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자료

성경의 원본과 사본. 역본

안명애 2015. 1. 24. 18:03

성경은 약 40명의 기자들에 의해 약 1,500년 동안에 걸쳐 기록되었으며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헬라)어,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세상의 모든 책들은 종교의 경전이라도 시대와 저자마다 다른 사상으로 전개되지만 성경은 실로 방대한 역사를 통해 각자가 만나서 서로 의논하지도 않고 기록했지만 66권의 기록은 놀랍게도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일치가 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성경이 사람의 연구에 의한 기록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임을 알게 해준다.
성경의 원본은 구약의 사본과같이 가죽이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성경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이 낡은 성경을 보관하지 않고 묻거나 불태워버렸고

바벨론 유수와 같은 박해 때에 이방인들에 의해 성경이 더럽힘을 받지 않게 하려고 파기하거나 불태웠기 때문에

오늘은 구약의 원본을 완전히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성경의 제일 오래된 것은 신구약 모든 성경의 원본이 아니라 사본들이다.

그러나 고대의 사본들 역시도 박해의 시기에 많이 유실된 것으로 본다.
사본은 마쏘라 사본, 사해 사본, 이집트 사본 등의 구약 사본과 헬라어 사본, 바타칸 사본, 시내산 사본 등의 신약 사본들이 있다.성경 각 권의 원본은 모두 분실되었거나 파손되어 사라졌고, 다만 사본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사본들은 원본 또는 다른사본을 베낀 것들이다.

사본은 기원전 11세기 경부터 사용된 파피루스에 가장 많이 기록되었으며,

그 밖에 양피지나 송아지 가죽, 점토, 나무 껍질 등도 재료로 이용되었다.

 

[1] 구약의 사본

 

1) 사해 사본

1947년 사해 북방에 있는 쿰란동굴 속에서 구약 성경의 사본들이 적힌 가죽 두루마리들이 발견되었다.

이 동굴은 기원전 2세기말부터 기원후 2세기초까지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에 속한

쿰란 공동체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작업을 통해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구약 성경의 단편들과 함께 외경과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종파의 문헌들이 발견되었다.

그 후 1951,2년에 다른 동굴에서도 다른 사본들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11개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고문서학적 분석 및 탄소 연대 측정법을 통해 기원전 2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보다 앞선 것들로는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레위기와 사무엘서의 단편들도 있고,

늦게는 기원후 2세기경의 사본들도 발굴되었다.


(2) 맛소라 사본

고대 유대인들은 모음 없이 자음만으로 글을 썼으며, 구약성경의 내용을 거의 암기하여 그것을 구전으로 후대에 전해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히브리어는 점차 잊혀지게 되었고 대신 아람어가 통용어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낭독했는데, 히브리어가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가자,

히브리어로 된 율법서와 예언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원전 7세기부터 자음만 있던 히브리어에 모음을 달기 시작했는데, 그 작업을 주도한 유대인 학자들을 '맛소라'라 불렀고

그들에 의해서 모음이 붙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맛소라 사본'이라 부른다.

 

(3) 사마리아 오경

사마리아인들은 구약성경의 모세 오경만을 그들의 유일한 경전으로 여기는데 이를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한다.

1616년 이탈리아의 한 여행가가 다마스커스에서 처음 발견하였는데 단편들까지 합쳐서 150여 개의 두루마리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가장 최초의 것은 기원후 9세기경에 기록된 것이고 대부분은 14-15세기의 것들이다.

특히 이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꼽히는 사마리아 오경은 세겜의 그리심산 기슭에 위치한

사마리아 회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아론의 증손자 이름이 붙여져 아비샤 두루마리라고 불린다.

 아비샤 두루마리는 적어도 9명의 필사자들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 가운데 1149년에 기록된 것이 가장 최초의 것으로 밝혀졌다.

 

[2] 신약의 사본

 

전체이건 부분이건 신약 성경이 기록된 그리스어 사본은 대략 5,000여 개에 이르고 그 밖에도 초기 번역본에 대한 사본들이

 약 1만개 이상, 교부들의 인용문도 수천개가 발견되었다.

 기원후 9세기까지는 모든 사본 그리스어 대문자로만 기록되었고, 소문자는 그 이후에 사용되었다.

 대문자 사본으로 공식 목록에 올라 있는 것들은 214개에 달한다. 그 중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본들이 유명하다.

 

(1) 시내 사본

1884년 시내산의 성 캐더린 수도원에서 독일 신학자 티쉔도르프가 발견한 사본으로 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2) 알렉산드리아 사본

1627년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던 루카리스가 영국왕 찰스 1세에게 증정한 사본으로 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3) 바티칸 사본

4세기 초의 사본으로 1457년 바티칸 도서관에 등록되어 계속 보관 중이다.

이 밖의 중요한 대문자 사본들로는 에프라임 사본(5세기초), 베자 사본(5, 6세기) 등이 있다.

한편 소문자 사본들은 9세기에서 17-8세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모두 2,500여 개가 넘는 사본이 남아 있지만 역시 대부분 단편들이다. 
 

[3] 고대 역본

 

(1) 아람어 탈굼역

바벨론 포로기 이후 회당에서는 성경을 낭독한 다음 당시 히브리어보다 아람어를 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아람어로 해설해 주었다.

이같은 구두 해석이 전승을 거듭하다가 기원전 2세기에는 문서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탈굼이라고 하는 아람어 역본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탈굼은 모세 오경, 예언서, 성문서집 등이다.

하지만 아람어 역시 나중에는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서 히브리어와 같은 운명을 겪는다.

 

(2) 그리스어 역본

기원전 3세기 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70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는데,

이를 70인역(Septuagint)이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팔레스타인과 지중해 지역의 유대인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은 이 70인역만을 사용하였다.

 

(3) 라틴어 역본

기원후 2세기 말엽부터 유럽 각지에서 라틴어로 성경이 번역되었는데 이들을 고대 라틴어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대 라틴어역들은 무절제한 수정과 내용의 와전으로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382년 교황 다마수스 1세는 당시의 가장 유능한 성경학자인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오늘날 제롬으로 알려져 있음)에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을 요청하였다.

제롬은 383년 복음서를 시작으로 하여 405년에 신구약 번역을 끝마쳤다.

'불가타'(The Vulgata: 공통적인)라고 불리는 제롬의 라틴어 역본은 이후 중세 1,000년 동안

서구세계에서 공인성서로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4) 그 밖의 역본

초대 교회는 전도자들의 선교활동을 돕고 개종자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된 성경을 제공하기 위해 그리스어 성경을 다른 언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이 근동지방과 남부 유럽 여러 민족들의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현재 고대 이집트어인 콥트어를 비롯하여, 고트어, 아르메니아어, 시리아어, 그루지아어, 이디오피아어, 아랍어역 사본 등이 전해지고 있다.

 

[4] 현대 역본

 

(1) 현대 성경 번역의 현황

1999년 말까지 전세계적으로 성경이 번역된 언어는 모두 2,333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6,500여 개 언어 가운데 371개 언어로

신-구약을 합친 성경전서가 번역됐으며, 신약은 960개 언어로 번역됐고, 단편만 번역된 언어 숫자는 902개에 이른다.

이는 98년 말 2,212개에 비해 21개가 늘어난 것이다. 성경은 단편이 먼저 번역된 다음 신약과 구약의 순서를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2) 영어 성경

 

가. 위클리프 성경

최초의 영어 성경전서는 위클리프(Wycliffe)의 번역이었다.

위클리프는 1383년 평신도의 손에 성경을 쥐어 주겠다는 목적으로 번역한 뒤

 '청빈한 사제단'을 조직,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며 가르치게 했다.

후에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 불렸다.

 

나. 틴데일 성경

영어 성경 번역의 큰 흐름은 틴데일(Tyndale)로부터 시작되었다.

 "성경을 모국어 로 평신도의 눈앞에 제시하지 않고는 그들을 진리 앞에 굳게 서게 할 수 없음"을 깨달은 틴데일은

1525년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 독일에서 신약을 인쇄하여 영국으로 보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과 라틴어 역본(불가타)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어로부터 직접 번역하 였다.

 틴데일역은 근대 번역이 출현하기까지 문체나 내용 면에서 표본이 되었고 영어를 훌륭한 문장언어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틴데일 역시 화형을 당 했다.

 

다. 흠정역

흠정역(King James Version: KJV)은 1604년 영국왕 제임스 1세가 "전 영국 교회가 하 나님 예배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성경번역을 명령하여 성공회와 청교도 성직자 및 평신 도로 구성된 54명에 의해 1611년 완성되었다.

 종교개혁의 일환으로서 10세기 이후 발간 된 각종 영역성경에 입각, 왕과 교회의 권위로써 통일시킨 표준역으로,

 내용 면에서도 독 일어의 루터역 성경과 쌍벽을 이루는 명역(名譯)으로 알려져 있다.

장중한 문체, 간결하 고도 힘 있는 표현, 유려하고 격조 높은 리듬, 명확하고 구체적인 이미지 등의 특징으로 인하여

‘영어 산문의 가장 숭고한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처음 출판된 이래 수세 기를 경과한 오늘날까지 영국 국민뿐만 아니라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두터운 사랑을 받아왔다.

 

라. 개정 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 RSV)

개정 표준역은 국제 교회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흠정역(KJV)의 미국 개정판이었다(1946-52). RSV는 전혀 새로운 번역이 아니었으며, 가능한 곳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이전의 번역본에 충실하였다.

가끔 딱딱한 문체의 성경 영어('thou'와 ‘thee'를 포함)가 나오긴 하지만 여러 면에서 RSV는 연구 목적을 위한 최고의 성경이었다.

이것을 개정한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 1990)는 딱딱한 성경 영어적 표현은 좀 적으며 포

괄적인 언어에 예민하지만, 원문에 덜 충실하다는 점에서 가치는 떨어진다.


마. 신국제 번역(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1973-78)

이 성경은 뉴욕 국제 성경 공회(New York International Bible Society)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RSV의 보수적인 대안으로 불리어졌다.

일반적으로 문자적인 것이 분명하지만 RSV만큼 문자적인 것은 아니며 약간 일관성이 없다.

그러나 연구 목적을 위해 유용하다.


바. 개역 영어성경(Revised English Bible, REB)

새 영어 성경(New English Bible, NEB, 1961-70)은 영국의 개신교 교회에서 그 당시 박력이 있는 문체의 영국 영어로 출판되었다.

구약은 다소 의역이 심해서 이상한 점이 있지만, 신약은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80년대 NEB의 철저한 개정으로 이루어진 성경이 REB이다. REB는 보다 일관성 있게 만들어졌다.


라. 그 밖의 영어 성경

흠정역 이후 17-19세기 동안 새로운 사본의 발견에 자극받아 수많은 번역이 이어졌다.

 1870년 영국에서 신교가 초교파적 개역 작업에 착수하여 1881년 신약이 출 판되었는데

영,미 양국에서 첫 해에 300만부나 팔렸고 4년 후 구약이 마저 발간되었 다(English Revised Version).

 1901년에는 미국에서 이를 일부 수정한 American Standard Version이 출판되었다.

 그 후로도 Revised Standard Version, The New English Bible, The New American Bible, The Today`s English Version, Good News Bible,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NIV), The Living Bible 등이 발간되었고,

가장 최근에는 New Living Translation(NLT)이 번역, 출판되었다.

 

*비고

 

원본은 첫 영감 받은 사람들이 쓴 최초의 문서 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구약과 신약의 어떠한 원본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래된 원본의 사본들입니다.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 성경 사본, 그리스어로 쓰여진 신약 성경 사본.

다시 말하자면 누군가가 원본을 베껴 쓰고 그 베껴 쓴 것을 또 누군가가 다시 베껴 쓰고 이렇게 오랫 동안 베껴 전해져 내려온 사본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본이 여럿이고 그 사본들 사이에 기록의 차이가 있을 때 어떤 사본이 원래 원본에 더 가까운가를 추정해 내는 것은

 성서 해석을 위한 주요한 task가 된다.  
         

신약 성경와 비교하면 구약 성경는 휠씬 사본 간의 변화와 차이가 적다고 말 할 수 있다.

신약 성경의 사본은 약 5,000 종이 되지만 그 중 완전히 기록이 일치하는 사본은 하나도 없다.

통상 사본을 비교해서 오래 된 것일 수록 또 문장이 짧은 것 일 수록 또 내용이 단순 명료 할 수록 더 원본에 가깝다고 판정된다

 

이러한 히브리어, 그리스어 사본이 수 많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져왔고 또 지금도 번역되어지고 있는데

이렇게 번역되어진 성경을 역본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역본으로는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과 여러 가지 히브리 종교 문학서들이 기원 전 250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되어진 것이데 이 역본을 70인역 또는 Septuagint라고 부른다

 

그리고 알면 도움이 되는 사항은 신약 성경에서 인용되어진 구약 성경의 구절들은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서가 아니라 이70인역에서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성경이 영감 받았다고 말할 때 사실은 원본을 말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본은 베껴지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역본은 번역되어지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원본이 없는 지금 어떻게 성경을 바로 해석 할 수 있습니까? 
너무나 감사한 것은 성경의 대부분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많은 사본과 역본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장구한 역사를 통해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함으로 모든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비록 성경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발견된 성경의 사본들을 비교 연구해 볼 때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다양한 형태의 사본들이지만 한결같이 그 내용이 일치되고 있으며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의 원본 기록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성경의 사본 기록자들에게도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독하심 가운데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 할 때 기도를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과 더불어

성경의 전체적 unity를 이해하고 그 unity 내에서 부분들을 해석해 나가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성경 해석을 향한 태도이다 

  아가페 출판사


 

 

 

"바이블"이란 말은 어디서 나왔는가



영어의 바이블 The Bible,도이치어의 비벨 Die Bibel,프랑스어의 비블 La Bible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비블리아 Biblia에서 나온 것이다. 이 라틴어는 그리스도의 ta biblia에서 나왔으며, 이것은 그리스어의 비블로스 biblos의 복수형이며 <책>을 의미한다. 즉 고대 필사 재료었던 파피루스,즉 종이 풀의 줄기를 가리키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이다.

고대의 항구도시 비블로스는 지중해 연안의 베이루트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 쥬베르,헤브라이어로는 게발<언덕)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의 이름이다. 이 항구도시의 역사는 기원전 수천년으로 소급되며, 이곳은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교역의 중심지이며 특히 이집트산 파피루스의 집산지였다. 이 도시의 사정은 에제키엘서 27장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장은 호화로운 배로 묘사된 띠로스와 그 몰락을 말한 시와 따로스의 교역 관계를 말한 산문으로 나뉘어 있으며, 후자는 후대의 추가이다. 비블로스는 기원전 2천년대에 지중해 세계에 발달하기 시작한 알파벳이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그리스 세계에도 전달되면서 책을 의미하게 되어,뒤에 책 중의 책이라는 뜻에서 <성서>를 가리키게 되었다.

우리 말<성서>는 영어의 The Holy Scriptur,도이치어의 Die Heilige Schrift,프랑스의 La Sainte Ecriture등의 번역이며,이것은 교부시대의 라틴어 Sacra(Divina) Scriptura등에서 온 말이다. 헤브라이어로도 거룩한 책 sepharim kithbe haqqodes라는 말이 있으며, 율법 torah와 예언자들 nbiim과 문서들 ktubim의 세 가지 머리 글자를 딴 ta -na-kh(타나하)라는 구약성서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이 있다. 이것은 현대의 유대인 사이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성서는 구약성서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New Testament)로 나뉘고 이 명칭은 옛 계약과 새 계약을 의미한다. 계약은 성서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그리고 인간과 윤리적 인격관계를 나타내는 극히 중요한 용어이다.

성서의 역사적 무대는 동쪽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서쪽으로 지중해까지 펼쳐저 있으며, 구약성서의 원사용되고 있는 국어는 그 대부분이 본래 가나안어인 헤브라이어이며, 불과 에스라 4장8절-6장18절, 에스라 7장12-26절, 다니엘서 2장4절-7장28절, 예레미야서 10장 11절), 창세기 31장 47절 등의 일부분 만이 아람어로 돼있고,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고 셈어족의 세계와 인도,유럽어족의 세계에 걸쳐 있다. 각 부분의 저자의 수는 문서화되기 이전의 구비 전승의 시대를 상징하면 수십명이 넘으리라고 생각된다.

 

사본이란 무엇인가


안 유 섭 목사
(아르케 아카데미 원장, 반석교회 담임)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성경은 원본(Original)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보존되어진 사본을 비교 분석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즉, 이는 본문비평 연구의 결과에서 얻어진 산출물이라고 하겠다. 사실 사본과 번역본에 대한 연구는 본문비평에 속하는 것이다. 본문비평에 대해서는 뒤에서 성경비평에서 좀 더 다루기로 한다.
  사본(Manuscript)이란 원본의 보존을 위해 필사된 것이지만 원본이 사라진 후엔 이전의 사본을 필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원본이 전혀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지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사본의 재질로는 파피루스(Papyrus)와 양피지(Parchment)의 두 종류가 사용되었는데, 형태별로는 낱장을 모아놓은 단편들(Piece)과 책처럼 편철한 코덱스(Codex), 그리고 파피루스나 양피지를 잇대어 만든 두루마리(Scroll) 형태의 사본들이 있다.
  사본은 구약은 서기관들에 의해 필사되어왔고, 신약은 교부들과 수도사들에 의해 필사되어왔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사본의 필사자들은 누락이나 오기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성경을 베끼긴 했지만 방대한 분량을 일일이 손으로 쓰다보니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본 필사 과정에서 나타난 인위적 오류는 종류가 다양하여 중복, 탈락, 도치, 융합, 분리, 오사(誤寫), 오독(誤讀) 등으로 나타나는데, 이 때문에 때로는 성경 안에 서로 모순되는 표현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구약의 경우는 모음이 개발되기 전에 자음만으로 기록할 때 오류가 많았을 것이고, 신약의 경우는 띄어쓰기가 없던 대문자 사본에서 오류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필사본의 경우 전적으로 일치하는 사본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인간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은 어쩔 수 없는 실수와 더불어 필사자의 신앙과 신학적 배경에 따라 의도적으로 부분적인 첨가와 삭제의 관행이 있었음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현재까지 발견된 사본들의 보존 상태도 문제가 된다. 사본의 재질은 보통 양피지와 파피루스였으며 대부분 많은 부분들이 훼손된 채 발견되므로 사본 중에서 온전하게 참고할 만한 것은 매우 드물다고 하겠다. 이렇게 사본이 희귀하고 보존성에 의문이 많게 된데다가 수많은 역본까지 등장하게 되었으므로 성경 원본이 가르친 진정한 뜻은 사라지고 말 위험에 처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은 상존하였다.

구약 사본

  구약 사본은 파피루스 형태가 드물고 대부분 양피지에 기록한 것들이 많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사본 수는 약 1,000여개 정도로 추정된다. 구약 사본의 경우 고대에 벌써 사본이 안고 있는 한계와 많은 문제점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AD 2세기경의 랍비 아키바는 당시에 산재한 사본들을 집대성하고 정리하여 정통적인 히브리어 성경을 제정하고자 주창하였다. 이를 계기로 히브리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많은 구약 주석방법이 개발되었으며, 히브리어 성경의 본문 내용을 구분하기 위한 절(節)의 구분과 각종 부호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노력은 계속되어 마침내 6-7세기경에 맛소라 사본이 만들어짐으로써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

(맛소라 사본)

  맛소라 사본(Codex Massora)은 전통이라는 뜻을 가진 맛소라(Massorah) 학자들에 의해 구약 성경을 히브리어로 정확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히브리어는 원래 별도의 모음이 없이 단어를 이루는 글자 자체의 고유한 소리를 일일이 기억하여 발음하였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포로생활로 인하여 세계 각지로 흩어지면서 팔레스타인에서조차 히브리어가 그들의 생활 언어로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히브리어 발음이 유실될 우려가 있게 되자, 맛소라 학자들은 발음의 보존을 위하여 새롭게 히브리어의 모음을 고안하였는데 이를 맛소라 모음이라고 한다.  
  맛소라 사본은 모든 자음에다 새롭게 고안된 모음을 붙여서 표기함으로써 정확한 발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랍비들이 성경을 필사함에 있어서 다시는 개인적 오류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글자 수와 글자 배열까지 치밀하게 규정한 표준 필사법을 제정하여 그 기준에 미달한 성경은 여지없이 폐기하는 엄격함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맛소라 사본이 만들어지고 나서부터 히브리어 성경은 비교적 정확하게 보존되어져 갔다. 그러나 맛소라 학자들은 자신들이 당시에 입수 가능한 모든 사본을 참조하여 그들 나름의 본문을 만들었기 때문에 지역과 가문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맛소라 사본은 지역에 따라 바벨론 맛소라와 팔레스타인 지역의 티베리아 맛소라의 두 종류로 나뉜다. 바벨론 맛소라는 근거 사본의 취약 때문에 가치가 적으며 티베리아 맛소라가 중요하다. 티베리아 맛소라는 다시 가문에 따라 벤 납달리 사본과 벤 아쉐르 사본으로 나뉘어지며, 벤 아쉐르 가문의 권위가 더 인정받고 있다. 벤 아쉐르 사본 중에서 9세기경 모세 벤 아쉐르가 필사한 레닌그라드 박물관 소장의 사본(Codex of Moses Ben Asher 또는 Codex Leningradensis)이 유명한데, 이는 전문이 보존된 상태였다.

(사해 사본)

  현존하는 히브리어 사본 중에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면서도 가장 오래된 사본이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이다. 사해 사본은 쿰란 사본(Codex Qumran)이라고도 하는데, 1947년 사해 근처 쿰란의 여러 동굴에서 양치는 목동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사해 사본은 BC 2-1세기경 로마의 예루살렘 침략 때 무혈 저항하던 쿰란 종단에 속한 유대인들이 동굴에 은거하면서 당시의 성경을 필사한 것들인데, 외경도 다수 포함하고 있다. 한편 사해에서 발견된 성경과 맛소라 사본을 대조해 본 결과 큰 차이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곧 맛소라 사본의 신뢰성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기타 사본)

  그밖에 유명한 사본으로는 이집트에서 발견된 오경의 일부만이 보존된 나쉬 파피루스 사본, AD 9세기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자음만으로 되어있는 대영박물관 사본, 또 현재 히브리 대학에서 발간중인 HUB 히브리어성경의 모체가 되고 있는 알렙포 사본(레닌그라드 사본 이전 것으로 추정) 등이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히브리어 사본 중에서 주전에 필사된 사본은 사해 사본 말고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맛소라 인쇄본)

  1450년 구텐베르크(Gutenberg)의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에는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쓰는 필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으며, 인쇄된 맛소라 사본이 탄생하게 되었다. 제일 처음 히브리어성경이 인쇄된 것은 1477년에 시편이었다. 곧 이어 1488년에 구약 전문이 인쇄되었는데, 이것이 히브리어 인쇄본의 효시이다. 이후에 몇몇 히브리어성경이 계속해서 출간되었는데, 그 중에서 1524년에 야곱 벤 하임이라는 유대인에 의하여 편집되고 봄베르그가 출판 제작한 '제2 랍비 성경(Bombergiana)'이 가장 유명하다. 벤 하임의 제2 랍비 성경은 기존의 맛소라 사본들을 최대한 참고하여 편집한 것으로 20세기까지 세계 모든 구약성경의 근간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사본)

  독일의 신학자 키텔은 1906년 벤 하임의 제2 랍비 성경을 토대로 BHK(Biblia Hebraica Kittel)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경 두 권(BHK 과 BHK )을 차례로 펴냈었다. 그런데 키텔은 1937년에 제 3판(BHK )을 내면서 본문을 벤 하임 인쇄본 대신 레닌그라드 사본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벤 하임 인쇄본이 15세기에 편집된 작품임에 비하여, 레닌그라드 사본은 9세기경의 권위 있는 랍비인 모세 벤 아쉐르가 직접 필사한 것이었고, 또 전문이 훼손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1977년에 독일성서공회는 BHK 의   오기와 난외에 맛소라 주기를 보충하여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발간하였으며 오늘날은 전세계적으로 이것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신약 사본

  신약 사본은 구약 사본보다 훨씬 더 많아서 약 5,000 여 종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성경은 약 3,200여종이 되며 나머지는 헬라어로 된 성구집과 설교들이다. 형태별로 보면 가장 오래된 형태인 파피루스 사본은 소량이며, 대부분은 양피지에 기록된 사본들이다. 신약 27권의 최초의 글은 처음에는 파피루스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피루스의 훼손되기 쉬운 성질 때문에 보존을 오래할 수 없으므로 곧 필사본이 만들어져야 했고, 성경의 원본들이 얼마 후에 유실된 후에는 파피루스 사본들만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파피루스보다 재질이 견고하고 보존이 용이한 양피지가 개발되면서 파피루스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양피지에 기록된 사본들은 크게 대문자 사본과 소문자 사본의 두 계열로 나뉘어 대립되어 있다. 대문자 사본은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초기의 사본으로 숫자가 적게 발견되어 소수 사본이라고 하며, 소문자 사본은 비잔틴 계열의 다수 사본으로 대부분 9세기 이후 시대의 사본이다.  
  알렉산드리아 계열을 신뢰하는 학자들은 대문자 사본이 소문자 사본보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더 우수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비잔틴 계열의 사본을 신뢰하는 학자들은 오래된 연도로만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대문자 사본은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실제로 많이 사용되지 못했고 오히려 소문자 사본들이 원본에 가까워서 광범위하게 수용되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간에 공방을 계속 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전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양자를 같이 비교하며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 일방이 자신들이 선호하는 사본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은 원본이 아닌 어디까지나 사본이기 때문이다.

(파피루스 사본)

  신약 사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인 파피루스 사본은 AD 2세기부터 8세기경까지 제작되었는데 현재까지 약 90여종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파피루스의 약한 특질상 많이 파손된 상태의 단편들뿐이며, 따라서 아쉽게도 어떤 파피루스도 신약의 완비된 부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파피루스 사본은 대문자 P로 표시하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한 조각의 P52라는 사본으로서 AD 13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한 면에는 요한복음 18장 31절에서 33절까지, 다른 면에는 18장 37절과 38절이 씌어있다.  
  그밖에 역시 2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P90과 P98이 있으며, 나머지는 대개 3세기 이후의 사본들이다. 1930년대에 베아티(Beatty)가 이집트에서 수집한 세 종류의 파피루스인 P45, P46, P47도 3세기경의 사본들로서 비교적 많은 쪽수가 발견되었으며, 곧 책으로 출판되어 그 내용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대문자 사본)

  대문자 사본(Majuscules)을 언셜체(Uncial) 사본이라고도 부르는데, 현재까지 약 300여종이 발견되었으며 소문자가 개발되기 전까지 파피루스 사본과 함께 8세기경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파피루스 재질의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양피지는 질겼지만, 글씨를 쓰기는 불편하였다. 더군다나 고대에는 초서체의 소문자가 개발되지 않았으므로 대문자로 기록하였는데,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기록상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대문자 사본은 숫자가 적으므로 소수 사본(Minority Text)이라고 하는데, 이집트와 가이사랴 그리고 라틴을 비롯한 서방 지역에서 주로 많이 제작되었으므로 서방의 대표적인 지명인 알렉산드리아의 이름을 따라 알렉산드리아 계열 사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문자 사본은 소문자 사본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나 발견된 시기로는 오히려 소문자 사본들보다 늦은 것이 대부분이다.
  유명한 것들로는 먼저 4세기경의 바티칸 사본(Codex vaticanus)이 있다. 이는 아무 장식이 없어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히브리서 일부와 목회서신과 요한계시록이 없다. 그리고 시내 사본(Codex Sinaiticus)도 4세기경의 것인데 구약의 일부를 빼고 신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서 매우 귀중하게 여기는 사본이다. 그 다음 5세기경의 알렉산드리아 사본(Codex Alexandrianus)이 있는데, 이는 신구약성경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이상의 세 개의 사본들은 모두 신약뿐 아니라 구약까지 포함하고 있는 사본들이다.
  다음은 역시 5세기경의 사본으로서 원래 양피지에 성경을 기록했으나 12세기에 그 성경본문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에브라임이라는 사람의 설교를 기록한 에브라임 사본(Codex Ephraem)이라는 것이 있다. 또 프랑스인 베자에 의해 수집된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이 포함되어 있는 베자 사본(Codex Bezae)과 사복음서와 예수님의 어록까지 포함된 워싱톤 사본(Codex Washington)도 있다. 그밖에 6세기경의 클라로몬타노 사본(Codex Clarnontanus)과 라우드 사본(Codex Laudianus)이 있고, 8세기경의 레기우스 사본(Codex Regius)이 있다.

(소문자 사본)

  소문자 사본(Minuscules)은 대문자 필사의 불편성을 개선하기 위해 초서체 소문자를 고안하여 필사하였기 때문에 초서체 사본이라고 부른다. 대문자 사본은 글씨가 화려하고 크며 더군다나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서 필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초서체 소문자 사본은 비교적 빠르고 쉽게 필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곧 많이 사용되었으므로 현재까지 약 2,800여종이나 발견되었으며 다수 사본(Majority Text)이라고 부른다. 또 2,000여종의 성구집(Lectionaries)과 설교집도 거의 초서체 사본들이다.
  한편 서로마 지역은 주로 라틴어성경을 사용하면서 헬라어성경의 필요성이 감소되어 헬라어 필사본을 많이 만들지 않았으나, 비잔틴 지역의 동로마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어 문화권이었으므로 계속해서 헬라어 필사본을 만들었기 때문에 비잔틴 지역에서 많이 제작된 소문자 사본을 서로마의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과 대비하여 비잔틴 계열 사본이라고도 부른다.
  소문자 사본은 9세기부터 만들어졌는데 1450년에 구텐베르크에 의해 서양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많이 필사되고 널리 사용되어왔다. 그런데 소문자 사본은 파피루스 시대와 대문자 사본 시대를 거쳐오면서 훨씬 후대에 필사한 것이므로 고대 사본들과 비교하면 더욱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그 신빙성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비잔틴 계열의 소문자 사본들로는 비잔틴 사본(Codex Byzantine), 안디옥 사본(Codex Antioch), 시리아 사본(Codex Syrian) 등이 있는데, 이들은 동로마 지역에서 오랫동안 폭넓게 인정되고 수용된 사본들이지만, 그것들도 저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지상에 존재하는 사본간에 완전한 일치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곧 인간이 필사한 사본은 어떤 것을 막론하고 원본에서 조금씩은 이탈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만일 원본이 아닌 필사본에 불과한 어떤 사본을 맹신하면서 또 융통성 없는 문자적인 해석으로 경직화된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약 헬라어 사본의 인쇄)

  하나님의 말씀은 필사자들의 손에 의해 계속 보존되어 왔으나,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에는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쓰는 필사는 더 이상 불필요한 일이 되고 말았다. 즉, 1450년 구텐베르크가 자신이 발명한 인쇄방법으로 라틴 불가타 인쇄본을 출판한 이래 필사본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그 후에는 인쇄기에 의한 대량 출판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헬라어 사본을 최초로 인쇄한 것은 1514년『여러번역 대조성경(Complutensian Polyglot)』에 실린 헬라어신약이었으나, 헬라어 사본이 독자적으로 인쇄·출판된 것은 1516년 에라스무스가『헬라어신약성경』을 발표한 것이 최초라고 할 수 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성경)

  인문주의 신학자인 에라스무스는 주로 동로마 지역에서 사용되던 비잔틴 계열의 소문자 사본들을 종합하여 1516년에 헬라어신약성경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인쇄된 헬라어 사본으로 간주된다. 당시 에라스무스는 신약 전체가 포함된 사본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사본을 종합하고 편수하여 새로운 본문의 헬라어성경을 만들었으며, 헬라어 사본을 구하기 힘든 경우에는 라틴어 불가타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재구성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에라스무스는 결국 가능한대로 헬라어 신약성경의 원본을 복원하고자 한 것인데,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본문은 표준원문 또는 수용원문(Textus Receptu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널리 사용되어져 왔으며, 계속 수정·보완되어 전부 5판이 출판되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성경은 후에 스테파누스의 헬라어성경을 비롯하여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역성경과 틴데일의 영어역성경 등의 번역 모체가 되었다.

(스테파누스의 헬라어성경)

  에라스무스에 뒤를 이어 여러 형태의 헬라어성경이 출판되었는데, 거의가 비잔틴 계열의 소문자 사본을 반영하여 편수한 것들이었다. 그 중에서 돋보이는 것은 프랑스 인쇄업자 스테파누스에 의해 1550년에 출판된 헬라어성경이다. 그는 구약은 맛소라 사본을 채택하여 신구약이 포함된 원어성경을 펴냈는데, 이는 역사상 최초로 본문비평적 편집으로 출판되었으며, 또한 제4판부터는 숫자로 절(節)을 구분하여 출판하였다. 그는 또 1553년에는 제네바에서 올리베땅(Olivetan)의 불어 번역본도 출판하였는데, 여기서도 장, 절을 구분함으로써 이후 모든 성경의 표준이 되었다. 장의 구분은 원래 13세기 켄터베리의 주교(Cardinal)였던 랑톤(Langton)이 한 것을 그대로 준용하였는데, 학자에 따라서는 역시 13세기에 카로의 주교였던 유고(Hugo)가 장의 구분을 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베자의 헬라어성경)

  칼빈의 뒤를 이어 스위스 개혁교회의 지도자였던 베자는 성경 수집과 사본 연구에 힘을 쏟아 대문자 베자사본을 발견하였고 또한 헬라어신약성경과 라틴어번역성경 등을 출판하였다. 그가 출판한 헬라어성경은 에라스무스로부터 시작된 사본 편집의 방법을 따라 그때까지의 사본들을 수집하여 본문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많은 헬라어 사본을 종합하여 표준이 되는 본문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로써 표준(수용)원문이라는 개념을 일반화시키고 고정시키는데 한 몫을 하였다.
  베자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이 발견한 대문자 사본인 베자사본과 기타 비잔틴 계열의 소문자 사본들을 편집하여 헬라어성경의 본문으로 채택하고 나서 1565년부터 40년 넘게 수정을 거듭하면서 무려 10판을 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헬라어 신약사본은 1611년 발행된 영어흠정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엘제비어 형제의 표준원문)

  비잔틴 계열의 소문자 사본을 편수하여 종합한 본문을 표준원문 또는 수용원문(Textus Receptus)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1633년 독일의 인쇄업자였던 엘제비어(Elzevier) 형제가 처음 사용하였다. 그들은 에라스무스와 스테파누스의 본문을 재구성한 헬라어성경을 출판하면서 서문에서 '모두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본문'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 후부터 수용원문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하게 되었으며, 줄여서 TR사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엘제비어의 헬라어 성경은 7개판이 나왔는데, 따라서 에라스무스판 5개, 스테파누스판 4개, 베자판 10개를 합치면 TR사본은 모두 26가지가 유통되었다.  
  
(웨스트콧-홀트 헬라어 성경)

  17세기에 만들어진 TR사본들은 이후에 계속 보급되어 18-19세기에는 가장 널리 사용되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들어 본문비평의 발달로 TR사본의 가치가 의심스러워지면서 새로운 헬라어성경의 출판이 예고되었는데, 몇몇 신학자들은 TR본문의 근거가 된 비잔틴 계열의 소문자 사본들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고 더 오래된 사본인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대문자 사본을 근거로 하여 비평적 편집에 의하여 본문을 재구성하여 새롭게 편집된 헬라어 성경들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1881년 영국에서 성공회 소속인 웨스트콧(Westcott)과 케임브리지 대학의 홀트(Hort)라는 두 신학자가 공동으로 출판한 헬라어 성경이다. TR사본이 비잔틴 계열의 소문자 사본을 근거로 만들어졌다면, 이들에 의한 헬라어성경의 본문은 주로 대문자 사본을 편수하여 만든 것으로 조금 뒤에 네슬레 헬라어 성경에  영향을 주었다.

(네슬레 헬라어성경)

  독일의 네슬레(Nestle)는 1898년 독일성서공회 지원을 받아 헬라어 신약성경(Novum Testamentum Graece)을 펴내었다. 그는 웨스트콧과 홀트의 헬라어성경과 몇몇 발행된 헬라어성경을 비교하고, 또 초기의 대문자 사본을 많이 참고해가면서 다수의 사본들이 일치하는 새로운 본문을 만들었는데, 네슬레 헬라어성경은 부자(父子)간에 대를 이어 계속 발행되어 20판까지 출판되었다.
  네슬레 헬라어성경의 특징은 사본간에 본문과 번역 및 교부들의 인용구까지 비교하고 다수결의 원칙으로 본문을 채택하여 철저하게 비평적인 편집을 한 것인데, 판을 거듭할 갈수록 우수한 본문으로 인정받으면서 20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권위있는 본문으로 서서히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TR사본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본문으로 평가되어 그 동안 누려오던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다.

(네슬레-알란트 헬라어성경)

  네슬레 헬라어성경은 21판 편집부터 역시 독일인인 알란트(Kurt Aland)가 참여함으로써 21판부터는 네슬레-알란트판으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공동으로 연구하고 보완하면서 거듭 수정판을 내었는데 네슬레판을 포함하여 1993년 현재까지 27판까지 발행되었다. 이들의 헬라어성경은 기존의 대소문자 사본뿐 아니라 AD 200년대의 파피루스 사본까지 최대한 많이 반영하여 수많은 사본을 분석하고 편집한 것인데, 비평적인 편집으로 결정된 헬라어 본문과 본문비평장치의 우수성 때문에 오늘날 신학계에서는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으며, 많은 현대 번역성경들이 네슬레-알란트판 헬라어성경을 번역의 저본(底本)으로 사용하고 있다.


2C 말 까지의 신약성서의 정경화


신약성서는 어떤 사본에 근거하고 있는가

 

1. 원시 기독교에서 권위있는 책들

*. 예수와 원시 기독교는 결코 성경이 없지는 않았다. 그들은 구약을 "성경"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유대교에서 물려 받았으며 후에 구약 정경이 된 세부분 모두에서 인용되었다.

*. 랍비들에 의해서 주후 1세기에 성경으로 규정된 39권의 마소렛 판의 정경은 여러 세기 동안 기독 교회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 원시 기독교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한정된 정경이나 배타적인 기준을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 고전 15:1ff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원시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되고 있다.

*. 새로운 살아있는 규범은 우선 주님을 위시해서 주님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사도들을 갖고있던 교회에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2. 사도이후 시대에서 정경화 과정의 예비적 단계들

*. 주님의 말씀을 인용할 때에 그것들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표시가 없다고 하는 사실이며 오늘날까지 클레멘스 1서나 이그나티우스 서신이 쓰여진 복음서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 아무런 견해도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최소한 2세기 초까지는 소아시아에서 알려져있던 바울 서신들의 수집이 끝났고 이러한 수집은 이미 마르시온의 정경에 잇던 10통의 편지 전부를 포함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2세기 중엽쯤에는 상황이 바뀌어져 갔는데 클레멘스 2서와 130년대에 기록된 폴리ㅋ의 서신의 주요 단락들이다.

*. 사도시대 이후로 이러한 저작들의 수집과 병행해서 2세기 중엽에는 "성경"이 형성되는 예비적 발전이 있었다.

*. 소위 클레멘스 2서는 교회의 기원이 위에서 부터 온 것이라는 교리를 뒷받침하는 권위있는 것으로서 를 들고 있고, 그럼으로써 그 본문의 가장 타당한 의미에 따르면, 그는 사도들을 구약성서와 나란히 살아있는 권위로 놓았던 것.

3. 2C 후반부에서 정경화의 시작

*. Justin이 4복음서 정경을 알고 있었는지는 증명될 수 없고 Justin 에 의하면 인용된 몇 가지 조화를 이룬 공관 복음서의 본문들은 그에게 구전 전승으로 전해졌을 가능성도 아주 높다.

*. Marciond의 정경은, 다소간 후대의 서문들에 의해서 보여주는 신학적 의도에 따라서 특정지어 있는데, 분명히 두 부분으로 정확하게 구분된 성격이었다.

*. 이 부로 구성된 새로운 경전이 2세기말에 발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Vienna와 Lyones의 교회들의 서선들 속에서 177년부터 요한계시록을 로 인용하고 있었다.

*. 2세기말의 세 명의 위대한 신학자들은 4복음서와 13통의 바울 서신들, 사도행전은 베드로전서, 요한1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포함된 사도 서신들을 내용으로 하는 신약 성서를알고 있었던 반면에, 일반 서신들과 히브리서의 경전성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또 종종 다른 문서들이 경전성이 있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 여기서 우리가 개별문서들을 포함시키거나 제외시킨 동기들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주 분명했던 의식은 예언적인 문서들의 숫자가 고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적인 문서들도 정확한 한계가 정해져서, 새로운 겅경도 확정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이였다.


고대 교회에서의신약정경의 확정

1. 오리겐에서부터 고대 말엽까지 헬라 교회 내에서의 신약성서.

오리겐은 자기 새대에 신약성서와 관련해서 교회의 여러지방 별로 어떤 경향이 있었는지를 알아내고, 이 연구에 근거해서 조심스럽게 몇가지의 결론들을 이끌어 낸 것이다.

(1) 첫째부류는, 그에의하면, 에 속하는 것이다.

(2) = 의심스로운 문헌들 : 베드로 후서, 요한2서, 3서, 히브리서, 그외에 야고보서와 유다서, Hermas의 목자서와 Didache를 로 인용함.

(3) :에집트 복음서, 도마 복음서, 바실리드 복음서, 맛디아 복음서 이런 것들은 이단적인 왜곡이 있는 것으로서 배척됨.

*. 3세기에는 Codex Claromontanus에 의해 다른 증거가 제시됨.

이 목록 안에는 4복음서와 13통의 바울서ㅅ들, 7통의 일반 서신들, 요한계시록, 사도행전 등이 열거되었다.

*. 신약성서의 사도적 서신들의 한계에 대한 불확실성은, 가이사랴의 Euswbius가 자기의 교회사에서 신약성서에 관해 발였던 확대된 논쟁에서 나타남.

(1) 모두 성경으로 인정하는 것

(2) 의견이 나누이는 것

(3) 완전히 분별없고 불경건하며, 참된 신앙에서 이탈된 이단자들의 위조인 것. 그에게 있어서 의견이 나누이는 것을 두 그룹으로 나눔.

*. 유세비우스 자신이 증거하는 7통의 일반 서신들을 대부분은 알고 있었고,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의견이 일치되는 문헌들과 의견이 나누이는 문헌들 중 첫째 그룹이 함께 묶일 수 없다면, 현대적인 의미의 신약성경이 구성되었던 것이다.

*. 이러한 신약 성경의 범위에 대한 불확실성은, 동방 교회에 있어서는 367년의 Athanasius 의 39회 부활절 축제 서한에 의해서 종결되었다. 이 서한은 거의 완전하게 헬라어, 시리아어, 그리고 콥트어로 보존 되어 있다.

*. 후기 비잔틴 시대까지 님아 있었던 신약 성서의 헬라어 문헌들 중에는 단지 몇개 만이 요한계시록을 포함하고 있고, 요한계 시록의 대부분의 헬라어 사본들은 그 본문이 주석의 일부로서가 아니면 비 성서적인 문헌들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2. 시프리안에서부터 5세기까지의 라틴 교회에서의 신약성서

*. Novatian (약 250년 경)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열 세통의 바울 서신들 이외에는 단지 요한 1서와 요한계시록만을 "성경"으로 인용.

*. Jerome 은 서방과 동방의 경전 사이의 구분을 철폐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

*. Ambrosioster 라는 사람은 히브리거를 제외한 13통을 바울 서신들로 제한 했으며, Pelagius 도 로마에서 약 400년 경에 시도함.

*. 4세기 후반에는 Piotoers 는 히브리서와 야고보서, 그리고 베드로 후서를 사도적인 것으로 인용함.

3. 동방의 국가 교회들 안에서의 신약성서

*. 5세기 초에 생성된 시리다의 전승인 Doctrina Addai 가 전하는 바로는, Edess 의 교회를 설립한 사람이 자기를 고별 설교에서 후임자 Aggai 에게 훈계하기를 구약성서 이외에는 복음서, 바울 서신들, 사도행전 등 하나님의 진리가 담긴 것 이외의 다른 문서들이 교회에서 읽혓는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 5세기 초에 감독안의 공동 노력에 의해서, 시리아 교회의 성경인, 소위 말하는 Peshitta 가 형성됨.

히브리서를 포함한 14통의 바울서신들 다음에는 세 통의 일반서신들, 야고보서,

베드로 전서, 요한1서 등이 있었고, 요한계시록등 다른 것들은 제외되었다.

*. 508년에 Mabby 의 감도 Phildyenus에 의한 공인개정 작업 - 즉, 신약성서의 새 번역 사업으로서, 소위 Philoxeniana - 과 616 년에 Harkel 의 Thomas 에 의한 수정 작업에는 요한2서, 3서와 벧후,유다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포함됨.

종교 개혁 이후의 서방교회에서의 정경과 정경에 대한 신약적 문제 *. 1442년에 플로렌스 공회에서 서부 시리아의 야곱파와 연합할 때에도, 아타나시우스의 정경은 다시 한번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공인되었다.

*. Trent 공회는 구약 성서 전체와 신약성서 전체가 Vulgate 에 수록되어 있는 그대로 정경성이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였으며, 모든 개별적인 책들을 열거하였는데, 그 가운데 히브리서는 바울의 14번째 서신으로, 야고보서는 사도 야고보의 것으로 열거되었다. 공회는 전체 성서의 모든 책들이 같은 권위를 기지고 있는 것이라고 선언함

*. 비록 신약 정경의 외적인 역사는 종결되었지만, 계몽주의 신학 시대 이후로 정경에 대한 교회의 제한과 개신교 신학에 있어서 정경의 구속력 등이 타당한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 Semler 시대 이후로 얻어진 바를 정경의 범위에 대한 여러 세기에 걸친 동요와 역사적 발전에 대한 통찰이야말로 정경의 이러한 형성의 가치와 합리성을 고려하게 해주는 것이다. 정경의 역사는 복음서와 사도문서들로 구성된 두 부분으로 된 정경이 교회의 삶속에서 2세기에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 정경의 범위에 대한 고대 교회의 결정들은 대부분 사도성을 문제 삼았는데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사도성이라고 하는 기준도 역사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쓸모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정경의 범위에 대한 현실적인 개방성과 사실상의 한계 설정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성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어떤 사본에 근거하고 있는가

신약성서의 원본에는 원저자 자필의 원본은 없다. 그러므로 모두 사본에 의하여 전승되어 있다. 신약성서의 원본의 재건에는 (1) 그리스어 사본,(2)고대 번역, (3)교부들의 저서 중에서 성서를 인용한 것과 언급한 것 등의 세가지 사료가 주로 사용된다. 그중에서 그리스어 사본이 주요 사료가 되며,고대의 번역과 교부들의 인용구나 언급, 그리고 그 밖의 단편들은 2차적인 사료가 된다. 그러나 번역도 양질이나 정본의 독법을 반영했을 경우는 그리스어 사본과 맞먹는다. 그리고 초기 교부들의 인용이나 언급은 중요한 도움이 된다.

그리스어 사본의 수는 5천을 넘으며,이것은 다음 네 종류로 분류된다. (1) 파피루스(사본수 81),(2) 대문자 사본(267),(3) 소문자 사본(2768), (4) 일과서(2146)

신약성서의 주요 사본은 기원 2세기에서 10세기 사이의 것이 많이 남아있다. 대문자 사본으로 주요한 것으로는 시나이 사본(4세기,시나이산 기슭 수도원에서 발견되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대영박물관 소장).바티칸 사본(4세기,바티칸 도서관 소장)알렉산드리아 사본(5세기,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것, 대영박물관 소장), 에브라임 사본(5세기,중기 사본,배자 사본(5-6세기,그리스어와 라틴어의 대조판)등이 있다.

 

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 사해사본이란

1947년과 1956년 사이에 사해 주변에서 발견 되어진 사본을 말한다. 이 "사본들"은 일부 완전한 것들도 있 지만, 대부분은 부분적인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광범위한 의미 로보면, 사해사본들은 주전 3세기부터 주후 8세기 무렵까지의 문서들로서 사해바다 주변 지역의 7 장소에서 발견되어진것들을 통칭한다. 사해바다 주변 지역들이란 것은 쿰란, 마사다, 와디 무라바아트, 나할 헤베르, 나할 쩨엘림, 나할미쉬마르, 그리고 키르벳 미르드 지역들을 일컫는다. 이러한 광범위한 의 미에서의 사해사본에는 카이로에서발견되어진 "그니자"까지도 포함되어지기도 한다.
한편, 협소한 의미에서의 사해사본은 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쿰란 사본들을 가리킨다. 1952년 3월 10일 부터 29일까지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사해바다 의 북서쪽 해변가 일대, 즉 하자르 엘 아쯔바흐에서 부터 라쉬 훼쉬카에 이르는 8 km 지역에 흩어져있는 273개의 동굴들에 대한 답사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39개의 동굴들에서 사람들이 살았던자취를 확인하였고 25개의 동굴들에서 쿰란 제 1동 굴과 쿰란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같은 형태의 토기들과 유물들을 출토하였다. 그중에 단지 11개의 동굴에서만 "기록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들을 가리켜 협소한 의미에서 사해사본이라고 일컫는다.
•어떻게 사해사본의 기록연대를 알았을까 ?
사본과 함께 발견되어진 토기와 동전들을 통한 연대 결정과 더불어 서체를 비교 연구하는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이 사해사 본의 기록연대를 결정하는데 사용되어졌다.
W. F. Albright, N. Avigad, S. A.Birnbaum, F. M. Cross, R. S. Hanson 과 J. T. Milik 등이 이 고문서학(팔레오그라피)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에 의해서 사해사본의 서체들이 4가지 부류로 분류되었다.
    ① 고어체; 250 B.C. 부터 150 B.C. 까지,
    ② 하스모니안 서체; 150 - 30 B.C. 까지,
    ③ 헤롯시대 서체; 30 B.C. 부터 A.D. 70 까지,
    ④ 헤롯시대 이후 또는 장식서체; A.D.70-135 까지 등의 구분이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고딕체와 필기체 등 으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고문서체 비교연구 방식에 의해서 얻어지는 연대 결정은 + 50년의 오차 범위 한도내에서 비교적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문서체에 대한 비교 연구와 함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이용하여 연대를 결정 짓는다. 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C14)를 이용하여 산화되고 남아있 는 방사능 물질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얻어지는 연대는 +200 년 또는 + 80 년 정도의 오차를 보여 고문서체 연구와 함께 연 대 결정의 중요한 방법으로 사용되어진다.1951년 시카고 대학 의 과학자 W. F. Libby 는 쿰란 제 1동굴에서 발견된 사본을 둘러쌌던 천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를 1917, + 200년 또는 A.D. 33, + 200년. 즉, A.D. 233 년과 168 B.C. 무렵이라는 결정을 얻었다(O.R. Sellers, BASOR 123[1951] 24-26 참조).
 또한 1956년 런던의 한 연구소(Laboratory of the Royal Institution)에서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종려나무 조각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940 + 80 년, 즉, A.D.16 + 80 년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마지막으로 사본 자체 내에 연대 산출의 근거를 제공하는 단서들에 근거한다. 예를들 면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된 나훔 주석서(4QpNah)에 [ Dmy ]trws 는 Demetrius III Eucerus 라는 주전 2세기 경의 셀류 커드 통치자라는 것이 거의 확실하며, 알렉산드라 여왕의 히브리식 이름 "샬롬찌온",알렉산더 얀네우스의 후계자 "히르카누 스", 그리고 첫 번째 시리아의 로마 총독 Aemilius Scaurus(ca 63 B.C.)에 의하여 일어난 "'Emilyos 학살 사건"등과 같은 내부 기록들은 연대 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한다.

•제 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7개의 두루마리 사본이 발견되어진 곳이다. 7가지 두루마리 사 본들은
    ① 이사야 두루마리A(1QIsaa)
    ② 이사야두루마리 B(1QIsab)
    ③ 공동체 규칙서 (1QS)
    ④ 전쟁사 (1QM)
    ⑤ 감사 찬양시편 (1QH)
    ⑥ 하바국 주석서(1QpHab)
    ⑦ 창세기 외경 (1QapGen) 등이며, 이것들 외에도 72개의 조각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고 그 가운데 15개가 성서 내용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은 미가, 스바냐, 시편의 주석서들과 2개의 공동체 규칙서의 부록들이다
(1QSa; 공동체의 메시 야 규율 1QSb; 축복문 모음집).

•제 2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2번 동굴에서는 18개의 구약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는데, 레 위기 11:22-29 의 내용을 담고있는 2Q5 같은문서는 고대 페니키아 문자들과 비슷한 고대 히브리 어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2Q18 은 제 2경전 가운데 하나인 시 라서(Sir 6:14-15, 20-31)의 내용을 보존하고 있으며 이것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으로는 매우 초기에 해당하는 시라서 사 본으로 알려진다. 왜냐하면, 10세기, 12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카이로그니자에서 발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기록된 시라서는 헬라 어와 라틴어 사본 만이 알려져 왔었었다.
2번 동굴에서는 또 다른 히브리어로 기록된 제 2 경전 사본 조각들도 제공한다. 그 밖에도 15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텍스트들도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2개의 '쥬빌리(Jubeilees)' 사 본들(3Q19, 3Q20)과 아람어로 기록된 '새 예루살렘에 대한 서 술문(3Q24)' 등이 있다.

•제 3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3번 동굴에서는 14개 조각의 텍스트들을 발견하였는데, 3개가 성서(에스겔 16:31-33, 시편 2:6-7,애가 1:10-12, 3:53-62) 내 용들이고 11개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고 그 중에 하나는 이사야 1:1에 대한 주석(3Q4)이다. 또한 유명한 "청동 플라 크"(3Q15)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는데 12개의 칼럼에 보물들(돈, 금, 은, 기타 보석들)이 감춰진 장소들이 열거되어 있다. 감춰 진 보물들의 수량은 가히 경이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들면, 4600달란트의 은과 금 등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아무 누구 도 텍스트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제 4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4번 동굴은 가장 중요한 동굴이랄 수 있다. 완전한 사본은 발 견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15,000 조각들"의 사본이 발견되어 진 곳이다. 나훔의 주석서(4QpNah)가 5개의 칼럼으로 기록된 가장 긴 사본이고 나머지는 모두 끼워맞추어야하는 조각들로 발견되었다. 1952년 부터 1960년 까지 끼워 맞추기 퍼즐을 통 하여 584개의 텍스트 종류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에 127개가 성서 내용들이고 나머지는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가운데는 테필린, 메주자, 그리고 탈굼 (4Q128-157)들인데 DJD 6 으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주석들과 구약성서와 관련된 시리즈들(4Q158-186)은 DJD 5 에서 다루었 다. 또한 여러종류의 제 1에녹서가 1976년 J.T. Milik 에 의하 여 출판되었다. 그 외에도 10개 내지 11개의 공동체 규칙서와 1896년 카이로 그니자를 통해서만 알려졌던 다마스커스 사본이 8개 정도 발견되었다. 그리고 헬라어로만 알려져왔던 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의 일부도 발견되었고, Jubilees 의 히브리어 원본의 일부도 알려졌다. 또한, 토빗서 의 사본(4개는 아람어, 1개는 히브리어- 헬라어와 라틴어를 통 해서만 알려진 제 2경전)과 1번 동굴에서 발견된 감사 찬양시 편 조각, 그리고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본들이 발 견되어진 곳이 4번 동굴이다. "하나님의 아들(4Q246)", "축복 문 모음집(4Q525)", "율법의 실천을 위한 모음집( )"으로 알려진 4QMMT 등, 이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구약성서에 대한 본문비평 연구의 중요한 자료들일 뿐만 아니 라 신약성서 사상의 배경을 연구하는데에도 중요한 자료들로 알려졌다. (DJD=Discoveries in the Judean Desert(Oxford:Clarendon)

•제 5번, 6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5번 동굴에서는 정경화 이전의 성서 텍스트들 8개(신명기 7:15-24, 8:5-9:2 열왕기 상 1:1, 16-17, 27-37 이사야 40:16, 18-19 아모스 1:3-5 시편 119:113-20, 138-42 애가 4:5-8, 11-15, 16, 18-19, 20-22, 5:1-3, 4-12, 13, 16-17 애가4:17-20 과 개봉하기가 아주 어려운 테필린 한 개)와 17개의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이 발견되었다. 성서 내용이 아닌 것들 중에는 1QS 2:4-7, 12-14와 병행구에 해당하는 "공동체 규칙서 (5Q11)", 그리고 카이로 그니자 다마스커스 사본 9:7-10과 병 행구인 "다마스커스 사본(DD)의 사본(5Q12)", "아람어로 기록된 새예루살렘에 대한 서술문(5Q15)" 등이 있다. 이와는 대조 적으로 6번 동굴에서는 비교적 덜 중요한 문서들이 발견되었는 데,대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2개는 고대 히 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6Q1 창세기 6:13-21 과 6Q2 레위기 8:12-13 등의 기록이다). 나머지는 열왕기 상 3:12-14, 12:28-31, 22:28-31 열왕기 하 5:26, 6:32, 7:8-10, 7:20-8:5, 9:1-2, 19-21 시편 78:36-37 아가 1:1-6, 6-7 다니엘 8:20-21, 10:8-16, 11:33-36, 38 등의 내용들이다. 그 밖에도 24개의 성 서 내용이 아닌 것들도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중요성이 덜한 이야기체 문학들, 예언적,사법적, 제의적 내용들과 찬양시들 이다.

•제 7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놀랍게도 19개의 문서 조각들이 전부 헬라어로 기록된 것들이 발견되어진 동굴이다. 이 중에서 2개가 확인되었는데, 7Q1은 출애굽기 28:4-7 그리고 7Q2는 예레미야의 편지 43-44(=바룩 서 6:43-44)로 밝혀졌고 다른 것들은 너무 조각이 작고 적힌 내용의 분량이 충분치 않아서 해독하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제 8번, 9번, 10번 동굴들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8번 동굴에서는 4개의 성서 텍스트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테필린에서 또 어떤 것은 메주자에서 나왔다. 또한 창세기 17:12-19, 18:20-25 그리고 시편 17:5-9, 14, 18:6-9, 10-13 등의 문구들과 한 개의 비성서적 찬양 텍스트가 발견되 었다. 9번 동굴에서는 6 개의 히브리어 문자가 새겨진 파피루 스 조각 한 개만이 발견되었고, 10번 동굴에서는 2개의 히브리 어 문자가 새겨진 오스트라카 한 개가 발견되었다.

•제 11번 동굴에서 발견되어진 것들은 무엇인가 ?
11번 동굴은 1번, 4번 동굴들처럼 중요하다. 고대 히브리어 문 자로 기록된 레위기(11QpaleoLev)와 시편두루마리(11QPsa), 욥의 탈굼역(11QtgJob), 거의 완전한 성전 두루마리 (11QTemplea), 그리고 여러개의 성서내용이 아닌 문서들이 발 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