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수선공이 위대한 비전의 세계 선교사로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 된 캐리는 세계선교에 무감각한 교회를 일깨우며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유언적 명령이 곧 우리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을 믿고 세계선교에 대한 원대한 비전과 성령의 불은 타오르게 되었다. 해외선교는 교회가 맡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792년 봄 그는 '이교도 개종에 대한 크리스천의 의무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통해 세계선교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와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당시 이 책은 루터의 95조항과 함께 베스트 셀러가 되어, 뜨거운 세계선교열풍을 전 유럽으로 확산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후 캐리는 침례교회연합회 모임에서 이사야서 54:2,3 '네 장막터를 넓히라.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것임니라' 말씀을 여러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원대한 비젼을 심어 주었다.
그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 그 다음날 감동과 도전을 받은 목사들이 새로운 선교회를 만들기로 합의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침례교 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였다.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결단하자, 그의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와 그리고, 그의 목회지인 하비레인 교회의 성도들도 캐리와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잃는다는 생각으로 완강히 반대했으나, 곧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기도로 지원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사랑하는 가족 모두와 처제, 그리고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침례교 선교위원회가 파송한 최초의 인도 선교사가 되어 인도땅에 도착했을 때, 인도는 선교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혹시 선교사역 때문에 상업적 이익에 손해를 볼까 두려워하여 선교사역에 대한 심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동인도 회사가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1794년 캐리는 무드나배티 지방의 인디고 공장에서 감독으로 취업의 길을 열어 주어서 이전까지의 연봉의 5배를 받게 되어 자비량 선교를 하고 번역을 위해 돈을 저축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본국의 선교회를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고자 하여 자비량 선교의 본을 보였다.
세람포에서의 선교사역의 성공은 그의 덕 있는 인격이 첫째로 작용한 결과였다. 물질적인 희생을 감수하고 모든 것들을 희생하는 그의 태도와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는 넉넉한 인격이 선교사역을 넓혀 가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캐리는 성경번역과 더불어 말씀을 전파하고 또 여러 학교를 세웠다. 그렇게 벵갈에서 7년간 땀 흘렸지만 단 한 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그 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큰 업적중의 하나는 영적 지도자들과 복음 전파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세람포 대학(Serampore College)을 세운 것이었다.
1800년 공장을 정리하고 덴마크의 영지인 세람포르로 옮긴 캐리는 공동생활이 선교에 여러가지로 효과적이라고 확신하고 여러 가족을 한 공동체로 묶어 공동사역을 시작하였다. 캐리와 워드와 마쉬만 그리고 케리는 세람포르의 삼총사라 불리웠는데, 23년간 팀을 이루어 서로간의 긴밀한 사랑의 교제로 힘을 얻으며 믿음의 역사를 이루었다.
대형화재로 인해 수년간 작업한 것이 소실되었으나, 삼총사는 팀웍을 새로이 갖추고 다시 도전하여 믿음으로 낙망치 않고 도전하여 결국 수 많은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다. 그는 산스크리트어, 힌두어도 열심히 공부하고, 성경을 벵갈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계속했다. 캐리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인도 종교경전들을 조사하여 어린아이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과 과부들을 부당하게 죽이는 사티제도도 폐지시켜 나쁜 관습을 폐지하고 좋은 전통을 계승시켰다. 캐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쌓았다.
캐리는1834년 73세의 일기로 그토록 사랑했고 헌신한 인도 땅에 묻혔다. 윌리암 캐리는 그의 그칠 줄 모르는 뜨거운 열정과 끈질긴 도전으로 18세기의 타락한 영국을 구원하였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 잠자고 있는 영국을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로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리라는 그의 거대한 믿음과 선교의 뜨거운 열정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세계선교의 불을 당기었다. 인도에서 그가 썩은 밀알이 된 헌신된 삶을 통해 근대 선교 역사가 시작되었고 19세기 선교황금시대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성취하라"
(Expect great things for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캐리는 자신의 뜻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을 자신의 묘비에 새겨줄 것을 부탁했다.
"윌리엄 캐리, <?XML:NAMESPACE PREFIX = ST1 />
가엾고, 불쌍하고, 무력한 벌레 같은 인간, 당신의 친절한 팔에 안기나이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었을 때, 캐리 박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를 말게.
캐리 박사의 구주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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