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료

조직신학(구원론)

안명애 2014. 9. 16. 20:11

組織神學 救援論

 

                                                                    강의 이현채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연구원

 

 

구원론

 제 1 장 서론적 고찰

 1. 구원론과 성령님 론과의 관계

 기독교 2천년 역사 동안 재래 조직신학이 성령님에 대하여 신론의 삼위일체 부분에서 다루는 것을 제외하고 성령님을 독립적으로 나누어 다루는 항목이 없으므로 성령님은 기독교에서 위격으로는 잊혀진 위격이나 다름이 없다. 이는 교회로 하여금 성령님에 대하여 공포증을 갖게한 사건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처음으로 몬타누스가 2세기 중반에 일으켰던 성령님에 대한 운동인데 이 운동의 세력은 지중해 지역을 다 덮을 정도로 강렬했고 아프리카에 살던 교부 터툴리안까지 가담할 정도이었다. 마침내 몬타누스는 자신을 자칭 보혜사라고 칭하게 되므로 그는 이단으로 정죄 되었고 이 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성령님의 운동을 외면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 후 삼위일체 논쟁에서는 성령님이 제 3 위격으로 확정되어 발전했지만 성령님론은 교회 론에 삽입되었다. 그 이유는 교회의 탄생이 오순절 성령님의 역사로 교회가 출발하였으므로 4세기 교부들은 성령님을 교회와 연관시켜 교회론에 성령님론을 포함하였다고 할 것이다.

 또 오순절 성령님의 역사로 수천수만의 구원받은 무리가 교회를 이루므로 구원론에서도 성령님론을 다루므로 구원론을 성령님론이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역사 안에 객관적으로 완성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원론에서도 중생과 성화 외의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별 이야기가 없다.

 2. 오순절 운동의 교회사적 배경

 종교개혁 당시 경건주의적인 수도원 운동의 반동으로 재세례파가 성령운동을 일으켰으나 말씀에서 이탈하여 잘못되어지자 그것을 막는 방법으로 개신 교회는 말씀으로 성령님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서 루터는 말씀에 성령님을 종속시켰고 칼빈도 성령님의 주권 성을 높여 말씀과 더불어 혹은 말씀과 함께 역사 한다고 했으나 결국 말씀을 강조했다. 그러니 교회생활에서 성령님을 망각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처음 중생할 때는 맛보기처럼 적은 은혜를 받고 두 번째 충만히 받아야 하는데 이것이 성령세례이다. 이 성령세례는 항상 개종 후에 두 번째 받는 특별은혜를 말한다. 이것이 오순절 자체의 신학이 아니고 웨슬레의 경건주의에서 시작했는데 웨슬레에게 점화되어 미국으로 건너가서 유명한 휫필드 같은 사람을 통하여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감리교 부흥사 찰스 피니가 이 부흥운동을 복음주의 교회의 정통의 원리와 방법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처음에는 작은 은혜요 두 번째 특별은혜를 받아야 완전 성화에 이른다고 하는 소위 완전주의의 결실이다. 여기서 복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성결파 운동이 생겼고 지금도 성결교는 두 번째 특별 은혜를 성령세례와 연결시켜 말한다. 개혁주의 노선에 있는 학자라도 오순절의 계속성을 주장하는 것과 성령 충만을 말하는 것도 오순절 운동의 현상적인 면을 정리한 것이지 결코 구속사적 성경원리를 따른 개혁신학의 가르침이 아니다. 분명히 오순절 사건은 구원사적으로 그리스도 구속사건이 단 회적이듯 두 번 반복할 수 없는 단회적 사건으로 종말론적이며, 성령세례는 예수 믿음을 말하고 단번에 주신 은혜가 왔다 갔다 함이 없이 계속적으로 구원을 완성한다.

 3. 오순절 운동과 은사 운동의 시작과 발전과정

 본래 오순절 운동은 감리교 시모어라는 목사에 의해서 오순절 집회를 한 것이 오순절 운동의 시작이라 한다. 조금더 앞에 1901년 동부지대 미주리 지역에 촬스 파함이라는 흑인 목사가 사실 오순절 운동을 일으켰다. 파함 목사가 큰 건물을 구해서 성경공부를 시작하여 함께 공부할 사람과 같이 살면서 초대교회 특색과 초대교회가 지금과 다른 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촬스 파함이 초대교회가 지금과의 다른 특색을 연구하는 과제를 주고 여행을 갔다가 왔는데 초대교회가 성령세례로 성령님의 충만 받음이 그 특색이고 외적으로 나타난 점은 소위 방언인 점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오순절 설교를 하고 또 방언을 받고 열심히 오순절 집회로 모였다. 그때 방언을 하고 시끄러우니 주변의 주민들과 교회들이 가만 주지 않고 핍박을 해서 쫓아 버리고 집도 불태워 버렸다. 나중에는 산에 통나무로 집을 짓고 집회를 했는데 그래도 또 그 집을 불태웠다. 그러니까 방언 하는 오순절 파가 진짜인지 방언을 막은 파가 진짜인지 모르게 되었다. 반복해서 집을 짓고 불태움이 진행되다가 로스엔젤레스에서 1906년 아주사가에서 오순절 집회를 열어 성령세례와 충만과 방언을 가르치고 전했다. 이 때 시모어 목사와 촬스 파함이 연결되었고 촬스 파함이 후에 로스엔젤레스에 가서 거기서 처음엔 감리교 교회당을 빌려 집회를 하다가 점점 커지자 독립해서 나왔다. 그러므로 1906년이 오순절 운동의 정식 시작 연대라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급격하게 방언을 받고 저들이 말하는 성령세례를 받았다. 그때 이 운동이 아주사가에서 번지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거기로 몰려와 거기서 은혜 받은 사람들이 각지로 퍼져 나갔으며 순식간에 미국 전역에 센세이션을 일으켜 퍼지게 되었다. 그 때 스칸다비아의 감리교 목사인 바라트 목사가 뉴욕에 모금 운동을 왔다가 이 운동이 진행됨을 보고 편지를 해서 그들의 편지의 가르침을 통해서 성령세례를 받아 스칸디나비아의 오순절 운동을 세웠다. 그후 스칸다비아에서 영국으로 화란으로 독일을 통해 대륙으로 아주 쉽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기성교회가 용납을 안 하므로 교파를 구성해서 한 30여개 되는데 제일 큰 것이 하나님의 성회 순복음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성회가 소위 데이비드 듀플레시스란 남아프리카 사람인데 이 듀플레시스가 미국 전역 그리고 유럽 사방에 전도하며 교단도 조직하고 이분에 의하여 W. C. C.에 가입함으로 하나의 분파에서 하나의 교회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전 세계의 이목이 여기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1950년까지 오면서 이 운동이 활발하게 지나오다가 침체를 했다. 그래서 대폭 자기들의 내부의 문제점들 때문에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는데 그 오순절 운동이 기성교회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운동이 또 다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처음 운동을 오순절 운동일 하면 그 이후 운동을 신 오순절 운동, 혹은 은사운동(카리스마)이란 이름으로 다시 시작해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기성 교단으로 번져갔다.

 이 때에 우리나라도 때를 같이하여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다가 잠잠해질 때 60년대부터 기성교회로 번져 나가기 시작해서 70년대까지 세계적으로 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 운동을 일으킬 때에는 자기들이 모여서 교파를 구성했다. 그러다가 힘이 아주 약화되니까 활동이 없다가 기성교회로 파급되어 이 운동이  이제는 교파를 나룰 필요가 없다고 하여 기존 교파에 소속하면서 이 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좋게 여겨 성령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은사운동이라 혹은 신 오순절 운동이란 이름으로 커지게 되었다. 이 오순절 운동은 개신교에서 천주교회까지 강하게 파급되어 전 세계적인 교회 운동이 되었다. 그래서 카톨릭은  1972년에 세계 은사 운동 집회를 열었으나 개신교에서 왔다는 말을 안 하고 단지 이미 받은 은혜가  재현된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은사가 성령님의 은혜로 역사한 것이라고 하여 개신교에서 건너온 이야기는 숨겼다. 이러한 운동으로 교파들의 선이 약해지고 교단의식이 약화되었다(로마교회가 1962년 요한 23세가 개신 교회가 하는 성경연구의 방법을 도입하고 신부들로 복음서를 읽고 강론하도록 했다. 그리고 찬양대만 하던 성가를 평신도가 하도록 함으로 아무도 예배 모범이 고쳐질 것을 생각도 못했는데 실행하고 그가 죽자 바울 6세가 계속해서 예배모범을 고쳤다. 평신도 예배 동참, 운사운동, 마리아 숭배에서 예수님을 믿는 데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성령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이것이 은사 운동이 가져온 좋은 파급 효과이다. 그 이전에는 성령님에 관해서 별로 이야기를 못했다. 모두 기독론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화란의 판눌러가 너무 성자 중심이니 성자에서 성부와 신국이라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점을 돌리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반동이었지 실제로 운동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오순절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퍼짐에 따라서 이제까지 교회가 억제하고 두려워하며 회피하려고 한 성령님의 연구를 활발히 하게 되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에 관한 연구를 발간하고 그 중에도 화란 사람들이 성령님의 연구를 많이 하고 있고 특히 독일에 헤리벨트 뮐렌이 파데보든 지역에 신학교 교의신학 교수로 성령님 론에 관해 접근을 하고 있다. 뮐렌은 사회학적 측면에서 삼위일체를 어필하는데 출발점이 성령님이시다.

 감리교회에 의하면 처음 중생할 때 받은 은혜는 초보적인 단계이고 그보다 더 큰 은혜는 두 번째 특별한 은혜가 완전하게 온다. 그렇게 되면 그 완전 은혜를 받은 표현이 무엇인가? 아직 피니 때는 오순절 같은 방언이 그 표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완전한 사랑의 단계에 이르면 완전 성화의 단계에 간다는 것이었다. 이는 월등한 신앙의 단계로 올라가는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완전주의라 한다. 즉 특별은혜를 받으면 죄짓지 않고 완전한 사랑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리교는 시작부터 우리 장로교 같이 조용한 것이 아니라 웨슬레의 특별한 감각적으로 경험된 중생 체험의 큰 변화로부터 시작하듯이 이 오순절 운동은 그 방법론에 있어서 웨슬레처럼 그와 같은 방법으로 신앙이 들어가기를 구한다. 중생을 하면 제 2의 완전케 하는 특별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그러면 완전한 성결에 이르러 사랑에 이른다고 한다. 이 운동에서 웨슬레, 촬스 피니, 휫필드 등이 감리교 부흥운동과 성결운동을 일으켰다.

 R. A. 토레이라는 사람은 성령 세례를 강조하는 사람이다. 토레이를 신학적인 조상으로 해서 오순절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오순절 운동은 신학적으로 개혁신학 칼빈주의가 아니라 알미니안 신학에 서있었고 오순절 운동이 오기 전에는 제 2의 특별 은혜를 받으면 완전한 성화에 이른다고 했는데 성결 운동은 제 2의 특별은혜를 받으면 완전한 사랑을 이룬다고 한다. 그런데 신 오순절 은사 운동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성령님의 세례를 제 2의 특별 은혜로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성령세례는 오순절의 발생인데 지금도 우리가 성령세례를 오순절처럼 받아야 하고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초대 오순절 때뿐만 아니라 오순절 운동에서도 성령세례를 받은 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오순절 때와 같이 방언을 해야 한다고 한다. 방언이 오순절의 특색이다. 방언을 빼버리면 오순절 운동이 운동으로써 존속할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기성 교회와 부응할 수 있는 유일한 특색이 방언인데 방언을 약화시켜 버리면 그 운동이 끝나게 된다. 옛날 감리교나 성결교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서울의 S교회 J목사도 옛날처럼 방언을 강조하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교파에 충실하려면 몇 번씩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금식을 행하고(금식으로 괴로워하는 고통을 제물로 받으심이나 고행이 하나님께 공로가 된다는 것은 옛날 루터가 개혁시켰고 우상종교가 공덕을 쌓는 행위이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고행을 앞세우기보다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행위와 선행이 공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금식하면 힘이 없으므로 생각하는 것이나 움직임은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옳은 금식은 예수님을 사모하는 열심히 식욕을 이길 때 금식이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고행주의나 금욕주의와 호의호식하고 낭비하는 주의가 아니라 절제하는 삶이다. 있으면 너무 많이 먹어 없애고 없으면 금식하고 또는 있는데 굶어가면서 고행하는 것을 하나님이 즐거워하시겠는가? 금식하면 일등 성도가 되는가? 방언 하면 일등 성도가 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많이 닮아 가는 것이 일등 성도일 것이다), 또한 대신 방언과 대물, 대인 방언을 못하면 성령님을 못 받은 사람으로 하고 하나님과 직접 하는 방언이 있는 것으로 하여 너무 높은 경지에 있어서 평범한 성도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게 하는데 이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어를 주셨고 마음을 주셔서 대화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시는 데 왜 특별한 방언을 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개인의 유익과 전도의 효과를 마쳤으면 다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돌아와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적인 언어로 세계의 모든 성도들에게 자국어를 버리고 영적인 언어를 사용케 할 것이다). 특별히 대물방언은 사물에다 어찌 말을 하는가? 대물방언은 의식이 없는 사물에다 의식이 있는 것으로 신령 화 시키는 행위로서 비성경적인 것이다. 사물을 구원하시는 것이 목표라면 대물방언이 좋으나 우리의 구원이 목표이시다.    

 오순절 운동에서는 방언을 성령세례의 결과로 말하는데 이것이 신 오순절 은사 운동으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성령세례란 말이 성경의 가르침에 적합하지 않다고 많이 문제시되었다. 그래서 성령세례 대신 성령 충만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방언의 강조는 같다. 성령 충만 혹은 성령세례로 말하지만 이것은 방언으로 연결된다. 이들은 오순절 때처럼 성령님에 충만을 받으면 생동 력이 있는 것으로 말한다. 이것이 기성교회와 오순절 파와 다른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순절 파에서는 열심히 기도한다. 그래서 철야기도를 시작했고 우리들도 본받아서 철야기도를 공식화한다. 그런데 이 철야기도는 기도에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철야에 강조가 있다. 그래서 기도만 하면 졸리고 지루하니 찬송 한 시간, 예배 한 시간, 간증, 복음 송, 안수를 하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기도는 언제 하는가? 요즘은 12시에 끝나는 곳도 있는데 이는 잠자러 가기 위함이다. 기도 시간이 많다는 것을 혹평할 필요가 있는가? 문제는 가정의 질서와 기본 생활리듬을 깨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방언을 받으면 힘이 있어서 뜨겁게 기도를 한다는 것이 장로교회와 다른 오순절의 특색인데 이런 것이 기초하고 있는 신학이 오순절 신학이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어떻게 받나?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있다. 임금님이 자기 아들을 위해서 모든 학자와 신하를 불러다가 아들 교육을 시킬 법을 세우라고 했다. 그래서 책을 썼다. 요즈음 같으면 수많은 책을 만들어 놓으니 임금님이 생각해보고 그걸 읽다가 세월이 다 갈 것 같아 줄이라고 했다. 그걸 읽는 세월에 성공이 다 지나가 버린다고 생각해서 한 권으로 줄였다. 그것도 아들이 임금이 된 후 정사는 안보고 그것만 읽겠는가? 또 줄여라 는 임금의 견해는 책이 클수록 안 좋은 것이다. 그래서 한 문장으로 줄였다. 그게 무엇이냐 ‘공짜는 없다’는 말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 성령님의 세례가 아니고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또 믿을 때야 쉽게 믿었다. 그런데 믿고 싶어 믿었는가? 교회 가자고 해서 갔고 믿자고 해서 믿었다. 주일학교 때 먹을 것을 주니 갔다. 내가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꼭 믿어야 될 필요성을 느껴서 믿은 것도 아니다. 믿다가 보니 목사도 된다. 어느 누구도 믿어야 되는 것도 없이 교회 가자 혹은 주일학교에 가자고 해서 믿다가 보니 믿게 되었지만 그러나 믿고 성령님을 받는 데는 목적이 뚜렷하고 분명한 것이 아닌가? 또 믿을 때는 방향도 목적의식도 영웅적인 대상도 다 희미했으나 이제는 대상도 목적도 다 뚜렷하다. 그러니 영적인 신앙도 필요하고 보통 신앙으로는 안 된다고 한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와는 다르게 성령님을 받는 조건을 내세우는데 1. 뜨겁고 열정적인 신앙이 있어야 한다. 2. 회개해야 한다. 죄를 두고 어찌 성령님을 받느냐? 철저히 회개하여야 한다고 한다. 죄가 많아 서는 은혜도 못 받는다고 한다. 3. 언제나 순종이 완전해야 되고 믿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는 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4. 간절히 생사 결단을 해야 한다. 성령님의 세례 더구나 방언을 받는데 죽도록 해야 한다. 5. 소위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오순절 전에도 기다렸지 않느냐? 그러니 기다려야 무엇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기다림이 아니고 충만한 가운데 머물러 있어라 는 식이다. 마지막까지 기다리는데 그냥이 아니고 성령세례를 주는 집회가 있어야 한다. 6. 순종 속에는 완전한 말씀의 순종뿐 아니라 자기 몸과 의지와 사지를 다 주님 뜻대로 쓰시도록 내어 맡기는 것이다. 그러니 그 분위기에 젖어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집회는 그 점을 유입하여 전달해서 분위기를 고조한다. 마음대로 하도록 부르짖음 안에 울부짖음과 잿더미에 뒹굴고 기도해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는데 그냥 있어서는 안 되니 칼빈주의 자는 입장금지이다. 그런데 토레이는 성령 충만의 조건이 열 개쯤 되어 더욱 복잡하다. 이들은 조건을 충족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같이 우리가 조건을 충족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 공로에 의해 성령님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알미니안 신학의 귀결에 이른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주권적인 하나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은사의 수준으로 하락시킨다. 그리고 그 신학에 들어있는 또 다른 면은 우리가 그렇게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다 고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조건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이들에 의하면 우리가 전적타락 전적 무능이 아니어서 은혜로만 구원에 이르고 은혜로만 되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알미니안 신학이다. 루터교가 멜랑톤 이후 알미니안으로 갔어도 그래도 종교개혁당시에는 전적인 은혜뿐이고 전적부패와 타락을 말하여 죄과 해결은 내가 못하고 은혜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종교개혁의 근본신학이다. 죄 문제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할 만한 힘이 없으니 내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신다. 그러니까 은혜이다. 하나님이 굽어보시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다. 사실상 이들의 주장인 성령님의 충만이나 세례나 근본 개념은 같다. 다만 성령님의 세례를 완전케 하는 특별은혜로 생각하는데 은사 운동에 와서 성령 충만으로 대피시킨 것뿐이며 그 도식은 같다. 성령님을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으나 그렇게 받은 사람이 있다는 말은 못 들어보았을 것이다. 성령님을 충만히 받으면 완전히 문제가 해결되고 신령해 진다거나 의식주가 해결된다거나 인간의 삶의 방식을 떠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없다. 다만 기도함으로 성령님의 역사로 은혜가 강화된다. 물론 전혀 새로운 은혜가 아니라 우리가 처음 받은 은혜의 신앙이 자라가고 성장하도록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생활에 넓혀진다. 그것은 말씀의 선포가 강화될 때 그렇다. 그런데 우리가 조건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되니 바른 신학이다.

 그리고 종교개혁 특히 성경의 기본신학과 근본적으로 모두 다르지만 또 하나의 배치되는 근본적인 것이 있는데 우리의 의는 법정적인 칭호이다. 우리가 옳은 일을 잘해서 거룩해지고 성화 되니 칭의를 받는 게 아니고 모두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덧붙이신다. 그래서 우리 속에 죄가 많아도 의롭다고  하신다. 이 때 우리를 의롭다고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또 거룩하게 하신다. 이때부터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에까지 자라 가는 것이다. 그것이 지상에 사는 날 동안 우리의 목표이다. 천국에서도 이와 같다. 그러니 의로움으로 시작한다. 이는 로마교와 오순절교회도 의롭게 되려면 바로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의로워져서 하나님 앞에 칭의를 받는 것으로 여긴다. 이 의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사인 선물이 아니고 우리의 공로로 받는 것이다.

 은혜가 강화된다고 했는데 강화와 충만과 능력과의 구별은 어떻게 하는가?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을 오순절 신학에 대한 우리의 답이 있다. 본문은 한 성령 안에서 우리 모두가 한 몸에로 세례를 받아 졌고의 우리말 성경도 번역을 잘했으나 바른 번역이 아니다. 즉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한 몸에로 한 성령에 의해서 세례를 받아졌던 것이다. 우리말만 읽어서는 성경학교이다. 원문을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 몸에 가입되는 일에 구분이 없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례 받아져서 한 성령님을 마시게 되었다. 우리가 마신 것이 아니라 마시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통로로 처음 믿을 때에 성령님을 마시고 성령님으로 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안 되는가? 옛사람의 관습으로 많은 일에 성령님의 역사를 거스리며 소멸한다. 성령님을 금심케 하니 성령님이 역사하실 자리가 없다. 이 때 회개해야 하는데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함의 회개가 아니라 옛사람이 큰 은혜를 배반했으니 은혜 안에 살도록 회개해야 한다. 오순절에서 배울 것은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의 오류를 떠나서 기도 많이 하는 일에 할 말이 없다.

 성령세례와 성령님의 충만과 은사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성령세례를 잘 이해해야 한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문맥을 보면 앞에 술 취한 것이 옛사람의 일이다. 그러니 여기에 새사람의 일을 대조시켜 놓았다. 옛사람은 죄의 본성으로 살고 영의 사람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새 생명의 원리를 따라 새 사람으로 사는 삶이다. 영이 두 가지로 쓰이는데 여기 영이라 할 때 성령도 되지만 성령님에 의해서 새로워진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 그리스도인의 생활 혹은 존재 방식을 영이라고 한다. 영어 성경의 대부분이 영을 성령님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육이 영이 되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서이지만 옛사람이 죄만 즐기던 사람이 의를 좋아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새사람으로 있는 존재 방식 그것은 영이지 그 때도 성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성령님을 말할 때는 정관사를 붙이는데 이 곳에서는 안 붙였다. 즉 성령님의 인도에서 결과 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존재는 영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이라고 하면 모두 성령님이 아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 부활의 체험을 영이라고 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영을 대립시킬 때, 그렇게 구분하여 쓰여 질 때 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문맥상에 나타난 것을 성령님으로 말한다. 새 생명이 무엇이냐?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세가 새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말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 자신이 내가 말하는 것이 영이라고 할 때 그 말씀하시는 것이 성령님이라고 표시할 수 없다. 성령님이라고 해석하려면 정관사나 형용사가 있어야 한다. 충만도 ‘플레로마’란 말이 여기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다. 1장 23절에 보면 교회에 대한 충만이라고 했다. 그런데 만물을 만물 안에서 충만케 채우시는 자의 충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예수님의 발아래 독점되어 있다.

 그러면 충만의 표가 무엇인가? 모든 만물이 그의 무릎아래 끊는다. 그런데 그 충만이 만물 안에서 만물의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 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말한다. 사도행전에 처음 교회에 성령님에 인도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충만했다는 말을 사용한 후 다른 신약 성경에 충만 이라는 말이 없고 에베소서에 처음 나온다. 그런데 소위 바울이 교회론 적으로 전제한 것에서 충만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충만이란 무슨 뜻인가? 바울에 의하면 자기가 복음을 전하여 로마 천지에 교회를 가득 채워짐을 말한다. 교회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지배를 받는다. 각 족속들 중에 그리스도의 지배가 완전히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충만 이라고 할 때 물이 그릇에 가득 채우듯 공기가 지구를 가득 채우듯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지배, 그리스도의 통치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통치가 모두 충만 이라고 하면 우리는 항상 가득 담기는 것으로 일차적으로 이해를 하는데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1장에서 교회론적 전개를 하면서 그리스도가 지금 만유를 재배하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만유를 다스리심을 말한다. 에베소서 3장 18절로 19절에도 충만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모든 충만에 이르기까지 충만케 되도록 하기 위함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속하신 넘치는 사랑을 말한다. 앞으로 우리는 충만 이란 말을 성령님의 다스림이나 그리스도의 온전한 통치로 보아야 한다(엡 1: 3: 5:).

 그리고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후서가 바울의 가장 중심 사상이며 특히 로마서 8장이나 갈라디아서에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사는 것이 무엇인가 말하고 있으나 성령님의 충만이란 말이 없다. 문제는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고 아무리 외쳐도 성령님의 충만이 없다. 문맥은 이미 받아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수동태 명령법으로 되었음). 직설법과 명령법이 같이 나온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명령법만 보고 직설법을 못 보는데 문제가 있다. 이미 성령님이 오셔서 계시니 받은 것이요 받았으니까 성령님을 좇아 사는 것을 명령하는 명령법을 이해 못하여 내가 기도로 성령님을 끌어다가 내 속에 채우고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중간에 우리의 필요에 의하여 성령님을 모시고 종처럼 이용하거나 마셔서 가득 채움이 아니라 이미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 세례는 교회에 가입했다는 표가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몸에 세례 받아졌다. 내가 성령님을 취함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직접 오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서 한 생명 줄로 살게 하실 때 나무가 원줄기의 양분을 같이 마심과 같다. 이미 오셔서 우리들 안에 계신 성령님을 밤새워 부르고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이미 계신 성령님을 모르는 소행일 것이다. 그러면 성령님의 충만이 무엇이냐? 성령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시고 거룩한 분이시며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닮게 하시다가 우리를 천국까지 확실하게 인도하실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충만은 말씀을 따라서 죄와 투쟁하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삶이 성령님의 충만이라고 할 것이다. 감정만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한다. 사람이 언제 죄와 투쟁하느냐? 성령 충만으로 투쟁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를 통해서 말씀을 받아 옛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되는 일을 하는데 성령 충만을 받으면 된다는 것은 잘못이다. 금식기도, 방언, 은사들을 받아도 옛사람은 안 벗고 그대로 있는 경우는 무엇인가? 잘못된 성령 충만은 신령하다는 집회를 찾고 혹은 사단의 영을 받게 하고 성령 충만케 한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사람이 받게 하고 혹은 나누어 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성령님을 받기 위하여 몸을 고생시킬 것이 아니라 이미 오셔서 계시는 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기독교 2천년 역사 동안 성령님에 대하여 깊은 연구가 없는 것은 잘못이다. 때문에 말씀을 전해도 확신이 없는 것이다. 글자의 풀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지한 가운데서 잘하기를 바라는 것은 허영과 요행이며 미신적인 심리이다. 무지보다 잘못은 알려고 하지 않은 죄가 더 크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죄는 알미니안 보다 말씀주의를 강조하면서 저지른 죄악이요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그 성경 부분과 연결시켜서 이해하지 못하고 글자만 풀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받을 조건이 무엇이냐? 예수님을 믿음이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을 때에 성령님이 이미 인 쳐주신 것이며 우리가 받을 영원한 기업의 보증으로 성령님이 오셔서 내주 하신다. 아이는 어려도 어린아이의 생명으로 충만이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의 분량만큼 역사 하시므로 성령님을 다르게 느껴질 수는 있다. 중간에 우리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오신 성령님을 너무 무시하고 박대하며 우리들이 하고 싶은 행동으로 살면서 마음대로 죄짓고 있을 때 떠나지도 못하시는 성령님을 얼마나 슬프게 했던 것인가? 옆에 있는 누구는 알아도 성령님은 몰랐다면 무지이고 더 큰 무지는 오신 성령님은 모르고  충만을 받으려고 몸을 괴롭힌 것이다.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성령님을 받을 조건은 하나님께 순종이다. 가장 큰 순종은 예수님을 믿음이며 그리스도의 법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법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기보다 교회 봉사와 규칙과 계명을 지키라고 한다. 세상 적으로 보면 그 길이 헌금이 많이 나오며 교회가 유지되는 것처럼 오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법으로 사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지탄을 받을 교회는 헌금을 강요하고 돈을 많이 내는 자가 큰소리하면서 힘을 쓰게 하고 또 그들에게 복을 많이 빌어줘야 하는 영웅심리 작용에다 종교적 분장을 하여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을 세워 높여주고 그러한 공치사로 또 돈을 많이 내게 하고 축복을 약속하면서 하늘의 능력을 부어 주되 성령님도 소나기처럼 부어 준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법으로 살았기 때문에 변화된 것이다. 큰 교회는 큰 통장이라는 사고는 숫자를 그 보상으로 삼는다. 큰 교회, 많은 숫자, 많은 헌금만 가지면 그것으로 생활비의 도움을 받으려고 아부, 아첨, 비겁해지지 말고 예수님 앞에 바로 서야 한다. 큰 교회를 세우면 장관급 대우와 풍요로운 삶을 살려고 하면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 안 되고 종교적으로 분장한 성도가 된 것은 윗물이 흐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신지식을 얻어 하나님을 알고 그 후에 사람이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이 얻어지는 데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가짜다. 누가복음에 11장 13절에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고,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의 말씀들은 아직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님이 오시지 못했다. 요한에 의하면 영광을 보는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다. 아직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성령님이 오시기 전이니 성령님을 구할 수 있다.

 

   성령님이 오시는 통로

 성령님이 오심은 단순히 예수님이 승천했으니 자동적으로 순서에 의해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시므로 성령님을 필연적으로 받아 주시게 되어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로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오심은 인성이 부착된 그리스도의 위격을 통해 그의 몸된 교회에 종말론적으로 영구히 오셨다. 이렇게 성령님을 주심과 우리의 구원도 종말론적이어서 중간에 거두시는 게 아니다. 다만 지금은 맛보기로 주신 것으로 보증금으로 오셔서 계신다. 은사는 종말론적이 못되고 임시적 이어서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나 남은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 주신 은사가 지금 계속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상황에 따라서 은사를 다시 주신다.

 히브리서와 사도행전의 가르침에 의하면 구속 때문에 성령이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사 속죄양이 되시고 단번에 구속을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이 구속을 만족하시고 만족하신 표로써 그 영으로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여 그 상하신 몸을 아버지 앞에 보이시므로 구속 중보자로서 구속을 완료하시고 그 구속의 대가로 성령을 획득하셔서 새 인류인 우리에게 보내시므로 그의 몸인 우리는 구속의 보증금으로 성령님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이때 성령님은 누구의 얼굴로 나타나시는가? 구속 중보의 영으로써 그리스도의 위격을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오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얼굴로 나타나신다. 이러한 면에서 성령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이 성립된다. 완전 동일이란 말이 아니고 중보 사역 적 의미의 동일성을 말한다. 성령님이 오심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가로, 구속 때문에 이루어졌다. 그 구속을 증거 하여 그의 몸과 그의 나라를 완성하러 오셨다. 이것은 히브리서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지, 내 개인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5. 성령님을 받음의 조건

 성령님께서 오심의 통로는 무엇인가?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고 그 외 우리의 공로로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마저도 성령님의 역사로 온 선물이라서 우리가 스스로 믿는 게 아니라 은혜로 믿는다.

 알미니안은 복음 선포가 충족은혜라 하여 이 은혜가 도덕적으로 감화하여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면 우리가 선택해서 우리가 결정하여 믿으니 믿음을 공로 적으로 말하지만 우리는 전적 부패해서 믿으려는 마음까지도 못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영의 일에 대해서 적대적이며 반항적이어서 스스로 영을 받을 길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오셔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대해 갖는 적대감정을 제거하므로 믿게 하신다. 때문에 에베소서 2징 8절 말씀과 같이 믿음이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신 믿음을 활용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일이다. 믿음을 연단하라고 하시고 담력을 원하시며 얻는다고 함이 활용에 속한다. 다시 말해서 믿음을 가진 후에 힘써 구해야 성령님을 받는다는 것은 오순절이나 알미니안의 견해이다. 그들에 의하면 특별기도나 금식, 작정기도 혹은 방언이나 은사 자들과 같은 특정인들만 성령님을 받는 것처럼 알고 있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우리는 믿을 때에 성령님을 받았다.          

 주변의 성령님을 받기 위한 훈련은 인본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이다. 금식기도가 많은 경우 기도는 못하고 육체만 괴롭히고 있음과 같다.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것이요 생명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할 때 하나님은 자기 육체를 괴롭히고 있는 것을 좋아하시는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금식하고 나면 자연과 싸워 이겼다는 영웅심과 쾌감 외에 무엇이 달라지는가? 금식 기도가 한국교회에 얼마나 많은 피해를 끼쳤는가를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것은 없고 대부분 자기 성취감에 빠진다. 40일 금식을 하고 나면 신령한 대접을 받을 수는 있어도 도중에 죽은 사람은 없는가? 은혜 받으려고 시도하다가 죽었다면 은혜를 배척하는 율법주의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성령님을 받지만 그 조건은 오직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공로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온 것이다(예수님의 위격을 통해 동일성으로 오심).

  6. 성령님께서 오셨다는 표

 우리가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성령님이 오심인데 성령님이 오심의 표가 무엇인가? 위에서 말했지만 예수님을 믿음이요 예수님을 믿음이 성령님이 오심이고 성령님이 오심은 예수님을 믿음이다. 그러므로 표는 바울의 증거인 성령님의 열매인데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라고 했다. 그리고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으니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을 때 아홉 가지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라는 시집살이가 힘들어도 남편이라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 견딜 수 있으며 열매를 맺으면서 이긴다는 것이다. 마음이 불안하여 지옥이었는데 성령님을 받으니 그 표로 오순절에서 강조되는 방언이나 다른 은사가 아니라 사랑, 희락, 화평으로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학이 성경의 문맥에서 가르침을 받아야지 신학의 논리로 성경의 가르침을 변조하면 안 된다. 같은 것을 가르쳐도 비중을 어디에 두었나를 살펴서 지혜롭게 믿어야 한다. 믿음의 확신을 주기 위해 들려야 할 것을 잘못 알아서 머무르면 안 된다. 우리는 성령님을 충만이 받으려는 노력보다 그리스도의 품성으로 변화되어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아 사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많은 경우에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일에만 심취하여 오히려 교회가 어지럽고 부패가 심각해져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거짓이 남무 하는 무법사회가 되어 가는 것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이러한 성령님의 충만에 관한 논쟁이 계속 반복되면 특별계시인 하나님의 말씀보다 물증이라는 방언 등에 끌려 갈 것이다. 더 위험한 것은 방언 받음이 하나님이 임재하심의 보장으로 확산되고 그것이 기복신앙으로 흐른다는 것이다.

 개핀 이란 신학자는 방언이 없다고 주장했고 자유대학의 교의학 주임교수도 방언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데 오순절과 같은 집회와 분위기에 젖어들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함은 임시적인 은사보다 종말론적으로 오심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를 보면 고린도 교회만 방언과 여러 은사가 있었고 다른 교회는 없었는데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인가? 아마 안디옥 교회가 이상적인 교회라고 할 것이요 고린도 교회는 물의가 일어난 교회일 것이다. 예수님을 쏙 빼 닮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나 잘난 선생들이 모인 교회보다 훨씬 좋을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은사들이 그칠 때가 있고 사랑만 남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경험보다 승한 것이 말씀이라는 것과 성경의 표준에서 말씀이 뭐라고 하는지를 살핀다. 경험으로 성경을 바꿀 수가 없고 오히려 성경의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또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결코 교회를 혼잡케 했지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했다.

 성경의 문맥에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14장의 전체 문맥에서 볼 때 오히려 방언을  내리며 유익됨이 없으니 그 길에서 나와 사랑의 길로 나가도록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가르친다. 바울이 방언을 부정하지는 않아도 문맥으로 보아 거의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유익한 것을 구하여 덕을 세우라고 강조하고 그들의 은사에 대한 시비를 나누려는 것보다 적극적인 사랑의 길을 제시하여 그것들의 무가치성을 느끼게 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방언뿐 아니라 예언, 내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주는 용맹 있는 헌신까지도 격하시키면서 사랑을 강조하고 그의 사역에서도 종말론적인 사건인 십자가만을 강조하였다.

 7. 오순절 방언의 구원사적인 의의  

 사도행전의 오순절 날 예루살렘 교회에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있었던 첫 방언은 일반적 규범성을 말하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구원사적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오순절의 첫 방언은 그리스도의 구속 완성으로 성령님의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인데 이것은 첫째 바벨탑에서 혼잡 된 언어가 새 시대에는 원래대로 그 언어가 통일될 것을 미리 예표 적으로 보임이요, 둘째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다른 방언으로 내가 복음을 전한다)로 보는데 역사적인 상황이 다른 방언으로 말해야 할 만큼 되었다.

  8. 사마리아 개종 사건

 사도행전 8장의 사마리아의 개종이 오순절에서 생각하듯 빌립의 전도를 받고 믿은 후에 성령세례를 완전 은혜로 받았느냐? 우리는 구원사적으로 문맥에서 살펴야 한다. 5절에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좆더라, 했는데 9절에서 11절에 보면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랫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12절에서는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이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 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은 지라이다.

 12절 이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또 믿었다 하는 말이 또 나온다. 시몬이 믿었다는 말에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이 없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성령님을 돈으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을까? 진짜 예수님을 믿고 개종을 했을까? 하늘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빌립의 능력에 비하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고 빌립의 능력을 믿지는 않았을까?

 사마리아의 전도는 빌립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사도들이 와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함으로 그리스도를 믿었다. 빌립의 전도를 외적 소명이라 말할 수 있고 사도들의 성령임 함을 내적 소명으로 말할 수 있다. 만약 빌립에 의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할지라도 수사도를 보내셔서 그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가 있다. 역사적인 상황이 사마리아와 유대 사이에 수백 년 동안 상상할 수 없는 큰 장벽이 있어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개처럼 취급했다. 그 담을 누가 감히 헐어버릴 수 있나?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이 담을 허시고, 사도행전 1장 8절에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대로 이방인과 사마리아까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편입한 것을 분명히 표시하기 위해서 사도들을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방과 사마리아인들까지도 아무 차별이 없이 동일한 성령님을 보내시므로 그들을 인정하셨다. 그러니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으로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를 보는 개혁신학만이 바른 신학이라 할 것이다.

 9. 그리스도인과 성령님의 충만 문제

 그리스도인 됨이 성령 강림으로 발생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살아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오순절 파에서는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의 대표적인 책에 성령님의 충만이라는 말이 없다. 물론 바울이 성령에 관하여 제일 많이 말하며 특히 주된 글(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에는 전혀 성령님을 충만히 받으라고  하지 않았다. 에베소서 5장 18절도 다스림을 받으라는 해석이 옳다. 그리고 에베소서는 후기 작품이기 때문에 바울의 주된 글의 주장을 바꿀 수 없다. 바울의 주된 글에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음과 성령님의 주장을 받음과 성령님을 좇아 삶을 말하고 이 세 가지가 성경에 가득하다. 성경해석은 부분적인 것은 전체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리차드 개핀도 성령님의 충만 받는 이야기를 강조했지만 성령님의 온전한 인도와 주장이 성령님의 충만이며 오순절파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물동이에 물이 채워지듯 하는 개념은 아니다.

 10. 성령님의 충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타당한가?

 성령님의 충만이 바울의 주된 글에는 없으므로 로마서 8장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성령님께 붙잡혀 주장을 받는 것을 성령님의 충만으로 말한다. 이렇게 인도를 받으면 필연적으로 열매를 맺는다. 성령님의 주권성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도로 달라고 했다면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함에 옳지 않다.  많은 분파들이 성령님의 인격성에 강조함  보다 은사, 즉 어떤 세력인 힘에 강조를 둔다. 이들에 의하면 성령님께서 우리 사람들의 태도나 주문에 따라서 좌우되는데 이는 위험하며 공교회 밖에 있는 교회들의 견해이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으로 주권적이시며 독자적으로 은사들을 각각 주신다. 독일의 쿠르트 훗텐이 쓴 “분파들의 사상 체계”란 책에서 말하기를 분파들에 의하면 성령님이 사람에 의하여 좌우된다. 그래서 그분이 사람이 좌우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간다. 그러므로 카리스마적인 사람들에 의해 독점되고 좌우되며 그들에 의해 공급되니 개인 중심으로 된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성령님의 역사 없이 정말 믿음으로 바로 서고, 교회가 하나 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럴 때 너무 많이 영적으로 혼미하여 어렵지만 루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면 성령님께서 영으로 역사 하신다고 했으며 말씀이 역사함은 성령님이 함께 역사 한다고 했고 말씀의 인도를 좇아 영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보다 외적 체험이나 현상적인 물증을 구하니 그것은 말씀을 불신함이다.

 누가복음 11장 13절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겠다고 했다. 분명히 요한복음 5장 39절에 요한이 구원사적으로 성령님이 구원 섭리사적으로 보면 그 기간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받는 때로 이월해 가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때까지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 담지하고 계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요 아직 구속은 이루시지 않았으므로 성령님을 방출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위의 누가복음은 오순절을 앞에 두고 하신 말씀이므로 구원사적으로 보아야지 개개인의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보면 안 된다.

 11. 방언 기도의 그릇된 사례

 방언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보아야 하나? 많은 경우에 은사가 성령님으로부터 왔느냐를 검증할 필요가 없다. 내가 지금까지 방언을 말한 사람들을 접촉해보면 한결 같이 공통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입으로 시인하는 것도 희미하고 생활이 그렇다. 방언을 유창하게 잘하고 거기에다 통역까지 잘하고,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하면 대물 방언이나 귀신까지 나와서 같이 대화하고 교접을 하니 어디에 맞추어 인격이 자라야 하나? 나운몽 파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해도 가정은 이혼하고 행방불명이요 개인주의로 나아간다.

 한 영으로 기도하는데 어떤 사람은 광신적으로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조용히 하는데 어떤 것이 성령으로 기도한 것인가? 그것은 개성이 다르니까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선생을 따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기도가 더 잘된다는 현상에 대한 견해는?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했다. 방언은 통역이 필요하고 통역하지 않으면 무익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방언 자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는 것이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0-19)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기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유익하여 덕을 세워야 한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직통으로 올라가는가? 미숙한 신앙의 자세로 기복에 사로잡혀 하는 기도는 몰라도 내가 이해 한 대로는 바른 기도로 직통으로 올라가는 기도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기 위한 투쟁이다. 오순절 운동의 뿌리인 알미니안은 감리교에서 나왔는데 성령님으로 중생한 다음에 2차로 성령님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으로 두 번 특별은혜를 받으면 완전해 진다는 완전주의 계통에서 나온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방언 한 가지 은사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여러 은사들을 주시는데 성령님은 하나님으로서 은사를 주시기 때문에 어떠한 은사를 고정해 놓고 모두 공히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권적으로 역사 하셔서 주시고자 하시는 자에게 주신다. 그런데 오순절 파에서는 어떤 것을 제시하며 내놓으라는 반 협박 속에서 강요를 거듭하고 혹은 금식으로 시위를 하면서 얻어내는 것은 성령님을 하나님이 되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오순절 신학이 우리와 다르다고 할 것이다.

  12. 성령님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의 기도생활

 예수님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령님으로 시작하여 기도하신 분은 예수님뿐이시다.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잉태하여 성화되어 출생하셨고, 성령님의 세례를 직접 하나님께 받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만큼 성령님을 완전히 받으신 분은 인류 역사상 없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예수를 사랑하사 은혜를 한량없이 주시고 성령님을 물 붓듯 한량없이 주셨다고 했으니 예수님만이 성령님을 완전히 충만히 받으신 것이다. 그렇게 성령님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이 어디에서 기도하실 때 방언 기도를 하셨다는 흔적이 없다. 성령님이 충만함으로 영이 직접 기도했다는 경우를 복음서에서 찾을 길이 없다. 예수님은 오히려 투쟁의 기도를 드렸는데 보통 투쟁의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사투의 기도를 하셨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오순절 파들이 말하는 우리의 두번 받는 특별은혜의 모범을 말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 이전에도 성령님께서 함께 계셨지만, 성령님의 세례를 받으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의 왕으로 임직된 임직 식이었다. 즉 메시야 나라의 메시아로서 임직 받으시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나라의 왕으로 공포되었고 이후로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고 시작되었다. 구약시대에 임직 식에 쓰인 올리브 기름은 예수님께서 받으실 성령 하나님을 예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이 함께 계셨는데 또 받으신 것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그리고 성령님으로 충만한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이루기 위한 기도라 할 것이다.

 

   제 2 장 성령님의 일반적인 사역

 1.자연계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님의 일반적 사역

 일반 은혜는 창조주요 구속 주에게서 오지만 자연계 안에서 일반적으로 역사 하시는 성령님은 삼위일체적인 면에 가까운 성령님을 말한다. 왜냐하면 구속의 역사는 모든 죄인에게 라고 말할 수 없는 특별은혜인데 비해서 일반은혜의 역사는 모든 인류에게 내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은혜를 위해서 일반은혜가 허락되었으므로 성령님의 일반 사역은 창조주로서 사역에 가깝다고 할지라도 그 사역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이다.

 성령님의 일반적 사역에는 첫째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고, 둘째 인류의 생을 가능케 한다. 이렇게 성령님의 일반적 사역으로 나타난 은혜를 일반 은총, 일반 은혜라고 하는데 두 가지 기능이 있다.

 1) 죄를 억제하나 죄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한다.

 2) 시민생활이 가능하도록 지반을 조성한다.

 이는 기독교가 들어가지 않는 사회 즉 일본, 중국이 경제대국이나 대 민족이 법치에 서 있고 질서와 문화가 꽃피고 시민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죄가 억제되어 일반 기능이 발휘되는 것은 모두 성령님의 일반은혜의 역사 때문이다. 전쟁 후 사회가 재건되는 것도 모두 일반은혜의 역사이다.  

 그러면 왜 일반 은혜를 주시는가? 이는 구속 때문에 창조와 인류의 보존을 위해서 구속을 준비하시며 구속을 위해서 주셨다. 보존과 유지를 구속 때문이라고 할 때 일반 은혜가 성부에게서 직접 유래한다는 것은 바르지 못하다. 구속 주이신 그리스도가 일반 은혜의 유래 처라고 함이 옳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가 특별 은혜를 가지고 일반적인 은혜의 역사만을 좋아하고 추구한다. 성령님을 받아 세상의 복을 보장 받으려하며 세상적인 복만을 구하는 것은 일반은혜가 구속 때문에 있고 구속을 위하여 존재하며 그 은혜가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복음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객을 전도시킨 것은 타락한 심성의 발로이라고 할 수 있다.

 2. 특별은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피택 자들에게만 제한된 것으로 인간 중심 즉 영적인 관계이며, 영적 재창조적인 역사로 불가항력적이다.

 불가항력적 은혜란? 이를 정의하면 중생에 공작하는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 그리고 죄인의 편에서 항거로 인하여 실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은혜가 임하면 주관적인 성향이 변화되어 결국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을 불가항력이라 한다.

 3. 보통 은혜

 보통은혜란 모든 인류에게 차별이 없으며 자연 영역에 관계된 가항력적으로 임하는 것으로 도덕적 합리적 방법으로 역사함을 보통은혜라 한다.

 1) 보통 은혜의 유래

 앞에서 말한 대로 일반 은혜의 역사는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했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준비함인데 알미니안 파는 일반 은혜를 충분 은혜라고 하며 도덕적인 감화 형식으로 충분 은혜가 오면 자기가 도덕적인 감화를 입어서 자기의 임의대로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데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인간의 죄 성은 영의 일에 대해서 반항적이다. 영의 일을 하는 것은 특별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일반 은혜의 섭리와 사역은 자연 질서를 유지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다. 일반 은총도 특별 은총처럼 유래하는 근원은 동일하다.

 2) 보통 은혜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하나님은 처음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는 선고를 내렸지만 당장 사형선고를 집행하지 않고 그 형벌을 유예하시므로 집행을 연기하여 범죄 이전의 상태와는 비교할 수 없이 떨어진 상태지만 생을 유지시킨다. 이것을 보통 은혜 혹은 일반 은혜라고 한다. 비록 죄책을 제거하지 못하였지만 이 은혜도 보통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 일반 은혜의 진리는 칼빈에게서 시작하여 카위퍼에게서 정립되었다. 만약 타락으로 모든 은혜가 다 철수되었으면 우리가 천치 바보의 자리에 있음이 마땅하며 모든 도덕성도 모두 파괴되어 무법천지가 되며 무정부 상태가 되니 인류의 존립이 불가능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범죄가 줄을 잇고 파괴된 폐허로 변하여 전혀 소망이 없는 것 같지만 전쟁이 마치고 재건한 도시가 되며 위대한 천재, 영웅, 예술가들이 나와서 인류 문화가 창조되고 시민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것은 인류가 존속되고 보존되도록 악과 죄를 억제하시며 처음 주신 은혜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일반 은혜의 섭리 때문인데 이는 구속 때문이요 구속을 위해서이다.  

 우리나라는 특별 은혜가 많은 복을 가져 왔는데 일반은혜도 특별은혜의 구속 때문에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실제로 기독교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양심이 더 바르며 선한 생활을 하는 것은 구속 은혜의 빛으로 일반은혜가 강화되기 때문이며 여기서 온갖 세속주의와 신비주의와 잘못된 문화관을 극복할 수 있다.

 3. 보통 은혜의 방법

 1) 자연계를 통한 계시의 빛

 자연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자연계시에 의존한다. 그러나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겉으로 알뿐이다. 그리고 오직 구속계시를 통해서만 자연계시를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2) 정부

 국가와 정부는 일반 은혜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정부의 존재 의의는 복음 선포의 기반을 조성하여 궁극적인 목표인 구속 복음이 선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국가의 사명이다. 이 성경원리에 입각해서 한국의 정치 이론을 다시 써야하니 잘 길러 국회로 보내야 한다.

 3) 여론

 정부가 하나님의 빛 아래서 이루어 졌으니 여론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에게 사명이 있다. 하나님의 법과 일치하는 여론을 조성하여 사회를 되돌려서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이요 책임이다. 그렇다고 정권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거나 폭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바른 사회 제도를 위한 바른 사회 제도를 위한 바른 원리를 제시하므로 서 여론을 조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른 원리를 설교함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하며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에로 돌이킬 것이다.

 4) 하나님의 형벌과 상급

 일반 은총의 영역에서 성경은 정부가 하나님의 사자로서 악을 벌주고 선을 상주기 위해서 홀을 받았다고 했다. 이와 같이 국가가 선한 목적으로 세워졌으니 죄와 악을 제거하고 선을 보상하여 시민 선을 장려함이 정부의 책임이다. 이 때 교회는 정부로 하여금 이러한 기능을 바로 행사하도록 권장해야 한다. 그런데 도리어 정부가 선한 뜻을 가진 일반 개인이나 단체를 죄인으로 만들고 죽이며 정부의 이름으로 행하면 국가 존재의 목적이 없어지고 그 악은 커서 큰 악을 발생시키므로 책임질 곳은 없어지며 죄악을 막을 기능도 없어진다. 교회도 정부와 사회에 일을 바로 하도록 권장하지 못하고 타협하면 더욱 길이 없어질 것이다. 일천 이 백만이라는 그리스도인이 사는 우리나라에 언제 국민으로부터 정권을 제대로 이양 받은 적이 있었으며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정당 집권이 있었는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법을 세워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 시급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현세에서도 심판을 행한다. 다 행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악이 있고 불의한 사람이 여전히 활개를 친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왜 심판이 없나? 심판이 없는 것일까? 하고 속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어거스틴의 신국 론에 유명한 말이 있다. “현세에서 심판을 다 행하면 마지막 심판 때 심판하실 것이 없다. 심판을 이 땅에서 다 실행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면 불신자만 벌을 받느냐? 결코 아니다. 아무리 선택자라도 죄악을 행하면 시시때때로 채찍을 드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빨리 데려 가신다. 죄의 정체가 무엇인가 파괴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죄이다. 불의의 사고와 육체의 질병 등으로 나타나며 천재지변과 자기가 지은 죄악이 범죄자에게 고통을 주는 방법으로도 심판하신다. 또 범죄 하면 심리적으로 불안과 갈등을 느끼고 염려하고 공포에 쌓이면 위장이 상하고 뼈가 녹고 혈액순환이 안돼 각종 신경질환과 질병을 유발한다. 때문에 시편에 의인의 날은 길 것이요 악인의 날이 짧다고 하셨던 것이다.

 4. 보통 은혜의 효과

 1) 형의 집행 유예

 세상에 쌓여 있는 모든 죄악들을 지금 형벌을 집행하면 좋은데 왜 안 하시는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행위언약을 파기한 형벌을 연기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2) 죄의 제재

 죄의 특성은 분리하고 파괴하는 것이므로 죄와 악이 억제되지 않으면 분리의 파괴가 격화되어 창조가 보존되지 못한다.

 3) 진리, 도덕, 종교의식

 사람에게 진, 선, 미가 있고 도덕과 아름다운 예술이 있고 이방 세계에 나타난 훌륭한 선이 있는데 모두 일반은혜에 속한다. 그러나 칼빈은 이방 세계에 나타난 미와 선과  덕에 찬사를 보내지만 특히 덕은 모두 가면에 불과하며 진정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4) 세속적인 의

 이것은 자연적인 선으로 사회윤리와 사회정의이다. 대가를 지불한 만큼 보수를 받는 것이 사회정의이다. 말을 바꾸면 각자 자기 몫을 하고 사는 것이 사회정의이다. 그러니 일하는 것 노동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법이요, 하나님의 법으로서 일하는데서 인류 문화가 꽃피고 유지되며 향상되도록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돈의 정의도 도출할 수 있는데 돈은 지불한 수고의 대가라할 것이다. 그 외에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전부 다 도적이요 사기이다.

 학생으로 말하면 배우지 않고 학점을 받는 것이나 가르치지 않고 학점을 줄 수 있는가? 수고 없이 점수를 받으면 좋은 것 같으나 하나님의 법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앞세워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는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용납된다면 사회 정의는 무너져서 하나님 나라의 법은 설 수 없고 도리어 악이 득세할 것이다. 지구촌에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 국가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 결과로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노동법을 헐게 된다.

 시민의 선은 무엇인가? 일반은총의 역사로 시민 생활이 가능하도록 선을 행함이다.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시민 생활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무능한 이웃을 돕고 구제하며 선한 법과 정신 그리고 선한 제도를 세우는 일은 시민선 즉 사회정의에 속한다. 그러면 불신자들에게도 의가 있는가? 불신자가 사회 정의를 이루는 선을 행하면 그것은 일반 은총의 역사이다.

 5) 자연적 축복

 자연적 축복도 일반 은총에 속하므로 특별 은혜를 위해서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열정은 자연적 축복을 위해서 특별은혜를 구하는데 그 까닭은 특별은혜를 받으므로 자연적 축복이 약속되고 보장된다는 기복주의 심리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자연적 축복을 얼마나 많이 받아 누리는 가로 신앙과 하나님의 뜻을 평가하고 은혜의 유무와 경중을 평가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질그릇에 보화가 있는데 그것이 너무 귀해서 자연적 축복을 모두 배설물로 버렸다.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을 뿐 아니라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바울은 가만히 생각해 볼 때 그의 생명이 내 몸에 와 있는 것이 가가 막혀서 그의 부활 생명에 참례하려 하여 그의 고난을 오히려 자처한다고 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실정은 다 그런 것이 아니나 거의 다수가 가난해서 인지는 모르지만 보화는 복이 아니다. 바울이 버렸던 쓰레기나 배설물을 큰 보화로 여겨 그 복을 약속해야 교회가 커지고 또 그것을 최고로 구하니 한심할 노릇이다. 우리는 위에 것을 구하고 아래 것은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한다.

 심지어 성령하나님이 오심도 우리를 날마다 영생의 진리로 인도하시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주 희한한 은사를 주셔서 튀게 하거나 좋은 일이 많이 생겨서 살맛나는 목적이라면 곤란하다. 방언을 해서 현재 어떤 유익을 보아야 되고 신유의 은사를 나타내서 무슨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성품과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 사회 정의를 이루려는 일은 관심이 없으니 성령님의 오심도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거나 축복이 오는 통로로 생각하여 성령님의 충만을 구한다면 종교의 본래 특성을 잃을 수도 있다. 한국 교회의 종교의 기능은 생활의 보장 노릇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보통 은혜의 성경적인 진리의 교훈은 개혁교회인 우리만 가지고 있으므로 한국 교회는 이 복음에만 소망이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잘못된 교리를 인도할 우리까지 거기에 빠진다면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한국교회의 존망이 어깨에 걸렸다는 의식을 갖자.

  제 3 장 소명

 소명이란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룩된 구원을 신앙으로 수납하도록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이다(롬 8:30).

  1. 구원의 서정에 대한 일반적 고찰

 구원의 서정이란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구원이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차례이다. 도대체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구원이 어떻게 주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느냐? 주관적 적용의 근거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이다. 이 연합에 근거해서 모든 구원의 축복이 개인에게 적용된다. 그러면 연합은 언제 이루어지느냐? 그것은 소명 시에 이루어진다. 반면에 로마 교회는 구원을 성례를 통해 교회가 나누어주므로 교회가 구원을 주고, 알미니안은 객관적 구원을 그리스도가 이루셨지만 주관적 충용(적용)은 신앙으로 내가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의 공로로 삼는다. 개혁교회만 하나님이 구원의 창시자이시고 구원의 적용자라고 믿는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교회나 중보자가 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을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적용하시는 이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매개자를 세우지 않는다.

 2. 소명

 많은 경우에 소명을 오해하며 멀리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또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부흥사가 소명 받았다고 함과 또는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으니 소명을 받은 줄로 안다. 문제는 소명이 소명을 받은 자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여러 번 반복된 줄로 알고 있으니 잘못이다. 외소와 내소의 공통점은 발령자가 하나님이심과 공작자는 성령님이시며 기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1) 외적 소명

 소명은 구원받도록 부르심인데 부흥회 설교나 개인 전도나 토론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되며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지를 말하고 예수 믿도록 권고하는 설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객관적 사역을 선포하여 현세적으로 받아 믿으라는 권고를 소명의 기구 혹은 외적 소명이라 한다.

 (1) 외적 소명의 요소

 바른 복음의 사실과 이념을 제시하여 누구든지 회개하고 신실하게 예수 믿으라는 초청이다. 이 복음의 선포가 소명 요소의 바른 정의이며 또한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내어 줌으로 나타났으며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 사랑의 부르심을 소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할 때 회개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요 회개가 성화의 길이다. 회개가 예수님을 믿는 길이요 회개를 동반한 믿음이 바르다. 회개 없이 믿는다고 할 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죄를 회개함 없이 무엇을 달라고만 하면 이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다. 축복 종교에는 회개가 없다. 그리고 축복을 받기 위하여 회개를 강요함이나,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라고 하기 어렵다. 축복을 위한 회개는 결국 바른 회개라 말할 수 없고 결국 바른 회개의 가르침이 없어지므로 회개가 없어져 가는데 회개를 촉구해야 한다.

 (2) 외적 소명의 특징

 특정한 사람만 부르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아무 차별이 없이 오라는 신실한 소명의 초청이다. 물건 파는 분들처럼 판매할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어떤 신비주의적인 사람들처럼 척보고 투시하여 혹은 기도해보고 직관하여 예수 믿는지 안 믿을 것인지를 점치는 행위도 크게 잘못이다. 선택의 개념만 생각하고 이 사람은 아니고 겸손하고 공손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합당하는 식의 선별을 피하자 오히려 복음을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더 복음의 필요성이 절실한지 누가 알겠는가?

 (3) 외적 소명의 의의

 복음 증거의 좀더 분명한 소명의 정의는 피조물의 바른 목적에로 돌이킴이다. 피조물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 때문에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소명의 목적은 바로 이 피조물의 목적에로 부르심이다. 우리는 축복만을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함이 곧 축복이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 섬김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이지 다른 일이 결코 아니다. 죄짓고 이 길에서 떠났음에도 구원하고 다시 되돌아오라는 신실한 권고를 받음이 생명인데 이런 은혜로운 소명을 거절함은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외적 소명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긍휼하심에 의해 자멸을 피하도록 경고하심이다.

 2) 내적 소명(유효성이며 불변적인 성령님의 사역으로 천계 성이다)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의 구분은 알미니안 신학에는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믿지 않고 인간이 선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적 소명이나 외적 소명은 모두 하나님의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라는 권고인데 선택교리를 갖는 교회만 선택교리 때문에 외소 와 내소를 구분한다. 실재적으로 복음 선포로 동일하게 부르심을 받아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선택받은 자를 확실하게 믿어지도록 성령님께서 내적으로 그 택 자의 영혼에 역사하심이 내적 소명이다.

 내적 소명이 말씀과의 관계에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간에 다소 문제가 있는데 말씀 선포를 통해서만 성령님께서 역사함인데 말을 바꾸면 말씀 선포 때 성령님께서 자동적으로 역사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에 종속되게 역사하지 않으신다. 개혁교회는 말씀과 함께 역사 하신다는 것인데 문제점은 말씀이 없어도 역사 하신다는 귀결에 이른다는 위험이 있다. 예를 들면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의 경우와 택 자인데 어린이의 경우 말씀이 없어도 주관적, 초자연적으로 역사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여기서 말씀의 무용론을 뒷받침하는 악용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외소 와 내소는 아직도 미해결된 부분이다. 다만 구원 적 소명으로 반드시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함을 말한다.

 (1) 소명은 도덕적 존재의 방법으로 역사 하신다.

 말씀에 몇 가지 구분을 들면 a. 신의 말씀인 로고스(육을 입으시기 전 예수 그리스도). b. 창조의 말씀. c. 성경에 기록된 말씀. d. 선포된 말씀인데 여기서 로고스라 할 때는 창조의 말씀과 구분한다. 로고스는 존재론적인 면에서 아버지의 이성 즉 아들로써의 말씀을 말하면 이 로고스가 창조의 말씀이라고 할 때는 섭리론 적으로 방출하여 그 존재에는 이상이 없으면서 창조로 나타나신 창조를 이룬 말씀이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구속 역사를 통해 계시되어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이며, 선포된 말씀은 언약이 성취되어 사도들이 증거하고 선포한 복음의 증거의 말씀을 말한다.

 (2) 소명은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역사 한다.

 성령님께서 소명자의 의식에 역사 하여 지성을 열어 효과 있게 말씀을 받게 역사 하신다. 그러지 않으면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3) 이 소명은 항상 하나의 목적지를 향하게 한다.

 목적은 영생인데 예수 믿음에 이르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한다. 중생의 목적과 같다.

 3) 두 소명의 차이점

 a. 외소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고 내소는 택 자들에게 임한다. b. 외소는 외면적 자연 생활에만 영향을 주나 내소는 내면적 영적 생활에 영향을 준다. c. 외소는 사죄와 구원에 관한 약속을 제시하고 내소는 구원에 이르는 효과를 가진다. d. 성령님의 공작에 의하여 외소가 발생하나 유효하지 못하고 내소에서는 유효하게 된다.

 제 4장 중생

 중생이란 사람 안에 새 생명의 원소를 심고 영혼의 주관적 성향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중생이란 주관적 성향의 재창조이다. 이는 전 인격에 그 영향이 미치며 홀연히 즉각적으로 중간의 단계가 없으며, 순간적이어서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니 비밀하고 헤아릴 수 없는 변화이다.

 1. 중생의 의의

 중생이란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 속에 심어주어 영혼의 주도적 성향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정의되었는데 여기서 말한 새로운 생명이란 예수님께서 구속하시고 부활로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생명을 말한다. 즉 우리의 중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된 것이며,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어법대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함’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부활을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라고 말할 수 있다. 중생의 정의에서 성화를 말했는데 여기 성화란 죄에서 거룩하게 하심인데 보통 성화가 중생 후에 오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성화가 중생에서 시작한다.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심는 것이 무엇인가? 영혼의 주도적 성향을 성화 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영혼의 주도적 성향이 바뀌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원리가 의식생활에 나타난 것으로, 죄악 된 자기 생각으로 살았는데 하나님 중심으로 되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이 나타나면 첫째로 감정이 순화되고, 둘째로 생활의 방향이 바뀌어 지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도 복을 많이 받아야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니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정당하게 보지 않는다. 우리가 알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그 때부터 믿기 전과 후가 현저하게 나타나야 되고 자기 주도적으로 사는 성향을 확실하게 바꿔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은혜를 받으면 황홀해 하며 감정을 못이겨 눈물을 흘리는 좋은 현상 후에 말씀을 따라서 삶의 생활 태도나 의식 혹은 사고방식이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시급한 것이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삶으로 돌아서서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는 일이 시급하다.

 카위퍼가 유명한 말을 했는데 “종말에 가면 많은 이방인들이 회심하여 돌아올 것이나 성화의 척도가 아주 낮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잘못하면 많은 경우에서 항상 자기 이해와 상관하여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자기를 드리는데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2. 중생의 본질

 1) 중생은 근본적인 변화로서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로서 자기의 인격을 바꾸는 것이다. 나를 중심해서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하나님 중심한 생활로 전체적인 변화 즉 전인격의 전환이다. 이러한 변화는 불신자가 아무리 선한 사업을 행할지라도 자기 과시를 벗어나지 못한다. 중생이란 순간적이요, 생과 사의 변화이며 그 중간은 없다. 중생 하면 존재 의식에서 인격의 중심에서 성화가 발생하며 성화는 일생 계속되는 점진적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이렇듯 중생이 의식 영역에서 나타나면 그것이 회심이며 회심하면 회개하며 신앙하게 된 것이다.

 3. 소명과 중생의 차서 관계

 소명과 중생은 논리적으로 구분하나 내소가 중생이다. 중생을 출생으로 말하면 성화는 성장을 말한다. 우리 주위에 중생 했어도 자라지 못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어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 사람은 어린아이의 상태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선포가 너무 없기 때문일 것이다.

 4. 중생의 필요성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 때문에 중생이 필연적이다. 부패했기 때문이요(렘 17:9), 영혼의 전 성향을 갱신하기 위해서 근본적인 내적 변화가 필요하며(요 3:3), 천국에 입성을 위해 필요하다.

 5. 중생의 기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중생이 성령님의 기본적 사역이면 어떻게 말씀이 중생의 도구가 되며, 중생이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잠재영역에서의 일이라면 도대체 중생 사역에서 말씀이 일할 자리가 있느냐? 일단 그것이 의식의 밖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벌써 새로운 의식이니까 중생이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느냐? 그러므로 말씀이 없어도 성령님이 역사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고 성령님의 주권 가운데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바른 견해는 성령님께서 말씀으로 중생을 시킨다고 해야 옳다. 성령님께서 말씀으로 동시에 역사하사 중생케 하신다.

 6. 중생은 독점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왜 중생이 하나님의 독점적 사역인가? 중생은 하나님이 그 창시자이다. 알미니안에서는 하나님의 독점적 사역의 진리를 거부하여 복음의 선포를 충족은혜하고 말한다. 알미니안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로 믿음을 선택한다. 그래서 믿음을 인간의 공로로 말하고 중생을 신인 협동으로 말한다. 이 알미니안의 교리는 바울이 말한 절대은혜의 교리와 전적 배치된다. 많은 경우 장로교회도 알미니안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아 잘못 이해하여 성도들을 혼란케 하는 경우가 있다. 중생 때 성령님이 오셨다가 우리가 잘못하면 다시 떠나시고 또 기도하면 다시 오심으로 인간의 기도의 양에 비례하여 충만케 된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인간의 의지에 좌우되며 인간의 기도 능력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귀결에 이르므로 이 알미니안 주의는 율법주의이다. 알미니 안은 칼빈이 주장한 한번 주신 은혜가 생의 기간동안 인간에 의해 상실되지 않는다는 성도의 견인지구 교리에 전적 배치된다. 그러므로 중생 자에게 성령님이 인간에 의해 취소되어 떠났다가 다시 오셨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소멸은 무엇인가? 오신 성령님이 떠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역사의 쉼을 말함이 옳다. 중생 자가 자꾸 죄악을 범하여 성령님을 거스리면 그의 역사가 소멸되어 힘 있게 역사 하실 자리가 없으므로 근심하며 탄식하신다는 것이다. 나가버리셨다면 탄식도 없으실 것이다. 여기에서 성령님께서 인간에 의하여 행하시기도 못하시기도 하심은 그의 통치 방식 때문이며 말씀의 감화로 인격적이며 자발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는 말씀의 간접적 통치 방식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생에 있어서만 은혜가 불가항력적이 아니라 계속 은혜에 있어서도 불가항력적이요 사람이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이 오심과 그의 은혜는 종말론적 선물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경우 사울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셨는데 후에 버림을 받은 경우는 은혜가 상실된 것이 아닌가? 사울은 원칙적으로 왕의 직책에로 부름을 받았어도 주의 은혜로부터 배척되었다. 히브리서가 말한 대로, 한번 하늘에 비췸을 받고 은혜를 맛본 자가 타락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혜가 상실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으나 불택 자라고 하여 전혀 은혜를 안 주시는 것은 아니다. 상실되지 않는 은혜는 아니지만 일시적인 은혜를 주신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의 경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물러가라”하였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여 선지자 노릇을 했다. 그런데 주님은 외면하시면서 거절하신다. 선택되지 않았어도 종교적인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은 왜 안 믿었느냐는 주의 질문에 은혜를 안 주셨기 때문이라고 핑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초보적인 맛보기 은혜를 임시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7. 세례와 중생

 로마 교회에 의하면 주입은혜 즉 구원은혜가 성례를 통하여 필연적으로 온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례로 중생이 이루어진다. 로마교회는 성례는 구원 얻음에 필수적인 조건이어서 형식주의에 빠진다.

 제 5장 회심

 회심이란 죄인이 죄로부터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의식적인 변화이다(요일 3:9). 그 특징으로 구원 과정의 한 부분이며, 재창조의 동작과 각성의식이 생기며, 단번에 성취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다.

 1. 회심의 성경적 용어

 구약의 용어: ‘니캄’과 ‘숩’인데 니캄은 노아 시대에 세상을 홍수로 심판 하시려고 할 때에 사용한 단어이고 ‘내가 사람 지었음을 후회하노라’,  ‘회개하고 돌이키라’, ‘후회 한다’, ‘돌아오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다. 숲은 ‘돌아온 다의 뜻이다’.  

 신약의 용어: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꾼다는 뜻을 지닌다. 이것을 회개라는 말로 쓰는데 메타는 ‘돌아가서’, 노이아는  ‘생각한다.’이니 생각의 변화, 말씀을 따라 생각하는 일이 수반되어야 한다. 즉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생활로 방향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옛날 죄악 된 생활을 않고 의롭게 살겠다하는 생각은 좋지만 그 다음 단계로 우리가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는 교훈을 늘어놓으니 청중이 자기중심적인 이해관계로 하는 경우가 많다.

 2. 성경의 회심 관

 중생은 잠재의식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면 회심이란 중생의 결과가 의식 생활에 나타나는데 반드시 회개와 신앙을 동반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중생을 하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하고 헌신적인 삶을 결과하며, 죄를 짖고 나면 반듯이 회개하고 새로운 작정을 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회심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오해가 많은데 회심이 반복적이라고 해서 성령님께서 떠나 계시다가 회개하면 또 오시고 하는 식으로 성령님의 오심이 반복적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단번에 완전하지만 우리의 상태가 완전하도록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름을 받고 나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번 부름을 받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이는 죄를 짓고 중생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촉구 받는 다는 뜻이다. 많은 경우 우리 한국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지만 회개가 동반되지 않은 것 같다. 세례문답을 하는데 잘 살펴서 회개한 흔적이 분명할 때 세례를 주어야 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잘 믿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만 나와도 감사하게 여겨지기는 하지만 회개가 없이 교회생활을 관습적으로 배우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개혁신학에 의하면 중생이 먼저이고 회개가 나중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선포에 보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다. 중생은 하나님의 일이니 우리는 회개를 촉구해야 한다. 그리고 중생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니까 알 수 없으니 우리는 중생 하라고 말하지 말고 회개하라고 촉구해야 한다. 지금 설교가 잘못된 경우가 많다. 중생은 단번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도 강조를 하다보니 늘 교인들은 중생을 몇 번씩 하는 줄로 알게 하면 안 된다. 반복적인 성격을 가진 회개를 촉구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말 중생한 자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첫째 생각의 변화로 이성의 사고가 변한다. 둘째 자기를 중심한 죄악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한 생활로 변한다. 셋째 감정의 순화가 변한다. 이 세 가지는 회개했다고 하는 증거이고 중생한 증거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경우는 중생해야 한다고 했지만 복음을 받을 사람들에게 중생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실천인 회개가 문제인 것이다. 많은 경우 회개는 하였지만 감정의 순화는 안 되는 경우가 많은데 내 이해 관계에 메이지 말고 정말 국가와 교회를 위하는 사고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3. 회심의 요소

 1) 회개의 요소

 여기서 회개의 요소들은 죄를 끊어버리는 것을 말하는데 아래와 같다.

 a. 지적인 요소: 생각이 변화하여 내가 죄인임을 알고 있음이다.

 b. 감정적 요소: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애통함이다.

 c. 결의적 요소: 그 죄를 끊어 버리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목적이 변화함이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회개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은혜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죄악을 하나님 앞에 나열만 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기 때문이다. 무엇에 근거해서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을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 예수 이름으로 고백하고 그 피로 씻을 것을 고하고 믿으면 하나님도 꼼짝없이 사하심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가 있기 때문이다. 그 피의 효력으로 죄의 용서를 받고 죄에서 자유 함을 누린다.

 2) 로마교회의 회개 관념

 어떤 면에서는 로마교회보다 개신 교회가 회개는 했지만 용서의 여부를 모를 수도 있다. 문제는 목회자가 어떻게 회개하고 용서를 받는가를 잘 가르쳐야 한다. 로마교회는 신부가 고해성사를 받고 확실하게 선언을 해주니 믿어 버린다. 그래서 개신교인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개신교회 성도들은 자기가 범죄를 고하고 회개를 고하여 직접 사함을 받으나 로마 교인은 신부가 사죄의 선언을 한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죄는 하나님만이 사하는데 사람인 신부가 죄 사함을 선언하니 성격적으로 잘못이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스러운 일을 하면 그 공로로 죄가 용서받는 것으로 하니 잘못이다. 이들에게는 보속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죄에 합당할만한 선한 것이나 공로로 사함을 얻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는 것이며 또 돈으로 계산해서 큰 죄는 많이 바치고 작은 죄는 작은 것으로 비교해서는 회개의 헌금 제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송아지 바칠 죄인가 비둘기의 제물로 되는 것임을 판단함이 잘못된 것이며, 또한 많은 헌금에 많은 기도도 은혜의 종교가 아닌 인간의 공로를 앞세우는 것과 같을 것이다.  

 3) 회개의 성경적 견해

 죄는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

 4) 회심의 특성

 중생과 연관시키면 회심은 순간적이며 순간적 개변을 뜻한다. 그러나 회개는 반복적이다.

 성화의 과정이 무엇인가? 육은 옛사람이요 영은 새사람인데 이 새사람과 옛사람과의 투쟁이 성화의 과정이다. 그리스도인 이 투쟁을 쉬면 육의 사람이 되고 만다.

 5) 회심의 창시자

 믿음은 선물이지만 의식과 관련시켜 회심이 일어나므로 협동이라 할 수 있다. 의식생활에 일어나서 인간이 해도 인간이 스스로 하느냐? 결코 그렇지 않다. 성령님께서 역사 하신다. 오해하지 말 것은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법대로 잘하려고 하느냐 그 것이다. 아니면 교회가 속화되고 타락한다. 어느 단체보다 교회가 더 빨리 속화되기 쉬운 곳이 없다. 그 이유는 온갖 사람이 모인 단체이기에 잘하기가 정말 힘들다. 문제는 우리 한국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을 생산해 내려고 하기보다는 지금 전반적인 경향이 어떻게 하면 교회를 많이 크게 하는가에 혈안이 되고 거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교회에 너무 퍼져 있지만 우리는 바른 복음을 깨달은 사역자들이 되는 것이 시급하다.

 회개는 사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하시게 하지만 그러나 둘을 굴려 밀 듯 하시는 것이 우리를 감화해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회개하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역사 하신다. 우리가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칼빈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하는 게 아니라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고 우리로 하여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역사 하시니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라 했다. 이러한 교리들이 언제 확정되었는가? 칼빈에게 거의 다 되었지만 16세기 후반 종교개혁 이후부터 18세기 초에까지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에 많은 책들이 나왔는데 조금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다.

 성령님께서 역사 하셔서 회개하도록 하시지만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는 성령님의 역사의 바른 정의이다. 회개도 협력해서 하게 하신다고 했는데 회심을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도록 섭리하시니 내가 자발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계속할 수 있도록 역사 하시는데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 된다. 물론 불가항력 교리에 비추어 그런 말을 할 수 없지만 모둔 경우가 다 똑같이 되는 것은 아니다.

 6) 회심의 필요성

 복음을 받으면 반드시 회개하고 믿어야 하며, 전하는 자는 믿으라고 권유해야 한다. 중생을 요구하지 말고 회개하고 믿으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 죄를 알 수 있느냐? 도덕적인 죄의식이 있다. 언약의 파기 자로써 항상 죄의식이 있으니까 속으로 죄인임을 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쉽게 고백하려고 하겠는가? 전혀 그럴 수 없는 사람인데 죄의식을 갖는 다는 것은 그것이 심판 때 핑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신앙에 의한 것으로서 효력이 있어서 성령님의 역사로 회개에 이르게 된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죄의 의식이 무디고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는 구원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잘못 믿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변화, 감정의 순화도 중생의 결과 즉 믿음의 결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평신도나 직분 자를 따질 것이 아니라 결과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루시퍼가 사탄인데 세 천사 중 한 천사이었다. 루시퍼는 신앙과 경배를 담당한 천사장이고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전령으로 일하는 천사장이며 미가엘은 하나님의 보좌를 지키는 군대장관이다. 여기서 예배와 천양을 담당한 루시퍼가 제일 높은 위치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제일 가까운 자리에서 모신 천사가 타락해서 사단이 되었다. 우리는 선택교리를 가지고 죄에 둔감한 판단을 하려고 하면 안될 것이다. 선택했느냐 안 했느냐를 보지 말고 죄를 가지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한번 하늘에 비췸을 받고 은혜를 맛 본 후에 타락한 자는 다시 돌이킬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생가가해 보면 선택 교리에 집착하지 말고 안심하지 말고 구비된 복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

 제 6장 신앙

 앞장에서는 일반적인 회심을 언급했으며, 회심의 소극적 요소 즉 회개에 대하여 간략히 서술했다. 본장에서는 회심의 적극적인 요소인 신앙을 논의하게 된다. 신앙은 구원론에 있어서 중요한 항목이므로 신앙이 회심의 일부분일 뿐만 아니라 칭의와 도구적으로 연관된다는 점에서 신앙을 본장에서 다루는 것이 가장 좋다. 신앙에 대한 논의는 자연히 이신칭의의 교리로 넘어간다. 칼빈의 신앙에 대한 정의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확고하고 확실하게 인식함’이라 했고, 하지는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과 교리들을 그대로 확신함’이라 하며, 벌콮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심적 신뢰이다’고 말했다. 신앙이란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영혼의 운동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심적으로 신뢰함이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 신앙이냐? 광의적인 신앙의 대상은 성경 전체요 특별한 신앙의 대상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다(구원의 완성 자).

 1. 신앙의 성경적 용어

 구약에 나타난 용어: 성경에 신앙의 용어들 중에 명사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하바국 2장 4절에 ‘에무나’라는 단어가 있지만 이 단어는 통상적으로 신실함을 의미한다(신 32:4, 시 36:5, 37:3, 40:11). 혹은 믿다를 나타낼 때 ‘아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돌보다와 양육하다를 의미한다. 중요한 단어로 ‘바타흐’가 있다. 이는 ‘브’와 결합하여 신임하다와 의지하다 혹은 신뢰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지적 승인의 요소보다는 확고한 신뢰의 요소를 강조한다. 헤어민은 70역에서 ‘피스튜오’라는 단어로 번역되지만 이 단어는 보통 ‘엘피조’혹은 ‘페토마이’로 번역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현재와 미래의 모든 희망을 하나님께 두고 있는 자이다.

 

신약에 나타난 용어: 신약은 두 단어 ‘피스티스’와 동사인 ‘피스튜에인’이 있다. 신약에서 하박국의 진술이 인용되고 있는 방식을 분석해 본다면(롬 1:17, 갈 3:11, 히 10:38) 하박국이 이 단어를 신앙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1) 역사적 신앙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의 한 시점에서 사실로 있었다고 인정하는 정도이다. 그 사실을 내 생명을 결정하는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역사적인 사실만을 인정하는 것이 역사적 신앙이다.

 2) 이적 신앙

 이는 개인의 확신을 이적으로 확인되지 못하면 믿지 않는다. 이적만을 위해서 믿는다. 복음주의 교회에 많은 미국의 경우도 그렇다. 현세적인 삶을 위해 초자연적인 힘을 많이 구한다. 구원을 동반할 수도 있다.

 3) 임시적인 신앙

 이는 임시적이어서 단정하기 어려우나 불택 자에게 핑계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임시적인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외소로 반응은 일어나지만 내소가 없는 경우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신앙으로서 감정에 뿌리를 박고 인간적인 기쁨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굉장한 종교적 반응도 동반한다. 특징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이다.

 4) 참된 구원 적 신앙

 진정하고 확실한 은혜로 구원의 진리에 대한 확신과 의뢰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 신앙은 반드시 선행이 동반한다. 그러면 이 선행이 무엇이냐? 이 선생은 경건주의 계통으로 시작해서 오는 선생이라 하면 남을 돕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남을 도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선한 사업과 바른 학문과 건전한 예술 활동 등 모두 구원의 신앙의 결과로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각기 직업에로 소명됨을 깨닫는다. 17세기 칼빈주의가 가는 곳에 바른 학문과 문화가 꽃피었다. 그때 등불이 된 나라는 영국과 화란이었다. 이 나라가 제일 학문이 빨리 발전한 나라라고 한다. 자기들의 구원신앙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열심히 학문 활동에 전력을 다 했다. 한국에서도 바를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바른 학문을 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복음이 초자연적으로 와야 한다고 배워서 그렇게 알고 있으므로 학문과 기타 사회 모든 분야는 불신자에게 맡기려 하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창조니 하나님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하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다스려지도록 해야 한다. 지금 우리 한국에 절박한 것은 어떻게 하면 정치와 경제 질서가 바로 되어서 일한 만큼 정당한 수고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학문하는 사람들이 연구하고 노력하며 밤을 세우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을 서며 교회들이 밀어 주어야 한다. 참 구원을 얻은 자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구할 것이 아니라 신행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기복신앙의 단점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있음으로 알고 또한 이기주의에 빠진 것이다. 우리는 모두와 사회를 생각하는 믿음으로 성숙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 돕고 이웃과 화평하고 영적으로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우리가 되자. 그리고 남을 돕는 것보다 법과 질서를 세우는 것이 시급하고 그 보다 긴급한 것은 전도와 하나님의 의의 법을 좇아 살도록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의 소명의식이 절실하다. 한국에 그리스도인이 천만일 때 장로교인이 5백만인데 소명에 대한 의식이 없다. 목사가 되는 일에만 소명이 있는 줄 안다. 칼빈주의의 소명관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직장에로 부름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직장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행하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항상 자부심과 창의력을 개발하여 충성스럽게 해야 한다. 그리고 돈을 받으면 하나님의 것으로 위탁된 마음으로 사용해야 한다. 내 것으로 알고 사치와 낭비가 없어야 한다. 권세도 위탁받은 것인 줄 알아 남용하지 말고 선한 청지기 자세로 하나님의 선한 뜻이 펼쳐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영역 주권은 소명관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는 칼빈주의 종교 개혁이 가져온 사상이다. 모든 것이 각각 자기 영역의 그 법칙을 곧 그 영역 내의 고유한 법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다른 영역에서 간섭하고 통제될 수 없는 법과 질서가 있다. 그 영역은 영역의 전문인들이 하고 그 책임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진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중앙집권화 되어 통제되고 있다. 과학문명이 이처럼 발달하여 상품화된 그런 사회에서 물의를 막는 일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생각하고 그냥 포기할 것이냐? 칼빈 시대는 할 수 있으나 지금은 못할 것으로 생각할 것이냐?

 19세기 초부터 20세기에 카위퍼가 했던 것처럼 20세기 후반에도 누가 반복할 것인가?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플라톤의 경우를 생각하면 자기가 정치세력을 가져서 그것으로 성공하니 그렇게 적극적으로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 보려고 해도 거듭 실패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후 그의 이상적인 국가론이 공화국의 국가형태에 아주 많이 투영되어 있다.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론에 첫째 저기 어디에 가서 장소를 정한다. 이상 국가를 세우려면 바닷가가 너무 가까우면 안 된다. 장사로 교역이 발전하면 국민윤리가 타락하고 성의 도덕이 빨리 부패한다는 것이다. 이상 국가는 산중에 들어있는 곳에 정하고 둘째 거기에 맞는 어떤 직업들을 택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지금 영역주권이 없고 총칼로 다 해서 문제지만 그래도 시도해 봐야 한다. 우리 사회에 영역주권이 없는 것을 보면 박 정권 때 위태로우니 경제개발을 시작한 것이다. 이 때 경제인들이 경제계획을 세운 것이 아니고 정부가 계획을 세우고 집행했다. 경제개발의 필수 요소가 돈과 기술인데 정부가 남의 빚과 기술을 도입해서 주관했다. 경제와 정치가 통합하면 절대 권력이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그 절대 권력을 가지고 사회 권력을 모으는 것은 자연적 귀결이며 전체주의에 이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이러한 전체주의의 현상은 전 세계적이어서 처음엔 스탈린이 시작해서 일본이 계속했고 지금은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것은 중앙 집권화 현상이 심화되는데 이런 현상은 몇 사람 혹은 한사람의 손에 모든 권력이 모아진다. 그러면 권력이 집중화된 후 어떻게 되는가? 자유대학의 판리쓴 교수가 “미래의 사회”란 책을 통하여 1952년에 예언했는데 20년부터 30년 사이에 문자적으로 적중했다. 그 책의 결론이 서구의 현대사회가 이 방향으로 가면 결국 중앙집권적인 현상이 되어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적그리스도라고 해도 누구나 다 아는 자로서 이미 심판을 받은 자들이었다. 앞으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될 것인데 이때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복음의 권세로 막아야 한다. 전쟁 중에 사과나무를 심듯이 재림이 가까울수록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고 끝까지 불의와 투쟁해서 성경에 가르친 뜻을 따라 사는 것을 내 놓고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결과로 이러한 복이 누린다고 내놓을 수 있어야겠다. 이는 공부해야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공부해야 사회도 발전한다. 데모할 시간에 피나는 노력으로 공부해야 빈부와 노사가 해결된다.

 왜 유대인들이 천재가 많은가? 유대인들의 교육이념은 메시야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동기에서는 천재가 나오기 어렵다. 그러므로 주일 학교에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잘 키워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목회자들은 책임이 크다고 할 것이다. 자기 앞에 무엇인가를 놓으려는 마음과 큰 것을 놓으려는 마음 때문에 학문의 길이 좁아지거나 막히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플라톤, 칸트, 뉴톤과 같은 석학들은 사람들은 학문과 결혼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우리 때의 공부는 책을 읽고, 듣고, 줄치는 식의 공부가 아니라 허리가 아프도록 연구하여 구원신앙을 소유한 자의 소명 관과 영역주권을 세우는 시대적 소명의식이다.

 3. 신앙의 요소

 1) 지성적 성분: 지식의 인식이란 기독교를 역사적 신앙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역에 대한 확실한 인지(인식)를 말한다. 신앙은 죄인의 심령에 반응을 일으키는 진리들에 대한 영적인 통찰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인식함이다.

 2) 감성적 성분: 신앙에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 인격적으로 찬동하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에 관한 지식을 가장 확신하며 승인으로 찬동하는 것이다.

 3) 결의적 성분: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단하.

 4. 신앙과 확신

 알미니안, 루터교회, 로마교회들은 모두 구원의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 로마 교회는 천국에 갈 확신을 선행으로 가늠한다. 연옥이라는 교리 때문에 천국에 갈려면 끝까지 교회에 붙어 있도록 함이다. 즉 교회와 잘못되면 연옥으로 떨어진다는 교리 때문에 구원받을 작업으로 헌금을 한다. 우리도 잘못하면 감사해서 헌금하지 않고 잘되려고 헌금을 한다. 알미니안도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결정을 하기 때문에 마지막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알 길이 없고 보장도 없다. 개혁신학이라는 우리의 복음에 의하면 한번 받은 은혜는 중간에 상실됨이 없어 끝까지 구원에 이른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지구인데 이 진리만 참 복음이다.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 신실성, 새 언약의 특성 때문이다. 변하지 않고 끝까지 구원에 이른다. 그런데도 내가 그 은혜를 받았는지 비밀 박스를 열어서 보고 싶은 사람이 많은데 사단의 속임수이다. 속임수에 빠지면 예언을 받아서 확인을 해야 하나, 입신, 투시, 방언 등을 요구한다.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 그것이 구원에 이르렀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고 그 것 외에 다른 것이 있다면 사단의 앞잡이다. 다른 것으로는 구원이 없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어려움을 이기려고 비밀 박스를 보고 싶다. 불행과 고통은 물러가고 온갖 좋은 축복을 폭포수처럼 쏟아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에 복채를 내듯이 헌금을 한다. 어려울 때에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 뜻대로 살려고 노력함이 있어야 한다.

 제 7장 칭의

 칭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하여 죄인에 관한 모든 율법적 요구가 만족된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 적 행위이다.

 칭의의 성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 성이며, 하나님의 법정적 결정이고, 신언성이며 즉각적 완전 즉 최종성이기 때문에 반복이 아니다.

 칭의의 특징: 죄의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죄의 책을 제거하며, 하나님의 법정에서 단행된 것이고 점진적인 과정이 아닌 단번에 이루어진 성부 하나님의 선고이다.

 칭의의 요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의 책과 형벌의 제거를 다 포함한다(사 43: 25; 롬 5:21). 그렇다면 예수님의 공로가 무엇인가? 율법을 모두 성취하심이다. 소극적으로 말하면 죄의 용서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 롬 8:15). 그 증거로 양자의 영, 즉 아들의 영이 우리에게 오심이요 아바 아버지라 부름은 아들의 영이 우리에게 오심의 증거이다. 그렇다면 영생의 자격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의 자격으로 아버지 앞에서 섬길 수 있음이 곧 영생을 기업으로 받은 것이다(롬 8:17; 벧전 1:4).

 1) ‘의롭게 하다’의 성경적 용어

 이는 죄인이지만 죄인이 아니라는 칭의로서 재판적인 선언인데 이는 의를 선사하는 말이요 하나님 앞에서 생존의 권리를 허락 받음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기 때문에 생존의 권리를 허락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2) 칭의의 본질과 특징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그의 의를 전가하여 의롭다고 선언하는 법정적 선언이다. 이와 같은 죄의 책임, 즉 죄책의 제거 혹은 면제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죄인이 아니라는 선언이니 죄의 책이 제거되고 이제는 의인이다. 죄인의 신분이 변화하여 의인이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되었다. 칭의는 죄책의 변화이며 성화는 오염의 제거이다.

 3) 칭의의 영역

 능동적 칭의와 피동적 칭의 나눌 때 능동적은 믿음으로 오는 칭의를 말하고 법정적 칭의의 선이다. 피동적은 그 선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올 수 있는 통로는 믿음이다.

 4) 칭의의 시간

 영원에서의 칭의: 영원한 경륜 안에서 구속의 계획을 세우시고 중보자를 세우셨으며 그 중보자의 의를 전가하시기로 작정하셨는데 단순히 작정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 경륜에서 그 전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이루어진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륜 안에서 전가를 이루셨기 때문에 영원경륜에서의 칭의라 한다. 중보자의 위격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오는 칭의: 로마서 4장 25절에 근거함은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리라, 즉 그의 부활이 우리의 의롭다함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으심의 확증과 함께 죽으심이 의롭다는 선언으로 그 부활을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선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 즉 칭의의 선언(바르고 옳다)에 우리도 동참하는 것이 부활에서 오는 칭의이다.

 신앙으로 말미암는 칭의: 신앙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효력 있다. 경륜과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창의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중보자의 위격 안에서 그의 백성에게 의를 전가하여 의롭다 선언함을 신앙으로 받을 때 그 신앙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이 때 신앙은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기구 혹은 도관과 같은 파이프이다. 내가 믿은 믿음 자체가 공로가 안 됨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엡 2:8). 칭의는 신앙이 구체적으로 받아드리는데 내가 받아드린가? 칼빈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에 받아드리도록 하신다. 곧 성령님이 받아서 우리에게 선물하신 것이요 받을 수 있도록 기관을 만들어 내신다.

 5. 칭의의 근거

 예수님의 완전한 의가 우리의 칭의의 근거이다. 우리의 의이지만 이 의가 우리 밖에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과 생명도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축복이 믿음으로 오는데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때 그 전가를 수납함이 믿음이다. 우리는 신앙생활 시작부터 죄를 회개함으로 시작하지만 알미니안들은 신앙생활부터 시작하여 오랫동안 수도를 하다가 죄인임을 느끼며 그것을 통과하면 성자의 영역으로 생각한다. 정반대로 출발한 것이다. 개혁교회는 시작부터 죄인임을 인정하여 성령님의 힘으로, 그들은 선행과정을 거쳐 죄를 깨닫는다.

 제 8장 양자

 1. 양자의 정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세상이라는 현제상태의 세속적인 가족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의 가족으로 전입시킴과 같은 것으로서 법정 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한다.

 2. 양자에 대한 기업

 공포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누림

 하나님과의 간격이 없는 교제를 나눌 수 있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음

 제 9장 성화

 성화란 무죄 선언을 받은 죄인을 죄의 오염에서 건지셔서 그의 전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닮아가도록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다(롬 8:14).

 1. 성화의 성경적 용어

 성화란 무엇인가? 성령님께서 우리들을 죄의 오염에서 건지며 죄의 오염을 제거하시는 사역이다. 거룩하게 되는 일은 우리가 불가능하지만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죄악의 생산 공장과 같아서 죄악을 끊는 일은 은혜의 역사요 적극적으로 성령님의 사역이다.

 죄책이 제거는 칭의에서 이루어졌지만 오염의 제거는 복음의 계속적인 선포로 이루어진다. 무죄의 선언은 단번에 이루어진 법적인 축복이다. 어떤 경우 오판하여 죄가 없어도 있다고 선언하면 죄인이 되어 해명될 때까지는 감옥살이를 하듯이 반대로 죄가 있어도 없다고 선언하면 죄인이 그 죄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성화는 오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회개나 성화가 전적인 성령님의 역사라면 우리가 할 일이 없지 않느냐라고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회개는 우리가 하지만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감동 즉 조명과 이끄심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역사 하신다. 사람이 협력하지만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공로적인 차원에서의 신인협동이 아니다.

 2. 거룩함과 성화의 성경적 관념

 거룩을 하나님께 먼저 적용할 때는 첫째 피조물과 죄와 구분됨에 있어서 이며 둘째 신성의 완전성을 표시하기 위해서이다. 즉 거룩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항상 영광과 거룩은 같이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이다.

 구약의 경우 옛 언약 백성들은 몇 사람의 인물 특히 제사장들에게 거룩을 적용했는데 그 거룩의 표시로 몸을 깨끗이 했고, 의복도 깨끗이 했고, 또 하나님을 뵈올 때 백성들에게 옷을 빨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마음도 깨끗하게 했지만 그것은 다 거룩하게 하시는 표시이었다. 몸을 깨끗하게 하면 마음도 깨끗하고 건강하게 사는 비법 중 하나가 몸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깨끗한 몸을 보존해야 하는데 환경의 오염은 심각한 문제이다. 모두가 잘 먹고 잘 입는 일에 급급함이 현실의 문제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몸을 깨끗이 한 것은 신약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될 것에 대한 예표이다.  

 진정한 성화란 무엇인가?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살리는 것인데 이 과정은 시간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동시에 이루어진다. 옛사람이 죽은 다음에 부활 같이 새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을 죽임이 새사람이 사는 길이며 새사람의 일이다. 우리의 기도가 늘 성령님의 충만을 주옵소서 하는데 결과가 무엇인가? 오히려 성화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하는데 옛사람을 죽이는 투쟁이 이루어져야 새사람이 사는 일이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인 옛사람과의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옛사람과 투쟁하지 않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요 죽은 사람은 죄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이다.

 성화의 정의를 더 구체적으로 한다면 a. 죄에서 깨끗하게 함. b. 옛사람과의 투쟁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음이다. 즉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삶을 산다. c. 선행을 해한다. 선행은 성화의 필연적 귀결이며 선행은 믿음의 자연적 귀결이다. 그러니 선생은 성화의 필수적인 열매이다.

 본래 기독교 정신은 남이 잘되게 하고 다른 사람이 유익을 보도록 대접하고 봉사하는 것이며 이것이 그리스도를 닮아 새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우리 교회들은 어떤가? 한국 사회는 어떤가? 물론 사람이니 천사처럼 살수는 없겠지만 자기 유익만을 구하여 어떤 위로와 좋은 말 해주는 것도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해가 계산되어 아첨과 아부를 일삼으니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또 진정으로 바르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에서 돈을 수 없이 투자하여 총회 감투를 쓰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일삼는 일은 봉사보다 세력을 잡아 세상적인 명예와 세도를 누리려는 일은 삼갈 것이다.

 3. 성화의 특징

 악의 원소를 제거하며, 전 인격에 영향을 미친다. 성화는 영적 성장이지만 평생 동안 계속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사역으로서 신체와 영혼에 호소한 것이 성화의 특징이다.

 a. 성화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시다.

 성화는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지고 성화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의 자유의지를 행사하심으로 그 성령님을 따라 사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일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으면 성령님을 슬프게 함이요 혹은 자동적으로 성화가 되는 것으로 착각함이다.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에 우리의 자유의지로 동사한다.

 b.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화를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하는 재창조의 사역이다. 새롭게 지어지는 것이다. 성화는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계속적이어야 하고 중간에 멈추지 않아야 한다.

 알미니안 신학은 두 번째 특별은혜를 받으면 완전에 이른다는 완전주의로서 성령님의 세례를 그리스도인이 다시 받아야 한다는 것은 특별은혜를 구하는 도식이다. 흔히 부흥회 때마다 특별은혜를 강조하는 것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죄와 피나는 투쟁의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인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않고 특별은혜를 받아 완성에 점프를 한다. 성화의 완성은 부활 때 이루어진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성화의 완성은 없다. 우리가 옛사람의 무덤을 준비한다고 해도 우리의 손으로 장사를 지낼 수 없음과 같이 성화는 부활 때 완성된다.  

 4. 성화의 성질

 1) 성화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다.

 성화의 성질은 영혼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중생으로 심어진 거룩한 성향이 강화되고 실현되어 죄의 오염 혹은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단으로 제일 좋은 것은 말씀이며 또 다른 수단은 고난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의 성화에 좋은 수단이다. 보통 자기 자신을 말씀과 고난 없이 성화 되는 특별한 축복을 받은 존재로 알기 쉬운데 그것은 이 법에 배치된다. 시편에는 고난당하는 것이 네게 유익이라 고난당하기 전에는 주의 말씀을 알지 못하더니 고난당하므로 주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고난당함이 성도들에게서 죄악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좋은 방편일 수도 있는데 성도들에게 축복만을 강조하여 잘 되도록 하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2) 성화의 구분

 성화는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옛사람을 억제하는 것과  새사람으로 사는 태동이다.

 3) 성화는 전인에게 영향을 준다.

 인격의 어느 한 부분에만 치우치는 가르침이나 강조는 바르지 못한 것이다. 성화는 우리의 이성과 의지와 감정과 양심이라는 전 인격 속에 영향을 준다.

 4) 성화는 성도가 협력하는 사역이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시지 않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바르게 활동하도록 만드신다. 우리가 이를 거슬려 자연을 억압하거나  과도한 욕망을 위하므로 평강을 누리지 못한다. 그런데 은혜는 자연을 억압하거나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여 하나님 앞에 수평적으로 정상적인 것이며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새사람으로 살게 하신다.

 5. 현세에서의 성화의 불완전 성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알미니안의 성결과 완전주의에서는 처음에 받은 중생은 작은 은혜이고 후에 특별은혜를 받으면 완전성화에 이르러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신학은 오히려 실제 생활에서 죄에 대하여 더욱 불안하며 구원의 확신마저 흔들리고 자기 공로로 완전에 도달하려는 율법주의에 이른다. 그러나 현세에서는 우리가 욕을 입고 사는 한 죄의 오염을 해결하지 못한다.

 한국 장로교회가 이 진리에 굳게 서지 못하여 성결교에 가서 잘 가르쳐야 하는데 그런 일은 없고 오히려 유명한 부흥사들이 장로교회에 와서 완전주의를 많이 가르쳤다. 장로교회와 침례교회를 제외하면 모두 알미니안 신학이다.

 베드로도 성령님의 세례와 성령님의 충만을 거듭 받은 사람으로 기독교를 세우고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안디옥에 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사마리아를 개종시킨 사도도 실수해서 바울에게 책망을 받았다. 바울은 어떤가? 바울같이 불이 활활 타오르는 사도도 마가가 부자 집에서 태어나 편하게 살다 전도여행을 하는데 고난을 참지 못해서 돌아갈 때 반대하여 바나바와 크게 다투고 헤어진 면에서 보면 바울도 감정적이다. 바울에게 바나바가 누구인가? 바울에게 바나바만큼 은인이 없다. 바나바만큼 위대한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나? 누가 바울의 개종을 누가 믿어주었나? 예루살렘 교회에 바나바의 수고로 수납되었다. 사도들이 바나바에게 안디옥에 가서 목회 하라고 했을 때 다소까지 가서 바울을 데려다가 목회자로 삼고 자기는 조력자가 되었다. 이런 자를 마가 때문에 크게 다투어서 헤어졌던 것이다. 바울이 말년이 되어서 생각해보니 내일에 유익하니 마가를 다시 데려 오라고 했던 것이다. 알미니안의 성령님의 충만과 완전주의자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사는 날 동안 성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6. 성화와 선한 일

 1) 선행의 성질

 선행이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행위와 도덕적인 것과 예술적인 분야와 학문 활동도 선행에 속한다. 여기에서 구분할 점은 시민 선이다.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인이 혼돈 하는 것은 시민 선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것으로 오판하고 있다. 외형적으로 볼 때는 분명히 선행이지만 자기의 공로와 자기의 의로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선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충동되어서 자기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자기를 과도히 의식하면서 선행을 하는 경우는 시민선의 경우이다.

 헌금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교인들의 생활을 평준화하기 위해서 그 원칙으로 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며 나눔의 삶을 위한 헌금이다. 이웃을 도울 때 불신자들에게도 돕고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는 접촉점의 헌금이라 왜 안 돌아오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구제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회생활의 평준화의 법을 누가 실천 하는가 국가보다 교회가 앞서야 한다.

 2) 선행의 공로 적 특징

 많은 선행을 했어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가 선행을 한다. 요한일서에 보면 주의 은혜가 선행을 하시지만 모두 다 우리가 한 것으로 인정하시고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 어떤 동기로, 어떤 표준에 의해서 선행을 하느냐?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의 의가 선행의 표준이고 공력이다. 즉 우리의 선행이 그리스도에게서 온 선행의 능력으로, 생명의 능력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잇는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옴으로 선행을 할 수밖에 없다. 이를 은혜라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성도가 된 후에도 선행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상 받을 것을 목적하면 시민 선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인가?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릴 의무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피조물로 서요 당연한 것이므로 공로가 될 수 없고 능력이나 공로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니 생애를 바칠 의무가 있다.

 3) 선행의 필요성

 왜 선행이 필요한가?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내 속에 있기 때문에 선행을 한다. 이는 새 생명의 법칙이다. 우리가 선행을 하도록 지으신 분이 계시고 그 선행을 하면 하나님께로 영광이 돌려진다. 그러면 어떻게 선행을 할 수 있느냐? 믿음 때문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선행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선행을 할 것이냐? 율법이 생활규범으로서 그 율법을 지킨다. 율법이 선한 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육이라는 우리의 본성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영에 의해서 지킨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이 우리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서 율법을 지켜 주신다.

 제 장 성도의 견인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자들은 반듯이 구원을 받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성도의 견인이라고 한다.

 1. 성도의 견인은 한번 주신 은혜가 상실되지 않고 끝까지 계속되어 궁극적 구원에 이르게 함이다. 왜냐하면 이 은혜가 은혜언약에서 왔고 은혜언약의 기본 특성은 은혜의 불변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 성 혹은 신실성에 입각해서 한번 주신 은혜가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그러면 택한 백성이라도 범죄 하면 멸망하느냐?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상실되지 않게 은혜를 주시며 소실되지 않고 구원에 이르도록 그를 붙잡으신다. 은혜가 붙잡아 준다는 것은 개혁신학에만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어떻게 하시는가? 어려움을 많이 당하고 빨리 데려 가신다. 오해 살고 싶으면 죄지을 생각을 하지 말고 몸을 무리하지도 말라.

 2. 견인 교리에 대한 증거

 견인의 교리가 거짓, 태만, 방종, 부도덕으로 이끌려 간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심겨져 있기 때문에 거룩에 머무는 것이 필수적이다(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    

 우리는 죄에 대하여 담력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 말고, 크게 일하고 명성이 뛰어난 것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는 말씀에 따라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사역의 목표를 따라서 살자.

 그리스도이의 윤리는 성화인데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전에도 말했지만 그리스도와 연합에서 그리스도의 안에 심기 움에서 나온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은 구원의 도리에서 가장 신비한 부분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요 심기 움이다.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면 기독교 신학을 이해한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냥 예수만 믿고 교회에 속해 있는 것 외에 그리스도에 연합되어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과 하나 된 몸과 하나 된 살과 하나 된 뼈와 피를 이루어서  살아야 할 것이다.

 3) 성도의 견인에 대한 추론적 증명

 (1) 선택의 교리: 선택은 불변적이어서 피택 자의 구원을 확실하게 한다.

 (2) 구속언약의 교리: 성부와 성자가 당사자이면서 성자가 중보이시므로 성도의 견인은 확실하다.

 (3) 마음에 성령과 말씀의 역사: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에서 떠나지 않도록 역사 하신다.

 이러한 교리를 부정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인간 의지에 의존하게 된다.

 제 11장 영화

 영화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혼과 신체가 함께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구속의 최종 완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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