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앙인물

하나님의 나팔수 존 녹스 (John Knox : 1514-1572)

안명애 2019. 1. 17. 10:19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시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요한 복음 17장의 한 구절인 이 말씀은 스 코틀랜드 개혁가인 족 녹스가 가장 애독하던 말씀으로 1572년 11월 24일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임종을 지켜 보던 아내의 음성을 통해 묵상하면서 남아있는 스코틀랜드 형제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이다.
스코틀랜드 개혁가 존 녹스는 1514년 해딩톤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인트 앤드류대학에서 철학과 신 학을 공부하고 사제로 임명되었다. 이 당시 스코틀랜드는 개신교 신앙이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당시 유럽은 이미 독일의 종교 개혁가인 루터에 의해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유럽의 종교 개혁가들은 로 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미신적인 교리와 성직자들의 세속적이며 성적 타락 등에 대해 반발했다. 그러나 이 들의 주장이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바로 세우자는 데 있었지 카톨릭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결코 반란이나 혁명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사제로 임명된 이후 녹스는 어거스틴의 저술을 접하면서 카톨릭 교리의 모순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녹 스의 생애에 결정적으로 그를 개신교 신앙의 지도자로 변화시킨 사건은 당시 녹스가 존경하던 개신교 지도자 인 조기 위샤트의 순교이다. 이 사건은 통해 녹스는 위샤트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교훈을 보여주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스코틀랜드에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이 당시 스코틀랜드는 카톨릭 교회 이외에는 어떤 교 회도 허용치 않는 종교적 탄압이 극심한 나라였으므로 그의 개혁 의지가 현실로 나타나기에는 어려웠다. 더욱 이 그가 추종하며 따르던 위샤트가 순교하고, 의회는 이미 개신교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어려 운 시기였다.

이 당시 개신교 신앙을 탄압하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추기경 비튼인데 그가 1546년 5월에 살해되었다. 이 비튼의 살해혐의가 개신교도들에게 주어지자 이로 인한 박해는 이전보다 더 심해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해 세인트 앤드류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때 녹스는 이들에게 설교를 하기 위해 그 성의 목회자로 부임했다. 이 세인트 앤드류 성의 목회는 그의 공적 사역의 시작을 뜻했다.

카톨릭주의자들은 그의 사역을 묵인하지 않았으며 이에 정부는 성안의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고자 당시 스코 틀랜드와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와 협력하여 개신교도들이 피신한 성을 침략하여 개신교도들을 포위하였다. 이것은 카톨릭 교회의 승리를 뜻하며 동시에 개신교도들의 패배를 뜻했다. 이에 녹스를 비롯한 개신교도들은 포로가 되어 19개월 동안 프랑스의 노예선에 감금되어 고된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노예가 된 녹스와 개신교도들은 미사를 강요당하며 가톨릭 신앙으로의 개종을 강요받았다. 노예선상의 포로가 된 녹스의 심정은 포로로부터 석방이 된 이후에 더욱 하나님의 복음의 나팔을 크게 불어야겠다는 결심으로 가득차 있었 다.

프랑스의 노예선의 사역은 그에게 찾아온 두 번째 큰 시련이었지만 이로 인한 그의 소명의식은 더욱 확고해 졌다. 그 이유는 노예선 생활을 통해 녹스는 카톨릭 교회의 우상 숭배와, 교리적 탈선, 지나친 선행의 강조가 복음의 진리를 오히려 파괴시키는 것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녹스의 강한 집념은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1550년 스코틀랜드와 유럽의의 정세는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불리하였으며 이에 개신교 지도자들은 망명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지금 우리들에게 알려진 프랑 스의 칼빈과 베자 불링거 등은 이곳 망명지에서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당시 망명지는 신앙의 자유를 원 하던 유럽 개신교도들의 집합 장소였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신앙의 지도자가 필요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개 신교 지도자들은 조국을 떠난 피난민들을 위한 설교자로, 지도자로 초빙되었다. 이에 녹스도 조국 스코틀랜드 의 여건이 좋아질 때까지 이들 개신교 지도자들과 교제하면서 자신의 개혁 신앙의 원리를 체계화시켜 나갔다. 녹스가 노예선에 감금되었을 때 그의 석방을 위해 애를 쓴 영국의 서머셋 공작의 영향으로 인해 녹스의 첫 망 명지는 영국이 되었다. 영국에서 목회를 하는 동안 녹스는 주교들과 심한 논쟁을 벌이는데 녹스의 일관된 주 장은 "교회예배와 교리에 인간의 마음이나 생각을 적용하는 것이 신을 모독하는 것이며 우상 숭배를 하는 것 이다"라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왕 메리가 신교도들을 이단으로 단정하며 종교 탄압을 감행하자 녹스는 1554년부터 프랑스의 디에페, 스위스의 제네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등지로 망명생활을 하였다. 녹스가 개신 교도들에게 설교한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만을 최고로 인정하며 다른 하나는 인간이 의에 이르는 수단은 오직 믿음에 의한다는 것이었다. 녹스는 피난민들을 위한 자신의 설교를 통해 카톨릭 교회의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이 당시 그의 이러한 비판은 죽음을 예견하는 위험스런 것이었지만 녹스의 각오는 대단했다. 녹스는 장모에게 보내는 글에서 "내가 빈곤이나 망명생활에서 당하는 고통이 크다 해도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가 저를 복음의 증인으로, 주님의 군병으로 만드십시다"라고 하면서 자신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주의 사자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후 녹스는 망명생활을 마치고 자신의 조국 스코틀랜드로 1559년 귀국하였다. 이 당시 스코틀랜드는 대내 외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이권 다툼의 장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입지를 유리하게 하려고 스코틀 랜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으며 스코틀랜드의 귀족들과 의회도 이들의 하수인이 되어 있었으므로 불안 한 시기였다. 녹스는 귀국한 후 세인트 앤드류시를 개혁하려고 하자 대주교는 병력을 동원하여 녹스에게 "당 신이 만일 앞으로 교회에서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면 당신을 죽을 것이다"라고 위협하였다. 그러 나 녹스는 어느 누구도 나를 방해할 수는 없다고 단호히 주교의 위협을 무시하면서 "내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서 산다면 주님께서 내 생명의 피난처가 되시므로 나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이후 녹스는 세인트 가일즈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그가 그 교회에서 목회할 때 그의 설교는 수백 개의 나팔 수가 불어대는 소리만큼이나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 강한 이미지를 주었다. 녹스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고 이 제는 자기의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다행스럽게도 망명 이후 스코틀랜드의 상황은 영국의 도 움으로 급변하여 이전보다 목회 활동을 하기에 어렵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개혁신앙을 위한 순교의 피가 밀알 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앙의 여파로 의회 내 귀족들의 개신교도로의 회심과 일반 대중들의 개신교 도로의 전향은 그의 목회에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사건은 1560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개신교 신앙을 법적으로 인준한 것과 녹스가 기초한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서'가 채택된 사건이었 다. 스코틀랜드 개혁의 열매인 1560년의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서'는 녹스를 포함한 6명의 목회자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작성했는데 이 고백서는 어떠한 교회가 진정한 교회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진정한 교회는 첫 째, 말씀을 바로 설교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둘째, 성례를 바로 집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셋째, 교리를 바로 가르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스의 조국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쉽지는 않았다. 그것은 녹스에게 닥친 세 번째 시련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귀국이다. 메리는 프랑스 왕인 자신의 남편 프란시스가 죽자 프랑스로부터 귀국한 것 이었다. 메리의 귀국이 녹스에게 위협이 된 것은 분명하였다. 메리는 개신교도들을 탄압하는 전형적인 인물이 었기 때문에 녹스와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에게 메리의 귀국은 비극이었다. 메리가 귀국하던 날 녹스는 "하늘 도 메리의 귀국을 슬퍼하였으며 그녀가 귀국한 후 이틀 동안 햇빛을 볼 수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메리 정부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는 시도는 녹스와 마찰을 일으켰으며 자연히 종교적 분쟁 을 심화시켰다. 녹스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을 불신하는 [여성 통치자에 대한 첫 번째 나팔]이라는 저서를 통해 그녀의 통치를 비판했다. 메리가 녹스에게 "백성들이 왕에게 저항하며 반기를 들 수 있느냐"고 질문하자 녹스는 "만일 아버지가 정신이 이상해 자식을 살해하려고 하면, 자식들은 힘을 모아 무기를 들고서라도 아버 지에게 저항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군주도 자신이 행해야 할 범위를 넘어서면, 백성들로부터 저항 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메리의 종교적 탄압에 대한 저항의 정당성을 피력한 그의 대표적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메리 여왕이 죽은 후 제임스 6세가 1567년 즉위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정세는 1560년에 의회에서 개준한 개 신교도들을 위한 신앙 자유의 입법 조치가 회복되면서 한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한다. 이제 녹스의 조국 스코틀랜드는 이를 통해서 볼 때 카알라일의 언급대로 그를 통해 종교 개혁을 이루었으며 스코틀랜드는 녹스 에게 큰 빚을 진 것이었다.

녹스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신앙의 자유를, 즉 종교 개혁을 이루었으나 그에게 닥친 육체적 질병은 우리를 비애에 잠기게 한다. 녹스의 죽음 스코틀랜드만의 슬픔이 아니라 개신교 신앙을 수호하는 모든 이들의 아픔이 었다. 1771년 녹스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572년 11월 24일에 에딘버러의 집에서 그의 일생을 마쳤다.

장례식에 모여든 군중들 앞에서 새 섭정가 모튼은 다음과 같이 애도하고 있다. "여기 이 세상의 사람을 결 코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한 녹스가 누워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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