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민의 역사
제 1권(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형성)
강의 이현채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연구원
선민의 역사
(제 1 권)(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형성)
차 례
1.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형성 15 ........................................ 4
2. 민족의 형성과 수난 4 ................................................... 7
3. 족장시대 이전의 사회생활 7 ............................................... 11
4. 새 조상 노아 11 .................................................................... 14
5. 홍수 후의 노아 15 .................................................................. 22
6. 왕권 시대의 출발 22 ........................................................ 22
7. 족장시대의 사회적인 배겨 22 .............................................. 26
8. 이방인의 잘못된 종교 26 .............................................. 33
9. 이방 법전의 종류 34 ............................................................. 43
10. 가나안의 초기 원주민들 43 .............................................. 46
11. 가나안의 후기 원주민들 46 .............................................. 50
12. 이어지는 혈통 50 ............................................................ 56
13. 아브라함의 여정 56 ............................................................ 59
14. 아브라함의 출생 연대 59 .................................................. 72
제 1장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의 형성[제 1권]
* 문명 사이에 서 있는 이스라엘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필연적으로 주변 국가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경우 약소민족으로서 주변 강대국으로부터의 영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이며 그 사람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과정을 통하여 하나의 민족을 이루게 되었는가? 그들의 종교적 뿌리는 무엇인가? 그들의 하나님 야훼는 누구이며, 어떻게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는가? 이러한 질문들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이 위치하며 살고 있는 근동 지방의 다양한 역사와 변화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한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계 3대 대륙인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연결하는 교량적 위치에 놓여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과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문제는 밀접한 관계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약세에 처해있던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아 왔으며, 그들로부터의 종교적 영향을 배제 할 수 없었고, 인류 문명의 발생지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대 문명과의 경제적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바벨론을 비롯한 앗수르와, 페르시아 제국들은 직접 이스라엘을 지배했었다. 뿐만 아니라 서쪽의 아나톨리아와 그리스 및 로마 제국 역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서방의 이 문명은 이스라엘을 지나 동방의 그것과 충돌하였다. 이러한 동서의 만남도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룩된 셈이다.
한편 이스라엘은 기름진 초승달의 서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화와 사막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동쪽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줄기를 타고 초승달 모양을 이루며 북서쪽으로 발달한 기름진 평야는 이스라엘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 끝을 이루고 있으며, 이집트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사막과 만나게 된다.
이스라엘을 지나가는 중요한 고대 도로는 양대 문명을 연결하여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안에서 발달된 도로는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며, 도로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들과 인구의 밀집 상태, 군사적 행동 등은 많은 사건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대의 역대 왕들의 매우 중요한 사업 가운데 도로 공사는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왔으며, 이는 곧 정복의 한 과정으로 취급되어졌다(사62:10 ; 40:3 ; 57:14 ; 49:11 ; 렘18:15). 동시에 국제도로는 상업 노선으로 경계가 교류하는 역할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을 통과하는 국제도로는 해변의 길과 왕의 대로로 크게 구별된다. 이 두 가지도로는 많은 군인, 사신, 상인, 여행자들이 지나 다니는 길로서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이스라엘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쳐왔다.
이사야 9장 1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해변의 길”은 이집트 탈출 사건에서 언급되고 있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출13:17)과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바다의 길”로 불리는 이 도로는 라틴말로 Via Maris라 칭한다. 이런 도로를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들은 이집트로부터 시작하여 가자, 아스돗, 아벡(삼상4:1 ; 29:1 ; 왕상20:26 ; 왕하13:17), 므깃도(왕상9:15~19 ; 계16:16), 하솔(왕하15:29), 다마스커스를 지나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게 한 것이다.
한편 왕의대로는 요단 동편산지를 중심으로 남북을 향하여 길게 뻗은 도로로써 성경에 기록하기를 민수기 20장 17절과 22장 22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도로는 세렛(신2:13), 아르논(신3:8), 얍복(신2:37 ; 3:16 ; 민21:24 ; 창32:22), 그리고 야르묵 등의 큰 와디가 가로 놓여 있어서 장애물이 되고 있다. 이즙트 탈출의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도로를 따라 모압 산지 느보산에 이르러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신2~3장). 한편 창세기 14장에서는 왕의 대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많은 도시 국가들의 이름이 열거 되어 있다.
제 2장 민족의 형성과 수난
성경 밖에 있는 역사가들은 족장시대에 대한 역사성에 대하여 의심한다. 아브라함 같은 인물은 실제적인 인물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서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만들어 놓은 전설적인 인물로 생각하려 한다. 이는 역사상의 많은 민족들이 자기들의 종족 영웅을 만들어 숭배하였듯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왕국시대 이후 그 민족들에 의해서 전하여지기 시작한 인물이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학설의 대표자는 19세기의 고등비평 학자인 쥴리어스 웰후우젠 이래 많은 비평학자들이 취하여 온 학설이다. 웰하우젠은 말하기를 “우리는 족장시대의 역사적 지식은 알 수가 없고, 오직 이스라엘 민중 속에서 그의 전설이 시작된 그 시대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계속 말하기를 전설이 무의식중에 조작되어 아득한 옛날의 인물 같이 되었고 영화로운 우상 같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힘이 더하여 졌지만 근세에 있어서 고고학자들의 맹렬한 활동은, 웰하우젠을 중심으로 모였던 많은 고등비평 학자들이 전설로 만들기 위하여 알 수 없다와 또는 모른다는 면들에 대하여 고고학자들의 많은 발굴로 인하여 발견된 자료들이 족장시대의 역사성을 알려 줌으로서 비평학자들의 학설들은 그 빛을 잃고 말았다. 이 시간에는 웰하우젠의 잘못된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통쾌한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이스라엘의 역사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자.
제 1절 고고학적 자료
1. 앗수바니팔의 도서관
이것은 앗수르의 최후의 왕 앗수바니팔이 수집한 비문들로 고대 니느웨의 궁터의 발굴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영국의 학자 라야드와 라쎔에 의하여 1854년에 발굴된 것으로서 약 26,000개의 서판들이 있다. 그 문서들 중에는 창조의 설화와 홍수의 기록이 유명하다. 지금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서판들은 고대 앗수르어와 바벨론어 연구에 있어서 기초자료들이 되었다. 앗수바니팔은 흔히 성경 명칭에 오스납발(에스라4:9, 10) 이라고 하는 그 인물일 것이라고 한다.
2. 마리 서판
마리 서판은 수리아 지방 서남쪽 유브라데스 강 근처의 고대 도성으로써 주전 1933~1960년에 걸쳐 고고학자 파로트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약 15에이커가 넘는 당시 18세기의 왕 궁전에 약 300실에 이르는 궁전과 더불어 다곤 신당과 여신 이쉬타의 신당이 발굴되었다. 그 서판들 중에는 아브라함 당시에 하란의 여러 지역들의 이름과 아브라함의 계보에서 보는 나홀, 데라, 수룩의 지명들이 자주 보이고 가나안의 도성으로서는 하속의 이름이 나타나 있다(창11:22, 21, 25 => 도성의 이름들이 인명과의 관계는 아직도 확실한 설명이 없다.)
3. 뉴지 서판
뉴지 서판은 메소포타미아의 하란 땅에 위치한 곳으로 1925~1931년에 약 20,000매 가량의 서판이 발굴되었다. 그것들은 기원전 약 1,500년 경의 것으로서 당시 그 지역의 점령자였던 호리 족속들의 유물들이다. 아카디언어와 바벨론어로 된 그 서판들 중에는 특별히 자기들의 생래의 기업을 어떤 필요한 물건과 임으로 교환하는 풍습과 또 가정의 수호신을 차지함으로 그 가정의 상속권을 가진다는 판례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족장시대의 사회상을 아는데 유익한 자료들이다.
야곱의 아내 라헬은 아버지 라반의 집의 수호신인데, 데라빔을 도둑한 사건은 뉴지 서판의 조명으로 본다면 그 아버지의 재산의 상속을 위한 행위 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일부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야곱이 라반의 두 딸을 아내로 얻게 될 그 당시에 라반에게는 아들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라반에게 아들들이 생기자(창31:1) 라헬은 자기의 상속권을 잃게 되었으므로 이제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데라빔을 도둑질 했을 것이라고 했다.
4. 라스 솨마라 서판(Ras Shamra Tablets)
라스 솨마라의 고대 이름은 우가리트라는 도시 국가였다. 지중해 북방 해안 산간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수천매에 달하는 서판들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는 연속적으로 기록된 것들도 있었다. 특별히 이 서판들은 이제 앞으로 다시 설명하겠지만 바알신화와 아낫 여신에 관한 것을 위시하여 당시의 이방 종교의 형편을 아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라스 솨마라의 서판들은(1929~1960) 여러 해를 걸쳐서 불란서 학자에 의하여 발굴 되었다. 발굴 중에는 왕궁과 바알신전과 기타 많은 동상과 무기와 기물들이 서판들과 같이 발굴 되었다.
5. 아마르나 서판(Amarna Tablets)
이것은 주후 1887년에 애굽의 한 농부에 의하여 처음 발굴된 것이다. 약 350매에 달하는 문서들이다. 이것들은 기원전 약 1,400~1,360년에 있어서 팔레스틴과 수리아 지역의 왕들이 애굽의 바로 왕과의 어떤 관계에 있었던가를 아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자료들이다. 특별히 그 문서들 중에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반증하는 자료들이 있어서 흥미롭다. 그 서판들 중에는 하비루(Habiru)가 침입하여 모든 도성들이 파괴도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가나안 왕들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청원 문서도 있다.
6. 저주 문헌
소위 저주 문헌이라고 하는 것은 애굽 왕조들이 남긴 것으로 기원전 2,000~1,800년경의 자료들이다. 이 문헌들은 현재 서독 백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당시의 바로 왕들은 종종 팔레스틴과 베니게 또는 남부 수리아 지역을 침범하여 지배했다. 그 때에 바로 왕들은 원수들을 저주하기 위하여 마법적인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방법으로는 도자기 항아리의 표현이나, 또는 인간 모형(결박된 포로의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주문을 기록한 후 그들의 의식에 따라 그것을 파괴시킴으로 원수를 멸하는 예조로 삼았던 것이다(렘19:11). 그 주문들 중에는 그들이 멸하고자 하는 가나안 지역이나 수리아 지역의 여러 도성들과 왕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역사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들이 된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의 택하신 언약의 백성들의 구속사이다. 택함을 입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게 될 때는 그들에게 번영과 축복이 있었으나 그것을 버리고 세속적인 나라의 번영과 영화를 따르게 될 때는 하나님의 준엄한 징계가 늘 뒤 따르고 있었으나 말씀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형통하게 하셨다. 비록 그들은 왕정 정치 하에 있었던 때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치 하에 있어야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왕들과 지도자들과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종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해야 했다.
이 책을 펴내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과 자료가 요청되며, 창세 이후에 수천 년이라는 많은 세월이 흘러서 긴 구약의 역사와 문화와 계통적인 지식과 그 배경들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관심만 가지고 있다가, 무식이 용기로 통하듯이 시작을 하였으나 내용은 유식하게 정리하기를 바라지만 결국은 더 깊은 연구와 더 좋은 책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시작하고자 한다.
제 3장 족장시대 이전의 사회 생활
1. 아담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첫 사람이요 천하 인류의 시조이다(눅3:38). 이름의 뜻은 사람, 또는 붉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진흙을 빚어 그 육체를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활동케 하였다. 그리고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한 여인을 만드사 저의 배필 곧 아내가 되게 하셨다. 아담이 그 이름을 “하와”라 하니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결혼식이었는데, 이는 완성된 남자만으로는 생육하고 번성하지 못하여 여자를 창조하시므로 미완성이었던 인간 창조가 완성됨을 뜻한다. 이들의 사회생활은 무죄의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영교를 통하여 만족을 누리는 생활이었으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행위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꿈의 동산인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이다. 행위 언약이란 인간의 내면에 자유의지를 주사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했음을 뜻한다. 이 언약의 목적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과 순종하는 법을 깨달아 그 안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함에 있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아담을 첫 사람, 산 영(고전15:45), 육의 사람, 흙에 속한 자(고전15:46 ; 15:47~49), 그리스도의 모형(롬5:17, 21)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사단의 시험에 빠져서 에덴으로 돌아가야 할 꿈을 안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메시야인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며, 가정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고 경외하며 교제를 위한 제사의 제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소망과 관심은 아들을 낳으면 에덴을 회복시켜줄 여자의 후손인가?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이었다.
2. 사단
사단이란 여호와의 사자의 좌우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자(슥3:1)로서 능력은 있으나 하나님께서 불허하시면 한 사람도 괴롭게 못하고 마지막에 영벌에 들어갈 영적인 존재이다. 이들의 처음은 천사였으나 타락하여 사단이 된 것이다(계20:7,8 ; 마25:41).
3. 아담의 타락
하나님께서 짐승을 지으실 때에는 전체의 종족을 상대로 지으셨지만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는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아담 그 한 사람을 상대로 하고 그에게 생기(生氣)를 불어 넣어 만들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받은 생기는 인간이 받은 그 영혼(靈魂)이다. 인간의 영혼은 아담의 갈빗대로 이어져서 하와가 탄생되었으므로 하와의 영혼은 아담에게 포함이 되었다(고전11:8). 이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의 영혼이 그에게 포함되어 있음을 알자. 이렇게 예수님을 예표했던 아담이 타락하게 되었다. “나의 깨달은 것은 이것이라 곧 하나님의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전7:29) 하신 말씀과 같이 아담과 하와는 정직하게 지음을 받았으나 그만 사단의 유혹으로 타락하게 되었다.
4. 타락의 동기
하나님의 말씀인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보다는 오히려 뱀의 간사한 말의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한 사단의 말을 더 믿게 되었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이 싹트게 되었다. 하나님을 우러러 사모하며 예배할 생각보다는 하나님과 동등해 지기를 더욱 원하였으며, 또한 만족함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고 오직 하나만을 금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하나까지 탐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 후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났고 그 후 그들과 후손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5.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자들을 찾아 손수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이다(창3:8, 21). 아담에게는 의의 가죽 옷을 얻기 위해서 피 흘린 제물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와에게도 해산의 고통이라기보다는 산자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했으니 죄를 범한 여성을 특별히 권고하신 하나님의 긍휼인 것이다. 그리고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신 것도 긍휼이요, 지상의 모든 문화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허락하신 은혜이다. 특별한 은혜는 마귀를 이기고 영생에 이르는 축복의 약속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그의 후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침내 모든 죄악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고 더 좋은 에덴인 하늘에 있는 천국을 상속 받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6. 아담의 아들(가인과 아벨과 셋)
아담과 하와는 그 후 두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지어 가인과 아벨이라고 했는데, 아담이 이름을 짓는 일에 명수임을 알 수 있다(창2:19). 모든 사물의 이름을 지어 붙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중의 하나이다. 그 속성을 밝히 아는 지식과 또 그것을 집약하여 표현할 수 있는 지혜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담은 할 수 있다.
* 가인이란 얻었다는 뜻인데 아담의 장자이다. 아담과 하와의 기쁨은 에덴을 회복할 수 있는 여자의 후손인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인류 중 처음 태생인 가인이 에덴을 가지고 올 자가 아님을 아담은 알았고, 아버지 아담에게 실망을 준 가인은 에덴의 동편 놋(유리하며 방황한다는 뜻)에 거하면서 아들을 낳아 에녹이라 불렀고 그곳에 성을 쌓고 그 성을 에녹성이라고 했다(창4:16). 문제는 에녹이 여호와를 떠났다는 것이다.
* 가인도 죄를 범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셨는데, 그 표가 인간의 마음에 공포심을 주어 무서운 일을 만날 때에 두려워 떠는 것으로서 생명 보존의 본능과 두려움 때문에 몸을 떠는 행동은 상대에게 관대한 처분을 받는 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성경을 보면 가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모습이 보인다. 창4:6,7에 “어찌 낮을 들지 못하겠느냐”의 원문을 살피면 어찌 높이지 않겠느냐와 혹은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느냐로 번역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인은 끝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평생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았고, 두려움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을 최초로 쌓은 것도 가인인데 결국은 공포 때문이며, 사람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인의 생명을 보호하시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또한 가인의 후손을 통하여 물질문명을 발전케 하셨다. 이것도 크신 은총이 아닐 수 없다.
* 아벨은 둘째 아들이다. 이름의 뜻은 허무이다. 둘째를 얻을 때는 기쁨보다 인생의 허무를 느꼈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아벨의 운명을 그가 예감했다면 얼마나 깊은 영감의 소유자 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것도 더 나은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이기에 죽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의인이 죽임을 당하고 악인이 득세하는 그러한 불합리한 현실에 부딪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벨은 결코 허무하게 죽지 않았다. 히브리 기자는 11:4에서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오히려 말하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믿음이란 허무한 것을 허무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아벨은 죽었으나 오히려 믿음으로 살아서 참 삶의 길이 무엇임을 천추만대에 전하고 있다.
* 가인은 아벨의 영혼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 상상컨대 아벨은 부모에게서 들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들은 바를 믿음으로 실천했던 것이다(롬10:14,17).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이었고,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고, 이로써 의인의 조상이 되었다.
* 셋은 아담의 셋째 아들이다. 이름의 뜻은 대신 둠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셋을 통하여 아담의 장자의 직분을 이어가게 하시고 여호와를 섬기는 자의 시조가 되게 하셨으며 그 자손 중에서 구주가 탄생되었다. 아담은 912세를 향수 하였다(창4:25 ; 5:7 ; 눅3:38).
7. 셋의 아들부터 야렛까지의 계보
에노스는 아담의 손자요 셋의 아들이다. 이름의 뜻은 남자이다. 게난은 광대한 소유라는 뜻이요, 야렛은 마할랄렐의 아들이요, 이름이 뜻은 내려감이다(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창세기 5장에서 간단하게 다루어지며, 평범한 사회생활을 한 것 같다. 오늘 날과는 다르게 많은 자녀들을 낳으며 거느리고, 옛날의 가장들이 당하는 그 수고와 그 시험을 같이 당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보면 참 신앙생활이란 특별한 생활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의 평범한 생활을 살아가는 중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찾아야 한다.
* 우리에게는 때때로 경건하고 엄숙한 형식이 필요하지만 그 어떤 의식보다도 더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고, 나누어 살면서 생활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비하면 가인의 자손들은 굉장한 일들을 남겼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에녹성의 이름을 남겼고, 야발은 큰 장막을 치고 많은 육축을 기르는 목축가의 조상이요, 유발은 수금을 치고 퉁소를 부는 예술가의 조상이 되고, 두발가인은 동과 철과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8. 에녹 ~노아까지의 계보(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다. 에녹의 업적이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는 것으로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큰 업적을 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생을 마치는 것이야 말로 이에서 더 큰 성공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녹은 신앙의 승리자이다. 에녹은 세상이 악하다고 세상을 버린 자가 아니었다. 그 악한 세상을 믿음으로 이겼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했을 것이다.
창4:23에 보면 “내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 배 일진데 라멕을 위해서는 벌이 칠십칠 배 이리로다.”라는 이 말은 살인자 라멕이 의기양양하여 자기의 권세를 뽐내는 노래이었다. 이렇게 악한 자가 득세하여 하나님을 비웃는 그런 시대에 살았던 에녹은 그 시대상을 슬피 탄식하신다(유1:14~15).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의인을 악한 세상에 더 남겨 둠을 원치 않으셨다. 그를 부르시되 높이 들려서 취하여 감은 하나님께서 그로 화의 심판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함으로 생각된다(벧후2:5~9). 연대는 아담이 주전 약 4,000년으로 본다면 930세를 살았으니 주전 3,070년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출생 연대가 주전 2,166년으로 본다면 약 1,000년의 세월은 추적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 셋으로부터 데라까지 :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고 807년을 살다가 912세에 죽음,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고 815년을 지냈으며, 905세에 죽었다. 게난은 70세에 마할랄렐을 낳고 840년을 지내며 895세에 죽었으며, 야렛은 162세에 에녹을 낳았고 800년을 지내며 962세에 죽었다.
* 므두셀라는 에녹의 아들로서 성경의 인물중에 가장 장수한 자로 기억되고 있으며 187세에 라멕을 낳고 그 후 782년을 지내며 969년을 지내며 969세를 향수하였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고 그 595년을 지내며 777세를 향수하였다. 노아는 500년 후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9. 은혜를 입은 노아(창6장)
(1) 노아의 가문
노아는 아담의 8대손으로서 라멕이 182세에 아들을 낳고 노아라 이름하였으니 그 뜻은 안식과 위로로써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우리의 수고하는 것을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함인데, 곧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표함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노아의 가문과 아브라함의 가문을 비교할 때 조금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불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러한 가정에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노아는 다르다. 경건한 조상들 밑에서 태어난 믿음의 가정의 아들이었다.
노아의 증조부는 유명한 믿음의 사람 에녹이었고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또 그의 나이 252세 때에(창5:21과 25절을 비교해 보라) 손자 라멕을 보았다. 에녹이 승천할 때 손자 라멕의 나이는 113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므두셀라와 라멕은 에녹이 어떻게 경건한 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가를 친히 보았다. 경건한 에녹의 감화로 친히 자라난 아들과 손자 이였음이 분명하다. 라멕의 신앙은 노아의 이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2) 노아시대의 환경
노아시대는 심히 부패한 시대이다(창6:2).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천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천사는 결혼하지 않는다. 셋의 후손들을 의미한다. 즉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무리와 연합하여 부패하였음을 보여준다(창6:5, 6). 하나님은 창조 후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지만 본장에서는 슬퍼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의인 노아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는 지극히 기쁘셨다.
억만인이 죄를 범한다고 할지라도 오직 죄악을 이기며 의를 행하는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한지를 우리는 노아에게서 배운다. 불의의 물결이 홍수 같이 밀려드는 그러한 때에도 죄악을 거슬러 경건히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창세기의 저자인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창세기를 기록할 때,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하신 그 말씀은 엡2:8과 같다. 예나 지금이나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제 4장 새 조상 노아(창7장 ; 히11:7)
노아가 어떻게 그처럼 의인이 되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었겠는가? 그 비결은 오직 하나 믿음이다. 히브리 기자는 말하기를 “노아의 믿음”이라 했다(히11:7). 믿음의 힘을 위대하다. 믿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보게도 하고 허물 많은 자를 불러 저와 동행하는 자가 되게도 한다. 노아의 증조부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 가족과 더불어 방주에 들어가 생명을 구원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
노아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다.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라는 경고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경고하심을 “받아”라는 말은 그 말씀을 듣고 믿었다는 말이다. 그 시대에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들었으나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아는 그 말씀을 믿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참 믿음도 없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믿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라고 사도 바울은 알려 주었다. 그러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가? 그렇다면 감사하자. 하나님의 은혜이다. 신약의 사도 베드로는 큰 은혜를 입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눅5:4, 5절에 보면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하였다.
베드로의 믿음은 말씀에 의지하여 움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고 했다. 위의 선진들은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확신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것이 참 믿음이요 큰 믿음인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꼭 그대로 믿고 그대로 움직였다. 참으로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2. 보는 것 같이 믿는 믿음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세상은 그를 비웃었다. 어리석은 자라고 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홍수의 징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홍수가 나기까지 즉 창세기 6장에 이르기까지는 비라는 말도 홍수라는 말도 없었다. 매일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평화로운 날들이 매일 계속 되었을 것이다. 홍수에 대한 위험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노아는 홍수의 경험이 전혀 없었어도 홍수의 경고를 듣고 체험해 보지도 못한 것을 그대로 믿었다. 사람들은 다 보이는 현실, 매일 경험하는 세상일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내세의 일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보이는 육신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영혼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참 믿음이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임을 믿는 믿음이다(고후4:8). 노아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보이는 것을 희생한 사람이다.
3. 실행이 따르는 노아의 믿음
그는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했다”고 했다. 그의 믿음은 매일 매일 방주를 짓는 순종으로 나타났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거기에 신앙의 선진들이 실행이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벨은 믿음의 사람이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아브라함은 순종으로 라합은 위험을 각오하는 행함으로,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는 일로 그 믿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들도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나는 믿음이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4. 희생이 있는 믿음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의 많은 희생을 하되(물질, 시간, 노력, 수욕, 인내) 철저히 희생한 자이다. 참 믿음은 희생이 따른다.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하나님께서 원하실 것인가?
5. 가정을 구원한 믿음
히브리서의 기자는 “그는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이는 믿음이란 개별적이란 점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잘 믿으니 그 후손들이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았고, 라합이 그의 믿음으로 가정이 구원을 받았다면 노아의 믿음은 그 가족을 구원할 수 있다. 나 홀로 믿는 짝 믿음은 크게 반성해야 하고 부모님의 큰 믿음(가나안 여인)은 자녀들을 돌아오게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들의 믿음도 영향력이 있어야겠다(고전7:14).
6.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 한 믿음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히11:7의 증언이다. 그가 방주를 지을 때 그것을 짓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노아는 방주를 예비함으로 짓는 목적을 분명히 밝혔을 것이다. “누구든지 이 방주에 들어오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으리라”이다. 누구든지 다 들어올 수 있도록 큰 방주를 지으라고 했다. 노아의 8식구만 들어갈 수 있게 만들지 않았다. 말로만 아니라 실제 생활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 했다.
7. 방주의 영적 의미
방주의 영적인 의미는 이구동성으로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먼저 창6:16에 보면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을 옆으로 내라”고 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구원의 문이라고 했고, 안에서 밖을 보지 못함은 성도들은 위의 것만을 바라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과, 그리고 비둘기를 통하여 물의 내용을 알고 아라랏 산 위에 닿은 그 날은 7월 17일이었다. 성민의 성력으로는 니산 월 17일이다. 이는 유월절이 지난 3일(출12:6) 만의 날짜로서 부활하신 주님을 정확하게 보여 주심으로 이제부터는 옛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부활의 세계가 시작됨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너무도 오묘하고 신비로운 탓일 것이다.
8. 방주의 크기
창 6:15에 보면 많은 짐승과 양식을 실었다. 길이가 300규빗이요, 넓이는 50규빗이라고 했다. 한 규빗은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18피트가 된다. 이것을 계산하면 4,300톤가량이다. 지금도 2,500톤급의 배라면 어떤 큰 바다라도 항해 할 수가 있다고 한다.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이 땅의 모든 짐승의 종류는 2,000종이며, 새는 약 6,500종이라고 한다.
제 5장 홍수 후의 노아
전장에서는 노아의 훌륭한 면들을 살펴보았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과 같이 그렇게 의로웠던 노아에게도 실수가 있다. 그는 포도주를 먹고 취하여 벌거벗은 몸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창 9:23 ; 출20:26).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벌거벗은 하체를 드러내 보이면 크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도 층계를 오를 때 하체를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셨고 그러기에 제사장이 번제 단에 올라갈 때에 특수한 복장을 원하시게 되었다.
출28:42에 보면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고의 : 허리부터 넓적다리까지 내려와서 하체를 가린 세마포로 만든 속바지)고 했는데, 노아는 술을 먹고 나서 하체를 드러낸 것이다.
성경에서 술이란 말은 의인인 노아와 함께 등장했던 것이다. 이는 홍수전의 타락도 술에 있었을 것이고 노아는 그 때의 술 만든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술을 만들고 취하여 실수를 했다는 것은 술이 얼마나 흉악한 괴물인가? 술이 있는 곳에 사람의 실수와 타락이 있다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잠언의 기자는 술을 보지도 말라고 했고(잠23:31), 민수기 6장에서는 술을 먹고 싶을 때는 포도를 먹지 말라고 금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사막과 같은 지역에서 물이 귀하므로 포도주가 나왔고, 그리고 일상적인 음료로 귀하게 쓰였을지라도 성경은 도처에서 술을 금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신약에 바울이 술을 약간 쓰라는 것은 상대가 목회자이기 때문이다. 평신도이었다면 술은 쳐다보지도 못하게 했을 것이다.
1. 사람은 죄를 범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그만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노아에게서 발견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셨지만(창9:2), 결국에는 자신도 다스리지 못했다. 우리는 자신을 다스려서 평생 동안 경건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우리 학우들은 성경에 세 가지 원수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마귀와 세상과 혈육이라는 것이다(약4:1~7). 세상은 벗하지 않고 피하면 되고, 마귀는 대적하면 승리하지만 혈육이라는 것은 많은 기도와 수양이 필요하다. 일평생 싸워야 한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이 원수를 이길 수 없다. 사람은 완벽하더라도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서있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가르치신다. 이는 신앙의 연조에도 관계가 없다는 것이 노아에게서 발견된다(6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
2. 승리 후에 오는 실패
창세기 6~9장까지의 내용은 모두가 노아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끝 무렵에 그의 실패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로마서 기자가 15장 4절에서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우리의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만일 성경을 사람이 기록했다면 노아의 실패를 빼어 버렸을 것이다.
창세기 9장은 분명히 홍수의 심판 후 인류의 새 출발을 기록한 장이다. 1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축복을 받으며 인류는 새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새 출발도 아담 때와 같이 인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인간은 홀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설 수 없다는 큰 교훈이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연약한 존재로 알아서 서로의 실수를 용서하며 덮어 주며 도와주어야 한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라! 노아의 실수를 비웃고 비방한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이 어찌 되었으며, 야벳과 셈이 어찌 되었는가? 함과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고(가나안에 대한 모습을 가나안이 먼저 발견하고 그의 아버지 함에게 알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을 슬퍼하며 덮어준 야벳과 셈은 큰 복을 받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는 엄숙한 마음으로 창세기 9:25절에 눈을 돌려보자.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말씀하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9:26)라고 예언하셨다.
* 노아의 발견
땅 위의 모든 생물들을 홍수로 심판하신 가운데 의인으로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아 홍수 이전의 시대로부터 홍수 이후의 시대로 건너오게 되었다.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사랑을 발견하였다(창6:8). 이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시력이요, 하나님을 신뢰한 믿음의 행동이었다. 똑 같은 문제로 징계를 받아도 복 받는 효자는 아버지께로 돌아오고 불효자는 아버지를 떠나게 됨과 같다. 노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으므로 생명과를 금하심과 홍수의 심판에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사랑을 발견하고 완전한 자라는 칭호를 받고(창6:9),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과 순종(방주)과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감격하시며(창8:21, 9:1), 축복해 주셨는데, 이는 아담에게 주셨던 복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 라고 하신 말씀은 창3:15 이후로 밝히신 구체적인 복음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죄를 범하여 피를 흘린다면 그 책임이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범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독생자가 대속의 피를 흘리시겠다는 복음이다. 사단은 이 선언으로 더욱 칼을 갈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찬란한 무지개의 약속으로서 증표를 주신 것이다(창9:16).
이런 환희 속에서 무지개 언약을 안고 아내와 여덟 식구들은 사망의 홍수를 건너서 생명과 축복의 새 시대로 들어왔던 것이다. 인류는 에덴에서와 같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는 축복을 안고서 무지갯빛과 같은 아름다운 꿈을 안고 일곱 색깔과 같이 다양한 민족들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노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였던 것처럼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독생자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삶과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받은 것이다.
* 노아의 자녀들
=> 셈(높은 지위, 이름)은 노아의 장자이다. 이는 히브리인의 조상된 자요, 98세에 방주에 들어간 자요, 야벳과 함께 부친의 실수를 가려줌으로 축복을 받고 600세에 별세했다. 셈의 후손들은 중동 중부에서 민족을 형성하고 아시아, 히브리, 수리아, 갈대아, 아라비아, 아람, 에돔, 미디안 등에 살았고 그들의 문자는 셈 문자라고 한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히브리인의 족속을 통하여 계승시키셨고, 에벨의 조상이라고 기록되었다(창10:20, 25~30). 결국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창10:21~31). 셈의 아들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다.
=> 야벳(확장함, 창대)은 노아의 둘째 아들로서 셈과 함께 부친의 부끄러움을 가려줌으로 축복을 받아 광대한 판도를 가지고 자유를 누렸다. 그들의 자손은 팔레스틴의 서방과 북방에 거주하되 물을 좋아하여 바닷가의 땅에 거하였다. 유럽인은 저의 자손이라 한다. 오경의 특징을 보면 구속사와 관련이 깊은 순서대로 자세하게 기술하는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야벳의 후손들이 먼저 언급되는 이유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구속사에 거의 언급되지 않으며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다(창10:2~5). 야벳의 아들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이다.
=> 함(검다, 뜨거움)은 중동의 남쪽 민족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민족들로 등장하여 육적으로 강대국을 형성하여 번영을 누렸지만 영적으로는 버림받은 존재로서 멸시를 받았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선민을 끊임없이 징계하시고 경고하심으로 나태와 죄악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섭리하셨다. 후손들은 애굽, 가나안, 앗수르, 바벨론, 시돈, 리비아 등에 살았고, 함의 땅이라 함은 애굽을 가리켰으나 근대에 와서는 아프리카를 지칭한다.
고대에는 강대국으로 문명의 발상지였으나 현대에 와서는 약소국이다(창10:6~20). {셈의 자손은 제사를 위하여 여산의 중턱에 머물고, 야벳의 자손은 바닷가에 머물고, 함의 자손은 비옥한 평지에 머물면서 생활하였다.} 함의 아들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다.
- 아르박삿(영역)은 셈의 셋째 아들이다. 이는 갈대아 인의 땅이란 뜻이며, 앗수르의 지방을 나타내기도 했고 그 백성을 지칭하기도 했다.
- 가이난(철공)은 셈의 손자요 아르박삿의 아들이지만 평범한 철공 인으로 창세기 10장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족보가 이어진다(눅3:36).
- 살라(보낸다)는 셈의 증손자요 가이난의 아들이다(눅3:35).
- 헤버(과거)는 셈의 오대 자손이다.
- 벨렉(분리하다)은 셈의 육대손이요, 에벨의 장자이다. 벨렉 때에 세상에 분리가 이루어져서 세상이 나누어졌으므로 그 이름을 벨렉이라 취하였는데, 이는 아르박삿의 자손이 욕단에게서 분리 됨과, 노아의 자손들이 바벨에서 방언이 혼란케 되므로 분산 될 것을 가르쳤다.
- 르우(친구)는 벨렉의 아들로서 아브라함의 고조부이다(창11:19)
- 스룩(활)은 아브라함의 증조부이다(창11:20~23).
- 나홀은 아브라함의 조부이다.
- 데라는 나홀의 아들이요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다. 갈데아 우르에서 우상 장사를 했다.
-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은 아브람(아버지)을 하나님이 고쳐 주신 이름이다. 그의 출생은 갈데아 우르이며,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에 거주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을 향하여 순종하여 갔으며,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에 살렘 왕에게 십일조를 바치므로 오늘날의 십일조 신앙을 그 시대에 실천했던 자요, 우리에게는 믿음의 조상이요, 이스라엘에게는 시조가 되고 회교 인에게는 모하멧의 조상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그 혈통으로 오신 특출한 신앙인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연대를 살피면 출애굽의 연대가 주전 1,446년이요(왕상6:1 ; 삿11:26 암몬 왕이 입다에게 길르앗 지역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주장했을 때 그는 대답한 말씀 중에 이스라엘이 “성음에 거한지 300년”이었다고 했으니 사울 왕보다 약 50년 앞서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울 왕의 통치가 주전 약 1,050년이니 선민이 길르앗(가나안)을 점령은 1,400년경이 되고 40년은 이스라엘이 광에서 보냈으니 출애굽의 연대는 1,446년으로 일치한다).
이스라엘의 애굽 체재기간 430년 + 100세에 이삭을 낳고 이삭이 60세에 야곱을 낳음 + 야곱이 130세에 애굽에 갔으므로(430+100+60+1,446=2,166년) 아브라함의 출생 연대는 주전 2,166년이다. 또한 에덴에서 인류의 시작을 주전 4,000년으로 볼 때, 아담이 부름 받은 나이가 930세이므로 아담의 삶인 930년을 빼면 주전 3,070년으로 계산된다. 그러므로 주전 3,070년부터 아브라함의 출생 연대 2,166년의 기간을 미력하나마 살펴보기로 하자.
* 주전 3,000년전에 소아시아의 남동쪽은 북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강들 사이의 땅)로 기울었으며, 고원지대와 해안의 저지대에 이르는 서부에는 철저히 독자적인 소아시아의 문명이 전파되었다. 해안 저지대에 이르는 서부와 내륙의 고원지대와 다른 문화가 있었고, 유럽에는 헷족이 공격해 들어옴으로 비로소 거대한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그들은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을 형성하였으며 거기서부터 점차 헷족의 국가는 합산되기에 이르렀다.
* 노아의 후손들이 3동네를 이루면서 동리와 대 가족의 제도에서 족장들의 사회로 변형되었다. 셈의 후손들은 우리나라의 잘못된 장자의 개념으로 부모님의 사후에 제사를 모시는 것과 같이 셈에게는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며 제사 드리는 아버지를 모시고 아라랏 산의 중턱에 자리 잡고 살면서 파종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셈이 제사 권을 가지고 산을 내려오면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가 어려워짐을 막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신앙의 선진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셈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엘람(높은 곳)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셈족의 조상이 되는 종족을 산지에서 내려와 우르 지방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수메르 사람으로 이야기 하는데 이 수메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것이 셈이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즉 셈족은 모두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란 것이다(우리나라 개념으로는 양반이다.).
셈은 곧 이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름 짓는 은사를 주셨는데, 그것을 이어받은 셈이다. 또 하나의 뜻은 홍수 후에도 에덴에서 사용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즉 원초적인 언어이다. 그 말을 다른 표현으로 말 할 때 수메르어라고 한다. 성경에서도 바벨탑 사건(창11:9) 이전의 언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의 모든 언어학자들이 수메르어를 자기들의 언어의 유형이라고 주장하고 또한 이론적으로 자기 나라에 무슨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원형은 수메르어 어디에서 왔다고 한다. 문자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찾아낸 최고의 기호 문자 즉 기호로 발음과 뜻을 나타내는 문자는 바로 수메르의 “쐐기문자” 뿐인 것이다.
또한 셈의 후손들이 산 중턱에 살게 된 이유가 흙을 좋아하고 흙을 통해 그릇을 빚고 도자기 문화를 발전시켰는데, 도자기 굽는데 필요한 나무가 산에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어 여러 가지 모형을 만들다가 변질되고 사단의 도구가 되어 우상을 만드는 우를 범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공헌을 했다면 흙을 빚어 점토판에 뾰족하게 깎은 갈대로 꾹꾹 눌러서 쐐기 문자를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과 삶에 필요한 지혜들을 기록하였다는 것이요, 또한 흙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은 것이다.
아무튼 노아의 장자로서 셈은 그의 신앙을 물려받아 장자의 직분을 잘 감당했던 자이었다. 이렇게 제사 중심으로 살았으나 세월이 흐르고 분가를 거듭하자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창8:21,22). 그리고 점점 더 먼 곳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아쉬운 것은 그 후손들은 장자권의 권위주의와 비생산적인 삶과 보수적인 면들이 부정적인 측면을 낳고 이는 가인의 실패를 답습함으로서 인류의 대 분단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 함의 후손들은 산에서 아버지 노아와 셈의 형님에게 제사를 맡기는 식으로 자유스럽게 생활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 산에서 내려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강들 사이의 땅이라는 뜻)의 평원에 정착하여 부를 누리며 확실하게 살아갔으며, 특별히 똑똑한 넷째 아들(함께 저주받은 아들) 가나안은 두 강의 상류를 지나 지중해(윗 바다)와 마주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에까지 내려가서 살게 되었고, 미스라임도 애굽으로 내려가서 많은 수확으로 황홀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이 가나안이요 그 가나안이 인명이 지명이 된 가나안이다.
함(뜨거움)은 이름의 뜻과 같이 열정적이며 부지런하고 진취적이었다. 과감하게 산에서 내려와 그들이 살 만한 땅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아라랏 산에서 내려와 넓은 평야의 비옥한 땅에서 더 많은 파종과 능률에 대한 연구와 농사법을 계속 발전시키면서 쟁기나 보습을 만들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기 때문에 흩어져서 살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큰 마을을 이루고 농사일도 분담하고 협력함으로서 큰 성읍을 이루면서 살고 가나안은 함과 같이 동시에 분가하여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비옥한 땅을 발견하여 성읍을 이루고 유통업을 필요로 하여 흉년과 생산의 불균형을 확실하게 해결하다가 결국 장사군의 역할을 시작하여 고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화폐를 처음 만든 곳이 가나안이요 색과 모든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러나 함의 후손들에게 문제가 생겼으니 이는 짐승의 습격이었다. 농산물의 피해와 생명의 위험이 왔다.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락했지만 아직 시행되지 않았을 때일 것이다. 맹수와의 싸움에서 빨리 달릴 수도 없고 농산문을 지키기 위하여 24시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맹수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의 장자인 구스에게 태어난 니므롯에게 무기를 만들고 짐승을 사냥할 재능을 주셨다(창10:8,9).
그는 너무나 뛰어난 재능 때문에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각에 더 의지함으로써 점점 하나님과 멀어져 갔고 그 후손들의 특징으로 열정적이면서 자유분방하여 계율과 법에 얽매이기 싫어하고 늘 꿈과 환상이 있고 낭만과 쾌락이 있어야 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통제를 받으면 축복이지만 하나님을 떠날 때는 문제가 발생하여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만다는 좋은 교훈을 준다.
함의 후손의 합리적인 사고와 낙천적인 삶은 거짓을 만들어 내고 하나님을 떠나며 자기들의 신화를 만들어 내고 그 풍부한 상상력으로 거대한 인본주의 문명을 건설하고자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을 정면으로 도전하여 언어의 혼잡과 함께 흩어지게 되고, 그 잘못된 인본주의의 뿌리는 바벨론의 지식과 과학으로 오늘날까지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 야벳의 후손들은 물을 좋아하였으므로 서쪽의 타우루스 산맥을 지나 바다를 끼고 정착하고 고멜과 그의 아들과 두발과 메섹은 북쪽의 검은 바다쪽으로 전진하다가 결국 바닷가의 땅에다 자리를 정하였다(창10:5). 멀리 간 야완은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를 건너서 새로운 땅들을 개척하여 문명을 건설하였고, 모험을 좋아하는 그들의 아들 엘리사는 바다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키프로스 섬과 크레타 섬을 차지하였다.
또 깃딤과 도다님은 헬라와 이탈리아를 지나 갈리아 지방까지 뻣어 나갔고 달시스는 배를 타고 가장 먼 곳까지 나아가서 땅들의 끝에 있는 이스파니아를 개척하였다. 마대는 동쪽으로 나가서 자르로스 산맥을 넘어서 카스피해에 이르렀다. 성경에는 야벳이 모두 일곱 아들을 두었다고 기록하였다(창10:2~4).
야벳이라는 이름이 창대하게 하신다는 뜻이었는데, 이를 이루시고자 하나님은 거친 파도가 출렁거리는 바닷가로 몰아 내셨던 것이다. 창대를 위하여 사람은 과감한 도전의 관문을 거쳐야 한다. 야벳의 후손들은 거칠고 험한 바닷가의 삶 속에서 얻은 도전 정신이라는 보물을 바탕으로 창대하였고 인류의 역사 가운데 커다란 업적들은 모두가 야벳의 후예들이 해 낸 것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북극을 최초로 탐험한 아문젠,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정복했던 헌트, 하늘을 날랐던 라이트 형제 등 수 많은 모험가와 위대한 발명가들은 한결같이 불굴의 도전 정신과 용기를 지녔던 야벳 가문의 후예들이었던 것이다. 이 야벳의 항로를 따라 복음이 전 세계로 신속하게 전파된 것이다.
야벳 자손의 좋은 점도 하나님을 떠날 때 결정적인 단점으로 전락 할 수 있다. 거친 조건과 싸우며 도전하는 야벳의 용기는 600백만 명이 되는 생명을 학살했다. 미국은 지금도 모험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들이 사회생활과 국회에서 세계 기구에서 인류의 평화를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예능 방면도 야벳의 후손들이 뛰어나다.
셈의 집안의 진지하고 심각한 음악이나 함의 집안에 떠들썩하고 신나는 춤도 야벳의 자손들이 보여주는 화려한 음악과 우아한 발레 앞에서는 슬그머니 물러설 수밖에 없다. 창세기 10장에서 사라진 야벳의 둘째 아들 마곡이 갑자기 에스겔의 예언 속에 등장하여(겔38:1~4, 9 ; 대상 1:5 ; 창10:2) 메섹과 두발이 그의 부하가 되어서 나타나며 그 후에 그들은(지금의 러시아인들) 공산주의라는 괴물을 만들어 내어 지구의 3분의 1을 피로 물들였고, 교회들을 말살시켰다.
제 6장 왕권시대의 출발
함의 아들을 밀어내면서 강들 사이에 땅으로 내려온 셈의 후손인 장자들의 횡포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해 살고 있던 모든 족속들과 마찰을 일으켰고, 그 때마다 분쟁과 폭행이 계속되었다.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중동 고고학을 연구한 크레이머 박사는 수메르가 메소포타미아의 난폭자로 등장하면서 건설했던 최초의 도시는 바벨론으로부터 약간 동쪽에 위치한 “기스”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때부터 인류의 역사에는 왕이라는 말이 탄생한다. 왕에 해당하는 수메르어는 큰 사나이라는 뜻이 있다.
수메르의 왕들이 때로는 점토판에 쐐기 문자를 새겨 넣을 때 자신에 대한 호칭을 왕과 장자로 표기했다. 즉 왕이 생기기 이전에는 셈의 집안에서는 장자권 자가 문중을 대표했을 것이고 수메르 왕들은 이 장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던 것이다. 수메르의 영웅적인 왕 중에 ‘우르남무’는 달의 신 ‘난다’을 위해 신전을 지어 헌당하고 점토판에다 “우룩의 주인이며 우루의 왕인 엔릴의 장자 우르남무는 여기에 난다 신을 위하여 그의 신전을 건축하였노라”라고 기록하였다.
우르남무는 자신이 신의 임명을 받은 셈의 집안에 장자권자인 동시에 우룩과 우르의 왕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내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수메르의 우두머리가 기스에 성읍을 건설하고 왕이 되면서부터 메소포타미아는 끊임없이 전쟁의 무대가 되었고, 왕은 점점 난폭한 독재가 되었으며, 왕은 장자권을 뽑을 때와 같이 문중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새습으로 물려주는 것이 되어 버렸다.
왕들은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지탱하기 위해서는 많은 주변 종족들을 희생시키며 짐승처럼 일만 하다가 죽어간 사람과 왕의 영광과 환락을 위하여 피 땀을 흘려 일구어낸 것들을 빼앗기고, 혹은 저항하다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의 통곡이 거대한 수메르 문명의 그늘 속에 숨겨져 있다.
실제로 난폭한 수메르를 처단하기 위하여 일어난 사람들이 압제를 받던 함의 집안이 아니라 그들의 편에서 힘이 되고자 민심을 모은 셈의 집안의 형제들인 엘람과 앗수르였다. 이는 문중의 형제들이 일어나 집안의 이단자를 처단하였던 징계 또는 파문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들이 일어남은 주변의 형제 국들을 압제하고 수탈했다는 죄목과 하나님을 버리고 난나신을 섬기기 시작했음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장자권의 수메르는 장자 집안의 엘람과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동쪽으로 밀려 나가다가 우룩의 북동쪽 55킬로미터 지점에 라가스에 이르러 결국 소멸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권은 틈만 있으면 찬탈을 당하게 되었다.
* 인간 제국(장자권이 무너짐)
그 후에도 여러 왕들이 일어나고 그 때마다 선하게 다스리지 못하여 강력한 다스림을 추구할 때마다 사단의 유혹을 받아 이방 신들과 신상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또한 천하에 모든 백성들은 장자의 셈의 집안에 대한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기들을 구원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 이는 육신의 시대가 온 것이다.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장자권이 무시되고 하나님이 무시되는 인간의 제국 즉 육신의 시대가 왔다. 이때에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니므롯을 설득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냥에 명수로 세워 날카로운 도구를 만들게 했으나 그것을 통하여 피를 흘리게 된 것이다.
가나안의 유혹에 마음이 교만한 니므롯은 셈의 집안의 불의를 척결하기로 작정하고 담대하게 장자권이란 왕권과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던 것이다. 그는 셈족에게 빼앗겼던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점령하고 바벨론이라는 인본주의의 대제국을 건설했고, 이 바벨론의 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신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니므롯은 가나안이 섬기는 여신 아스다롯은 니므롯의 성인 밥레에 이쉬타르라 부르며 그의 신을 섬기게 되었다.
니므롯이 가짜 장자권자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하게 되자 마침내 하나님을 몰아내고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건설한 인간의 제국이 천하를 통치하게 되었다.
최초로 탄생된 인간제국은 지혜와 능력을 통하여 많은 성읍들을 건설하였고,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질서를 확립하였고, 셈의 장자들로부터 학대를 받던 백성들을 좀 더 풍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하여 상업과 산업과 무역을 증대 시켰다. 또한 여러 가지 복지 제도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런 인본주의의 노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과학문명은 거의 모두가 이 바벨론에서 시작된 것이며 체제와 법률도 이미 그 때에 형성된 것이고 교육제도나 사회 보장제도 같은 것도 이미 니므롯 때로부터 있었던 것이다.
본래 사람의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사단은 인간의 마음을 교만하게 하여 니므롯을 이용하여 인간의 기준으로 바꿔서 타락시켰고 지금도 사단은 말하며 유혹하기를 세상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었다고 하며, 그리고 자기 것을 우리에게 안겨다 준다고 가르치며 일평생을 자기를 위하여 살다가 세상에 취한 후에 영혼이 병들어 죽도록 우리를 이용하고서 마지막의 품값으로 사망을 주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사단에게 이용을 당하는 함의 후손인 가짜 장자권자인 교만한 니므롯이 강성해지자 장자인 셈의 집안은 계속해서 무너지고 니므롯의 힘을 받아 함의 집안에 형제들은 연합전선의 공략으로 셈의 집안을 풍비박산이 되었고, 천하가 니므롯에게 들어갔다(창10:7, 13~14, 10:15~18).
하나님께서 죄악이 관영했던 지구를 홍수로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신 아름다운 이 땅을 강포한 장자들의 탐욕 때문에 지구상의 거의 모든 족속들로부터 배척 당하고 밀려나시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0장에 숨어 있는 비밀로서 홍수 후에는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 분으로 이해하고 인간의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처럼 다른 신을 본격적으로 섬기게 되었다.
셈의 집안을 정복하고 천하를 장악한 니므롯에게는 한 가지 근심이 있었다. 불법적인 쿠테타를 일으켜서 대권을 잡았기 때문에 또 언젠가는 자기보다 강한 세력과 조직으로, 더 강한 자가 나타나서 자신으로부터 정권을 탈취해 갈 수 있다는 공포와 불안으로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래서 통치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백성에게 존경 받음이 급선무이었다.
그리고 눈의 가시와 같은 장자권의 명분과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이 최대의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그는 사단의 능력을 발휘하여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게 되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번개의 신, 천둥의 신, 나무의 신, 바다의 신, 등을 통하여 자기에게 맞는 신을 섬길 수 있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몰아내는 작업을 시작하였고 이러한 일들을 니므롯과 가나안이 함게 만들어낸 음모이었다.
그 후 하나님만 믿는 다는 사고는 갑자기 사라지고 모든 족속에게 수 많은 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처음에는 하나님과 신들을 섬겼다). 이러한 신화들 중에 가장 믿을 수 있고 전형적인 것이 니느웨 성의 앗수르 바니팔 도서관에서 발굴된 “길가메쉬의 서사시”였다. 이 점토판의 서사시에는 길가메쉬는 반신 반인의 영웅으로서 니므롯과 같은 인물로 “에렉”(창10:10)의 영웅 “길가메쉬”가 온갖 신들과 만나면서 벌이는 모험담을 기록한 것인데, 이야기의 배경은 수메르 이면서 “아카디어”와 비슷한 “바벨론어”로 기록이 되었고 발굴된 장소는 “앗수르”의 도성인 니느웨였다.
길가메쉬는 영웅으로 에렉의 왕이었다고 기술되었는데, 그는 성경의 홍수 이야기와 아주 흡사한 신화를 만들어 혼합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홍수의 체험을 모두 했으므로 거짓이 들어날까 봐 성경이야기를 혼합하여 적당히 섞어 놓음으로서 이세들을 향하여 미혹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니므롯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하나님을 추격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는 사단이 니므롯을 시켜 하나님과 대항하게 하는 대결로서 시날 땅에서 시작된 바벨탑의 건설이었다(창11:3~4). 하나님을 대항하여 선봉에 나타날 사람은 니므롯 뿐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말한다. 그 이유로는 군사혁명을 일으킬 자와, 모든 족속을 규합할 자, 정보를 쥐고 역사의 배후에 실세로 다스리는 자는 니므롯이다.
니므롯은 셈의 장자권자인 수메르를 징벌하고 장자 가문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수메르의 치자로서 공의와 의협심이 강한 수메르의 양심세력이었던 엘람과 셈의 둘째 아들인 앗수르 가문에 들어가 이를 이용했었다. 슬쩍 들어간 니므롯은 셈의 집안의 반발과 저항을 피하기 위하여 앗수르에게로 들어가서 앗수르를 뒤엎은 후에, 가짜 장자권자의 권한으로 만국 평화의 회의를 주재하고 만국이 서로 분쟁하지 않고 평화스럽게 살자는 약속의 상징으로 범세계적 대 역사인 바벨탑 공사를 제의하였던 것이다.
막강한 무력으로 천하를 통치하는 앗수르의 장자권자가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다는데 그에 반대 할 이유가 없었다(창11:4). 이렇게 하여 평화의 이름으로 전 세계 인원이 충 동원 되어 바벨탑을 쌓게 되었다. 이는 통치자의 위협과 신앙의 타락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이 타락의 길은 오늘날도 바벨탑을 건축하고 권력을 장악한 통치자들은 거대한 만국 회의를 주재하고 인간의 힘으로 평화를, 인간의 합의에 의한 많은 착취와 노예적인 시스템이 일어났고,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자신들의 수정란을 분리하여 인간을 복제하는 기술의 개발에 성공했고, 장차 교환 될 장기의 공급을 위해 바보 인간을 생산하는 일도 가능하게 되며, 짐승 속에 인간의 유전자를 삽입하여 사람의 장기를 가진 짐승이 나타나게 되고, 인공 지능을 가진 가짜 모체에다 수정란을 넣어서 태아를 꺼내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인간의 포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독산동 슈퍼에서 가게를 보는 자가 보험금을 받아 내기 위하여 자기의 두 다리를 절단시키는 물질문명의 무서운 바벨시대에 살고 있다.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급히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창11:7) 바벨탑의 공사를 중단시키고, 사람들을 노예적인 공사로부터 해방시켰지만 지금은 성경을 좇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 자기의 권리를 자기가 찾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제 7장 족장시대의 사회적인 배경
주전 3,000년 이전의 고대 사회에 있어서의 여러 종족들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발굴 되었다. 그러한 자료들에 의하여 알려진 당시의 주변 환경들을 살펴보자.
1. 수메르의 도시 국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지역인 수메르 땅 즉 성경에 알려진 시날 땅에는 족장시대 보다도 1,000여년 앞선 때부터 수메르족들이 살아왔다. 그들은 약 2,000년 뒤에 아브라함이 태어나서 성장할 우르를 위시하여 에렉과 같은 많은 도시 국가들을 건설하였다(에렉은 창1:10에 나오는 시날인데, 니므롯이 차지한 지역이었다) 그들이 건설한 문화는 중동 문명의 기초를 놓았다. 수메르의 영향력은 이렇게 멀리 수리아와 팔레스틴을 거쳐 애굽에까지 미쳤다.
당시의 고대 민족들은 자기들의 국가를 다스리는 자를 신이라고 믿었고, 그 신을 대신하여 실제로 다스리는 자를 가리켜서 엔시 킹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곧 사원의 제사장을 겸했다. 그런데 그 엔시 중의 한 사람인 우루카기나가 통합된 제국을 꿈꾸고 인근 도시국가들을 점령하고 통합된 왕이 되었는데, 그가 곧 수메르 제국의 창건 왕이었다.
2. 악갓 제국
그러나 수메르의 북방 악갓 땅의 사르곤이 일어나 수메르를 점령했다. 사르곤의 정체는 신화에 싸여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세력의 기지는 우르의 북방지역이었다. 사르곤 왕조의 건설로 수메르의 언어는 사라지고 순수한 셈계의 언어가 악갓어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악갓 문화는 수메르 문화의 계승에 불과하리만큼 문자를 위시하여 그 중요한 요소들을 대부분 내포한 것이었다. 종교에 있어서도 그들의 신들이 약간 더 첨가되기는 하였으나 수메르 종교는 그대로였다. 그러므로 악갓 제국의 판도인 메소포타미아에 있어서의 종교는 수메르계와 셈계를 구별할 수 없이 되었다. 따라서 악갓의 사르곤이 수메르를 점령했다고 할지라도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그들에게 흡수되었다고 봄이 좋다.
악갓어도 널리 보급되어지기는 했으나 수메르어는 여전히 유식 층에서 사용되었고, 특히 사원 같은 곳에서는 그 말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수메르 문화와 악갓 문화의 풍토 속에서 자라났던 것이다.
3. 아모리 족속과 마리 왕국
기원전 약 2,000년경에 수리아 지역과 메소포타미아에 한 종족이 침입해 왔는데, 그 사람들이 아모리 족이다. 아모리라는 말 자체는 서부인 이라는 것이다. 수리아와 팔레스틴은 종종 아모리 사람의 땅으로 알려졌다(창48:22 ; 수24:15, 18). 그러므로 가나안인 이라고 하면 곧 아모리를 연상하리 만큼 그들은 가나안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은 특별히 요단강 동서 양쪽의 계곡지대에 많이 흩어져 살았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싸울 때도 하사손 다말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창14:7), 그 도성도 아모리 사람들의 것이었다. 예루살렘도 아모리 사람과 GPT 사람의 피가 혼혈된 도성이라고 했다(겔16:3, 45).
아모리 사람들은 원래 아라비아의 유목민들 이었으나 그 세력이 확대되어 마침내 앗수르를 지배하게 되었고 마리족을 점령하였다. 이렇게 세력을 확대한 아모리 왕 솨마쉬 아닷은 자신을 가리켜 “온 천하의 왕”이라고 했다. 이렇게 세력을 넓혀 갔지만 자리를 지키지 못하여 마리 왕국 출신인 지므리 림(Zimri Lim 주전 1730~1700년)에 의하여 아모리 왕은 패하고 마리 왕국이 득세했다. 그들은 그들의 신 이스타르(Istar)를 섬기는 전을 크게 짓고 선포하던 말이, 이스타르의 신이 천하의 권세를 지므리 림에게 위탁했다고 했다. 그의 왕국은 지금도 그 터가 잘 보존되어 있는데, 그 넓이는 약 15에이커가 된다. 그 구조로는 궁터와 더불어 300여개의 방이 있고 목욕실과 부엌과 교실과 예배실이 별도로 있었다. 그들은 내륙 지대만 아니라 섬과 구브로까지 세력을 뻗쳐 자기의 상업권내로 삼았다.
이처럼 그들은 한 동안 크게 번성했었으나 드디어 다른 아모리 족속의 한 사람인 함무라비(Hammurabi 주전 1728~1686년)에게 패하였다. 마리 왕국은 그 후 영원히 망하고 마리 성도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발굴된 마리 서판들이 있어 그들이 누렸던 과거 한 때의 영화와 문화를 엿보게 할 뿐이다.
마리 왕국을 이기고 일어난 함무라비 왕국은 더욱 왕성해 졌다. 그러나 함무라비 왕국보다 영토적으로 더 켰던 나라들이 없지 않으나 고대 역사에 있어서 함무라비 왕 같이 큰 문화적인 의미를 갖는 왕도 드물다. 그의 유명한 법전은 물론이요 그 밖에 많은 자료들(우주 창조의 신화, 홍수의 이야기, 수학과 천문학, 문법 교과서 등등)은 그 시대의 역사적 또는 사회적인 배경을 아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제 8장 이방인의 잘못된 종교
이스라엘은 가나안 종교의 치명적 영향을 사사시대 이전까지는 크게 느끼지 못했다(삿2:11 ~13). 그러나 여호수아 시대에도 그들은 그 종교의 영향을 받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수24: 15). 이처럼 가나안 정복 이래 바벨론의 포로 때까지 그들에게 가장 큰 유혹의 대상은 가나안 종교이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구약 성경에 선지자들이 금하고 있는 이방종교와 신들에 관해서 알고 있으나 그것들에 대한 자료의 결핍으로 그 지식들은 그저 표면적이요, 단편적인데 불과하다. 애굽의 문헌이나 헬라 문헌에도 그들의 종교에 관한 자료들이 약간 있기는 하나 그것 역시 단편적이다. 그러나 1929년에 발굴된 라스 솨마라의 서판들에서 우리는 이제 가나안 종교의 진상을 비교적 상세히 알게 되었다.
고대 우가리트(Ugarit), 즉 라스솨마라(Ras shamra) 지역은 지금 아람인들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로서 구브로(Cyprus)와 대칭적인 위치에 있는 곳이다. 그런데 라스 솨마라 서펀에서 보는 그들의 기록에 보면 최고의 신은 엘(EL)로서 그는 모든 신들의 아버지였다. 그 엘신은 북방에서 모여 온 여러 가지 신들을 모아 총회를 열고, 그 총회에서 선출되어서 신들의 의장이 되는 위치에 있었다.
가나안 신화에 있어서의 북방이란 마치 헬라 신화에 있어서의 올림퍼스(Olympus)라고 불리우는 신과 같이 신들의 집합소이었다. 사실 고대 셈족들에게 있어서 북방이란 그들에게 전혀 미지의 나라로서 그저 신비에 싸인 신들의 나라로 알았다(그래서 셈족들은 우가리트 지방으로 이주해 온 후에 많은 셈계인들이 아라비아 사막지대에서 북상하여 다른 지방과는 소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우가리트 문헌에 의하면 엘신의 아내는 아세라 여신이었다. 아세라 신에 대하여 그 문헌에는 “라트라”라고도 한다. 우리 성경에는 아세라 상이라고 하고 아세라 상이라고 하고, 아세라 목상으로 되어 있다(출34:13 ; 신7:5, 12:3 ; 삿3:7 ; 대하24:18). 그러나 영문 성경(K.J)과 70인경(LXX)과 벌겟(Vulgate) 기록에서는 아세라를 나무 기둥이라고 번역했다. 이는 아마도 신당에 목주를 세우면 그것은 곧 아세라 여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아세라는 본래 어떤 나무의 이름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증거로 창21:33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를 불렀으며...” 하신 것 같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섬기는 증표로 에셀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방 종교의 방법에서 아직 탈피하지 못한 태도였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많다. 가나안 인들은 그들의 신당이 있는 곳에 그런 나무를 심어(삿3:7 ; 대하24:18), 소위 성수로 삼았던 것이 이방인들의 풍습이었다. 학자들은 위에서 본대로 아브라함도 아세라 나무를 심은 것은 아세라 신을 섬긴 것은 아니지만 그가 배운 고향의 풍속을 따라서 그것을 하나의 성수로 심었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렇게 했다면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옛 풍속을 완전히 벗어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옛 사람을 벗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라스솨마라에 나타난 그들의 신화에 의하면 아세라 여신은 그 나무의 가지가 무성한 것과 같이 풍요와 번영을 상징한다는 신이다.
바알은 엘신의 아들이요 또 그의 후계자로서 그는 북방 하늘로 이끄는 어떤 높은 산에 왕좌를 베풀고 모든 가나안의 신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군림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하늘의 주라고도 했다. 따라서 엘신은 하늘의 비와 땅의 폭풍을 주관하는 신으로 섬김을 받았다.
엘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우레 소리에서 그의 음성을 듣는다고 믿었다. 라스솨마라 석비에 그려진 그의 그림을 보면 그의 오른손에는 창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벼락(끝이 뾰족한 방망이 같이 된 상상화)을 잡고 그것을 내려치려는 모습이었다.
바알이라는 말의 원 뜻은 주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도 한 때는 여호와를 바알이라고 불렀음을 본다(호2:16, 17).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 신을 섬기게 되자 그들은 여호와를 “바알”이라고 부르지 않게 된 것이다.
1. 바알의 신화
우라리트 비문에서 보는 대로 바알신은 또한 알리얀(승리자)으로 알려졌다. 그는 비를 주며 풍년을 주며 번영을 가져다주는 신으로서 그의 가장 큰 원수는 필연적으로 “못” 신이라고 부르는 불행의 신, 즉 죽음의 신이었다. 못신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음에 말하겠으나 그는 이러한 못 신과의 전쟁에 있어서 일시 피살되어 7개년의 세월이 흐른 후 바알 신의 애인이요, 누이가 되는 아낫 여신(전쟁의 신)이 그의 시체를 찾아 그를 다시 살렸고 그의 원수 못을 죽였다. 드디어 부활한 바알신은 못신의 왕좌에 앉아 다스림으로 세상에는 연속 7년간 큰 풍년이 있어 모든 식물의 번성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가리트 신화에 나타난 대략의 내용이지만 자유주의 학자들은 구약 성경 중에 특별히 이사야 53장에서 보는 바와 같은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의 기록은 바알 신화의 영향으로 된 것이라고 하여 그것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임을 부인하려고 했다.
여하튼 바알은 그처럼 신들의 왕이요, 비와 우뢰의 신일 뿐 아니라 정의의 신으로서 악한 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론 바알은 다곤신의 아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다곤 신은 곡물의 신으로서 불레셋 땅 아스돗에 그를 숭배하던 신전이 있었고(삼상5:1~7), 가사에도 있었다(삿16:23).
2. 아낫(Anath) 신과 아스다롯(Ashtaroth)
아낫 여신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알신의 누이요, 또 그의 아내이었다. 그 신은 아세라와 아스다롯과 더불어 가나안의 소위 3대 여신 중 하나이다. 아낫(전쟁신)여신은 바알의 원수인 못신을 이긴 전쟁의 여신이었다. 그는 동시에 성(Sex)을 주관하는 여신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낫 신과는 달리 아스다롯 여신은 저녁별의 여신이었다.
예레미야서에서 보는대로 이스라엘 여인들이 “하늘의 여신”에게 분향하고 전제를 드렸다고 하는 그 말은 (렘44:19) 곧 아스다롯 여신을 가리킨 것으로 본다.
그 여신도 아낫 여신과 같이 전쟁과 성의 여신으로서 서로 혼동되어 분별없이 숭배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는 이 두 여신을 합하여 아낫. 아스다롯 신으로 불렀다. 동일한 하나의 여신으로 생각되지만 서로 다른 여신인 것이다.
위의 3대 여성신은 여성들의 전형적인 세 가지 면을 아래와 같이 보여 준다.
* 아세라 여신
한 가정의 주관자로 그 가정의 머리인 아내이며, 어머니로서 모습을 보여 주었다.
* 아스다롯 여신
하늘의 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와 유연성과 성적 매력을 상징한다.
* 아낫 여신
정열과 흥분을 보여 준다고 했다. 아낫 여신의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에도 잘 반영되어 있으리만큼 그들의 숭배의 큰 대상이었다(삿 3:31 = 삼갈의 아버지 이름도 아낫이었다). 아낫은 “쿠두슈”라고도 불렀는데, 그 뜻은 거룩한 자란 의미요, 그에게 바쳐진 남성을 “카데쉬”라고 불렀는데 한국어 성경에는 미동이라고 번역 되어 있고, “남색 하는 자”라고 되어 있다(왕상14:24, 15:12, 22:46 ; 왕하23:76).
위의 여신들의 내용을 보면 여신을 이용하여 인간들이 얼마나 가나안의 종교가 타락하고 부패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우상에 미혹되어 여호와의 전 가운데 미동의 집을 두었고 그곳에서 여자들이 아세라 신을 위하여 휘장을 짰다는 기록이 왕하 23:7에도 나와 있다.
3. 못(Mot)신과 얀(Yam)신(일명 리워야단)
가나안의 우상종교에 있어서 소위 못 신은 앞에서 진술은 바와 같이 바알 신의 원수로서 불행과 재난과 죽음의 신으로 지하 세계와 광야의 황무한 땅이 그 거처하는 영역이었다고 그들은 믿어 왔다.
그 신의 이름은 또 일명 “호론”(Horon)이라고 했다. 여호수아 10장 10~11절에 보면 기브온 전쟁시 전쟁터가 되었던 지방 중에 “벧호론”이란 곳이 있다.
그것은 마치 벧엘이란 지명의 뜻이 하나님의 집이란 것과 같이 벧호론이라고 부름은 아마도 그 곳에 호론 신을 섬기는 제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못신과 같이 바알 신의 원수가 되는 신이 얌신이다. 그의 신은 태양을 주관하는 신으로서 일명 “리워야단”이라고도 한다. 그 신은 깊은 바다에 살면서 일곱 머리를 가진 괴물이었다고 전하여 왔는데, 성경에 그 신의 이름이 종종 나타나는 것을 보는데(시74:14, 104: 26 ; 욥41:1 ; 사27:1), 우리 성경에는 악어로 번역되어 있지만 각주에서는 리워야단이라고 원문대로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이사야 27장 1절에서는 리워야단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리워야단은 우가리트 서판에서 그 이름이 발견되기 까지는 하나의 우상신으로 섬기기보다는 오히려 환상적이요 허구적인 전설에 나타나는 바다의 동물로서 이해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로 그것은 그 당시의 신앙에 대상이었던 해양신임을 알게 되었다. 성경의 시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할 때 특별히 리워야단을 멸하시는 하나님으로 찬양되어 있음을 볼때 당시의 사람들이 그 해양신의 능력을 얼마나 높이고 있었던가를 알게 된다. 진실한 바와 같이 그 신은 강력한 바알신의 원수이기도 했다.
4. 몰렉(또는 밀곰 Molech or Milcom)
성경에 기록된 대로(왕상11:5, 33) 몰렉 또는 밀곰은 암몬인들이 섬긴 민족적인 신이었다. 유프라테스 강의 중류지역인 마리에서 발굴된 서판에 의하면 몰렉신은 마리 지방에서는 멜렉으로 알려졌는데, 기원전 1,800년경에 널리 그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열왕기하 17장 31절에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간 후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지방에서 이민 온(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은 “아드람 멜렉”과 “아남 멜렉”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신에게 자식을 불살라 드렸다고 했으니 그 신들은 결국 몰렉 신의 변형된 것이 아니면 별명이었을 것이다. 아드람 멜렉의 뜻은 영광스러운 왕이란 말로 태양을 상징하는 것이요, 아남 멜렉은 별, 특별히 토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몰렉에 대해 별다른 두 이름이 있는 것은 몰렉신의 파괴적인 위력과 보호의 양면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몰렉신에게 자녀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 것은(왕하21:6) 그 자녀들을 제물로 바쳐 죽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성결 의식이라고 했으나,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말씀대로(겔16:20 ; 렘7:31) 자녀들을 제물로 삼은 것이 확실하게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증거로는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보고에 의하면 4세에서 12세까지의 어린이들을 불태워 제물로 삼았던 뼈들을 담은 수백 개에 이르는 많은 납골 단지들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몰렉 숭배는 모세의 율법에서도 엄격히 금하여 왔지만(레18:21 ; 20:1~5)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자주 그 우상에게 미혹되었음을 본다.
솔로몬은 몰렉을 위하여 산당을 지었으며 또 아하스와 므낫세도 그 자녀들을 몰렉에게 제물로 바쳤음을 본다(왕하16:3, 21:6). 요시아 왕은 이렇듯 악한 몰렉의 숭배는 엄금 했었으나(왕하23:10), 이 우상숭배는 후일에 특별히 유다 말기에 반역시대에 성행했음을 본다(렘7:31 ; 겔16:20, 21, 20:26, 31, 23:37, 39).
사사기 11:24절에 사사 입다가 암몬왕에게 대답한 말 중에 너희 신 그모스라고 한 것은 분명히 몰렉을 의미한다. 모압인들은 몰렉을 그모스라고 불러서 그들의 민족 신으로 숭배해 왔다.
그들이 몰렉에게 어린 자녀들을 희생의 제물로 바쳐서 드리는 것은 어떠한 특별한 서원에 대한 확증이나 확약의 증표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서원의 확약으로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여호와의 사사 입다에게서도 보는데(삿11:31, 39),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이방 풍속에서 완전히 벗어난 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임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사단에게 미혹을 당하면 세상의 악한 종교와 풍습을 따르게 되고 한 번 따르게 되면 그 풍속은 성도들의 일평생의 영적 투쟁의 목표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몸의 지체가 죄를 범하면 빼어버리라는 말씀은 끊기가 어렵다는 말씀이다. 그러한 이방인들에게 어떠한 법전들이 있는가를 살펴보자.
제 9장 이방 법전의 종류
우상의 종교와 이방인의 신들이 있으면 그 이후에 있는 것은 신에 대한 법전이다. 인류 역사와 더불어 어느 사회이고 범이 없는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벌써 널리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 밖에도 그보다 선행한 법전들이 있었다. 우리가 이러한 법전들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생활과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됨은 물론이다. 그런데 고대 법전들이 있었다. 우리가 이러한 법전들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의 생활과 그들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됨은 물론이다. 그런데 고대 법전들 중에 가장 오랜 것으로는 먼저 우르 남무의 법전이 있다.
1. 우르 남무 법전(The Ur Nammu Code)
우르 남무는 기원전 3000~2000년 초엽 우르지역을 통치하던 수메르 왕이었다. 그의 법전은 위대한 바벨론의 입법자라고 하는 함무라비 보다 30년가량이나 앞선 것으로 그것이 발굴됨으로써 역사상 가장 오랜 법률의 내용을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발굴된 것들은 비록 파편들에 지나지 않지마는 2개의 토판이 완전히 남아 있어 지금 이스탄불(Istanbul)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 토판에 의하면 우르 남무 왕은 난나신의 선택을 받아 그의 지상의 대리자로서 Ur와 Sumer를 통치케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등위 하면서의 첫 임무는 우르의 국경을 지키며 침략을 막는 일이었다. 드디어 그는 그러한 자기의 책임을 다 한 후에는, 막강한 힘을 동원하여 국내에 범죄자를 다스려서 우르를 공의의 나라로 개혁하려고 결심하여 드디어 법전을 제정하고 선포하였다는 것이다(특별히 우르 남무 법전에는 공정한 상거래를 위하여 저울과 말에 부정에 없도록 하는 규례들이 있으나 그 조문들은 너무나도 낡아져서 판독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우르 남무 법전의 조문들은 모두 22개조에 달하는 것으로 감정은 되었으나 대부분의 그 내용은 분명치 않다).
그 토판에 나타난 조문들 중에는 왕이 시민들의 가축을 보호하기 위하여 약탈을 방지하기 위함과 도둑을 잡았을 때 제거하였다는 것과 바른 저울과 말을 만들어 장사를 하게 했다는 것과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이 어떻게 권세 자들에게서 보호를 받았다는 기록이 보이나 그 완전한 내용은 판독할 수 없이 마멸되었다. 그리고 완전히 판독할 수 있는 조문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발을 자른 경우에는 그는 10세겔의 배상을 해야 한다.
➁ 한 여인이 부도덕의 죄를 범했다고 고발을 받았을 때는 그 여인의 자원에 따라서 그를 물에 빠트린다. 거기에 빠져 죽으면 그 죄는 확실한 것으로 결정하나 그가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헤엄쳐 나오면 무죄한 것으로 인정한다.
2. 에쉬눈나 법전(The Eshnunna Code)
우르 남무가 창건한 우르의 제 3왕조가 무너진 후 메소포타미아 지영에는 엘람인들과 아모리인들의 적은 도시 국가들이 세워져 우르 왕국의 뒤를 이었다. 그 중에도 특별히 아모리인들은 에쉬눈나(티그리스 강 상류의 서쪽 연안지대로 엘람 동쪽인 남방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로니아 지역이다).
도시국가(주전2100~1800)를 건설하였다. 그런데 1945년에 그 지역에서 2개의 토판이 발굴되었다. 거기에 에쉬눈나의 법전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문장에는 고대 앗수르와 바벨론에서 사용되었던 이른바 아카디아어로 되어 있었다. 그 법전이 기록된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대략 기원전 약 2000년 경으로 추산된다. 그러므로 함무라비(주전 1700년경) 법전 보다는 약간 앞선 시대로 본다.
그러나 그 에쉬눈나 법전의 토판에 글자의 앞면이 너무 마멸되었으므로 그 왕이 누구인가는 알아 볼 수 없이 되었다(학자들이 추정하기를 그 왕의 이름은 빌라라마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법전도 그 왕의 당시에 제정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에쉬눈나 법전에서 판독할 수 있도록 보존된 것으로는 불과 6가지의 항목으로 상품의 가격에 관한 것과 노동자의 임금에 관한 것이며, 또 마차와 선박에서의 사고가 있었을 때의 규례와 그 밖에 결혼과 이혼에 관한 법과 간음에 대한 처벌법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법령들의 조문이 아래와 같이 판독되었다.
➀ 만일에 어떤 소가 다른 사람의 소를 받아 죽게 했을 경우 그 두 주인들은 살아 있는 소의 값을 나누는 동시에 또한 죽은 소의 값도 똑같이 나눈다.
➁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살아있는 소를 팔아 그 값을 반분하고 죽은 것도 반분하려니와(출21:35)
➂ 어떤 선주가 잘못하여 파선을 일으켰을 경우 그 선주는 모든 피해자에게 완전한 보상을 해야 한다.
3. 리핏 이쉬타 법전(The Lipit Ishta Code)
1889년과 1900년도에 걸쳐 이락의 닢퍼드 지역에서 수메르의 법전의 파편이 발굴되었으나(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발굴대에 의하여 발굴된 후 그것들은 지금 펜실베이니아 대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랫동안 거의 반 세기동안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드디어 1947년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그것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때에 발굴된 파편은 4개였는데, 그것들을 확인해 보니 수메르의 도시 국가였던 이신(Isin)의 제 5대 왕 리핏 이쉬타의 법전이었음이 판명되었다. 그 왕은 기원전 약 1868년 이후 11년간 이신이라는 국가를 통치한 자였다.
그런데 그의 법전은 거의 100행에 가까운 서문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것 역시 마멸이 심하여 완전히 판독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나 판독된 것들의 내용을 보면 그들의 신들(Anu : 하늘의 신으로 다른 신들을 통솔하는 자라고 믿고) Enlil(바람과 폭풍을 주관하는 신으로 믿었다)로부터 그들의 왕(Lipit Ishtar)이 왕권을 주고 어떻게 그 나라에 공의를 세우며 수메르 인들과 아카디아 인들에게 평강을 베풀기 위해 택함을 받았다고 하고, 왕권을 위임 받았다고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리핏 이쉬타 법전도 함무라비 법전과 같이 서문과 후기가 있다. 서문에는 리핏 아쉬타 왕을 가리켜 현명한 목자라 칭했고 Anu와 Enlil로부터 소명을 받기를 수메르와 아카디아 인들에게 공의를 위하여 세워진 신의 사자요, 모든 반역을 물리치며, 아무런 불평 없이 나라를 다스리고 복되게 하기 위하여 왕권을 받은 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 법전에 기록된 끝 부분에는 법전에 대한 권위를 높이고, 만일 그 법조문들을 파손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포했다.
그 법조문들 중에서 전부 혹은 그 일부를 판독할 수 있는 조문은 38개 조문으로서 그 당시
에 자주 있었다고 보이는 현실들을 취급한 것들이었다. 즉 상속에 관한 것, 세금 납부에 태만한 것, 결혼문제, 피해보상 사건 등등이 있다. 판독된 조문들 중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➀ 만일 어떤 사람이 남의 동산에서 나무를 찍었다면 은돈 반 미나를 보상해야 한다.
➁ 만일 어떤 사람이 남의 소를 때려서 눈이 상했을 경우 그 소의 값의 반을 보상 지불해야 한다.
➂ 만일에 어떤 사람이 아내가 자녀를 낳지 못했을 경우 어떻게 하여 그 남편이 창기의 몸에서 자녀를 낳았다 하자. 그 때 그는 그 창기를 위하여 곡식과 기름과 옷을 대어 주어야 하고 그 낳은 자녀는 그의 상속자가 된다. 그러나 그 본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 창기는 집에 들어와서 그 본 아내와 동거할 수 없다.
➃ 만일에 어떤 사람이 결혼하여 그 아내가 자녀를 낳았고 또 여종도 그 사람에게서 자녀를 낳았을 경우 그 여종과 여종의 자녀에게는 자유를 주어야 하나 그 여종의 자녀는 그 아버지의 기업을 본 아들과 함께 나눌 수는 없다.
이 마지막 법문은 구약 성경의 경우와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세의 법에는 물론 창기의 자녀에 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여종의 자녀의 경우는 야곱에게서도 또 아브라함에게서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에게 자유를 주었다(창21:14).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선언한 것도 그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은 사라의 몸에서 난 이삭과 같이 기업을 나눌 수 없다고 한 것이다(창17:19~21 ; 갈4:30). 이것은 위에 말한 리핏 이쉬타의 법전과 일치한다. 그 밖에 또 그러한 법조문에는 이런 것도 있다.
➄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아내를 버렸다고 하자. 그러나 그 아내가 그의 집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을 경우 그 남편은 비록 제 2의 아내를 새로 맞아 들였다고 할지라도 계속 그 첫 아내를 봉양할 책임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법은 야곱이 그 첫 아내 레아를 사랑하지 않고 둘째 아내 라헬을 사랑했다고 할지라도 첫 아내인 레아를 끝까지 돌보아야 했던 것과도 어느 정도 일치됨을 본다. 야곱의 그런 행동의 배후는 그 당시의 법으로서 오는 관습이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넉넉히 짐작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계시의 종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리핏 이쉬타 법전을 끝 맺는 후기에는 축복과 저주의 선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법전이 기록된 비문의 글자들을 잘 보존하여 상처를 주지 않는 자에게는 축복이 있을 것을, 그리고 만일에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저주가 있을 것을 선포했다.
위에서 논술한 우르 남무 법전과 에쉬눈나 법전과 리핏 이쉬타 법전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법전들로서 함무라비 법전보다 앞섰던 것들이었다. 그러한 법들은 후일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좀 더 완성을 본 것이라고 생각한다.
4. 함무라비(The Hammurabi Code)
바벨론 왕 함무라비(주전 1728~1676)의 법전은 위에서 논술한 여러 법들을 보완한 것이었지만 그 때까지의 그 어느 것보다도 충실히 보관되어 온 것이다. 함무라비 왕은 아모리 계통의 바벨론 왕으로서 그의 즉위 제 2년을 가리켜 “그가 공의를 세운 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해에 그 법전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것은 파리의 루브르(Louvre)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함무라비 법전은 서기 1901년 불란서의 고고학자 "Morgan"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그 장소는 옛 파사의 수산 궁이 있었던 곳이었다. 학자들은 그것이 파사 사람들이 바벨론을 침략하였을 때에 가지고 왔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 석비를 보면 윗부분에는 함무라비 왕이 법과 정의의 신이라고 하는 솨마쉬(Shamash) 앞에 서 있는 그림이 조각되어 있다. 그 그림은 왕이 그의 신에게서 왕으로서 권위와 백성들에게 베풀 수 있는 율법을 전수하여 받는 장면으로 조각되어 있다(지팡이와 종을 넘겨주고 있는 장면인데 지팡이는 왕권을 상징하고 종은 평화를 상징한다). 그 법전의 글은 아카디아 글자로 기록되었는데, 전부 51란으로 되어 있다(함무라비 석비에 서문과 결미를 제외하고도 51란에 기록된 법들이 250~300에 가까운 항목들로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러한 항목들은 상거래와 사회생활과 가정생활과 기타의 도덕적인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그 300에 가까운 항목들 중에 마멸되어 분명치 않은 부분들 중의 일부분은 그 당시의 것으로 발굴된 다른 토판들에 의하여 보완되어 분명해진 것도 있다). 그 서문에는 왕이 이 땅에 공의를 세우기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는 선언문이 시의 형태로 기록되었다. 또 그 결미에는 약자와 고아와 과부들을 압박자에게서 보호해야 한다는 말과 더불어 그 율법이 기록된 비문 석을 모든 사람이 누구나 볼 수 있는 위치에 세우도록 지시하는 글이 있었다.
그 법전이 보여주는 대로 당시의 사회적 계급은 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상류는 귀족 계급이었고 중류는 일반 평민 계급이었고 하류는 노예 계급들로 되어 있었다(사제들과 상인들과 군인들은 상류계급과 중류계급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노예계급이라 할지라도 인격적 가치는 인정을 받았고 그들 중에 얼마는 또한 자유로이 사업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계급들 간에 인격적 가치는 분명한 차등이 있었다.
함무라비 법전에 근거한 귀족 한 사람은 평민 2인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었고, 평민 한 사람은 노에 2인에 해당하는 값어치가 있었다. 이런 함무라비 법전에 나타난 종에 관한 규례를 이제 모세의 5경과 비교해 본다면 누구나 뚜렷한 차이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약에도 종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함무라비의 법에서와 같이 하나의 계급을 이루지는 않았다.
그리고 7년의 안식년이 되면 그들은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출21:1~6 ; 신15:12~15). 그 차이뿐만 아니라 함무라비의 법이 도덕적인 시민법에 국한 된 것이라면 모세의 법은 어디까지나 그 근본이 종교적인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도덕적인 시민법이라 할지라도 그 기초에 있어서는 종교적이었다{모세의 법에서는 영원성과 보편성을 갖는 10계명과 같은 도덕법이 있고 일시적이요 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그들의 시민법이 있었다(레19:13 ; 19:9, 33 ; 출21:1~6 등등). 또 그 밖에도 의식법이 있다. 레위기의 십일조의 법을 위시하여 절기를 지켜야 하는 것과(출34:18, 21, 22) 그 외에도 모든 제사법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십계명과 같은 영원성과 보편성을 지닌 것은 신약시대 이후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지만 시민법은 성취하신 것도 있으나(마5:38, 39) 그 정신을 해석하여 적용해야 하는 법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전9:9, 10에 “모세의 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소를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민법과 의식법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신약성경에 재현된 것이라면 그것은 영원성을 가진다.
구약의 십일조의 법과 같은 예수님과 신약의 사도들이 그것을 명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약하게 반영되기는 했지만 신약에도 재현되어 있다고 본다(마23:23). 그러나 제사법과 같은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성취됨으로 인하여 완전히 지나갔음을 신약 성경은 선포했다(히7:18, 27).
* 예를 들어 종에 관한 법을 보게 되면
제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15:12~14).
* 시민법도 그 결론에 보면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였음을 기억하라(15절)고 하심을 본다. 이같이 종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는 것도 인본적인 하나의 윤리에서만이 아니라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던가 하는 것을 깊이 반성케 하는 신앙적이며 종교적인데 그 기초를 두었던 것이다. 그러한 원리는 또 다음과 같은 법에서도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출23:9) 또는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레19:34)
위와 같은 내용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법인데, 이러한 법들도 결국은 그 기초에 있어서는 “너희도 애굽 땅에 객”이 되었다는 사실을 반성케 함에 있었던 것이다(출23:9 ; 레19:34).
또한 이스라엘의 중요한 의식법의 하나인 할례의 법에 있어서도 그 법은 히브리인에게만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에게까지 할례를 베풀어야 했던 것(창17:12~13)도 그 근원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아브라함)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1:3) 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를 두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는 할례까지도 이스라엘 민족의 독점물은 아니었다.
우리가 모세의 율법에서 깨닫는 것은 히브리인 사회는 결코 민족적 폐쇄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잡족들의 혼합 사회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의 출애굽 당시만 해도 벌써 그들의 회중에는 많은 이방 잡족들이 혼합되어 있었다(출12;38 ; 민11:4 ; 수8:35). 아브라함 때에 있어서도 이방인의 활동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창14:14). 히브리인 속에 섞여 살던 이방인들은 그들이 히브리인이 아니라고 해서 어떤 권리나 의무에 차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레24:16, 22).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완전히 히브리 사회에 동화되었고, 어떠한 형태의 분파도 이룬 일은 없었다. 이런 사실은 모두 모세의 법의 기초가 전적으로 종교적이요, 신앙적인데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흔히 모세의 율법에 있어서 중요한 조문이 끝날 때마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24:22 ; 19:34 등등)고 하신 말씀을 보는데, 그것 역시 모세법이 어떻게 종교적이요 신앙적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함무라비 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유사한 점도 많이 있다. 특별히 사회의 질서를 위한 시민법에 있어서 그렇다. 예를 들어 출21:23~25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지니라”하신 율법은 함무라비 법에서도 같은 것을 본다. 또 신19:18~19의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 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는 법은 함무라비 법에도 거의 비슷한 말로 표현되어 있다. 간음한 자를 사형에 처하는 법도 모세의 법(레20:10 ; 신22:22)과 함무라비의 법(12)은 서로 잘 대조 된다.
그리고 부모를 존경해야 할 것도 두 법은 모두 강조하고 있으나 불효자에 대한 처벌의 규정은 다르다. 모세의 법은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5)고 했는데, 함무라비의 법은 “아버지를 치는 자는 그 손을 자를 것이라”(195)고 했다. 여기 있어서 모세의 법은 좀 더 엄중했음을 본다. 사람을 유괴(도둑) 했을 경우의 두 법도 거의 유사하다. 함무라비 법에는 만일 사람이 자유인의 어린 아들을 도둑질 했을 때는 그는 죽일 것이라(14).
모세의 법은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6)라고 하였다. 위에서 본 것 같이 두 법이 유사하기는 하지만 전자는 “자유인의 아들”이라는 조건이 있고, 모세의 법에는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그러한 조건이 없다. 이러한 조건부는 다음과 같은 법에서도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함무라비 법에 “만일 사람이 상류 계급의 딸을 다쳐 그로 하여금 태중의 아들을 떨어지게 하였거나....... 만일에 그 여자를 죽게 하였다면 그 친 사람은 죽일지니라”(209~10)고 했지만 모세의 법에는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에 좆아 낼 것이요,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지니라”(출21:22~23)라고 하였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자는 “상류 계급”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이 후자와 다르다.
이 밖에도 함무라비의 법과 모세의 법이 서로 잘 대조되는 것으로 소에 관한 처벌과 보상의 규정이 있다.
* 함무라비 => 만일에 어떤 사람의 소가 받는 습관이 있어 그 지역 회의에 경고를 받았다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뿔을 자르지 않았거나 또는 그 소를 묶어 두지 않음으로 그 소가 귀족 중 한 사람을 받아 죽게 했을 경우 그 주인은 은 반 미나를 보상해야 한다(251).
* 모세의 법 =>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 간에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출21:28~29)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도 전자는 귀족 중 한 사람이라는 조건이 있으나 후자는 계급의 구별은 물론 남녀의 구별까지도 없다.
이러한 함무라비의 법과 모세의 법의 근본적 차이를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말했다. “함무라비 법에는 인간의 탐욕을 제어함이 부족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이기심을 억제시키는 법이 결여 되었고, 인간의 자비심의 정당성을 주장한 데가 없다. 죄는 곧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인간을 파멸로 인도한다는 종교적인 동기를 말한 곳이 없다.”
위와 같은 내용들을 연구해 온 많은 학자들의 말과 같이 함무라비의 법전은 종교적이요 신본주의적인 면이 결여 되어 있음이 모세의 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차이 만으로라도 모세의 법이 함무라비의 법에서 유래되었다는 비판학자들의 이론은 타당치가 않다.
5. 헷 족속의 법전(The Hittite Code)
족장시대에 벌써 헷 족속들은 가나안에 살고 있었고 아브라함도 그들과 교통이 있었다(창23:3). 그러한 헷 족속들의 법은 옛날 헷 족속들의 법은 옛날 헷 제국의 수도였던 소아시아에서 발굴된 재료에 의하여 그 편린(한 조각의 비늘이란 뜻으로 사물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엿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재료의 연대는 기원전 14세기라고 하지만 그런 법들의 근원은 좀 더 앞선 수세기 전시대부터 통용되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한다. 그 곳에서 발굴된 토판은 불과 2개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들은 하나의 연속된 것의 한 부분으로 그 나머지 부분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 토판들을 판독한 결과 우리는 족장시대의 사건들 중에서 간접적인 체험으로 헷 족속들의 법이 반영된 듯 보이는 것들도 약간 찾아 볼 수 있다.
그 토판의 조문에 보면, “만일 한 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상속을 받아 소유하고 있을 경우, 즉 만일에 그 밭 전체를 인계하여 받았을 경우에는 그는 군사적인 봉사와 책임을 진다. 그러나 만일에 그 밭의 작은 한 부분을 받았을 경우에는 그는 군사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 책임은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진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헷 족속의 법에서는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군사적인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창23:4~20에 보면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서 밭모퉁이의 한 부분을 사라를 위한 매장지로 사려하였을 때, 에브론은 그것을 허락지 않고(창23:11, 12~18) 그 밭 전체를 가지도록 요구했던 것을 볼 수 있다(11절). 만일에 아브라함이 그 밭의 한 부분만 샀었다면 에브론은 여전히 군사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팔므로 그 책임은 아브라함에게 전가되는 것이었다. 에브론은 그러한 법을 생각했던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또 그 밖에도 모세의 법에 죽은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그 가정을 세우는 것(신25:5~10)도 헷 족속의 법과 잘 대조됨을 본다. 그들의 법에 보면 “만일 어떤 사람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아비가 그를 취해야 한다. 만일에 그 아비도 죽는다면 그의 형제들의 아들 중에서 하나가 그 아내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성경의 다말은 헷 족속의 이 방법을 이용하여 시부를 통하여 아들을 얻으려 했던 것 같다. 때문에 유다가 창38:25, 26에서 “그는 나 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런 일들은 모두 당시의 헷 족속의 법의 원리를 기초로 하여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고 본다. 다말의 잘못된 행동이 모세의 법에 서는 그 선을 넘어선 것이라고 보지만 당시의 헷 족속들의 법에는 부합되는 행동이었다. 사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법이 없는 시대와 사회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족장들의 시대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시대에서도 상당히 발전된 문화 소산이라고 볼 수 있는 법률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그 근본적인 원리에 있어서는 모세의 법과 이방의 법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이방의 법들과 관습들은 족장들의 생활에도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때, 당시의 문화적인 환경과 사회적인 관습을 아는 것은 족장들의 생활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빛을 얻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자료들은 극히 단
제 10장 가나안의 초기 원주민들
1. 르바 족속(창14:5 ; 신2:10, 20)
가나안의 초기 원주민들은 얼마 못가서 멸절 되었고, 그 곳에 살고 있는 르바 족속은 가나안의 초기 원주민들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일찍 망했으나 창14:5에 보면 르바 족속은 아브라함 때에 그돌라오멜에게 망했다. 창15:20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을 말씀하실 때 르바 족속의 땅이란 말이 들어 있다. 여호수아 때의 바산 왕 “옥”은 르바 족속의 후손이었다(신10:11).
그 때의 르바 족속의 남은 자는 옥 뿐이었다고 했다. 성경에는 종종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에 이르기까지의 비옥한 계곡을 가리켜 르바임 골짜기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는데(삼하5:18, 22, 23:13 ; 대상11:15, 14:9), 그곳은 곡물의 추수가 풍성하여 이삭을 많이 주었을 때는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다(사17:5)는 말이 남아 있다. 이처럼 그들은 한 때 가나안의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살았던 족속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암몬 땅의 원주민이기도 했다(신2:20). 그들은 암몬에게 망했으나 아낙 사람과 같이 강하고 키가 컸다.
그들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족장시대에 있어서 그들은 한때 가나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비록 옛날 시대라고 할지라도 강한 자가 반드시 오랫동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르바 족속은 바산 왕 옥을 최후로 영원히 지상에서 사라졌다. 르바임이란 강대하다는 뜻과 유령이라는 뜻이 있다.
2. 엠 족속(창14:5 ; 신2:10)
엠 족속은 본래 모압 땅에 모압인이 거주하기 전에 살았으나 모압 족속에게 망했다. 그들도 르바 족속 같이 또는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컸다고 한다. 엠이란 뜻은 두려운 존재라는 말이다. 이 명칭은 신2:11에 보면 이 명칭은 모압인들이 부른 이름이었다. 성경 밖에는 그들에 관한 기록이 없다.
3. 호리 족속(창14:6 ; 신2:22)
호리 족속은 일찍부터 에돔(세일)에 살았던 자들로(창30:20~30) 에서의 후손들에게 쫓겨난 자들이다(신2:12, 22). 그러나 그들은 세일뿐만 아니라 팔레스틴의 중앙지대에 널리 살았고 세겜과 길갈에도 살았다(창34:2 ; 수9:6, 7).
위의 성경을 살펴보면 히위 족속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LXX경에는 모두 “히위” 족속으로 기록되어 있다.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아나의 딸)는 창36:2에서는 히위 족속이라고 했으나 창36;30에는 호리 족속이라고 했다. 아마도 호리 족속과 히위 족은 동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학자들은 히브리어 히위와 호리의 표기를 잘못하여서(와우와 레쉬) 서기관의 혼동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많은 학자들은 비 셈계 족속으로 코카사스 남방에서부터 메소포타미아 동족으로부터 흘러들어 온 후리 족속은 성경에 나타난 호리 족속과 동일하다고 한다.
그들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유역에 일찍부터(주전 1200년경) 자리 잡았고 멀리 지중해 연안까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후리 족속들은 주전 1550년부터 앗수르에 망하기 까지 수리아 지역과 남부 터키와 동부 앗수르에서 지배적인 세력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그들의 영토는 안수스의 손에 들어갔고 그 이름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4. 수스 족속(창14:5)
수스 족속은 일찍이 그돌라오멜에게 망했다(창14:5). 그들의 영토는 요단 동쪽 평지에 있었다. 그들의 수도는 함이었는데 지금도 길보아산 동북(요단강 북쪽)에 같은 이름의 촌락이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모압 땅 보스라 근방에 있는 어떤 곳일 것이라고도 한다.
5. 아낙 족속
아낙족속은 가나안의 원주민들로서 주로 헤브론 산지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정착해 있었다(민13:22) 그들은 본래 느비림의 후손들로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었다(민13:33). 아낙이란 본래 “목이 길다”는 말로서 거인을 의미한다. 네리핌의 뜻은 함락 시키다의 뜻으로 침략자를 의미한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정탐군들은 그들을 보고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 같으니”(민13:33)라고 하였다.
또 감히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신9:2)라고 했던 것이다. 그들이 거주한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고 했는데, 그곳은 그들의 중심 도성이었다(수14:15 :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고 했는데 그는 아낙 사람들의 조상인 듯하다).
여호수아에서는 엠 족속과 르바(르바임) 족속이 키가 크고 강장함을 말할 때 아낙 족속과 비교하여 그들과 같다(신2:11, 12)고 말하였다. 이 처럼 아낙 자손들은 가나안을 주장하고 있던 강한 족속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으로 망하고(수11:21, 14:15) 오직 블레셋 땅인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약간 남아 있었다(수11:22). 이렇듯 아낙 족속은 강대한 족속이었으나 후일의 역사에는 그 종족이 남긴 흔적이 없다. 오직 그 이름이 알려지기는 성경뿐이다.
6. 기타 족속들(창15: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의 땅을 기업으로 약속할 때에 특별히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라고 말했다(창15:18). 이러한 약속의 땅의 한계를 다스리며 확실하게 지배하였던 것은 솔로몬 왕(왕상4:23) 때와 북방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왕하14:25)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겐 족속(여기 겐 족속이란 가나안의 원주민이 아니라 미디안 족속 중 하나이다)들이 사는데 주로 홍해의 동남쪽 지역에 살았으며,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가 그 족속에 속해 있었다(삿1:16). 겐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광야 생활 중에 선대했고(삼상!5:6), 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살았다(삿1:16).
그니스 족속(그니스와 그나스는 종종 혼용되어 있다). 즉 히브리 맛소렛 사본에서 그니스로 된 곳은 창15:19과 민32:12, 수14:6, 대상14:13등에 있고, 그나스로 된 곳은 창36:11, 15, 42, 대상1:36, 53등에 나와 있다. 우리나라 한글의 번역에는 여호수아 14:6과 창15:19 외에는 모두 그나스로 되어 있다)과 갓몬 족속의 땅이 포함되어 있었다(창15:19). 민32:12이나 수14:6을 보면 갈렙이 그니스 족속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니스 족속 중 일부는 이스라엘의 유다지파에 합류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유대 역사에 크게 공헌도 하였다(민13:6).
또한 갓몬 족속이란 원 뜻은 동방 족속이란 말이다. 어떤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은 그 말뜻으로 보아 단순히 동방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고, 하나의 종족의 이름으로서 존재하다가 없어진 것이다.
제 11장 가나안의 후기 원주민들
가나안의 초기 원주민들은 족장시대에 벌써 멸절 되었거나 소수만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원주민들로는 흔히 다음과 같은 소위 가나안의 족속과 블레셋 족속을 말한다.
1. 헷 족속
헷 족속은 본래 가나안의 둘째 아들 헷의 후손들이다(창10:15). 그들은 족장시대로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까지에 있어서(창15:10 ; 신7:1 ; 삿3:5) 가나안에 거주한 종족 중에 하나의 큰 민족이었다.
그러므로 “광야와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온 땅을 헷 족속의 이름으로 불렀음을 본다(수1:4). 헷 족속은 기원전 2000년경에 벌써 소아시아에 와서 도시 국가들을 건설한 민족이다. 그들이 헷 제국을 건설한 것은 주전 약 1800년이었다. 헷 제국의 초기의 왕 중에 알려진 자로 “두달리아”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창세기 14:1에 “고임 왕 디달”과 동일 인물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그들은 일찍부터 가나안에 이주하여 온 종족들이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었을 때 그들에게서 무덤의 땅을 샀다(창23:3, 4).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그들 중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것이다.
에서는 그 아내 둘을 헷 족속의 딸들 중에 취했고(창26:34), 그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도 그들에게서 아내를 취할까 두려워했다는 기록을 보아(창27:46) 이삭의 가정이 살던 브엘세바 지역도(창28:10) 헷 족속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겔16:3, 45에 보면 예루살렘을 가리켜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것 역시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헷 족속들과 많이 혼혈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유명한 장군 우리아도 헷 사람이었다(삼상23:39).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다질 때 그의 부하 중 아비새란 사람도 헷 사람이었다(삼상26:6).
성경에 나타난 그들의 최후의 기록(대하8:7)은 그들이 어떻게 솔로몬의 역군이 되어 있었던가 하는 내용이었다. 그후 아마도 그들을 점차적으로 이스라엘에 흡수시켜 버렸을 것이다.
2. 가나안 족속
가나안 사람이란 말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넓은 의미로는 가나안에 사는 모든 족속들을 모두 가나안 사람이라고 했다. 가나안이란 말이 널리 알려진 것은 붉은 염료, 혹은 붉게 염색된 옷감을 무역하는 상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하고, 또는 그들이 붉은 채색옷을 입는데서 왔다고 하나, 아직 그 어원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애굽의 문헌에는 가나안이라는 말이 종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요셉과 같이 가나안 사람들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이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엔 주로 시돈과 두로의 베니게 지역의 해변가와 요단강 계곡과 평원에 사는 하나의 종족을 가리켜서 가나안 사람이라고 불렀다(창10:19 ; 민13:29 ;사23:8). 위의 성경을 보면 그들을 가나안에 사는 족속 중 하나로 구별하였다(창15:21 ; 출3:8, 17 ; 신7:1, 20:17). 그들은 주로 두로와 시돈의 해변 가에 살면서 무역에 종사였으므로 가나안 인이라고 하면 곧 상인을 의미하는 말과도 같았다. 그러나 팔레스틴에 살고 있던 가나안 인들은 점차적으로 히브리인들에게 흡수 되었다.
마5:21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갔을 때 가나안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친 기록을 보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그 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본다.
3. 블레셋 족속
블레셋 족속은 그레데에서 남부 팔레스틴 해안지대로 이주하여 온 족속들이다. 블레셋이란 그 말 자체가 이주자란 뜻이다. 그들은 본래 창10;14의 가슬루힘(머리를 깎은 사람들이란 뜻으로 기원전 16세기의 것으로 알려진 애굽의 벽화에 의하면 그들은 머리를 밀었음을 본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그것을 금했다)의 지파로 함의 후손들인 미스라임(애굽)과 그 조상을 같이 한다.
그들은 벌써 족장시대에 그곳에 영토를 점령하고 거주해 있었다(창21:32, 34을 보면 블레셋 땅의 왕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하였으므로 그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꾸짖고 그와 언약을 맺었다. 그러므로 그 우물 있는 곳을 브엘세바(언약의 우물)라고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그들은 기원전 1200년 경에 팔레스틴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들은 벌써 아브라함 시대에 그곳에 이주해 와서 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은 성경 밖에도 그 흔적이 보인다.
초기에 있어서 블레셋 사람들의 중심지는 그랄이었다. 창20:1, 2에 보면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했던 일이 있었다. 아비멜렉은 블레셋 사람의 왕이요 따라서 그랄은 블레셋 땅의 중심지이었을 것이 분명하다(창20:34).
그후 블레셋 사람들은 아스돗, 아스글론, 에글론, 가드, 가사등의 다섯 방백(군주)들에 의하여 통치되었다(수13:3). 사사시대에도 이들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이스라엘을 괼보게 하던 큰 세력이었다(삿3:3, 31 ; 10:7 ; 13:1~16:31).
그 후 사무엘이 아직 어린 시절의 일이지만 아벡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하여 실로의 성소가 훼파되며 법궤를 빼앗겼던 비참한 일도 있었다(삼상13장, 14장). 특별히 그들은 철 공업이 일찍 발달되었으므로 이스라엘은 어떤 철 기구를 만들려고 해도 온전히 그들의 손에 의존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과 싸울 때 이스라엘은 칼과 창이 부족하였으므로 한 때 곤란을 겪었던 일도 있었다(삼상13;19~22).
그러나 요나단의 지휘로 사울왕은 블레셋을 크게 이겼다. 그러나 블레셋을 완전히 멸할 수 없었고 그들과의 계속되는 전쟁을 위하여 군대를 키우는데 그는 더욱 힘을 썼다(삼상14:52). 다윗이 소년 때에 블레셋 장군인 골리앗을 이긴 후에도 블레셋을 멸하지는 못했고 그가 왕이 된 후에야 그들을 쳐서 이김으로 블레셋의 위협을 면하게 되었다(삼하5:25). 그러나 후일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약화되었을 때 블레셋은 다시 일어나서 유다 왕국에 계속적인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왕상15:27 ; 16:15 ; 사9:8~12) 그러나 여호사밧 왕 때에는 블레셋이 유다에게 조공을 바쳤으나(대하17:10, 11), 아하스 왕 때에 다시금 블레셋의 위협이 높아졌다(사9:8~12).
성경에서 블레셋의 멸망이 마지막 예언되기는 유다가 포로에서 돌아온 후 스가랴를 통해서였다(슥9:5~7). 블레셋이 완전히 방하기는 알렉산더 대왕 때였다(주전 332년). 마침내 블레셋 족속도 다른 민족에게 흡수되고 역사에서 그 이름이 영원히 사라졌다.
4. 히위 족속
히위 족속은 앞서 호리 족속에서 보듯이 이 두 족속은 동일한 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본래 함의 후손으로서(창10:17~20) 불방 레바논 산과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널리 퍼져 나아가 살았다(삿3:3 ; 수11:3). 그들의 거주지는 다윗 때에도 별로 변함이 없었다(삼하24:7). 시돈과 두로에는 가나안 사람과 더불어 히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또 일부는 세겜에서도 살았고(창34:2), 또 기브온과 그 주변 성읍들에서도 살았다(수9:3, 17).
특별히 기브온과 그 주변의 몇 도성에 살던 히위 족들이 여호수아를 속여 평화조약을 맺고 생명을 구한 일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수9:3~15).
5. 여부스 족속
여부스 족속은 가나안의 셋째 아들의 후손들로서(창10:16 ; 대상1:14), 예루살렘과 그 주변 산간지대에 살았다(수15:8 ; 18:16 ; 민13:29 ; 수11:3). 이 족속은 가나안에서 소수 민족에 속하지만 가나안의 중심인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었고 도 그 성읍은 그들의 이름으로 “여부스”라고 불렸다(삿19:10, 11 ; 수 18:16, 28 ; 대상 11:4, 5).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 여부스 왕 아도니세덱은 살해 되었으나(수10:1~27), 여부스 족속은 계속 예루살렘에 살았다(삿1:21). 그러나 다윗 때에 그 성을 쳐서 마침내 시온산성을 점령하고 다윗 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삼하5:5~9).
6. 브리스 족속
브리스 족속은 주로 변두리 시골에 살았던 족속인듯 하다. 브리스의 원어의 뜻은 “적은 마을에 사는 자”라는 뜻으로 견고한 성읍과는 대립이 되는 시골 동리에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브리스라는 말이 하나의 종족의 이름이 아니요 그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그들을 족속 중 하나로 열거하였다(창15:20 ; 출3:8 ; 신7: 1 ; 20:17 ; 수3:10 ; 9:1 ; 삿3:5 ; 왕상9:20 ; 대하8:7 ; 느9:8 등등). 그러나 그들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그들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
7. 기르가스 족속
기르가스 족속은 위에서 본 브리스 족속과는 달리 가나안의 계보에 들어 있다(창10;16 ; 대상1:14). 그러나 그들 역시 가나안의 족속 중 하나로 열거되어 있을 뿐이다(창15:21 ; 신7: 1 ; 수3:10 ; 24;11 등등). 더 알려진 것은 없다. 기르가스 족속의 존재가 간접적으로 확인된 것으로는 우가리트 문헌에 두 사람의 개인 이름이 나온 것도 있다.
제 12장 이어지는 혈통
우리는 혈통을 따라 내려가다가 형성된 국가와, 발굴된 법전과, 가나안의 주민들을 살펴보았지만 지금부터는 윗 시대를 찾아가서 간단명료하게 혈통들을 따라서 아브라함까지 내려가 보기로 하자.
1. 아르박삿
니므롯이 내세운 명분은 모든 인류의 뜻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평화의 탑을 건설하자고 재안했고, 그 탑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었지만 그의 속셈은 사람들의 이목을 바벨탑의 건설에 집중하도록 하여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함으로서 자신의 불법을 정당화하려는데 관심이 있었다.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11:4) 이렇게 니므롯이 모든 백성을 미혹해가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반역의 탑을 건설하고 있을 때 셈의 남은 백성들을 규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재건하겠다고 나선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에벨이라는 사람이었다. 성경은 이 에벨을 셈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창10:21)
셈의 형제들이 새로운 땅을 찾기 위하여 아라랏 산을 넘고 떠나갈 때 이들의 유랑에 참가하지 않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의 남은 형제들을 규합하여 탈취당한 장자권의 회복을 위해 투쟁한 인물 에벨에 대하여 성경은 그를 아르박삿의 자손이라고 기록했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창10:24) 아르박삿은 역대기의 기록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고.......”(대상1:18) 그러나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부터 소개할 때는 요셉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누가복음의 계보는 이 창세기와 역대기에 기록된 족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눅3:35, 36)라고 하였다.
위에서 헤버는 에벨을 말하는 것이고 살라는 곧 셀라이며 아박삿은 아르박삿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곧 아르박삿과 셀라의 사이에 가이난이란 사람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가이난이라는 이름을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 옮겨 놓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르박삿은 메시야가 오실 혈통을 셀라나 에벨에게 물려준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은 가이난이게 물려준 것이다.
2. 가이난
창세기의 외경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요벨서는 폐쇄적인 집단 생활을 하고 있던 엣세네파의 문서답게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으나 가이난에 대한 기록은 계속해서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서 내려오고 있던 전승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가이난에 관한 요벨서 제 8장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르박삿의 아들 가이난은 그 아버지에게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르박삿의 아들 가이난은 그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고 난 후에 도시를 공략할 수 있는 곳을 찾으러 나섰다. 그는 옛날 사람이 바위에 새겨놓은 비문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읽고 해석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죄를 범하였다. 거기에 있었던 것은 점성술의 가르침이었다. 즉 함의 자손들이 새로운 신들과 점성술에 빠져서 타락하고 있을 때 이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나섰던 아르박삿의 아들 가이난은 오히려 그들에게 미혹되어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이난은 점성술에 빠져서 이방신을 섬긴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니므롯의 바벨탑 건축에 참여하여 그를 도와주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가이난의 기술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나님이 노아의 세 아들에게 방주를 만들기 위하여 기술을 분담해 주실 때, 가인에게 주었던 기술을 그들에게 나눠 주셨다. 셈에게는 건축의 기술을 주셨고, 함에게는 금속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을 주시고, 야벳에게는 배를 만들고 항해하는 기술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힘을 합하여 방주를 건조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홍수가 끝난 후 장자의 횡포 때문에 함 집안이 하나님을 반역하여 장자 권을 뒤엎고 니므롯은 바벨탑의 대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금속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니므롯은 바벨탑을 건축하기 위하여 셈의 건축 기술이 필요했다.
마침 그 때에 아르박삿의 아들 가이난이 메소포타미아로 내려왔다. 니므롯은 음란한 새로운 신들을 동원하여 그를 유혹하고 점성술을 가르쳐 주어 그가 점성술에 빠지게 했다. 이렇게 해서 니므롯의 편이 된 가이난은 결국 바벨탑 건축에 협조하게 되었다. 결국 바벨탑은 셈과 함과 야벳의 혈통 모두가 참여하게 되었고 세 사람은 힘을 모아서 하나님께 도전하는 양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때 의를 향했던 소수의 무리(셈의 후손)가 아라랏 산을 넘어서 유랑의 길을 떠났고, 동방에서 새로운 역사를 일구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셈의 후손을 이어가는 아르박삿은 가이난의 못된 행동에 크게 노한 뒤에 가이난을 파문시키고 족보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가이난의 이름은 셈의 족보에서 영원히 삭제되었고 아르박삿은 아무도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 엄하게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하나님의 인도로 가나안에 정착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살던 이스라엘과 유다는 또 지난날의 가이난처럼 그 땅의 여신들에게 미혹되어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 그 때로부터 애굽에 도망가서 살고 있던 유대의 학자들은 히브리어를 잘 모르는 자손들에게도 신앙을 전수하기 위하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게 되었다.
그들은 성경을 번역하면서 가이난의 이름을 다시 그들의 족보에 기록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 같다. 그들의 잘못은 가이난이 범한 죄와 똑같은 것이며, 그 사실들을 통탄하면서 후손들에게 경고의 기록을 남겨주는 것이 되었다. 아르박삿은 아들 가이난을 건너 뛰어 손자 셀라에게 장자 권을 주어 후계자로 삼았다.
3. 에벨(헤버)
에벨이라는 이름의 뜻은 “건너뛰다”이다. 이러한 뜻을 가진 에벨은 셈의 후손들인 형제들을 강력한 리더쉽으로 규합하여 강력한 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유프라테스 강의 상류인 발리 강변에 있는 하란(지명)의 지방을 중심으로 “에블라”왕국이라는 장자의 나라를 재건하였다. 이 하란의 서 남쪽에는 알레포라는 곳이 있는데, 그 남쪽 30마일 되는 곳에서는 지금도 에블라 왕국의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다(원용국 성서고고학 P.185)고 한다.
이 에블라는 에벨의 이름과 관계가 있으며 여기서 아비루 또는 하비루라고 하는 민족의 이름이 유래되었고 오랫동안 세월이 흘러가다가 어느 날 이것이 성경에 기록 될 때에는 “히브리”로 기록이 되었다는 학자들도 있다. “히브리”라는 말이 성경에 기록되면서 그 이름을 다시 “건너편 땅”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히브리 사람이라고 하면 건너편 땅 즉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나그네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4. 벨렉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라...” (창10:25) 에벨이 아들의 이름을 벨렉이라 함은 그 뜻이 “나눔”이라는 뜻으로서 에벨은 아마도 벨렉의 시대에 동서의 대 분단이 있었기 때문이거나, 영적인 분단은 이미 이루어졌고, 육적인 분단의 조짐까지 보였기 때문에 이름을 벨렉이라고 한 것 같다(바벨탑 이전의 시대이었으나 니므롯은 이를 세상적인 방법으로 장자권을 탈취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불법으로 정당화하며 무력으로 다스렸던 것이다). 벨렉은 아버지인 에벨을 이어받아 하란 땅에 세웠던 에블라 왕국을 이어 갔다.
5. 르우(친구), 스룩(활), 나홀(코를 고는 사람)
하란 땅에 에블라 왕국을 건설했던 에벨의 후손들도 동쪽으로 떠난 형제들처럼 나중에 또 나그네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위의 족장들의 이름의 뜻을 보면 르우 때에는 태평하여 평화롭게 살다가 권력을 넘겨준 것 같고 스룩이 통치하는 시대에는 매우 어려운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름을 활 이라는 뜻으로 했다는 것은 선친의 시대에 누가 봐도 친구같이 사는 시대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활로서 강력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나흘의 시대에 와서는 권력의 핵심을 포기하고, 정신적인 고통을 해방하고 육체적인 평안을 원하는 마음으로 살아온 것 같다. 이러한 추리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사례를 통하여 살펴보자.
에벨이 세웠던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창 10:21의 말씀에 “셈은 에벨의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라고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굉장한 업적을 남겼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에블라 왕국은 그 후에 가나안에 속하는 헷 족속의 침입을 받아 멸망당했고 에벨의 자손들은 다시 터전을 잃고 방랑의 길에 나서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에벨과 그의 형제들이 애써서 재건한 에블라 왕국을 보호하여 주시지 않고 멸망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거기에는 하나님의 무슨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셈의 집안이 니므롯의 공격을 받아서 장자 권을 빼앗긴 것은 무력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아우들을(함과 야벳의 자손들) 돌보아 주고 보살펴 주며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하는 축복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아우들에게 수모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셈의 후손들은 가나안의 계략대로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신들에게 미혹되어 그들에게 절하며 그들의 여인들과 음행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셈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하나님이 보호의 손길을 거두어 가셨으므로 니므롯의 공격을 받아 어이없게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시 창과 칼을 들고 궐기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했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이 무의미한 것이었고 무력에 의한 왕국은 메시아의 왕국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무력에 의하여 건설된 왕국은 진정한 장자권의 회복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이다.
출 19:5,6을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칼과 창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장자들의 눈물과 회개와 기도와 사랑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칼과 창으로 회복된 장자의 나라 에블라의 왕국은 다시 멸망할 수밖에 없다. 힘을 통하여 세워진 에벨의 자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어 연단을 받아서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의 모습이 만들어져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6. 데라(표백)
데라가 아브라함과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을 때부터 하나님은 다시 장자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셨다. 행7:2, 3에 보면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메소포타미아(갈데아 우르)에 살았음을 볼 수 있다.
나홀의 아들이며 아브람의 부친인 데라가 태어난 때는 주전 2236년 이었고 그것은 동방으로 이동한 셈의 자손들이 아사달에 정착하여 감사의 제단을 쌓은 주전 2333년부터 계산하면 97년이 지난 후에 데라가 태어났었다. 이 시대는 바로 사냥꾼 니므롯의 반역으로 수립된 바벨론의 정권이 화려한 반역의 문화를 꽃피우며 천하를 장악하고 있던 때이기도 하고 에벨의 왕권도 바벨론의 정권에 멸망한 것이다.
바벨론 전에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두 강이 흐르고 이는 메소포타미아는 주전 약 3000년에 이미 청동기 문명을 가진 수메르인들이 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종교, 언어, 군주를 가진 인류 최초의 고등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나시르(성별된)시대와 우르 왕조 시대를 거쳐 오면서 세력을 확장해 갔다. 그러다가 서북쪽에서 발흥한 셈족에 멸망하면서 메소포타미아를 넘어 소 아시아, 이란의 고원 지대를 포함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중앙 집권적인 관료 국가를 이룩하였으며 왕이 곧 신이었다. 국가 건설의 주역인 사르곤 대제는 그야말로 위대한 왕이었다.
신의 대리자로 아카드의 제국을 세웠다. 이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주전 2250년경 살카르사리에 의한 것인데, 그 부친 사르곤 왕이 시작한 아카드의 건설을 완공했다는 것이었다. 사르곤 왕은 곧 앗수르에 그 뿌리를 둔 것이요, 더 올라가면 수메르 문명의 모방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수메르 문명의 아들에 해당되는 바벨론 문명에서도 똑 같은 현상은 아시 나타난다. 바벨론의 역사를 보면 바벨은 무역으로나 예술로도 앗수르에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아놀드 토인비 “역사의 연구”). 본래 바벨론 문명은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었으므로 창조의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인본주의를 밀어주는 사단이라는 존재는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단은 본래 거짓말쟁이로서 남의 것을 가져다가 모방하여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투적인 버릇이 있었음을 위에서 볼 수 있었다.
사단에 넘어간 바벨론도 마찬가지이었다. 그들은 수메르에서 물려받은 건축 기술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수메르의 쐐기문자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자기들이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수메르가 만든 바귀를 자기들이 발명한 것이라고 선전했다. 바벨론은 이렇듯 수메르의 문명을 고스란히 받아 들였으면서도 그것들을 모두 자기네 산물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바벨론의 문명은 화려했다. 그들의 통치 방법은 피라밋 모양의 조직을 구사하는 것으로 소수의 지도 그룹이 하부계층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직의 하부에 속하는 민중은 늘 조직이 요구하는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바벨론의 화려한 문명은 바로 강력한 지배급의 채찍과 하부에 조직의 희생위에서 건설된 것이었다.
바벨론의 주신은 여신인 이쉬타르였고, 이쉬타르는 가나안의 아스다롯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신들을 보면 바벨론의 주도 세력이 바로 갈대아 사람과 아모리 족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갈대아 또는 갈두 사람들은 니므롯과 함께 혁명을 일으켰던 세력이었고, 이 세력들은 주전 627년 이후 후기 바베론을 중흥시킨 느부갓네살의 아버지 느보폴라살도 역시 갈대아 사람이었다.
이들 갈대아 세력의 중심은 수메르의 도성이었던 “우르”이었는데 이 우르가 우상과 점성술의 본토로 변해버린 것을 보면 이들 갈대아 세력은 아스다롯의 여신을 처음 만들어낸 가나안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에 의해서 에벨이 건설한 하나님의 왕국 에블라가 멸망했던 것이요 에블라 왕국이 멸망하자 에벨의 후손인 데라와 그의 가족들은 정처없이 동쪽을 향해 가다가 갈다아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우르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
위대한 인물 에벨의 후손이면서 왕의 후예였던 데라가 우상의 도시였던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을 때 그의 생활이 어떠하였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에벨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가나안의 정보망은 그의 가족들을 끊임없이 감시했을 것이고 그들에게는 농사를 지을만한 땅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성경에 보면 데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창11:26)
그리고 데라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수24:2)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셈의 자손이요 위대한 인물 에벨의 후예인 데라이었으나 갈대아 우르에서의 삶이 너무 각박하였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신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둘째 아들을 그 아비의 이름과 같은 나홀이라 불렀고, 셋째 아들의 이름은 에블라 왕국이 있었던 땅의 이름을 따라서 하란이라고 하여 비록 나라는 망하여 우상의 땅에 살고 있지만 지난 날을 그리워하는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서글픈 이방의 생활 속에서 다시 비극이 일어난다.
그의 셋째 아들 하란이 이방의 땅에서 그 아비보다 먼저 죽었던 것이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창11:27) 역사가 요세푸스는 데라가 이 셋째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기록했다. 또한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창11:31~32)
제 13장 아브라함의 여정
아브라함은 고향의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이주했다. 그가 거쳐 온 곳들은 어떤 지방인가를 살펴보자.
1. 우르(창11:28, 31 ; 15:7)
많은 학자들은 창24:4, 7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의 원 고향이요, 출생지는 메소포타미아의 남방지역인 우르가 아니라 북방 메소포타미아의 밧단 아람일 것이라고 했다. 특별히 그들을 창11:28, 31에 나타난 갈대아 우르라는 말이 있음을 지적한다. 행7:4에서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인용할 때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의 출생지와 그 원 고향은 북방 밧단 아람이었으나 그가 성장하기는 남방의 우르였을 것으로 봄이 바를 것 같다. 우르는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였다.
수메르인들의 그 근원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들은 기원전 약 3000~2000년 어간에 남방 메소포타미아에 이동하여 온 사람들로 도식국가를 건설했고, 그곳에 마침내 고대 문화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들의 설형문자로 기록된 그들의 언어는 고대 근동지방의 다른 언어들과 그 근원을 달리하지만 후일에 그 지역에 이주하여 온 셈계의 부족들은 그들의 발달한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 바벨론과 앗수르에서 사용된 소위 셈어계인 아카디아어도 그 문자는 설형을 그대로 빌려 사용했던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메르 문화가 집약된 곳이 바로 우르이었다. 그곳은 또 갈대아의 월신 난나를 섬기는 중심지로서 많은 신전들이 있었다. 우르의 옛 성터가 발굴된 대로는 그 크기는 인구가 약 2400명 가량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우리는 바벨론의 함무라비(주전 1728~1686)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후일에 나보니더스(Nabonidus, 주전 556~ 주전535)라는 인물에 의해서 재건되기는 하였으나 다시는 옛날같이 문화 종교의 중심지는 되지 못했다. 아브라함시대의 우르는 가장 번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일찍이 북방 밧담아람을 떠나서 이러한 우르에 와서 정착했을 것으로 본다. 결정적인 것은 아브라함이 좋은 문화권에서 교육을 받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추장이나 백작).
2. 하란(창11:31, 32 ; 12:5)
하란이라는 그 말 자체는 곧 길이라는 뜻이다. 그처럼 하란은 교통의 요충지이다. 니느웨와 바벨론은 물론이요 다메섹과 두로와 애굽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이다. 우르 문화권의 마지막 울타리가 되는 국경지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이곳까지 와서는 다시 더 불안한 미지의 나라 가나안으로 가지 않으려 했던 것을 우리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하란은 기원전 약 2000년경에는 아모리인들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바로 이 하란의 주변은 본래의 아브라함의 가문의 발상지인 밧단 아람(아람인의 벌판이란 뜻)이다. 아브라함이 본래 이 아람 계통인 것이 분명함은 신명기 26:5에 “네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라는 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24:4)
3. 세겜(창12:6)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 머무른 곳이 세겜이다. 지금의 텔 발라다(Tell Balatah)란 곳이다. 이곳은 주전 약 2000~1800년 사이와 또 주전 1400~1200년 사이 즉 전후 400년간에 걸쳐서 가나안의 중요한 요충지대의 역할을 한 곳이다. 현금에는 반세기 동안 고고학자들이 세겜 지역의 고적을 계속해서 찾아다니며 발굴하고 있다. 이러한 발굴의 결과로 아브라함이 이주한 그 당시의 세겜의 성의 규모와 궁전의 고대 도시의 거리 모습을 짐작하게 되었다.
4. 벧엘(창12:8)
아브라함은 벧엘의 성 밖에 장막을 치고 거기에 머물렀다. 이 성은 주후 1934년에 알브라이트 교수의 지도로 발굴되었다. 그 결과 그 시대 그곳의 석공들의 그 기술이 그 어느 시대의 것보다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이 그 성지와 가옥들의 유적에서 알려졌다.
아브라함은 살기좋은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에서 “유리하는 나그네”로 이 모습은 상상하기만 하여도 처량하다. 이러한 벧엘은 또한 그가 가나안에 들어와서 맨처음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 곳이기도 하다(창12:8). 또한 그가 애굽에서 돌아온 후 다시 찾은 곳도 이 벧엘이었다(창13:3). 물론 벧엘은 야곱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창28:11~22 ; 35:1~8).
5. 브엘세바(창26:23 ; 28:10)
여기는 샘물이 있는 곳이요(창21:19), 우물로 유명한 곳이었다(창21:25). 이곳의 옛터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으나 지금까지도 이 부근은 생산물들과 상품들의 집산지가 되는 시장의 중심지이라고 한다. 이 도성의 그런 역할은 족장시대로부터 계속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6. 헤브론 혹은 기럇 아르바(창13:18 ; 14:13 ; 18:1,4)
아브라함이 롯과 갈라진 후에 비교적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이곳은 사라가 임종한 곳이기도 하다(창23:2). 물론 아브라함도 죽어 이곳에 묻혔다(창25:10). 이같이 그들의 무덤이 있는 것은 곧 족장들의 정착지였음을 증명하는 것도 된다.
이곳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고 했는데 그 뜻은 곧 “아르바인들의 성”이란 뜻이다. 아르바인들이란 아낙인들 중에서도 가장 큰 족속들의 이름이었다(수14:15).
특별히 아브라함은 헤브론의 마므레(그 친구를 높인다는 뜻이다)에서 살았다. 그는 세겜에서와 같이(창12:6), 상수리 나무에 이르러 장막을 쳤다(창13:18). 마므레의 지명은 아브라함을 기념하기 위하여서가 아닌가 한다.
7. 남방 일명 네게브(창12:9)
아브라함은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 팔레스틴의 남방지구를 네게브라고 부른다. 이곳은 그가 상당기간 유리하던 곳이다. 신 광야를 중심으로 팔레스틴의 남방 소위 네게브 지역을 조직적으로 발굴한 넬슨의 연구로 그곳은 황무한 사막만은 아니었음이 확인됐다. 만일에 지난날의 통속적인 지식과 같이 그곳이 불모의 사막이었다면 아브라함이 창12:9에서와 같이 그곳으로 옮겨 갈 이유가 없었다.
그는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 때 애굽은 이 민족이 찾아오는 것은 금하지 않았다. 침략을 목적으로 침입하는 것은 별 문제이지만 그렇지 않는 한, 즉 물물교환의 상거래와 또는 식량을 구하러 오는 자들이나 물을 찾아오는 목자들에게는 얼마든지 입국을 허락했다. 아브라함은 본래 농경을 업으로 하는 자가 아니라 목자였으므로 애굽에 내려간 것은 가축을 위한 물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목자들이 물을 구하여 애굽으로 가는 일은 하나의 관습 같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제 14장 아브라함의 출생 연대
아브라함의 출생 연대의 계수는 세 개의 요소로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출생에서부터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간 그 기간을 중심으로 연대를 측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아브라함이 받은 예언을 기준하여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입국하여 생활하였던 체재의 기간을 중심으로 연대를 계산하는 방법이다. 마지막 셋째는 출애굽의 연대인데 이것들의 총 합산을 하여 아브라함의 출생 연대를 추정한 학설이 있다.
그중에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의 연령이 100세이었고(창21:5), 또 이삭은 60세 때에 야곱을 낳았다(창25:26). 그리고 야곱이 애굽에 갔을 때는 130세이었다(창27:9). 이 모든 합계(100+60+130)는 290년이다.
다음은 이스라엘의 애굽체재 기간에 대한 두 학설의 430년으로 보고, 출애굽 연대도 이것 역시 주전 약 1446년으로 볼 때에 이 모든 합계는(290+430+1446) 2166년이 된다. 이것이 곧 아브라함의 출생 연대이다.
1. 아브라함과의 언약(창13~14장)
아브라함은 두 번에 걸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그처럼 거듭 받은 약속의 내용은 곧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와 그 후손에게 주시리라는 것과 또 그 후손들은 능히 셀 수 없으리만큼 번성하리라는 것이었다. 이같이 그 두 번의 약속은 내용이 동일한 것이지만 그 약속을 받을 때의 환경이 달랐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약간 다른 점이 있다고 느껴진다. 이제 그것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첫 번째 약속을 받을 때의 환경
창13:14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란 말로서 첫 번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시작된다. 위에 기록된 본문이 바로 그것이다. 창세기 13;1~13까지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무엇 때문에 서로 갈라지게 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는 것을 본 아브라함은 부끄럽고 비참한 그 모습을 이방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13:7).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나선 골육형제 삼촌과 조카가 얼마 안 되는 풀밭 몇 평을 놓고 이방인들 앞에서 서로 다툰다는 것은 얼마나 창피한 일이었겠는가?
아브라함은 슬픈 마음으로 롯을 불렀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8) 이것은 아브라함이 롯에게 한 말이었다. 롯은 물이 넉넉한 기름진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떠났다.
슬픈 마음으로 롯을 떠나보내고 쓸쓸히 돌아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셨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온 가나안 땅을 그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이런 약속을 주신 것은 바로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창13:14)의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새롭게 명심할 필요가 있다. 보이는 것을 양보했을 때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주시는 하나님, 적은 것을 양보했을 때에 더 큰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었다.
(2) 두 번째 약속을 받을 때의 환경
창15:1에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란 말로서, 또 언약을 하셨다면 둘째 약속은 시작이 된 것이다. 즉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창15:1, 5, 7)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두 번째 약속의 말씀이었다. 첫마디의 “이 후에”란 말씀은 아브람이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한 후에 크신 상급으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또 다음 사건 후에 그에게 크신 상급을 약속하셨다.
창세기 14장에 롯이 소돔 땅에 가서 거할 때에 시날 왕 아므라벨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를 쳐들어 왔을 때에 될 일이 기록되어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왕이 폐하였을 때 그 곳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기고 아브라함은 집에서 기르던 사병 318명을 거느리고 원수들을 쫓아가서 그들을 치고 롯을 구원했다. 모든 “재물과 부녀와 인민들을 다 찾아 왔다”(14:16). 이때에 구원을 받은 소돔 왕은 아브라함에게 사례하여 하는 말이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창14:21)고 했다.
창14:22에 보면 “천지의 주재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 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본래의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 세상의 상징이었고, 그들의 부귀와 영화는 세속적인 향락의 상징이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오는 기쁨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깨끗이 거절했다. 이유는 자기의 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소돔 왕에게 돌리지 않기 위함이요). 이는 곧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히 보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거절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그의 상급이 되셨다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창15:1의 “이후에”란 바로 그러한 일들이 있은 후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이 소돔 왕의 제의를 거절한 바로 그 후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약속이 있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은 원수들을 이긴 후에 오히려 두려워했음을 본다.
그들이 대오를 다시 정비하여 쳐들어 올 것을 무서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격려했다. 두려워 말라고 했고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신다고 하셨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캄캄한 하늘을 우러러 보게 했다. 하늘의 저 “뭇별을 셀 수 있나” 하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가나안을 그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을 삼게 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위에서 본 바와 같이(창13:1~13) 아브라함이 이방 사람들 앞에서 골육이 서로 다투게 된 것을 슬프게 알고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함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첫 약속을 상급으로 주셨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 찐데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4~17)
그리고 아브라함이 죄악 된 소돔의 부귀를 거절했음을 보실 때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방패가 되시며, 또 지극히 크신 상급이 되심을 확약 하시면서 두 번째 약속을 주셨던 것이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고, 계속해서 가나안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을 삼게 하셨다.
그렇다면 그 첫 번과 두 번째의 약속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먼저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의 동서남북을 바라보라”(13:14)는 말과 “하늘을 우러러....... 보라”(15:5)는 말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첫 번 약속의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녀에게 주리라는 것과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으리라는 것은 육신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고 거기에서 그의 후손들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이라면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는 그 말씀은 영적인 가나안의 영적인 신령한 믿음의 자녀들과 별과 같은 창성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육신의 가나안 기업을 말할 때는 그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고 하셨고,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 진데 그 자손도 셀 수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왕상4:20), 하늘의 셀 수 없는 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게 될 아브라함의 영적 신령한 자녀들을 가리킴이 아닐까? 창15:5에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는데, 여기 “네 자손”이란 원어는 복수가 아닌 단수이다. 그것은 여럿을 가리킴이 아니라 곧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갈3:16에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킴이라고 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했음을 본다. 분명히 아브라함은 캄캄한 하늘의 뭇별을 우러러 보았을 때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생겨질 영적 후손들을 믿음으로 바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와 같은 믿음을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감사하자. 본래는 이방 백성이었던 우리가 이제는 그저 “땅의 티끌 같은 후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아브라함이 영적 후손들이라 생각할 때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위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받은 언약 즉 “내가 네 자손을 땅의 티끌 같이 하리라.......”는 두 개의 언약을 구태여 구별하여 전자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육신의 가나안에서의 번성을 약속함이요, 후자는 그의 영적 믿음의 후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영적 축복을 약속함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영적 해석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을 줄을 안다.
즉 그들은 꼭 같은 내용의 약속을 대구적(對句的)으로 땅과 하늘, 티끌과 별로 표현한 것 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구별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이 두 번째 언약이 주어진 직후였다는(창15:5, 6) 사실과 둘째는 “땅의 티끌 같으리라”는 그 첫 약속은 열왕기상 4:20에 보면 벌써 솔로몬 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아브라함과 여호와의 상급(창15장)
아브라함은 지극히 큰 상급을 받은 믿음의 조상이었다. 지극히 큰 상급이란 어떤 것이 있을까?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곧 그의 지극히 큰 상급이었다고 창15:1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상급만이 아니라 그의 방패가 되신다고 하셨다. 애굽 왕 바로의 손에 있을 때 여호와께서는 저를 건지셨고, 가정이 완전히 파탄 날 그런 위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방패가 되어 주셨던 것이다(창12:14~20).
아브라함은 시날 왕 아므라벨과 그의 연합군을 쳐서 이긴 후 사랑하는 자기의 조카 롯과 그 가족들만을 구원한 것이 아니다.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은 물론이고 그들의 백성들과 재물들도 다시 찾았다(창14장). 그 때에 왕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제의 했다.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은 당신이 취하고 사람들만 내게 보내 주소서”(창14:21)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유명한 대답을 우리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될 줄 안다.
“아브라함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라함을 치부케 하였다 할까하여 네가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 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 하리라”(창14:23, 24). 이러한 그의 대답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 세상의 상징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부귀를 거절한 것은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부귀가 그리워 따라 간 사람이라면 아브라함은 찾아드는 것마저 거절한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거절한 이유는 그것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재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부자가 되었다는 추한 말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부귀는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 된 것임을 그는 세상에 선포하기를 원했었다. 그는 자기의 부귀를 통해서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하셨다. 창15:1에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 이니라”고 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상급인가! 이때 이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셨던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아브라함 이후 오고 오는 모든 후손들에게 하나의 신앙생활의 좋은 모범으로서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세상의 향락과 죄악 된 영화와 부귀를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저들의 상급이 되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이기도 하다. 히11:24, 25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셨다.
모세도 역시 아브라함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악의 낙을 거절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저를 축복하여 믿음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했을 때 그는 하나님께 무슨 상급을 요구 했었던가.
창15:2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하나이까 나는 무자(無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 이다.”라고 했었다. 계속해서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기른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 이다”(4절)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그리웠다. “나는 무자 하오니”하면서 아들을 구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그에게는 집에서 기른 다메섹 소년이 있었다.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인 그는 후일에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하여 메소포타미아로 보냄을 받아 리브가를 데려온 아브라함의 종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집의 모든 소유를 맡아 늙도록 충성한 종이었다(창24:1~2). 아브라함은 그를 자기의 상속자로 삼기로 일찍이 결심했는데, 홀연히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즉 롯을 떠나보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3:14~17)고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를 받은 후 벌써 많은 세월은 흘렀어도(창14장 참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씨(아들)를 주시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나타나셔서 크신 상급을 약속하시니 그는 무슨 상급을 주실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이 오직 혈육의 아들뿐이었다. 그것은 현재 아들이 없는 고독과 그에게는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그리웠던 것이다.
“동서남북의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는 분명히 알았지만 상속자의 아들이 없이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사실 이것은 그의 신앙의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보라!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구하는 자에게 주시되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이시었다. 육신의 상속자를 구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상속자 뿐 아니라 영적 상속자까지도 주셨다. 육신의 아들을 그리워하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아들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주셨던 것이다.
창15:5에 보면 “내게 시를 주지 아니하셨으니”하며 탄식하던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시면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자 보라 또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다. 여기 “네 자손”(원문은 씨, 단수)이란 말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그 단수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 육신의 아들 이삭이 외아들이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일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사라가 낳은 이삭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바울은 이 약속을 그렇게 간단히 보지 않았다.
갈3:16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했음을 본다. 그 자손이란 복수가 아닌 단수 곧 그리스도를 가리킴이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와서 비로소 “그 자손”(원문은 단수의 씨)을 그리스도로 이해 학 p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벌써 알았다.
그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 하리라” 했을 때 육신의 아들만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장차 나타날 자기의 씨(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후손들이 영적 가나안을 상속할 것을 믿었다(히11:13).
그러한 신앙은 진실로 성령의 지도로 생겨진 믿음이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은 본래 일찍부터 하나님을 섬긴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보게 하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계시를 통해 그 자손이란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믿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 때 이후 아브라함은 육신의 가나안보다도 하늘의 가나안을 더 사모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5, 16)고 했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 정든 산천, 부유한 고향 땅, 그리운 형제 친척을 버리고 떠난 것만 아니었다. 그는 나그네의 곤고한 생활 중에서도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든 부귀와 영화를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헌신짝 같이 버리는 순결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의 크신 상급이 되어 주셨고, 땅의 가나안과 위로는 하늘의 가나안까지도 그와 그 후손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셨다.
3. 아브라함의 실수(창16장)
위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슬프게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만 실수하여 첩을 얻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된 경로는 다음과 같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15)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셨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 의로 여기심을 받을 만큼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시험에 그만 실패하였다. 그 시험이란 이렇다. 세월은 흘러 그가 가나안에 들어와 약속을 받은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건만 아들이 없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첩으로 준 때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10년 후이었더라”(창16:3) 10년을 더 참지 못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하여 첩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그 아내 사라의 권면을 따른 때문이었다. 창16:2에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따라 하갈을 첩으로 얻었다. 이것이야 말로 아브라함의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은 지난날에도 벌써 여러 차례의 작지 않은 시험들을 당했었다. 어떤 시험에는 잘 이겼으나 어떤 경우에는 넘어지기도 했다. 먼저 그가 이겨 온 시험들을 보자.
(1)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창12:1)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그는 순종했었다. 그것은 물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순종하므로 잘 이겼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2) 롯에게 슬픔을 당하는 시험이었다(창13:1~11). 그 때에도 그는 모든 권리를 그에게 모두 양보했었다(창13:8~9).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셨다. 그에게 가나안의 기업을 주시며 후손의 창성(昌盛)을 약속했었다(창13:14~17)
(3) 신앙의 용기가 있느냐 하는 시험도 당했었다. 그는 318명의 적은 무리를 가지고 시날 왕의 연합군을 물리쳤다(창14:1~16).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오는 믿음의 힘이었던 줄 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가 되어 주셨던 것이다(15:1).
(4) 세상의 부귀와 영화의 시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겼다. 즉 소돔 왕이 제공하는 큰 재산을 그는 거절했었다(창14:21~23). 그 때 하나님께서도 그를 얼마나 기뻐하셨던가. 친히 여호와께서 그의 상급이라 하셨다(창15:1).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별과 같이 그의 후손이 창성할 것을 약속했었다. 참으로 그는 그 모든 시험에 잘 이겼던 것이다. 물론 먼 후일의 일이지만 그는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는 그 어려운 시험에도 이겼던 것이다.
* 이제 그가 넘어졌던 시험은 어떤 것이었던가. 먼저 일상생활에 있어서 계속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시험에 졌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을 때 그는 약속의 땅을 계속 지켰어야 했지만 그는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었다(창12:10). 그는 아무리 궁핍하여도 모든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겼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사실 우리가 일상생활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브라함에게는 물론 순종도 있었고, 믿음의 용기도 있었다. 겸손한 양보도 있었고 물질의 욕심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굶주림을 이기며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모든 염려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을 바라보며 살아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드디어 그 시험에 못 견디어 애굽으로 내려갔었다. 애굽에서 그는 큰 위경에 이른 때가 있었으나(창12:14~15). 하나님의 특별한 권고로 그는 거기에서 무사히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창12:17~20).
다음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시험이다. “하나님께서 네 씨(자손)로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면 그는 그것을 믿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견디고 참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이상을 더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거룩한 그 약속을 인간의 추악한 방법으로 이루려 했다. 마침내 하갈을 첩으로 얻어 아들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혀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되 그 약속을 하나님의 방법대로가 아니라 인간의 악한 수단으로 이루려 하였다는 거기에 그들의 실패가 있었다고 본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은 하나님의 거룩한 방법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적인 방법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수는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참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한데 그의 실패가 있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자주 느끼는 것은 약속을 바라보며 오래 참고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야곱의 경우에서도 그것을 본다. 창25:23에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약속을 받고 태어난 아들이 곧 야곱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때를 허락하시기까지 그는 믿음으로 오래 참고 견디었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는 참지 못했다. 인간의 속임수로 장자의 기업을 빼앗음으로 그 언약을 이루려 했다. 그는 그의 잘못된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히10:36에도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심을 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래 참아야 한다. 그는 10년 만에 지치고 말았다. 그가 하갈을 얻은 결과로 비참했다. 가정의 불화(하갈의 멸시와 사라의 학대)는 지금까지도 원수가 되었다.
아브라함이 말려들어간 옛 습관이란 어떤 것인가? 아브라함 시대의 것으로 소위 함무라비 경전이란 것이 일찍이 발굴 되었는데 거기에 보면 바벨론에 있어서는 아내 된 자가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경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자녀를 얻어 자기의 자녀로 삼을 수 있다는 법이 허락 되어 있다. 함무라비의 경전 밖에도 그러한 법률의 흔적이 다른 고고학적 자료에도 나타나 있다. 그것은 모두 아브라함 시대의 그의 고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된 자료들이다.
사라와 아브라함이 하갈을 그의 첩으로 얻게 한 것은 그러한 시대의 풍속에서 벋어나지 못한 세속적 불신행동이었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이제 엄숙히 사도 바울의 다음 성구를 다시 한 번 묵상하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4. 아브라함의 시련(창17장과 16:16)
위의 본문들은 창16장의 끝 절과 17장의 첫 절이다. 16장은 아브라함이 하갈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게 된 기록이다. 그 때의 아브라함의 연령은 86세였다고 그 끝 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뒤이어 곧 따라 나오는 창세기 17장 첫 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99세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란 곧 그 아내 사라가 이삭을 잉태하는 해이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본 후 다시금 이삭을 낳기 까지 13년 동안의 아브라함의 역사는 알 길이 없다. 진실로 침묵의 13년이다.
이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교통을 끊었던 때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거두셨던 기간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빌고 그것은 분명치 않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은 그 13년간의 긴 세월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이다. 이런 침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흔히 히브리 사람들은 13의 수를 고난과 시련의 수라고 생각했다. 에스더 3:12, 13을 보면 하만이 유다 민족을 전멸하기로 결정하고 왕이 조서를 내린 날이 정월 13일이었고 그것을 집행하기로 결정한 날도 십이월 곧 아달월 13일 이었다(그 밖에도 창14:4 ; 창47:9 등도 참고).
히브리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을 생각하고 13의 수를 고난의 수 또는 시련과 반역의 수로 생각하는 풍속이 생긴 줄 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하나님의 친구라고까지 불리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긴 13년의 긴 세월이야 말로 그 얼마나 괴로운 시간들이었으랴! 그 기간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큰 시련의 기간이요, 깊은 반성의 기간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13년의 시련 중에도 오히려 아브라함의 믿음을 크게 자랐음을 본다.
롬4;19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했음을 본다. 그가 85세가 되던 해에 사라의 태를 믿지 못해서 하갈을 얻어야 했건만 오히려 백세가 다 되어 그 믿음이 견고해졌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환난과 징계가 때로는 성도들에게 유익 하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때에 오히려 믿음이 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끊긴 괴로운 13년, 그러한 때에 오히려 그는 참고 기다리며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그와 13년이나 교통을 끊었을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3의 수가 무슨 고난의 수가 되어서 그 수를 채우기 위하여 그런 것은 아닌 줄 안다. 그러면 무엇일까? 그 대답으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는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는 것을 기다림이요, 둘째는 이스마엘이 13세가 되기를 또한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창17:24, 25에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99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양피를 벤 때는 13세이었더라”고 하심을 보아서 그렇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의 어린 아들 이스마엘이 13세 되기를 기다리셨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옛날부터 이스라엘의 풍속에 남아가 나서 13세가 되면 성년의 예식을 행하는 법이 있었다. 그것을(바르 미즈바)라고 부른다. 그것은 남자로서 13세가 되면 비록 부모를 떠나 어디를 가나 살 수 있다는 뜻으로 그런 예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이제 13세가 되었다. 위에서 말한 소위 침묵의 13년이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13세까지 키우는 시간이었다. 이스마엘은 비록 언약 밖에 있는 죄악 된 혈육의 씨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년의 해가 되기까지는 이스마엘로 하여금 고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자라게 했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 아들을 내어 쫒으로”(창21:12)고 명령하심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물론 그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도 심히 근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창21:12에도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스마엘)을 위하여 그 일이(내어 쫒는 일)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라고 하였음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내어 보내는 이스마엘에게 얼마나 크신 은총을 베푸셨던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창17:20에 “.......내가 그에게(이스마엘)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하리라 하셨다. 물론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물론 그 약속은 그의 당대에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본다(창25:12~18). 또 쫓겨 난 하갈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긍휼을 베푸셨던가. 그가 처음 쫓겨났을 때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방성대곡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셨고(창21:18), 그의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셨다(창21:19).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참으로 크고 놀랍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창21:19에도 보면 “하나님이 그 아이와(이스마엘) 함께 계시며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라고 하신 말씀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하셨다고 하여 결코 그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물론 하갈을 같이 내어 쫓는 것도 이스마엘을 키우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그 어느 사람에게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가혹하게 학대하신 일은 없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배반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하는 것뿐이다. 언약 밖의 아들인 이스마엘까지도 13세가 되기까지 고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자라게 했고 그가 광야로 쫓겨난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하시며 그에게 창성하는 한량없는 복을 주셨던 것이 아닌가. 또 다음 둘째로 소위 침묵의 13년은 아브라함이 99세 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로마서 4:19~21에 “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라고 했음을 본다.
99세는 100세를 바라보는 해이다. 연령이 100세이면 위의 성경 말씀과 같이 죽은 것 같이 되었음을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 때까지를 기다리게 했다. 아브라함과 사라로 하여금 인간의 무능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이 확실해지기까지를 기다려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죄 없는 아이를 놓고 불쌍히 생각하는 마음과 스스로 회개하는 마음은 마침내 하나님에 언약에 대한 깊은 신앙으로 점점 자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13년은 오히려 새로운 언약에 대한 신앙을 키우는 복스러운 기간이라고 생각해도 지나친 상상은 아닐 것이다.
5. 아브라함과 사라(창18~21장 ; 창21:1~5 ; 히11:11, 12)
두 사람은 아이를 얻는 일에는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창18:12, 13은 자기와 남편의 몸만 보고서 비웃었고, 꾸짖으시며 15절에서 확인시키며 불신앙을 드러내신다. 사라의 마음속에는 신앙과 불신앙이 함께 있었다. 이를 히브리 기자가 신앙만 드러내고 있으며, 아브라함도 실수와 허물이 많아도 믿음을 부각시켰다.
만약에 주께서 너희들은 큰 믿음을 보인 조상이라고 평가 하신다면 “아니요 하갈과, 누이라고 속인 것도 용서하세요.”라고 해야 정답인데 주께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시고 태산 같은 허물은 덮으시고 평가하심은 장차 우리의 심판 때에도 주실 은혜이다. 사라의 겨자씨 같은 믿음을 통하여 산자의 어미가 되었고, 죽은 태에서 이삭이 태어났다. 이는 신앙의 기쁨이요, 감격적인 웃음의 뜻을 따라서 아들을 이삭이라고 했다.
그리고 창21:7에 보면 “또 가로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의 뜻은 그 지방의 풍속에 자녀를 생산치 못한 여인이 아이를 낳게 되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이웃 동네 아이들에게 돌아가면서 한 번씩 젖을 빨게 함으로 증명해 보이며 박수를 받는 의식이 있다. 창21:6에서도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삭은 진실로 사라의 웃음의 아들이었다. 잉태할 때에 웃었고, 출생 후에 웃었고 모든 여인들이 같이 모여서 웃었다.
눅17:6에 보면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하셨다. 우리들의 적은 믿음을 귀하게 보시는 주님께 바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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