것을 우리는 주의 깊이 읽어야 할 것이다. 오므리 왕이 죽으매 그 아들 아합은 그 왕조를 계대하게 되었다.
3. 아합 왕의 권세와 그의 전사(왕상 16:29-22:36).
아합 왕(874-853)은 부왕 오므리의 왕조를 이은 후 부왕의 강력한 정책을 더욱 확대시키려 했다.
그러므로 아합 왕은 북방 베니게(두로와 시돈은 베니게의 중요한 도성임)와 동맹관계를 맺음으로 다메섹(아람)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그는 그 동맹의 증표로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했다. 이세벨은 베니게를 통치한 시돈 사람인 엣바알 왕의 딸이었다(왕상 16:31-33).
그리고 아합은 남방 유다와의 화평을 위할 겸 그 힘을 빌리기 위하여서 그의 딸(아달랴, 왕하 8:18, 26)을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에게 주어 사위를 삼았다. 아합은 막강한 아람의 남침을 막기 위하여 북에는 베니게와 남으로는 유다와의 동맹을 굳게 하여 권력을 확장하려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세벨이 이스라엘을 바알신화 시키려고 투쟁일선에 나선 자이었다. 말하자면 바알 종교의 선교에 헌신한 여성이었고 종교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알인지 하나님인지 결판을 내는 분기점에 이르게 되었다.
선지자 엘리야는 이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좌우를 결정하기 위하여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으로 모여 나오도록 아합에게 제안했다(왕상 18:19). 여기에 바알 선지 850명 모두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자들(바알 선지 양성소)과 대결을 한다. 갈멜 산에서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찌니라 했던 것이다(왕상 18:21-22). 이세벨은 종교를 잡고 정치에 들어갔는데 폭력정치의 대표적인 사건이 라봇의 포도원이다(왕상 21:1-16).
포도원 탈취도 바알 신화를 이용해서 뺏은 것이다. 바알 신화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여신이 깊은 산에서 사냥꾼 청년을 만났는데 그가 좋은 활을 가지고 있었다. 그 활은 신물이라고 해서 어떤 신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여신이 그것을 보고 탐이 나서 요구했으나 허락되지 않아서 그 여신은 모든 신들의 머리가 되는 엘 신에게 그것을 빼앗아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자 여신은 악을 택하여 독수리 날개를 타게 해서 그것으로 하여금 땅으로 쫒아 내려 그 청년을 쪼아 죽게 한 후 신에게 받은 활을 빼앗았다는 신화가 내려왔는데 이세벨의 포도원 사건과 일백상통하다.
즉 이세벨이 신화를 이용하여 라봇의 포도원을 뺏은 것이다. 우상 종교의 도덕수준의 악의 영향을 받아 자라났던 이세벨의 부패성이다. 선민의 왕 중에 가장 악한 아합은 나봇의 거절을 듣고 자기 권력의 한계를 느끼며 탄식했던 것은 그렇게 악한 왕이라도 우상 종교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아합이 이스라엘의 전통 속에서 살았고 그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그 전통에 의해 라봇이 최고 권력자가 매수하겠다고 했을 때 거절했다. 여기에 비해 이세벨은 한 푼도 안주고 죽여서 빼앗은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세벨은 왕궁을 호화로운 궁전을 꾸몄는데 그의 사치스러웠던 생활은 ‘상아 궁’(왕상 22:39)이란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상아 궁은 1세기 후 아모스선지를 통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암 3:15, 6:3). 아합의 호화로운 궁전도 아람과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종말을 보게 된다.
아합의 큰 원수는 아람 왕 벤하닷이다. Transjordan을 사이에 놓고 두 나라는 항상 긴장해 있었는데 열왕기상 20장 1절로 21절에 벤하닷은 그에게 속한 32 열왕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공격했다. 공격에 실패한 (왕상 20:1-21) 벤하닷은 다시 대오를 정리하고 재침했으나 사마리아 Transjordan의 북부 요충의 도성인 아벡(히브리어로 요새지라는 뜻이다)에서 다시금 패전하고 아합에게 굴복했다(왕상 20:22-34). 아벡을 점령한 아합은 3년 후 다시 그 남쪽 도시 Transjordan 동부 라못을 점령하기 위하여 주둔하고 있는 아람 군대를 공격했고, 이 때 유다 왕 여호사밧도 그와 협력하음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Transjordan 라못에서 전사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지배 하에 있던 모압까지도 반기를 들어 독립했다(왕하 1:1).
우리가 아합의 인물을 평가할 때 이세벨의 영향으로 무능한 왕인 것 같지만 Transjordan을 중심으로 아람(다메섹)과 또는 모압과 더불어 각축전을 벌이던 시대였으나 아합은 주도권을 잡고 국력을 확장시키는데 성공자이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이세벨의 여향을 받았지만 인물은 알려진 것과 같이 극악하지도 않은 것 같다(왕상 21:25, 왕상 19:1, 20:31-34, 21:27-29, 20:43).
그렇다면 아합이 어떻게 바알 종교를 추종했을까. 이는 베니게와 친선을 위하고, 또한 국권을 확장하기 위하여 바알 종교를 용납한 혼합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신앙노선은 국권확대는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나 종교적인 암흑시대로 끌고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므리 왕조는 아합이 죽은 후에도 계속 아람과의 각축전은 그치지 않았다. 또 이세벨의 영향을 받아 자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 왕 역시 바알 신에게 열중하기는 일반이다(왕상 22:51-53).
종교적인 암흑시대에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선지자들을 일으켰(왕상 18:13, 19:18)는데 특별히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록은 모므리 왕조에 있어서 특기해야 할 것이다. 이는 선지자가 특별하기보다 시대가 악하였기 때문에 많은 이적이 나타남을 본다. 엘리사 시대는 엘리야 시대보다 악하기 때문에 갑절의 은혜를 주셨고 특이한 것은 선지자직의 계승인데 예외에 속한다(영감의 겉옷을 받는 특별한 방법이다).
4. 오므리 왕가의 몰락(왕상 22:40-왕하 10:11).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2년을 다스렸으나 병사한 후(왕하 1:2-16), 그의 동생 여호람이 왕위에 올랐다(1:17). 여호람은 부모와 같지 않았다(왕하 3:2, 3, 왕하 6:24-30). 하지만 완전히 회개한 것은 아니다. 그가 선지자 엘리사를 저주하여 그 머리를 베려고 하수인을 보낸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다(왕하 6:31, 32). 선지자를 죽이려는 배경은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보낸 일과(왕하 5:8-14), 아람의 군대가 침입했을 때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들이 보지도 못하고 있을 때 여호람은 그들을 치려했으나(왕하 6:18, 21) 엘리사는 그들을 무사히 보내주었다. 이후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아이를 먹을 정도의 기근에 처할 때(왕하 6:28, 29) 엘리야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왕하 6:31). 물론 하나님은 그 전쟁에서 엘리사의 예언과 같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아람군대는 퇴거하고 이스라엘은 승리했으나(왕하 7:1-20) 그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소중한 줄을 몰랐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Transjordan을 사이에 놓고 아람과 이스라엘은 늘 긴장상태에 있었는데 벤하닷의 군대가 사마리아에서 패한 후(왕하 7:7) 평화가 있었으나 벤하닷이 죽고 하사엘이 왕위에 올랐을 때(왕하8:7-27) 여로람은Transjordan의 라못을 탈환하기 위하여 아람과 싸우다 부상을 입고 치료 중에(왕하 8:29) 군대 장관 예후에게 피살됨으로 오므리의 왕조는 4대 맘에 무너져 엘리야의 예언과 같이 되었다(왕상 21:29, 왕하 10:11).
5. 오므리 왕가가 유다에 미친 영향
유다 왕 여호사밧은 아합의 딸을 자부로 맞았고 또 그의 아들의 이름도 아합 집의 이름을 본받아 여호람이라고 했다. 아합과 여호사밧이 연합한 것은 남북의 긴장을 해소하고 주변국에 국력확장하려는 두 나라의 이해가 일치했고, 사건이 있을 때마다 서로 왕래하여 협력했다. 열국은 그를 두려워하여 조공을 드렸고 한 때는 모압과 암몬도 연합하여 그를 치려했으나 여호사밧은 그 연합군을 이기며 명성을 높였다(대하 17:1, 2, 5, 17:10-18:1, 대하 20:29-30).
여호사밧의 정책은 남북의 평화를 유지하며 주변에 국권을 확장하는데 도움은 되었지만 종교적으로 부패와 타락(왕하 8:18, 27; 대하 22:6-10)으로 국권도 쇠약해서 마침내 그 아들 여호람 시대에 이르러서는 속국으로 있던 에돔과 립나도 배반하여 그 수하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아합의 딸 아달랴는 유다 왕국의 왕의 씨들을 학살하는 비참한 결과(대하 22:10-12)까지 보게 되고 유다 왕국의 계대는 일시 중단되자 요아스가 위에 오를 때까지 6년 동안 유다 왕국은 아합의 딸 아달랴가 통치하는 비극을 보게 된 것이었다(대하 22:12).
6.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 (엘리야: 왕상 17:19, 21; 왕하 1:2-2:11)
아합 왕과 그 아들의 통치 시대에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의 활동은 밤하늘의 샛별같이 빛났다. 성경의 기록대로 그들의 활약을 비교한다면 아합 왕과 이세벨과 또 그 후 왕들의 기록은 오직 그들의 활동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배경과 같이 보인다.
엘리야의 배경: 디셉 사람이라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은 없다(왕상 17:1). 그의 대한 기록은 왕상 17장부터 19장과 열왕기하 1장과 2장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1) 아합 왕에게 수년 동안 우로가 없는 큰 가뭄을 선포하고 물러나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까마귀가 날라주는 떡과 고기로 연명하다가(17:1-7)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서 과부와 그의 아들을 만나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도록 이적으로 먹은 일과 다음 그 아들이 병들어 죽은 후 그 아들을 기적으로 고친 일이다(17:8-24).
(2) 그 후 3년을 이스라엘 땅에 심한 가뭄이 계속하므로 아합은 재난이 엘리야의 탓으로 돌려(왕상 17:1; 18:18) 죽이려 했으나 엘리야는 바알선지자 450과 아세라 선지자 400을 갈멜 산에 모으게 하고 대결에서 승리하고 참 신을 알게 했다(왕상 18:39).
(3) 아합과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 할 때 피하여 호렙 산으로 가는 도중 심신이 피곤하여 졌을 때 하나님의 위로가 어떻게 나타나셨던 일과(19:4-7) 드디어 호렙 산에 이르러 한 산에 섰을 때(19:11)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이 차례로 지나가 후에 세미한소리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19:12).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대신하게 하라는 부부를 받은 기록이 있다(왕상 19:15-16).
(4)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있을 때 땅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그 기업을 지키려는 언약의 가정과 개인의 권리를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책망하시는 가를 보여 주는 교훈이다(왕상 21:).
(5) 열왕기하 1장의 기록으로 아합이 죽고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된 후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가서 그 병이 났겠는가 물으려 할 때 엘리야가 그들을 만나 왕이 반드시 죽으리라는 예언을 듣고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알림으로 왕은 두 번에 걸쳐 50부장과 50인의 군대를 보내 그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엘리야의 이적으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 죽었다(왕상 1:1-12). 왕도 예언대로 죽었다(17).
(6) 승천의 기록으로 열왕기하 2장의 내용이다. 위대한 선지자의 생애 마지막의 찬란한 모습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장면이었다. 엘리야의 지상 활동은 엘리사가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더라.”(왕하 2:13)의 말로 엘리야의 지상 활동은 끝났던 것이다.
(7) 엘리사의 활동 (엘리사: 왕하 2:12-13:21)
그의 선교 활동을 보면 기본적으로 그의 스승 엘리야와 다름이 없다. 그는 부유한 농가의 출신이다(왕상 19:19). 그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을 때 열두 겨리 소들이 밭을 갈 때 부름을 받았다. 선교 기간은 엘리야 보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여호람 왕의 초기부터 시작하여(왕하 3:1) 예후의 시대를 걸쳐(왕하 11:34) 여호아스(13:1)와 요아스 왕 때(13:20)까지 약 50년간 활동하였다.
그의 사역에도 엘리야처럼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어도 광야로 도망하거나 극한투쟁을 벌인 일이 없었다. 그는 종종 궁중의 왕들과도 교통이 있었다. 많은 이적도 자기 주위의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병을 고치거나, 불쌍한 자들을 돕는 일 등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엘리야의 선지 학교는 엘리사 때에 와서 더욱 번창했고 또 선지자 양성에 더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을 본다(왕하 2:3-7; 15-18; 4:1-7; 4:38-41; 6:1; 9:1). 엘리야가 선지학교를 길갈(왕하 2:1)과 벧엘(왕하 2:3), 여리고(2:5)에 선지학교를 세웠다면 엘리사는 그것들을 더욱 발전시켰던 것이라고 본다. 그 시대의 형편으로 보아 헌신적인 참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양성하는 것은 절실히 필요하였을 것이다.
제 29장 3절 예후 왕가의 발흥과 몰락
(왕하 9:11-10:36; 13: 14:16-29)
오므리 왕가의 4대 왕 여호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예의 왕가는 5대에 걸쳐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오므리 왕가의 통치(44년)와 예후 왕가의 통치(89년)는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 있어서 강력한 정권들이었다. 예후 왕가는 오므리 왕가 보다 강한 것은 아니었다. 예후 왕의 통치 이후 왕국은 다메섹과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1. 예후 왕가의 시작
예후가 왕이 된 것은 20년 전에 엘리야 선지로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라고 예언되었던 것이다(왕상 19:16-17; 21:21-24). 때가 되자 엘리사는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시켜서 Transjordan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군대장관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고 아합의 집을 숙청하여 지상에서 멸할 것을 지시 했다(왕하 9:1-10).
당시 요람 왕은 아람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길르앗 라못의 기지를 떠나 이스르엘(지명이며 원문의 뜻은 하나님이 뿌려 주심이다. 인명으로는 대상 4:3; 호 1:4이다)로 돌아와 치료 중에 있었다(왕하 8:29). 예후는 다른 군대 장관들과 더불어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선지자의 지시를 받은 후 곧 혁명을 일으켰고 군중들은 나팔을 불어 예후가 왕이 된 것을 선포했다. 이후 예후는 곧 이스르엘로 가서 요람을 죽이고 요함과 함께 있던 유다 왕 아하시야는 탈출하여 도망했다.
예후는 곧 또 이스르엘에 이르러 이세벨을 죽이니(왕하 9:30-37) 그것은 일찍이 엘리야의 예언과 같이 된 것이다(왕상 21:23). 그 후 예후는 사마리아에 있는 정치적인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너희들은 아합의 아들 70인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그 아비의 왕위 세우고 아합 왕가를 위하여 싸우라고 했으나(왕하 10:1-3)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굴복을 의미로 왕자 70인을 죽여 예후에게 그 머리를 가져왔으니 이것은 예후의 명령대로 순종한 것이었다(왕하 10:6-7).
그 밖에도 예후는 아합 왕가에 속한 모든 귀족들과 바알의 제사장들을 다 죽여 그 왕자를 전멸시켰다(왕하 10:11, 17). 특별히 그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또 열심히 바알을 섬기던 자들을 전멸함에 있어서의 극렬한 피의 숙청은 그 유래를 달리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즉 그는 전국에 공포하여 바알을 위한 소위 거룩한 대회를 열고 바알의 선지자와 제사장들과 열심 있는 자들을 다 초대했다. 행사를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하여 열왕기하 10장 18절에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의 포고령을 내리고 그들을 더욱 안심시키려고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만 예복을 입히고 그들을 구별한 후에 한사람도 남김없이 전멸시켰다(왕하 10:19-24).
그리고 바알의 신당의 모든 목상을 불사르고 바알의 당을 헐어 화장실을 만들었다(왕하 10:27).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을 멸하려 한 그 결심을 그가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4대를 지나리라”(왕하 10:30)고 하셨다. 그러나 예후도 하나님의 율법을 전심으로 섬기지는 않았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증거 한다(왕하 10:29-31). 혁명은 성공하였으나 율법을 행하지 아니했으므로 다메섹 왕 하사엘과 앗수르 왕 살만에셀의 침략을 받아 그의 판도는 줄어들고 세력은 약화되어 열국들의 압박과 수모를 받게 된다.
2. 예후 왕과 다메섹 및 앗수르의 침략(841-814)
예후집의 약화의 종교적 원인은 이미 위에서 밝힌 것같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섬기며(왕하 10:29), 혁명을 일으킬 때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집에 속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존귀한 고급 관원들까지 숙청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달랐다. 그 결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울 수 있는 고급 인력들을 많이 잃어버렸다.
또 그의 혁명이 너무 감정적인 성격 때문에 협력을 꺼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후의 숙청은 유다 왕 아하시야까지 죽이고(왕하 9:27) 그것도 부족하여 아하시야의 형제들까지 죽였으므로 유다와의 동맹 관계는 완전히 끊어져 긴장 상태가 고조되었음은 물론이요 또 북쪽으로는 베니게 와의 관계악화로 국경을 수비하는 많은 힘을 소비해야 했다. 이러한 상태는 경제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예후 왕가의 무거운 부담이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또 실제에 있어서 예후는 군대 장관으로서 유능한 자이었겠으나 정치적으로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 다메섹(아람) 왕 하사엘의 침략
범죄한 예후를 징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의 아람 왕 하사엘을 일으켰다(왕하 10:32, 33). 그것은 벌써 일찍이 엘리야 때에 예언된 것이었고(왕상 10:15-17), 또 예언은 엘리사 때에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되었던 것이었다(왕하 8:7-15). 하사엘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때 요단 동편의 루우벤 및 므낫세 지파의 모든 땅, 즉 길르앗과 바산을 점령했다(왕하 10:32, 33). 하사엘은 계속 요단 서편을 공격했고,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 때에도 아람 왕 하사엘의 압박이 심하였다(왕하 13:3, 4, 7).
왕은 신변만을 보호할 수 있는 마병 50과 병거 10승과 보병 1만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했다(왕하 13:7). 아람 왕 하사엘은 그 세력으로 유다까지 침공했는데 유다 왕 요아스를 굴복케 하고 황금의 조공을 받고야 물러갔다고 한 기록이 있는데(왕하 12:17-18) 이는 북방 이스라엘이 하사엘에게 남침의 길을 완전히 열어줄 만큼 무력해지고 또한 하사엘에게 전적으로 굴복했음을 알 수 있다.
* 앗수르 왕 살만에셀의 침략
이스라엘의 예후 왕은 앗수르의 압박에 시달려 마침내 살만에셀에게 많은 조공을 바쳐야 했다. 앗수르가 처음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는 다메섹(아람)과 더불어 연합하여 대항했었으나 살만에셀의 기념비는 19세기 중엽(1846)에 니느웨 남방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사각으로 된 장방형이다. 사각 전면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 기념비에는 조공을 드리는 그림과 조각된 글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 다음
오므리의 아들 예후의 조공 물: 나는(살만에셀) 그(예후)에게서 은과 금과 금잔과 금병과 금주전자와 금바켓트와 놋그릇과 왕의 사용을 위한 홀과 나무로 된(?) 것들을 영수한다. 그런데(?)는 확실치는 않으나 싸인으로 추정된다. 주목할 문구는 예후를 가리켜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것은 앗수르 왕이 오므리 시대에는 이스라엘에게 압박을 당했던 것을 이제 회복했다는 자만심에서 그렇게 한 것 같다.
3. 구원자를 만난 여호아하스 (814-798, 왕하 13:1-9)
예후는 비록 그 나라는 많이 약화되었다할지라도 오래 동안 통치했다.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올라 16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통치 기간동안 다메섹(아람) 왕 하사엘의 압박이 계속되었음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하사엘의 침략). 아람 군대는 영토를 마음대로 지나다니며 블레셋 땅까지 공격하고 드디어 예루살렘에까지 진격할 정도가 되었다. 이스라엘에서의 그들의 횡포는 굉장했다(왕하 12:17-18; 13:3, 4). 이 때에 여호아하스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서 응답을 받았는데 구원자로 앗수르를 보냈다(왕하 13:3, 5).
4. 국세를 회복한 요아스 왕(798-782)
(왕하 13:10-25; 14:15. 16; 역대하 25:17-24)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왕에 오른 후 이스라엘의 국세는 점차 회복되었다. 그가 16년 동안 치리하던 기간 여로보암의 우상을 떠나지 않고 악한 길을 걸었으나(왕하 13:10, 11) 그래도 그는 선지자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었을 때 그를 찾아 가서 눈물을 흘리며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왕하 13:14) 하면서 울기도 했다. 그 때 엘리사는 그에게 이르되 활을 잡고 동편 창을 열고 쏘라고 했다. 그것은 곧 원수 아람을 진멸하는 활이라고 하면 서 아벡에서 아람을 쳐 이길 것을 예언했다(왕하 13:16, 17). 그리고 계속 활을 취하고 땅을 치라고 했다.
요아스 왕이 세 번치고 그칠 때 엘리사는 그를 책망하며 왜 5, 6번을 치지 않고 세 번만 쳤기 때문에 아람을 세 번만 칠 것이라고 예언했다(왕하 13:18, 19). 그 후 예언대로 부왕 때 잃었던 성문들을 아람 왕 벤하닷 2세(하사엘의 아들)에게서 빼앗아 국세를 회복하고 벤하닷을 세 번 이겼다(왕하 13:25).
요아스 왕은 남쪽 유다 왕 아마샤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요아스 왕은 벧세메스에서 유다를 이겼다. 아마샤 왕은 사로잡혔으며 예루살렘의 성벽의 일부는 무너졌다 성전과 궁궐의 보물들도 빼앗겼고 많은 포로들이 인질로 잡혀갔다(대하 25:22-24). 이 때 이후 남쪽 유다 왕국은 북쪽 이스라엘에게 완전한 예속상태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5. 이스라엘을 부강케 한 여로보암 2세 (793-753, 왕하 14:23-29)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는 부왕이 남긴 업적으로 비교적 안정되고 점점 부강하여지는 황금시대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40년의 통치는 이스라엘의 최 장기간이었다(왕하 14:14; 2 23).
국토는 하맛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왕하 14:25) 회복하였다고 했으니 이는 솔로몬 시대의 판도와 같은 것이었다(왕상 8:65). 그는 또 다메섹도 완전히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삼았다. 하사엘이 주관하고 있던 길르앗을 중심으로 트렌스요르단 전체를 그의 수중에 장악하게 되었다. 이처럼 여로보암 2세의 이스라엘 왕국은 팔레스틴의 영역을 넘어서 주변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강국이 되었다. 이같이 이스라엘의 상태가 강화된 이유는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는 가장 큰 원수로 이스라엘을 늘 괴롭게 하던 하사엘과 벤하닷 2세의 다메섹은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앗수르의 공격으로 심히 약하여진 때문이요,
둘째는 다메섹을 공격했던 앗수르는 북방의 새로운 세력인 우라르트(아라랏)를 막기 위하여 골몰하던 때이었다. 또 당시 앗수를는 계속하여 약한 지도자들이 왕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앗수르는 그 때에만 해도 국외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셋째는 요아스와 여로보암 2세는 비록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못하였으나 통치자로서의 능력은 충분히 발휘했던 유능한 지도자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로 번영을 누리던 이스라엘은 그 때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져야 할 것인데 나라가 부유하여 짐에 따라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점점 부패해졌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호세아와 아모스를 보내셨다.
6. 호세아와 아모스의 활동과 그 메시지(이스라엘이 망하고 포로 될 것을 선포)
(1) 호세아
호세아는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간(793-753) 약 40년에 걸쳐 활동한 선지자이다. 웃시야 왕 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까지라고 했다(호 1:1). 북방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솔로몬 때의 모든 판도를 모두 회복하고 번영을 구가하는 호화로운 시대에 부름을 받았다. 백성들은 호화로우면 더욱 타락된 길을 걸었다(호 2:8, 13; 8:6; 13:2; 14:2).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호 8:42; 4:11, 12). 지도자들의 부패(호 9:8-12). 50년을 사역했으나 이적이 없었으나 미래 지형적인 선지자이었다.
(2) 아모스
호세아와 같이 이스라엘이 마지막으로 그의 번영 중에 있던 여로보암 2세의 통치 때이다(암 1:1). 그는 남방 유다 출신으로 북방에 와서 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다(암 1:1, 7:12-15). 주변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다메섹은 트레스요르단에 있는 길르앗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박하는 불의가 있었기 때문이요(암 1:3, 4), 또한 블레셋을 심판한 이유는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파는 불의 때문이었고(암 1:6-8), 두로와 시돈의 멸망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어기고 배신하는 불의가 있었기 때문이며(암 1:9), 에돔을 멸한 것은 형제 이스라엘을 언제나 원수로 알아 항상 분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며(암 1:11), 또한 암몬을 벌한 것은 영토를 넓히고자 하여 길르앗의 이스라엘 백성을 무차별 살해했기 때문이며(암 1:13-15), 모압을 멸한 것도 역시 잔인한 불의가 관영했기 때문이라고 2장 1절에서 말씀하셨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선포할 때 “들으라”는 4편의 설교를 했다(3:1-15; 4:1-13; 5:1-6, 14; 8:4-14). 그리고 여호와께서 보이신 환상을 “보이신” 5개의 환상을 기록하고 있다(7:1-=3; 4-6; 8:1-3; 9:1-=4).
설교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를 선포했다.
7. 예후 가의 최후 왕 스가랴 (753, 왕하 15:8-12)
여로보암의 2세의 아들 스가랴가 위에 올랐으나 불과 6개월 만에 반역이 일어나 살룸에게 죽었다. 이러한 일은 이미 선지자 아모스가 예언한 일(암 7:9)이었으나 아모스는 이러한 예언을 했던 때문에 오히려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을 반역하는 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던 것이다(암 7:10-13). 스가랴 왕의 기록은 별로 없다. 그는 오직 열 왕들의 악을 따라 단과 벧엘에서 여로보암의 우상을 섬기기를 계속하였던 것이다. 그는 예후의 4대 손으로 살룸에게 죽으니 그것은 이미 예후에게 예언하신 말씀, 즉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였으니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하신 그대로였다(왕하 10:30).
제 29장 4절 북방 이스라엘의 쇠퇴와 멸망
(752-722, 왕하 15:13-17:41)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예후 왕가의 여로보암 2세의 이스라엘은 그 역사에 있어서 가장 찬란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스가랴가 살룸에게 죽자 그것은 예후 왕가의 몰락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 성공 못한 살룸 왕(752-722)
살룸은 혁명을 일으켜 예후의 왕가를 무너뜨렸으나 불과 한 달동안 왕위에 있었을 뿐 뒤따라 또 혁명을 일으킨 므나헴에게 죽었다. 열왕기의 기록대로 므나헴은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15:14) 살룸을 죽였다고 했다. 이것은 아마도 므나헴이 옛 도성 디르사를 장악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살룸이 혁명을 일으킨 후 왕권을 빼앗기는 했으나 사마리아에서 멀지 않은 디르사까지도 그 힘이 미치지 못했던 혼란기의 정권이었을 것이다. 살룸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7일 천하로 시므리 다음으로 단명한 임금이었다. 살룸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므나헴은 일찍이 예후 왕가의 최후의 왕 스가랴 밑에 있었던 군대 장관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1) 므나헴 왕가(752-742, 왕하 15:16-22)
므나헴이 혁명을 일으킨 후 특별히 그에게 성문을 열어 환영하지 않은 딥사에서는 잔인하게도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심지어는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고 했다(왕하 8:12; 암 1:13; 호 14:1; 15:16). 이것은 그가 딥사의 거민들에 대하여 얼마나 큰 반감이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므나헴이 만일에 예후 왕가의 최후 군대장관으로 스가랴왕의 충성한 부하이었다면 그를 죽인 살룸을 처치한 후에는 또 다시 여로보암 2세 때의 중요한 영토를 다시 회복하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므나헴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앗수르는 다시금 강한 세력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앗수르 왕 불(745-727)이 스르라엘을 공격해 왔다(왕하 15:19). 이 때에 므나헴 왕은 은 일천 달란트를 조공으로 바쳐 불 왕을 물러가게 했다. 그리고 앗수르를 이용하여 나라를 굳게 하려 했다. 므나헴은 10년 동안 통치하고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었다(왕하 15:22).
(2) 혁명으로 죽은 브가히야 왕(742-740, 왕하 15:23-26)
부왕 므나헴의 대를 이은 후 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린 후 자기의 부하인 군대장관 베가의 반란으로 죽었다. 이로서 이스라엘의 일곱 번째의 왕가도 무너졌다. 이처럼 혁명이 따르는 피의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점점 더 깊은 혼란으로 빠져 들게 되었다.
(3) 앗수르에 굴복한 베가(740-732, 왕하 15:27-31).
브가히야를 죽이고 왕이 된 베가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20년을 치리하였다(왕하 15:27). 그가 혁명에 성공한 것은 반 앗수르 파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하 15장 20절에서 보는 대로 므나헴이 앗수르에 조공을 드리기 위해 큰 부자들에게 많은 은을 토색했다고 했는데 그들은 모두 므나헴과 앗수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전국을 통치한 기간은 8년간이다(740-732). 그의 12년간은 트렌스 요르단의 길르앗 지역만을 다스리면서 므나헴과 대립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브가히야 때에 와서 드디어 반란을 일으켜 브가히야를 죽였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그는 혁명 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통일 왕이 된지 6년(734) 만에 앗스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트렌스 요르단과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왕하 15:29). 그때 그들이 베가를 죽이지 않은 것은 바로 그때 호세아의 반란이 일어나서 그가 그들 대신으로 베가 왕을 죽였기 때문이다(30).
물론 호세아는 앗수를의 보호를 받으며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으나 이스라엘은 결정적으로 앗수를에 완전히 점령되는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이었다.
(4) 최후의 왕 호세아(732-723; 왕하 17:1-6).
베가를 죽이고 호세아가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벌써 그 나라의 영토는 많이 축소되어 있었다. 앗수르는 트렌스 요르단의 길르앗 지구와 또 북방지구인 납달리(갈릴리)를 모두 점령하였다(왕하 15:29). 여로보암 2세 때 볼 수 있었던 이스라엘의 영광은 벌써 완전히 떠난 때이다. 그는 9년을 치리하는 동안 앗수르에 굴복하며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러나 디글랏 빌레셀이 죽자 살만에셀(727-722) 이 호세아를 쳐들어 왔다(왕하 17:3). 할 수 없이 다시 살만에셀에게 굴복하고 조공을 드렸으나 기회를 찾아 그는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 조공을 거절한 것이다(왕하 17:4). 그런데 애굽은 약해져서 호세아를 도울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호세아 왕은 어리석게 애굽의 도움을 믿었던 것이다. 앗수르 살만에셀은 이스라엘을 다시 공격해 호세아를 잡아 둔 후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사마리아에 와서는 그 성을 삼년동안 포위하였다(왕하 17:5).
호세아 9년에 사마리아 성은 함락되었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히니 북방 이스라엘의 왕국의 역사는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이것은 바로 선지자 호세아가 13장 11절에서 j예언한 말씀 곧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의 응답이었다. 그 말씀을 슬프게도 그대로 이루게 된 것이다. 여로보암에게서부터 호세아에게 이르기까지 209년간 왕가로 보면 아홉 가문으로서 19왕이 다스렸던 것이다. 그 중에 5대 왕 시므리는 7일 천하로 끝났고, 15대 왕 살룸은 1개월로 끝났다(왕상 16:15; 왕하 15:13).
그리고 왕가가 바뀔 때마다 피 흘리는 혁명이 있었는데 그 횟수는 8번에 이른다. 제일 오래 동안 다스린 왕가는 예후 왕가가 5대에(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랴)이다. 오므리 왕가는 4대(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여호람)이었다. 여로보암 왕가는(여로보암, 나답) 2대로 마쳤다. 바아사 왕가도(바아사, 엘라) 2대로 마쳤다. 므나헴 왕가도(므나헴, 브가히야) 2대이다. 그밖에 왕들은 자기 대에서 끝났으며 그 때마다 가문이 전멸하는 비극을 보아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엘리야, 엘리사를 보냈고, 또 호세아와 아모스의 두 선지자를 보냈으나 그들은 끝내 듣지 않았다.
(5) 앗수르와 이스라엘
이스라엘 왕국은 드디어 앗수르에 패망하고 말았다. 앗수르와 이스라엘은 정치적 또는 문화적인 여러 면에서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고자 할 때 또한 앗수르의 역사적 재료들을 무시할 수 없다. 앗수르가 최고로 높아졌을 때는 8세기와 7세기 때에는 바벨론과 애굽, 수리아와 팔레스틴과 메데 지역의 전역에 그의 세력을 확장시켰다(북부 메소보다미아의 광야, 서쪽은 수리아와 사막지대, 남쪽은 바벨론, 북쪽은 우라르트요, 동쪽은 파사의 고지로 국경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니느웨와 갈라는 그들의 중요 도성이었다. 인종의 구성은 셈계통의 종족들이었다. 성경에서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한 종족들이다(사 10:5; 7:20; 8:7-8). 그리고 니므롯이란 영걸이 3개의 도시를 건설했는데 그 중에 2개가 ‘니느웨’와 ‘갈라’인데 문명의 발상지이었다(창 10:11).
* 앗수르 문화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앗수르의 문화적 유산으로 볼 때 당시의 찬란한 문화를 넉넉히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상아 조공 품이라든가 금속과 보석류로 되어진 예술품과 많은 석상들은 고대 그 어느 나라의 유물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큰 석상으로 사람의 머리에 날개가 돋친 사자와 황소의 상이 궁전과 그들의 제단 입문에 놓여져 있고 또 궁전 벽에는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것들은 당시의 그들의 생활양식과 풍속들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림 중에는 전쟁장면 속에 사용된 무기와 장비와 전쟁방법들과 결과들까지 그려 놓았다.
앗수르의 마지막 왕인 앗수바니팔은 학문적인 취미를 가졌던 자로서 많은 비문들과 유적들을 남겼으므로 수집하여 궁중에 두어 큰 도서관을 이루었다. 당대의 건축물의 웅대함은 그 궁전 건축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의 종교는 다신교이었고, 성경에 기록된 우상은 담무스(겔 8:14)와 느보와 벨과 니스록과 월신과 이스타르 신 등이 있다. 그들은 전쟁에 승리하면 그 탈취한 성읍에는 그들의 우상의 제단을 세움으로써 승리의 표식을 삼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유다 왕 아하스가 앗수르 왕을 만나려고 다메섹에 갔다가 본을 떠온 그 제단도 앗수를 왕이 다메섹을 점령한 후 세웠던 것이 아닌가? 흔히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고대 사회가 모두 그러하듯이 전쟁에 승리한 후에는 잔인하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앗수바니팔 왕의 남긴 기록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적군 600을 칼에 죽이고, 포로 3천명을 화형에 처했다. 그 중에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았다. 그들의 시체는 산 같이 되었다. 그들의 두목인 클라이를 생포했으나 그의 가죽은 벗겨서 담다무사 성의 성문 위에 널어놓고 그 도성을 불살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잔인한 민족이 비록 고도의 문화와 예술이 있었다 할지라도 길이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나라도 드디어 망하고 말았다.
제 30장 유 다 왕 국
(이스라엘의 분열과 반역 호 4:15; 호 8:14)
기원전 722년 북방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도 남방 유다는 B.C. 586까지 계속되었다. 그 역사적 배경은 남방 유다나 북방 이스라엘이 거의 비슷하다. 계속적인 앗수르의 위협과 남북관계의 충돌과 선지자들의 활동은 선지자들의 활동은 남북간의 차이가 별로 없다. 그리고 남방의 유다와 에돔과의 관계는 마치 북방 이스라엘과 다메섹과의 관계와 비슷하게 되었으나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북방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었으나 남방의 유다는 다윗의 왕조로서 다윗과 그 후손들로 일관되었다. 물론 남방 유다도 일시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가 유다 왕국을 지배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 때에도 숨어 자라던 요아스가 7년 만에 표면에 나타나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유다 왕국의 분류
1. 유다와 이스라엘이 서로 투쟁하던 시대
2. 유다와 이스라엘이 서로 화평하던 시대
3. 유다와 이스라엘이 서로 평행하던 시대
4. 유다만이 홀로 있던 시대
제 1절 남북 투쟁시대의 유다 왕국
(931-8770 B.C. 왕상 14:21-15:24; 대하 10:-36:)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국이 어떻게 분열되었는가는 이미 북방 이스라엘의 건국역사에서 본 바와 같거니와 처음 여로보암이 분열할 당시에는 르호보암을 따른 지파는 오직 유다뿐이었다(왕상 12:20).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가 나라를 세웠는데 그 이후 백성들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레위 자파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고, 남에 있던 베냐민 지파가 북으로 옮겼음)
역사적으로 베냐민은 항상 남방 유다보다도 북방 지파들을 지지하였다. 그런데 지리적 조건 때문에 르호보암의 암력이 작용하였음을 본다. 이렇게 하여 아히야의 예언과 같이 열 지파를 소유한 이스라엘과 두 지파를 소유한 유다로 나누어졌다. 여로보암은 나라를 세운 후 금송아지의 우상을 만들고 또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사모하여 가지 못하도록 절기도 유다와 비슷하게 정했다. 열왕기상 12장 32절에 보면 “8월 곧 그달 15”일로 절기를 정했다고 하였다. 유다의 절기는 초막절이 7월 15일이었다(레 23:39). 레위기에서 보는 대로 유다의 7월은 1년 중 가장 큰 절기의 달이다. 7월 1일은 나팔 절이요 10일은 대 속죄일
이렇게 율법을 어긴 행위는 레위 제사장들의 불평을 샀을 것은 거의 분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은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못하도록 금하고 스스로 제사장을 세울 때 레위 족속들은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왔고 또 다른 지파들 중에서도 여호와를 구하는 진실한 사람들이 레위 족속을 따라 유다로 넘어갔다. 이러한 일로 유다의 르호보암의 세력은 강화되었다(대하 11:13-17).
1. 분열 유다의 첫 왕 르호보암과 애굽의 침략
르호보암(931-913. 왕상 14:21-31)
르호보암은 41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17년간을 다스렸다. 그는 신앙에 있어서 조부 다윗을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솔로몬의 말기의 영향을 받아 문란하도록 우상을 섬겼다. 그가 그처럼 신앙적으로 타락한 것은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본다. 열왕기상 14장 21절과 31절에 보면 르호보암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그 시작과 끝에 거듭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었더라.”의 말씀이 입증한다. 그호보암은 위에 오르면서부터 큰 전쟁들로 시달려야 했다. 먼저 북방 여로보암과의 전쟁이요 다음은 애굽 왕 시삭의 침략이었다. 그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있어서는 계속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나 애굽의 시삭의 침략에는 큰 피해를 입었다(왕상 14:25-26).
먼저 이스라엘과의 사이에서는 계속 전쟁이 있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서 용사 18만을 모집하여 여로보암을 쳐서 남과 북을 통일하려 했으나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금하셨다. 여로보암의 나라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가르쳤다(대하 11:1-4).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은 주로 국경분쟁이었던 것으로 본다. 국경선 위치에 있던 베냐민이 완전히 르호보암 편에 선 것을 보아 르호보암은 그 분쟁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는 전쟁을 위하여 요새지를 건축할 뿐만 아니라 양식과 무기를 언제나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북방 이스라엘을 겨냥한 것보다도 오히려 블레셋과 애굽을 겨냥한 것 인듯하다. 사실 애굽의 침략은 로호보암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다(왕상 14:25, 26).
* 시삭의 시삭의 침략(왕상 14:25-27; 대하 12:2-12)
르호보암 5년에 애굽의 시삭의 예루살렘 침략은 그의 교만을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른 3년 동안은 온 유다가 모두 다윗과 솔로몬의 길을 걸었다(대하 11:17). 북방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도 경건한 자들과 레위 족속들이 힘써 남방유다를 돕고 그들은 더욱 경건한 신앙의 길을 걸었다. 그동안 유다는 강성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대하 11:16, 17). 드디어 시삭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솔로몬을 피하여 간 여로보암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준 왕이었다(왕상 11:40). 시삭은 본래 나일 강 서쪽 지역의 추장의 아들로서 애굽의 22 왕조의 창건자이다. 그의 이스라엘 침략은 925B.C.로서 르호보암 제 5년이었다. 그러니까 르호보암을 공격하기 위해 온 시삭은 솔로몬의 장인인 바로 왕은 아니다(왕상 3:1). 솔로몬의 장인 바로왕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는 애굽의 21 왕조이었다. 만약에 시삭이 동일 인물로 솔로몬의 장인이었다면 여로보암이 피난 갔을 때 사위가 죽이려던 인물을 숨기거나 망명 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삭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은 물론이요 솔로몬 때에 만든 금방패가지 모두 빼앗겼다(왕상 14:26; 대하 12:9). 물론 그것은 르호보암이 시삭에게 조공으로 바친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명확화 한 것은 므깃도에서 발굴된 그의 전승 기념비의 파편에서 확증되었다. 그리고 신전 담벽에 그 때에 점령했던 팔레스틴 지역의 150이 넘는 도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 도성들 중에는 유다의 중앙에 있던 도성 예루살렘을 포함한 이름이 없는 것은 많은 조공을 바쳐 군인들을 물리쳤기 때문으로 본다.
그렇게 함으로 르호보암은 겨우 유다의 독립을 유지했고 예루살렘에서 원수들이 물러가게 했다. 그러나 시삭의 침략으로 인하여 르호보암과 온 유다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함은 다음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들려주신 말씀에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겠다(대하 12:4-8).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때 하나님께서 대가 구원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대강이나마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르호보암은 더 많은 고통을 겪었어야 했을 것이다. 시삭의 침략은 유다의 르호보암뿐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도 많은 손해를 입었음은 시삭의 전승비가 므깃도에 세워졌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2. 여로보암을 이긴 아비야 왕(913-911, 왕상 15:1-8; 대하 13:1-22)
아비야라는 말은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열왕기에는 그 이름이 아비얌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양신은 나의 아버지라는 뜻이 있다. 본명이 아비얌이다. 그런데 얌의 뜻이 바다라는 뜻과 우상이란 뜻이 있다. 아마도 아비야가 왕위에 즉위하면서 아비야로 바꾼 듯 하다. 르호보암이 17년을 다스린 후 아비야가 대신 왕이 되어 3년을 다스렸다. 부왕 르호보암의 죄를 버리지 안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한 등불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입혀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다(왕상 15:4; 왕상 11:13, 36).
그러므로 북방 이스라엘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40만의 군대로 그 갑절이 되는 80만의 여로보암의 군대를 이겼다. 그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50만의 희생자를 내었고 아비야는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의 남쪽 종교 중심지인 벧엘을 점령했고 그 밖에도 몇 성읍과 마을을 빼앗았다(대하 13:19). 아비야는 점점 더 강성하여짐으로 여로보암은 계속 그 앞에서 쫓기는 형편이었으나(대하 13:20- 21)
아비야의 권세도 길이 계속되지 못했다.
그 아들 아사 때에 남방 유다는 이스라엘의 바아사의 침략을 받아 얼마동안 베냐민 땅 라마를 점령했던 일도 있다. 아비야 왕의 기록에 있어서 역대기의 기록은 열왕기와는 달리 그의 죄악을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전쟁터 에브라임 산지 스마라임 산 위에 서서 북방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했고 범죄한 것을 꾸짖으며 그 무리들에게 외친 그의 설교와(대하 13:4-12) 더불어 그가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승리한 그의 신앙만이 크게 기록되어 있다(대하 13:13-21).
그러나 열왕기의 기록과 같이 그가 죄악된 길을 걸었다면 여로보암을 이긴 후 그 마음이 교만하여진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아비야의 설교는 여로보암이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는 것을 지적하고, 여호보암이 큰 무리이며 우상인 금송아지가 너희와 함께 있으나 그것은 헛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머리가 되어 너희를 공격하니 너희는 싸우지 말아야 됨을 외쳤고, 너희가 형통치 못할 것을 설교하였다. 이는 아비야의 신앙과 인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되는 줄 안다.
3. 개혁자 아사왕의 성공과 실수(911-870, 왕상 15:9-24)
아비야의 아들 아사가 왕위에 올라 41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솔로몬 이후 경건한 왕이었다. 아사왕은 위에 오르면서부터 경건한 신앙의 통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먼저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 일에 착수했다.
아비야의 아들 아사의 기록을 보면(왕상 15:2, 10) 아비야의 모친에 이름이 마아가 이다. 그런데 역대하 15장 16절과 왕상 15장 13절에 보면 아사왕의 모친의 이름도 마아가 이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아비야와 아사는 부자지간이 아니라 형제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아사는 아비야의 아들이라고 했다(왕상 15:8; 대하 14:1).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말하기를 아비야의 3년이라는 짧은 집권 후(왕상 15:2) 그 어머니 마아가는 계속하여 아사왕의 태후로 있었기 때문에(왕상 15:13; 대하 15:16) 그의 어미니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추정할 때 아사왕의 생모는 아마도 일찍 죽었을 것으로 본다.
(1) 그의 개혁 운동(왕상 15:11-15; 대하 14:2-5; 15:8-18).
그의 개혁운동은 궁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출발은 얼마나 엄했던지 그는 그의 어머니의 우상숭배를 꾸짖고 드디어 그의 태후의 위까지도 폐하여 버렸던 것이다.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들을 찍어 불살랐으며(왕상 15:3; 대하 15:16) 열조의 모든 우상들과 남색 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제거해 버렸다. 열왕기상 14장 23절과 24절을 보면 르호보암 때에 벌써 유다가 큰 악을 행하여 이방인들의 풍속을 따라 산위 푸른 나무아래 산당을 두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며 거기에 남색 하는 자가 있었다고 했으니 르호보암의 이러한 행위는 그 어머니(솔로몬의 처 암몬 사람 나아마, 왕상 14:21)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본다.
아사 왕은 선왕이 남긴 그러한 이방 풍속의 모든 제단과 산당을 철저히 없이하는 듯 했으나(대하 14:2, 5) 전부를 없이 하지 않고 남겨둔 것이 있음은 유감이었다(왕상 15: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왕상 15:14)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해 도안 전쟁을 막아 주시고 유다에 평안을 주었다(대상 14:6). 그는 하나님께서 평화를 주심을 감사하면서 나라를 견고케 하기 위하여 성곽을 만들며 성읍들을 건축했다(대하 14:7).
그의 개혁 운동이 활발하게 된 것은 선지자 아사랴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아사 왕이 구스의 침략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 선지자 아사랴는 그를 영접하며 격려하는 말이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15:2)고 하셨고 또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으리라”(15:7)고 하셨다. 이 때는 그가 즉위한 후 15년째 되는 3월이었다.
그는 아사랴의 말씀(대하 15:2-7)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모든 우상을 제거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할 뿐만 아니라 유다와 베냐민 지파들에게 성회를 선포하고 여호와의 언약을 새롭게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때의 이러한 종교적인 개혁과 신앙의 부흥은 북방 이스라엘까지도 크게 영향을 미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지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사 왕에게 로 돌아왔다(15:8-9).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의 성회에 모여 소 칠백과 양 칠천의 번제를 드리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을 새롭게 했던 것이다(대하 15:12). 온 백성들은 이에 호응하여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며 여호와께 맹세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했다(대하 15:13-15). 참으로 아사왕의 개혁 운동은 분열된 유다에 새로운 신앙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2) 애굽 및 구스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대하 14:9-15)
아사왕은 41년의 통치 기간 중 두 번에 걸친 전쟁을 했다. 구스 사람 세라가 지도하는 애굽 군과 이스라엘 바아사 왕과의 전쟁이다. 세라는 군사 100만이요 병거 300승에 아사왕은 군대 58만에 비하면 능히 대항할 수 없는 강한 병력이었다. 이 때 아사왕은 하나님께 기도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아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 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대하 14:11). 애절한 호소로 기도한 아사왕은 전쟁에서 크게 승리했다. 블레셋 땅인 그랄까지 쫓아가서 많은 전리품을 얻을 뿐만 아니라 블레셋의 모든 성읍들의 백성들을 떨게 했고, 또 그 모든 성읍들을 점령했다(대하 14:13-15).
(3) 이스라엘과의 전쟁과 하나님의 책망(왕상 15:16-22; 대하 16:1-10).
전쟁에 승리한 후 아사왕은 하나님을 찾는 믿음이 식어졌다. 아사 왕 16년에 바아사 왕이 유다를 공격해 왔다(대하 16:1). 대하 16장 1절에 아사 왕 36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오라왔다고 했는데 여기 아사 왕 36년은 즉위 연대가 아니다. 왕상 16장 8절과 10절에 보면 아사 왕 26년에 바아사는 죽었다.
그러므로 대하 15장 19절에 “이 때부터 아사 왕 삼십 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라고 말했다. 아사 왕 35년은 남방 유다의 시각연대부터 계산한 연수라고 많은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라의 전쟁을 이긴 해는 아사 왕 15년이다(대하 15:10). 따라서 역대하 16장 1절의 아사 왕 36년은 남방 유다의 시작부터 36년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사 왕 즉위 후 16년이 된다.
그는 베냐민 땅 라마를 점령하고 거기에 성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유다 왕 아사에게 연락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대하 16:1; 참고 성구 15:9). 라마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아사 왕이 다메섹 왕 벤하닷의 원병을 청원했을 때 다메섹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북방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바아사는 드디어 북방의 도성들을 방비하기 위하여 라마에서 철군했다. 라마 성을 건축하던 모든 자료들을 아사 왕은 게바와 미스마의 두 성을 건축했다(대하 16:6;). 아사 왕은 자기의 정책이 매우 지혜로웠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선지나 하나니가 그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왕은 그를 크게 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하나니의 책망은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왕을 의지하였다는 것과 또 그것은 아람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대하 16:7). 하나니는 다메섹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싸웠더라면 그는 이스라엘의 바아사를 이길 뿐 아니라 다메섹까지도 주관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만 기회를 놓쳤다는 뜻이었다.
선견자 하나니는 아사 왕에게 과거 세라와의 전쟁에서 어떻게 도우신 하나님인가를 회상케 하면서(대하 16:8-9) 이제 왕은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했던 것이다. 아사 왕은 크게 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학대하였다(대하 16:10). 이 때 하나님의 징계로 발에 병이 들어 중할 때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다(대하 16:12). 이는 의원을 찾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보다 사람을 더 의지했다는 말이다. 그가 2년 후 죽었으나 41년간의 긴 세월을 통치했다.
제 30장 유 다 왕 국
(이스라엘의 분열과 반역 호 4:15; 호 8:14)
기원전 722년 북방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도 남방 유다는 B.C. 586까지 계속되었다. 그 역사적 배경은 남방 유다나 북방 이스라엘이 거의 비슷하다. 계속적인 앗수르의 위협과 남북관계의 충돌과 선지자들의 활동은 선지자들의 활동은 남북간의 차이가 별로 없다. 그리고 남방의 유다와 에돔과의 관계는 마치 북방 이스라엘과 다메섹과의 관계와 비슷하게 되었으나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북방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었으나 남방의 유다는 다윗의 왕조로서 다윗과 그 후손들로 일관되었다. 물론 남방 유다도 일시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가 유다 왕국을 지배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 때에도 숨어 자라던 요아스가 7년 만에 표면에 나타나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유다 왕국의 분류
1. 유다와 이스라엘이 서로 투쟁하던 시대
2. 유다와 이스라엘이 서로 화평하던 시대
3. 유다와 이스라엘이 서로 평행하던 시대
4. 유다만이 홀로 있던 시대
제 1절 남북 투쟁시대의 유다 왕국
(931-8770 B.C. 왕상 14:21-15:24; 대하 10:-36:)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국이 어떻게 분열되었는가는 이미 북방 이스라엘의 건국역사에서 본 바와 같거니와 처음 여로보암이 분열할 당시에는 르호보암을 따른 지파는 오직 유다뿐이었다(왕상 12:20).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가 나라를 세웠는데 그 이후 백성들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레위 자파가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고, 남에 있던 베냐민 지파가 북으로 옮겼음)
역사적으로 베냐민은 항상 남방 유다보다도 북방 지파들을 지지하였다. 그런데 지리적 조건 때문에 르호보암의 암력이 작용하였음을 본다. 이렇게 하여 아히야의 예언과 같이 열 지파를 소유한 이스라엘과 두 지파를 소유한 유다로 나누어졌다. 여로보암은 나라를 세운 후 금송아지의 우상을 만들고 또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사모하여 가지 못하도록 절기도 유다와 비슷하게 정했다. 열왕기상 12장 32절에 보면 “8월 곧 그달 15”일로 절기를 정했다고 하였다. 유다의 절기는 초막절이 7월 15일이었다(레 23:39). 레위기에서 보는 대로 유다의 7월은 1년 중 가장 큰 절기의 달이다. 7월 1일은 나팔 절이요 10일은 대 속죄일
이렇게 율법을 어긴 행위는 레위 제사장들의 불평을 샀을 것은 거의 분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은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못하도록 금하고 스스로 제사장을 세울 때 레위 족속들은 르호보암에게로 돌아왔고 또 다른 지파들 중에서도 여호와를 구하는 진실한 사람들이 레위 족속을 따라 유다로 넘어갔다. 이러한 일로 유다의 르호보암의 세력은 강화되었다(대하 11:13-17).
1. 분열 유다의 첫 왕 르호보암과 애굽의 침략
르호보암(931-913. 왕상 14:21-31)
르호보암은 41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17년간을 다스렸다. 그는 신앙에 있어서 조부 다윗을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솔로몬의 말기의 영향을 받아 문란하도록 우상을 섬겼다. 그가 그처럼 신앙적으로 타락한 것은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본다. 열왕기상 14장 21절과 31절에 보면 르호보암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그 시작과 끝에 거듭 “그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라 암몬 사람이었더라.”의 말씀이 입증한다. 그호보암은 위에 오르면서부터 큰 전쟁들로 시달려야 했다. 먼저 북방 여로보암과의 전쟁이요 다음은 애굽 왕 시삭의 침략이었다. 그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있어서는 계속 주도권을 잡고 있었으나 애굽의 시삭의 침략에는 큰 피해를 입었다(왕상 14:25-26).
먼저 이스라엘과의 사이에서는 계속 전쟁이 있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서 용사 18만을 모집하여 여로보암을 쳐서 남과 북을 통일하려 했으나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금하셨다. 여로보암의 나라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가르쳤다(대하 11:1-4).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은 주로 국경분쟁이었던 것으로 본다. 국경선 위치에 있던 베냐민이 완전히 르호보암 편에 선 것을 보아 르호보암은 그 분쟁에 있어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는 전쟁을 위하여 요새지를 건축할 뿐만 아니라 양식과 무기를 언제나 갖추고 있었다. 그것은 북방 이스라엘을 겨냥한 것보다도 오히려 블레셋과 애굽을 겨냥한 것 인듯하다. 사실 애굽의 침략은 로호보암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다(왕상 14:25, 26).
* 시삭의 시삭의 침략(왕상 14:25-27; 대하 12:2-12)
르호보암 5년에 애굽의 시삭의 예루살렘 침략은 그의 교만을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이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른 3년 동안은 온 유다가 모두 다윗과 솔로몬의 길을 걸었다(대하 11:17). 북방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도 경건한 자들과 레위 족속들이 힘써 남방유다를 돕고 그들은 더욱 경건한 신앙의 길을 걸었다. 그동안 유다는 강성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3년을 넘기지 못했다(대하 11:16, 17). 드디어 시삭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솔로몬을 피하여 간 여로보암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준 왕이었다(왕상 11:40). 시삭은 본래 나일 강 서쪽 지역의 추장의 아들로서 애굽의 22 왕조의 창건자이다. 그의 이스라엘 침략은 925B.C.로서 르호보암 제 5년이었다. 그러니까 르호보암을 공격하기 위해 온 시삭은 솔로몬의 장인인 바로 왕은 아니다(왕상 3:1). 솔로몬의 장인 바로왕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는 애굽의 21 왕조이었다. 만약에 시삭이 동일 인물로 솔로몬의 장인이었다면 여로보암이 피난 갔을 때 사위가 죽이려던 인물을 숨기거나 망명 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시삭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은 물론이요 솔로몬 때에 만든 금방패가지 모두 빼앗겼다(왕상 14:26; 대하 12:9). 물론 그것은 르호보암이 시삭에게 조공으로 바친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명확화 한 것은 므깃도에서 발굴된 그의 전승 기념비의 파편에서 확증되었다. 그리고 신전 담벽에 그 때에 점령했던 팔레스틴 지역의 150이 넘는 도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 도성들 중에는 유다의 중앙에 있던 도성 예루살렘을 포함한 이름이 없는 것은 많은 조공을 바쳐 군인들을 물리쳤기 때문으로 본다.
그렇게 함으로 르호보암은 겨우 유다의 독립을 유지했고 예루살렘에서 원수들이 물러가게 했다. 그러나 시삭의 침략으로 인하여 르호보암과 온 유다가 얼마나 어려웠던가? 함은 다음 선지자 스마야를 통하여 들려주신 말씀에서 넉넉히 짐작할 수 있겠다(대하 12:4-8).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때 하나님께서 대가 구원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대강이나마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르호보암은 더 많은 고통을 겪었어야 했을 것이다. 시삭의 침략은 유다의 르호보암뿐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도 많은 손해를 입었음은 시삭의 전승비가 므깃도에 세워졌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2. 여로보암을 이긴 아비야 왕(913-911, 왕상 15:1-8; 대하 13:1-22)
아비야라는 말은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열왕기에는 그 이름이 아비얌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양신은 나의 아버지라는 뜻이 있다. 본명이 아비얌이다. 그런데 얌의 뜻이 바다라는 뜻과 우상이란 뜻이 있다. 아마도 아비야가 왕위에 즉위하면서 아비야로 바꾼 듯 하다. 르호보암이 17년을 다스린 후 아비야가 대신 왕이 되어 3년을 다스렸다. 부왕 르호보암의 죄를 버리지 안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한 등불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입혀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다(왕상 15:4; 왕상 11:13, 36).
그러므로 북방 이스라엘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40만의 군대로 그 갑절이 되는 80만의 여로보암의 군대를 이겼다. 그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50만의 희생자를 내었고 아비야는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의 남쪽 종교 중심지인 벧엘을 점령했고 그 밖에도 몇 성읍과 마을을 빼앗았다(대하 13:19). 아비야는 점점 더 강성하여짐으로 여로보암은 계속 그 앞에서 쫓기는 형편이었으나(대하 13:20- 21)
아비야의 권세도 길이 계속되지 못했다.
그 아들 아사 때에 남방 유다는 이스라엘의 바아사의 침략을 받아 얼마동안 베냐민 땅 라마를 점령했던 일도 있다. 아비야 왕의 기록에 있어서 역대기의 기록은 열왕기와는 달리 그의 죄악을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전쟁터 에브라임 산지 스마라임 산 위에 서서 북방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했고 범죄한 것을 꾸짖으며 그 무리들에게 외친 그의 설교와(대하 13:4-12) 더불어 그가 어려울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승리한 그의 신앙만이 크게 기록되어 있다(대하 13:13-21).
그러나 열왕기의 기록과 같이 그가 죄악된 길을 걸었다면 여로보암을 이긴 후 그 마음이 교만하여진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아비야의 설교는 여로보암이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는 것을 지적하고, 여호보암이 큰 무리이며 우상인 금송아지가 너희와 함께 있으나 그것은 헛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머리가 되어 너희를 공격하니 너희는 싸우지 말아야 됨을 외쳤고, 너희가 형통치 못할 것을 설교하였다. 이는 아비야의 신앙과 인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되는 줄 안다.
3. 개혁자 아사왕의 성공과 실수(911-870, 왕상 15:9-24)
아비야의 아들 아사가 왕위에 올라 41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솔로몬 이후 경건한 왕이었다. 아사왕은 위에 오르면서부터 경건한 신앙의 통치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먼저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 일에 착수했다.
아비야의 아들 아사의 기록을 보면(왕상 15:2, 10) 아비야의 모친에 이름이 마아가 이다. 그런데 역대하 15장 16절과 왕상 15장 13절에 보면 아사왕의 모친의 이름도 마아가 이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아비야와 아사는 부자지간이 아니라 형제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아사는 아비야의 아들이라고 했다(왕상 15:8; 대하 14:1).
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말하기를 아비야의 3년이라는 짧은 집권 후(왕상 15:2) 그 어머니 마아가는 계속하여 아사왕의 태후로 있었기 때문에(왕상 15:13; 대하 15:16) 그의 어미니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추정할 때 아사왕의 생모는 아마도 일찍 죽었을 것으로 본다.
(1) 그의 개혁 운동(왕상 15:11-15; 대하 14:2-5; 15:8-18).
그의 개혁운동은 궁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출발은 얼마나 엄했던지 그는 그의 어머니의 우상숭배를 꾸짖고 드디어 그의 태후의 위까지도 폐하여 버렸던 것이다.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들을 찍어 불살랐으며(왕상 15:3; 대하 15:16) 열조의 모든 우상들과 남색 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제거해 버렸다. 열왕기상 14장 23절과 24절을 보면 르호보암 때에 벌써 유다가 큰 악을 행하여 이방인들의 풍속을 따라 산위 푸른 나무아래 산당을 두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며 거기에 남색 하는 자가 있었다고 했으니 르호보암의 이러한 행위는 그 어머니(솔로몬의 처 암몬 사람 나아마, 왕상 14:21)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본다.
아사 왕은 선왕이 남긴 그러한 이방 풍속의 모든 제단과 산당을 철저히 없이하는 듯 했으나(대하 14:2, 5) 전부를 없이 하지 않고 남겨둔 것이 있음은 유감이었다(왕상 15: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왕상 15:14)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해 도안 전쟁을 막아 주시고 유다에 평안을 주었다(대상 14:6). 그는 하나님께서 평화를 주심을 감사하면서 나라를 견고케 하기 위하여 성곽을 만들며 성읍들을 건축했다(대하 14:7).
그의 개혁 운동이 활발하게 된 것은 선지자 아사랴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아사 왕이 구스의 침략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 선지자 아사랴는 그를 영접하며 격려하는 말이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15:2)고 하셨고 또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으리라”(15:7)고 하셨다. 이 때는 그가 즉위한 후 15년째 되는 3월이었다.
그는 아사랴의 말씀(대하 15:2-7)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모든 우상을 제거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할 뿐만 아니라 유다와 베냐민 지파들에게 성회를 선포하고 여호와의 언약을 새롭게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때의 이러한 종교적인 개혁과 신앙의 부흥은 북방 이스라엘까지도 크게 영향을 미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지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사 왕에게 로 돌아왔다(15:8-9).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의 성회에 모여 소 칠백과 양 칠천의 번제를 드리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을 새롭게 했던 것이다(대하 15:12). 온 백성들은 이에 호응하여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며 여호와께 맹세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했다(대하 15:13-15). 참으로 아사왕의 개혁 운동은 분열된 유다에 새로운 신앙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2) 애굽 및 구스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대하 14:9-15)
아사왕은 41년의 통치 기간 중 두 번에 걸친 전쟁을 했다. 구스 사람 세라가 지도하는 애굽 군과 이스라엘 바아사 왕과의 전쟁이다. 세라는 군사 100만이요 병거 300승에 아사왕은 군대 58만에 비하면 능히 대항할 수 없는 강한 병력이었다. 이 때 아사왕은 하나님께 기도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아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 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대하 14:11). 애절한 호소로 기도한 아사왕은 전쟁에서 크게 승리했다. 블레셋 땅인 그랄까지 쫓아가서 많은 전리품을 얻을 뿐만 아니라 블레셋의 모든 성읍들의 백성들을 떨게 했고, 또 그 모든 성읍들을 점령했다(대하 14:13-15).
(3) 이스라엘과의 전쟁과 하나님의 책망(왕상 15:16-22; 대하 16:1-10).
전쟁에 승리한 후 아사왕은 하나님을 찾는 믿음이 식어졌다. 아사 왕 16년에 바아사 왕이 유다를 공격해 왔다(대하 16:1). 대하 16장 1절에 아사 왕 36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오라왔다고 했는데 여기 아사 왕 36년은 즉위 연대가 아니다. 왕상 16장 8절과 10절에 보면 아사 왕 26년에 바아사는 죽었다.
그러므로 대하 15장 19절에 “이 때부터 아사 왕 삼십 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라고 말했다. 아사 왕 35년은 남방 유다의 시각연대부터 계산한 연수라고 많은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라의 전쟁을 이긴 해는 아사 왕 15년이다(대하 15:10). 따라서 역대하 16장 1절의 아사 왕 36년은 남방 유다의 시작부터 36년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사 왕 즉위 후 16년이 된다.
그는 베냐민 땅 라마를 점령하고 거기에 성을 건축하여 백성들이 유다 왕 아사에게 연락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대하 16:1; 참고 성구 15:9). 라마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아사 왕이 다메섹 왕 벤하닷의 원병을 청원했을 때 다메섹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북방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바아사는 드디어 북방의 도성들을 방비하기 위하여 라마에서 철군했다. 라마 성을 건축하던 모든 자료들을 아사 왕은 게바와 미스마의 두 성을 건축했다(대하 16:6;). 아사 왕은 자기의 정책이 매우 지혜로웠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선지나 하나니가 그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왕은 그를 크게 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하나니의 책망은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왕을 의지하였다는 것과 또 그것은 아람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대하 16:7). 하나니는 다메섹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싸웠더라면 그는 이스라엘의 바아사를 이길 뿐 아니라 다메섹까지도 주관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만 기회를 놓쳤다는 뜻이었다.
선견자 하나니는 아사 왕에게 과거 세라와의 전쟁에서 어떻게 도우신 하나님인가를 회상케 하면서(대하 16:8-9) 이제 왕은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했던 것이다. 아사 왕은 크게 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학대하였다(대하 16:10). 이 때 하나님의 징계로 발에 병이 들어 중할 때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다(대하 16:12). 이는 의원을 찾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보다 사람을 더 의지했다는 말이다. 그가 2년 후 죽었으나 41년간의 긴 세월을 통치했다.
제 30장 2절 남북 동맹시대의 유다 왕국
(873-835 B.C. 왕상 22:41-50; 왕하 8:16-29; 11:1-16; 대하 17:1-23:15)
아사왕의 아들 여호사밧이 위에 오르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다. 열왕기상 22장 44절에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으로 더불어 평화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동시대 이스라엘 왕들은 아합을 위시하여 아하시야와 여호람이었다.
1. 여호사밧의 경건과 잘못된 화해 정책 (왕상 22:41-50; 대하 17:1-20)
여호사밧이 아사의 뒤를 이어 25년간 유다를 통치했다. 그는 왕이 된 처음부터 부왕 아사가 시작한 개혁운동을 계속했다. 그는 경건한 인물로서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려했다(대하 17: 6; 19:3). 그는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을 제하고 또 부왕이 미쳐 다 숙청하지 못한 남색하는 자를 쫓아냈다(왕상 22:46). 그뿐아니라 그의 개혁은 좀더 철저한 데가 있었다. 그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을 뽑고 또 방백들을 뽑아 각 성읍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에게 율법 책을 가르치게 했다(대하 17:7-9).
그는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게 하는 것으로 첫 사명을 삼게 했던 것이다. 그가 분명히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하여 먼저 율법 책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호사밧의 경건한 신앙은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 더욱 확실히 표현되었다. 이 연합군이 유다를 치기 위하여 엔게디까지 진출했을 때 여호사밧은 그 군대의 많음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였지만 그는 온 백성에게 금식을 공포하고 백성들을 모아 기도했다.
이 때 그는 선지자 야하시엘을 통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고 했고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다(대하 20:15). 그리고 전쟁에 싸울 것이 아니라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했다. 왕은 특별히 노래하는 자들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으로 행하며 찬송을 부르게 했고 그 찬송이 시작될 때에 복병을 두었다가 적군을 치게 했을 때 크게 승리하게 되었다(대하 20:20-23). 그 때의 승리로 전리품을 나르는데 3일이 걸렸다(대하 20:25).
성가대로 전쟁에 이겼다고 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 100만의 군대가 있었다. 아르나에 30만, 여호난에 28만, 아마시야에 20만, 베냐민 지파의 천부장 엘리아다에 20만. 여호사밧 밑에 18만이었다. 그 밖에도 국고 성을 건축하여 국방을 든든히 했다. 이처럼 나라가 견고해지고 부귀와 영광이 극하여졌을 때 그는 북방 이스라엘과 전쟁을 피하려고 아합의 딸 아달랴를 자부로 맞게 되었다(대하 18:1. 2; 왕하 8:18). 그후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은 그 아내 아달랴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으로도 크게 부패해졌다(대하 21:6).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의 연흔은 통하여 밀접한 외교적 화해를 이룬 후에 경제적인 발전의 첫 사업으로 에시연게벨에서(이 지역은 홍해 동북방의 항구로서 여호사밧의 통치권 밑에 들어와 있었다. 열왕기상 22장 47절에서 보는대로 에돔에는 그들의 독립된 왕을 둘 수 없었고 섭정 왕이 다스리게 되었던 때이었다. 역대하 20장 1절 이하의 내용과 같이 모압과 암몬과 에돔의 연합군이 패한 후 여호사밧의 권력은 이처럼 멀리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에돔인들은 다윗 이후 유다의 속국으로 있었으나 애굽의 후원으로 솔로몬 때에 유다에게 반기를 들었고(왕상 11:14-22), 르호보암 때에는 그들의 왕을 가질 수 있도록 독립했으나 여호사밧에게 다시 굴복하게 되었다. 에시연게벨과 오빌에 관해서는 열왕기상 9장 26절로 28절을 참고하자).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의 연혼을 통하여 밀접한 외교적 화해를 이룬 후에 경제적인 발전의 첫 사업으로 에시연게벨에서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배를 짓게 되었다. 다시스와의 무역을 통하여 오빌의 금을 가져오려했던 것이다(대하 20:36; 왕상 22:48). 그는 솔로몬 때의 영화를 꿈꾸었던 것으로 본다. 솔로몬은 다시스와 무역하여 오빌의 금을 실어왔다(왕상 9:26-28; 10:11, 22). 하지만 배의 파선으로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될 것은 벌써 선지자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에게 예언하였다(대하 20:37).
여호사밧은 또한 이스라엘과 군사동맹을 이루었고 아합의 청원을 받아 아람의 벤하닷과의 전쟁에 참예하였으나 길르앗 라못의 전투에서 그는 겨우 구원을 얻어 생명을 건졌고 아합 왕은 전사하였던 것이다(왕상 22:29-33; 대하 18:31). 그는 그후 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의 청원을 받아 모압을 치는 전쟁에 같이 나가게 됐다. 그러나 그때는 7일 동안 물을 얻지 못해 군사와 가축이 죽게 되었을 때 그래도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도록 이스라엘 왕에게 권하여 드디어 엘리사에게 갔다(왕하 3:12).
그 때 선지자 엘리사는 “내가 만일 유다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라.”고 했다. 엘리사의 지시로 개천을 파서 흐르는 물을 얻어 그들은 생명을 구할 뿐 아니라 모압을 크게 이겼다(왕하 3:15-27). 그 때 그 전쟁에 이기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이 악한 이스라엘 왕과 연합하는 것을 크게 슬퍼하셨다. 그러므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선지자가 개입하여 여호사밧을 깨우쳤던 것이다. 앞서 말한 길르앗 라못의 전투에서 돌아왔을 때 미가야 선지는 그 전쟁은 실패로 끝날 것이요, 이스라엘 왕이 죽을 것을 예언하였다(대하 18:19). 여호사밧은 그 때 곧 깨달았어야 했다.
여호사밧이 그 전쟁에서 목숨을 건져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도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의 충고 하기도 했다. 여호사밧은 그 어느 때도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신앙과 정치가 일치하지 못했던 것은 유감이었다. 열왕기하 8:16절에 보면 그가 아직 위에 있는 동안에 그 아들 여호람으로 왕이 되게 했다.
2. 아달랴의 영향 밑에 있던 두 왕, 여호람과 아하시야 (왕하 8:16-29; 9:27-29; 대하 21:1-22:9)
여호사밧은 이스라엘과의 화해를 위하여 아합왕의 딸 아달랴를 자부로 맞아 여호람의 처로 삼게 했다. 이는 목전의 화해는 이루어진 듯 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유다왕국은 큰 혼란에 빠져야 했다.
(1) 여호람 왕(848 B.C. 841. 왕하 8:16-24; 대하 21:)
여호사밧의 뒤를 이은 여호람 왕의 통치 8년간의 행사는 진실로 비극이었다. 그는 부왕과 조부 아사 왕과는 다르게 북방 이스라엘의 아합의 길을 따랐는데 이는 아달랴의 영향이었다(대하 21:6; 왕하 8:18).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그를 완전히 멸하지 않으셨다(대하 21:7). 그가 왕이 된 후 범한 죄는 자기의 형제들을 죽인 것이다.
여호밧은 여호람을 위시하여 7형제의 아들을 두었다. 여호사밧은 다른 아들들에게는 은금과 보물과 견고한 성읍들을 주어 살게 했으나 장남인 그에게는 왕위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을 모조리 죽이고 이스라엘 방백 중 몇 사람도 죽였다고 했다(대하 21:4). 그 이유를 성경은 분명히 말하지 않았으나 아마도 그들은 아합의 길을 따르는 그의 악한 종교정책을 반대했거나 혹은 반대할 수 있는 징조가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대하 21:6).
유다왕국의 잘못된 종교 정책을 위하여 북방 엘리야 선지자가 무서운 형벌을 예고한 편지를 보냈다(대하 21:12-15).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응답되었다. 즉 블레셋과 아라비아는 군대를 일으켜 유다를 쳐서 왕궁의 모든 재물과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했다. 오직 아들 중에는 여호아하스만이 남고 또 여호람 왕 자신은 예언대로 중병이 들어 2년 후에 죽었다(대하 21:16-20). 여호람의 통치기간 중에 나라는 심히 약하여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략과 에돔까지 유다를 배반했고 립나(아야론과 라기스의 중간 위치에 있는 요새의 도성이다)도 배반하여 그 수하에서 벗어났다. 여호람 때 유다의 국세는 약했다(대하 21:8-9; 왕하 8:25-29).
(2) 아하시야 왕(841B.C. 왕하 8:25-29; 9:27-29; 대하22:1-9)
외세로 여호람 왕가는 진멸되고 오직 말째 여호아하스만이 살아 남아서 그가 22세에 왕위에 올랐다(대하 8:26; 대하 22:2). 그가 왕위에 올라 어머니 아달랴의 교도를 받아 완전히 아합의 길을 따르게 되었으며 북방 이스라엘과 긴밀한 교제를 가졌다. 북방 아합의 아들 요람 왕이 아람의 하사엘과의 전쟁이 있었을 때 그는 그를 도우며 길르앗 라못으로 갔다.
그 때 요람은 부상을 입고 이스르엘로 돌아와 있었는데 아하시야는 그의 병문안을 위하여 그를 방문하여 갔다가 반란을 일으킨 예후에게 죽어 아합 왕가의 진멸과 동시에 유다의 아하시야의 왕위도 끝나고 말았다. 이 때에 아하시야를 좇던 유다의 귀족들과 왕족들도 아하시야와 같이 예후의 부하들에게 피살되었으므로 아하시야의 왕가는 아주 약하여져서 더 이상 왕위를 지키기 어려운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대하 22:9).
(3) 북방 이스라엘의 예후의 혁명으로 말미암아 아합 왕가가 무너질 때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남방 유다도 아하시야 왕과 많은 귀족들과 왕족들이 죽었다. 이 때 아하시야의 소식을 들은 아달랴가 일어나 자기 가정의 왕족들의 씨를 전멸하고 스스로 정권을 잡았다.그 때 왕의 누이요 여호람의 딸인 여호사브앗이 아하시야의 어린아들 요아스를 간신히 숨겨 6년간을 키웠다(대하 22:11). 아달랴는 그 어머니 이세벨의 딸이었다.
북방 이스라엘에서 피의 숙청을 일으켰던 이세벨을 따라 그의 딸은 또 남방 유다에서 피의 숙청을 감행한 잔인한 여성이었다. 그는 유다를 암흑기로 만들었고 다윗의 왕조를 말살시키려는 자이었다. 남편 여호람이 왕위에 있을 때도 그를 충동하여 그의 반대세력과 반대에 가능성이 있는 형제들과 귀족들을 무참히 죽이게 했던 여성이었다(대하 21:1-4).
그는 복수심에 가득찬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이었다. 또한 자기가 정권을 잡은 6년 동안에 바알 종교를 부흥시키려 했던 것이다. 만일에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세력이 없었더라면 유다는 분명히 더 종교적인 암흑세계를 당했을 것이다(대하 23:16, 17). 그러나 아달랴는 드디어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으로 유다 국민들의 칼에 죽었다(대하 23:21).
그가 죽고 어린 요아스가 왕위에 올라 6년간의 암흑시대는 끝났다. 이 때 이후 또한 남방 유다의 북방 이스라엘 왕국과의 긴밀한 연락은 끊어지고 얼마동안 그 두 관계는 평행을 이루어 나가게 되었다.
제 30장 3절 남북 평행시대의 유다 왕국
(835-722 B.C. 왕하 12:-17장까지. 대하 23:16-28:27)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 있어서는 예후의 반란의 성공으로 아합의 왕가는 무너지고 남쪽 유다에서는 아합의 딸 아달랴의 죽음과 여호야다의 반정의 성공으로 남과 북의 밀접한 관계는 무너졌다. 그 후 유다와 이스라엘의 두 분열 왕국은 서로 평행을 이루는 시대가 되었다. 남쪽 유다 왕국에 있어서의 아달랴의 집권은 다윗 계통의 왕계가 무너질 위기이었다. 그러나 여호야다의 반정은 유다 다윗 왕통을 다시 일으켰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과 요아스 왕 (왕하 11:4-12; 대하 23:1 - 24:7)
(1) 반정의 성공과 왕의 즉위(대하 23:1-21; 왕하 11:4-21)
아하시야 왕의 누이 여호사브앗의 손에서 숨어 자란 어린 왕자 요아스가 7세에 제사장 여호야다는 오랫동안 계획하던 반정을 일으켰다. 아달랴의 정책에 크게 불안해하던 이스라엘의 족장들과 군대의 지휘관들과 레위 사람들은 여호야다에게 호응했다. 드디어 치밀한 계획 밑에(대하 23:4-10) 어린 왕자를 무리 앞에 인도하여 면류관을 씌우고 율법 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요아스 왕 만세를 부르게 했다. 군종의 찬송소리와 나팔소리에 놀란 아달랴는 “반역”이라고 외치며 도망했으나 군대들의 손에 피살되었다. 여호야다는 유다의 모든 백성들과 굳게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리라고 서로 맹세했다. 온 국민이 스스로 일어나 바알의 단들을 훼파하고 우상을 깨뜨리며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였다.
(2) 요아스 왕의 성전 수리(대하 24:4-14; 왕하 12:4-16).
여러해 후 이제 요아스 왕은 스스로 정책을 결정할 때가 되었을 때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아달랴 때에 성전을 파괴했고, 모든 성물을 바알에게 드렸기 때문이다. 그가 이제는 오히려 제사장 여호야다를 격려하여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온 백성들에게 연보를 거두게 했다. 성전의 수리는 완성되었고 모든 성물들은 옛날 같이 정돈되었다. 매일 드리는 번제도 회복되고, 전국에 걸쳐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 부흥은 편만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아스 왕은 그러한 아름다운 행적은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가 죽은 후 사태는 달라졌던 것이다.
(3) 요아스 왕의 타락과 징벌(대하 24:15-27; 왕하 12:17-21).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그의 정책이 바꾸게 되었다. 즉 여호야다가 죽은 후 유다의 방백들이 찾아와서 아세라 목상을 세우며 섬길 것을 청원했을 때(대하 24:17) 그 것을 허락했다. 그러므로 다시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게 되었다. 요아스 왕은 얼마나 크게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그것을 경고하는 선지자 스가랴를 돌로 쳐 죽이도록 허락했다. 그렇게 죽은 선지자 스가랴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이었다(대하 24:20, 22). 요아스는 그렇게도 큰 도움을 입은 여호야다의 은혜를 생각지 못한 후 죄를 지은 것이었다. 스가랴는 죽을 때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대하 24:22)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왕을 징계하기 위하여 그가 죽은 1년 후 다메섹 왕 하사엘을 일으켜 유다를 치게 했다. 그 때에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 왕궁의 곡간의 금을 다 거두어 아람 왕 하사엘에게 주어 그로 예루살렘을 떠나게 했으나(왕하 12:18) 그 때 많은 방백들이 죽었고(대하 24:23) 요아스 왕 자신도 크게 부상을 입었다(대하 24:25).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드디어 그의 부하들의 반란으로 요아스 왕은 죽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40년이었다(대하 24:25; 24:1).
2. 아마샤왕의 승리와 실패(796-767 B.C. 왕하 14:1-20)
요아스 왕이 피살된 후 그 아들 아마샤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상당히 조직력을 가진 행정수완이 있었던 것 같다. 요아스 왕 말기부터 혼란하여지고 약하여진 유다왕국을 정리하여 나라를 굳게 한 후 그는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처형했다(대하 25:3). 그 후 국방을 든든히 하고 에돔을 공격하기 위하여 30만의 군대를 조직하고 이스라엘에서 10만의 용병을 고용했다(대하 25:5, 6).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용병을 기뻐하시지 않은 것을 충고했다. 그 충고를 따라 왕은 그들을 돌려보냈으나(대하 25:9, 10)
용병들이 불평을 품고 유다의 성읍들을 역습하여 와서 3천의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노략했다(대하 25:13). 그러나 아마샤 왕은 끝까지 계획대로 에돔을 공격했다. 본래 에돔은 여호사밧 때에 유다의 통치 밑에 있다가 그 아들 여호람 때에는 유다를 배반하여 독립하니 그 에돔을 다시 정복하려 한 것은 홍해로 연결되는 남방의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전쟁은 크게 승리했다. 아마샤 왕은 개선 후 돌아왔을 때 에돔의 우상을 가져다가 자식의 신으로 세우고 경배하며 분향했다(대하 25:14).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보시고 선지자를 통행 충고하실 때 그 우상이 “자기 백성을 왕의 손에서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거늘 왕은 어찌하여 그 신들에게 구하나이까”(대하 25:15). 했으나 오히려 왕은 그를 듣지 않을뿐더러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16)고 그를 크게 꾸짖었다. 이는 용병을 보냄과 그 용병들이 입힌 피해가 선지자 때문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그는 이제 또 이스라엘에게 화살을 돌렸다(대하 25:17). 그러니까 이스라엘 용병들에게 피해를 입은 보복으로 볼 수 있다. 이 전쟁으로 예루살렘은 훼파되고 성전의 모든 기구는 약탈되고 많은 사람들은 포로가 되었으며 아마샤 왕의 사신도 포로가 되었다(대하 25:22-24). 역대기의 기자는 그의 이러한 비참한 사실을 가리켜 이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 저희가 에돔 신들에게 구하였으므로 대적의 손에 붙이려 하심이라고(대하 25:20) 기록했다. 그는 마침내 자기 백성들의 모반을 받아 피살되어 그의 재위 29년은 끝나고 그의 아들 웃시야가 대신 왕이 되었다.
3. 유다왕국을 부강케 한 웃시야 왕(767-739B.C. 왕상 14:21-22).
아마샤 왕의 아들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을 다스렸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또한 많은 경우에 아사랴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유다의 열 왕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유능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그는 사실 유다 왕국을 부강한 민족국가로 일으킨 강력한 수완의 왕이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을 크게 부강케 했던 여로보암 2세와 대등한 인물이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죽은 후 그는 주변 열국들에게 있어서 여로보암의 위치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부왕 아마샤가 정복한 에돔을 계속 주관하고 홍해 북부 연안에 엘랏엘롯 항구를 건축하여 솔로몬 때와 같이 무역 정책에 힘을 쓰면서 남방을 제압했고 또 동쪽으로는 암몬을 다스리며 그들에게서 조공을 받았고 서쪽으로는 블레셋을 쳐서 여러 성읍을 정복했다. 그 성읍들 중에는 가드가 들어 있었다(대하 26:6). 이처럼 그는 과거의 잃었던 땅들을 다시 탈환하면서 그 세력을 애굽 변방까지 뻗쳤다(대하 26:10).
산업 정책: 엘랏을 건설하여 홍해를 통한 아라비아의 무역을 활성화 시켰고, 거친 땅에는 물웅덩이를 만들어 목축업에 힘을 썼다. 산과 밭에는 농부들과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어 농업에 힘을 썼다(대하 26:10).
국방과 군사 정책: 군대의 조직을 재편성하여 군대 장관 하나냐 밑에 족장들 중 용사 2.600명을 뽑고 수하 30만 7천 5백명의 정예병을 두어 훈련시켰다(대하 26:11-13). 당시의 무기인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맷돌까지도 풍부히 준비하였고, 특별히 또 많은 기술자들을 시켜 기계들을 제조하여 예루살렘 성곽 위에 두어 살과 돌을 쏘는 장치를 만들어 그 소문이 열방에 퍼져 열국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대하 26:14-15).
위와 같이 웃시야 왕이 이처럼 강력해진 데는 외적 요인도 컸다. 이미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의 역사 속에서 본바와 같이 북방의 강력한 세력이었던 다메섹은 신흥 앗수르에 꺾여 약하여진데다가 그 앗수르 마저 북방의 아라랕의 공격을 받아 그것을 방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는 힘을 얻어 나라의 힘을 조직하고 국력을 키워 마침내 중동 아세아의 가장 강력한 나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여로보암 2세가 죽자 북방 이스라엘은 내부의 혼란과 계속되는 혁명으로 왕조가 자주 바뀌면서 심히 약하여졌다. 결과적으로 때를 만난 웃시야 왕은 강하여지게 되었다.
웃시야 왕의 교만: 유다 왕국이 강하여지매 백성들은 물질주의로 기울어져 한없이 사치했고(사 3:18-23) 왕은 심히 교만해졌다. 유다 왕들은 대부분 처음은 좋았으나 그 마지막이 좋지 못했는데 웃시야도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무시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대하 26:21-33). 제사장의 권면과 경고를 오히려 진노로 대하였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의 징계로 문둥병이 들어 별궁에 살면서 그 아들 요담에게 왕국을 관리케 하고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그는 마침내 문둥병으로 죽었다. 웃시야도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동안에는 형통했으나 하나님을 버리고 교만해지며 세상나라의 번영만을 따르게 될 때 그만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다.
4. 앗수르의 발흥과 요담과 아하스왕(왕하 15:32-38; 16:)
전장에서 본바와 같이 웃시야 왕 때는 유다왕국이 강력한 산업국가요 발흥하던 시대이며 솔로몬 시대 이후 가장 부흥했던 시대이었다. 그러나 웃시야가 죽자 당시의 국제 정세도 유다에게는 불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더구나 웃시야 왕의 죽음에 따라서 유다 왕국의 앞날은 더욱 순탄하지 않게 되었다. 이 때는 이사야 선지자가 부름을 받아 나타나던 시대이기도 했다(사 6:1-6).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 계속되는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의 3대에 걸쳐 선교활동을 했던 선지자로서 유다 왕국이 부딪친 그 위기들을 넘기는데 요긴한 선지자의 역할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컸다. 웃시야 왕은 각처에 성읍을 건축하고 주변의 블레셋과 암몬을 눌러 조공을 받으며 농업과 무역 등의 산업을 일으키고 많은 군대를 소유했으나(대하 26:2-15)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백성들은 물질주의에 기울어졌고 왕은 교만해져서 드디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문둥병으로 죽은 후 그 아들 요담이 왕위를 이었다.
1) 유다의 부패를 다스리지 못한 요담 왕(왕하 15:32-38)
요담 왕은 16년간 유다를 치리했으나 그것은 부왕 웃시야 왕의 섭정까지 포함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부왕의 생존시에 벌써 왕정에 동참했던 자이며 부왕의 장점을 본 받아 신앙적으로도 비교적 경건했다. 그리고 부왕에게서 계승한 많은 건축 공사도 완성시켰으며(대하 27:3-4; 왕하 15:3) 부왕이 남겨준 군사력도 계속 유지하였다. 웃시야 왕이 죽은 후에 암몬이 배반하려 했으나 그는 계속 그들을 제압하고 조공을 받았다(대하 27:5, 6).
그러나 이러한 계속적인 번영은 종교적 타락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요담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담은 신앙적으로는 큰 허물이 없었고 하나님 앞에 정도를 걸어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계속 유지한 왕이었다(대하 27:6). 하지만 백성들의 죄악을 다스리는 데는 실패했다(대하 27:2; 왕하 15:35). 웃시야 때부터 사치에 기울어진 백성들은 날마다 부패하되 이사야의 경고에도 돌이키지 않았다.
그 당시 앗수르는 새로운 전략가요 정치가인 디글랏벨레셀 3세의 세력이 커져가는 때이었다. 당시 북쪽에 이스라엘 왕국의 므나헴은 벌써 앗수르이 세력권 안에 있었다(왕하 15:19). 요담 왕 말년에는 다메섹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는 점점 세력이 강하여져서 앗수르를 대항하고자 하여 먼저 그 동맹자인 유다왕 요담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왕하 15:37). 드디어 요담왕이 죽은 후 그 아들 아하스는 이러한 어려운 형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2) 친 앗수르의 아하스 왕(731-715 B.C. 대하28:과 왕하16:11)
아하스는 왕위에 올라 16년을 치리하였으나 그의 통치 기간에 유다 왕국은 심히 약해진다. 북쪽에는 다메섹과 이스라엘의 압력이 계속되었고 서쪽과 남쪽에서는 블레셋과 에돔의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 그때 아하스 왕은 오직 앗수르 만을 의지하는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쳤으나 그 앗수르도 유다를 돕기보다 유다를 괴롭게 했다(대하 28:20, 21). 선지자 이사야는 계속 그에게 그의 정책의 잘못을 권고하기도 했으나 그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사 7:3-20). 그 배경은 아래와 같다.
3) 베가와 르신의 공격(대하 28:5-21; 왕하 16:5-9).
친 앗수르의 정책의 노선을 걷는 아하스 왕을 다메섹 왕 그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는 연합하여 공격해 왔다. 이는 앗수르를 대항하는 연합전선에 유다를 끌어넣으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두 연합군의 공격은 이미 앞에서 본바와 같이 요담 왕 말기에 벌써 있었던 것이다. 이 때 아하스는 크게 당황하여 두 연합군의 공격으로 유다는 드디어 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나 왕은 계속적인 자기를 구원할 자는 오직 앗수르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사야가 권면하였다(사 7:3-9)고 했으나 아하스는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다(사 7:10-13). 이 때 이사야선지는 아하스에게 사람을 괴롭게 하며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했다(사 7:13). 그리고 친 앗수르의 정책이 실패할 것을 선포했으나 종내 그는 듣지 않고 앗수르의 도움으로 다메섹과 이스라엘은 물러갔다. 그러나 유다의 큰 원수는 그 작은 두 나라가 아니라 앗수르인 것을 왕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4) 에돔과 블레셋의 반격(대하 28:16-21)
아하스의 세력이 약화되니 에돔은 유다를 배반하고 공격해 왔다. 본래 에돔은 이미 앞에서 본바와 같이 여호사밧 때에 유다의 통치 밑에 있었으나 여호람 왕 때에 독립했고 후에 아마샤 왕 때에 다시금 유다의 통치 밑에 있었다(대하 25:11, 12, 14). 그러나 이제 다시 에돔은 힘을 내어 유다를 공격해 왔다.
그때 유다 백성들 중에는 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이러한 에돔의 공격은 앞서 본바와 같이 아람 왕 르신이 엘람을 유다에서 빼앗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왕하 16:6). 그 후 또 블레셋이 침략해 왔다. 웃시야 왕 이후 유다에 속하여 있었으나 이제는 유다를 침략하여 여러 성읍까지 점령하게 되었다(대하 28:18). 이처럼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을 받은 아하스 왕은 또 다시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에게 많은 재물을 보내며 구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유익이 없었다(대하 28:16, 20, 21). 앗수르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북쪽으로는 다메섹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서쪽의 블레셋과 남쪽의 에돔까지 그 힘을 뻗치게 되었고 유다도 앗수르의 손에 빠져들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유다는 사면초가의 연약한 신세를 면치 못했다.
5) 아하스의 종교적 타락(대하 28:1-4; 22-25; 왕하 16:2-4)
아하스는 이사야선지가 언명함 같이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 하나님을 괴롭게 한 자이었다. 앞의 4분의 선왕들은 비록 허물이 있었다할지라도 그런대로 여호와의 도를 정직히 걸었다. 그러나 이제 아하스는 그들의 길을 버린 자이다(대하 28:1). 그는 가나안의 모든 우상을 섬기는 일들을 자행했다.
바알 우상을 다시 만들고 어린 자녀를 불살라 드리는 몰록 종교를 따랐고 산당에서 우상을 섬기는 일들과 다메섹과 전쟁에 있어서 앗수르의 도움을 청했고 앗수르 왕은 그의 청원에 따라 다메섹을 치므로 전쟁을 끝낸 일이 있다. 그때 아하스 왕은 앗수르 왕을 만나려 다메섹에 가서 그곳의 우상의 제단을 본떠다가 그것을 예루살렘에 두고 제사를 드릴뿐만 아니라 성전의 놋 제단을 그 우상의 제단 북편에 두었으며 성전의 기명들을 뜯어내고 성전을 폐쇄해버렸다(대속죄일이다. 15일부터 7일 간은 초막절이다.
주중 7일이 안식일이요, 연중 7년은 안식년인 것같이 달 중의 7월은 유다의 큰절기의 달이다. 그런데 북방의 여로보암은 8월을 절기의 달로 삼았다. 하 28:24).
유다 왕국의 단독시대와 징계 후 회복
제 31장 유다 왕국의 단독시대(대하 29:1-36:20)
우리는 4권에서 본바와 같이 앗수르 왕국은 북쪽 이스라엘을 위시하여 다메섹과 블레셋과 에돔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이제는 유다와 대결하게 되었다. 아하스 왕이 남긴 연약한 유다 왕국을 인계한 왕은 그의 아들 히스기야이었다.
제 1절 반 앗수르의 개혁 왕 히스기야
(대하 29:-32:, 왕하 18:1-20:21; 사 36:1-38:22)
부왕 아하스의 남긴 연약한 정권을 인계받은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에서 29년을 치리했다. 역대기의 기자는 그를 가리켜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또한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기는 했으나 그 표준이 다윗과 같다는 말은 없었다고 하였다(왕하 18:5).
성경에서 다윗을 표준삼아 칭찬한 일은 아사 왕(왕상 15:11)과 여호사밧 왕(대하 17:3)과 요시아 왕(왕하 22:2)이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의 선왕이었던 왕 즉 요아스, 아마샤, 웃시아 요담에게도 칭찬을 하기는 했으나 그 표준이 다윗 같다는 말은 아니었다(대하 24:2; 25:2; 26:4; 27:2). 다윗을 들어 칭찬받은 왕히스기야는 모세의 율법에 충성하였고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반 앗수르적이었다. 그는 또 블레셋을 쳐 이겼다.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했던 것이었다(왕하 18:6-8).
1. 그의 개혁 운동(대하 29:3-31:21).
히스기야 왕은 위에 오르자 곧 그의 부왕인 아하스가 폐쇠하여 버렸던(대하 28:l24) 성전의 문을 다시 열었다(29:3). 이를 원년 정월이라고 되어 있음으로 어떤 학자들은 히스기야 왕이 즉위하는 첫해 첫 달에 곧 성전수리를 착수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29장 17절에 “정월 초하루에 성결케 하기를 시작하여 그달 초팔일에 여호와의 낭실에 이르고 또 팔일 동안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 하여 정월 십육일에 이르러 마치고”라고 했으니 즉위식 날로 보기는 바람직하지 않음이다. 또 어떤 학자는 즉위식은 연말에 그리고 성전을 수리했다고 한다. 성전 숙정이 끝난 후 모세의 법을 따라 번제와 화목제의 큰 제사를 드림으로써 유다 왕국이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했다(대하 30:1-27).
이 때에 그는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내어 예루살렘에서 함께 지키기를 청했다(대하 30:1). 북쪽의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온 이스라엘이 크게 기뻐했는데 솔로몬 이후 그러한 일이 없었다고 했다(30:26). 모세의 법대로 7일의 무교절을 지키며 기뻐한 그들이 회의에서 결의하고 7일을 더 지켰다고 했으니 그들의 감격이 얼마나 컸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대하 30:23).
특별히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동포들이 사로잡혀 간 후 처음 느끼는 최대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이 때에 수송아지 1천과 양 7천을 드렸고 방백들 수송아지 1천과 양 1만을 백성들에게 주었다(대하 30:24). 이는 히스기야의 개혁이 얼마나 철저하였던가는 모든 산당을 훼파할 뿐만 아니라 모세 때부터 있어 오던 놋 뱀(민 21:8, 9)까지도 부수고 그것을 놋 조각(느후스단)이라고 했다. 그는 백성들이 그것을 아직까지 우상화시켰음을 탄식했던 것이다.
2. 앗수르 왕 사르곤과 히스기야
히스기야 왕은 처음부터 그의 부왕과는 다르게 반 앗수르 적이었다. 그러나 사마리아를 마지막 점령한 사르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공개적으로 앗수르를 대항하지 않았다. 사르곤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끌어가고 다른 백성들을 그곳에 이주케 한 후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했다. 기록에 의하면 사마리아의 함락 일년 후 하맛과 다메섹에서의 반 앗수르파의 반란이 있었으나 그것도 곧 진압되었다. 그는 또 북쪽에서 오랫동안의 원수였던 아라랏의 세력도 완전히 꺾어버렸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르곤의 블레셋 출정이었다. 기원전 711년에 아스돗 지역의 반란으로 그는 블레셋에 출병하여 그것을 진압했다. 그 때 애굽은 아스돗을 돕기로 약속했었으나 실패했다. 이 때 히스기야 왕은 아스돗을 도와야할 입장에 있었으나 지혜롭게도 그것을 피하여 사르곤의 공격을 면하게 되었던 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권면에 의한 것이었다(사 20:1-6).
3. 산헤립 왕의 침략(대하 32:1-21; 왕하 18:13-19:37; 사 36:-37:)
사르곤의 아들 산헤립이 앗수르의 왕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히스기야는 이때야말로 반 앗수르의 정책을 써야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사르곤 왕이 죽자 앗수르에 예속되어 있던 모든 나라들은 각각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히스기야 왕은 애굽의 후원을 얻어 두로를 위시하여 아스글론과 에글론과 더불어 반 앗수르의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앗수르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국방을 튼튼히 했다(대하 32:5). 특별히 또 그는 앗수르군이 공격해 왔을 때 시내의 물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물을 막아 소위 실로암 굴을 파서 성내로 끌어드려 백성들이 그 물을 사용하도록 한 것은 참으로 큰 공사이었다(대하 32:30; 왕하 20:20). 그러나 그후 앗수르왕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와서 성을 포위했다. 이 때 산헤립은 라기스를 점령하고 그곳에 본부를 두고 예루살렘에는 그 부하 랍사게를 보내어 갖은 모욕을 다하며 히스기야의 항복을 요구했다(대하 32:9-19). 이 때는 참으로 위기이었다.
주변의 모든 나라와 모든 도성들이 다 앗수르에 굴복한 때이었다. 산헤립의 공격은 먼저 베니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 북으로는 시돈을 위시하여 서쪽에는 블레셋 지구의 여러 성들이 함락되었고 남쪽에는 에돔과 동쪽에는 모압도 굴복했다. 히스기야 왕은 라기스의 본부에 있는 산헤립에게 화해를 청하여 은 3백과 금 30달란트를 주게 하고 성전과 왕궁에 있는 은과 금을 다 거두어 보냈다. 이 때에 히스기야 왕이 받은 수욕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왕하 18:13-16; 사 36:4-22). 이 때에 성전에 문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도 모두 벗겨 보냈으니(왕하 18:23) 그 형편을 알만하다.
산헤립의 비문 기록에 나타난 대로 산헤립은 각 도성에 군부대를 파송하여 점령케 했는데 46개의 성들과 촌락이 무너지고 2십만 일백 50명의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고 했고, 또 금은 30달란트요 은은 300달란트라고 되어 있다(18:14). 그밖에도 많은 보석들과 상아상과 의자와 히스기야 왕의 딸들과 후궁들까지 데려 갔다. 그러나 그 많은 예물도 화해의 조건이 되지 못했다. 계속해서 부대의 대군이 와서 항복을 요구했다(왕하 18:17).
이 때에 이사야선지는 말할 수 없이 곤궁해진 왕 히스기야에게 용기를 주어 하나님께 기도케 하고(사 37:6-13, 21-31) 앗수르 왕은 반드시 물러가리라는 것을 예언했다(왕하 19:20-28, 32-33; 사 37:32-3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히스기야와 그 백성들을 보호하실 것을 말했다(왕하 19: 29-31, 34). 그날 밤으로 앗수르의 진에서는 18만 5천이 죽고 산헤립은 떠나갔다. 산헤립은 신하들의 반란으로 죽고 그 아들 에살하돈이 왕이 되었다(왕하 19:37).
히스기야와 유다 왕국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었다. 북방의 이스라엘 왕국은 그들의 최후 선지자였던 호세아와 아모스를 배척함으로(암 6:12, 13) 망하였으나 남방 왕국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있어서 왕 스스로가 선지자에게 기도를 부탁하며(왕하 19:4) 또 자기 자신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하는 신앙을 나타내 보임으로(대하 32:26; 왕하 19:14이하)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었다.
4. 히스기야의 병과 바벨론왕의 사신(대하 32:22-31; 사38-39).
히스기야 왕의 역사에 있어서 잊지 못할 두개의 특별한 사건이 있다. 하나는 그가 중한 병으로 죽게 되었던 일과 또 다른 하나는 병이 치유된 후에 바벨론 왕의 사신의 방문이다.
* 히스기야의 병 : 그가 병난 것은 앗수르의 군대가 물러간 후가 아니라 오히려 전쟁 중에 되어진 일이다. 그의 간절한 회개와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15년의 생명의 연장과 더불어 앗수르의 손에서의 구원을 약속하셨다(왕하 20:6).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의 확실한 징표로서 일영표가 10도를 뒤로 물러가는 이적을 보이시기도 했다(왕하 20:9-11).
이사야 38장에는 그의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38장 3절에 보면 히스기야 왕은 심히 통곡했음을 본다. 그의 그러한 애통은 앗수르의 공격 중에 죽음으로 나라의 운명을 생각한 때문일 것이요, 또 하나는 그에게 그 때까지 왕위를 계승시킬 아들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들 므낫세는 그의 병이 나은 후에 얻은 아들이다. 그는 왕위에 오를 때에 12세였기 때문이다(왕하 21:1).
바벨론왕의 사신들의 내방: 히스기야 왕이 나은 후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위문의 사신들을 보냈다. 그 때 앗수르의 침략으로 몹시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때에 바벨론 왕은 유다와의 동맹을 청하여 앗수르를 대항코자 하였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벌써 유다는 앗수르를 이긴 나라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히스기야는 서쪽에서 바벨론은 동쪽에서 싸운다면 넉넉히 앗수르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사신들은 예물을 가지고 히스기야 왕을 방문했고 그들의 방문 성과가 어떠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그때 히스기야는 그들에게 군대 무기고와 군기의 보물을 공개하였고 그의 부강함을 자랑했다(왕하 20:12, 13). 그후 선지자 이사야의 책망을 받았는데 후일에 유다가 반드시 바벨론에게 망할 것을 예언한 것도 바로 그때이었다(왕하 20:16-18).
히스기야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원수가 앗수르요, 결코 바벨론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벨론은 그에게 진정한 동지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친절을 베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실수는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곧 그의 교만이었다고 했다(대하 32:25). 즉 그는 군기와 무장을 자랑하며 은과 금의 보물을 자랑했다.
그는 세속적인 방법으로 나라의 부강을 과시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는 마음이 미혹되어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보다 세상나라의 부귀를 더 생각하는 시험에 빠졌다. 히스기야의 큰 실수는 나라를 강하게 하는 것은 은과 금과 무기임을 믿는 세속적인 방법을 우선으로 생각한 것이었다(신 17:16이하). 이스라엘의 신정국가에 있어서 언제나 그 흥망의 원리는 분명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충돌 상태에 있었다. 왕이 세상나라를 추구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책망이 있었고 그들의 멸망이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솔로몬 왕의 실패도 거기에 있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부흥케 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 히스기야 왕은 교만의 시험에 빠져 세상 나라를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선지를 통하여 분명히 알려 주었다.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왕하 20:17).
5.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의 활동
이사야의 활동: 유다왕국의 위기에 있어서 이사야의 활동은 지극히 컸다. 그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부터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에 이르는 비상한 때에 선지자의 임무를 감당했다. 이미 앞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선지자 이사야는 아하스 왕 때에는 유다가 앗수르와 서로 동맹하는 행위를 신랄하게 경고하며 반대했다. 또 그는 히스기야 때에 이르러서는 전과는 반대로 유다가 앗수르를 항거하기 위하여 애굽과 동맹하는 행위를 신랄하게 경고하며 반대했다(사 30:1-7, 31:1-3).
왕들이 비록 때로는 앗수르를, 때로는 애굽을 의지할지라도 선지자 이사야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을 돕는 일에 힘을 다했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들의 믿음이 약함을 탄식하면서도 그들의 어려웠던 입장을 아마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선지자 이사야는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어떻게 해서든지 깨닫게 하도록 힘을 썼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거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소명을 받을 때(사 6:)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계시는 그의 메시지의 기간을 이루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심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의 백성과의 간격이 너무도 큰 것임을 그는 탄식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그는 구속 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바라보며 회개할 것을 절규했다(사 1:18). 구속 주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속죄의 큰 역사는 후일 고난의 종의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면서 그 백성들을 격려한 것은 그의 설교의 절정을 이룬다(사 53:).
미가야의 활동: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 선지자로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선지자이다(미가 1:1). 그가 또 어떻게 히스기야 왕을 도운 사실은 후일에 예레미야의 증거에 나타나 있다(렘 26:18, 19). 즉 그의 증거에 의하면 히스기야 왕은 미가 선지의 경고를 받자 크게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회개하였다(렘 26:19).
분명히 히스기야 왕 때에도 북방 이스라엘(여로보암 2세) 못지않게 유다의 지도자들도 부패했다. 공의와 정직은 사라져 갔다(미 3:9-11).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은 북방 이스라엘의 왕들과 백성들은 참 선지자들(호세아 · 아모스)을 배척했다. 그러나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히 회개했다(렘 26:19). 여기서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의 운명은 다르게 전진되었던 것이다.
진실로 히스기야는 위기에 살면서도 나라를 크게 일으킨 왕이었다. 비록 그도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전혀 실수가 없었던 왕은 아니었으나,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유다 왕국은 앗수르를 잘 이겨냈고 나라의 주권을 견고히 했던 것이다. 그가 남긴 이러한 공적으로 유다 왕국은 앗수르가 멸망한 후에도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후에는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의 눈부신 활동이 있었던 것이다.
* 암흑시대의 므낫세와 아몬 왕
히스기야 왕이 죽자 그의 왕위를 계승한 두 왕 므낫세와 아몬은 유다왕국을 부패와 타락의 암흑시대로 끌고 들어간 불행한 지도자들이었다.
1. 므낫세 왕(686-642 B.C. 대하 33:2-10; 왕하 21:2-16).
그가 부왕 히스기야를 이어서 왕이 된 것은 12세부터 이다. 그 후 55년간을 왕위에 있었다고 했으니 그 햇수로 따지면 남과 북의 이스라엘 왕들 중에 최 장기간 왕위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장기간의 통치는 유다왕국으로 심히 부패케 한 때이기도 하다.
2. 므낫세의 종교적 부패(대하 32:2-10)
므낫세 왕은 그의 부왕과는 정반대의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부왕이 헐어버린 신당을 다시 짓고 바알의 단을 다시 세우며 아세라 목상과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했고 몰렉에게 아들을 번제로 드려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을 치고 사술을 행했다(왕하 21:6; 대하 33:6). 그리고 그 정책을 반대하는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리게 한 자이었다(왕하 21:6).
유대인들의 전설대로라면 이사야선지도 그의 손에 죽은 것이 아마도 거의 분명할 것 같다. 이 같은 타락은 하나님께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다고 한다(왕하 21:9). 그가 이렇게까지 타락한 것은 앗수르의 영향이 클 것이다. 고고학적인 증명으로 부왕이 죽은 후 완전히 앗수르에 예속된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를 반대한 세력이 선지자들이고 이를 단행했을 것이다. 므낫세는 앗수르의 제도와 종교와 풍속을 따름으로 앗수르의 호의를 얻으려 함이다.
3. 하나님의 징계와 그의 회개(대하 33:11-20).
이제 므낫세 그 개인에게 우선 무서운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다. 그는 쇠사슬로 결박되고 갈고리에 꿰워 잡혀가는 비참한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섬기던 앗수르의 왕에게 그런 모욕을 당했던 것이다. 역대하 33장 11절에 므낫세 왕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에 앗수르군은 바벨론을 점령하고 그 본부를 수산에 두었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얼마동안 포로생활을 한 것으로 본다. 돌아올 때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고 섬길 것을 서약하고 유다로 돌아왔다.
그후 크게 겸비하여 기도했고 모든 우상을 물리쳤으며 여호와의 단을 중수하고 백성들로 여호와를 섬길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대하 33:12-19). 가경에는 “므낫세의 기도”라는 책이 있다 권위와 가치는 인정하지 않지만 가경이 기록될 만큼 그의 회개의 사건은 깊은 전설로 되어 있었던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의 회개의 열매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후 그 아들 아몬이 왕위에 올랐다.
4. 아몬 왕(642-640 B. C. 대하 33:21-25; 왕하 21:19-26).
아몬은 므낫세의 위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2년간의 그의 정치는 그 부왕의 타락한 정치의 반복에 불과하다. 그 부왕은 그래도 그 말기에는 우상을 제거에 힘을 썼으나 아몬은 그것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 이처럼 므낫세 회개가 그 아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면 그것 역시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몬은 마침내 궁중의 신하들의 반역으로 죽었다. 그를 죽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국민들은 그들의 반역을 옳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일어나 왕을 죽인 자들을 다 잡아 처형하고 여덟 살 밖에 되지 않은 그 아들, 어린 요시아로 대신하여 왕을 삼았다. 그러나 그 때의 주변 국가들의 정치정세는 문자 그대로 격동하는 시대이었고 국제간의 권력의 재편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때이었다. 특별히 그는 신흥 바벨론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는 때다. 그러므로 이 때 과거에 서로 두각을 다투던 앗수르와 애굽은 오히려 연합하여 신흥세력을 꺾으려고 힘썼다.
제 31장 2절 신흥 바벨론과 유다 왕국의 멸망(640-586 B. C.).
요시아 왕을 계기로 하여 유다 왕국은 드디어 그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앗수르의 세력도 이제는 매우 약화된 때이다. 앗수바니팔 왕의 뒤를 이은 왕들은 그렇게 유능하지도 못했다. 앗수바니팔이 죽은 후 앗수르에서는 그의 아들인 앗스르에틸리라니가 왕위에 올랐으나 다시 얼마 후 제 2왕자인 신솨르이쉬쿤이 그 위를 계승했다. 그들은 나라의 문제성을 그대로 인계 할뿐 그것들을 해결할 능력은 없었다.
니느웨가 멸망할 때까지 앗수르는 점점 나약해졌다. 그때를 이용하여 신흥 바벨론이 일어나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고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세력이 활발하여지기는 요시아 왕 말기부터이었다. 그러므로 요시아 왕 때에는 앗수르의 힘은 약화되었고 아직 바벨론은 잠재세력으로만 강화되어 있었을 뿐, 유다왕국은 평화로운 중에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 말하겠거니와 요시와 왕의 뒤를 이어 여호아하스의 여호야김과 여호야긴과 시드기야 등등의 모든 왕들은 바벨론의 세력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히고 유다 왕국은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시아 왕 때만은 평온한 중에서 유다 왕국을 최후로 크게 발전케 했고 여호와의 종교를 마지막으로 크게 부흥케 했다. 아마도 유다 백성들이 먼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 가는 비극을 당하기에 앞서 그들에게는 마지막으로 그 같은 신앙적인 부흥이 필요하였을지 모른다.
1. 유다 왕국 최후의 개혁 왕 요시야(640-609 B. C.)
요시야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아몬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물론 그 배후에는 경건한 신앙의 인물들이 있어서 요시야 왕을 충성으로 섬겼다. 역대하 34장 9절 이하에 나타난 대로 대제사장 힐기야와 서기관 사반을 위시하여 여러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고, 선지자 스바냐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별히 스바냐선지는 히스기야 왕의 현손이었으니 요시야 왕과는 숙질 관계이었다(스 1:1). 그렇다면 그는 요시야 왕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황족이었다.
그의 감화도 시켰을 것으로 본다. 그의 치리기간 31년은 참으로 크게 부흥하고 발전하던 시기로 유다 왕국 창건 이래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모든 우상을 멸하는 숙청작업에 있어서도 남방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까지의 온 이스라엘 우상을 멸하였다. 요시야 왕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우상까지 멸한 것은 앗수르가 약화되어 명목상으로만 통치하고 있었고, 열왕기 상 13장 2절에 예언되어 있었다(왕하 23:25).
(1)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
요시야가 위에 오른 지 8년 즉 그의 나이 16세 때에 그는 벌써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고, 위에 있은 지 12년 즉, 그의 나이 20세에 예루살렘과 유다와 북방 여러 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상을 정결케 했다 그러한 정화운동을 이루는 데는 무려 6년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대하 34:1-8). 이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개혁운동이었다. 성전 수리에서 발견된 율법 책으로 말미암아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그 책을 그는 서기관에게 주어 그것을 요시아 왕 앞에서 읽게 했고, 왕은 옷을 찢으며(대하 34:19), 온 백성들과 더불어 그는 여호와 앞에 언약을 세워 진정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서약했던 것이다(29-33).
물론 그의 그러한 신앙의 큰 부흥은 성경을 발견하기 전 성전을 수리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율법을 듣게 됨으로 더욱 분명히 열조의 죄를 회개하며 새로운 서약을 하게 되었다. 과거 히스기야 왕 때보다 요시야 왕의 개혁이 더욱 철저했다(왕하 23:13). 진실로 요시야 왕의 철저한 개혁을 통하여 남방 유다에서는 솔로몬 때부터 있었던 모든 우상과 그 산당들과, 또 북방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때 세웠던 모든 우상의 제단들을 다 훼파했다. 이는 이스라엘의 무명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었다(왕상 13:2). 그러나
우상들의 숙청과 더불어 그의 신앙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던 것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킨 것이다(대하 35:1-19; 왕하 23:21-23). 요시야 왕 때처럼 유월절을 크게 지킨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사사시대 이후 처음이었던 것이다(대하 35:18; 왕하 23:22).
히스기야에게 회개를 외친 미가라는 선지자가 있었고 요시야에게는 스바냐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그들은 후대에 개혁운동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으니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2) 요시야 왕의 말기의 국제 정세와 므깃도 전쟁(대하 35:20-27; 왕하 23:28-30)
앗수르 제국은 앗수바니팔이 죽은 후 그의 계대를 잇는 아들들은 유능하지 못하여 나라는 점점 쇠약했다. 이 때 바벨론의 공격을 받았는데 설상가상으로 메데도 바벨론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하여 614 B. C.에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은 앗수르를 점령했고 2년 후에는 니느웨를 포위했으며 3개월 후에는 마침내 수도 니느웨는 함락되었다. 그 때 앗수르의 왕이 피살되었다. 이러한 니느웨의 멸망은 벌써 20년 전에 선지자 나훔을 통하여 예언한 그대로의 성취이었다(나훔 3:1-7; 16-19).
이처럼 니느웨는 비참하게 망했으나 그래도 앗스르는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서북부 도성인 ‘하란’에서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610 B. C.에 하란은 함락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609 B. C.에 그는 하란을 다시 탈환하려고 대시 대오를 정비하여 공경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 때 하란을 탈환하려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애굽은 옛 원수였던 앗수르를 도우려 했다. 애굽의 바로 느고는 신흥 바벨론을 꺾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바로느고는 하란에서 싸우는앗수르를 도우려고 군대를 출정시켰다. 그러나 그때 요시야 왕은 반 앗수르적인 입장이었다. 앗수르가 망하는 것은 유다의 독립을 위하여 유익하다고 판단되었다. 드디어 요시야 왕은 앗수르를 도우려는 애굽을 막기 위하여 므깃도에 진출했다. 그러나 므깃도에서 요시야 왕은 전사했다(왕하 23:29. 30; 대하 35:23, 24). 이 므깃도의 전쟁에서 애굽은 앗수르를 돕는 기회를 놓쳤다.
2. 애굽 왕에게 폐위된 여호아하스(대하 36:1-4; 왕하 23:31-33)
요시야 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엘리야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 인데 둘째인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르고 다음에 첫째 엘리야김과 셋째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다. 삼형제가 왕이 된 예는 남북 이스라엘 역사에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이스라엘의 아합의 두 아들 아하시야와 요람, 두 형제가 대를 이어 왕이 된 일이 있을 뿐이다.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전사한 후 백성들은 그의 둘째 아들인 여호아하스로 왕을 삼았다. 그러나 므깃도에서 요시야 왕을 죽인 애굽의 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제거하고 그의 형인 엘리야김을 왕을 삼게 했는데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고치게 했다. 이름의 뜻은 엘리야김은 하나님께서 세우시다이요 여호와김은 여호와께서 세우시다이다.
여호야김은 왕이 된 후 자기를 왕 세우지 않고 동생을 세웠던 장로들을 죽였다. 바로 왕은 자기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여호아하스를 폐위하여(장로들은 유능자인 동생을 선택) 포로로 잡혀가서 죽었다(왕하 23:34; 렘 22:11). 유다가 세운 모든 것을 무효임을 선포하기 위하거나 혹은 지혜로운 왕보다 순종하는 왕이 필요했을 것이다.
애굽은 유다를 속국으로 삼고 은 100달란트와 금 한달란트를 벌금으로 받고 또 다음 여호야김 때에도 은과 금을 조공으로 받았는데 여호야김은 바로느고의 명령을 이루기 위하여 국민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과 금을 바치게 했다(왕하 23:35). 두 왕의 평가를 에스겔 선자가 평하기를 여호아하스는 “사람을 움키는 사자새끼”라고 했고 여호야김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겔 19:5-9).
3. 두루마리를 태운 여호야김(대하 36:4-8; 왕하23:34-24:7; 렘 22:13-19; 렘36:1-32).
(1) 여호야김은 애굽왕 바로느고의 직접적인 임명으로 유다 왕이 됐다.
유다 국민들이 장남인 그를 버리고 그의 동생이었던 여호아하스르를 왕으로 삼았던 것은 형에게 결점이 있었을 것이다. 여호야김의 사치한 마음은 백성들의 노력을 동원하여 더 큰 궁전을 지었다(렘 22:18, 19). 선지자 하박국의 탄식도 여호야김의 통치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합 1:3, 4).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나라를 징계하기 위하여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다고 했다. 그는 많은 의인의 피를 흘렸는데 선지자 우리야를 죽였고, 또 예레미야도 죽이려 했으나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로 살았다(렘 26:20-23; 26:24; 36:26). 특별히 그는 예레미야가 받은 계시의 두루마리를 빼앗아 불에 던져 태우는 등의 암흑정치를 감행했다(렘 36:23).
(2) 갈그미스 전투와 그 후의 여호야김
므깃도의 전쟁에서 유다의 요시야 왕을 이긴 애굽의 바로느고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하란을 점령하지는 못했으나 수리아 지역과 팔레스틴은 완전히 점령했다. 그러므로 느고의 마음대로 여호아하스를 폐위하고 여호야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바벨론 왕 나보폴리살은 병석에 있었고 그 맏아들 느브갓네살이 군대를 이끌고 유브라데스 강을 건너 수리아의 북부 지방인 갈그미스에서 앗수르의 동맹국인 애굽의 바로느고를 격퇴시켰다.
이 갈그미스의 전쟁은 참으로 처참하여 대영 박물관에 소장 되었는데 내용 중에 하맛으로 후퇴한 애굽 군이 대오를 정비하려 했으나 추격한 느브갓네살의 군대에게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전멸당했다고 기록해 있고, 전지에서 부왕 나보폴리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같은 해 9월 1일에 느브갓네살이 왕위에 올랐다(부왕은 8월 8일에 죽었다. 605년 B. C.).
열왕기하 24장 7절은 “바벨론 왕이 애굽 하수에서부터 유브라데 하수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취하였음이라”고 기록했다. 또한 갈그미스 전쟁에 의미가 있음은 앗수르와 애굽의 동맹을 격파하므로 단번에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앗수르는 영원히 역사에 사라졌고 애굽은 약한 나라로 전락됨이 오늘까지이다. 그 후 3년 동안 여호야김이 조공을 바쳤는데 느브갓네살이 애굽의 느고를 치기 위하여 애굽 국경에까지 진격했는데 양편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자 여호야김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느브갓네살을 배반했다(왕하 24:1).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을 섬겨야할 것을 권면했으나 듣지 않았던 것이다(렘 27:1-15).
유다의 지도자들의 분위기가 애굽을 의지하면 일단 도와 줄 것을 믿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느브갓네살이 유다 근방에 있는 갈대아 부대와 그 예하에 있는 아람과 모압과 압몬의 부대를 급파하여 여호야김을 쳤다(왕하 24:2; 렘 35:11). 그리고 그 후 얼마동안 바벨론 왕은 아람과 모압과 암몬의 군을 통해 유다를 다스리게 했다(왕하 렘 35:11). 그 후 바벨론의 주부대가 예루살렘에 진입한 후 여호야김은 죽었는데 사인은 궁중의 어떤 자가 바벨론에 호감을 얻기 위해 죽였다는 설이 있다. 여호야김은 11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죄악된 일을 저질렀으며 그의 정책도 애굽을 섬기다 또 바벨론을 섬기는 등 심히 불안정한 처지에 있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렘 22:18).
4. 여호야긴 왕과 유다의 첫 포로(597 B. C. 대하 36:9-10).
여호야김의 뒤를 이은 왕위는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3개월 10일 동안 이었다(대하 36:9). 바벨론으로 끌고 간 후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그 때는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선지자 에스겔과 여호야긴 왕과 그의 어머니와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유력한 자들을 잡아갔는데 용사가 7천과 기술자 1천명이 포함되었으니 유다는 거의 폐허화 되었다.
시드기야는 요시야 왕의 3째 아들인데 본래 이름은 ‘맛다니야’(여호와의 선물) 이였으나 바벨론 왕은 그 이름을 ‘시드기야’(여호와의 의)로 고쳤다.
5. 시드기야 왕과 유다 멸망(대하 36:11-21; 왕하 24:17-25:21; 렘 39:1-10).
여호야긴이 잡혀간 후 바벨론 왕이 숙부로 왕을 삼고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쳤다(왕하 24:17). 그러나 시드기야는 섭정 왕으로 볼 수밖에 없음은 느브갓네살이 포로 중에도 왕궁에서 먹으며 종신토록 공급을 받았으니 왕으로 인정한 것이다(왕하 25:27-30; 렘 52:31; 겔 1:2; 8:1). 시드기야 왕위는 확고한 통치자로서의 능력도 부족하였다. 반 바벨론적인 관원들과 바벨론의 압력으로 불안한 입장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국가의 혼란은 더욱 심했다. 마침내 시드기야는 반 바벨론파의 친 애굽 파의 압력으로 바벨론을 배반하게 되었다(왕하 24:20).
(1) 시드기야의 반 바벨론과 예루살렘의 함락(왕하24:20-25:12).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을 배반하게 된 것은 애굽의 원조를 구하여 바벨론을 막아야 한다는 압력과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가 또한 그러한 충동을 준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나서 그를 잘못 격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 베니게의 여려 나라들이 반 바벨론 동맹이 이루어졌고(렘 27:1-3; 겔 21:1-3; 21:8), 유다도 여기에 가담하라는 사신들이 시드기야 왕에게 그것을 강권할 때 거짓선지자들과 반 바벨론파의 수뇌들이 시드기야 왕에게 포로들은 반드시 돌아오겠고, 예루살렘을 지켜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강권했을 것이다.
예레미야 28장 1절로 12절에 평안을 외치면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을 반드시 지키신다고 호소했다(렘 7:4). 여기에 힘을 얻은 시드기야는 반 바벨론 파들을 따라 느브갓네살을 배반했다(왕하 24:20). 드디어 느브갓네살은 시드기야 9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포위 2년 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이 때 도망가는 시드기야 왕을 잡은 바벨론 왕은 그의 눈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그의 두 눈을 뽑아버린 후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죽는 날까지 옥에 갇혀있었다(엠 52:9-11; 왕하 25:6, 7).
성의 함락과 더불어 성전은 훼파되고 남은 백성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오직 비천한 자들만 남게 되었다(렘 25:8). 예레미야는 포로들에게 돌아갈 생각하지 말고 정착하며 편안하기를 힘쓰고 그 성읍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렘 29:4). 그는 유다의 포로들에게 70년 후에 귀환을 선언했다(렘 29:10).
에스겔선지도 시드기야 왕의 비참한 최후를 증거 하면서 한 말이 “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끝 때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라”(겔 21:25-26)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보다 더 좋은 자가 나타나면 다윗의 위를 계승할 것을 말하면서 미래의 소망을 보여주었음은 그 남은 자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겔 21:27). 구속사적으로 보면 유대 왕국은 요시야 왕으로 끝이 났고 그 이후의 왕위는 요식행위이다. 그런데 나라가 망할 때 신앙이 흥왕하여 포로생활 중에서 신앙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2) 성의 함락과 라기스의 편지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래도 유다의 관원들은 애굽의 원병이 오리라고 믿고 견디었다(포위는 588년 10월 10일이요 함락은 586년 4월 9일이었다). 원병을 기다림은 소위 ‘라기스의 편지’인데 이는 라기스의 성밖을 파수하는 군대의 지휘관인 호사야(Hoshaiah)는 어떤 인물인가? 아마 예레미야 42장 1절과 느헤미야 12장 32절에 나타난 동일인으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가 많다. 이 편지를 받은 자는 ‘야오쉬’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 Yaosh는 예루살렘을 지휘하는 최고의 사령관이었을 것이다.
편지 내용은 바벨론 군의 진격이 빨라서 유다의 성읍들이 함락되어 가는 것을 탄식하는 심정을 읽을 수 있고, 성과 성의 신호인 횃불이 끊어져서 라기스로부터 오는 신호를 받고자 기다린다는 호소가 실려 있다. 그런데도 궁중의 지도자들은 지나치게 미래를 낙관하여 군사력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당시 유다의 형편이 얼마나 긴박한 중에 있었던가를 묘사했으나 관리문제로 판독되지 못 했다. 그러나 성경에 인물들이 나타나 있는데 즉 사반의 아들 그마랴는 예레미야 29장 4절에, 야아사냐는 렘 35장 3절에, 네리야는 렘 36장 4절 등에 기록이 있어서 별명이 예레미야의 부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 유다 왕국의 최후(왕하 25:22-26; 대하 36:17-21)
바벨론 왕은 유다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어가고 그 남은 자들을 위하여 그달리야를 세워 총독으로 삼았다(왕하 25:22). 그는 한 때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숨겨 주었던 아히감의 아들로서(렘 40:5; 26:24) 그의 조부 사반은(렘 26:24) 요시야 왕의 개혁 당시 서기관으로 있었던 사람이었다(왕하 22:3). 흩어졌던 유다 백성들은 그래도 그달리야가 총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미스바로 모였다(렘 40:11, 12). 이 때 총독은 유다에 거하면서 조용하게 바벨론 왕을 섬길 것을 권면했다. 그리하면 유익할 것이며 자기도 미스바에 있으면서 갈대 인들을 섬기겠다고 했다(렘 40:9, 10).
모임의 결과는 반 바벨론 자들인데 당시 모압과 암몬과 에돔 땅에 망명한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었고 그들은 전부가 강경 자들이므로 총독 그달랴의 말을 듣지 않고 매국자로 보아 반대하고 반 바벨론 자들의 두목인 이스마엘은 총독 그달랴를 죽이고 또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숙청했다(렘 41:4-7). 그들이 그렇게까지 반 바벨론 적이었던 것은 당시 암몬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 증거로 이스마엘 일당은 그 후 애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암몬으로 갔던 것을 본다(렘 41:10, 15). 이때 살아남은 백성들은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멀리 애굽으로 가게 되었다(렘 41:18).
그때 애굽으로 가는 것을 금했던 예레미야도 그들에게 끌려 원치 않는 곳으로 갔다. 그 후의 역사의 기록은 없으나 유다는 더욱 황폐하여졌을 것이고 그 지역은 일괄적으로 사마리아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후 약 1500년 후에 그의 후손들은 이제 자유인이 아닌 포로로서 다시 옛 고토인 갈대아 땅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또 소수의 일부는 많은 수난을 겪으며 출애굽 했던 그 땅을 다시 자기 발로 찾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제 31장 2절 신흥 바벨론과 유다 왕국의 멸망(640-586 B. C.).
요시아 왕을 계기로 하여 유다 왕국은 드디어 그 마지막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앗수르의 세력도 이제는 매우 약화된 때이다. 앗수바니팔 왕의 뒤를 이은 왕들은 그렇게 유능하지도 못했다. 앗수바니팔이 죽은 후 앗수르에서는 그의 아들인 앗스르에틸리라니가 왕위에 올랐으나 다시 얼마 후 제 2왕자인 신솨르이쉬쿤이 그 위를 계승했다. 그들은 나라의 문제성을 그대로 인계 할뿐 그것들을 해결할 능력은 없었다.
니느웨가 멸망할 때까지 앗수르는 점점 나약해졌다. 그때를 이용하여 신흥 바벨론이 일어나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고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세력이 활발하여지기는 요시아 왕 말기부터이었다. 그러므로 요시아 왕 때에는 앗수르의 힘은 약화되었고 아직 바벨론은 잠재세력으로만 강화되어 있었을 뿐, 유다왕국은 평화로운 중에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 말하겠거니와 요시와 왕의 뒤를 이어 여호아하스의 여호야김과 여호야긴과 시드기야 등등의 모든 왕들은 바벨론의 세력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히고 유다 왕국은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시아 왕 때만은 평온한 중에서 유다 왕국을 최후로 크게 발전케 했고 여호와의 종교를 마지막으로 크게 부흥케 했다. 아마도 유다 백성들이 먼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 가는 비극을 당하기에 앞서 그들에게는 마지막으로 그 같은 신앙적인 부흥이 필요하였을지 모른다.
1. 유다 왕국 최후의 개혁 왕 요시야(640-609 B. C.)
요시야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아몬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물론 그 배후에는 경건한 신앙의 인물들이 있어서 요시야 왕을 충성으로 섬겼다. 역대하 34장 9절 이하에 나타난 대로 대제사장 힐기야와 서기관 사반을 위시하여 여러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고, 선지자 스바냐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특별히 스바냐선지는 히스기야 왕의 현손이었으니 요시야 왕과는 숙질 관계이었다(스 1:1). 그렇다면 그는 요시야 왕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황족이었다.
그의 감화도 시켰을 것으로 본다. 그의 치리기간 31년은 참으로 크게 부흥하고 발전하던 시기로 유다 왕국 창건 이래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모든 우상을 멸하는 숙청작업에 있어서도 남방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까지의 온 이스라엘 우상을 멸하였다. 요시야 왕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우상까지 멸한 것은 앗수르가 약화되어 명목상으로만 통치하고 있었고, 열왕기 상 13장 2절에 예언되어 있었다(왕하 23:25).
(1) 요시야 왕의 개혁 운동
요시야가 위에 오른 지 8년 즉 그의 나이 16세 때에 그는 벌써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고, 위에 있은 지 12년 즉, 그의 나이 20세에 예루살렘과 유다와 북방 여러 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상을 정결케 했다 그러한 정화운동을 이루는 데는 무려 6년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대하 34:1-8). 이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개혁운동이었다. 성전 수리에서 발견된 율법 책으로 말미암아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그 책을 그는 서기관에게 주어 그것을 요시아 왕 앞에서 읽게 했고, 왕은 옷을 찢으며(대하 34:19), 온 백성들과 더불어 그는 여호와 앞에 언약을 세워 진정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서약했던 것이다(29-33).
물론 그의 그러한 신앙의 큰 부흥은 성경을 발견하기 전 성전을 수리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 율법을 듣게 됨으로 더욱 분명히 열조의 죄를 회개하며 새로운 서약을 하게 되었다. 과거 히스기야 왕 때보다 요시야 왕의 개혁이 더욱 철저했다(왕하 23:13). 진실로 요시야 왕의 철저한 개혁을 통하여 남방 유다에서는 솔로몬 때부터 있었던 모든 우상과 그 산당들과, 또 북방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때 세웠던 모든 우상의 제단들을 다 훼파했다. 이는 이스라엘의 무명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었다(왕상 13:2). 그러나
우상들의 숙청과 더불어 그의 신앙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던 것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킨 것이다(대하 35:1-19; 왕하 23:21-23). 요시야 왕 때처럼 유월절을 크게 지킨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사사시대 이후 처음이었던 것이다(대하 35:18; 왕하 23:22).
히스기야에게 회개를 외친 미가라는 선지자가 있었고 요시야에게는 스바냐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그들은 후대에 개혁운동에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으니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2) 요시야 왕의 말기의 국제 정세와 므깃도 전쟁(대하 35:20-27; 왕하 23:28-30)
앗수르 제국은 앗수바니팔이 죽은 후 그의 계대를 잇는 아들들은 유능하지 못하여 나라는 점점 쇠약했다. 이 때 바벨론의 공격을 받았는데 설상가상으로 메데도 바벨론과 연합하여 앗수르를 공격하여 614 B. C.에 바벨론과 메데의 연합군은 앗수르를 점령했고 2년 후에는 니느웨를 포위했으며 3개월 후에는 마침내 수도 니느웨는 함락되었다. 그 때 앗수르의 왕이 피살되었다. 이러한 니느웨의 멸망은 벌써 20년 전에 선지자 나훔을 통하여 예언한 그대로의 성취이었다(나훔 3:1-7; 16-19).
이처럼 니느웨는 비참하게 망했으나 그래도 앗스르는 다시 대오를 정비하여 서북부 도성인 ‘하란’에서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610 B. C.에 하란은 함락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609 B. C.에 그는 하란을 다시 탈환하려고 대시 대오를 정비하여 공경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이 때 하란을 탈환하려는 전쟁이 벌어졌을 때 애굽은 옛 원수였던 앗수르를 도우려 했다. 애굽의 바로 느고는 신흥 바벨론을 꺾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바로느고는 하란에서 싸우는앗수르를 도우려고 군대를 출정시켰다. 그러나 그때 요시야 왕은 반 앗수르적인 입장이었다. 앗수르가 망하는 것은 유다의 독립을 위하여 유익하다고 판단되었다. 드디어 요시야 왕은 앗수르를 도우려는 애굽을 막기 위하여 므깃도에 진출했다. 그러나 므깃도에서 요시야 왕은 전사했다(왕하 23:29. 30; 대하 35:23, 24). 이 므깃도의 전쟁에서 애굽은 앗수르를 돕는 기회를 놓쳤다.
2. 애굽 왕에게 폐위된 여호아하스(대하 36:1-4; 왕하 23:31-33)
요시야 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엘리야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 인데 둘째인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르고 다음에 첫째 엘리야김과 셋째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다. 삼형제가 왕이 된 예는 남북 이스라엘 역사에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이스라엘의 아합의 두 아들 아하시야와 요람, 두 형제가 대를 이어 왕이 된 일이 있을 뿐이다.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전사한 후 백성들은 그의 둘째 아들인 여호아하스로 왕을 삼았다. 그러나 므깃도에서 요시야 왕을 죽인 애굽의 바로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제거하고 그의 형인 엘리야김을 왕을 삼게 했는데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고치게 했다. 이름의 뜻은 엘리야김은 하나님께서 세우시다이요 여호와김은 여호와께서 세우시다이다.
여호야김은 왕이 된 후 자기를 왕 세우지 않고 동생을 세웠던 장로들을 죽였다. 바로 왕은 자기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여호아하스를 폐위하여(장로들은 유능자인 동생을 선택) 포로로 잡혀가서 죽었다(왕하 23:34; 렘 22:11). 유다가 세운 모든 것을 무효임을 선포하기 위하거나 혹은 지혜로운 왕보다 순종하는 왕이 필요했을 것이다.
애굽은 유다를 속국으로 삼고 은 100달란트와 금 한달란트를 벌금으로 받고 또 다음 여호야김 때에도 은과 금을 조공으로 받았는데 여호야김은 바로느고의 명령을 이루기 위하여 국민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과 금을 바치게 했다(왕하 23:35). 두 왕의 평가를 에스겔 선자가 평하기를 여호아하스는 “사람을 움키는 사자새끼”라고 했고 여호야김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겔 19:5-9).
3. 두루마리를 태운 여호야김(대하 36:4-8; 왕하23:34-24:7; 렘 22:13-19; 렘36:1-32).
(1) 여호야김은 애굽왕 바로느고의 직접적인 임명으로 유다 왕이 됐다.
유다 국민들이 장남인 그를 버리고 그의 동생이었던 여호아하스르를 왕으로 삼았던 것은 형에게 결점이 있었을 것이다. 여호야김의 사치한 마음은 백성들의 노력을 동원하여 더 큰 궁전을 지었다(렘 22:18, 19). 선지자 하박국의 탄식도 여호야김의 통치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합 1:3, 4).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나라를 징계하기 위하여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다고 했다. 그는 많은 의인의 피를 흘렸는데 선지자 우리야를 죽였고, 또 예레미야도 죽이려 했으나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로 살았다(렘 26:20-23; 26:24; 36:26). 특별히 그는 예레미야가 받은 계시의 두루마리를 빼앗아 불에 던져 태우는 등의 암흑정치를 감행했다(렘 36:23).
(2) 갈그미스 전투와 그 후의 여호야김
므깃도의 전쟁에서 유다의 요시야 왕을 이긴 애굽의 바로느고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하란을 점령하지는 못했으나 수리아 지역과 팔레스틴은 완전히 점령했다. 그러므로 느고의 마음대로 여호아하스를 폐위하고 여호야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바벨론 왕 나보폴리살은 병석에 있었고 그 맏아들 느브갓네살이 군대를 이끌고 유브라데스 강을 건너 수리아의 북부 지방인 갈그미스에서 앗수르의 동맹국인 애굽의 바로느고를 격퇴시켰다.
이 갈그미스의 전쟁은 참으로 처참하여 대영 박물관에 소장 되었는데 내용 중에 하맛으로 후퇴한 애굽 군이 대오를 정비하려 했으나 추격한 느브갓네살의 군대에게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전멸당했다고 기록해 있고, 전지에서 부왕 나보폴리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같은 해 9월 1일에 느브갓네살이 왕위에 올랐다(부왕은 8월 8일에 죽었다. 605년 B. C.).
열왕기하 24장 7절은 “바벨론 왕이 애굽 하수에서부터 유브라데 하수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취하였음이라”고 기록했다. 또한 갈그미스 전쟁에 의미가 있음은 앗수르와 애굽의 동맹을 격파하므로 단번에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앗수르는 영원히 역사에 사라졌고 애굽은 약한 나라로 전락됨이 오늘까지이다. 그 후 3년 동안 여호야김이 조공을 바쳤는데 느브갓네살이 애굽의 느고를 치기 위하여 애굽 국경에까지 진격했는데 양편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자 여호야김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느브갓네살을 배반했다(왕하 24:1).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을 섬겨야할 것을 권면했으나 듣지 않았던 것이다(렘 27:1-15).
유다의 지도자들의 분위기가 애굽을 의지하면 일단 도와 줄 것을 믿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느브갓네살이 유다 근방에 있는 갈대아 부대와 그 예하에 있는 아람과 모압과 압몬의 부대를 급파하여 여호야김을 쳤다(왕하 24:2; 렘 35:11). 그리고 그 후 얼마동안 바벨론 왕은 아람과 모압과 암몬의 군을 통해 유다를 다스리게 했다(왕하 렘 35:11). 그 후 바벨론의 주부대가 예루살렘에 진입한 후 여호야김은 죽었는데 사인은 궁중의 어떤 자가 바벨론에 호감을 얻기 위해 죽였다는 설이 있다. 여호야김은 11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죄악된 일을 저질렀으며 그의 정책도 애굽을 섬기다 또 바벨론을 섬기는 등 심히 불안정한 처지에 있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렘 22:18).
4. 여호야긴 왕과 유다의 첫 포로(597 B. C. 대하 36:9-10).
여호야김의 뒤를 이은 왕위는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3개월 10일 동안 이었다(대하 36:9). 바벨론으로 끌고 간 후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그 때는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선지자 에스겔과 여호야긴 왕과 그의 어머니와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유력한 자들을 잡아갔는데 용사가 7천과 기술자 1천명이 포함되었으니 유다는 거의 폐허화 되었다.
시드기야는 요시야 왕의 3째 아들인데 본래 이름은 ‘맛다니야’(여호와의 선물) 이였으나 바벨론 왕은 그 이름을 ‘시드기야’(여호와의 의)로 고쳤다.
5. 시드기야 왕과 유다 멸망(대하 36:11-21; 왕하 24:17-25:21; 렘 39:1-10).
여호야긴이 잡혀간 후 바벨론 왕이 숙부로 왕을 삼고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쳤다(왕하 24:17). 그러나 시드기야는 섭정 왕으로 볼 수밖에 없음은 느브갓네살이 포로 중에도 왕궁에서 먹으며 종신토록 공급을 받았으니 왕으로 인정한 것이다(왕하 25:27-30; 렘 52:31; 겔 1:2; 8:1). 시드기야 왕위는 확고한 통치자로서의 능력도 부족하였다. 반 바벨론적인 관원들과 바벨론의 압력으로 불안한 입장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므로 국가의 혼란은 더욱 심했다. 마침내 시드기야는 반 바벨론파의 친 애굽 파의 압력으로 바벨론을 배반하게 되었다(왕하 24:20).
(1) 시드기야의 반 바벨론과 예루살렘의 함락(왕하24:20-25:12).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을 배반하게 된 것은 애굽의 원조를 구하여 바벨론을 막아야 한다는 압력과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가 또한 그러한 충동을 준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나서 그를 잘못 격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 베니게의 여려 나라들이 반 바벨론 동맹이 이루어졌고(렘 27:1-3; 겔 21:1-3; 21:8), 유다도 여기에 가담하라는 사신들이 시드기야 왕에게 그것을 강권할 때 거짓선지자들과 반 바벨론파의 수뇌들이 시드기야 왕에게 포로들은 반드시 돌아오겠고, 예루살렘을 지켜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강권했을 것이다.
예레미야 28장 1절로 12절에 평안을 외치면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을 반드시 지키신다고 호소했다(렘 7:4). 여기에 힘을 얻은 시드기야는 반 바벨론 파들을 따라 느브갓네살을 배반했다(왕하 24:20). 드디어 느브갓네살은 시드기야 9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포위 2년 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이 때 도망가는 시드기야 왕을 잡은 바벨론 왕은 그의 눈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그의 두 눈을 뽑아버린 후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죽는 날까지 옥에 갇혀있었다(엠 52:9-11; 왕하 25:6, 7).
성의 함락과 더불어 성전은 훼파되고 남은 백성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오직 비천한 자들만 남게 되었다(렘 25:8). 예레미야는 포로들에게 돌아갈 생각하지 말고 정착하며 편안하기를 힘쓰고 그 성읍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렘 29:4). 그는 유다의 포로들에게 70년 후에 귀환을 선언했다(렘 29:10).
에스겔선지도 시드기야 왕의 비참한 최후를 증거 하면서 한 말이 “너 극악하여 중상을 당할 이스라엘 왕아 네 날이 이르렀나니 곧 죄악의 끝 때니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길지라. 그대로 두지 못하리니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라”(겔 21:25-26)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보다 더 좋은 자가 나타나면 다윗의 위를 계승할 것을 말하면서 미래의 소망을 보여주었음은 그 남은 자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겔 21:27). 구속사적으로 보면 유대 왕국은 요시야 왕으로 끝이 났고 그 이후의 왕위는 요식행위이다. 그런데 나라가 망할 때 신앙이 흥왕하여 포로생활 중에서 신앙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2) 성의 함락과 라기스의 편지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래도 유다의 관원들은 애굽의 원병이 오리라고 믿고 견디었다(포위는 588년 10월 10일이요 함락은 586년 4월 9일이었다). 원병을 기다림은 소위 ‘라기스의 편지’인데 이는 라기스의 성밖을 파수하는 군대의 지휘관인 호사야(Hoshaiah)는 어떤 인물인가? 아마 예레미야 42장 1절과 느헤미야 12장 32절에 나타난 동일인으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가 많다. 이 편지를 받은 자는 ‘야오쉬’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 Yaosh는 예루살렘을 지휘하는 최고의 사령관이었을 것이다.
편지 내용은 바벨론 군의 진격이 빨라서 유다의 성읍들이 함락되어 가는 것을 탄식하는 심정을 읽을 수 있고, 성과 성의 신호인 횃불이 끊어져서 라기스로부터 오는 신호를 받고자 기다린다는 호소가 실려 있다. 그런데도 궁중의 지도자들은 지나치게 미래를 낙관하여 군사력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당시 유다의 형편이 얼마나 긴박한 중에 있었던가를 묘사했으나 관리문제로 판독되지 못 했다. 그러나 성경에 인물들이 나타나 있는데 즉 사반의 아들 그마랴는 예레미야 29장 4절에, 야아사냐는 렘 35장 3절에, 네리야는 렘 36장 4절 등에 기록이 있어서 별명이 예레미야의 부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 유다 왕국의 최후(왕하 25:22-26; 대하 36:17-21)
바벨론 왕은 유다의 백성들을 포로로 끌어가고 그 남은 자들을 위하여 그달리야를 세워 총독으로 삼았다(왕하 25:22). 그는 한 때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숨겨 주었던 아히감의 아들로서(렘 40:5; 26:24) 그의 조부 사반은(렘 26:24) 요시야 왕의 개혁 당시 서기관으로 있었던 사람이었다(왕하 22:3). 흩어졌던 유다 백성들은 그래도 그달리야가 총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미스바로 모였다(렘 40:11, 12). 이 때 총독은 유다에 거하면서 조용하게 바벨론 왕을 섬길 것을 권면했다. 그리하면 유익할 것이며 자기도 미스바에 있으면서 갈대 인들을 섬기겠다고 했다(렘 40:9, 10).
모임의 결과는 반 바벨론 자들인데 당시 모압과 암몬과 에돔 땅에 망명한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었고 그들은 전부가 강경 자들이므로 총독 그달랴의 말을 듣지 않고 매국자로 보아 반대하고 반 바벨론 자들의 두목인 이스마엘은 총독 그달랴를 죽이고 또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숙청했다(렘 41:4-7). 그들이 그렇게까지 반 바벨론 적이었던 것은 당시 암몬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 증거로 이스마엘 일당은 그 후 애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암몬으로 갔던 것을 본다(렘 41:10, 15). 이때 살아남은 백성들은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멀리 애굽으로 가게 되었다(렘 41:18).
그때 애굽으로 가는 것을 금했던 예레미야도 그들에게 끌려 원치 않는 곳으로 갔다. 그 후의 역사의 기록은 없으나 유다는 더욱 황폐하여졌을 것이고 그 지역은 일괄적으로 사마리아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후 약 1500년 후에 그의 후손들은 이제 자유인이 아닌 포로로서 다시 옛 고토인 갈대아 땅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또 소수의 일부는 많은 수난을 겪으며 출애굽 했던 그 땅을 다시 자기 발로 찾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제 32장 이스라엘의 징계(懲戒)와 회복(回復)(호 9:17; 6:1)
제 1절 포로가 된 언약의 백성들
1. 바벨론에 끌려간 유다인들
유다 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는 4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은 기원전 605년에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들과 귀족계급이었다(단 1:1-6).
둘째는 기원전 569년에 여호야긴 왕을 포함한 일반백성들과 모든 방백들과 군사들 일만 명 외 많은 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왕하 24:14).
세 번째는 기원전 589년에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이 최후로 함락될 때 시드기야 왕을 포함한 백성들이었다(왕하 25:6-12; 렘 25:9-11).
넷째는 기원전 581년 느브갓네살의 시위대장 느브사라단이 마지막 남은 유다 인들을 사로잡아갔다. 첫 번 귀족계급을 제외한 삼차에 걸쳐 끌려간 포로의 수는 함께 4천 6백 명이라(렘 52:28-30)고 했으나 그것은 남자 장정들만의 수요, 남녀노소를 합하면 그 삼배 내지 사배는 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 52장 28절과 열왕기하 24장 14절에서 제 2차의 경우를 비교해 볼 때 예레미야서에는 3천 23명이라고 했으나 열왕기서에서는 용사 칠천과 대장장이 1천을 제외한(렘 24:16) 모든 포로 자가 1 만 명이었다(렘 24:14)고 했기 때문이다.
제 32장 2절 포로기간 중의 바벨론의 정세
1. 바벨론의 새로운 왕 나보니더스
느브갓네살 왕이 죽자(562년) 바벨론의 정세는 순탄치 않았다. 그의 아들 에윌므로닥(왕하 25:27)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성경기록에 나타난 대로 여호야긴 왕을 감옥에서 내어 놓아 그 지위를 높였다는 인물이었다(왕하 25:27-30).
그러나 2년 후 에윌므로닥은 궁중 반역을 당하여 피살되고, 그의 처남인 ‘네르갈레셀’이다. 예레미야 39장 3절에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B. C. 586) 바벨론 왕과 더불어 입성한 바벨론의 방백 중에 맨 첫 번 기록된 ‘네르갈사레셀’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가 죽자 그의 어린 아들 ‘라바시말둑’이 왕위에 올랐다(556) 그러나 그는 일년이 못되어(9 개월) 음모 단에 의한 무혈혁명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그 음모의 주동이었던 ‘나보니더스’가 왕위에 올랐다(B. C. 556-539). 바벨론의 새 왕 ‘나보니더스’는 상당히 유능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정세는 바벨론 북방에 신흥세력인 메데 제국이 점점 강하여지는 때이므로 바벨론은 국가적으로 보아 강한 지도력이 필요한 때였다. 그는 위에 오르자 메데의 침입을 막고자 국방강화에 힘썼고 또 애굽과 통하는 통상로가 되는 남북연결의 통로를 확보하기에 힘썼다.
당시 ‘메데’ 제국은 벌써 북방 수리아지방을 침략하기 시작했으므로 메소보다미아에서 ‘갈그미스’를 통과하여 애굽에 이르는 대로는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나보니더스는 수리아 지역에서 ‘메데’를 물리쳐 그 통로를 확보했다. 그는 또 다음 남방에 있는 파사만과 애굽에 이르는 중간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북 아라비아에 위치한 데마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곳을 바벨론의 제 2의 수도로 삼았던 것이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그 자신은 11년간이나 그곳에 정주하면서 그의 아들 벨사살을 세워 부왕으로 삼고 바벨론 궁을 지키며 바벨론을 다스리게 했다. 그가 그처럼 아라비아의 ‘데마’를 바벨론의 제 2의 수도로 삼고 거기에 정주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이유뿐만 아니라 그의 종교관에 있어서 바벨론의 국신 Marduk 보다 Nanna(월신)를 더 숭배했기 때문에 그 신의 숭배의 중심지인 그곳에 장기간 정주한 것이다.
2. 나보니더스와 벨사살
고대 바벨론 역사의 연대에는 나보니더스(556-539 B.C.)가 바벨론의 최후 왕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경비판학자들은 다니엘서 5장의 기록, 즉 바벨론의 멸망 직전의 최후 왕이 벨사살이란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만일 다니엘서의 저자가 다니엘 자신이었다면 그러한 오류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소위 그런 기록의 잘못은 다니엘서 자체가 먼 후일에 기록된 것으로 다니엘이 아닌 어떤 사람에 의해 된 것이라고 했다. (30-31)
이와 같이 성경비평학자들은 다니엘서의 저자가 다니엘이란 것을 부인하는 증거로 삼는다. 만일 사실이라면 예수님께서 다니엘서의 저자가 다니엘이라고 마태복음 24장 15절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고든”은 또 하나의 오류가 될 것이다. 19세기 중엽에 고대 바벨론에서 발굴된 서판들에 의하면 벨사살이란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그가 역사적 인물임이 증명되었다.
그 후 서판에서도 벨사살이란 이름과 나보니더스의 이름이 같이 기록되고 그들의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서판에서 나보니더스의 아들임이 밝혀졌다. 곧 나보니더스가 그의 모든 왕권을 아들인 벨사살에게 맡기고 그는 멀리 데마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데마의 왕을 죽이고 그곳을 점령한 후 장기간 거주했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자료는 다니엘서의 기록에 잘못이 없다는 확증이 된다. 다니엘 5장 29절의 “다니엘로 하여금 바벨론의 셋째 치리자로 삼으니라”하신 뜻은 셋째 치리자란 것이다. 즉 나보니더스와 벨사살 자신의 다음 자리를 다니엘에게 주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벨사살이 나보니더스의 아들이면 나보니더스는 느브갓네살 왕의 사위일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다니엘 5장 2절과 11절과 18절과 22절의 부왕이란 히브리 식의 풍속대로 이어 받은 왕권을 말할 때 부왕이라고 한 것으로 보는데 대표적인 학자는 ‘카일’이다. 아버지란 뜻이 히브리 식으로 8가지 중에 하나인 계대자란 뜻으로 부왕이라 했다는 것이다.
3. 메데와 파사의 관계
파사는 ‘엘람’ 왕국의 멸망 후에 그 판도의 일부에서 출발된 작은 나라이었다. 한때 바벨론의 벨사살은 메데의 세력을 막기 위해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점점 장성한 파사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하지만 파사가 메데의 영향하에 있지만 지도자 고레스 왕(559-530 B. C.)은 젊은 나이로 부왕을 계대하여 나라를 급속도로 발전시켰다. 그의 부왕은 메데와 궁중 정략결혼을 통하여 서로 동맹을 맺고 메데의 영향 밑에서 평화를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메데와 파사가 서로 두각을 다투는 큰 전쟁이 벌어졌다. 수적으로 열세이었지만 유능한 고레스 왕의 지도로서 강력한 메데를 물리쳐 승리했다. 승리 후에도 두 나라를 구별하지 않고 우열의 등차도 없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어머니(메데 사람으로 정략적으로 결혼함)가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혹자는 어머니가 메데의 여왕이었다가 파사 왕과 결혼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두 나라는 강력한 연합군임이 틀림없다(에스더 1:19절에 파사와 메데라 했고, 다니엘 5:28절에 메데와 파사라 기록함).
헬라의 역사가들도 메데와 파사를 동의어로 사용하는 습관을 갖기까지 했다. 따라서 전술한 바와 같이 한 때 바벨론은 파사와 더불어 메데를 대항하는 관계에 있었으나 그것은 드디어 파괴되고 바벨론의 벨사살 왕은 이제 강력한 파사와 서로 대결하는 위치에 있다가 마침내 패망하게 되었다.
4. 나보니더스의 종교정책과 유다의 포로
데마에 제 2의 수도를 건설하고 거기에 정주한 나보니더스는 바벨론 궁을 비우게 되어 많은 불평이 있게 되었다. 특별히 그는 바벨론의 공식적인 왕으로서 신년의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이 되었어야 할 것인데 다년간 그 제사에 불참했다. 바벨론 국왕의 신년 제사는 국신인 Marduk에게 올리는 연중 가장 중요한 행사이었다. 아무리 그 아들 벨사살 왕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치권에 관한 것이요 제관을 대행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그가 Marduk신에 게을리 한 것은 새로운 다른 신 Nanna를 따르는 월신 숭배에 열중하여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욥기 31장 26절로 27절에 “언제 태양이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 맞추었던가”라는 말씀과 같이 나보니더스는 사막 아라비아의 원정 길 밤하늘에서 명멸하여 쇠하든 듯 그러나 다시 소행하면서 그의 앞길을 인도하는 달에 깊이 미혹되었는지 모른다. Nanna에 깊이 미혹되었는지 모른다. Nanna신은 본래 지혜와 지식과 능력의 신이라고 고대 이방사회에서 숭배를 받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나보니더스는 바벨론 왕국의 전 판도에 걸쳐서 다신교의 혼란한 종교를 정리하고 Nanna 신 중심의 종교를 세우려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나보니더스의 새로운 종교정책은 유다의 포로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오랫동안 사생활이나 종교생활에 안정과 자유를 누려왔던 저들에게는 새로운 불안과 수난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나보니더스의 종교 정책이 성공되어 바벨론의 종교가 난나 신 중심으로 통일 된다면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의 포로들에게는 새로운 뜻하지 않은 수난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는 극히 짧았다. 즉 새로운 파사의 고레스 왕의 승리는 유다 포로들에게 있어서는 이중 삼중의 해방과 큰 기쁨이 되었던 것이다.
어떤 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그 때 유다 본토에 남겨둔 백성들은 극히 비천한 자들로 토지를 갈고 농사를 지을 사람들로 불과 2만 명 이내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후의 유다의 형편은 앞으로도 다시 말하겠지만 각처에 도망갔던 유다 인들이 다시 모여 왔으나(렘 40:11-12) 황무하여진 시온의 형편은 기아와 약탈로 비참해진 불법천하 이였다(애가 5:1-18). 타버린 성전에는 그래도 남은 터가 있어서 북방 이스라엘에서까지도 순례자들이 찾아온 일이 없지는 않았다(렘 41:5).
그러나 다른 한편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들에게 바벨론 정권은 비교적 많은 자유를 허락했다. 그들은 원 하는 대로 집을 짓고 원하는 사업을 할 수 있었다. 또 비록 성전은 없지만 종교의 자유도 허락했다(렘 29:5-7; 겔 8:1; 33:30). 사실 유다 인들이 성전을 대신하는 회당이 생기게 된 것도 이러한 포로생활 중에 자연적으로 생겨진 제도이었다. 그들은 거기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울 수 있었고 또 한 민족으로서의 이산을 막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2. 유다에 남은 백성들
이미 전장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하여 바벨론과 느브갓네살은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웠다. 그때 예루살렘은 이미 황패되었으므로 그 본부는 미스바(예루살렘 북방 7리)에 두었던 것이다(렘 40:1, 5). 그러나 그달리야의 통치는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그때 소위 반바벨론파요 스스로 애국주의자로 자처했던 이스마엘이 그 동료 10인을 데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 죽이고(왕하 25:25), 그를 따르던 유다인들은 물론이요, 거기에 진주해 있던 바벨론의 군사들까지도 죽여(렘 41:2, 3) 미스바에 있은 어떤 구덩이에 그 시체를 채웠던 것이다(엡 41:9). 그리고 그 이스마엘의 일당은 암몬으로 도망갔다.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그때까지도 암몬은 반 바벨론 세력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스마엘은 그러한 암몬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때의 형편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고고학적 자료가 있다.
3. 애굽으로 간 유다인들(렘 43:8-44:30)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달리야가 피살된 후 이스마엘의 일당은 바벨론군의 보복이 두려워 암몬으로 갔으나 그 남은 사람들은 애굽으로 가려했다(렘 41:17, 18). 그들은 그래도 먼저 예레미야에게로 가서 고문을 받아 그 일을 결정하려 했다. 그때 그는 그들에게 그것을 거절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렘 42:10-17).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거짓말을 한다고 예레미야를 포함한 모든 남은 자들을 끌고 애굽으로 갔다(렘 43:2; 7). 유다에 남은 그들이 예레미야를 전적으로 불신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렘 42:2).
분명히 그들은 예레미야를 존경하여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바룩의 말만 듣고 그의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생각했다(43:3). 그들은 예레미야를 따르는 것보다는 오히려 갈대아 군대가 더 무서웠던 것이다. 애굽으로 간 그들은 대부분 다바네스에 머물렀으나(렘 43:7; 8) 일부는 다른 성읍에 흩어졌다(44:1).
이것은 일찍이 이사야선지가 벌써 유다의 후손들이 애굽의 여러 성읍에서 흩어져 있을 것을 예언한 그대로의 응답이었다(사 19:18).
애굽에서도 예레미야는 계속 선지자의 사명을 다 했다(렘 44:1; 14; 20-23; 24:30).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씀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우상인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전제를 드리며 그 일을 폐하니 가난과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한다는 것이다(렘 44:16-19). 이것으로 보아 그들은 요시야 왕 때의 그 개혁에 대해서도 이제 와서는 그 불만을 묘사한 것이 분명하다. 우상의 제단을 헐어버림으로 오히려 큰 재난을 만났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애굽으로 와서 옛날의 그 우상을 다시 섬기는 백성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여호와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음 고고학적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호와의 성전을 지었던 흔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소위 여호와도 섬기며 이방신도 섬기는 다신교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그들은 여호와를 여러 지방신들 중의 하나로 섬기는 타락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 고고학적 자료
엘레판틴 파피루스: 애굽 북부 나일 강 연안의 한 섬인 엘레판틴에서 1904년에 많은 파피루스의 문서들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그 문서 중 하나는 예루살렘에 주재해 주는 파사 총독에게 보낸 것으로 엘레판틴에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해 달라는 청원문서이었다. 이에 대하여 알브라이트는 말하기를 애굽으로 갔던 유다 인들에 의하여 그것은 기록된 것이라고 했다.
4. 예레미야의 최후의 예언과 그 성취
예레미야는 애굽에서도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다 했다. 그의 애굽에서의 최후의 예언은 예레미야 44장 전장이다. 거기에 보면 애굽에 온 유다 인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에 대하여 예언한 말에 “애굽 땅에서 사는 모든 유다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와 너의 아내들이 ····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전제를 드리라 하였은즉 ···· 보라 내가 경성하여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니 애굽 땅에 있는 유다 모든 사람이 칼과 기근에 망하여 멸절되리라”(렘 44:24-27)고 했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만이 남아서 유다 땅으로 돌아가서 여호와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게 되리라고 선언했다(렘 44:28-29).
또 당시의 애굽 왕 호브라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붙여지게 될 것을 예언했다(렘 44:30). 이로써 선지자 예레미야의 생애와 사명은 끝났던 것인데 그 후 애굽의 역사는 그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즉 애굽 왕 호브라는 바벨론이 팔레스틴을 점령한 것이 자기에게 큰 위협으로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서부 아세아에 있는 두로가 느브갓네살 왕을 대항하고 있었다. 애굽의 호브라와 두로는 서로 동맹하여 바벨론을 대항했다. 그러나 전세는 불리하여 드디어 두로는 바벨론에 포위되어 13년(585-573 B. C.)을 견디다가 마침내 함락되었다.
그러나 바벨론군이 진격해보니 성안은 비어 있었다. 사람들과 모든 재산은 애굽으로 도피시켰던 것으로 본다. 두로를 점령한 바벨론군은 기세를 몰아 애굽을 공격했다. 이때 애굽 왕 호브라는 패하여 느브갓네살 왕에게 붙잡힌바 되어 성경대로(렘 44:30) 이루어졌다. 호브라를 대신하여 애굽의 장교로 있던 아마시스가 애굽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후 그는 다시 느브갓네살을 반역했다. 그러므로 바벨론 군은 다시 애굽을 공격하여 마침내 애굽의 영토 일부에는 바벨론 군이 진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애굽은 지극히 약한 나라로 있다가 또 다시 신흥 파사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애굽의 유다 인들은 특별히 그들이 살던 지역을 중심으로 재난이 더욱 컷기 때문에 전쟁은 물론 기근으로 인한 희생으로 그들의 운명은 비참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모든 처참한 형편은 앞에서 본바와 같이 예레미야 선지가 예언한 그대로의 성취였음을 본다.
제 32장 3절 이스라엘 해방과 귀환
1. 고레스 왕의 새로운 정책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정복한 것은 기원전 539년 1월 29일이었다. 정복 후 곧 그는 유다 포로들을 위하여 두개의 선언을 공포하였다. 즉 본토로 귀환하라는 것과 성전을 재건하라는 그것이었다(대하 36:23). 고레스 왕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어떠하였음은 아직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는 피지배국에 대해서는 관대한 종교정책을 쓸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종교를 크게 장려하는 정책이었다. 바벨론 속국이 해방 후 총독제도를 통해 모든 속국들에게 환영받은 통치자로서 대화 방법도 속국으로 대하지 않고 일대 일로 대하였다.
파사의 군대가 바렐론에 입성할 때 벨사살이 피살된 것이 사실이며, 그밖에 그 성내에서 유혈의 전쟁이 없음도 이유가 있다. 본래 바벨론은 Marduk 신을 그들의 국신으로 믿었고 매 신년에는 그 신에 대한 종교의식을 국왕이 주관해야 했고 또 왕은 새롭게 그 신으로부터 그 나라의 통치를 위임받는 의식이 있어 왔다.
그러나 바벨론 왕 나보니더스는 전술한 바와 같이 Marduk 신보다 Nanna(월신)신을 더 숭배한 때문에 국신에 대한 의식을 거행하지 않고 전술한 바와 같이 데마에 체류하였다. 여기에서 일반 군중들의 불만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고레스 왕은 이제 그러한 저들에게 큰 만족을 주게 되었다. 즉 그는 선포하기를 Marduk 신이 자기에게 예배를 게을리 하며 무시하는 바벨론 왕을 멸하기 위하여 자기를 파송했다고 하고 자기는 Marduk 신의 파송자라고 했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민중은 그를 크게 환영하여 그가 가는 곳마다 성문을 열어 그를 영접하였으며 유혈의 전쟁이 없이 전 바벨론을 점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승리는 Marduk 신의 도움이라고 공포했다. 이렇게 하므로 그는 바벨론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종교정책은 다음과 같은 서판에 남아있다. 소위 고레스 서판인데 “Marduk 신이 세상에 모든 나라 중에서 가장 바른 지도자를 찾다가 안샴(파사의 고대 명칭)의 왕인 고레스의 이름을 찾아 그로 하여금 온 세계의 지배자로 선포했다.” 그리고 “모든 포로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선포한 기록도 있다. 역대하 36장 22절과 23절의 기록과 에스라 1장 1절로 4절의 내용과도 공통점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다른 것은 후자들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국을 내게 주셨다”고 한 점이다.
이 같은 차이점은 아마도 그는 각 나라에 대해서 그 백성들이 섬기는 신을 그들의 신앙적 입장에서 찬양하고 각각 자기들의 신을 섬기도록 했던 그의 종교 정책의 자연적 귀결로서 여러 포로 민족들에게 각각 그들에게 필요하도록 다른 말을 했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된 것은 각 족속들이 각각 자기의 원하는 본토에 돌아가서 자기들의 신을 섬기며 자유를 누리라는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레스 왕은 어떠한 정책을 전제로 그같이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를 움직여(대하 36:22) 예레미야선지의 예언(렘 25:12,13; 29:10)을 응답케 한 것이요(대하 36:22; 스 1:1), 또 이사야선지의 예언을 응답케 한 것이다(사 44:28, 45:1). 고레스 왕의 출현은 유다의 포로들에게 있어서는 더 없이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고레스 왕을 평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의 목자’ 또는 ‘나의 모든 기쁨을 청취할 자’라고 했지만 이사야서 후반부에서 그렇게 애용한 명칭인 ‘나의 종’이라고는 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이사야가 증거 한 여호와의 종은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가 아니라 분명한 소명의식에서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되 불의한 심판과 고난을 참으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외치지 아니하며” 고요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이었다(사 42:2). 그러므로 우리는 ‘고레스’ 왕을 가리켜 하나님의 세우신 큰 뜻으로 이스라엘 해방시킨 목자라고 하지마는(사 44:28), 엄격한 의미로는 ‘여호와의 종’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2. 이스라엘의 귀환(스 1:1-2:70)
유다의 포로들이 본토로 돌아오도록 허락된 것은 기원전 539-538년(스 1:1)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돌아가게 된 것은 기원전 537년이나 혹은 536년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귀환하려는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각양 선물들을 많이 받았다(스 1:6).
고레스 왕 자신도 옛날 느브갓네살 왕이 옮겨온 성전의 기명들을 유다의 지도자 세스바살에게 돌려주었다(스 1:7. 8). 당시 유다의 두 지도자는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이었다(스 2:2, 3:2). 돌아온 그들의 각 지파별 명단들은 에스라 2장에 기록되어 있거니와 그 수효는 42.360명이요, 노비가 7.337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200명이라 했다. 그 전체가 수는 거의 5 만 명에 달했던 것이다(에스라 2장 64절에 4만 이천 삼백 육십 명이라 했다). 특별히 스룹바벨은 여호야긴 왕의 장남 스알디엘(대상 3:18)의 아들(혹은 손자) 이다.
또 세스바살은 스룹바벨의 숙부로서 여호야긴의 넷째 아들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유다의 백성들을 다윗의 후손인 그들에게 맡겨 본토로 돌아오게 했다. 이것은 진실로 일찍이 이사야선지가 예언한 그대로 새로운 출애굽이요, 새 일의 시작이었다(사 2:9; 43:19; 48:6).
3. 고레스 왕의 최후
고레스 왕은 바벨론을 정복한 후 이제 자기(파사)를 대항하는 나머지 큰 세력은 애굽뿐이었다. 고레스 왕의 애굽을 정복하기 위한 모든 계획은 그의 아들 Cambyses에게 맡기고 그 자신은 파사 제국의 동부지역의 유목민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전했다. 그 전쟁은 지극히 소규모의 전쟁에 불과했으나 그만 고레스 왕은 거기에서 부상을 입고 드디어 전사했다. 그 시체는 당시 파사의 수도중 하나인 ‘브살가데’에 옮겨져 장사했다. 역사상 고레스 왕만큼 정복자로서의 존경을 받은 왕도 없을 것이다.
파사의 백성들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고 헬라인들은 주라 또는 입법자라 불렀고 유다 인들에게는 주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 불리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그의 무덤이 폐허되지 않기 위하여 힘써 그것을 수축했다. 그는 파사의 종교와 제도를 피 정복자들에게는 물론 그 백성들에게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자 소수민족들의 제도와 문화와 풍속을 보존하여 발전시키는데 후원했던 것이다.
제 32장 4절 예루살렘의 성전 건축(에스라 3장-6장)
귀환한 포로들이 고토(故土)에 돌아와서는 모두 자기들의 조상들의 본성으로 돌아갔었으나 그 다음해인 7월에는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여왔다. 칠월은 일년 중에 가장 큰 그들의 절기의 달로서 1일은 나팔을 불어 기념하는 성회가(나팔 절) 있고 10일은 대속죄제일이요, 15일은 7일 동안 연속으로 지키는 초막절이었다(레 23).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번제를 드리되 옛 성전의 터 위에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조석으로 번제를 드렸다. 그들이 그렇게 성회를 지키며 제사에 힘쓴 것은 단순한 해방과 귀환의 감격에서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태도에서 어려울 때에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는 간절한 그들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그 다음 해에 드디어 성전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착공 전에 벌써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고 기름을 주고 바사와 고레스의 조서대로 베바논에서 욥바까지 백향목을 운반하게” 하였다(에스라 3:7).
드디어 성전의 지대를 놓게 되었을 때 노인들은 오히려 젊은이들과 달리 그 규모의 적음을 보고 슬퍼 통곡했다(스 3:12). 사실은 그들이 슬퍼한 것은 그 화려함이 옛날 같지 못하고 또 법계에 대한 향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구약학자 ‘발톤’은 말하기를 새 성전의 기초는 옛 성전의 남아 있는 그 터 위에 옛 주추를 찾아 같은 규모로 지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저들의 감격은 잠간이었다. 드디어 그들은 큰 애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북방 사마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돌아온 유다 포로들이 성전을 건축한다는 말은 듣고 저들도 같이 건축할 것을 제의해 왔다(스 4:2). 이들은 본래 앗수르 왕 에살하돈(기원전 681-669)이 식민정책으로 폐허되었던 이스라엘로 이민을 왔던 사람들이었다(왕하 17:24). 그들은 거기에 와서 자기들의 신도 섬기고 여호와도 섬기는 혼합종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왕하 17:27-33).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는 하나의 지방 신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스룹바벨은 그들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부터 그들은 성전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들은 파사 왕에게 유다인들을 고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고소 내용인즉 “유다 인들은 성곽을 건축하는데 그렇게 되면 파사를 배반할 것이라”고 모함했다.
드디어 건축을 중지시키는 왕의 회답이 내려 약 15년 가까이 성전 건축은 중단되었다. 귀환포로들은 예루살렘 근방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으나 가뭄은 계속하여 생활은 매우 궁핍해졌다(학 1:10, 11). 더구나 그들은 성전 건축에는 더 생각할 여유까지 잃어버리도록 그들의 신앙적 감격은 사라졌다. 학개 1장 2절에 보면 그 때에 그들의 심정을 표현한 말에,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 하였다”고 까지 말한 것을 본다.
1. 성전 건축 중단기간 중의 파사의 정치정세
그 기간 중의 파사왕은 고레스의 아들 Cambyses와 까우마타이었다. 이 기간은 파사에 있어서 매우 어려운 난국이었다. 특별히 Cambyses 왕은 파사를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킨 애굽을 점령하려고 출정한 때이었다.
이렇게 파사의 정치적 형편이 다급해진 때에 사마리아의 총독이 귀환하여 유다 인들의 성곽 건축을 서둘며 파사를 배반하려 한다는 상소문은 파사 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또 특별히 그가 애굽 출정 길에 나선 후에는 본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즉 그 동생 고레스의 차남인 스멜디스(헬라어 명칭)가 형을 반역하여 난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Cambyses 왕은 듣게 되었다.
그래서 곧 그는 돌아와서 그 아우를 암살해버렸다. 그런데 사실 반란을 일으킨 자는 그 동생이 아니라 동생의 이름을 빌린 제삼자인 까우마타 이었다고 한다. 드디어 그 반란은 성공되어 왕위를 점령했고, Cambyses는 자살하고 말았으며 그가 죽은 2개월 후에 다시 파사에 군사반란이 일어나 까우마타는 처형되었고(왕위의 이름은 스멜디스이었다), 드디어 다리오 왕 1세가 위에 올랐다.
2. 학개와 스가랴선지의 활동
이스라엘에 귀환자들이 흉년으로 곤고를 겪고 있을 때에 선지자 학개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일에 게을리 한 징계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선포하기를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여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떨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5, 6)라고 했고, 다시 그들에게 권면하기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 ...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 집에 빨랐음이니라.”(학 1:8, 9)고 하였다.
그리고 용기를 잃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들에게는 격려하는 말이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학 2:4)고 하셨다.
또 다른 한편 옛날의 솔로몬의 성전을 기억하여 그같이 화려하지 못함을 슬퍼하는 자들을(에스라 3:10-13) 위해서는 오히려 위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학 2:7, 8). 하셨고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9) 하는 여호와의 계시를 저들에게 말했을 때 그들은 크게 힘을 얻어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했다 이것은 다리오 왕 2년 6월 이었다”(학 1:14, 15).
또 뒤이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가랴를 세워서 실만 중에 있던 스룹바벨을 격려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했고, 스가랴 4장 7절에서는 “큰 살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했고 또 스룹바벨의 손이 이전의 지대를 놓을 때에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고 스가랴 4장 9절에서 말씀하셨다. 마침내 다리오 왕의 허가를 얻어(6:13) 건축은 크게 진척되어 드디어 착공한지 20년 후인 516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하는 것은 선지자들의 성전을 그 자체의 가치에서가 아니라 나타날 메시야의 상징임을 강조함으로써 이스라엘 자녀들의 신령한 눈이 성전의 실체인 나타날(메시야)를 보게 하려고 힘썼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스가랴서의 후반부(9:1-14:21)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나타날 그의 왕국, 참 성전은 그의 수난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밝혔다. 그가 나귀를 타고 시온성에 들어오실 모습과(슥 9:9) 은 30에 팔리는 것과(11:12, 13) 그가 창에 찔릴 것과(12:10; 13:6), 그의 죽음으로 속죄의 샘의 문이 열릴 것을(13:1) 알려주었다. 참 성전은 이러한 그의 피로 값 주고 사게 되어질 것임을 밝혀주었다. 그는 드디어 왕 중 왕이 될 것이요(14:8), 온 만국의 백성은 그 앞에 회개하며 돌아올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
에스라 6장에서 성전 건축이 완공되고 7장부터는 에스라의 역사기록이다. 7장 이후 스가랴의 이름이 다시 등단되지 않는다. 6장과 7장간의 시간은 약 60년간이 된다. 이러한 긴 기간인 공백 중에 에스더의 사건 등이 있었다(아하수에로 왕 3년은 기원전 483년). 그렇다면 에스라가 본국에 귀환하기 약 25년 전의 일이 될 것이다(에스라 본국 귀환은 기원전 458년이었다). 성전 완공 시의 파사왕은 다리오 1세이었으나 그 다음 왕은 아하수에로 왕이다.
3. 아하수에로 왕의 자취
아하수에로 왕은 고대 헬라 역사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를 침략한 일이 있으나 ‘살라미스’의 해전에서 크게 실패하고 그의 군사들을 거의 잃어버렸던 일이 있었다(기원전 479). 처음 그는 아덴까지 침입하여 크게 승리했으나 그만 해전에서 실패함으로 후퇴했다. 에스더의 사건은 그의 즉위 3년(483)의 일이었으니 그의 패전은 에스더의 사건이 있은 지 4 년 후의 일이었다.
다리오 왕과 아하수에로 왕 시대의 궁터는 파사의 수산에서 발굴되었는데 그 궁전의 건물 면적은 약 2.5에이커에 이르고, 옥좌가 있던 왕실은 36개의 조각된 각주가 있었고 그 기둥은 고가 67피트에 이르고 천정은 레바논의 백향 목으로 되어 있었다. 그 궁은 바로 에스더 왕후가 살던 곳이었을 것이다.
4. 에스라의 귀환(스 7:27-10:44)
파사 왕 아하수에로 왕의 뒤를 이은 아닥사스다 1세가 위에 오른 후 7 년에 제사장 아론의 후손인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말하자면 그의 일행의 귀환은 포로들의 제 2차 귀환이었다. 그 때 그는 많은 사람들과 같이 동행 환국했다.(스 8:1-20).
사실 그때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려 바벨론에 거주하는 유다 인들이 본토에 돌아갈 뜻이 있는 자는 에스라와 같이 동행할 것을 권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을 위하여 많은 은금까지 주었다(스 7:15, 20). 돌아온 그들은 은과 금을 성전에 바치며(8:33)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 열둘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8:35). 여기에 열둘이란 것은 이스라엘의 12 지파는 앗수르의 점령과 더불어 이스라엘 북방에 10지파는 다 분산 되었다는 학설을 뒤 엎는 말이다.
사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앗수르의 사르곤(사르곤 2세, 기원전 721-705)이 사마리아를 점령했을 때 잡혀간 포로의 수는 불과 27.290명과 병거는 50승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숫자는 북방 이스라엘의 전체 인구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대로 본토에 남아 거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가 돌아온 후에는 남아 있던 북방 이스라엘인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귀환한 유다 인들까지도 (스 10:7-9)벌써 많이 이방화가 되었고(스 9:1), 이방 결혼을 인하여 타락해 가고 있었다(스 9:2) 그러나 에스라 시대의 회개운동으로 저들은 옛날의 순결을 회복하는데 큰 역사가 있었다.(스 9:5, 10:1, 2) 때는 벌써 성전 완공 후 60년이 되어가는 기원전 458-557년경이었다.
5. 에스라의 귀환시대에 관한 이론
에스라의 귀환시대에 대하여 어떤 급진적 비판 학파들은 에스라 7장 7절 이하의 아닥사스다 7년을 아닥사스다 2세의 7년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연대들을 따르게 될 때는 느헤미야 13:6의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느헤미야가 일단 파사로 돌아간 것은 벌써 에스라의 부흥운동이 있은 후의 일인 것임을 생각할 때 모순 된다.
제 32장 5절 느헤미야 귀환과 성곽 건축(느헤미야 1-13)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1세의 궁궐에서 술 관원의 직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에 그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이 큰 환란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었고 성문은 타 버렸다는 소식을 그의 아우 하나니로부터 들었다(느 7:2; 1:1-3). 이렇게 되기까지의 역사적 경로는 이렇다. 다리오 왕이 유다 인들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는 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하수에로 왕이 등위하자 그들은 또 다시 모략을 시작했다(스 4:6).
그러한 사실들이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에스더서에 나타난 대로 보면 파사 정부의 요인들과 유다인들 사이에는 어떤 간격이 생겨진 것을 보아서 그들의 고소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던 차에 다음 왕 아닥사스다가 등위했다. 그때 사마리아 인들은 그들을 구체적으로 모해할 구실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유다의 귀환한 포로들이 예루살렘의 성곽을 쌓게 된 것은 실제에 있어서 파사 왕궁의 허가를 맡은 일은 아니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그들이 파사를 반역하려 계획한다는 증거를 삼았다. 그들은 아닥사스다 왕에게 고발하기를 옛날 앗수르와 바벨론 시대에도 유다 인들은 성곽을 든든히 쌓으므로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는 과거의 역사를 들어 이번에도 유다 인들은 파사 정부를 반역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모략은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왜냐하면 그 왕은 일찍이 즉위 초에 애굽의 반란에 있어서 그것을 진압하는데 6년의 세월이 걸렸던 일이 있었다(기원전 460-454).
이러한 경험이 있는 아닥사스다 왕은 유다 인들의 반역의 가능성에 신경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왕은 드디어 유다 인들의 성곽건축을 중단시켜버렸다.
그러나 그 후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느 1:3)는 말을 보아 그 성은 일부 건축되었던 것으로 본다.
사마리아의 원수들이 성을 훼파시켰다는 소식을 느헤미야가 들은 것은 아닥사스다 왕 20년이었다(느 1:1). 그는 곧 아닥사스다 왕의 허가를 얻어 예루살렘에 귀환했다. 그는 왕에게 상당한 권한을 받았다. 그의 직책은 유다 땅 총독이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사마리아인들은 크게 당황했고 근심했다(느 2:9). 이처럼 느헤미야에게 큰 호의를 베푼 왕은 본래 그 성곽건축을 중단시켰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협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1. 아닥사스다 왕의 성곽건축 협조
그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 때의 정세는 벌써 많이 변하여 있었다. 기원전 488년 즉 아닥사스다 왕 17년에 아바르 · 나하라의 총독인 메가비주스는 파사의 정권을 반항하는 봉화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던 일이 있었다. 본래 메가비주스는 왕의 즉위 후 10년경에 있었던 애굽의 반란을 앞장서서 진압한 장군이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그 왕을 반역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에 그와 협력하여 파사를 반역한 사람들은 곧 유다 인들을 고소했던 그 사람들이었다. 즉 사마리아의 총독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연히 아닥사스다 왕은 유다 인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왕은 오히려 예루살렘의 성곽을 견고히 하는 것은 파사 제국을 위하여 유익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2. 새로운 원수 산발랏
애굽과 사마리아의 반란 실패 이후 사마리아의 르훔과 심새는 다시 역사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의 위를 대신하게 된 자가 곧 산발랏 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의 총독 위치에서 다시 유다 인들의 원수로 등단하게 된다. 그는 본래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유다와 그 인근지역을 모두 관할하는 권세를 가졌었으나 유다의 총독으로 느헤미야가 부임하게 되므로 그의 지위는 축소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느헤미야를 경계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는 드디어 자기의 세력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기의 세력 하에 있는 암몬 지역의 부 총독 도비야와 서북 아라비의 부 총독 게셈과 동맹을 하고 느헤미야의 성곽건축을 방해하게 되었다. 그들의 방해는 끈질긴 것이었으며 마음에는 근심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업신여겼다(느 2:16,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성곽은 재건되어 감을 보고 “저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리라”고 무시하거나 두고 보자는 식으로 무시하였다(4:3).
그러나 일이 점점 성취되어 감을 보고 이제는 폭력으로 그것을 방해하려 했다. 그래도 저들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을 때는 드디어 화해 정책으로 유혹하여 아주 해쳐버리려는 음모를 꾸몄다(6:2). 심지어 저들은 소위 선지자 스마야를 매수하여 예언케 하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라.”(6:10)하니 느헤미야와 일꾼들은 성전으로 도망하여 가서 생명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6:10). 그러나 그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곽은 마침내 52일 만에 완공되었다(6:15). 원수들은 드디어 하나님이 느헤미야와 같이 하심을 보고 두려워하며 낙심했다.
3. 산발랏과 도비야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
애굽으로 내려간 유다 인들의 정착지인 ‘엘레핀’ 지역에서 발굴된 소위 엘레핀 파피루스의 아랍어 문헌에 의하면 거기에 산발랏과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즉 그 문헌의 내용은 애굽의 유다 인들이 그들의 성전건축의 소망을 사마리아의 총독인 산발랏에게 진술하여 그의 협력을 간구하는 것이었는데 그 맺는 글에서 “이 편지의 전체 내용은 또한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의 두 아들인 ‘델라이야’와 ‘셀레미야’에게도 ...”라고 되어 있다.
또 도비야에 대해서도 애굽의 오아시스 지구로 ‘파움’이라고 불리 우는 지방의 ‘게자’란 곳에서 발굴된 소위 ‘제노 · 파피루스’에 나타난 것을 보면 거기에는 팔레스틴 지구를 총괄하는 암몬 총독 도비야가 직접 기록한 것이다. 이 밖에도 도비야의 기록이 있는데 암몬 동부인 ‘아락엘 에밀’에서 도비야의 가문의 성지가 발굴되었는데 그 근처에는 그 가정 묘지가 있다. 그 성의 외벽 파편들에 아랍어로 도비야란 이름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고고학자 알브라이트의 감정에 의하면 그것은 기원전 400년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기에서 산발랏의 두 아들 ‘델라이야’나 ‘셀레미야’나 또는 ‘도비야’ 등의 그 명칭의 말미의 야웨의 약칭으로 되어 있음을 보아 그들의 부모나 그들은 여호와를 숭배했던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유일신 여호아를 섬겼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 여호와를 하나의 지방 신으로 섬긴 증거일 것이다.
4. 느헤미야의 다릭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7:70)
예루살렘의 성전건축을 위하여 어떤 족장들은 ‘금 일천다릭’ 또 어떤 족장은 ‘금 이만 다릭’ 도 나머지 백성들은 ‘금 이만 다릭’을 바쳤다고 했다(느 7:70-72).
여기 ‘다릭’이라는 금전의 명칭은 히브리 원문대로는 드라크마라고도 읽을 수 있다. 물론 헬라 주화인 것이 사실이나 그것은 벌써 기원전 5세기부터 아세아의 근동지방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이 증명된다. 즉 예루살렘 남방 수리지점에 있는 베릍츠 줄 지역에서 헬라의 주화 드라크마 6개를 발굴했다. 그것은 파사시대와 동시대의 것으로 감정되었다. ‘아춰’에 의하면 그 시대에 벌써 헬라의 상인들은 멀리 아세아의 근동지역에 내왕하면서 무역이 계속되었다고 지적했다. 그와 동시에 알브라이트는 같은 시대에 애굽에서도 드라크마의 주화를 사용했다고 ‘엘레판틴 파피루스’에서 증명되었다고 보고했다.
5. 건축된 성곽 문들
느헤미야 3장에는 그 성곽의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건축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 성곽의 문은 8개 내지 10개가 있었다.
(1) 양 문(1절)
이것은 성곽의 동북쪽에 있었는데 그 옆에는 베데스다 못이 있었다(요 5:1). 제물 된 양들을 그 못에서 씻어 그 문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불렀던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 성문은 대제사장 엘리아삽과 그 형제 제사장들이 함께 일어나 건축하였고 또 그것이 완공될 때는 그것을 성별하여 다른 문들과 확실하게 구별하였던 것이다.
(2) 어 문(3)
이는 북쪽 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요단강과 갈릴리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운반하여 들어온 것에서부터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3) 옛 문(6)
이 성문은 지금의 다메섹 문에 해당되는 문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다른 어느 곳에서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4) 골짜기 문(13)
서남쪽에 위치하여 있는 문이다. 이 문은 힌놈의 골짜기를 향하여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과거 웃시야 왕이 견고케 했던 그 당시의 이름 그대로이다(대하 26:9).
(5) 분문(14)
성 남쪽 중아에 있는 문이다. 성안의 모든 오물들을 실어내는 문이다.
(6) 샘 문(15)
이 문은 실로암 못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다. 느헤미야 3장 15절에서 보는 대로 왕의 동산 근처 셀라(실로암)의 못가에 있었다고 했다.
(7) 수 문(26)
이 문은 성전에서 쓰는 물을 실어들이기 때문에 불러왔던 이름이다.
(8) 마 문(28)
동쪽에 있는 문으로서(렘 31:40) 이곳으로 말들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아마도 이 문은 왕궁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느 3:25).
(9) 동문(29)
이 문은 아마도 앞서 말한 ‘수문’과 동일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10) 에브라임 문과 감옥의 문
느헤미야 3장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즉 에브라임 문과 감옥의 문이다. 에브라임 문은 성곽 북쪽 즉 옛문을 향하여 가는 서편 방향으로 위치하여 있었을 것이고, 감옥의 문은 아마도 성곽 동쪽 즉 수문을 향하는 북편 방향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도시에 있어서 성문이란 매우 중요하다. 누구든지 성문을 통하지 않고 그 성에 들어갈 수 없고 또 야간에는 언제나 성문은 잠겨져 있는 법이었다. 놋으로 된 빗장과 자물쇠까지 구비되었던 것이 느헤미야의 성곽이었다(느 3:3, 6, 13). 한 나라의 힘은 곧 그 성곽과 그 성문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 성문을 점령하는 것은 곧 그 성을 점령하는 것으로 알았다(창 22:7). 그러므로 느헤미야 3장에서 보면 특별히 성곽을 건축함에 있어서 성문 건축에 큰 힘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제 32장 5절 느헤미야 귀환과 성곽 건축
5. 건축된 성곽 문들
느헤미야 3장에는 그 성곽의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건축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 성곽의 문은 8개 내지 10개가 있었다.
(1) 양 문(1절)
이것은 성곽의 동북쪽에 있었는데 그 옆에는 베데스다 못이 있었다(요 5:1). 제물 된 양들을 그 못에서 씻어 그 문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불렀던 이름이다. 그러므로 그 성문은 대제사장 엘리아삽과 그 형제 제사장들이 함께 일어나 건축하였고 또 그것이 완공될 때는 그것을 성별하여 다른 문들과 확실하게 구별하였던 것이다.
(2) 어 문(3)
이는 북쪽 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요단강과 갈릴리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를 운반하여 들어온 것에서부터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3) 옛 문(6)
이 성문은 지금의 다메섹 문에 해당되는 문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다른 어느 곳에서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4) 골짜기 문(13)
서남쪽에 위치하여 있는 문이다. 이 문은 힌놈의 골짜기를 향하여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어졌다고 한다. 이것은 과거 웃시야 왕이 견고케 했던 그 당시의 이름 그대로이다(대하 26:9).
(5) 분문(14)
성 남쪽 중아에 있는 문이다. 성안의 모든 오물들을 실어내는 문이다.
(6) 샘 문(15)
이 문은 실로암 못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었다. 느헤미야 3장 15절에서 보는 대로 왕의 동산 근처 셀라(실로암)의 못가에 있었다고 했다.
(7) 수 문(26)
이 문은 성전에서 쓰는 물을 실어들이기 때문에 불러왔던 이름이다.
(8) 마 문(28)
동쪽에 있는 문으로서(렘 31:40) 이곳으로 말들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아마도 이 문은 왕궁과 연결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느 3:25).
(9) 동문(29)
이 문은 아마도 앞서 말한 ‘수문’과 동일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10) 에브라임 문과 감옥의 문
느헤미야 3장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즉 에브라임 문과 감옥의 문이다. 에브라임 문은 성곽 북쪽 즉 옛문을 향하여 가는 서편 방향으로 위치하여 있었을 것이고, 감옥의 문은 아마도 성곽 동쪽 즉 수문을 향하는 북편 방향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도시에 있어서 성문이란 매우 중요하다. 누구든지 성문을 통하지 않고 그 성에 들어갈 수 없고 또 야간에는 언제나 성문은 잠겨져 있는 법이었다. 놋으로 된 빗장과 자물쇠까지 구비되었던 것이 느헤미야의 성곽이었다(느 3:3, 6, 13). 한 나라의 힘은 곧 그 성곽과 그 성문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 성문을 점령하는 것은 곧 그 성을 점령하는 것으로 알았다(창 22:7). 그러므로 느헤미야 3장에서 보면 특별히 성곽을 건축함에 있어서 성문 건축에 큰 힘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4. 느헤미야의 다릭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7:70)
예루살렘의 성전건축을 위하여 어떤 족장들은 ‘금 일천다릭’ 또 어떤 족장은 ‘금 이만 다릭’ 도 나머지 백성들은 ‘금 이만 다릭’을 바쳤다고 했다(느 7:70-72).
여기 ‘다릭’이라는 금전의 명칭은 히브리 원문대로는 드라크마라고도 읽을 수 있다. 물론 헬라 주화인 것이 사실이나 그것은 벌써 기원전 5세기부터 아세아의 근동지방에서 널리 사용되었음이 증명된다. 즉 예루살렘 남방 수리지점에 있는 베릍츠 줄 지역에서 헬라의 주화 드라크마 6개를 발굴했다. 그것은 파사시대와 동시대의 것으로 감정되었다. ‘아춰’에 의하면 그 시대에 벌써 헬라의 상인들은 멀리 아세아의 근동지역에 내왕하면서 무역이 계속되었다고 지적했다. 그와 동시에 알브라이트는 같은 시대에 애굽에서도 드라크마의 주화를 사용했다고 ‘엘레판틴 파피루스’에서 증명되었다고 보고했다.
3. 산발랏과 도비야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
애굽으로 내려간 유다 인들의 정착지인 ‘엘레핀’ 지역에서 발굴된 소위 엘레핀 파피루스의 아랍어 문헌에 의하면 거기에 산발랏과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즉 그 문헌의 내용은 애굽의 유다 인들이 그들의 성전건축의 소망을 사마리아의 총독인 산발랏에게 진술하여 그의 협력을 간구하는 것이었는데 그 맺는 글에서 “이 편지의 전체 내용은 또한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의 두 아들인 ‘델라이야’와 ‘셀레미야’에게도 ...”라고 되어 있다.
또 도비야에 대해서도 애굽의 오아시스 지구로 ‘파움’이라고 불리 우는 지방의 ‘게자’란 곳에서 발굴된 소위 ‘제노 · 파피루스’에 나타난 것을 보면 거기에는 팔레스틴 지구를 총괄하는 암몬 총독 도비야가 직접 기록한 것이다. 이 밖에도 도비야의 기록이 있는데 암몬 동부인 ‘아락엘 에밀’에서 도비야의 가문의 성지가 발굴되었는데 그 근처에는 그 가정 묘지가 있다. 그 성의 외벽 파편들에 아랍어로 도비야란 이름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고고학자 알브라이트의 감정에 의하면 그것은 기원전 400년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기에서 산발랏의 두 아들 ‘델라이야’나 ‘셀레미야’나 또는 ‘도비야’ 등의 그 명칭의 말미의 야웨의 약칭으로 되어 있음을 보아 그들의 부모나 그들은 여호와를 숭배했던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유일신 여호아를 섬겼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 여호와를 하나의 지방 신으로 섬긴 증거일 것이다.
2. 새로운 원수 산발랏
애굽과 사마리아의 반란 실패 이후 사마리아의 르훔과 심새는 다시 역사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의 위를 대신하게 된 자가 곧 산발랏 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의 총독 위치에서 다시 유다 인들의 원수로 등단하게 된다. 그는 본래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유다와 그 인근지역을 모두 관할하는 권세를 가졌었으나 유다의 총독으로 느헤미야가 부임하게 되므로 그의 지위는 축소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더욱 느헤미야를 경계하게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는 드디어 자기의 세력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자기의 세력 하에 있는 암몬 지역의 부 총독 도비야와 서북 아라비의 부 총독 게셈과 동맹을 하고 느헤미야의 성곽건축을 방해하게 되었다. 그들의 방해는 끈질긴 것이었으며 마음에는 근심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업신여겼다(느 2:16,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성곽은 재건되어 감을 보고 “저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지리라”고 무시하거나 두고 보자는 식으로 무시하였다(4:3).
그러나 일이 점점 성취되어 감을 보고 이제는 폭력으로 그것을 방해하려 했다. 그래도 저들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을 때는 드디어 화해 정책으로 유혹하여 아주 해쳐버리려는 음모를 꾸몄다(6:2). 심지어 저들은 소위 선지자 스마야를 매수하여 예언케 하기를, “저희가 너를 죽이러 올 터이라.”(6:10)하니 느헤미야와 일꾼들은 성전으로 도망하여 가서 생명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6:10). 그러나 그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곽은 마침내 52일 만에 완공되었다(6:15). 원수들은 드디어 하나님이 느헤미야와 같이 하심을 보고 두려워하며 낙심했다.
1. 아닥사스다 왕의 성곽건축 협조
그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 때의 정세는 벌써 많이 변하여 있었다. 기원전 488년 즉 아닥사스다 왕 17년에 아바르 · 나하라의 총독인 메가비주스는 파사의 정권을 반항하는 봉화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던 일이 있었다. 본래 메가비주스는 왕의 즉위 후 10년경에 있었던 애굽의 반란을 앞장서서 진압한 장군이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그 왕을 반역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에 그와 협력하여 파사를 반역한 사람들은 곧 유다 인들을 고소했던 그 사람들이었다. 즉 사마리아의 총독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연히 아닥사스다 왕은 유다 인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왕은 오히려 예루살렘의 성곽을 견고히 하는 것은 파사 제국을 위하여 유익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제 32장 6절 느헤미야의 총독 시대와 에스라의 신앙부흥
예루살렘의 성곽의 완성(느 12:27-43)으로 총독으로서의 느헤미야의 사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일찍이 해방 초기에 스룹바벨이 유다의 총독을 지낸 후 다시 느헤미야가 총독이 되기까지 70년 동안 유다를 다스린 총독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적들은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그 여러 총독들은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토색하며 압제하였었던 것만은 알 수 있다(느 5:15; 말 1:8). 그러나 느헤미야에 이르러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그는 스스로 증거 하기를 자기는 유다의 총독으로 있는 동안(아닥사스다 왕 20년에서 32년의 12년간(13:6) 총독의 녹까지도 먹지 않았다고 했다(느 5:14, 18).
이처럼 그가 몸소 본을 보이게 된 것도 사실은 그때의 환경이 너무도 타락하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귀환한 유다인들 중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계급의 차이가 생기고 동포들을 종으로 매매하는 일까지 성행되어 있었다(5:5).
또 자기의 기업을 팔고도 속량할 길이 없는 자들도 속출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행위들을 크게 꾸짖어 그들로 하여금 모세의 법에 따라 그들의 생활들을 정리할 것을 호소했다. 즉 이식받기를 그치고(5:10), 종을 돌려보내고 기업을 무르고(5:11, 14), 또 동포들이 율법으로 돌아오기를 호소했다. 이 때 많은 백성들이 그의 호소에 호응하여 점점 나라는 안정되어 갔다(5:12, 13).
그러나 이제 느헤미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정치지도자로서의 그는 유다 인들의 종교생활을 지도할 수는 없었다. 그는 에스라에게 백성들을 율법으로 가르쳐 저들의 생활을 지도하여 줄 것을 건의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드디어 절기의 달 7월에(1일 나팔 절, 10일은 대속 죄 일, 15일부터 일주간은 초막절) 유다의 자손들은 각기 본성에서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여 에스라의 낭독하는 율법을 듣고(느 8:3, 8),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8:9-12).
이러한 놀라운 부흥은 사실 하나님의 율법을 들음으로 비로 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성전을 건축할 때의 그 열심과 또 에스라가 율법 책을 펼 때에 백성들이 일어나 손을 들고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며 얼굴을 땅에 대고 몸을 굽히던(8:5, 6) 그러한 간절한 마음,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사모하던 그 갈급한 마음에서 벌써 부흥은 시작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부흥은 상당기간 깨달음과(8:) 회개(9:)와 헌신과 실천운동으로(10:) 계속되었던 것이다.
1. 최후 선지자 말라기
말라기선지는 느헤미야 시대에 보내진 최후 선지자이다. 그의 선교의 시작은 성전의 완공된 후(말 3:1)이며 정상적인 제사제도가 회복된 때였다(1:7, 16). 그리고 그의 메시지의 내용에는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적 환경이 잘 반영되어 있다. 즉 제사장들의 해이한 마음과 불 경건을 책망한 일이라든가(말 1:6; 느 13:4, 9),
십일조를 게을리 했던 일(말 3:7-12)은 느헤미야가 12년간의 총독의 일을 끝내고 일단 파사로 철수했다가 돌아오기 바로 직전의 환경과도 잘 일치된다(느 13:6, 10-12). 또 이방인의 딸들과의 결혼을 책망한 것(말 2:23-28)도 느헤미야의 경우와 같다(느 13:23-28). 이러한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볼 때 말라기서의 기록은 물론 성전 건축이후일 것이나 그렇다고 느헤미야가 총독 되었던 그 기간도 아닌 것임이 분명하다.
말라기 1장 8절에 보면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하신 말씀을 읽는데 그러한 총독이 물론 느헤미야 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말라기서는 느헤미야가 일단 파사에 돌아갔을 때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느헤미야와 말라기로서 구약의 역사는 전부 끝났다. 신약 시대가 되기까지 중간시대는 주로 파사 제국과 헬라 왕국이 그 중심세력이 되어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성경은 이 시기에 대해서는 깊은 침묵을 지킨다.
오직 다니엘의 예언을 통하여 잠간 말할 뿐이고 근자에는 사해사본의 발굴로 그 조각들을 약간 엿볼 수 있다(편린). 그러므로 우리가 중간시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 밖의 자료에 의할 수밖에 없다. 구약의 제사장이 폐지되고 신약의 제사장은 영적인 제사장이 강조된다. 말라기는 신구약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1. 최후 선지자 말라기
말라기선지는 느헤미야 시대에 보내진 최후 선지자이다. 그의 선교의 시작은 성전의 완공된 후(말 3:1)이며 정상적인 제사제도가 회복된 때였다(1:7, 16). 그리고 그의 메시지의 내용에는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적 환경이 잘 반영되어 있다. 즉 제사장들의 해이한 마음과 불 경건을 책망한 일이라든가(말 1:6; 느 13:4, 9),
십일조를 게을리 했던 일(말 3:7-12)은 느헤미야가 12년간의 총독의 일을 끝내고 일단 파사로 철수했다가 돌아오기 바로 직전의 환경과도 잘 일치된다(느 13:6, 10-12). 또 이방인의 딸들과의 결혼을 책망한 것(말 2:23-28)도 느헤미야의 경우와 같다(느 13:23-28). 이러한 모든 것을 종합하여 볼 때 말라기서의 기록은 물론 성전 건축이후일 것이나 그렇다고 느헤미야가 총독 되었던 그 기간도 아닌 것임이 분명하다.
말라기 1장 8절에 보면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하신 말씀을 읽는데 그러한 총독이 물론 느헤미야 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말라기서는 느헤미야가 일단 파사에 돌아갔을 때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느헤미야와 말라기로서 구약의 역사는 전부 끝났다. 신약 시대가 되기까지 중간시대는 주로 파사 제국과 헬라 왕국이 그 중심세력이 되어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성경은 이 시기에 대해서는 깊은 침묵을 지킨다.
오직 다니엘의 예언을 통하여 잠간 말할 뿐이고 근자에는 사해사본의 발굴로 그 조각들을 약간 엿볼 수 있다(편린). 그러므로 우리가 중간시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 밖의 자료에 의할 수밖에 없다. 구약의 제사장이 폐지되고 신약의 제사장은 영적인 제사장이 강조된다. 말라기는 신구약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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