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만경창파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떠나가니/ 아- 위태하구나 위태하구나”
이 찬송은 고 김활란 박사(1899-1970)가 1921년에 지은 찬송입니다.
김박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여성 지도자요, 기독교교육가로 이화여자대학교총장을 지내셨습니다.
김활란은 1899년 인천 배다리라는 동네에서 8남매 중 5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어려서 7살 때에,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받았는데, 헬렌(helen)이라고 했는데,
그의 부친이 ‘활란’으로 고쳐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여성으로 최초의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며,
한국YWCA를 조직하였고, 이화여자전문학교의 7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해방 후에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으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라몬 막사이상을 수상하였고,
미국 감리교회가 수여하는 다락방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일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여성교육과 한국복음화를 위하여 헌신하였고, 그는 죽으면서 유언하시기를
“장례식 대신에 더 풍성한 생명의 길로 환송해주는 환송예배를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거기에 적합하게 모든 승리와 웅장하고 신나는 음악회가 되기를 원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 장례를 모실 때에, 그의 유언에 따라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웅장한 환송음악회를 열어 장례식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그녀의 영전에 대한민국 외교공로상 최고 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활란박사는 1939년 4월에 제7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40세였습니다.
정말 어려운 시기에 커다란 책임을 지게 된 그녀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힘과 능력을 다해 학교를 위하여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1940년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에게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추방령이 내려졌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주던 선교사들이 떠나가자,
이제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해야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다른 기독교 학교들은 하나 둘 폐교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김활란 박사는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이화는 이에 굴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고
뜨거운 기도로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갔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은 죄 없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그는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일본에 협력하게 되었고,
바로 그것이 그녀의 일생을 통해 가장 큰 회한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그런 친일행각이 없었다면 우리 여성의 어머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1921년 그의 나이23세 때에 지은 찬송시를 읽어보면 1919년 기미 독립만세 이후
우리나라는 큰 바다를 항해하는 작은 배로 비유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건져주시고
구해주실 것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들어 있습니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 폭풍이 일어나는 바다 위에 작은 배 한 척이 외로이 떠 있으니,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바로 그런 모습이 우리나라의 현실이었습니다.
작은 배의 사공이 고군분투하면서 배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오려고 하지만,
정말 힘이 없음을 실감하면서, 어려움과 역경 중에도 한 가닥 희망이 보이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배안 계심을 믿고, 기도올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이 죄인 굽어보사 성난 풍랑 잔잔케 하시고/
이 불쌍한 인생을 살리소서/ 오- 우리 하나님 우리 하나님”
기도하던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감격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모진 바람 또 험한 큰 물결이 제 아무리 성내어 덮쳐도
권능의 손 그 노를 저으시니 오- 잔잔한 바다, 잔잔한 바다”
마지막 절이 가장 좋습니다. <퍼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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