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 출생하고, 1885년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와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 모임에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선박충돌사고로 인해 44세의 젊은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seller)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별히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학교와 교회를 통한 그의 선교활동은 단지 과거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 목회자들에게도 여전히 감동과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선교사로서의 그의 목회사역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아펜젤러의 목회사역 방향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의 어린 시절과 학교생활에 대해 언급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간단하게 소개해 본다.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의 스위스 이민 제 4대로서, 어릴 적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배우는 경건한 신앙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특히 타락한 현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독일계의 메노나이트파의 경건성을 훈련받았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가정의 이러한 신앙적 분위기는 그 뒤 그로 하여금 ‘뜨거움’을 갈망케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개혁교회에서 장로교회로, 또 대학시절(1879년)에 감리교로 옮아갔던 것도 당시 감리교회의 분위기가 이러한 열정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펜젤러는 랭카스터의 개혁교회 계통인 Franklin and Marshall대학을 마친 후, 뉴저지 주에 있는 드류(Drew)신학교에 갔다. 거기서 신앙과 지적인 훈련을 쌓는 한편, 당시 미국 신학생들에게 일고 있던 해외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처음에는 일본에, 다음에는 한국에 복음선교사로 갈 결심을 굳히게 된다. 지금은 드류에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영향도 크게 미치고 있지만, 당시 교수진들은 19세기 비판적 성서연구와 진화론과 신학적 자유주의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복음적인 노선에서 아펜젤러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설교 “신생(Regeneration),” “양자결연(Adoption),” “체험적 종교(Experimental Religion)," “인간이란 무엇인가?(Man-What?)” 등의 내용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1888년 11월 25일 Seoul Mission Church에서 한 “체험적 종교”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그는 학문의 업적을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외부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인정을 하고 감사하지만, 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머리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진정한 기독교의 힘은 죄에서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힘에 대한 그리스도인 각자의 증거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앙은 인간 본성의 보다 깊은 욕구를 만족시키며, 갈망하는 영혼은 우리 주의 신앙의 위대한 진리에 대한 신앙에 사로잡힐 때 만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복음주의적 신앙의 토대 위에서 그는 한국 땅에서 교육사업과 교회를 통한 선교활동을 펼쳐나간다.
1. 교육활동
그의 목회사역을 얘기하면서 교육사업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효과적인 복음 선교를 위해서는 먼저 학원 선교가 필요하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이 바로 복음 선교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서울에 도착하고(1885년 7월 29일) 한달이 채 되지도 않아 교육사업을 먼저 시작하게 된다. 85년 8월에 쓴 편지에서 그는 자기의 학교에는 벌써 4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그 이듬해(1886) 6월 8일에는 정식으로 학교를 시작했는데, 87년에는 이미 재학생이 63명이며 평균최고 출석수가 40명이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교육사업을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구원사업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목회에 대한 기본입장이었다.
지난 한해(1887)동안 2명의 학생이 기독교로 개종했고, 현재 우리 교회 예비교인으로 있다. 이들은 내가 최초로 세례를 준 한국인들이다. 나는 또한 우리 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 가운데서 한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처럼 개교 첫 해 동안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학생들 가운데서 구원사업을 시작하셨다.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유용한 인재”는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주의 피로써 구원받지 않고는 “양육”될 수 없다. 다른 학생들은 길을 묻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기도와 심령의 소원은 이 학교를 특별한 영적인 힘이 넘치는 학교로 만드는 것이다(미감리회 선교부 1887년도 연례보고서).
당시 문호를 개방하고 해외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국의 상황에서,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곧 출세할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시행하는 영어교육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었다. 이렇게 찾아오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아펜젤러는 영어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온 것은 남을 섬기는 종이 되기 위함이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희생물로 바치기 위한 것이라는 진리의 토대 위에서, 자기 사회와 나라에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섬기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가 기대했던 교육은 통역관이나 교환수 등의 기능인을 양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좋은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고, 크리스챤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열정을 가지고 1885년 후반기부터 시작된 그의 학교에 대한 평판은 서울시내 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알려졌다. 한국 정부에서도 비록 선교사에 의해 경영되는 것이지만, 국왕이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펜젤러는 신앙교육을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층 강화하였다. 아직 국내에서는 신약성경이 번역되지 않았으므로 배재학당에서는 한문신약성경을 교과과정의 일부로 삼았는데, 이는 학교에 입학한 전원에게 기독교 교육을 실시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그의 신앙훈련을 통해 학교의 분위기는 점점 신앙적으로 바뀌었고, 1890년대 후반에 가서는 크리스마스 때에 불신학생까지도 예수의 탄생을 통해 자신들이 받은 축복을 증거하게 되는 등 학교는 완전히 기독교정신으로 충만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교육이념과 신앙훈련은 처음에 오로지 벼슬을 목표로 입학했던 젊은이들을 변화시켜 갔다. 그들 중에 교과과정만 밟고 학교를 마친 사람들이 많았지만, 많은 수는 아펜젤러의 교육이념과 신앙훈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며, 때로는 그들의 요청에 의하여 한 주간 기도회를 가지기도 하고 성경공부반이 열리기도 했다. 이렇게 새로운 교육과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개인의 삶이 변화되자 그 변화된 삶은 누룩과도 같이 사회에 퍼져 들어가게 되었다(이만열편, 「아펜젤러」,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p.488 참고).
2. 복음선교 활동
아펜젤러는, 당시 북감리교 해외선교부가 매클레이 목사를 통해 한국 정부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 처음에는 복음선교를 위한 교육에 전념하는 듯이 보였으나, 그의 중심에는 기독교 신앙의 복음 진리를 널리 전파하는 것이 선교사로서의 그의 주된 임무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복음을 통해서라야만 이 땅의 민족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라는 간구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종교 활동이 아직은 공개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 복음선교 활동을 해나갔는가?
1) 주한 외국인 전도
한국인에게 복음을 바로 전할 수 없는 당시의 상황에서 아펜젤러는 우선 재한 외국인을 상대로 복음전도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펜젤러는 재한 외국인들로 이루어진 연합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봉사하는 한편, 1886년 초부터 주일 오후에 일본인을 위한 성경공부를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 성경공부는 일본 공사관의 직원인 하야카와 데찌야와 그의 동료 두 사람과 함께 마태복음을 가지고 시작 되었다.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 성경공부 모임을 두고 아펜젤러는 자신의 선교사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자부하였다. 이렇게 계속되던 정기적인 성경공부는 1886년 9월에 이르러 일본 영사 유키 씨의 집에서 모이게 되었는데, 이 해 가을에 12명이 모였고, 이 사실은 일본 기독교계의 The Christian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지난 다음날 주일 오후에는 일본인들과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성경공부가 이제는 주일예배로 발전해 간 것이다. 이렇게 꾸준히 계속된 성경공부와 아펜젤러의 설득으로 1887년 4월 10일 부활주일에는 일본 영사관의 무관 수기바시 고이치로씨가 세례를 받는다. 이는 1886년 4월 25일 부활주일에 마리온(스크랜톤 박사의 딸)과 에리스(아펜젤러 자신의 딸)와 함께 공사관의 직원인 하야카와에게 세례를 베풀고 난 후 두 번째로 일본인에게 세례를 베푼 것이었다.
이와 같이 아펜젤러가 한국인 선교에 앞서서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를 강화했던 것은 선교전략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한국정부가 아직도 선교사들의 복음전도를 허락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에 대한 선교는 한국인 전도를 위한 분위기 조성의 방법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선교사임을 알리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현지 사정을 이해하면서 무모한 선교전략으로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나름대로 효율적인 접근 방법이었다고 생각되어진다.
2) 한국인에 대한 전도
아펜젤러는 한국 정부가 선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은 상황에서, 배재학당의 개설을 준비하고 재한외국인 교회를 인도하며 동시에 재한 일본인의 성경공부반을 이끌면서, 한국인에게 복음 전할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1887년 2월 21일에 선교사들의 의료, 교육활동에 호감을 가진 왕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게 되자, 자신이 이제는 정부의 인정을 받아 한국인 앞에 떳떳이 설 자리를 마련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1887년 7월 24일 박중상이라는 학생에게 세례를 베풀므로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감리교신자가 태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1887년 10월 2일 주일날 저녁, 아펜젤러는 그의 거실에서 한용경 학생에게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때 그는 한글로 번역된 세례예식서에 의해 한국어로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은 한국 교회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렇게 학교를 통한 개종자가 생기는 분위기에서, 1887년 9월에 한국에 온 워렌 감독이 선교사들에게 보다 활동적으로 움직일 것을 강력하게 부탁하자 이에 고무된 아펜젤러는 그 해 10월 9일 주일날 오후에 네 사람의 한국인과 함께 ‘벧엘’에서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예배를 시작하게 된다. 물론 이 이전에도 한국인들은 가끔 50여 명까지 모이는 외국인들의 연합교회 예배에 같이 참석하여 기독교에 대한 큰 관심을 나타내기도 하였지만, 한국인만의 독자적인 모임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예배에 대해 아펜젤러는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사방 8자되는 방에 모여서 한국식으로 앉았다. 내가 영어로 기도하고 시작하였으며, 우리는 마가복음 1장부터 읽었다. 그 다음 장 형제가 마치는 기도를 인도했다. 모임은 우리들에게 깊은 관심으로 가득 찬 것이었으며, 나는 하나님께 이 모임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중심지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1887년 10월 11자 아펜젤러 일기).
벧엘에서의 두 번째 예배를 드린 10월 16일 주일에 아펜젤러는 29세의 최씨 부인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여성에게 처음 베푼 이 세례에 대해 그는 무척 감격해 하였다. 그다음 주일인 10월 23일에는 한국에서 감리교 최초의 성찬식을 가지게 된다. 이 때 회중은 ‘우리의 기도문’(our liturgy)을 사용했으며 모두 경건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느꼈다. 이제 벧엘에서 한국인 예배를 시작한 아펜젤러는 거기서 한국인 형제들과 더불어 교회 공동체가 누려야 할 성례--세례와 성찬식--를 거행한 것이다. 그는 성찬식을 거행한 감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렇게 생명의 떡을 이 백성에게 떼어 주다니, 오 얼마나 큰 은혜인가! 감사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 떡을 먹고 살아가게 하옵소서.”(1887년 10월 31일자 아펜젤러 일기)
선교초기 모든 것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만찬을 거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을 고려해 볼 때, 아펜젤러의 이러한 성례전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본받아야할 점이라고 믿는다. 예배에 말씀과 성찬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오랜 교회의 전통으로 오늘날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할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성만찬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은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 그리고 감리교 창시자인 죤 웨슬리 목사와 최초의 한국 감리교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의 정신을 잇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펜젤러에게 보이는 일련의 선교활동의 한 유형은 이와 같이 먼저 세례를 베풀고 성찬을 같이 하는 ‘성례’를 중시하는 것이었다. 성례는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교회됨을 확인하는 예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먼저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세례 받는 이들이 모여 주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식을 거행함으로써 교회설립을 구체화하는 과정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교육과 의료사업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교회중심의 선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기부금을 통해 1897년 10월 3일 주일에 예배당을 완공하여 첫 예배를 드리고, 12월 26일에는 이 아름다운 교회건물을 봉헌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서울에서만 선교활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재한 외국인과 한국인에게 전도하고 세례를 베풀던 아펜젤러는 종교에 대한 억제가 다소 풀려감을 의식하고는 전국을 여행하면서 전도를 하였다. 그의 여행의 일차적 목적은 이 나라를 탐험하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전략적 요소를 고르는 것이었는데, 에를 들어, 1887년 4월에 서울을 떠나 평양에 이르기까지 그는 당시의 풍경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인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절망과 이들을 구원하기 위한 결심을 그의 일기에서 잘 말해주고 있다. 기록을 보면 그는 1888년 한 해 동안 전도사업을 위해 1,830마일(약 2,945Km)이나 지방 여행을 강행했는데, 그 가운데 1,400마일(약 2,252Km) 이상은 승마 여행이었다고 보고한다. 이러한 그의 복음선교에 대한 열정은 죤 웨슬리를 생각나게 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도 이런 열정을 갖도록 도전주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3) 선교지 언어를 통한 선교
선교지에서 효과적인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곳의 문화, 사회관습, 그리고 무엇보다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지금과 달리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없던 당시 선교사들이 한글을 배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처음부터 한글을 배우기 위해 힘썼고,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50여명이 되고 한국인들의 예배를 인도하게 되는 1887년 말에 와서는 한국어로 가르치고 설교해야 한다는 강한 의욕을 여러 번 피력하였다. 때문에 그는 이 해 크리스마스 때에 자신이 한국어로 설교를 하게 된 것을 두고 “이것은 위대한 연설”이라고 멋쩍게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직접 설교문을 쓸 수가 없었고, 권서 최씨에게 그의 생각을 말해주면 최씨가 적당한 한국말로 표현해 주었다. 그러면 그는 원고를 읽는 방식으로 설교를 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언젠가는 원고에서 벗어날 것을 희망하면서, 자주 한국말로 설교를 시도하였다.
이렇듯 아펜젤러는 한국어를 습득하고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바쁜 중에도 하루에 5시간씩 한국어교육을 계획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수년 후에는 한국어를 통해 그의 생각을 전달하는데 마치 일상 언어처럼 익숙해졌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신약성서 번역 사업에서 그는 마태, 마가복음, 고린도 전후서를 번역할 수 있었고, 그가 참여한 한글 신약성서의 완성을 감사하는 예배를 1900년 9월 9일 서울의 제일교회(지금의 정동교회)에서 가질 수도 있었다. 19세기 말에 서양의 선교사가 한국어로 직접 설교하고 가르치고 글을 쓴다는 것이 선교에 얼마나 효과적이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목회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도전을 준다.
아펜젤러의 목회사역을 정리하면서, 또 한 가지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데 최상의 성과를 거두려면, 목회자는 협동할 줄 아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펜젤러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선교사들과 협동하며, 한국인들에게도 고압적인 자세가 아니라 함께 협동해 나가자는 솔직함을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이 의심과 경계심의 마음을 풀고 진지하게 그들의 마음을 열었던 것을 본다. 그리하여 전도자, 교육자, 종교신문의 편집자, 번역자로서 그의 활동이 한국교회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포용적이고 열린 마음의 목회자였기에 그는 타종교나 타교단과 큰 마찰이 없이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일반 백성은 물론 국왕조차도 아펜젤러가 한동안 휴가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혜택을 받을 수 없음에 그리고 친히 그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유감스러워한다는 전갈을 보내왔고, 그뿐만 아니라 사신을 보내 안전한 여행이 되기를 빌면서, 감사를 표시하는 기념품들까지 하사하였던 것을 보면 그의 인품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나도 알 수가 있다.
어려서부터 경건한 신앙훈련을 받은 한 사람이 복음의 열정과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낯선 문화의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우리 한국사회와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우리의 목회사역에서도 그의 열정과 열린 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이 시대에 새로운 변화와 도전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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