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밧모 섬의 비밀
(제 2 권)
강의 이현채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연구원
요한 계시록 밧모 섬의 비밀
(제 2 권)
차 례
제 7 장 네 천사 ....................................................................... 2
제 8 장 금향로와 일곱 나팔 .......................................................... 10
제 9 장 황충의 난 ....................................................................... 14
제 10장 힘센 천사 ........................................................................... 19
제 11장 갈대 척량의 비요 ............................................................ 22
제 12장 여자와 용 ...................................................................... 25
제 13장 두 짐승 ......................................................................... 27
제 14장 어린 양과 144000 ........................................................... 31
제 15장 성도의 노래 ................................................................. 38
제 16장 일곱 대접과 일곱 재앙 .................................................... 39
제 17장 많은 물에 앉은 큰 음녀의 심판 ......................................... 45
제 18장 큰 장사꾼 바벨론 ............................................................ 50
제 19장 음녀의 심판 ..................................................................... 52
제 20장 천년 왕국 ........................................................................ 56
제 21장 새 하늘과 새 땅 ............................................................... 79
요한 계시록
(밧모 섬의 비밀 제 2권)
계시록 제 7장 네 천사(계 7:1)
본장의 네 천사는 6장에 나오는 네 생물의 활동을 7장에서는 네 천사의 활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네 천사와 네 생물은 같은 존재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인을 치기까지 땅이나 각종 나무에 붙어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잠정적인 조치이고 인을 마치면 6장에서와 같이 각종 환란이 닥치게 되는 것이다.
땅과 바다와 각종 나무에 붙지 못하게 하심(1).
환란을 받은 대상을 인격체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인을 치기까지 땅, 바다, 나무를 헤치지 말라고 하셨을까? 기가 막힌 대 환란에 무생물인 자연이 그렇게 중요해서 인 맞지 못한 사람을 뒤로하고 관심을 갖을까? 본서는 거의 상징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관심 있는 생명이다. 미가서 6장 2절에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렘 22:29).’ 미가서 6장 2절에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쟁변을 들으라......’했고, 시편 98편 3절에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계시록 12장 12절에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 진저......’(시 96:13), 계시록 12장 16절에 ‘딸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라고 하심은 무생물이 아닌 인격체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바다
하박국 3장 10절에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시편 24편 2절은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의 말씀은 만세 반석 위에 세운 교회를 바다라고 한다. 에스겔 28장 2절에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척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의 말씀을 보면 바다의 중심은 하나님의 자리이다. 그렇다면 용과 사단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 시편 74편 13절에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했고 이사야 27장 1절에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그 외에 성구(합 3:15; 계 1:9)등이 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양의 탈을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무(슥 11:2; 마 3:10, 7:17-19; 눅 3:9, 6:43-44).
이스라엘로 비유된 나무: ‘대서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사 5:7; 렘 11:15-16)’
심판 때 성도로 비유된 나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더라(눅 23:31)’
메시야로 상징된 나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또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취하여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놓고 빼어난 산에 심되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을 이룰 것이요 각 약 새가 그 아래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거 할지라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겔 17:22-24)’ 이 말씀은 이사야 11장 1절의 ‘이새의 줄기와 뿌리에서 한 싹과 가지가 나서 결실하여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강림하는’ 재림 메시야를 상징한 나무이다.
만국을 소성시킬 나무: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말씀하셨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생명나무의 잎이 만국을 소성케 한다는 말은 큰 병을 앓고 있다가 정신이 돌아와서 회복된 것을 말한다. 에스겔 47장 12절에서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표현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사람들이 병들어서 약을 사용한다면 천국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계 7:2-3).
알곡과 쭉정이를 심판하기 전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역 사를 말한다. 이들은 극심한 환란에도 해를 받지 않는 성도들이다. 이들은 재림 메시야와 함께 시온에 서게 되는 144.000명이다(계 14:1).
요한복음 6장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자니라’로 확정지어 설명해 주셨다. 사명 자를 상징으로 십사만 사천이다. 양식은 인자되신 예수님께서 주시고 다른 분이나 인간은 양식이 될 수 없다. 양식이라도 자기 몸을 줄 수 있겠는가?
인 맞은 자(계 7:4).
야곱의 아들 수대로 12지파인데 단 지파(창 49:16-18)가 빠지고 그 자리에 므낫세가 들어온 이유는 야곱의 예언 속에 빠진 이유가 있다. 장자는 르우벤(창 29:32, 35:23)인데 유다가 먼저 소개된다. 야곱의 예언은 일차적으로 후손의 예언임과 동시에 훗날에 영적 이스라엘의 후손에 관한 예언이다(계 2:9, 3:9; 롬 2:29). 이중적인 예언 속에 단에게 한 그 예언은 초대교회와 오늘날 말세 교회에게 예언이다(일곱 교회, 금촛대).
같은 맥락으로 가룟 유다가 있다. 처음부터 마귀라이다(요 6:70).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한 밭에서 자란다고 했다.
십사만 사천(4)
이 숫자는 12지파에 12.000명씩 인 맞은 수를 곱한 수가 144.000이다. 즉 12지파 곱하기 12.000은 144.000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의 기본수는 12이다. 성경에는 12라는 수가 많다. 12제자, 새 예루살렘성의 12진주문과 12지파 등은 언제나 완성과 완전을 뜻한다(12라는 기본 숫자는 3과 4를 곱할 때 12라는 지상의 완전 숫자가 나온다. 3과 4를 합할 때도 완전 숫자가 나온다). 여기 12를 12로 곱하면 144이다. 이후 영적인 공식 하루가 천년을 적용하면 144.000이 된다(벧후 3:8). 영적인 공식은 일이 천이 될 수 있고, 천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숫자가 상징적인 숫자이다.
상징적인 숫자가 말하는 뜻은 예루살렘 성의 성취 수이다.
계시록 21장 10절로 27절에는 새 예루살렘 성을 설명하고 있다. 빠르게 보면 천국의 규모를 설명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다. 장과 광과 고가 같은데 스다디온(1 스다디온은 약 180m)으로 척량하면 12.000 스다디온으로 약 160 km인데 규빗(1 규빗은 약 45cm)으로 척량하면 144규빗이니까 이상한 일이다. 같은 성을 무엇으로 계산하느냐로 크기가 다르다.
스다디온으로는 4백리가 되고 규빗으로는 100m도 못되는 이런 성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성의 모습이 온갖 보석으로 쌓았고 정금이며 각종 보석으로 꾸몄다고 했지만 상상을 하면 감옥이나 다름이 없다. 문자대로의 성이 아닌 것이 분명해진다. 일곱 대접을 가졌던 천사중 하나가 사도 요한에게 신부 인 어린 양을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 준다니까 눈을 뚝 뜨고 보니 위에서 성이 내려온 것이다. 사람인줄 알았을 것이다. 즉 어린 양이신 아내를 아름다운 성으로 표현한 것이다(계 21:9-11).
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어린 양의 아내가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신부의 자격이 완벽함을 표현한 것이다. 장, 광, 고, 규빗, 스다디온, 온갖 보석과 숫자는 합당한 신부 감을 말한다. 12와 12를 곱하면 144인데 하늘의 영적 공식인 1.000을 곱한 수가 144.000이다. 그렇게 보면 이들은 인을 맞은 자들인데 영생의 양식을 나눠주는 자들인 것이다(요 6:27). 그러므로 말세에는 인 맞은 자(예수님을 믿어 영생의 양식을 먹은 자)들이 또 영생의 양식을 준다(계 22:17).
영의 양식인 생수를 나눠주는 사역을 이사야 선지자가 55장 1절에서 예언했고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요 4:13-14) 시작하셨고, 명절 끝 날에 생수( 곧 성령님)를 주실 것을 전하셨던 것이다(요 7:37-38). 말세에 종들에게 또 다른 인을 치신다(계 7:3)
해 돋는 데로부터
요한 계시록 7장 2절에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땅이나 바다나 나무를 헤하지 말라고 한다. 문제는 하나님의 ‘인’은 어떤 이름일까? 천사가 왜 동쪽에서 가지고 왔을까? 이 예언의 모체가 되는 다니엘서에 느부갓네살의 꿈에 본 신상의 계시의 내용은 그 당시로부터 말세에 이르는 모든 역사와 종교의 모습을 상징한다. 열 발가락 시대는 우상화된 종교들을 심판함을 뜻하는데 쳐부수는 심판의 돌이 산에서 뜨인 돌이 우상을 친다(단 2:45). 계시록에서는 인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동쪽에서, 다니엘에서는 산에서이고 이사야는 ‘판단하며 판결하시는 이’가 여호와의 전이 서 있는 산이 한다는 사상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나온 사상인 것이다. 에스겔은 43장 4절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간’ 다는 것이고 하박국 3장 2절로 15절과 이사야 63장 1절로 6절은 심판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위치에서 볼 때 해 돋는 방향인 ‘데만’에서 오시고, 이사야 30장 25절로 33절은 원방에서 오시는 모습인데 모두 맥이 같은 사상이다.
이사야 30장 27절에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 그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 혀는 맹렬한 불같으며’의 말씀 중 여호와가 오시지 않고 이름이 오신다. 오늘 천국 가는 길도 예수님의 이름만 오셔서 구원에 이른다. 요한복음 5장 43절에도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하셨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왔다 갔다 하시지 않으시고 우 주에 거대성으로 계신다. 그리고 심판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온다.
동방 독수리(46:10-11)
10절에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른다.’는 것은 이 세상 끝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먼저 보이심을 말한다. 그 내용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불러온다. ‘동방’의 원문은 계시록과 같이 ‘해 돋는 곳’이다. 즉 먼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자를 부르신다. 동방은 먼 곳이요 독수리는 하나님의 사역자이다. 현대 신학자들은 동방 사람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와 관계된 해석을 하지만 바른 해석이 아니다.
구원 받는 흰 무리(계 7:9-17)
흰 무리는 9절 서두에 ‘이 일 후에’ ‘인’치는 사건 후에 나오는 무리들이다. 인을 맞고 나오니 흰 무리가 아니라 인 맞은 자와 상관이 없는 흰무리이다. 12지파에서 나옴이 아닌 민족이다. 14절은 큰 환란에서 나온 자이다. 배경은 스가랴 12장 9-14절과 13장 1절이다. 스가랴 12장 10절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했다. 이 말세 현상들은 스가랴 12장에서부터 13장과 14장으로 연결된다. 각 장들을 살펴보면 12장은 9절에 예루살렘을 치는 것인데 말세지말의 사건이다.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이 멸망될 사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음’이 아니다. 침입자들이 패배를 당하는 상황이다. 이 때의 침공이란 진리의 싸움으로 회개운동이 크게 벌어지는 이유를 스가랴가 12장 10절에서 ‘그 들이 그 찌른 바 그 를 바라보고’ 애통하는 회개의 때이다. 재림 메시야 때에 진리가 확실하게 들어나면 세속적인 기복사상으로 변질된 교회에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날 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터지고 새롭게 되어 큰 무리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요엘 2장에서도 영적 이스라엘이 참 이스라엘이다(롬 9:29). 문자대로라면 우리와 예수님 그리고 구원과 상관이 없다.
계시록 제 8장 금향로와 일곱 나팔(1-5).
1절에 일곱째 인을 떼니 30분 동안 조용하더니 일곱 나팔 가진 천사들이 나왔다. ‘인’의 해석이 나팔로 진행된 것이다. 7개의 나팔은 ‘인’과 같은 내용을 풀어간다. 즉 말세 사건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30분동안 고요한 시간은 세상의 시간이 아닌 하늘의 시간을 말한다. 열 처녀의 비유에 보면 ‘졸며 잘 새’의 시간일 것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자들을 통하여 천국이 가까웠다는 나팔을 불어서 설교하게 한 것이다.
제단과 금단
여기에서 ‘단’을 옛날 성전에 있던 성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세가 하늘의 것을 보고 그림자 같은 모형을 만들었다면 이 단은 실재의 단이다(히 8:5; 출 25:8). 계시록 21장 22절에 ‘...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하셨다. 제단이 인격체인 것이다. 때문에 사명 따라 상징으로 표현하므로 제단이 사람같이 말을 하며 행세하는 제단이다(계 16:7, 13:14). 계시록 8장 3절에 ‘또 다른 천사가 왓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이다. 인격이신 분이 받으신다는 결론이다. 인격이 없으면 ‘놓더라’이지만 인격이 있으므로 ‘드리고자’로 표현 했다. 성도의 기도를 받지 않으면 이런 표현이 없을 것이다.
첫 번째 나팔(6)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나팔’을 불어 안식일을 정해주었다(레 23:3, 24). 그리고 칠일 단위와 별개로 매년 7월 1일을 ‘나팔’을 불게하고 성회로 모여 나팔 절을 지켜 죄를 사 했다(민 29:1, 25:9). 요엘 2장 1절에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기록을 보면 나팔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연관된 나팔이며 안식일의 실체가 되는 날이다.
나팔 재앙(7)
여기 나팔로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짐의 재앙 은 요엘 2장 29절로 32절 예언이 성취됨이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 29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린’다는 말씀의 배경이 요엘 2장 31절 말씀이다. 요엘 2장 30절에 ‘피와 불과 연기’의 이적이 계시록에 천사의 나팔소리에 피 섞인 우박이 내려서 땅의 3분의 1이 타서 죽고 수목과 풀도 죽는다고 했다. 그러면 사람은 멀쩡하였다는 말씀인가? 땅, 나무, 수풀은 모두 사람을 가리킨다.
우박 재앙
이는 이사야 28장 17절 예언의 성취인데 계시록 16장 17절 이하에서도 일곱째 대접을 쏟을 때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사람들에게 쏟아진다고 했다. 한 달란트는 약 60kg에 해당한 무게이다. 우박 사건으로 출애굽 할 때 7번째의 재앙으로 내렸던 것이다(출 9:23-26). 그 후 심판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수 10:11; 시 78:47; 사 28:2, 30:30; 겔 13:11, 38:22; 학 2:17). 이렇게 선민을 괴롭힌 애굽인과 심판의 수단으로 하여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한다(사 28:17)고 하신다.
거짓의 피난처
노아에게 홍수 때를 준비하여 산에 방주를 만들게 하여 피난처가 되게 하셨듯이 말세에도 피난처가 있는데 거짓 피난 처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교회가 피난처인데 세속주의로 변질된 교회는 거짓의 피난처이다. 이러한 교회를 하나님께서 우박으로 소탕하시겠다는 것이다.
불붙는 산
예언서에 산들은 상징이거나 암호이다. 계시록도 암호로 되어 있다. 본문도 산이 아닌 같은 것 즉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란 사실적인 산이 아니다. 우리가 주변을 살펴보자 산과 같은 것이 어디 있는가? 예레미야도 51장 33절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마당과 같은지라...’의 시대는 우상 종교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성전을 헐고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 술을 마시던 때인데 ‘딸 바벨론’이란 이해하기 어렵다. 암호이기 때문이다. 51장 36절에도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수하여 그 바다를 말리며 그 샘을 말리신’다는 말씀은 성도들의 앙갚음을 위하여 하시는 말씀인데 바다와 샘물에게 하신다. 계시록 21장 1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인데 예레미야의 바다는 앞에 정관사가 있는 그 바다이며 51장 42절에 ‘바다가 바벨론에 넘’친다고 했는데 바다와 수 천리 떨어진 육지 깊숙이 도시를 어떻게 넘친다는 것일까? 암호이다. 51장 53절에 ‘암호의 딸 바벨론에 때가 이른 타작마당과 같다는 말씀과 같은 뜻의 말씀이다’ 즉 곡식과 가라지를 나누는 심판의 타작마당이 된 바벨론을 말한다. 계시록 8장 8절로 9절에 불 붙는 산 같은 것도 예언서에 나오는 그 특성을 가진 산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야 51장 25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는 하나님께서 산이 온 세계를 멸함을 말한다. 그리고 말도 못하는 산과 하나님의 관계가 대적의 관계라고 해석하면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여기 산은 사단과 그 무리들의 암호로서 적그리스도의 교회에 목회자이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변질된 목회자를 불 탄 산이라 하신다.
셋째 나팔과 쑥별(10-11)
쑥별이 강들과 여러 물 샘에 떨어져 많은 사람이 죽는 재앙인데 이는 예레미야 23장 5절로 15절의 성취이다. 배경은 재림 메시야가 오시는 때이다. 이사야 11장에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와서 결실할 그 메시야 사건과 짝이 된다. 즉 재림 메시야를 왕 중의 왕이 세상을 다스리기 전에 독한 쑥물을 먹여 심판을 하심을 하셨다.
큰 별(10)
이는 계시록 1장 20절에 밝힌 계시의 핵심적인 원리이다. 그 원리에 따라 별은 주의 사자인 목회자인데 비밀이 붙어 있는 자이다. 육안으로 구별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이사야 14장 12절에 사단을 ‘계명성’이라고 했고, 다른 말로는 셋별, 금성이라고 하는 별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도 계시록 22장 16절에서 ‘나 예수는 ...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하셨다. 새벽 별을 다른 말로는 샛별인데 귀한 자리에 있던 그룹(겔 28:14)이 욕심 때문에 사단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계시록 8장 10절에 하늘의 큰 별이란 하늘에서 신령한 빛을 밝히던 쟁쟁한 별이 변질됨이고 이 세상에서는 기복 사상으로 변질된 목회자가 떨어졌다는 말이다. 굉장한 목회자가 나타나 말씀을 상징하는 강물과 물 샘에 나타나니 강물과 물 샘은 기복신앙이라는 쓴 물이 나타났다는 말씀이다(예레미야 23:5, 6).
넷째 나팔(12)
해 삼분의 일, 달 삼분의 일, 별들의 삼분의 일, 그리고 7절에서 땅의 삼분의 일, 수목의 삼분의 일, 8절은 바다의 삼분의 일, 9절에 배들의 삼분의 일, 10절에서 들의 삼분의 일이라 하셨고, 어디에 비유를 하든지 삼분의 일이다. 즉 똑 같은 하나의 사건을 여러 가지로 표현한 것인데 교회의 삼분의 일이 변질됨을 말한다.
계시록 제 9 장 황충의 난(1-12)
예수님으로부터 열쇠를 받은 베드로를 연상케 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이는 다섯 번째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열어 볼 때 황충이 나온 것을 보여 준다. 크기가 약 5cm이며 날개는 10cm로서 귀뚜라미 과에 속 하고 떼를 지어 움직인다. 출애굽 할 때 내린 황충은 푸른 풀이나 채소와 곡식을 먹었지만 계시록의 황충은 이마에 인을 맞지 않은 사람의 영혼을 해한다(4). 이러한 황충이 지나가면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를 황무지로 만든다는 교훈이다. 무저갱을 열어 자기 일꾼들을 풀어서 악행을 하는데, 하나님께 위임 받은 한계는 넘지 못한다(계 17:17). 계시록 6장에 하나님 편의 사자인 4필의 말을 설명하듯 황충들이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것 같은 현상이다(계 9:7).
하나님 편의 말들도 문자적이 아닌 상징으로 세상을 심판하는 사명 자이었듯이 황충도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과 같고, 금 면류관 비슷한 것을 쓴 것은 계시록 6장 2절에 흰 말을 탄분이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이기려고 하는 하나님 편의 사역자와 대조를 이룬 사단편의 사역자라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위장을 위해 면류관을 쓰고 있으나 메시야가 아니다라는 암시이다. 무엇이다가 아니라 무엇과 같다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또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또 철 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갈과 같은 꼬리의 쏘는 살이 있어’의 표현들은 다음과 같은 암시가 있다. 1. 진리의 싸움에 사단이 예비한 종, 진짜 면류관으로 속이려는 금 같은 면류관은 가짜 왕이라는 것, 3. 얼굴이 사람의 얼굴 같다는 말은 사람이 아 니라 짐승이란 뜻(단 7:4), 4. 여자의 머리털을 가졌다는 말은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가 아닌 변질된 교회와 목회자, 5. 그 이(치아)가 사자의 이 같음은 그 짐승을 황충으로 묘사한 것(단 7:7, 19; 계 13:), 6. 철 흉갑의 황충은 계시록 9장 16절의 마병 대와 황충은 같은 존재인데 이름만 다른 것이며 황충이 수백만의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은 마병대가 이만만을 연상케 한다. 욥기 41장 1절로 2절에 사단의 군대로 묘사한 악어가 보통 창으로 뚫을 수 없는 악어의 무장을 비유했다. 낚시와 노끈으로 이길 수 없듯이 사단의 세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제압이 된다. 7. 황충들의 날개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가는 소리와 같음은 하나님 편의 네 생물의 그룹이 움직일 때의 소리와 대조를 이룬다(겔 1:24). 8.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은 황충의 환상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이만만의 군대들의 말들의 꼬리에서 나오는 힘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계 9:19).
계시록 9장 11절에 황충을 밝힌다. 히브리 음으로 ‘아바돈’은 멸망이란 개념이나 음부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며 ‘아볼루온’은 멸망을 의인화 즉 비 인격체를 인격화한 것으로 관념화된 파괴자 사단을 말한다. 이들이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하는 권세를 가졌다. 다섯 달의 개념은 얼마간의 기간을 말한다.
여섯째 나팔(13-15)
위에 13절에 명령을 하는 금단은 계시록 16장 7절에 말을 하는 제단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영체들로서 8장 3절
에서는 일곱째 인을 뗄 때 천사가 성도들의 기도의 향을 받아서 드린 그 금단 네 뿔이다. 금단은 제단보다는 한층 더 가까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영체들을 말한다. 이러한 영체들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들인 것이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
여섯째 나팔 소리와 함께 유브라데에 결박된 천사들의 결박이 풀리는 것은 16장 12절에 ‘여섯째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엣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와 병행 구절이다. 요한이 반모 섬에서 하늘의 계시를 받던 세계는 이스라엘에서 볼 때 서쪽으로 유럽을 끝으로 하고 동으로는 인도 일부가 그 때로서는 전 세계로 알고 있던 때로서 큰 강은 이집트의 나일 강과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스 강이 제일 큰 강이었다. 즉 세계의 제일 큰 강에 네 천사가 결박되었다는 말은 사명자인 네 생물인 천사들이 물로 표현한 하나님의 말씀(요 4:13-15)의 세계에 묶여 있다가 하늘의 허락으로 결박에서 풀려 활동한다는 말씀이다. 16장 12절에서는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고 했다. 계시록의 왕은 일곱별을 지칭한 종들이다(벧전 2:9). 하나님 편의 종들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 여섯째 나팔이나 여섯째 대접이라고 하는 것을 쏟을 때 강이 말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이 강물이 어떻게 거세든지 네 천사도 때가 오기까지는 그 강가에 묶여 있던 형편이었다. 이 천사들이 일시 에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인다. 죽는 자들은 변질된 종교 안에서 삼분지 일로 예비한 자들이다.
꼬리에 달린 말(계 9:16-19)
계시록 9장 17절에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 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의 말씀에 머리가 사자, 꼬리는 뱀, 입은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는 말이다. 여기 사자의 머리는 다니엘 7장 4절에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의 말씀 중에도 사자와 같다고 하는 짐승이다. 본서 19절에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 하더라’의 구절이 10절에 황충의 꼬리를 말하면서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을 해하는 권세가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황충의 꼬리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황충을 말하면서 이만만의 말들을 말할 때에 그들이 꼬리에 해하는 기구를 가졌는데 암시는 정정당당하게 정면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이 사단인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 것을 하나님 같이 된다고 꾀인 뱀같이 간교한 교훈으로 그 정체를 숨기고 있다. 그 사실이 잘 보이지 않음을 꼬리로 표현하고 잘 보이지 않아 망설일 때 해친다는 계시이다.
계시록 20절로 21절에서도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 하더라’는 마지막 환란에도 사람들이 회개치 않는 것은 출애굽 때 애굽의 왕과 그의 신하들이 하나님께서 내리는 재앙을 보고도 끝까지 굴복치 않는 것과 같이 말세에도 똑 같이 그 환란의 끝이 와야 사단과 그의 사자인 적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손을 들게 된다는 말씀이다.
계시록 제 10 장 힘센 천사
힘센 천사는 구름을 입고,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와 같이 밝고, 그 발은 불기둥 같았음 보여준다. 그리고 이동할 때는 구름을 타고 움직인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재림 메시아는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하셨는데 본서에는 힘센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 광경이 하늘에는 무지개가 있었다. 계시록 4장 3절에 보좌에 앉으신 이의 모습에 무지개가 둘려 있는 것과도 같고 라고 했고 에스겔 1장 22절로 28절에서 주 하나님 앞에 모셔 섰는 네 생물이라고도 하고 그룹이라고도 하는 엄청난 천사의 모습을 말하면서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장엄한 영광의 형상을 갖춘 힘있는 천사가 본장에 나타난 천사이다.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계시록 1장 16절에 재림 메시야 되신 인자 같은 이가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과 같은데 여기에 힘 있는 천사도 그 얼굴은 해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1장 15절에는 그 재림 메시야의 발이 마치 풀무에 단련된 빛난 주석과 같다고 했다.
이러한 유사성의 대조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본문의 힘 있는 천사를 재림 메시야로 해석하였다. 우리도 계시록 일장에서 천사의 문제를 살펴보았듯이 천사는 모두 하나 같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 주 하나님의 사자로서 일을 하시는 천사 중에 야곱에게 본인을 소개하는 천사가 있다. 창세기 31장 11절로 13절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천사 중에는 그 하는 사역 상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대행을 하는 천사도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요한계시록의 인자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사용하시는 칭호인 인자가 아니라 ‘인자’와 같은 인자인 것이다. 또 어린 양 역시 복음서의 어린 양은 성경 원어에 작은 양의 표시로 ‘암노스’인데 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이 ‘아르니온’으로 어린 양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어린 양으로 기록되어 복음서의 어린 양과 계시록의 어린 양을 선명하도록 구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즉 본문에 힘 있는 천사가 재림 메시야 적인 인자 같기 때문에 인자가 아니라는 확신에 도달한다. 또한 지극히 작은 어린 양인 아르니온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작은 책(계 10:2-3)
성경 원어에는 일곱 우뢰라 했는데 단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서 ‘하이 헵타 브론타이’이니 그 일곱 우뢰들이다. 그런데 그 일곱 우뢰들이 각각 제소리들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뢰들이 각각 특색이 있어서 소리를 내되 자기 소리를 내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일곱 우뢰를 일곱 음성으로 부르고, 관습에는 주의 음성으로 간주한다. 계시록 5장에도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있던 것으로 안팎에 글이 써있고 일곱의 인으로 봉합되었던 책이 있는데 어린 양이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손에서 그 책을 취하여 6장에서 그 책의 인을 떼시므로 그 책은 비로써 펴 놓인 책이 되었다. 또 일곱의 인으로 봉합된 극비 사항이 여기 힘센 천사의 손에 펴 있을 때 이 말씀이 공개되는 순간이므로 하늘과 땅을 진동하는 우뢰 소리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계시록 10장 8절로 11절의 내용은 에스겔 2장 8절부터 3장 4절의 내용과 짝이 되는 병행구절이다. 요한 계시록의 대부분이 에스겔서를 모체로 하고 계시된 것이기 때문에 본문의 내용 역시 같은 사건을 사도 요한에게 계시한 것이다.
문제는 사도 요한이 말세 사면자의 모형으로 작은 책을 가져다가 먹고 배에 채우며 그 말씀을 다시 예언하여야 할 사 명을 부여받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수천 년 오래 저장했던 진한 포도주의 말씀을 먹을 때에는 입에 달기가 꿀과 같았고 사역을 감당하려 함에는 쓴 약 이었던 것이다. 그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오는 환란이나 핍박이 올 때에 그 말씀은 배에서 쓰게 되며 고통이 따르게 된 것이다(마 13:21).
일곱째 천사의 소리 내는 날
여기서 일곱째 천사가 내는 소리를 그 나팔 소리와 같은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 천사들의 나팔 소리는 단순한 악기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선포하는 말씀을 계시록에서는 나팔 소리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끝이 오는 것은 이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 즉 말세 복음의 소리가 다 끝이 나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룬다는 말씀을 계시록에서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고 했다(계 11:15).
계시록 제 11장 갈대 척량의 비유
본문 1절과 2절에 갈대로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하였다. 계시록 21장 15절로 17절에서는 금 갈대로 새 예루살렘 성을 척량하는데 본문에서 성전 마당은 이방인에게 내어준 것임을 확인시키며 척량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성전 밖이 아니라 성전 안에 있는 자녀들이 얼마나 성숙했는가에 관심이 있다. 알곡으로 익었다면 추수를 명령하는 의미인데 전능하신 분이 알고 계시지만 우리로 깨어 있으라는 명령일 것이다. 에스겔도 40장에서 미래의 성전을 장대로 척량했고, 스가랴도 2장 11절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지는 배경의 보여줄 때 한 사람이 척량 줄을 잡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본다. 아모스도 세 가지 환상에서 황충, 불, 다림줄이라는 척량 줄을 백성 가운데 베풀고 심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척량은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이요 선민들에게는 알곡 상태로 재림을 고대하기를 바람이다.
그리고 3절로 12절은 하나님 편의 사역자가 인격체를 가진 사람 둘이 나온다. 지금까지는 천사와 생물과 말과 황충 등이 등장했다. 10장까지는 영계의 일로서 설명한 것이었지만 11장은 인격체를 가진 두 증인이라고 하는 두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의 사명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교회 안의 계시이다. 이에 사단의 편에서도 사역자가 나오는데 뒤에 보면 17장과 18장 여자로 나오는 음녀와 짐승이 사단의 사역자로 등장한다. 본문의 두 증인들은 삼 년 반 동안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외친 분들이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이는 스가랴 4장의 온 세상의 주 즉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섬기던 자들이 삼 년 반 동안 회개 운동을 전개한 배경이다. 실상은 기름 부은 두 사람이다. 이러한 마지막 사명 자들은 우리의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 신으로 된다고 스가랴 4장 6절에 말씀을 하심은 아무라도 마지막 사명자라고 자처하는 망령된 자가 없기를 바라신 것이다.
두 증인
특정한 인물로 3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할 때 방해자가 없고 있다면 입에서 불이 나와 소멸한다고 5절에 밝히신다. 이들은 하늘을 닫아 비가 없게 하고, 물이 피로 변케 하며 여러 가지 재앙으로 세상을 치는 분들로 6절에 소개되므로 엘리야 선지의 아합 왕의 아들 아하시야의 군대가 엘리야를 헤치려고 잡으려 할 때도 엘리야로 불을 내려 군대를 사름과(왕하 1:9-12) 삼 년 반 동안 비가 없음과(왕상 17:) 모세가 애굽에서 물을 피로 변하게 한 사건(출 7:19)을 재현하는 것을 보게 된다.
두 선지자를 죽인 성(11:7-12)
인류의 역사에 크고 작은 전쟁이 많지만 두 사람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일이 없음을 볼 때 영적 전쟁을 말하는 아마겟돈 전쟁을 말한다. 문제는 본문의 전쟁으로 죽는데 그 성을 말씀하실 때에 롯이 살던 소돔 또는 애굽이라 했다. 이사야 1장 10절에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잘못을 향해 꾸짖으시며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소돔과 고모라로 비유했다. 선민들을 종으로 삼던 애굽을 상징으로 말할 때 기생 라합으로 비유했다(사 30:7). 또 새 하늘과 새 시대에는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표적과 증거가 되며 제단이 있을 곳이며, 만민의 복의 기관이 되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다(사 19:19-25). 즉 이방세계의 교회를 말한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누가복음 13장 33절에 말씀하셨다. 성도가 핍박을 받는 곳도 예수님과 같이 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로 구성된 공회인 것이다. 회당에서 매질을 당한다(막 13:9).
사흘 반(9, 11)
두 선지자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방치됨은 삼일 반의 말씀의 배경은 다니엘 7장 21-25절에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짐승의 손에 붙이는 그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단 11:13).
땅에 거하는 자들
이는 계시록에서는 시험의 때를 당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며(계 3:10), 또 심판의 대상이 될 자들을 말하고(6:10), 화를 당할 자이며(8:13), 짐승에게 경배할 자들이고(계 13:8), 짐승의 미혹을 받을 자이다(계 13:14). 즉 교인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두 선지자가 하나님의 바를 진리를 전하므로 땅에 거하는 자들은 듣기가 괴로워서 저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감.
마지막 삼년 반이 끝날 무렵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두 선지자 속에 들어가 다시 살고 사람들은 크게 놀란다. 두 선지자에게 다시 생명을 소생케 한 이 생기는 아담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만들어 놓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 또는 생명인데 두 증인이나 두 선지자에게 들어간 생기는 생명의 성령으로서 에스겔 골짜기에 생명을 살리던 ‘프뉴마 조’에 속한다. 구약 원문으로는 ‘루아흐’로 성신을 뜻한다(겔 37:1-10; 사 32:15). 그러므로 말세에 두 증인 선지자들은 실상 죽은 후 살아남보다 ‘프뉴마 조’에 충만함을 뜻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임직함과 같은 이치다.
계시록 12장 여자와 용
본장에서 하늘과 관계된 구절이 다섯 곳이 나오지만 살펴보면 인간이 해를 입고, 상징적인 용이 있다는 것과 지구보다 더 큰 별을 끌어 던짐과, 사람이 하늘과 그 가운데 있다는 말씀은 문자대로의 하늘이 아님을 확실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가진 자와 그 장막 된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일 것이다. 말세에는 교회 안에서 영계의 싸움과 진리의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그리고 육의 세계에서는 교회에서 참 진리와 비 진리의 대립이 싸움이다. 해를 입은 여자가 낳은 메시아인 철장 권세 자가 있고 마귀 편에 음녀가 거짓 선지자 곧 적그리스도와의 싸움이다.
해를 입은 여자.
시편 84편 11절과 말라기 4장 2절에는 말세에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한다고 했다. 즉 신령한 교회를 상징한 여인이 태양되신 하나님을 입고 그 분의 이름과 능력으로 말세 교회를 치료함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을 입기 전에는 용과 싸우면서 양육을 받는다(12:12-14). 본문의 독수리 날개는 계시록 4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자인 네 생물의 한쪽 면이 독수리 같은데 그 날개를 말한다. 즉 여인이 사단에게 핍박을 받을 때 비로소 참다운 진리를 깨닫고 네 생물과 같이 진리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날을 수 있는 독수리의 두 날개가 된 것이다. 3절에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는데 큰 붉은 용인 사단이 “하늘에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짐은 계시록 1장 20절에 일곱별은 목사들인데 목사 3분의 1을 자기의 수하에 넣겠다는 것이다.
철장 권세 자
이는 만왕의 왕으로 심판주이다(계 2:27; 19:15; 시 2:9). 그리고 철장 권세라는 말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권세를 말한다. 이사야 11장 1-9절의 말씀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 직전에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사명 자가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으로 충만하여 심판하신다. 그분은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고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무력의 세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로 모든 심판이 이루어진다.
제 13장 두 짐승
계시록은 사단편의 사역자만 짐승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 편에 사역자들도 생물이라는 짐승 곧 말 같고 사자와 같은 짐승으로 등장한다. 계시록 6장의 네 생물은 에스겔 1장과 10장을 그 배경으로 한 것으로서 짐승이라 한다. 본장의 짐승은 사단의 사역자를 말하며 다니엘 7장 2절로 28절을 보여 준다.
짐승이 나오는 시기
배경은 다니엘 7장 25절로 26절에서 심판이 시작되기 전으로 말세지 말을 말한다. 삼년 반 동안 성도들을 환란에 넘기는 때임을 알 수 있다.
짐승이 나오는 장소
사단 편: 바다와 무저갱에서 나온다(13:11; 11:7; 17:18).
하나님 편: 두 놋 산 사이에서 나온다(슥 6:1-5).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
네 필의 말들로 표현된 것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다가 그 분의 지시를 받아 ‘두 놋 산’이라고 하는 그 산을 통하여(슥 6:1-5) 세상에 나온 말일의 사역자들이다. 두 감람나무와 두 증인과 두 선지자는 두 놋 산이다. 환상들을 보면 어느 편에서 나왔든지 짐승, 생물과 또는 말들로서 예언서의 환상 가운데 나타내 놓으신 것이다.
짐승은 곧 네 나라 네 왕의 다른 이름이다.
다니엘 7장 17절에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고 했다. 23절에서는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나라라고 했다. 그러므로 짐승은 문자 그대로 짐승이 아니라 상징으로서의 짐승을 말한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짐승이 사람의 마음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지구 탄생이레 짐승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일은 없다. 때문에 본문의 짐승은 큰 의미는 나라이고 작은 의미는 왕이라는 사단의 나라와 그 사역자이다(계13:2; 단 7:2-7; 계 17:8-10).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다. 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는데 일곱 머리와 열 뿔이라 하고 계시록 17장에서 일곱 머리는 일곱 산도 되며 또 일곱 왕도 된다고 설명을 한다. 12절에는 ‘열 뿔은 열 왕’이라고 했다. 다니엘도 2장 41절로 44절에 신상을 통해 “열 발가락은 열 왕의 때”라고 했다.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과 상징적으로 해석할 것을 알아야 한다. 결론은 문자대로 짐승이 아니라 말세에 나올 사단의 사역자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마흔 두 달 (3년 6개월)
거짓 목회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목회하는 시기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고, 성경보고 설교하지만 사단이 받는다(암 5:25; 행 7:42). 하나님께 모든 충성을 바치지만 교회의 3분지 1이 사단이 받는 예배이다(딤전 4:1; 계 13:11).
거짓 목자의 형상은 땅에서(렘 22:29, 6:19; 사 62:4; 시 98:1-9; 96: 13; 계 12:12,16, 13:3) 올라오는데 땅들이 그 듣는 자의 신앙생활의 중심 사상에 따라 어린 양의 신부로 결혼할 자격자도 있고, 심판을 받을 자도 있는 곳이 교회인데 그 교회에서 짐승이 나온다는 것이다. 사단은 재림 메시아인 예수님이 어린양으로 오시니 사단이 새끼 양을 위장하고 두 뿔을 달고 용처럼 말한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목자로 알면서 알고 따른다는 말이 용처럼 이다.
“용처럼 말 하더라”
사단이 위장을 하여도 용임을 아는 안목을 주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주신 은사가 아니고 사단의 영이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그 것도 압도적으로 설교함을 말한다.
나중에 나오는 짐승(13:12)
짐승에게는 뿔이 없으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과 같이 위장한 뿔을 달고 이적을 행하여 미혹한다. 다니엘 8장에 수양과 수 염소로 상징하는 환상 중에 말세 교회를 계시하는데 첫 번째 그 수 염소의 큰 뿔이 꺾이고 두 번째 뿔 넷이 나와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순한 수양의 환상인데 나중에는 거친 수 염소의 세계로 바뀐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겸손을 버리고 교만하여 기형적으로 부흥할 때 뿔이 꺾이고 수 염소의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짐승의 표(13:16-18)
계시록 7장에서 이마에 인을 치는 행위를 사단도 사단의 표를 준다. 에스겔서 9장과 짝이 되는 내용인데 이 하나님의 인을 에스겔 9장에 표라고 했고 계시록에서는 하나님 편과 사단편이 각각 자기들의 세력 안에 있음을 확인함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편의 해를 입은 여인(계 12:)=사치한 음녀(계 17:) 하나님편의 생물(계 6:)=바다에서 나온 짐승(계 13: 겔 7:) 하나님편의 두 증인(계 11:)=이세벨의 선지자(계 2:)
그러므로 이 표는 영적인 표이며 또한 이표로 말미암아 매매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은 영혼의 매매이다. 계시록 18장 12절로 13절에서 타락한 교회 “큰 성 바벨론”이 상거래를 하는데 그 상품 중 사람의 영혼을 상품화해서 사고파는 것이다. 깨닫기 힘들게 섞여 있다.
세상에서 영혼을 다루는 기관이 세상 어떤 기관이겠는가? 타락한 교회가 사람 영혼의 상품화로 본색을 드러낸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행 20:28; 고전 6:20; 7:23)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계시록은 짐승의 표를 가지고 사고파는 매매 행위를 말씀하신다. 말세에는 신령한 양식을 감추고 거짓 선지자들과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만이 거짓 양식을 통해 영혼을 매매한다.
성령님의 인과 짐승의 표
성경은 성령님의 인을 치는데 그 느낌이 육적으로 식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이나 성령님의 인이 신령에 속하는 영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영계의 일들을 육신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며 짐승의 표도 기계로 그 표를 만들 수도 없고 식별되지 않는다. 계시록 13장 17절과 18절에 짐승의 표를 정의할 때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라”하여 사람을 말하며, 어린양의 신부를 보여주시겠다고 하시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셨다(계 21:9; 사 1:26; 시 87:3; 겔 48:35). 사단 편에도 성이 있다(겔 22:1-4).
제 14장 어린양과 144.000
시온 산에 섰고(1-5)
시온 산은 예루살렘 동남쪽 언덕이다. 시적인 표현은 예루살렘 도성 전체를 말한다. 본장은 스바냐 3장 14절로 20절을 그 배경으로 스가랴 14장의 예언과 짝이 된다. 계시록 14장 1절은 시편 2편 6절의 성취이다(어린 양이 시온에 섰고=내가 나의 왕을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이는 재림하시는 장소를 말한다. 스가랴 14장 4절과 5절은 재림 장소를 감람산으로 말씀하시니 두 곳이 되어 일관성이 없는 예언으로 생각하지만 문자적인 언덕도 감람산도 아닌 예루살렘 도성에 임하신다는 말씀이다(미 4:6-8).
그와 함께 144.000이 섰는데
재림하실 때 천사가 아닌 인을 맞은 144.000과 서신다. 마태복음 24장 31절에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라고 하셨고, 스가랴 14장 5절에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짐승의 표를 가진 자들도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는데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계 13:17) 했다. 양쪽이 각각 그 세력에 속한 자들은 그 속한 주인의 이름아래 있다는 것이다.
새 노래
십사만 사천이 노래를 부르는데 아무도 부르지 않던 새 노래이다(시 98:1). 구원 받기전의 노래와 구원을 받은 자가 하는 노래가 다름을 분명히 하는 노래로서 두 가지인데 인봉 책을 떼심과 피의 값으로 사시고 제사장을 삼으심을 노래한다.
여자로 몸을 더럽히지 않은 자
본문의 여자를 특정한 부류라고 말하지 않아서 문자적으로는 첫째는 여자와 더불어 상관을 갖지 않고, 둘째는 남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는 말이 없음은 천국 백성은 성을 중시하지 않음이요(막 12:25; 마 22:30), 창세기 1장 28절에 사람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으로 주신 것이므로 본문의 여자는 문자대로가 아니라 바벨론이라고 하는 음녀와 깨끗한 관계를 말한 것 같다.
처음 익은 열매
야고보 1장 18절에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쫒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도다.”는 미래에 속한 사건이기 때문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사도까지도 영육간의 완전한 구원에 대하여 탄식하시는 말씀이다(롬 8장 23). 바울도 완전한 구원은 소유하지 못하고 그 구원을 기다린다고 했다. 성도의 구원이란 미래에 성취된다. 베드로 사도도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했고 시작된 구원이 미래에 성취된다. 그러므로 창세 이후로부터 재림 때까지의 성도들이 십사만 사천이고 처음 익은 열매이다.
영원한 복음(6-12)
이 복음은 공중에 날아가는 천사가 가졌는데 앞으로 전할 복음이라 했다. 분명한 것은 영원한 복음이 나타남이 재림 직전일 것이다(계 14:6(영원한 복음), 7(심판이 임박).
큰 성 바벨론
지금 이라크의 옛 수도인데 유프라테스 강 옆에 바벨론이 있다. 최초의 언급은 BC. 2500년경까지 소급되며, 고대 바벨론 왕들 가운데 가장 알려진 왕은 함무라비 법전을 만든 왕을 들 수 있다. 유명한 이 도시는 BC 689년에 산헤립에게 완전히 파괴되고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바벨론을 재건하여 신 바벨론의 수도로서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될 때는 느부갓네살 2세의 치하인 BC 605-562년 이다. 신 바벨로니아가 패망한 후 페르시아에 넘어간 것은 BC 539년에 고레스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영원히 멸망한 것이다.
본 계시록을 기록할 시기는 바벨론이 패망 후 539년경인데 사도 요한의 환상 중에 현재 사건인 것과 같이 표현한다(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그러므로 바벨론은 선민의 원수개념인 상징적인 것이요 이를 예레미아도 51장 7절과 8절에서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영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을 인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낳으리로다.”라 했다. 하나님께서 선민을 잡아서 포로로 종을 삼는 악의 집산지인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울라 하심은 하나님의 처녀 딸들이 바벨론이라는 음녀로 변질되었다가 무너진 것을 보고 울라하신 것이다. 계시록은 무력으로 세계를 제패한 것이 아니고 음행으로 세계를 무너뜨린다. 바벨론은 변질된 교회이요 음행의 결과는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게 된다. 좋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노의 포도주는 변질된 말씀이다.
이 땅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음(10-11)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지옥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고 재림하시는 예수님과 천사(인을 맞은 모든 자)들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다(슥14:5; 마 24:16).
그 불이 이 땅에서 세세토록 올라감
모든 나라로 음행이라는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를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시는 것을 계시록 18장 2절에도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라고 외친다. 그리고 바벨론이 무너진 이유를 2절 중반에서 19장 2절까지 기록하고 19장 3절에서는 큰 성 음녀를 태우는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했다. 이사야도 34장 10절에서“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라”고 했다. 이 때의 시대적 배경을 이사가 말할 때 여호와가 만국을 향하여 분내시며 진멸하시는 때 즉 심판 때라고 했다(사 34:10; 사 66:24).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14:13).
예수님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라 했다. 이는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으려고 순교한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추수 심판(14-20)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손에 낫을 가지고 심판을 하시려고 한다. 한문으로는 인자 같은 이가 계시록 1장 13절에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 7장 13절과 14절에는 인자 같은 이가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서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을 것을 말씀했다. 분명한 것은 재림 메시아를 가리키는 메시야가 아닌 인자 같은 이로 두 분으로 말씀되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오신다고 예언하시고 오실 때는 그 분의 아들이 오신 것같이 재림 메시아도 예수님의 칭호인 ‘그 인자’가 아닌 ‘인자 같은 이’가 모든 권세를 가지고 오시는 것과 모두 같은 맥락이다.
두 번 추수
①먼저 추수는 곡식 추수로서 명령은 성전에서 나온 천사이고 그 추수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한다.
②나중 추수는 진노의 포도주 틀의 추수는 제단으로부터 나온 천사가 명령을 하고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온 천사가 한다. 성전과 제단에서 나온 천사는 이모두가 상징이다. 하늘에는 이 세상에 있던 그런 성전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성전”이라고 했다(계 21:22). 그리고 제단도 사람이 거하는 주택이 아니고 제물을 드리는 단이다. 이렇게 상징의 은어로 가득 찬 계시록에서는 제단이 말을 한다(16:7). 그러므로 성전에서 나온 천사나 구름 위에 앉은 천사나 제단에서 나온 천사가 모두 상징으로 된 계시이니 심판의 모습을 인간의 안목으로 한층 더 깨달을 수 있도록 기록된 말씀이 구약에 기록된 곳이 다음과 같이 있다. 먼저 요엘 3장 11절로 15절인데 계시록 6장에 여섯째 인을 뗄 때 일어난 광경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세 징조를 말씀하신 마태복음 24장 29절의 말씀이다. 이사야 22장 1절에 “이상 골짜기”의 실상에 대한 말씀을 보자 “이상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찜인고 훤화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며”라고 했다. 그러므로 심판의 골짜기에서의 죽음은 인류의 큰 전쟁으로 죽은 삼차 전쟁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칼에 죽는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에 모임
예수님께서 말세 징조의 끝을 맺으면서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셨다(마 24:31; 13:27). 데살로니가후서 2장 1절과 2절에도 그 모임을 말씀하셨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했다. 이 모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나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한 바울의 서신에도 자세한 설명을 하시지 않고 단순히 모이리라고만 하셨으나 위에서 본 요엘 3장 11절에 여호와께서 친히 “사면의 열국아 모일지어다.”라고 명령을 하신 것은 그 목적이 여호사밧 골짜기에 모여 놓고, 참 진리와 비 진리의 대립의 싸움이 있을 것이며 그 비 진리에 속하는 무리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모임이 심판을 위하여 모으게 하셨지만 실상은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이사야 66장 15절로 24절의 이사야서의 말씀에도 열방과 열 족을 모으시는(18) 즉 세계 민족을 모으시는 그 때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강림하시는 새 시대가 오기 직전에 모으시는 사건이 있을 말씀한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만민에게 전파하기 위함이다. 그 때의 증거를 남기시는 사건이 여호와께 패역한 자들의 시체가 꺼지지 않은 불속과 벌레들 속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 했다. 결국 사명 자와 진노하심을 받은 두 부류이다.
민족들이 모여들 산의 참고 성구들
미가서 4장 1절로 13절은 변질된 교회가 새롭게 될 때까지는 시온이 해산하는 여인처럼 구로한다는 말씀이다. 바벨론이라는 타락한 교회가 교계 위에 군림할 때 거기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미가서 5장 1절의 “딸 군대여 떼를 모을 지어다”라는 말씀은 참 성도인데 모임의 이유는 그들이 에워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을 향해 막대기로 치라할 때 이스라엘의 제판자의 뺨을 치라 하신다(사 22: 세상적인 전쟁이 아니었다. 막 13:9; 막 15:1; 미 4:11).
제 15장 성도들의 노래
계시록은 순서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건적으로 문제를 연결해야 한다. 그러므로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들이 모두 하나의 말일 사건을 여러 모양으로 계시한 것이다. 15장의 끝은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는 이해가 안 된다. 우리 생각으로는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 보다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더라가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교리가 담겨있다. 본디 하늘에는 성도의 개념 속에 있는 물질적인 모형을 갖춘 그런 성전은 없는 것이다. 성전의 실상은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을 다른 말로 표현함이 성전이다(계 21:22). 그러므로 말세 대 환란이 끝나기까지는 누구든지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되신 예수님 앞 가까이는 들어갈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들어간다는 말씀도 되지만 살펴보면 성전 안에 들어간 자들과 성전이 하나가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요 14:20). 신인이 일체가 되는, 인간 창조의 진정한 완성의 경지를 말씀하고 계신다. 이 완성의 단계를 다른 말로는 어린 양의 그 신부가 결혼하는 날이라고도 하고 새 예루살렘 성이 완성된 것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단계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계 21:).
제 16장 일곱 대접과 일곱 재앙
대접 재앙에서 심판을 주관하시는 분을 성전에 계신 분으로 소개된다. 14장 14절에서도 성전으로부터 나온 천사가 금 면류관을 쓰고 있으며, 명령을 내리는 분도 성전에 계신다. “성전에서 나온 음성” 또는 “성전에서 나온 천사”가 심판을 주관 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2장 47절 이하에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사명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사명만 있으신다는 것이다. 심판하실 이가 계시는데 서 “나의 한 그 말이” 심판하신 다고 48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즉 말씀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요 또한 영이기 때문에 그 생명의 영이 심판주로 오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여기 예수님의 말씀을 영이라고 할 때, 그 말씀이 영이 되는 것은 그 말씀에는 진리의 보혜사가 역사하기 때문에 영이 되는 것이다. 또 그 말씀에는 또 다른 보혜사께서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의 속에서 생명으로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 보혜사께서(요 14: 26)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요 16:8) 심판 주 이기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닌 다른 이가 심판을 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심판을 직접 하시지 않고 다른 이가 오셔서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관계는 상상을 초월한 것으로 “내가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고 요한복음 14장 49절로 50절에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정으로부터 큰 음성으로 명령을 하신 분이나(16:1)성전으로부터 나와서 구름 위에 앉은 분에게 명령하는 천사나(14:15) 분이나 같은 분이다. 우리는 천사가 다 같은 천사가 아님을 10장에서 살펴보았다.
첫째 대접의 재앙 : 독한 헌데가 돋아남(2절)
둘째 대접의 재앙 : 바다가 피같이 됨(3절)
셋째 대접의 재앙 :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됨(4)
넷째 대접의 재앙 :해가 권세를 받아 사람들을 불로 태움(8)
다섯째 대접의 재앙 : 짐승의 보좌에 쏟음, 그 나라가 어둠
여섯째 대접의 재앙 : 큰 강 유브라데가 마르므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된(12) 것은 재앙으로 마지막으로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인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의 세력 아래 있는 유브라데가 말라져서 사명자자의 대로가 열린다는 계시이다. 좋은 유브라데 강물이 쑥별이 떨어져 쑥물 때문에 사명 자들이 힘들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물을 말리시니 천년 왕국의 길이 열린다는 것인데 역사적으로 홍해가 열려 선민이 길이 됨이 비유일 것이다.
여섯 번째 대접 재앙과 여섯째 인 재앙과 여섯 번째 나팔 재앙과 함께 말세 환란이다. 계시록 9장 13절로 15절에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 들이더라”라고 했다. 여섯째 나팔은 결박한 네 천사가 놓임을 받고 여섯째 대접은 강이 말라 자유롭게 되는데 왕과 천사들로 표현한 것은 하나의 사건에 사명 자들을 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사야 11장 1절로 5절에는 “이새의 줄기와 가지에서 각각 한 싹과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하며,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여 그가 심판을 하는데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고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고 그 입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이며 공의로, 성실로 허리띠를 삼으리라”고 했다. 6절로 9절에 에덴이 회복되어 천년 왕국이 시작되며, 10절로 16절은 이 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때에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는 사건이 일어나 만민의 기호가 된다는 것이다. 15절로 16절은 메시야 앞에 모인 이유가 유브라데 강을 건너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즉 영적인 출애굽을 교훈하신다.
아마겟돈 전쟁(계 16:13-16).
본문은 위의 사건과 다르며 사단편의 사역자인 왕들을 모으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편에 사역자인 “동방에서 왕들의 길이 예비 되더라”는 사건은 이사야 41장 2절로 4절의 예언의 성취인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킨 때이다.
이 예언의 일 단계 성취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는 것을 해방시킨 고레스 왕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4절 태초와 나중에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 니라고 하실 때 나중에 있을 자인, 재림 메시야 때의 사건을 예언하신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예언이 이중 삼 중적으로 계시되었다. 사단의 사역자들도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해 참 백성을 치려고 모인다(미 4:11-12). 그들은 개구리 같은 영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16절에 보면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고 했고 1절에서는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했고, 어떤 무기를 들고 서로 싸웠다는 상황 설명이 없다.
이어서 일곱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았는데 성전 보좌에서는 공기 가운데 대접을 쏟은 사실을 잘 되었다고 한다(17). 마지막 재앙으로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지진이 일어났는데 천지개벽 이후로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지진으로 큰 성이 3갈래로 갈라졌고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는 큰 성 바벨론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큰 지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세 징조의 하나로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 24:7) 라고 하신 예언의 성취이다(암 8:11).
아마겟돈으로 사람을 모으는 사건은 흔히 말하는 삼차전이 아니다. 학자들은 그러한 지명이 없고, 원문을 살피면 ‘할 므깃도’라고 한다. 즉 므깃도 산인데 지도상에 평야로 되어 있으며 산이 없다(사 13:1-16). 그러므로 여섯째 대접 재앙은 온 천하 무리들을 산으로 모아 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이라는 은어의 뜻을 가진 교회 안에서 진리의 문제로 심판하시기 위한 싸움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우박 재앙
이는 출애굽(출 9:22-26)과 여호수아 군대가 가나안의 땅을 점령하려고 할 때 하늘의 우박이 선민 이스라엘을 도와 적군의 무리를 죽이는 재앙으로 내렸던 우박이다(수 10:11). 그러므로 우박 재앙이란 이 곳에서 저 곳인 약속의 땅으로 갈 때 심판의 재앙으로 사단의 편의 군대를 치시는 우박인 것이다.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는 우박
성경은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고 질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거짓 피난처인 거짓 교회를 우박으로 심판하신다.
주의 종들을 통하여 싸운다.
그 우박이 내리는 시기를 이사야 말씀의 배경을 보면 28장 22절에 “온 땅을 멸망시키는 때”라고 했다. 이 우박이 쏟아져 거짓 피난처를 소탕할 때는 이사야 28장 21절에 배경이 다윗이 블레셋과 싸울 때 여호와께서 그 싸움에 직접 개입하셔서 블레셋을 격파한 것과 같게 하신다고 하셔서 21절에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신다.”고 하셨고 또 여호수아가 가나안 사람을 쳐 무찌를 때와 같이 하신다는 말씀으로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 일을 행하신다.”고 하셨다. 이 두 전쟁을 사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전쟁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 직접 개입하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시겠다는 말씀이다. 그 때와 같이 말일에도 주의 참 종들을 통하여 심판 때에 거짓 피난처를 소탕한다는 말씀이다.
우박은 전하는 도
이사야 28장 19절에 “그것이 유행할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라는 말씀에서 우박 재앙은 결국 “참 진리의 이치”를 말씀하신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박’이 문자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음 덩어리가 아니라 참 진리가 거짓 진리의 피난처를 소탕한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28장 2절에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물의 창일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세에 재앙으로 내리는 우박은 주께로부터 출발하여 사명자의 참 진리의 이치가 능력의 말씀이 되어 거짓의 피난처에 약 100근이나 되는 무서운 우박으로 변하여 내리친다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철장 권세자의 그 입의 권세로 세상을 치는 것을 “그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이것으로 만국을 치겠고”라고 말씀하실 때와 우박 진리와 같이 두렵다는 말씀이다.
유행하는 우박
이사야 28장 19절에 우박 재앙이 유행할 때마다 너희를 잡을 것이니 아침마다 유행하고 주야로 유행한다고 했다. 즉 우박이란 참 진리의 이치가 되므로 유행하는 것이다. 계시록 6장에 흰 말을 타고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신 재림 메시야께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장 11절에 심판하며 싸우더라고 함은 재림 메시야가 한판의 승부를 하기까지는 연속적으로 우박이 있고 그 우박은 예수님 편에 있는 자는 영생을 주고 반대편의 교인들에게는 거짓 진리에 있으므로 거치는 돌과 걸리는 반석이 된다는 것이다. 이사야 8장 14-15절에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니엘 8장 23절로 25절에 “만왕의 왕을 대적하는 왕이 있다”고 하셨고, 시편 2편 2절에서도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기름 받은 자 메시야를 대적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왕과 관원들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변질된 군왕들과 관원들을 말한다.
계시록 17장 많은 물에 앉은 큰 음녀의 심판
여기 음녀와 붉은 빛 짐승과 그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뿌과의 관계는 여기서 여러 형태를 가지고 있는 음녀의 숨겨진 얼굴을 계시하신 것이다. 음녀의 숨겨진 얼굴이 아무리 깊숙이 감추어 있다고 하여도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뜻은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려면 말씀을 E깨닫는 공식의 설명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든다면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17:9-10). 의 말씀은 짐승의 일곱 머리가 실상은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고 또 일곱 왕이 된다. 그러므로 짐승과 여자는 똑 같은 존재라는 간단한 원리이다. 이러한 원리는 계시록을 푸는 열쇠이다(계 1:19-20).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계시록 1장의 별은 : 교회의 목회자요.
촛대는: 교회이며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음녀, 짐승, 일곱 머리, 열 뿔은 하나의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이 교계와 영계에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계시록 17장 18절에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고 했는데 이는 여자라고 했지만 일곱 산 위에 앉은 여자, 또 일곱 왕 위에 앉은 여자라고 했다. 그러므로 일곱 산은 은어이고 산 위에 군림하는 세력이다. 일곱 왕들의 위에 군림하는 세력도 된다는 말씀으로 예언서의 ‘산’이 가지고 있는 암호는 사명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시편 68편 14-16절에 “전능하신 자가 열 왕을 그 중에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거하시려는 산과 그 산을 시기하여 보는 높은 산들이 있다고 하셨으니 문자대로의 산이 아니라 은어를 사용한 하나님 편의 사명자의 산도 있고, 사단 편에 속하는 산도 있기 때문에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라는 말씀이 요한 계시록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왕이라는 단어도 은어를 사용한 사명 자를 뜻한다. 하나님 편이나 사단 편이 사명 자라면 참 교회와 변질된 교회를 의미한 것이다(17: 1-6).
여자가 앉은 물(15절).
15절에 여자가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고 했는데 이는 모든 사람을 말할 때 쓰인다. 즉 별과 촛대인 교회와 목회자들에 관한 말씀이므로 백성, 무리, 열국, 방언이라고 표현하시고 교회 위에 앉은 음녀의 세력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물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도 한다. 즉 음녀가 변질된 말씀으로 미혹한 것으로 우리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변질된 교회의 특징
먼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을 섬기지 못하게 하지만 1차적으로 실패했을 때에 2차적으로 믿음의 목적을 흐리게 하므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쁨을 누리고 살게 하며 믿음의 대가로 영생과 복락을 꿈꾸며 모든 행위를 축복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천국과 이 땅위에 있는 축복에 메임을 받게 한다. 이는 사단의 역사요 변질된 교회의 모습이다. 참된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가? 우리가 아는 데로 천국을 가고 싶어서 예수님을 믿음이 아니요 그 나라에 가서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천국에 가며, 이 땅에서도 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예수님을 이용하는 꼴이 된다. 오직 우리를 위해서 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부활로 재림의 소망을 주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 성도이다. 즉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위해 계심이 아니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성화도 이방 종교의 도식이다. 실제 예수님도 아니요(동양인이신 예수님) 그 화상에 신성을 옮겨올 수가 없기 때문에 신성이 없는 예수님은 거짓 예수님이신 것이다.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그분의 신격을 격하시키거나 경외심이 없다면 몰염치이요 이방종교인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남아 있음이 최고의 축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이란 뜻은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아래 세상의 물질로 변질시키지 말고 참 교회와 참 성도되어 영광을 돌려야 한다. 시편 1편 1절을 읽을 때 거짓 교회 성도는 복 있는 사람을 축복이 많기 때문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지만, 참 교회 성도는 복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닮기 위해 악인의 꾀를 좇지 않음이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문화권을 누리지 못하며 거지 나사로 같아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인생에 성공과 자녀들의 축복과 미래보다 예수님을 닮아감에 최선을 다하고, 우리 속에서 보혈의 권세가 나타나 영생의 향기를 토하는 것이다.
음녀의 행위(2절)
“땅의 임금들”이란 세력이 있는 대통령이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 족속을 말한다(계 17:2). 물 위에 앉은 여자도 문자대로의 여자가 아니다. ‘이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했다’(계 17:18). 즉 ‘큰 성’이란 큰 성과 같은 세력을 가진 큰 교회와 교권의 세력을 말한다. 17장 12절에는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모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동안 받으리라”의 말씀은 열 왕이 임금의 권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임금처럼 행세하는 왕으로 가짜 왕이라는 것이다.
음녀는 음행의 포도주로 미혹한다(2).
2절 음행과 포도주에 취함이란 배금주의와 말씀을 상징하는 포도주이다(사 55:1). 계시록에서 변질된 말씀을 음행의 포도주이요 축복 사상과 배금주의는 음행의 포도주인데 성도들을 미혹하여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로 바뀌는 것을 보여 준다.
진노의 포도주 잔(계 16:19)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뀐 것을 말한다. 예레미야 51장 7 절로 8절에 “ 바벨론은 여호와의 수중의 온 세계로 취케 하는 금잔이라 열방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인하여 미쳤도다 바벨론이 졸지에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인하여 울라 그 창상을 인하여 유황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의 말씀은 모든 교회로 그의 금잔에 담긴 포도주를 마시고 미쳤다고 했다. 가죽 부대나 항아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잔에 있으니 황금만능주의와 축복사상에서 나오는 포장된 포도주는 참포도주와 혼합된 것으로 사람의 눈에 아름답고 향기가 그윽할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책망과 심판을 면치 못하며 예루살렘의 죄를 책망한 것이다.
열 뿔은 열 왕이니(12)
이는 괴상한 짐승이 아니라 성품의 본질은 짐승이고, 사람의 세계에서는 여자라고 하는 교회 위에 군림한 변질된 교회를 말한다. 사도 요한이 이것을 보고 본장 6절에 ‘기이히 여기니’라고 말 했다. 변질된 교회들은 성도의 피에 취한다. 예레미야도 6장 2절에 “기이한 여자”를 “묘한 딸”로 표현하였다.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세상 여자에 관한 계시를 보았으면 어찌하여 기이히 여기겠는가? 음녀가 음행을 하면 이상할 것이 없지만 예수님의 피로 사신 신부의 교회가 음행을 하니 귀가 막힐 노릇이다. 이리의 탈로 우상 종교로 미혹하다가 말세가 되면 양의 탈을 쓰고 몸 된 교회에 와서 사단의 사자로 성도들의 피에 취하고 있으니 놀랐던 것이다.
하나님의 한 뜻을 이루기까지(17)
말세에 짐승이 나와서 표를 받게 하고 교회를 유린하는 한 뜻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6절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의 말씀은 사단의 사자들도 자기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한 때가 있고 그 때를 하나님의 허락으로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계시록 18장 큰 장사꾼 바벨론
바벨론은 종교를 가장한 장사꾼의 세력이다. 11절 이하에 상고들이 상품을 사는 자가 없어서 울고 있다. 이는 말세에 바벨론과 함께 종교 재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교회의 삼분의 일이 장사의 소굴로 변한다. 변질된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전하기보다 성공적인 삶과 소원성취와 자기 배를 섬기게 한다. 바벨론의 설교를 계시록 18장 23절에 “...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론하지만 실상은 점쟁이들이 하는 복술이라는 것이다.
많은 물가에 거하며 재물이 많은 자(15-19)
시편 77편 19절에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의 말씀처럼 저 푸른 바다에 정말로 주의 첩경이란 지름길이 있을까? 바다라고 하는 교회 물이라는 교회에서 구원의 방부를 운전하는 뱃사공은 목회자이므로 그 바다에 치부하였다는 말이다. 에스겔 28장 2절에 “... 내가 하나님의 자리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했고, 시편 24편 2절에도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였도다.”라고 하셨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상징의 바다는 하나님의 자리인 교회인데 그 바다에서 일어난 말세 교회의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 계시록 18장의 내용이다. 계시록 18장에 나오는 바벨론의 주 고객은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라고 했는데 이들이 바벨론의 상품으로 치부한 자들이라고 했다. 그 상품들을 여러 가지를 열거한 중에서 맨 마지막에 기록된 종들과 영혼들이라고 했는데(계 19:13) 이는 바벨론이라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사고파는 장사꾼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51장 12절로 13절에 “바벨론 성벽을 향하여 기를 세우고 튼튼히 지키며 파숫군을 세우며 복병을 베풀어 방비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거민에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경영하시고 행하심이로다. 많은 물가에 거하여 재물이 많은 자여 네 탐람의 한정, 네 결국이 이르렀도다.”했는데 역사상의 바벨론은 육지 한가운데 있는데 본문에서는 많은 물가에 거하는 나라로 말씀하신 것은 역사상의 바벨론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타락한 말세 교회라는 바벨론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 18장에 나오는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 선장, 선객”은 모두가 타락한 말세 교회와 관계를 맺고 사는 목회자와 교인들을 상징한 말이다.
계시록 19장 음녀의 심판
본장 1절에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음성은 천상천하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의 음성을 가리키는데 할렐루야 4창이 나온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1창(1절) 할렐루야: 우리의 완성된 구원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과 능력을 찬양 드리는 것이다.
2창(3절) 할렐루야: 그 음녀의 심판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 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 심판에 대하여 찬양 드리는 것이다.
3창(4절) 할렐루야: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하신 약속이 진실하게 이루어짐에 대하여 24장로들과 4 생물들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분께 경배함이다.
4창(6절) 할렐루야: 전능하신이가 통치하심에 대하여 할렐루 야로 찬양을 드린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할렐루야 찬송을 24장로들과 네 생물이 영광을 드렸는데 응답하신 말씀은 5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여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할렐루야 찬양을, 본인 자신 말고 “우리 하나님께 돌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보좌에 앉으신 이 말고 다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신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을 보면 경배 드리는 무리들과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라 한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중보자의 위치에 계신다는 것이다(단 7:9-27).
어린 양의 신부의 옷(6-8).
혼인 잔치가 다가오니 예복을 입어야 되는데 세마포란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는데 누구든지 많고 적음의 차이가 속에 예복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신랑 예수님을 기다리는데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예복과 등불로 기다림에 갖출 것은 끝났는데 문제는 오시기 직전에 기름병과 기름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행실 중에 예수님만을 위한 기름병과 기름이 있어야 한다. 이사야 64장 6절에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했다. 즉 벗어버려 할 옷과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가 아닌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옳은 행실이 요구된다. 하나님과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있어야 신앙생활이 즐겁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
마태복음에서(22:14)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청함은 누구든지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말하고 택함은 반드시 참여함을 교훈을 하신다. 계시록의 청함을 원문을 살피면 “케크레메노이”란 말인데 초대하다의 완료를 뜻한다.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초대받음을 말하므로 본문의 청함과 마태복음의 택함을 입은 것과 같다. 이제 선택의 기회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의 절대권 아래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불러낸 것이다(이사야 25:6-8).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
엄청난 천사를 만나 여러 가지 환상과 그 해설을 듣던 사도 요한은 제 2 계명에 기록된 “또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에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라”를 유대인이라면 어릴 때부터 배웠겠지만 요한이 절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고급 천사인가를 가늠케 한다. 그는 종이라고 말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증거는 직언이 아닌 대언의 영이라고 한다. 성경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지 하나님께 직접 받은 것은 아니다. 8절에서와 같이 계시록의 특별한 어법이다. 즉 예수님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자기가 보았던 것으로 이해된다(계 1:2).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증거라는 것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환상인 요한계시록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는 말씀은 “요한 계시록의 대언을 받은”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증거 함이 아니고 증거를 소유한 자 즉 가진 자라는 말이다. 바울도 내가 예수의 흔적을 증거 하였노라고 하지 않고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고 말 한 것을 볼 수 있다. 해석하면 사단의 세력인 용과 싸우는 종들은 밧모 섬의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자는 예수님을 증거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 때문에 순교함이다.
재림 메시야의 싸움
재림주이시며 심판 주이신 왕께서 백마를 타고 심판하심은 하박국 3장 8절로 15절에 있는 여호와께서 말을 타시고 밟는 심판주의 예언을 다시 예언한 것이다. 말을 타시고 심판하심은 6장에서 네 필이 하나님의 사역자를 뜻하는 말로서 참 진리를 가려내면서 싸우는 전쟁이며 진리로 판정난 후 심판주의 입에서 나오는 권세의 말씀이 사단의 사역자들을 불로 사르는 심판이라는 것이다.
새들의 고기 잔치(17-21)
하나님의 심판을 다른 면으로 표현할 때 “새들을 위한 잔치”라고 한다. 심판 때에 죽은 자의 시체가 얼마나 많든지 그 시체를 장사지내는 데 일곱 달 동안이나 그 시체를 장사할 것이라고(겔 39:12)했다. 에스겔 39장 4절과 17절에 그 새들을 위한 잔치가 “산 위에 예비 된 큰 잔치”라고 하셨고, 또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고 했다. 이 말씀에도 아마겟돈 므깃도 산에서 싸움이 바도 새들을 위한 잔치이며, 다른 말로는 아마겟돈의 싸움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하는 것이다.
계시록 20장 천년 왕국
천년 왕국이란 계시록 외에는 없다. 왕국의 내용에 대한 성격만 말씀하셨다. 우리는 천년 왕국과 144.000에 대하여 상고해 보자.
1. 천년왕국의 문제
1) 미국과 한국 교회의 천년전기와 세대 론의 경향
박형룡 박사님의 조직신학 책은 벌콥의 조직신학을 기초로 서술했는데 천년전기에서 는 자유롭게 하시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인 무 천년설의 자리에 천년전기 론으로 대치하셨다. 미국에도 보수교회 80%가 천년 전기론 입장이다. J. N. Darby라는 사람이 19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성경을 다시 해석하는 법을 세웠는데 그때 성경해석으로 채택한 법이 소위 문자적이고 세대론 적인 해석이었다. 그리고 미국에 전도 여행을 가서 미국 보수주의 교회들에게 그 세대 론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 후에 스코필드라는 좋은 제자를 만났고 스코필드는 “스코필드 관주 성경”을 만들어 세대 론의 각주를 달았다. 그래서 미국의 종말론은 세대 론에서 보완된 천년 전기 론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의 구레인 박사가 평양 신학교에서 무천 년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이후 건너온 선교사들이 문자적인 해석으로 천년 전기 론을 가르쳐서 문제가 발생했다. 문제는 미국과 한국이 천년 전기 론을 가르치는데 이는 장로교회의 핵인 웨스트민스터 신앙을 고백할 때 종말론은 웨스트민스터를 따르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2) 무 천년기론과 천년기론의 비교
종말의 도식에 있어서 무 천년하고 천년기하고 어떻게 다르냐? 간단하게 말하면 무 천년은 예수님의 재림, 부활, 그리고 심판,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재림은 공중 재림, 지상 재림, 부활도 천년 전의 부활, 천년 중간의 부활, 천년후의 부활, 심판도 천년 처음에 심판, 천년 중간기의 심판, 마지막의 심판, 그런 것이 아니라 심판은 한번이요 부활도 한번, 재림도 한번,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된다. 이것이 성경적이다. 중간에 천년기가 끼어 있지 않다. 천년전기는 계시록 20장 1절로 6절을 기초로 천년 왕국이 있을 것을 주장한다. 20장 7절에서는 사단이 나와서 그 세력이 커지니 천년기가 종결되고 그 후 에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진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된다고 하는데 재림과 부활과 심판이 복잡하다.
그렇다면 무 천년이란 언제 생겼느냐? 천년 전기 론이 있었을 때 무 천년이란 말은 없었다. 다만 예수님의 재림,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된다는 것을 믿고, 전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세대 론과 천년전기가 일어나서 자기들의 이론을 주장하니 성경적으로는 천년 기가 없고 무 천년이라고 반박하자 자연스럽게 무 천년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무 천년이란 2천년 공교회의 신앙고백에 있어서는 종말론에 한번의 재림, 한번의 부활, 그리고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현재의 하나님의 영적 왕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직접 넘어간다고 주장한다. 즉 실제적인 숫자로 천년 기간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복음의 권세를 천년왕국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의 표준적 종말론과 로마교회의 종말관도 무 천년기이다.
3) 천년기설의 배척 이유
천년기론은 공교회의 태도가 아니다. 공교회의 고백도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공교회는 무 천년을 고백해 왔다. 그래서 교리사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세파와 세속에 동화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날 작은 분파들에 의해서 천년 기가 시작되었다. 칼빈도 천년 기에서 주된 요점이 무엇이냐? 에 그리스도의 통치는 영원한데 천년기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지상 재림 천년에 한계를 두는 것은 불가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천년기론에 의하면 구원에 실패해도 또 한번의 기회가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은 자들을 다시 구원하시는 것이 중요하느냐? 말씀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이 중요하느냐? 그리고 많은 말을 하면 그 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오해가 있을 것으로 알아 더 이상 논하지 않았던 자가 칼빈이다.
배척이유
(1)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다. 천년에 국한함이 비성경적이다. 그리스도의 출생과 수태 때 천사가 그의 아비 다윗의 왕국을 그에게 주리니 그의 나라가 영원하리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다. 그 왕권에 사단이 끼어들어 훼방을 놓고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도 다스리신 예수님의 통치를 알아야 한다. 처음 천년 기를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 왕권을 천년에 국한했다. 이단이란 시비를 통해 깨닫고 수정을 했고, 그 수정된 천년 기는 지금 우리처럼 그리스도의 왕권아래 있음을 고백한다.
(2)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신적 통치가 천년 후에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들어간다는 이론의 반박.
그들에 이론에 그리스도의 왕권이 무너진다 하니 불가하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오셔서 다스린다고 하는 말은 신적인 직접적인 통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신적 통치가 적그리스도의 세력인 피조물의 세력에 의해서 창조주의 통치가 중단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 어찌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피조물의 대항에 의해서 중단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천년 기는 바르지 않다.
(3)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어서 낙원의 표준에 부착할 뿐 아니 라 그 영광을 능가한다. 그런데 천년 전기 론에 의하면 여기서 살다가 또 다른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다른 처소로 옮겨진다고 하니 이것이 불가하다.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니 이 회복된 장소가 우리의 거소인데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천년기가 바르지 않다.
(4) 세대 론과 천년기론은 피 제사의 복귀를 말한다. 왜 피의 제사를 복귀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속하시는 일이 세대론 자들의(스코필드 7세대 구분) 주장처럼 1. 무 흠 시대라는 처음 낙원에서는 선악과로 2. 양심시대인 에덴 동쪽에서 정부가 출현하기 전까지 그 때는 양심에 의해서, 그래도 안 되니 3. 니므롯 때부터 아브라함의 소명 이전까지 4. 인간 정부에 의해서 정부의 세력으로 한번의 시취 기회를 주어 구원에 이르게 하고, 그 후에는 약속, 언약 시대이기 때문에 5. 아브라함의 약속 때부터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까지는 약속을 믿음으로 약속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고, 약속을 믿지 않아 실패해서 시내 산 언약을 주었고 그것이 율법시대이어서 그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을 얻는데 그 율법에 실패하니 마지막에는 6. 은혜시대라 해서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7. 마지막에 천년 왕국이 오는 것이다.
위의 7세대 론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짐승이라는 피의 제사로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단번에 피로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역사는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세우신 계획을 준비하시고 성취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을 준비하시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는 어디에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스라엘은 그 사명을 다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스라엘과 우리가 동일한 가운데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궁극적이요 또 종말론적이다. 다른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큰 구원이 없는데 천년 전기 에서는 피 제사로 복귀한다는 이론은 예수 그리스도 구속이 간주곡으로서 은혜시대에만 효력이 있고, 재림하시면 그 때는 또 왕국 복음을 전파하여 유대인의 그 제사법으로 피 제사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다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이 택한 백성이니 언젠가는 돌아올 것으로 보아야 하지만 피의 제사라는 도식은 확실하게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내신 유일한 구원이고(엡 1:3-4) 마지막 구원이다. 피 제사의 복귀는 이단적인 이론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헛되이 하고서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천년기론을 정당한 것으로 받을 수 있는가?
2. 천년 후기설과 그 비판
1) 천년 후기 설
천년 왕국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발생한다. 천년왕국은 현재 우리가 사는 복음시대에 나타난다. 두 종류의 설이 있다. 점차적인 세계 복음화로 복음의 능력과 권세가 개인의 영혼뿐 아니라 사회제도와 조직을 변화시켜 복음의 지배가 이루어진 풍부한 영적 축복의 사회적 시기가 마지막에 천년 동안 전개되고 그 다음에 사단이 쫓겨 가고 짧은 기간의 배도, 악의 세력과의 무서운 싸움으로 최종적인 투쟁이 있은 다음에 그리스도의 재림, 일반적 부활 최후 심판 등의 사건이 동시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사회를 복음의 능력으로 개조시켜서 정말 의와 공평히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 복음주의하고 같은 것이다. 그래서 라우신 부시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사회 복음주의가 천년 후기 설을 주장했다. 그 때에는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경제문제만 기독교적으로 해결되면 종말이 올 줄로 알았다. 복음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며 모두 사랑이 많아 돕기를 쉬지 않고, 외국에 보조를 하고 살기 좋은 미래를 만들어가니 천년 후기 설을 좋아 하게 되고 신학자들도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호소력을 얻었다. 그러나 오늘 날은 사회 진화론으로 흘러 천년 왕국이 복음 전파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 도입되지 않고, 교육과 사회 개혁을 통하여 인간 스스로가 새 시대를 가져온다고 한다. 결국 의와 화평이 지배하는 축복의 시기가 천년이라는 것이다.
3. 비판
1)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
이스라엘 자체를 택하시고 세계의 지배권을 주고, 세계의 영화를 다 보게 함이 아니다. 이스라엘로 하나님께 봉사케 하고 택한 그릇이기 때문에 더 잘되는 것을 세계만방에 과시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구원의 섭리에 의해 봉사자와 조력자인 도구로 서 있고, 세상의 구원자로 오실 예수님을 출산할 어머니와 같은 모태와 태반으로 삼은 것이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세상의 구원자를 보내기 위함과,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섭리와 구속 경륜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출산과 세계를 향한 복음전파는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다한 증거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명을 마친 이스라엘을 버리시느냐? 사명이 끝났기 때문에 버리신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오셔서 특권이 없어지고 복음에 있어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똑 같이 구원의 대상으로 서 있는 것이다.
2) 구원이란 복음을 믿음으로 성취된다.
예수님의 재림 때 그 영광의 광채를 보고 이스라엘이 회심한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권세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맞지 않고 섭리에도 전적으로 배치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능히 구원하시기 때문에 어떤 세력을 보이시거나 물리적인 행사에 의해서 구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파는 유다에게 보여 주셔서 사랑하는 제자의 배신을 안보시면 좋겠으나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재림을 보고 그 때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의 복음이 사람을 구원하는데 충분한 능력이 아니란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로 17절의 말씀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들을 이 복음으로 구원하시고 다른 것으로 하시지 않으신다. 나사로를 심부름시키려는 부자에게 모세와 선지자라는 복음으로 구원된다고 분명히 하셨다.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를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3) 그리스도의 통치
천년 동안 예수님의 권세로 직접 다스리시는데 직접 신적인 통치를 하는 그 일이 사단과 그의 군데에 의해서 악한 자들, 즉 피조물들의 공격에 의해서 창조주의 통치가 끝나는 것은 이론적 이단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비 신앙인의 자세이다.
4) 영화된 성도
영화한 성도와 죄인이 어떻게 죄와 죽음이 날뛰고 있는 지상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을 못한다. 영화된 성도와 죄인이 어떻게 살 수 있느냐? 우리는 영체가 된다. 불신자들은 계속적으로 우리의 현재 상태로 의식주가 필요하다. 그들은 회사를 다니며 결혼도 하고 살아야 되는데 우리는 같은 집에 살면서 하나는 영체로 하나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제자들도 실망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이 이런 것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니 같이 있어도 될 줄로 알았다. 그런데 다른 방법으로 대해 주시고 다른 방법으로 같이 계시니 이해를 못한 것이다.
5) 보편 부활
의인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 천년의 간격과 세 번, 네 번의 부활과 심판을 말하나 성경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말하고 심판의 일시성과 동시성을 말한다. 천년 기간을 주장한 자들은 의인은 부활하고, 성도만 변화하며, 악인은 불변한다고 가르친다. 양과 염소를 고르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하신다. 모두를 한 번에 그것도 종말론적으로 행하신다.
6) 교회는 다윗의 왕국의 회복
선민들은 다윗 왕국의 영광스러운 재건이 메시아의 날에 이루어진다는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가 심판과 구원의 완성이 아닌 지상적이고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오셨으나 유대인들이 거절하자 재림 때까지 연기하면서 구약의 선지자도 모르는 교회를 간주곡으로 세우셨다는 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초림도 인류 구원을 위한 궁극적 사역이 아니라 유대나라의 회복이 그 근본 목적이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길이다. 그러므로 잘못되었다. 민족의 왕국이 아니라 신령하고 우주적인 것이 신약의 계시이다.
야고보가 이 백성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편입하는 것으로 다윗 왕국의 회복을 말할 때 분명히 아모스와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을 인용해서 “내가 후일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키리니”라고 말 할 때에 그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킨 것을 야고보가 사도행전에서 해석하기를 예루살렘 땅에 옛날의 영화를 구하는 그와 같은 지상 왕국의 회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에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방이 편입됨을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키는 것으로 해석을 했다. 우리가 어떻게 사도의 해석을 넘어갈 수 있는가?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궁극적인 사역인데도 불구하고 유대나라와 그 지상적 회복을 목적으로 이해를 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궁극적인 혹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니 그릇된 것이다.
7) 복음의 권세
교회도 간주곡으로 재림 때까지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복음으로는 대대적으로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재림을 보고 메시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직접통치를 위한 재림으로 인류가 대대적인 회심을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의 복음은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적이고 일시적으로 만드는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
8) 이 땅은 선민과 새 인류의 영원한 거소로서의 창조이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 땅에 영원히 거하고 교회는 저 공중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창조가 곧 우리의 거소이다. 구속은 창조의 회복이라고 늘 강조했는데 우리 몸만 회복이 된 후 다른 곳으로 가고 이 땅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마치 겨처럼 날려버린다고 했으니까 없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진다고 하니 모두 없어진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 창조를 그렇게 완전히 정화하시니 그 과정이 그와 같다는 재창조를 말한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영화된 인류가 살기에 합당한 거소를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과 지구를 흔적도 없이 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에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했다. 즉 창조의 일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는 것이다. 만물을 새롭게 하는 일이 이미 끝났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에서는 모든 일이 끝이 났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장막이 여기에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러면 천국이 저 위에 있는데 어떻게 여기에 같이 임하는가? 그 때는 공간의 제약이 철폐되니 여기에 하나님의 성전이 분명히 하늘에서 내려온다. 지금 현재의 천국하고 지상의 도성하고 합치는 것이다. 두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진다.
9)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력
피의 제사 복귀는 그리스도의 제사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든다. 피의 제사에 복귀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무너뜨려야 가능한 것이다. 구약의 제사는 원본이고 예수님의 제사는 간주곡이라는 이론이다. 이는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근본에서 무너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효력이다.
10) 세속적인 천년기의 소망
어거스틴은 천년기설이 육욕적이고 현세적이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고 해서 배척했다.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속아서 천년 왕국, 잘 먹고 잘사는 영광을 보고 불신자들을 다스리고 그렇게 하자는 것인데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성경을 다시 쓰기 전에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알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종말론적이고 궁극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구원에 필요한 계시도 궁극적이다. 물론 종말에 가면 그것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새로운 성경이 다시 기록되지 않는다. 이상한 것은 위와 같이 무지한 말들과 설들이 왜 우리 가운데 있고, 그리고 연구만 하는 석학들에게 남아 있는지 참으로 묘한 일이다.
4. 여호와의 증인 지상천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의 비교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이 하나님 나라가 된다면 여호와 증인과 무엇이 다른가?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온 세상이 다 받으면 이라는 조건이 있다. 모든 사람이 받으면 그때부터서 영생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불가능을 시도한 것이다. 맞지 않은 것은 어떻게 모든 사람이 복음을 모두가 받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택한 자만이 구원에 이른다고 하신다.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열심히 사는 것, 규모 있게, 질서 있게, 열정적인 전도와 새신자반의 태도는 본받을 만하나 그들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여호와의 증인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때부터 세상이 영생하도록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때가 차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완전히 정화하신다. 그러면 죄악이 완전히 제거되고 정말 새로운 생을 살게 된다.
5 계시록 20장의 해석에 대한 문제(천년왕국)
1. 성경 해석의 원리
성경을 해석할 때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전체는 부분에 의해서, 해석하고 조명한다. 불분명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이 원칙이다. 또 상징적으로 기록된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산문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계시록 20장 1절로 6절은 상징적으로 하늘의 광경을 말하고 있다. 지상적이나 국민적인 팔레스타인에 있게 될 왕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20장에서만 6번이나 천년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할 수가 있느냐? 며 천년 전기 론의 대표적반박이다. 그러나 횟수에 있지 않고 상징을 말할 때 상징적이라 한다.
2. 계시록의 숫자에 대한 해석
1) 144,000의 해석
그렇다면 144.000과 같은 원리도 글자대로 해석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리 민족만 해도 천만의 성도이다. 그리고 기독교 2천년 역사에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모두 구원을 받지 못했나? 박태선의 구원론은 시온성이란 자기 아래 144.000이라고 했다. 한국교회가 괘씸죄를 적용하면서 상징적으로 보는 눈이 뜨인 것은 이단이 도와준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숫자라고 하는데 그들이 국민적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144.000으로 되겠는가? 어림도 없다. 144.000은 구약의 12지파를 상징하고 신약의 12제자로 표시한 교회의 대표에 10의 완전수 세제곱을 한 완전한 하나님의 구원 수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곧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의 총수를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된다.
2) 24보좌의 해석
하늘나라에 보좌가 24개 밖에 없다면 그 많은 성도들이 어디에 앉을까? 천국에 들어가기만 해도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고생시키려고 의자를 없게 하신 것일까? 아니다. 구약의 교회를 대표하는 12하고, 신약교회를 대표한 12 사도를 말하기 때문에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대표를 24 보좌로 말씀하신다. 곧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총수가 24 보좌라 한다.
3) 666의 해석
지금도 문자대로 받은 사람이 있고, 혹은 컴퓨터가 적그리스도로서 666이라는 자가 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레네우스가 666을 해석할 때 적용될 수 있는 자가 많다고 했다. 느브갓네살, 초대교회의 네로 등이 있다. 현대신학에서는 히틀러, 얼마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키신저가 666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아랍과 이스라엘을 화해시켰기 때문이다. 아랍은 이스라엘의 적이니까 멸절해야 되는데 화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666의 해석에 대한 확실한 정답은 모르지만 육일 창조로 시작되고, 진행된 후 창조가 완성될 때 악의 세력을 대변한 상징적인 숫자가 666이라고 말한다.
3. 계시록 20장의 해석
1. 사단의 결박과 감금
본문은 천사가 하늘에서 쇠사슬로 사단을 결박한다.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도 쇠사슬로 묶어 놓았지만 끊어버렸다. 헐크만 돼도 끊어버릴 것이다. 사단은 얼마나 힘이 강하겠는가? 제일 강한 쇠는 스텐이고 불에 녹지 않는 쇠는 없다. 하늘의 제철소에서 가장 강한 쇠를 만들어 묶는다고 하자, 사람은 귀신들린 사람이라 묶는다고 하지만 사단은 영물인데 어떻게 묶겠는가?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상징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특히 숫자와 나라들에 관해서 모두 짐승으로 표기함은 로마의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이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나라들을 짐승으로 표시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이 정확 무 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니 글자대로 믿고 이해하고 해석한다. 함부르크에 가면 미가엘 교회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사단을 묶지 않고 천사 장 미가엘이 방패를 들고 창을 잡고 사단을 짓밟고 있다. 그런데 그 방패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그 창도 십자가 모양인데 헥토르가 사용했던 유명한 창으로 사단을 누르고 있다. 미가엘과 사단에 대한 무지이다. 미신적인 사단의 놀음에 속을 때 교회에서부터 속은 것이다. 사단의 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의 권세가 깨뜨려질 때 사단을 정복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방패와 창이 아닌 피를 조각해 놓을 것인가?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능력보다 본체론적인 예수님이 사단의 무장을 해제한 것이다. 백번 피를 흘려 죽어 주셨어도 예수님이 안계시면 사단은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미신 행위에 속지말자. 예수님이 계시고 그 피의 권세는 사단으로 더 이상 하늘에 있지 못하게 하니 그는 쫓겨난 것이다. 그러면 사단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모른다. 예수님을 영접한 심령에 사단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거소가 불분명함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느냐의 질문과 같이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민족들을 미혹하니 천년동안 감금함은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권세로 사단의 권세를 제재하는 것을 말한다. 그 기간이 얼마동안이냐? 문자적인 천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동안은 사단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며 교회를 전체적으로 박멸하지 못한다.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천년동안이라는 기간은 피를 흘리시고 사망권세를 이김부터 재림 때까지 무저갱에 갇혀 있기 때문에 만국을 미혹치 못한 것이다. 무저갱이란 끝이 없는 함정인데 어디에 준비해 두셨을까? 천년동안 내려가는데 어떻게 가두었을까? 영체도 머리끝이 쭉 올라가고 무서운 곳의 함정일까? 모두 세상기준으로 보여준 상징이다. 사단은 만국을 미혹할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복음의 권세로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 교회를 박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천년 왕국의 의미이다. 그러면 묶는 것은 무엇이냐? 물리적인 사슬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의 권세이다. 세대 론과 천년전기 론의 맹점이 공포 불안을 안겨주는 심판을 말하나 공포를 이기는 복음에는 약하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통치의 동참
그리스도의 왕권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이냐?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목 베임 받은 자들로 순교자들은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인데 이를 첫 부활로 말한다. 그리고 거기 본문에 분명히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지, 부활한 자들이 아니다. 그러니 아직 그들이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지 산자의 상태가 아니다. 그들의 영혼이 살아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한다. 둘째는 성도들의 경우인데 우리가 지금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어떻게 역사해서 좋아졌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기도하면 세계 역사가 변한다. 소원을 성취해달라고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예정해 놓으셨는데 왜 기도 하는가?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을 왜 기도하는가? 급하니까 한다. 좀 느긋해 져서 인내심을 길러야 되는데 성격이 급해 기다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기도는 안 해도 될 것과 빨리 달라는 것이며, 내년에 받을 것을 앞당겨 받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듯이 역사하신다. 예정과 경륜과 어떻게 조화 하는지는 지금 여기서 생각할 수 없고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역사하신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일에만 상관해서 기도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3.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 나오는데 첫째 부활은 무엇이고 두 번째 부활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무 천년 자들이 천년 전기론 자들에게 많이 공격을 당한다. 왜냐하면 둘째 부활은 글자대로 둘째 부활로 받는데 첫 부활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1. 죽은 자들 특히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들어가 동참하는 것이다. 2. 중생을 첫 부활로 한다. 천년기간 동안 첫 부활이 있고 끝나고 마지막 두 번째 부활이 있는데 여기 중생을 부활이라고 하니 영해를 한다고 비난을 받는다. 영해한 다는 말은 들어도 이는 바른 신학인 것이다.
4. 1.000년
천년이란 10의 완전수를 세 번 곱한 것이다. 즉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복음이 선포되는 기간을 말한다. 골로새서에 보면 그 권세 잡은 자들이 피 때문에 모두 발아래 복종케 했다. 144.000도 문자대로 받고 그 뒤에 허다한 무리를 셀 수도 없으니 셀 수 없는 것이 상징적이니 허다한 무리를 무시해야 될 것이 아닌가?
5. 만국을 미혹한다.
사단이 풀려난 다음에 만국을 모아 미혹한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를 박멸하도록 진행된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도 지금 전 세계적으로 전체의 인류가 단합해가지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멸하려고 하는 일은 아직 진행되고 있지 않다. 숫자를 보면 기독교가 많은 것 같아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모두 무늬만 같은 기독교라 자기의 무늬가 드러날까 봐 위장하려고 언제 어떻게 핍박하면서 사단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기독교를 향한 대적은 이방종교가 아니라 기독교 안에 있는 것이다. 성경을 잘 알고 종교 의식인 예배당에서 예배만 잘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변화되어야 한다. 시대가 어려우면 계시록 강해가 많고 그 여파는 곧 재림 하시니 예수님 만날 준비만 하는 성도가 있다. 우리들의 마음과 삶 속에서 천년 기간에 대한 소망을 빼버려야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온갖 보석의 집으로 기복신앙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언제 섬기고, 예수님께 언제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의 심장으로 살 것인가?
6. 요약
천년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복음의 권세가 성행한 시기이다. 사단을 묶을 강력한 쇠사슬은 예수님의 피와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쇠사슬은 복음의 권세를 말한다. 즉 사단이 무저갱에 감금된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의 권세로 사단을 무장으로부터 해제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왕 노릇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상에서 다스리고 기도와 도고로 그리스도의 통치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부활
1. 부활의 횟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보편적인 부활이다. 모두 부활을 한다. 차등이 있어 먼저 부활하고 뒤에 부활하고 그렇지 않다. 예외 없이 부활을 한다. 부활을 몇 번에 나누어 함이 아니다. 천년 기 시작하기 전에 부활하고 중간에, 마칠 때 부활함이 아니다. 한번의 부활로 모든 부활이 이루어진다.
2. 부활의 의의
지금은 창조의 회복이지만 부활되면 창조의 완성이다. 즉 부활이 무에서 새롭게 창조로 된 것이 아니라 죽었던 것이 새로 사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구속이며 미완성에서 완성이 부활인 것이다.
3. 부활의 성경적 증거
부활의 확실성은 그리스도의 계시와 함께 왔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부활하셨다. 구약에는 포로 후기 선지자들 대표적으로 에스겔과 다니엘에 의해서 개인 부활이 등장한다.
4. 부활의 보증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기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성도의 부활의 보증인데 그가 몸의 머리로서 부활하셨고, 머리는 몸의 부활의 확증이며 필연적이다. 전신 마취에 있어서도 머리에서 말초신경까지 모두 깨어난다(조금 늦게 깨어나는 기관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부족하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출발한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 그렇다면 그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 값으로 죽어 주시고 죽은 자 가운데 계실 때 예수님을 살리신 영이시다. 즉 나를 부활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이다. 그리고 천국까지 확실하게 인도할 보증으로 오셔서 계신다(부활과 구원의 보증으로 계심). 바울은 부활을 교훈할 때 예수님께서 첫 열매이요 마지막 전체 추수를 보장하며 그 보증금으로 우리 안에 계심을 말한다.
5. 부활의 성질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보증은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이 있을 것을 말 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신체의 구속을 포함한다(죽으시고 장사되어 무덤에 들어간 동일한 몸이 동일하게 부활하셨듯이 우리의 부활도 신체적 구속이 포함되며 그리스도께 붙은 자들의 신체적인 부활의 보장이다).
몸과 인격의 동일성을 유지하나 그 원소들의 동일성은 아니다. 현재 우리의 몸도 세포가 7년마다 완전히 교체되어서 7년 전의 추억을 남겼던 세포는 없어진 가운데 동일한 기억을 가진 몸으로 남아 있는 것이 참고가 된다. 그렇다면 부활할 때 얼마나 성숙하느냐? 지적 도덕적 능력이 완전 성숙에 이른다. 얼마만큼 올라가느냐?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에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요한이 죽은 것 같았던 상태까지 영화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부활하면 인격과 몸의 동일성 때문에 서로 식별할 수 있고 소개가 없어도 앎이 발생하며 몸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한 성질로 변화되듯이 영혼도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에 합당한 영적인 능력을 갖게 된 높은 상태의 갱신이 이루어진다.
6. 부활의 종류
옛날에는 영혼의 불멸을 믿었으나 현대인들은 죽음이 무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플라톤이 주장한 철학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으나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은 죽음은 무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죽으면 모두 끝나는 것이니 여기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다. 안식파와 럿셀파도 악인의 전적 멸절을 믿어 악인의 부활을 부정한다. 그리고 선인의 부활을 말함이 상을 받기 위해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의 부활은 영생을 위함이고 악인의 부활은 영벌의 심판을 위한 것이다. 즉 의인은 구속과 영화의 행위로 그리스도와 부활체가 같아져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영생할 수 있는 상태이다. 악인은 자기 영과 몸의 부활로 극형을 초래하게 되는 수치의 부활이다.
7. 부활의 시기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 및 세계의 종말과 때를 같이 한다. 최후 심판 직전에 있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과 연결된 한번의 부활이요 한번의 심판이다.
이중 부활 설: 천년 전기론 자들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 사이에 천년동안의 간격이 있다고 믿는다. 세대 론의 부활은 예수님의 공중 재림 시, 7년 후의 지상 재림 때, 천년 통치 기간과 천년 통치가 끝날 때 등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장 23절로 28절에서 바울이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이고 그리스도 안에 죽은 자들이 더욱 복을 받을 상태에 있음을 논리적인 순서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4절로 18절을 인용하면서 부활이 몇 번 있는 것으로 말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순서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비중이 큰 것부터 시작한다. 즉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자들 중에 사도들, 순교자들이 먼저 부활할 것이라고 우선권을 말하는 것이다. 계시록 20장 4절과 6절에는 목 베임을 받은 자들로 되어 있다. 부활한 자들로 되어 있지 않고 목 베임을 받은 자들로 되어 있다. 부활이 아니고 아직 죽은 자의 상태에 속해 있다. 즉 육체의 부활이 아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서, 이것이 첫째 부활인데 천년 동안 천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천상의 장면을 지상의 장면으로 그리고 환상을 이 땅위에 일어난 일로 보면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왕권의 통치가 지상의 정치적 통치가 아니라 복음의 권세로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이 개혁신학의 가르침은 금세기의 최고의 학문이다. 일회적 보편적 부활을 놓치지 말자.
최후의 심판
1. 최후 심판의 근거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세상을 종말 할 때에도 하나님 앞에 언약의 체결자로서의 책임을 모두 보고하게 되어 있다. 언약의 책임자로서의 계약을 맺었으니 그 결말을 보고 해야 한다. 자기 생을 보고할 책임이 있다. 표준이 나오지만 심판의 근거는 바로 이 언약의 체결에 있다고 해야 맞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조직신학자는 없지만 이것이 바르다. 또한 심판이 있을 것을 양심이 증언 한다. 왜냐하면 언약 체결 때문이다. 모두는 죽으면 심판을 받는다. 이는 인간 심리의 깊은 확신의 하나이다. 구약에서도 이것을 말하며 신약에 더욱 명백하다. 주변에서 왜 이럴 때 하늘의 심판이 없을까? 의 대답은 현세의 심판이 없는 것을 보니 마지막 심판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해야 한다.
2. 최후의 심판과 그 성격
부활한 자들은 심판을 받기 위하여 부활한다. 그리고 심판이라고 하는 뜻이 항상 형벌만으로 생각하는데 그러한 것이 아니다. 심판은 형벌을 받을 자와 축복 받을 자를 나누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과 함께 심판이 진행된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구속을 완성하시고, 그 구속으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형벌하심으로 구원이 종결된다. 더 이상 구속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며 믿는 것이 아니고 끝이다.
3. 심판자와 그 보조들과 심판의 주체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가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자됨을 위하여 심판권이 주어졌다고 말씀하셨다. 곧 구속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심판주로서 인류의 역사를 종결한다. 이 명예는 그의 속죄 사업의 성취에 대한 보상으로 예수님께 귀속되었으며 이 것도 예수님의 승귀의 일부가 된다. 성육신과 구속을 이룸으로 받으신 대권이다. 이 대업을 천사들이 참여 하며 성도들도 어떤 부분과 역할을 담당할 것 같다.
4. 심판의 대상
모든 사람들이 부활과 동시에 선함과 악함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 그 때 최종적인 선포 전에 죄의 고백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도들의 궁극적인 칭의가 순식간에 선포된다. 심판대에서 받은 칭의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받았던 칭의로서 최후 심판에 받을 칭의를 미리 앞당겨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것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갖는다.
최후의 심판은 개인의 전 생활뿐 아니라 민족적 공과도 모두 계산해서 심판을 받는다. 바울은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할 줄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느냐고 했다. 그러니 사단과 악한 천사들, 악령들, 귀신들이 심판을 받을 때 우리도 동참하여 심판의 정죄를 한다. 선한 천사들도 우리들에게 삼판을 받을 것인가? 그 때 종이 될 서약일지 모른다.
5. 심판의 시기와 기간
전 인류와 전역사가 심판을 받기 때문에 최후 심판은 세상의 종말에 부활과 함께 부활 직후에 이루어진다. 천년 전기 론과 같이 두 번 그리고 천년의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의 그것도 길지 않은 시간에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미 부활할 때 영광에로 부활과 사망과 지옥의 수치에로의 부활이 모두 구분되어졌다. 하나님의 전능이 부활할 때 절대 형벌과 상급의 등급을 동시에 정하신 것이다. 세대론 자들과 같이 몇 년 혹은 몇 십년동안 심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교리를 모르는 결과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심판의 시기가 재림하고 부활 직후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입되기 이전이지 계속해서 오래 동안 진행됨이 아니다. 즉 시간이 영원하고 통합되기 전에 심판하시기 때문에 흐름이 정지된 상태에서 천년이란 일 년의 천배라는 개념과 의미가 없다.
6. 심판의 표준
성도들과 죄인의 심판 표준은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다. 이방인은 자연법에 의해, 유대인은 구약 계시에 의하며, 신약 성도들은 이 계시와 함께 복음의 요구에 의해서 된다는 것은 의문이다. 이러한 것은 세대 론의 잔재가 들어옴이다. 궁극적인 모든 심판의 표준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때문에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이복음의 선포가 있다. 즉 옥의 영들이 알게 됨을 말 한다.
7. 개혁신학의 윤리
오늘날 성도들의 잘못된 생각은 죄를 많이 범해도 회개하면 된다는 것이다(루터교회의 주장인데 성화는 말하지 않는다). 모두 믿음으로 용서를 받고 또 범하고 은혜로 구원을 받으니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 루터 교는 칭의가 강조되니 용서만 강조되고 죄를 이기는 힘을 강조하지 못한 맹점이 있다. 개혁교회는 모두가 그리스도에게로 심어 졌다. 그리고 그 거룩한 생명으로 산다. 때문에 우리의 생활이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이종되어 졌고, 그 곳에 뿌리를 박고 그의 지체로 접목되었다. 이것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명으로 살고 연합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의 원천에서 그리고 거룩한 터전에 살면서 죄를 이기고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 개혁교회이다. 때문에 개혁교회에서 윤리가 강조된다.
계시록 21장 새 하늘과 새 땅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질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계신 장소도 특정한 곳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다(눅 17:20-21). 본장에서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성이 지극히 귀한 각종 보석으로 꾸며지고 열 두 진주문과 그 성은 정금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성이 아님을 볼 수 있다. 계 21장 9절에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 준다는 천사가 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새 하늘’ ‘새 땅’이란 불순종하는 자들이 없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사단과 죄와 사망이 없고 악의 흔적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이다. 이사야 11장과 65장 내용대로 지상의 낙원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치장은 어린 양의 아내의 영적 모습이다. 온전한 성도들의 모습은 하나님과 함께 영광스럽게 사는 것이다.
계시록 22장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계 22:1-2; 겔 47:1-12 )
본장의 생명수 강이나 에스겔의 생명수 강이 그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으며 또 그 나무가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의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에스겔서에는 약 재료가 되리라고 했다. 생명 강과 생명나무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참신한 하나님의 말씀과 신령한 양식을 전하는 사명을 뜻한다. 요엘 3장 18-19절에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고 했다. 요엘은 이러한 일이 만국을 심판하실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일어날 사건이다. 그러니까 요엘 3장 18절과 19절은 심판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흘러내릴 생명수 강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요엘이 애굽은 황무지가 되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라고 했을까? 에돔이나 애굽이 왜 말세에 등장할까? 많고 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있는데 근본도 없는 나라 에돔이 나타나는가? 이는 에서의 별명으로서 믿음의 조상을 모시고 태어났지만 그가 팥죽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갖는 특권을 우습게 여기고 장자의 명분을 판 대가로 하늘나라와 장자의 기업에서 탈락된 저주의 모형이다(히 12:16). 그리고 예언서에서 암시적인 애굽은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했다. 즉 하나님을 알고 교회생활을 하던 사람이 변질된 모습을 은어로 애굽이라 한다. 이런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도 선민 가정의 장자의 명분을 우습게 여기며 배로 하나님을 삼는(빌 3:19) 배금주의로 혼합된 그들은 새롭게 될 수 없고 황무지가 된다는 교훈이다.
그리고 애굽은 계시록 11장 8절에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을 영적으로 말할 때 애굽이라고 한다.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8)” 그러므로 세상 물질을 좋아하는 축복사상으로 혼합주의가 된 애굽이라고 하는 말세 교회는 황무지가 되고 황무한 들이 된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된다는 내용을, 에스겔서는 생명수 강이 흘러서 강이 흐르는 곳마다 번성하며 모든 생물이 살고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지만(겔 47:8-9)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라(엘 47:11)고 하신 것이다.
에스겔서는 “진펄과 개펄”로 표현하셨고, 요엘서는 “애굽과 애돔”으로 상징하므로 육지에서 온갖 잡탕이 썩어서 모인 집합체인 것이다. 이렇게 세상 물질로 혼합된 혼합주의의 교회는 생명수 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다시 살아나지도 못하고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는 사해 바다와 같은 소금 땅처럼 된다는 말씀이다.
성도의 겉옷 두루마기(22:14)
상징적으로 말씀하시는 성도의 옷을 크게 두 종류로 말씀하였다. 이사야 61장 10절에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임하시며 의의 겉옷으로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의 말씀에서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이 강조되었다. 구원을 받은 자가 갖추는 옷 그리고 구원을 받은 자가 의를 갖추는 모습으로 말씀하셨는데 그 사실을 더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의의 옷은 구원의 옷 위에 더하여 입는 겉옷이라고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옷을 “두루마기”라고 한다. 이 의의 겉옷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다. 이 옷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예화에서 잔치 집에 온 손님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을 했는데 예화에 보면 그를 결박하여 바깥 어둠에 내어던지게 한 것이다(마 22:2-13). 이 예복이 겉옷으로 의의 겉옷을 말한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가 입혀지지 않으면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입하지 않음을 말한다.
의의 겉옷 두루마기를 빠는 시기
재림 메시야이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마 25:5)라고 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슬기롭다고 하는 처녀와 함께 똑 같이 잠에 깊이 빠져 있었다. 신랑이 왔다는 소리에 깜짝 놀란 신부들이 등불 소동을 벌인다. 이 때에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했고,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는 결론이다. 생명수 강이 가는 곳마다 소성함을 입는다는 말씀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의 역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신랑이라 맞으라, 할 때 각인이 메시야를 볼 뿐만 아니라 그 메시야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라고 했는데 누가 찔렀느냐? 소돔이라고 하는 교회와 애굽이라고 하는 변질된 교회가 그를 찔렀으며 한다. 그 찌른 교회가 구름 타고 오시는 재림 주를 볼 것인데 재림 전에 회개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요엘 2장에 큰 회개의 운동이 있은 후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주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요엘 2:28-32).
구원의 문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됨이 문들을 통하여 얻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문이 되심을 알고 있다. 요한복음 10장 7절로 9절에 “그러므로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 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심 같이 구원의 문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그런데 왜 구원의 문들이라고 밝히시면서 많은 문들이 있다는 것일까? 첫째 구원을 성취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오 둘째 예수님께서 성취하신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들어오도록 협력하도록 부르신 사명 자를 가리킬 때 구원의 문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사야 12장 1절로 3절에 “그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저네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 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위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려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 리로다”의 말씀은 구원을 얻은 우물이 하나가 아니라 “구원의 우물들”이라고 복수로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2장 13절과 17장 13절에는 주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생명의 물인 생수를 주시는 분으로 요한복음 4장 4절로 14절에 말씀하셨다. 즉 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권세를 문들이라고 하는 말세 사명자의 문들을 통하여 들어가며 구원의 우물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계시록 11장에서는 “두 증인” 또는 “두 선지자”로 말씀하셨고, 오바댜 1장 15절에는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인 심판 때를 배경하고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끝맺는 부분에 “구원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복수를 사용하여 구원자들이라고 하신다. 21절에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위에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는 구원자들을 보게 되는데 구원자들이 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그 성에 들어갈 권세를 문들을 통하여 얻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87편 1절에서 4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 하시는 도다”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고 곤란하다. 보석 같은 것을 사랑하지 왜 문들을 사랑할까?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그의 사명자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다.
성밖에 있을 자(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15절 말씀에 개들이 먼저 성 밖에 있음이 이상하다. 일곱으로 분류했는데 모두 사람이고 ‘개’라는 동물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사람보다 수천마리의 개들을 첫 번째로 말씀하셨을까? 개라는 동물이 왜 등장할까? 의문이다. 성경에 서 제일 나쁜 표현을 했던 동물이 뱀과 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몸에 좋다는 것이 아닌가? 보신탕으로 수난을 당하는 개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먼저 성밖에 있을까? 본문의 개들은 몰각한 목자들을 말한다. 이사야 56장 9-12절에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그 파수꾼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 느니라”라고 했다. 이 개들은 몰각한 목자들, 즉 진리를 분명히 깨닫고 바로 이해하는 일이 없는 무지한 목회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런 은어로 인봉했기 때문에 쉽게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윗 왕도 말하기를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라고시편 22편 16절에 말했다. 또 22편 20절에서는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 하소서”라고 했고 기도에서도 성도를 괴롭히는 사단의 세력의 무리들을 개들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개들이 첫 번째로 성밖으로 나가는 순서이다.
신부 시대(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여기 신부가 생명수를 받으라고 외치고 있다. 구약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큰 소리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고 하였는데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렘 2:13; 17:13) 생수를 주시는 역사를 하셨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영혼의 생수를 주시는 분으로 말씀하셨다(요 4:12-14; 요 7:37-38).
이렇게 말세에 성령과 신부가 생수를 주는 때가 온 것인데 이는 영적인 안목으로 볼 때는 성령과 신부가 역사하면서 생수를 주는 것이지만,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는 성령님께서는 영체이므로 보일 수 없기 때문에 신부인 사람이 생수를 나누어 주는 때가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영적으로 표현한 성경이 있는데 요한계시록 14:6-7절에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더라.”라고 말씀하셨다.
심판하실 시간이 다 되어가는 그 무렵에 공중에 날아가는 천사가 나라와 각 민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 영원한 복음은 성경 전체를 통해 이곳 한 곳에만 나온다. 그런데 이 영원한 복음이란 역사이레 한 번도 전해진 사실이 없고 심판 직전에 그 천사를 통해서 이 세상에 처음으로 전해질 복음이다. 이 영원한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성령과 신부가 주는 생명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수천 년간 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그 때가 바로 지금 문 앞에 다가온 것이다. 재림을 알리는 가슴 떨리는 복음을 기다리면서 말씀 위에 굳게 서고 오직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에 앞장서서 죄를 이기는 면역성으로 신부로 단장하는 성역 역행되는 모든 것을 끊고 아멘 오시옵소서를 외치면서 칭찬을 기대하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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