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 - 이신칭의
1.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청년 루터가 수도사의 길로 들어가게 된 것은 극적인 계기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법률가가 되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스스로 금욕적인 수도사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루터는 자신에게 엄격했으며 죄의 의식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루터는 자신의 의지로 죄에서 벋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선한 존재가 되려고 해도 될 수 없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해 좌절하였다.
"나는 착실한 수도사로서 수도원의 계율을 철저히 지켰다. 그래서 수도원 훈련을 통해 천국에 갈 수도사가 있다면 바로 내가 그런 수도사라고 자처했었다. ...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내 양심은 그러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고 항상 의심이 일어날 뿐이었다. 그 때마다 내 양심의 소리는 내가 옳게 한 것이 무엇이냐고 책망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신과 자신의 간극에 대해 고뇌하던 루터가 성서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진리가 바로 '이신칭의'라는 것이었다. 이 개념에 대한 성경의 구체적인 언급은 바울의 로마서 1장 17절에 기록되어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을 풀이해 보면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을 통해 인간에게 계시되는 것으로,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인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인간의 성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에 따르는 부차적인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선함을 이루려고 했던 루터의 딜레마는 여기서 해결되었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인데 이는 수동적인 의로서 자비의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살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나는 여기서 완전히 다시 태어남을 느꼈으며 이미 열린 문들을 통하여 낙원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루터는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가 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은 우리를 행위에 따라 심판하시는 준엄한 심판관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도움 없이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의를, 그 합일과 평화를 자녀들에게 주시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에게 속한 어떤 속성으로서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관용을 찬양하는 만큼 스스로는 도저히 의롭게 될 수 없는 악한 인간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다 칭해진 죄인들을 사실상 의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소망에 의해서 이미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루터는 여기서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것, 즉 믿음까지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하나님이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루터는 더 나아가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선행은 하나님이 이미 주신 의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야 옳지, 우리가 선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를 허락하시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의로운 삶은 칭의의 결과이지 조건은 아니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그 당시의 신앙인들 사이에서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루터가 말한 대로 의인이 되는 조건이 단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뿐이라면 칭의 받기 위해 열심히 선행을 쌓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에게 루터는 위험한 도덕 폐기론자로 여겨졌다.
루터는 선행을 칭의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았다. 따라서 칭의 받기 위해 열심히 선행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신의 사랑을 인지함으로써 나타나는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사랑의 표출이 진정한 선행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의 이신칭의 사상은 도덕을 폐기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 마땅히 서야 할 자리를 설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칭의를 통하여 일어나는 변화가 신자 개인의 본성이 바뀌는 근본적인 변화라기보다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위치나 신분의 변화라고 주장한다 . 즉 어떤 신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죄에서 완전히 벋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서 죄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칭의 받은 인간은 이미와 아직 사이 즉 구원과 완전한 성화 사이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은혜로서 구원 받았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자신의 죄성에 괴로워하며, 그로부터 벋어나서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의 심성을 닮아가려고 하는 것이 칭의 받은 인간이다. 그는 도덕을 지키고 선행을 베푸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스스로 기꺼이 행한다.
2. 용서에 대한 새로운 신학 – 만인 제사장 교리
루터의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은 그 당시 로마 교황청에 의해 공공연하게 판매되고 있던 면죄부에 대한 반대 선언이었다. 그 반박문에서 루터가 동원한 주요한 논점 중의 하나가 만인 제사장 교리이다.
그 당시 교회들은 면죄부와 같은 비 성경적 판매 사업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칭의 교리에 대해 모호하게 가르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교회는 기존의 교회 권력에 기대어 죄를 심판 하는 진정한 주체가 누구인지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루터는 제도적 교회가 가지는 성직자의 사죄권을 전면적을 부정했다. 그는 이신칭의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가 사람의 경제적 형편이나 사회적 신분과는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거저 주어지는 것이며,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했던 것이다. 신자라면 누구든지 사제나 교회 같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기구나 권위에 기댐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구원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만인 제사장 교리이며, 만인 제사장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보편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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