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를 필두로 가나안 땅을 정복함으로서 새 시대를 열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첫 번째의 시련은 아간의 죄로 인한 아이성 전투에서의 패배였다. 이러한 패배는 시대를 건너서 또 한 번의 새로운 시대 곧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한 교회의 탄생을 알리는 시작점에서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아간은 금덩이 하나와 시날산 외투를 훔쳤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소유를 판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다. 하나는 훔쳤고, 하나는 속였다.
새 시대의 출현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흐름을 바꾸어보려는 사단의 궤계가 명백히 드러나고 심판을 통한 정화가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예비된 하나님의 확성기와 축복과 저주의 선포>
아이성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따라 북쪽으로 행진하게 되었으며, 얼마 후 그들은 왼쪽으로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두 개의 산 곧 에발산과 그리심산을 만나게 됩니다. 에발산은 그리심산보다 약간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두 산 사이의 계곡을 따라 사마리아성을 향하는 길이 나 있고 또 두 산 사이에는 ‘세겜’이라는 성읍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기도 하며, 장차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눌 곳이기도 합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은 서로 꼭대기로부터는 약 1마일 반(약 2,400m) 정도, 바닥으로부터는 단지 500야드(약 460m) 정도 밖에는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산의 꼭대기에서 바라보면 그들이 취할 약속의 땅이 대부분 보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두 산 사이가 마치 자연적인 원형극장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꼭대기나 산등성이에서 서로 간에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으며 또 소리를 지르면 확성기가 없어도 다른 편이 쉽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매우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향해 자신의 소리를 들려주실 하나님의 확성기였던 것입니다.
수8:33-35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하나님은 그리심산이 축복의 산을 표징하고, 보다 높은 산인 에발산은 경고의 산 또는 저주의 산을 표징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면 그리심산에서 낭독된 축복을 받을 것이며, 만일 지키지 못한다면 에발산으로부터 저주가 떨어질 것입니다. 이같이 그들은 이 산들에서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율법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율법에 앞서 단(altar)을 주신 하나님>
하지만 이러한 축복과 저주가 선포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먼저 하도록 명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명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을 수행하기 전에 단을 통해 깨닫기를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신27:4-7)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을 따랐습니다.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 (수8:30, 31)
여기서 우리는 단이 그리심산이 아니라 저주가 선포된 에발산에 세워졌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할 수 있으며, 또한 단을 필요로 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범해서는 안되지만, 혹 죄를 범했을 경우에도 그 분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이미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즉 에발산으로부터 죄를 범했을 경우에 관한 경고를 받았지만 또한 동시에 바로 그곳에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아야 할 뿐 아니라 거기에 철기를 대어서도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단을 에발산에 쌓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단에 인간의 어떤 행위도 포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단에 어떤 인본주의의 흔적도 불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단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감이 그 어떤 우리의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과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감에 있어서의 이러한 원칙은 신약 경륜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처음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4:3, 4)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바는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그리스도가 아직 죽지 않으셨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방식 곧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갔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많은 유대인들이 그릇 행하게 된 이유는 아브라함이 갔었던 길을 몰랐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그리심산(율법을 지킴)을 통해 결코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지 않았고, 단이 있는 에발산을(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실패는 그들이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 시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되고 그 결과 혼혈족속이 된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을 멸시하는 남유대인들을 증오하여 자신들만의 예배처소를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그곳이 바로 그리심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본주의자들이었으며,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던 가인의 입장에 섰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누었던 예수님의 대화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우물은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4:20)라고 말하면서 아마 그리심산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답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 그 어느 쪽도 가리키지 않았고,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참된 예배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내 안에 있다.’ 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경배자들이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고 있는데, 바로 지금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이렇게 경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경배하는 사람들은 영 안에서 진실함으로 경배해야 합니다.” (요4:23, 24)
주님은 그녀의 관심을 그리심산으로부터 돌려서, 단이 있는 곳 곧 그녀가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에발산으로 돌리려 했던 것입니다.
<계명의 참 의미와 역사의 실상>
단은 세워졌고, 그 위에 십계명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기록은 그들이 이 천연적인 확성기 앞에 섰을 때 낭독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모든 것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어떤 일이 있을 것이며, 또한 지키지 못하면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그들에게 확실히 각인되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은 죄가 들어오면 멈추고, 그 죄가 심판 받은 후에야 비로소 흘러가게 된다는 것도 그들에게 최근에 일어났었던 아간의 사건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들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그 분의 명제적 진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고 계시며 그 분의 인격이 곧 우주의 법입니다. 그 분은 온전한 자유를 가지고 계시지만 결코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법은 그 분의 인격을 성취하는 것에 관한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이 시점 이후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들의 결정에 따라 좌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러한 약속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그들의 실패로 인해 축복이 거두어지는 것과 또한 그들의 회개로 축복이 다시 이어지는 것의 되풀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원칙을 이해한다면 역사의 흥망성쇠를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의 참 의미는 인간의 실상과 한계를 하나님의 인격 앞에 드러내고 궁극적 구원의 길을 찾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임을 우리는 통찰할 수 있습니다.
<두 제사와 구원의 길>
모세의 명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이 기록되고 낭독되기 전에, 에발산에 먼저 세운 단에서 두 가지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단은 주님의 십자가를 상징하며 번제와 화목제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번제(burnt offering)로 드리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가 만족되어지도록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자신을 화목제(peace offering)로 드리셨습니다. 주님은 이 두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양쪽을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번제로 드려야 하며, 그 다음에 우리의 필요와 만족을 위해 또한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드려야 한다는 원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성한 교통 안에서 하나님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단이 저주가 선포된 에발산에 서 있었던 것은 구원이 인간의 행함에서 결코 올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에 있는 우리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그리심산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에발산에 있는 단을 통해서입니다. 구원은 오직 시공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상하는 단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축복의 언약, 아니 성경의 처음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늘 기억하고, 우리는 늘 제단 앞으로 가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 곧 나 자신과 그리고 나의 모든 소유를 먼저 그 제단 위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을 만족하심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필요를 위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장막(Tent)에 두어야 합니다. 언제든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즉시 돌려드리기 위해서이지요!
오 주 예수여! 당신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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