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 시대의 유대종파들 -사두개파(Sadducees)
사두개파는 히브리어로 tsaddiqim이라고 일컫는데 이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Sadoc)의 후예들로 알려져 있다(III Kings, I, 8, 26, 32; ii, 35; I Par., xxix, 22; cf. Ezech., xl, 46; xlii, 19; etc.). 이들이 정치적 그룹으로서 대두된 것은 존 히루카누스의 통치기(John Hyrcanus, 135-105 B.C.)부터였다. 이들은 헬라화 된 하스모니아(Asmonean)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런 이유로 유대국가의 정통성을 유지하려했던 바리새파들과는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Aristobulus I)와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us) 이래, 그 직계 계승자인 존 히르카누스(John Hyrcanus) 때에 사두개파의 힘은 가장 강력해졌고 바리새파와의 대립은 알렉산드라 살로메(Alexandra Salome, 780-69 B.C.)의 섭정기간 동안 계속되다가 히르카누스 2세(Hyrcanus Ⅱ) 헤롯 안티파터(Antipater) 그리고 로마가 지원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Aristobulus II, 69-63 B.C.) 때에 와서 완전한 패권을 장악하였다. 폼페이가 63 B.C.에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아리스토불루스는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쫓겨났고 로마는 37 B.C.에 이두메 사람 헤롯(Herod the Idumean)에게 통치권을 주었다. 그렇지만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제사장의 직무를 고수할 수 있었고 산헤드린(Sanhedrin, 유대의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헤롯 통치기와 로마가 유대 총독을 파송했을 때 그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Catholic Encyclopedia, Sadducees)
사두개파는 제사장과 귀족 집단이었다. 그들은 바리새파들보다 더 문자적으로 율법을 해석했고 철학적 논쟁을 좋아해서 그것을 덕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성전제사와 각종 의식을 주도했지만 영혼불멸, 육체의 부활, 천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이 율법에 문자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두개파들은 일반 평민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고받지 않았다.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종파들-바리새파(Pharisees)
바리새파는 후기 유다이즘의 한 부류로서 BC 3세기 경에 등장한 정치-종교적 그룹(politico-religious sect)이었다. 이스라엘이 포로기를 지나면서 그들은 반(half) 정치-반 종교적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것은 그 지역 내에 이교적이고 우상숭배적인 국가들의 영향이 점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려 함이었다. 그들은 구약 외경인 에스드라서(Esdra.,10:11)에 의거하여 자신들의 구별됨을 주장하였다. "이제 당신의 조상들의 하나님 주께 죄를 고백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며 이 땅의 사람들과 당신의 이방인 아내들로부터 당신 자신을 구별하시오"
이방인과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고 이방인과 결혼한 자는 그가 비록 제사장이라해도 부정한 자로 취급하였다. 3세기에 헬레니즘이 유입되자 유다이즘이 파괴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유대인들 중 열성파들이 거룩한 제사장과 율법학자들로서 카시딤(Chasidim) 혹은 '경건한 사람들'(pious ones)이라는 이름으로 에스드라서의 이상을 실행하려 시도했다. '이들 경건한 사람들'은 마카비전쟁(Machabean wars) 기간에 열성적으로 전투에 참가하면서 특별한 그룹을 형성했는데 이 때부터 이교도와 유대를 침범하는 이교적 영향에서 구별되는 그룹이라는 의미로 바리새파(Pharisees)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방인과 한 식탁에 앉는 것을 혐오하고 그들과는 어떠한 사회적 관계도 갖지 않았다. 그들의 이런 행위는 일반인들에게 영웅적 행동으로 비춰졌으며 지대한 영향을 주어 제사장들보다 이들을 더욱 선호하게 하였다. 예수님 당시에 이들은 '모세의 의자'(Moses' seat)라는 곳에 앉아 가르쳤는데 이것은 그들의 세력과 명성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준다. 주님께서도 이것을 언급하신 바 있는데 마태복음 24장 1-8, 13-36절의 내용이 그것이다.
안티오쿠스(Antiochus)의 박해기간 동안 바리새파들은 유대인의 종교와 전통을 가장 완고하게 지켜낸 그룹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고(I Mach., i, 41 sq.) 시리아 인들이 안식일을 범했을 때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다(I Mach., ii, 42; ibid., v, 3 sq.). 로마와의 전쟁 후(A.D. 66-135)에 바리새주의(Pharisaism)는 유다이즘(Judaism)과 거의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마카비 전쟁과 여타의 많은 사건들은 바리새주의의 발로로 일어난 것으로 간주된다.
초기 바리새주의는 도덕적 위엄과 우월성 그리고 고상함 그리고 애국적이며 종교적 이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사두개파와 비교해 보면 바리새파는 제사장 직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일면 민주적 경향도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민주적이고 영적인 입장을 취했다. 율법의 조항에 의하면 제사장직 그 자체는 배타적인 것이다. 아무도 제사장 가계가 아니면 성전에서 그 직임을 행할 수 없다. 따라서 바리새파는 자기들의 임무를 주로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에서 찾았다. 그들의 사역은 주로 회당(synagogues)에서 이뤄졌는데 회당에서는 아이들을 교육하고 이교도들을 향한 선교가 이뤄졌다. 결과적으로 바리새파는 기독교를 위한 길을 예비한 셈이 되었고 이 땅을 정화하는 것을 통해 도움이 되었다. 바리새파의 이상적 민족주의는 유다이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서 예언자들의 유일신 사상(monothism)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들은 다니엘서와 외경 에녹서(Enoch)에 기초하여 부활과 장차의 상급을 믿었다. 그들의 교육적인 모습은 민족적 의지를 훈련하는 일과 기독교의 대두에 영향을 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그들의 많은 결점과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영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바리새주의는 율법이 말하는 중요한 의미보다 제의적 형식에 더욱 얽매여서 자기들의 정통성에 대한 허영과 오만 그리고 부풀려진 허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Matt., xxiii, 23-28).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말씀의 깊은 영적 의미를 간과한 것으로 편협한 이해이다.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도 포함되는 우주적 교회이해를 불가능하게 한다. 바리새인 사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받은 계시를 통하여서 만, 어느 곳에 있는 교회이든 그것은 동일한 '아브라함의 씨'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ume XI, Pharisees)
사두개파와 달리 바리새파는 기록된 율법과 마찬가지로 구전 전승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의 율법해석은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후의 세계와 죽음 이후의 부활을 믿었다. 주후 1세기 경 바리새파들의 사상과 실천은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에게 가장 친숙하게 수용되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Book XVIII Chapter 1) 그들은 삶과 세계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귀결하였으나 인간의 이성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덕스런 행동을 할 수도 있고 악한 행동을 할 수도 있는 여지가 있다. 그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었기에 지상에서의 삶을 따라 부활하여 생명을 다시 얻는 상급을 받게 되거나 혹은 영원한 감옥에 갇히는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성한 예배와 기도 그리고 희생제사를 드렸고 자신들의 신념을 철저히 수행하려 힘을 기울였다.
언젠가 TV프로그램에서 현재의 정통 유대인 가정의 삶을 방영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 내용 중 한 주부가 식탁을 차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녀에 의하면 율법에 피와 함께 먹지 말라는 구절을 지키기 위해 고기와 야채용 칼과 포크를 따로 보관하고 우유용 컵과 기타 음료용 컵을 따로 보관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율법에 이른 대로 남성들은 이마에 성서의 말씀을 적은 쪽지를 넣은 작은 상자같은 띠를 두르고 팔목에 또한 그것을 감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기독교에서 바리새파를 말할 때 그 형식주의 만을 염두에 두고 비난조로 말하고 있지만 본래 바리새주의라고 말할 때는 그들의 이런 내면적이고 종교적인 철저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들의 종교적 열심은 주님께서도 그들을 칭찬했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성서 속의 니코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장사지냈던 아리마대 요셉은 바리새파로 구성된 의회의 의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종파들-에세네파(Essenes)
에세네파(Essenes)는 프랑스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뻬레 롤랑 드 뽀(Pere Roland de Vaux)가 사해 근처의 한 동굴에서 한 묶음의 두루마리(사해사본)를 발견함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쿰란(Qumran)공동체라고도 불린다. 고대 기록에 에세네파에 대한 언급은 유대인 역사가 필로(Philo Judeaeus)의 글과 요세푸스의 고대사 그리고 플리니(Pliny)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사두개파나 바리새파와는 달리 에세네파는 세속의 삶을 떠나 나름의 영역을 다져나갔던 그룹이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수도원적 삶과 금욕적 삶을 지향하면서 유대광야에 은둔하였다. 그들은 재산을 헌납하여 함께 공유하고 학습과 예배와 일을 함께 했고, 정결의식으로서 침례를 행하였고 공동식사를 실행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요세푸스에 의하면(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Book XVIII Chapter 1) 당시에 결혼한 여성과 노예들을 제외하고도 이들의 숫자는 약 4천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결혼한 이들은 소득의 일부를 이 공동체에 지불했고 그들을 위해 옥수수와 식품을 공급하기도 했다. 에세네파는 모든 사물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여겼다. 영혼의 불멸과 의로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가장 의로운(rightoussness)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존재들로 여기며 공동생활 속에서 함께 노동하며 자급하며 살았다.
- 에세네파에 대한 아래 내용은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ume V의 'Essenes'를 번역한 것이다.
에세네파라는 이름은 처음 필로가 '거룩'이라는 뜻의 단어 hosios를 사용한데서 유래했으며, 요세푸스에 의해서 Essi와 Esseni 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들의 숫자는 약 4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사해(Dead Sea)로부터 멀지 않은 곳의 서쪽 지역에 주요 은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이곳 이외에서도 거주했지만 주로 팔레스틴의 작은 마을에 거주했었는데 도시들에서 가끔 그 흔적이 발견된다. 엣세네파(Essene의 옛이름은 Judas였다. BC 110)는 B.C 150년 경에 시작되었고 AD 1세기 말 경에 사라졌다. 그들은 모든 것들의 창조주요 통치자요 전지하신 유일신 하나님을 경배했다. 모세는 가장 존경을 받았고 그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태양은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깨우는 것으로서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신이 정한 운명의 보편성은 믿었지만 자유의지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전으로 희생제물을 보내기는 했지만 불결해지는 것을 저어하여 성전에서의 희생제사를 거부했다. 이것은 그들은 경건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제사로 여긴 것으로서 피의 희생이 그들에 의해 드려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안식일은 가장 엄격히 지켜졌고 그들의 모임장소에서는 연장자의 순으로 자리가 배정되었으며 그 모임에서는 성서가 낭독되고 현자에 의해 알레고리적 해석을 따른 성서해설이 이어졌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곳으로서 정결의식 즉 자주 씻는 예식을 행했고 레위인들이 제사에서 더럽혀진 반면에 이 규정을 철저히 지켰다. 심지어 젊은이가 어른을 만지는 것은 그를 더럽히는 것으로 여길 정도였다. 내부규율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죽음은 '육체는 타락하기 쉽고, 가진 물질은 영원한 것이 아니지만 영혼은 불멸하고 영원히 살아있으며 가장 신비한 하늘로부터 어떤 생래적 욕망에 의해 감옥에 들어가는 것처럼 육체 안으로 던져진다'는 그들의 생각 때문에 환영받을 일로 여겼다. 육체와의 결합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오랜 예속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서 대단히 기뻐했다. 그리고 그들은 눈이나 폭풍우 그리고 사막의 열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그렇지만 대양으로부터 시원한 북동풍이 불어와서 항상 고요하고 원기를 주는 대양(바다) 곁을 좋은 거주 장소로 여겼던 그리이스인들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나쁜 영혼들은 음울하고 결코 끝나지 않는 고통으로 가득찬 험악한 동굴 속에 있다고 보았다. 어떤 글에 보면 에세네파는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에세네파는 복종과 정직과 성적 금욕, 정의 그리고 절제 등을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병자들에 아주 큰 관심을 기울였고 연장자를 존중하였으며 방문자들에게 친절과 환대를 베풀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여겼고 노예제도는 천륜을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큰 죄를 지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은 오랜 기간 추방되거나 완전히 추방되는 처벌을 받았는데 그들은 그 기간에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서 아무 것도 얻어먹어서는 안되며 큰 곤란을 겪고 가끔은 죽기도 했다. 철학은 무용한 것으로 악마적 인간의 놀음으로 배척받았다. 그렇지만 윤리는 열정적으로 학습하였다. 그들은 자연에서 약품의 재료들을 찾았고 신조에 상관없이 병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고 광천수의 효과를 조사하기도 했다.
그들은 신비한 능력과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그들의 예언의 능력에 대하여 기록했다. 에세네파 중 마나헴(Manahem)이란 사람은 헤롯이 왕위계승의 어떠한 여지도 없던 어린 시절에 그가 헤롯대왕이 될 것을 말하기도 했다. 모든 것들은 공유했고 심지어 집까지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농사와 농지경작 그리고 가내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결코 전쟁을 위한 무기는 생산하지 않았고 여행 중 방어용 이외에는 그것을 운반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수확물과 임금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하는 청지기에게 보내졌다. 의복들과 신발들은 다 헤어질 때까지 입었다. 물물교환 이외에는 어떠한 상업적 활동도 불허했다. 도유(기름을 붓는 예식)는 더럽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종을 두는 것은 불의에 유혹되는 것으로서 금지되었다. 그들의 지도자들과 수장은 그들의 사제들-비록 그가 부름을 받은 자라해도-, 청지기들과 마찬가지로 투표를 원칙으로 하였다. 관리로서 마을에 있는 사람은 여행하는 형제들을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1백명으로 재판정이 구성되었는데 그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판결된 것은 번복될 수 없었다. 에세네파의 구성원은 네 개의 과업을 수행했다. 매일의 일과는 그날그날 주어졌다. 그들은 동트기 전에 기상하여 태양이 뜨기 전까지는 불경스럽지 않은 말 만을 했으며 마치 태양이 뜨도록 간구하는 것처럼 기도에 열중하였다. 그 후 그들은 지정된 일터로 보내어지고 그곳에서 11시까지 5시간동안 일을 했다. 모두가 모였을 때 그들은 특별하게 축귀된 물에서 목욕을 했다. 그리고 흰 옷을 입고 아주 고요하고 조용하게 공동 식사를 위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들에게 각각 어떤 류의 빵과 한 종류의 음식이 담긴 접시가 놓여지기 전에 한 사제가 은혜를 선언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끝나기 전에는 먹을 수 없었다. 식사 기도의 끝에 사제가 다시 흰 옷을 그 곁에 놓도록하고 평상복을 갈아입으라고 말하고 그들은 저녁때까지 일을 한다. 저녁 식사도 그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정오 식사에서는 그들의 사제들에 의해 준비 된 하나의 희생 만찬으로서 외부인에게는 동참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저녁만찬에는 참석을 허용한다. 식사를 마친 후에야 말을 할 수 있고 음식과 음료는 아주 알맞게 준비되며, 외부인들에 식사에서의 고요는 매우 종교적이고 신비스럽게 보여진다. 에세네파의 많은 사람들은 고령이고 그들은 로마에 의해서 그들에게 가해진 엄청난 고통에도 마음과 몸의 평정을 유지했으며 절개를 꺾지 않았고 웃으면서 최후를 맞이했다.
대다수의 에세네파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여성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평화와 조화를 열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 공동체는 어린이들을 받아들이고 플리니(Pliny)가 말한 것처럼 '인생의 거친 바다에서의 싸움에서 지친' 성인들을 받아들임으로서 유지되었다. 그들이 입회하면 그들에게는 목욕시에 입을 앞치마(apron)가 주어진다. 흰 의복과 작을 구덩이를 파기 위한 작은 연장이 주어지며 그들은 태양 광선으로부터 자신의 배설물을 덮는다. 1년 동안 공동체의 금욕적 규칙을 관찰하는 것에 의해 그들의 극기가 시험된다. 그런 다음 2년간 육체적 시험이 주어지는데 그동안 그들은 정결예식에 참여한다. 그렇지만 공동식사에는 참여할 수 없다. 그들이 이 모든 시험에 통과하면 완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정의를 지키며 모두에게 특별히 지도자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경건한 맹세를 하게된다. 그리고 비록 다른 사람의 의복이 자기들의 것보다 더 낫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동료들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으며 외부인들에게 아무 것도 발설하지 않으며 그들이 읽는 서적들의 내용과 그들의 천사들 이름을 비밀로 지킬 것을 엄중히 맹세한다. 에세네파 사람들이 단 한번 이 맹세를 했을 때 그들의 말은 헤롯이 자기 신하들에게 충성의 맹세를 요구했던 것이 매우 신성한 것이었듯이 그들 모두에게 그렇게 간주되었다. 그들 중의 일부에게는 미혼이 요구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 공동체의 의무는 아니다. 이것은 3년이 지난 후의 시험에서만 시행되고 만약 여성이 건강하고 자원하여 아이를 데리고 들어올 때에는 요구되지 않는다.
에세네파는 3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그들의 수와 동시대 사람들의 삶에 끼친 영향과 종교 운동의 한 분파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이런 주목은 외부적인 하나와 외부적인 두가지 요소에서 나타난다. 내부적인 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것들이 그들의 교의와 관습에서 매우 깊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이상함은 호기심을 자아내었고, 에세네파들이 비록 헬라어를 매우 능숙하게 말하였다할지라도 그들이 순수한 유대인들이었다는 이 조화를 가늠하는 것을 통해 알게된 것의 진의를 실험하도록 했다.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었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안식일을 준수했고 할례를 열광적으로 고집했다(Hippolytus). 이 모든 것들은 내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반면에 태양을 향한 그들의 태도, 사제들의 선출, 삶의 방식, 요세푸스 그 자신에 의해 피타고라스학파와의 유사성 등은 외부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1. 에세네파의 탄생
에세네파의 기원은, 셀레우코스 왕조를 상대로 마카베오스 독립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친 하시딤이다. 그들이 외형적인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가 열리면서, 하시딤들 역시 갈리게 되었다.
최초에 하스모니아 왕조의 정교일치 정책과, 마카베오 집안의 요나단이 사제직을 획득하는 데에 반기를 든 하시딤의 일부가 유다사회를 떠나서 사해 서쪽의 촌락군에 은거를 하게 되는데, 그들이 에세네파를 형성하게 된다. 하스모니아 왕조가 제관 계급인 사두가이파들을 차츰 중용하면서, 친 하스모니아 왕조 경향을 가지고서 남아 있던 하시딤들은 바리사이파를 형성하게 된다.
2. 에세네파의 생활과 교리
에세네파는, '정의의 스승'(Teacher of Righteousness) 이라 불리는 사람이 이끌었으며,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을 내세웠다. 에세네파 신자들은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따위를 모두 함께 했다. 결혼은 거의 하지 않았고, 오로지 세상의 종말에 대비하여 하나님과 한 몸이 되기를 기도했다. 마사다 결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200년 동안 에세네파 교인들은 금욕, 기도, 하느님의 말씀 읽기를 계속해 왔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믿었으며, 구약의 나지르인과 비슷한 의미로 자신을 주께 봉헌한다고 생각하였다. 모세는 가장 존경하는 선지자였으며, 희생 제사를 지양하고, 정결의식을 자주 행하였으며, 그리스인들의 내세관과 유사한 관점을 공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세네파는 여타 유다인들의 권위, 특히 대사제직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매우 엄격한 유다인이면서도, 많은 이방 사상을 받아들여 자기들의 신학에 적응시켰다. 이들이 두 영(靈) 또는 두 권능의 근본적 대립을 바탕으로 매우 이원론적(二元論的)인 교리를 발전시키게 된 것은, 틀림없이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결과일 것이다. 하나는 ‘선’이요 다른 하나는 ‘악’인 이 두 존재는 세상 마지막 날까지 무자비한 전투를 벌이는데, 결국은 ‘빛의 제후’가 ‘암흑의 천사’를 완전히 쳐이기게 된다.
에세네파는 반(反)로마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이들은 격동의 70년대에, 최후의 항쟁이었던 마사다 결전 이후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에세네파에 주목을 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리니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기독교 사회에서 그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으며, 뻬레 롤랑 드뽀 수사가 사해 사본을 발견하면서, 비로소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신약성서 시대의 유대종파들-젤롯당(zealot)
요세푸스가 언급한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이외에 또다른 한 부류의 그룹이 있었는데 이 그룹이 바로 성서에서 언급되는 열심당(zealot)이라고 불리는 제롯당이다. 이들은 로마에 직접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한 그룹으로 에세네파와도 일련의 관계를 가졌던 그룹이었다. 이들 중 시카리파(Siccari)는 주로 친 로마의 관료나 로마인들에 대한 테러와 암살을 감행했는데 가슴에 칼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베드로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 적이 있었는데 그 까닭에 베드로가 이 단체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요세푸스는 열심당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대 철학의 네 번째 그룹으로서 작가 갈릴리 사람 유다(Judas the Galilean)를 언급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이 유다를 강도로 묘사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가 유대를 통치할 때 유다가 일으킨 폭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바리새파와 유사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에서의 독립을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들의 통치자요 주(Lord)라고 믿었기에 죽음도 불사했다.
젤롯당은 바리새파들과 헤롯 가계의 사두개파에게서 공히 배척을 받았던 무리들이다.
젤롯당은 무력 사용을 적극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구별된다. 그들은 자기 민족의 하나님이 모든 역사적 운명들을 좌우하며. 하나님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기가 택한 백성의 오랜 고통에 찬 소망을 들어주신다고 믿었다. 반면에 모든 참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과 수 많은 전통들이 포함된 여러 주문들을 지키는 데에 온 마음으로 헌신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현시되기를 기대하며 인내력있게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충일한 메시아 대망을 검으로 앞당기려 서두른 이들로서 A.D. 70년에 끝난 폭동과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기간에 그들은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여 무력으로 보복을 행하였다. 젤롯의 열광주의는 로마인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동족들에게 끔찍한 대적이었다. 헤롯 가계로 알려진 사두개파는 외세와 이교 문화에 동조하였고 심지어 혈통상 절반만 유대인인 헤롯 왕의 후손 아래 민족적 왕국을 재건하려고 하였기에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다.(Catholic Encyclopedia, Pharisees)
AD 6세기에 로마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메를 한 영지로 묶어 총독정치를 시행하였는데 이에 반발하여 AD 68년에 유대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곧 진압되었다. 쿰란(Qumran)은 AD 68년에 로마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AD 70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었으며 AD 73년에 마사다(Masada) 요새가 함락됨으로서 유대 전쟁이 좌절되었다.
어쨌든 주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은 유대 전쟁기의 유혈 독립운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를 예시한 것인 동시에 팍스-로마나(Pax-Romana)를 구가하던 로마에 대한 일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말씀이 단지 정치와 종교를 구별하거나 신앙과 행함을 구분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제자 중 다른 시몬(Simon of Zealot)도 제롯당이었는데, 그는 서방전통에서는 제자가 된 후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 유다와 함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동방전통에서는 에데사(Edessa)에서 평화롭게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찌 되었든 시몬은 이전에 죽이는 자였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후 살리는 자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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