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이야기
(19)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後裔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이삭은 四十歲에 리브가를 取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族屬 中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族屬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이삭이 그 아내가 孕胎하지 못하므로 그를 爲하여 여호와께 懇求하매 여호와께서 그 懇求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孕胎하였더니 (22)아이들이 그의 胎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國民이 네 胎中에 있구나 두 民族이 네 腹中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族屬이 저 族屬보다 强하겠고 큰 者는 어린 者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그 解産 期限이 찬즉 胎에 쌍동이가 있었는데 (25)먼저 나온 者는 붉고 全身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後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六十歲이었더라
이삭이 40세에 결혼하여 60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자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응답으로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합니다. 그런데 태중의 두 아이가 어찌 심히 싸우는지 걱정이 된 리브가가 기도하였더니 하나님께서 ‘태중의 두 아이가 두 국민이 될 것이고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큰 아들은 붉고 털이 많아 에서(털이 많음)라 하였고 둘째는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와서 야곱(발꿈치를 잡음, 거짓말쟁이)이라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출산하는 이야기가 몇 곳 나오는데, 그들의 생애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의 쌍둥이 자녀를 낳을 때에 먼저 손이 나온 녀석을 장자로 여겨 손에 붉은 실을 매었는데, 다른 녀석이 먼저 나와서 베레스라고 하였고, 본처 소생 셀라가 있는데도 며느리가 나은 베레스가 유다의 족보를 잇는 장남이 됩니다. 결국 며느리 다말이 아내의 자리를 빼앗았고, 그 아들이 장자의 자리를 꿰어 찼다는 것을 나타낸 출산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10)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祖上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孕胎하였는데 (11)그 子息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善이나 惡을 行하지 아니한 때에 擇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行爲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者가 어린 者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記錄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0-13)
야곱은 아브라함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기록되어있고 이후에도 더 많이 거론되는 인물입니다. 우선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서 선택받고 버림을 받은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태중에서는 어떤 선행도 악행도 하기 이전이고, 더구나 에서는 장남인데도 버림을 받고 야곱이 선택받은 것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主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兄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山들을 荒蕪케 하였고 그의 産業을 曠野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當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萬軍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惡한 地境이라 할것이요 여호와의 永永한 震怒를 받은 百姓이라 할 것이며 너희는 目睹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地境 밖에서 크시다” 하리라(말1:2-5)
참 난해한 구절입니다. 에서가 야곱의 형인데도 야곱을 택한 것이 그를 사랑한 까닭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의 산들을 황무하게 하고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이는 것이 야곱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에서가 힘을 내서 다시 일으키면 하나님께서 도로 헐어버리시는 것이 어떻게 야곱을 사랑하기 때문인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에서의 잘못을 일체 거론하지 않으면서 야곱을 사랑하기 때문에 에서를 악한 지경을 만들고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요?
에서와 야곱은 두 사람이지만 한 몸 안의 두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태어났는데 이를 옛사람 또는 겉사람이라 하고 주님을 믿음으로 거듭난 생명을 새사람 또는 속사람이라고 합니다.(골3:9-10.고후4:16,롬7:22) 우리 안에는 이 두 사람이 공존하고 있으며 서로 싸우고 있는 것도 태중의 두 쌍둥이와 같습니다. 이에 대한 다른 표현을 보면 육신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라고도 합니다.(고전3:1) 즉 우리 안에 죽어야 하는 옛사람과 날로 성장하고 새로워져야 하는 새사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겉사람 즉 옛사람이 죽고 속사람이 날로 장성하여 새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새사람이 자랄 수 없기 때문에 옛사람의 상징인 에서를 무너뜨리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식 사랑의 동기
(27)그 아이들이 長成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軍인故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從容한 사람인故로 帳幕에 居하니 (28)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25:19-28)
이삭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서를 사랑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가축에게 사료를 먹여 기르지만 그때에는 가축이나 사냥한 것이나 들판의 풀을 뜯어먹기 때문에 고기 맛이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에 리브가가 염소 고기로 별식을 만들었을 때에 이삭이 전혀 분별을 못하고 잘 먹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냥한 고기 맛보다 사냥하는 에서를 사랑하였고, 장남이니까 사랑하였고, 육적인 동기를 가지고 에서를 사랑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리브가의 동기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반대적인 동기로 에서를 사랑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아들이 장성하여 큰 아들 에서는 사냥을 즐기는 들 사나이가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주로 장막에서 지냈는데,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합니다. 성경은 리브가가 야곱을 사랑하는 이유를 적지 않고 있는데, 이럴 때에는 한쪽을 근거로 추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삭이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다는 말은 그 고기를 좋아했다는 뜻도 되지만, 그의 사냥꾼인 남자다운 모습을 좋아하고, 장남이라는 그의 위치를 인정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사랑의 근거가 육적(肉的)이라는 지적인 것입니다. 지금은 가축에게 사료를 먹여 기르지만 그때에는 가축이나 사냥한 것이나 들판의 풀을 뜯어먹기 때문에 고기 맛이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에 리브가가 염소 고기로 별식을 만들었을 때에 이삭이 전혀 분별을 못하고 잘 먹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리브가는 이삭과는 다른 기준으로 야곱을 사랑하였는데, 조용히 장막에 거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은 아들을 앞세웠기 때문에 그 말씀을 근거로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려고 밧단 아람에 가서 저녁에 혼인을 결정하고 이튿날 아침에 떠나자고 하였을 때에 선뜻 따라나선 당찬 여인입니다. 물론 그녀가 이런 결정을 한데는 아브라함의 종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리브가가 태중 아이들 때문에 기도하였을 때 ‘큰 자는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육신의 장남이 아닌 하나님이 택한 아들을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다음 27장에서 이삭과 리브가의 행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하는데, 생각(사랑)은 행동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명분과 팥죽 한 그릇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甚히 困憊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困憊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別名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兄의 長子의 名分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長子의 名分이 내게 무엇이 有益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盟誓하라” 에서가 盟誓하고 長子의 名分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長子의 名分을 輕忽히 여김이었더라(창25:29-34).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허기졌을 때에 야곱은 형의 약점을 이용해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양도받습니다. 성경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다고 하고,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사모하여 그것을 양도받았으니 에서는 버림받을만한 이유가 있고, 야곱은 선택받을만한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래서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선택하셨다면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격으로 말미암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는 선택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 아니라, 에서와 야곱의 삶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야곱도 자기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셨기에 그의 생애에 깊숙이 관여하시고 에서의 삶에는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샀다고 해서 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장자가 된 것이기에 쓸데없는 짓을 해서 형의 미움을 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는 교활함을 칭찬해서도 안 될 것이고요. 다만 에서나 야곱이나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만 입증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약속의 승계
아브라함 때에 첫 凶年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凶年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王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指示하는 땅에 居하라 이 땅에 留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福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子孫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盟誓한 것을 이루어 네 子孫을 하늘의 별과 같이 蕃盛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子孫에게 주리니 네 子孫을 因하여 天下 萬民이 福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順從하고 내 命令과 내 誡命과 내 律例와 내 法度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차26:1-5)
이삭이 흉년으로 인해 가나안 남쪽 그랄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복을 주되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이삭에게 승계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약속은 야곱에게 이어지고 마침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셔서 그 언약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다고 하시는데,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이삭에게 하신 복에 대한 약속 외에는 19장의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내 언약을 지키라. 할례를 하라’는 말씀과 22장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 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아마도 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에 하나님이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심과 자신의 방패와 상급이심과 전능하셔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 이삭을 향해 칼을 빼든 사실을 가리키심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보다 더 소중한 자식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지키실 것을 믿었기에 그의 후손을 큰 민족으로 번성케 하여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셔야할 의무가 생겼다고 하겠습니다.
부전자전
이삭이 그랄에 居하였더니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百姓이 리브가로 因하여 自己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이 거기 오래 居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王 아비멜렉이 窓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丁寧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對答하되 “내 생각에 그를 因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行하였느냐? 百姓중 하나가 네 아내와 同寢하기 쉬웠을뻔 하였은즉 네가 罪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百姓에게 命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者는 죽이리라” 하였더라(창26:6-11)
이삭은 족장 중에 가나안을 떠나지 않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 그랄에 머물면서,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하였던 것처럼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내의 미모가 뛰어나서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남편인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생사(生死)가 달린 문제라고는 하지만 부전자전으로 보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기 전 애굽에서 있었던 일이고, 지금 이삭은 아버지의 하나님을 곁에서 지켜본 2대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주었던 일은 죽어 마땅한 일이었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할 때에 이삭이 순종하였다고 볼 경우 더욱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제단을 쌓을 때 곁에서 도왔을 것이고, 나무를 벌여놓을 때에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무를 묶었던 줄로 이삭을 묶을 때 이삭은 무엇을 하는지도 몰랐기에 반항하거나 순종할 겨를도 없이 그냥 묶였던 것이고 왜 자기를 묶는지도 몰랐기에 “아빠 왜 이래요?”하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대답도 없이 그를 제단에 안아 내려놓고 칼을 빼들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기를 왜 묶는지, 왜 자기를 향해 칼을 빼어들었는지 몰랐다가 이후에 하나님의 시험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이후로 아버지를 전처럼 친근히 대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칼을 빼들게 하신 하나님을 경외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3년이 지나도록 위로를 받지 못하다가 리브가를 어머니 장막으로 데려가 위로를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창24:67) 또 자식이 없어 기도를 하여 리브가가 잉태하였지만, 아내가 기도 중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으면서도 그런 하나님의 선택을 외면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에서를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블레셋 땅에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시기를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지키려 하는 것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서도 순종하였다면 이후의 이런 일련의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아내를 껴안는 이삭을 발견한 것도 주님의 은혜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것이 왕에게 문제될 이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삭은 자기 땅의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런데 누이라던 리브가를 껴안는 이삭을 불러 책망하면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삭과 그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누이인 줄 알고 그를 아내로 맞이하였다가 하나님께 곤욕을 치렀던 그 왕입니다(창20장). 그는 아브라함 때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 아들도 혹시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우연히 리브가를 껴안는 이삭을 보게 된 것이고 이삭 보호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는 이삭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의 뒤에 있는 하나님의 보복이 두려워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고, 아비멜렉이 두 사람이 부부됨을 알게 하신 것도 이삭을 공개적으로 보호하며 이삭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을 하지 않게 배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아버지나 아들 이삭이 똑같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는데도 그들을 나무라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방패 되심을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해주시려는 의도이십니다.
우물 파는 이삭(26:12-25)
이삭이 그 땅에서 農事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福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昌大하고 旺盛하여 마침내 巨富가 되어 (14)羊과 소가 떼를 이루고 奴僕이 甚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猜忌하여 (15)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强盛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17)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帳幕을 치고 거기 寓居하며 (18)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後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根源을 얻었더니 (20)그랄 牧者들이 이삭의 牧者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因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故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蕃盛하리로다 하였더라(창26:12-22)
이삭이 농사가 잘 되어 거부(巨富)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들을 흙으로 메우고, 아비멜렉도 자기 땅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이삭은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가서 블레셋 사람들이 메운 우물들(아브라함 때에 팠던)을 다시 파서 물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랄 사람들이 와서 자기네 우물이라고 우기므로 이삭이 그 우물을 ‘에섹(다툼)’이라 하고, 다른 우물을 팠지만 또 시비를 걸어와 ‘싯나(대적함)’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그곳을 떠나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더 이상 시비가 없어 ‘르호봇(넓은 곳)’이라 이름 짓고 거기서 지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라 블레셋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우물이 귀한 가나안 땅에서 왜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메웠는지 알 수가 없지만,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파서 물을 얻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사람들의 텃세 때문에 우물을 빼앗기고 몇 차례나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지만,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파서 물을 얻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우물은 삶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그 땅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인 우물을 빼앗겨서 정착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지만, 하나님께서 나그네로 사는 이삭에게 그때마다 우물을 주셔서 살아가게 해주십니다. 이삭은 한곳에 정착해서 살기를 원하였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나그네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물을 빼앗기고 쫓겨나더라도 그의 필요를 공급하셔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해주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23)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爲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福을 주어 네 子孫으로 蕃盛케 하리라 하신지라 (25)이삭이 그곳에 壇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帳幕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두려워 말라. 내가 아브라함을 위하여 너와 함께 있으며, 네게 복을 주어 번성케 하리라.”하시고, 이삭은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를 부르시며, 그곳에서도 우물을 얻습니다.
브엘세바
(26)아비멜렉이 그 親舊 아훗삿과 軍隊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分明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盟誓를 세워 너와 契約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너는 우리를 害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犯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行하며 너로 平安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福을 받은 者니라 (30)이삭이 그들을 爲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盟誓한 後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平安히 갔더라 (32)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自己들의 판 우물에 對하여 이삭에게 와서 告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城邑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이삭이 브엘세바에 정착하였을 때에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국방장관을 거느리고 와서 자기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 이삭에게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합니다. 이런 계약은 북한이 미국에게 불가침 조약을 맺자고 하는 것처럼 약자가 원하여 맺어야하는데, 나그네인 이삭에게 그 땅의 왕 아비멜렉이 찾아와서 맺자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삭의 말대로 그들이 이삭을 미워하여 쫓아냈던 강자 아비멜렉이 쫓겨난 약자 이삭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웃기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비멜렉은 ‘여호와께서 이삭과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라며, ‘너는 여호와께 복 받은 자니 우리를 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런 일은 아브라함 때에도 있었는데(창21장) 아비멜렉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이삭이 아니라 이삭의 보호자인 여호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신 약속이 성취되었던 것처럼, ‘아브라함을 위하여 너와 함께 하겠다’는 이삭과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없었기에 아내를 누이라고 하여 위기를 모면하려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巨富)가 되긴 하지만 그들에게서 쫓겨났고, 우물을 파면 물을 얻긴 하지만 그 우물 때문에 다투고 그 우물들을 빼앗기도록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보호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비멜렉의 눈에는 하나님이 한순간도 이삭을 떠나지 않고 그에게 복을 주시며 그를 지키시는 분으로 보였기 때문에 ‘너는 우리를 해치지 말라’면서 맹세를 하자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삭은 자기를 두려워하는 아비멜렉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이삭은 그들과 맹세하고 잔치를 배설하고 먹고 마신 후에 그들을 보냅니다. 마침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삭은 세바(맹세)라 이름을 지어서 오늘날까지 그곳을 브엘세바 즉 맹세의 우물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브엘세바는 아비멜렉과 맹세한 장소이면서, 하나님께서 이삭의 보호자이심을 확신하게 된 신앙의 유적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서를 축복하려는 이삭
에서가 四十歲에 헷 族屬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族屬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取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器具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爲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別味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前에 내 마음껏 네게 祝福하게 하라”(창26:34-27:4)
에서가 40세 때에 가나안 족속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였기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를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유다가 가나안 여인을 취하여서 낳은 아들들이 하나님께서 죽이실 정도로 악하였던 것처럼 이들의 죄악이 아직 관영하지는 않았어도 이삭 부부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그런 에서를 축복하겠다고 합니다.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성경에서 눈이 먼 것은 거의 모두가 영적인 뜻이 있음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도 나이 많아 눈이 멀었지만 육신의 눈은 멀었어도 영적인 눈을 뜬 것을 나타내고, 엘리 제사장은 자식 사랑에 눈이 먼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이는 이삭의 영적 눈멂에 대한 책망임과 아울러 그의 잘못됨을 바로잡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로 볼 수 있습니다. 보지 못하기에 속일 수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리브가의 의도
(5)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父親이 네 兄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7)나를 爲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別味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前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祝福하게 하라 하셨으니 (8)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命하는대로 (9)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父親을 爲하여 그 즐기시는 別味를 만들리니 (10)네가 그것을 가져 네 父親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前에 네게 祝福하기 爲하여 잡수시게 하라 (11)야곱이 그 母親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兄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12)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者로 뵈일지라 福은 姑捨하고 詛呪를 받을까 하나이다 (13)어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詛呪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좇고 가서 가져오라 (14)그가 가서 取하여 어미에게로 가져왔더니 그 어미가 그 아비의 즐기는 別味를 만들었더라(창27:5-14)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들은 리브가는 즉시 야곱을 불러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라고 말할 때 야곱은 사양합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속일 수 없기 때문에 포기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리브가는 저주는 내가 받을 테니 너는 복을 받으라면서 야곱을 등 떠밀어 들여보냅니다. 리브가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에서를 축복하려는 이삭에게 야곱을 축복하게 하려는 것일까요?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입니다. 그녀는 우물에서 만났던 아브라함의 종의 자초지종을 들으면서, 그 종이 자기를 이삭의 아내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믿었으며, 저녁에 혼사를 결정하고 이튿날 아침에 떠나자는 종을 흔쾌히 따라나섰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던 것입니다. 결혼 20년이 지나도록 없었던 아이가 남편 이삭이 기도하자 임신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임산케 하셨음을 믿었고, 태중에서 싸우는 아이들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음성을 들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작은 아들 야곱을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선택하였다는 사실을 안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당찬 여인입니다. 리브가가 이일에 개입하는 이유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자인 야곱을 선택하셨는데도 장남 에서를 축복하려는 이삭을 저지하여야 한다는 것이 리브가의 생각입니다. 욕심 많고 용의주도한 야곱도 저주받을까봐 포기하겠다는 것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가 이 일에 뛰어드는 이유는 작은 아들을 편애하기 때문도 아니요, 남편을 이기려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하기 위하여 부득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남편 이삭은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남편이 이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죽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겠다는 것이 아내 된 리브가의 간절한 염원인 것임을 안다면 누구도 허튼 소리로 리브가의 용단을 책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남편을 속인 것을 문제 삼는 분들이 많지만, 그렇게 볼 일이 전혀 아닙니다. 기생 라합은 자기 동족을 배반하고 거짓말을 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세상의 모든 가치를 넘어 하나님께 항복한 것이기에 지금도 책망을 받지 않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그런 헛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바로 돌려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이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리란 믿음을 갖고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각오하는 것이지요.
속는 이삭
(15)리브가가 집 안 自己 處所에 있는 맏아들 에서의 좋은 衣服을 取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미고 (17)그 만든 別味와 떡을 自己 아들 야곱의 손에 주매 (18)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른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야곱이 아비에게 對答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命하신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請컨대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祝福하소서” (20)이삭이 그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涑히 잡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順適히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1)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果然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지려 하노라” (22)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音聲은 야곱의 音聲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그 손이 兄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能히 分別치 못하고 祝福하였더라 (24)이삭이 가로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對答하되 “그러하니이다” (25)이삭이 가로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祝福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葡萄酒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26)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 맞추라”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香臭를 맡고 그에게 祝福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香臭는 여호와의 福 주신 밭의 香臭로다 (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豊盛한 穀食과 葡萄酒로 네게 주시기를 願하노라 (29)萬民이 너를 섬기고 列國이 네게 屈服하리니 네가 兄弟들의 主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屈服하며 네게 詛呪하는 者는 詛呪를 받고 네게 祝福하는 者는 福을 받기를 願하노라” (30)이삭이 야곱에게 祝福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兄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31)그가 別味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祝福하소서” (32)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對答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33)이삭이 甚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者가 누구냐 너 오기 前에 내가 다 먹고 그를 爲하여 祝福하였은즉 그가 丁寧 福을 받을 것이니라” (34)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放聲大哭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祝福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35)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奸巧하게 와서 네 福을 빼앗았도다.” (36)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合當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番째니이다 前에는 나의 長子의 名分을 빼앗고 이제는 내 福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爲하여 빌 福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37)이삭이 에서에게 對答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兄弟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穀食과 葡萄酒를 그에게 供給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38)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福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祝福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39)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對答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40)너는 칼을 믿고 生活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창27:15-40)
이삭은 염소로 만든 별식을 갖고 들어오는 야곱에게 누구냐고 묻고 야곱은 천연덕스럽게 에서라고 대답하자 이삭은 에서인지 확인하자며 그를 만지고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구나”하면서 능히 구별하지 못하고 별식을 먹은 후에 야곱에게 축복합니다. 사람이 한 기능이 정지되면 다른 기능이 예민해지게 돼있습니다. 이삭이 눈이 멀었지만 취각은 더 예민해져서 에서의 옷 냄새를 맡아 알았으며, 아무리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 내도 야곱의 목소리임을 금방 알아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라면서 속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삭은 이렇게까지 자신의 축복을 받으려는 야곱의 열심을 가상히 여겨 못이기는 체 축복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축복을 받고 나가자 들어오는 에서가 맏아들 에서라고 하자 그는 심히 크게 떨며 그가 진정 복을 받을 것이라며 울며 매달리는 에서에게 축복하기를 거절합니다. 이삭은 눈먼 아비를 속인 야곱을 저주하며 축복을 취소할 수도 있으련만 왜 그토록 매달리는 에서를 축복하지 않고 두려워 떠는 것일까요? 그것은 속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비록 눈이 멀었어도 목소리가 야곱인데 손이 에서의 손이라고 축복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 일이 단순히 야곱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울며 매달리는 에서를 축복하지 않고 저주에 가까운 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에서의 분노
(41)그 아비가 야곱에게 祝福한 그 祝福을 因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心中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哭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兄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하나니 (43)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避하여 (44)네 兄의 노가 풀리기 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居하라 (45)네 兄의 憤怒가 풀려 네가 自己에게 行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46)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因하여 나의 生命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萬一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사람의 딸들 中에서 아내를 娶하면 나의 生命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에서는 아버지 축복을 가로챈 야곱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 조금 후에 아버지 장례를 마치면 그를 죽이겠다고 벼르기에 이릅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권도 형의 약점을 이용하여 빼앗았고 이번에는 아버지를 속이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삭은 이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에 에서를 축복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는 에서는 번번이 자기 복을 빼앗은 야곱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한 일이고 남편을 바른 자리로 돌아오게 하려고 한 일이 이렇게 형이 동생을 죽이려는데 까지 이르자 야곱을 피신시킬 방도를 세웁니다. 에서가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 근심이 되던 차이기도 하매 자기 친정에 보내어 거기서 혼인을 하여도 좋겠다싶어 남편에게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기를 제안합니다. 이 일로 리브가가 사랑하는 아들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된 것이 바로 남편을 속였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는 형들이 요셉을 팔아버린 것이 애굽 총리가 되는 길이었던 것처럼, 야곱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먼 여정을 출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야곱을 축복하는 이삭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祝福하고 또 付託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中에서 아내를 娶하지 말고 (2)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外祖父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外三寸 라반의 딸 中에서 아내를 娶하라 (3)全能하신 하나님이 네게 福을 주어 너로 生育하고 蕃盛케하사 너로 여러 族屬을 이루게 하시고 (4)아브라함에게 許諾하신 福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子孫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寓居하는 땅을 遺業으로 받게 하시기를 願하노라 (5)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었더니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미 리브가의 오라비더라(창28:1-5)
이삭은 야곱을 밧단아람의 외갓집으로 보내며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택하라고 권면하여 보냅니다. 그런데 야곱을 축복하는 내용이 이전에 에서인 줄 알고 축복한 내용과는 전혀 다름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에서인 줄 알고 축복한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지만 배부르고 등 따스한 육신적 복이며, 만민과 열국을 거론하고 복과 저주에 대한 언급도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핵심인 ‘땅과 후손’이 빠져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으로 축복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인 줄 알고 하는 축복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 즉 ‘땅과 후손’에 대한 유업의 복으로 축복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祖上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출3:6)
(3)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全能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가나안 땅 곧 그들의 寓居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言約하였더니 (5)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子孫의 신음을 듣고 나의 言約을 記憶하노라 (6)그러므로 이스라엘 子孫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苦役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災殃으로 너희를 救贖하여 (7)너희로 내 百姓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盟誓한 땅으로 너희를 引導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基業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출6:3-8)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시는 데는 반드시 그들이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심을 알고 믿게 된 이후에 ‘나는 그의 하나님’이라고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고 믿을 때에 믿어지지 않는 언약이 성취될 것을 믿을 수 있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믿을 때에 ‘나는 아무의 하나님’이라고 기쁨으로 자신을 소개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언약의 자손인 이삭을 향해 칼을 빼들었던 것은 이삭을 죽여도 다시 살리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에 26장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삭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언약을 이루실 줄을 믿었고 그래서 야곱에게 정식으로 축복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도 ‘나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것과 다윗이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는 하나님’을 노래한 것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8)이삭의 나이 一百 八十歲라 (29)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氣運이 盡하매 죽어 自己 列祖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葬事하였더라(창35:28-29)
이삭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런데 곧 죽을 줄 알고 유언을 한 이삭의 죽음 이야기가 왜 나오지 않나 싶어 살펴보니 35장에서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후에 180세를 향수하고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때를 추론하기가 쉽지 않지만, 요셉의 나이를 계산하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야곱이 애굽에 내려간 때의 나이가 130세이고 요셉이 39세 때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요셉을 낳은 때는 대략 90세였던 것 같습니다.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20년 동안 있었고 요셉은 떠날 때쯤 낳았다면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간 것이 70세였다고 볼 수 있고 그때 이삭은 130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을 줄 알았던 이삭이 50년이나 더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볼 때 이삭이 죽을 줄 알았던 것은 하나님의 개입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삭의 생애를 바로잡아주기 위해 그가 얼마 살지 못할 것처럼 생각하여 유언을 하게하고 리브가의 개입하게 하셨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와 아내의 도움으로 그의 잘못된 생애를 바로잡고 위대한 족장이; 될 수 있었고, 그래서 노년 5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생애를 살게 하셨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건강한 몸으로 노년을 누렸을 것이고, 아브라함이 노년에 자식을 낳은 것처럼 이삭은 멀었던 눈도 뜨고 유복한 노년을 향유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이전에 했던 축복과 내용에 있어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을 에서인 줄 알고 축복하였을 때는 자기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적인 축복이라면(27:27-29) 야곱에게 정식으로 축복하는 내용은 하나님이 주체이시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자신에게 허락하신 복의 계승자로 야곱에게 복 주시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28:1-4).
에서인 줄 알고 한 축복은 배부르고 등 따스한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축복이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축복 일부를 인용하지만 이 역시 육신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속은 줄을 깨달은 후 야곱에게 한 축복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인 큰 민족을 이루게 하는 것으로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야곱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출 6:2-5] (2)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3)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 그들과 가나안 땅을 주기로 언약하셨다고 하시는데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이런 약속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믿을 수도 없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 때에 비로소 그분의 약속을 믿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 족장의 믿음을 요구하실 때에 자신의 전능하심을 강조하셨고, 그들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고백할 때에는 그분의 언약을 믿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믿고 고백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세 족장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언약을 믿게 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을 여호와라고 하신 이유는 족장들과 세운 언약을 이행하시려고 오셨기에 그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는 스스로 계시는 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이름을 언약을 이행하시는 분으로 모세에게 알리고 계심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세 족장은 언약을 할 뿐 실제로 그 약속을 이루는 것은 4-500년이 지난 때이기에 그들에게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릴 수가 없으셨던 것이고, 이제 그 약속을 이행하러 오셨기에 여호와라고 스스로의 이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렘 33:2]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겔 17:24]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우고 마른 나무를 무성케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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