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앙인물

개혁자 존 낙스

안명애 2015. 6. 21. 21:22

해밀톤의 순교에서부터 종교개혁이 성취되기까지 30여 년 간 약 20여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순교자의 길을 갔는데. 이들 가운데 훗날 낙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죠지 위샤트(George Wishart)였다. 그는 낙스를 회심(?)시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스코틀랜드 전체를 그리스도에게 바치게 했던 사람이었다. 
   죠지 위샤트가 영국에서 돌아와 관헌의 눈을 피해 성경을 강해하러 다닐 때 낙스는 에딘버러시에서 떨어진 어느 시골 귀족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 당시 낙스는 이미 성직자였으나 교회를 섬기는 것 외에도 세속 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소위 세속승이었다. 위샤트는 낙스가 봉직하고 있는 귀족집에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강해하기 위해 방문하였는데 이것이 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고, 이 만남은 낙스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존 낙스의 초기 생애 
존 낙스(John Knox, c. 1515-1572)는 스코틀랜드의 개혁자로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특출한 지도자이자 장로교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지만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낙스에 대해 가장 오래된 기록을 남겨 두었던 데오도 베자와 기타 다른 이들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그는 1512년 경에서 1515년경에 출생하였다. 또 베자는 그의 「아이콘스」(Icones)라는 책에서 낙스는 스코틀랜드 동부 로티안(East Lothian)의 해딩톤에서 별로 멀지 않은 기포오드(Gifford) 출신이 넋으로 기록하고 있다. 낙스는 후일 제네바에 거주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를 가리켜 해딩톤 출신이라고 말한 점을 보면 이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그의 부모님들은 농부였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하나님의 나팔수」(Trumpeter of God)라는 제목의 낙스의 전기를 쓴 스텐포드 리드(Stanford Reid)는 그가 ‘중산픙’(the middle sort) 출신이었음을 특별히 강조하였는데 이 점은 낙스의 생애를 해석하는데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서류상으로 남아 있는 증거는 없으나 낙스는 해딩톤에 소재한 지방학교에 취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1529년에는 성 앤드류스(St. Andrews)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16세 전후였다. 그러나 그가 대학을 졸업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성 앤드류스 대학교의 졸업생 명단에 낙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대학에서 수학한 점은 분명하나 졸업은 하지 못하고 가정교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로마가톨릭 교회 성직자로서 서품받았을 때는 1536년경으로 추측된다. 신부가 된 그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분명치 않다.
   그런데 1540년에 이미 낙스는 ‘존 낙스 경’(Sir Joh Knox)으로 불리는 교황 휘하의 공증인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기성 교회 체제 안에서 인정을 받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공증인(papalnotary)은 변호사와 비슷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각 교구(parish) 내에서 중요한 존재였다. 공증인은 자기의 서명으로 각종 법적 서류들의 효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낙스는 1540년 이후 가정교사로서 그리고 공증인으롯 활하였는데 비교적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을 했으나 이러한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다. 그가 공증한 서류 중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중의 하나인 1543년 3월 27일자의 문서를 보면 ‘그리스도를 통한 신실한 증인,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Testis per Christum fidelis, cui gloria)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점은 그가 이 땡에 이미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낙스가 언제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점이 되고 있다.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낙스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의 정황과 낙스의 생의 자취들을 추적함으로써 이 점을 해명하는 도리밖에 없다. 어쩌면 오랜 기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그의 신앙관의 변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위샤트와의 만남
1540년대 스코틀랜드에는 대륙의 개혁사상이 여러 지역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아마도 발틱해 연안으로부터 상인들을 통해 북부로 유입되기 시작하던 이 개혁신앙은 에버딘, 퍼스(Perth)로, 그리고 던디(Dundee), 에딘버러(Edinburgh) 등지로 확산되었고 1540년에는 프로테스탄트 찬송가가 ‘선하고 귀한 노래들’(The gude and godlie ballattis)이란 이름으로 비밀리 출판되기도 했다. 이 찬송가의 노래는 대부분 독일어로부터 번역된 것이었는데, 그 후의 종교개혁 사상을 전파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1540년대 스코틀랜드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전파와 더불어 정치적으로는 친영파(親英派)와 친불파(親佛派)가 대립하고 있었다. 바로 이러 시기에 죠지 위샤트가 등장하였고 낙스가 1545년 경 그를 만났던 것은 그의 생애에 전환점이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낙스가 위샤트를 만났을 이 때에 회심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낙스가 그의 설교를 듣고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고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동행하였고 밤에 여행할 때마다 위샤트 앞에서 긴 칼을 차고 호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행하게도 위샤트는 1545년 추기경 비튼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해 3월 1일 비튼이 보는 앞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위샤트가 로티안 지방에서 보낸 마지막 5주간의 행적을 기록한 낙스의 글을 보면서 마치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예언자의 직분을 남기고 떠난 것처럼 위샤트는 그가 이루지 못한 교회개혁의 꿈과 이상을 낙스의 어깨 위에 남겨두고 떠난 것을 느낄 수 있다. 위샤트를 보위하며 보낸 5주간의 낙스의 생활은 그로 하여금 개혁자로서의 길을 가는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1546년 5월 29일,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단의 신자들이 비튼 추기경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살해한 것이다. 이것은 준비된 거사였고, ‘위샤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한 프로테스탄트의 분노의 폭발’만이 아닌 복합적 이유를 지닌 응징이었다. 당시 왕 제임스 5세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성 앤드류스의 대주교였던 비튼 추기경의 영향력은 등대되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정계에서 로마 가톨릭과 친불파를 이끄는 중심인물이었다. 비튼은 많은 정부(情婦)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교회소유의 성직록을 좌우하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하던 악명 높은 추기경이었다. 어떤 기록에 보면 위샤트는 처형당하기 직전 비튼이 수개월 내에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점은 아마도 당시의 비튼 제거를 위한 음모가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 앤드류스의 설교자
비튼의 사망 이후 성 앤드류스는 신교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스코틀랜드를 사랑하는 애국주의자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낙스는 이곳으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그가 가르치던 세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1547년 4월 10일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아마도 이곳에서는 박해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교제를 나눌 사람들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앤드류스 성에 도착한 낙스는 스스로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곳의 프로테스탄트 집단의 목회자로 부름받았고 4개월간 설교자로 봉사하였다. 그 후부터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대변자가 되었다. 
   이때의 목회활동에 대해 낙스의 전기 작가인 스텐포드 리이드는 “낙스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목회에 불러 주셨음을 확인시켜 주셨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또 그는 “다른 많은 설교가들이 겨우 나뭇가지를 흔들었다면 그는 교황제의 근본 뿌리를 파해쳤다.”고 함으로써 낙스 자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왕가의 혼인을 통해 비밀조약을 체결하고 있었는데, 이때 왕실은 자기들의 정권유지가 어렵다고 보아 프랑스에 원병을 요청한 것이다. 그래서 1547년 7월 30일 프랑스 함대는 성 앤드류스 앞바다까지 공격해와서 성을 공격하므로 성 앤드류는 함락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살되었고. 120여명에 달하는 젊음이들이 체포되어 프랑스 전함의 노예로 끌려갔는데 낙스도 그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때부터 낙스는 갈리선의 노예(the Galley slave)로 19개원 동안 중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첫 일 년 동안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중노동과 체형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 동안의 경험을 통하여 강인한 지도자로 성장해 갔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대해 보다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하였다. 그는 로마 가톨릭이야말로 우상숭배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는 확신을 얻었기에 이를 증오, 적대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그의 소명과 사명(calling and mission)은 단순히 학술적으로 로마가톨릭을 반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벽을 돌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팔을 불었듯이 완전히 파괴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열과 뚜렷한 목적의식은 그를 교회개혁 운동의 지도자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19개월간 노예로서의 생활을 마친 후 정치적 변화 속에서 석방될 수 있었다. 아마도 하나님은 이 열정과 확신에 찬 ‘하나님의 나팔수’를 망망대해 위에 노 젓는 노예로 남겨 두기를 원치 아니하셨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 문제로 대립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 정부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낙스는 석방될 수 있었다. 이때가 1549년 초였다. 스텐포드 리이드에 의하면 당시 영국 정부는 낙스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 몸값을 지불했다고 한다. 어떻듯 영국정부는 낙스를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만은 분명하다.


 

개혁자의 길
석방된 낙스는 영국으로 갔다. 아직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개혁운동을 전개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영국교회 성직자가 된 그는 스코틀랜드와 영국 국경 근처의 도시인 버위크(Berwick)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영국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항구도시였다. 그는 이곳에서(1549년 이래로) 1553년까지 영구교회 안의 저명한 설교자로 활약하였다. 영국 왕실은 그에게 주교의 지위까지 주려고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당시 영국왕은 에드워드 6세(Edward Ⅵ)였는데 그의 치하에서 교회개혁은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지도력 하에서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낙스가 영국에 정착한지 5년이 되던 해, 곧 1553년 아직 10대 소년에 지나지 않았던 에드워드 6세는 세상을 떠났고 메리(Mary)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열렬한 가톨릭교도로써 가톨릭 신앙회복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삼고 있었던 그녀는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자 영국교회의 천주교 복귀를 선언하고 개신교 지도자를 투옥, 처형시키고 개신교 신앙운동을 극렬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낙스는 다른 개신교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유럽대륙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1554년 1월, 낙스는 런던 시가를 가로 지르는 템즈강에서 배를 타고 영국을 탈출하여 한 때 노예 신분으로 일한 바 있는 프랑스의 항구도시 디에프(Dieppe)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디에프에 잠시 머문 낙스는 스위스 제네바로 갔다. 여기서 그는 칼빈을 만났고 칼빈으로부터 실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제네바를 떠난 낙스는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영국인 망명자 교회에 목회자로 체류하였다. 여기서 낙스는 개혁교회 예배형식을 소개하였는데, 영국의 「공중기도서」를 이탈하였다는 점에 대해서 반발이 있었다. 리차드 콕스(Richard Cox) 등은 낙스의 개혁교회 예배에 반대하고 영국교회 전통을 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낙스는 개혁교회 예배가 가장 성경적이요 가장 이상적인 예배임을 주장하면서 후퇴하지 않았다. 낙스의 이런 견해는 후일 대륙의 개혁교회 보다 충실한 개혁을 주장하였던 청교도운동의 전조가 되었다. 이런 대립으로 낙스는 프랑크루프트를 떠나 1555년 3월(혹은 4월)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고 이곳에 체류하였다. 
   1555년 가을에는 조국 스코틀랜드에 비밀리 입국하여 그곳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는 한편 마조리 양(Miss Marjorie Bowes)과 결혼하였다. 낙스는 벌써 사십이 넘었으나 마조리 양은 이십 세 전후의 젊은 여인이었다. 불행하게도 결혼한 지 5년이 지난 1560년 낙스의 아내 마조리는 세상을 떠났는데, 칼빈은 그녀를 가리켜 “가장 사랑스런 여인”(the most sweet wife)이었다고 말하면서 낙스를 위로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조리는 성실한 아내였다. 아버지와 친척들의 거센 반대에도 무릅쓰고 가진 것 없는 망명객 신세의 목사에게 기꺼이 몸을 맡긴 것을 보면 그녀의 신실성을 알 수 있다고 리이드는 쓰고 있다. 스코틀랜드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제네바에 있는 영국 피난민 교회로부터 목사로 청빙받은 낙스는 이듬해인 1556년 9월 제네바로 돌아갔고 그해 12월 그 곳 영국인들의 교회에 목사로 취임하였다. 즉 낙스는 1556년부터 1559년 1월 제네바를 떠나 조국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기까지 2년 6개월 동안 목회자로 일했던 것이다. 이 기간은 낙스에게 중요한 기간이었다. 그는 칼빈과의 교제를 통해 그의 개혁사상을 터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목사, 장로, 집사를 세우고 장로정치를 실현하였다. 그가 제네바를 가리켜 “사도시대이래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the most perfyt schoole of chryst since the dayis of the Apostille)라고 불렀던 것은 그가 칼빈에게서 가장 성경적인 신앙과 신학원리 그리고 교회 정치형태를 보았기 때문이다.


 

낙스가 제네바에 체류하는 동안 스코틀랜드에는 개혁의 때가 성숙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대한 억압이 있었으나 복음주의 신앙운동은 1555년부터 성 앤드류스, 스터링(Stiring), 던디, 에딘버러, 퍼스(Perth) 등지에서 비밀교회(privy krik)를 형성하였고 급속히 성장하였다. 1555년에서 1556년 사이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였던 낙스에 의해서 스코틀랜드에서는 최초의 개혁 교회 방식의 성찬식이 거행된 일도 있다. 그러던 중 개신교회 연합세력인 소위 ‘종교개혁 추진 동맹’(Lords of Congregation)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1557년 3월 10일 낙스로 하여금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결국 낙스는 1559년 5월 2일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이 시기까지 낙스는 폭넓은 경험을 하였다. 영국과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자들과 교제하였고 특히 칼빈과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그의 사상과 개혁운동을 직접 보고 배웠다. 낙스는 칼빈을 ‘하나님의 유일하신 도구’라고 불렀는데, 그에게서 예배와 신학, 예번과 행정 그리고 개혁정신을 배웠다. 스코틀랜드로 귀국한 낙스는 종교개혁추진 동맹을 관장하고 동시에 에딘버러시의 목사가 되었다. 이제 그의 개혁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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