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농사를 짓는 가난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소를 돌보는 목동 일을 하면서 동네 한문 서당에 서 글을 배웠다. 1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2살 때 노남리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김현진이라는 선비에게 글다운 글을 배우게 되었다. 이 무렵 같은 서당에 다니던 서너 살 위의 필대은과 친분을 맺으 면서 신학문에 접하게 되었다.
16세 때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소년다운 울분으로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다짐했던 도산은 서울로 상경하여 무료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밀러스쿨(지금의 경신학교)에 입학하고 본격적인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세 때는 서재필이 주도하던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 였으며,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후로 독립협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약관의 나이 21세에 점진학교를 설립하여 민중에게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다.
24세 때는 본격적인 신학문을 배우고자 이혜련과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공부보다는 국권회복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교민사회의 교화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1905년에 미국에서 조직한 공립협회는 2년도 채 안돼는 단기간에 600여명의 회원을 모을 정도로 힘있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공립협회가 자리를 잡고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도산은 1907년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뒤에서 총 지휘하였다. 또한 교육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여기고 있던 도산은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고, 평양, 서울, 대구에 태극서관을 두고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평양 마산동에 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 형성을 위한 노력에도 선구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무렵 일본 총독 이토가 약관의 나이 29세의 도산을 만나 소위 도산 내각을 만들자는 제의를 해왔으나 이를 일축한 후로 일경의 요주의 인물로 주목을 받는 처지가 되기도 하였다.
1909년 도산은 국내 최초의 청년운동 단체인 청년학우회를 창설하는 등 전 국민을 상대로 조직화 운동에 착수하던 중 안중근 의사 사건으로 서울 용산의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2달 만에 석방되기도 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이라는 역사적인 국치를 눈앞에 두고 해외 망명길에 오른 도산은 북경, 상해, 블라디보스톡 등지를 유랑하면서 해외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과 합동으로 청도회담을 개최하였으나 그 결과는 암담한 현실로 나타났다. 미국으로 건너간 도산은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고 이끌었고,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도산은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여는 데 힘썼으며, 한국독립당을 만들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려고 노력하던 중 그는 불행하게도 이듬해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국내에서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도산은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
도산은 쉴 새 없는 구국독립의 실천 활동 속에서도 한편으로 우리 겨레가 일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이며 더 나아가 살기 좋은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 영원히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깊이 연구하였다.
그래서 도산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을 얻게 되었다.
먼저 도산은 우리가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적절한 기회에 그들과 전쟁을 해서 승리하는 데 있다고 보아 최소한의 근대적 무력을 준비해 두자는 독립전쟁 준비론을 정립했다.
동시에 도산은 독립을 이룬 다음에는 모든 국민들이 자유롭고 고르게 잘 살 수 있도록 참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민주국가건설론을 갖고 있었다
.
또 독립을 이루고 민주국가를 세워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족을 위해 헌신할 지도적 인물의 양성이 중요하다고 보고 민족운동의 지도적 인물양성기관으로서 흥사단 운동론도 폈다.
도산은 말 그대로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삶을 살았다. 도산의 60평생 가운데 그 전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두어졌으며, 후반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바쳐졌다.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해 일함으로 인류와 하늘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라고 애국 애족적인 인생관을 밝힌 바 있는 도산은 실제로 평생을 자신과 가정의 편안함을 돌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위기에 처한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그리하여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내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타계하였던 것이다. 말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직접 앞장 서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준 진정한 애국적 지도자였다.
도산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하지만 도산은 아직도 완전히 과거 인물만은 아니다. 그의 독립운동 업적은 과거의 일이라고 쳐도 그의 인격과 사상은 아직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유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산은 우리 나라 근 현대사의 여러 인물들 가운데서 가장 성실한 자세와 정직한 마음씨를 가졌던 참으로 인격적인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도산은 청년들에게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가르쳤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와 개혁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세계화 시대를 맞아 경쟁력을 갖춘 당당한 민족으로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통일국가도 이루어야 하겠고 부패없는 맑고 투명한 사회도 만들어야 한다. 사회 구석구석 뿌리박혀 있는 낡은 관습과 비민주적인 요소를 털어 내어 진정한 의미의 인간해방과 민주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육을 살려 국가 경쟁력도 갖추어야 하겠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밝고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가치관을 심어 주어 나라의 미래를 가꿔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도산이 강조한 민족의 3대 자본 즉, 지식과 신용과 금전의 자본 축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가치로 강조되고 있다.
연도 | 나이 | 내용 | 비고 |
---|---|---|---|
1878 | 0 | 11 월 9 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 ( 일명 도롱섬 ) 에서 안흥국 ( 安興國 ) 의 3 남으로 태어남. 아버지는 빈농의 선비로 당 27 세 , 어머니 황씨는 당 32 세 , 형은 치호 ( 致浩 ). | |
1884 | 6 | 평양 대동강변 국수당 ( 國水塘 ) 으로 이거. 가정에서 한문수학. 매씨 ( 妹氏) 신호 ( 信浩 ) 태어남 . | 갑신정변 ( 甲申政變 )* 한성조약 ( 漢城條約 ) 체결 |
1886 | 8 | 한문 서당에서 수학하는 한편 열 다섯살 때까지 목동 생활. 이 무렵인 1890 전후 황해도 구월산 만유 ( 漫遊 ) | 이화학당 ( 梨花學堂 ) 창립 |
1889 | 11 | 부친 별세 | |
1890 | 12 | 평양 남부산면 노남리로 이거. 서당에서 황해도 안악 출신 청년 선각자인 연상의 필대은 ( 畢大殷 ) 과 교류 . | |
1894 | 16 | 상경하여 서부 대정동 소재 구세학당 ( 救世學堂 ) 에 입학 , 이즈음 예수교 장로회 입교. 필대은을 신앙으로 인도함 . | 동학혁명 발발 2 월 김옥균 상해에서 피살 7 월 청일전쟁 ( 淸日戰爭 ) 발발 |
1896 | 18 | 구세학당 졸업 후 조교로 복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조부의 주선으로 이석관의 장녀 이혜련 ( 당 13 세 ) 과 일방적인 약혼이 되었음을 알고 파혼을 주장하나 관철되지 않음 . | 2 월 아관파천 ( 俄館播遷 ) 4 월 서재필《독립신문》발간 7 월 독립협회 결성 11 월 독립문 건립 |
1897 | 19 | 동생 신호와 약혼녀 혜련을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을 정신여학교 ( 貞信女 學校 ) 에 입학시킴. 독립협회에 가입. 동회 ( 同會 ) 가 만민공동회 ( 萬民共同會 ) 로 발전함에 따라 필대은 등과 평양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부 ( 關西支部 ) 를 발기. 여름 , 평양 감사 조민강 등 수백 군중이 참집한 평양 쾌재정( 快哉亭 ) 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첫 열변. 18 조의 쾌재와 18 조의 불쾌를 열거하며 민중의 새로운 자각을 호소함 . | 경인철도 기공 |
1898 | 20 | 11 월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7 대신을 탄핵하고, 6 개조의 정치혁신안 ( 政治革新案 ) 건의 . | 11 월 황국협회가 만민공동회 습격함 |
1899 | 21 |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 ( 漸進學校 ) 설립. 하천 매축 공사로 황무지 개간 사업에 종사. | 아편전쟁 ( 阿片戰爭 ) 발발 |
1902 | 24 | 김마리아 외숙 김윤오 주선, 밀러 목사 주례로 서울 제중원 ( 세브란스 ) 에서 이혜련과 결혼 (9 월 3 일 ). 다음날 부부 동반으로 인천항을 출발, 일본 동경에서 1 주일을 체류한 후 도미. 하와이 근해에서 아호를 도산 ( 島山 ) 으로 함. 10 월 14 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가정 고용인으로 청소하는 일 등 노사에 종사하며 미국 소학교 통학. | 시베리아 철도 완공 5 월 서울 개성문 전화개설 8 월 국가 ( 國歌 ) 선정 |
1903 | 25 | 9 월 23 일 재미교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 ( 韓人親睦會 ) 조직, 회장에 피선됨 . | 황성기독교청년회 (Y.M.C.A) 발족 |
1904 | 26 |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 기독교 경영의 신학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수업 . | 러일전쟁 ( 露日戰爭 ) |
1905 | 27 | 4 월 5 일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 ( 共立協會 ) 창립, 초대 회장이 됨. 11 월 공립협회 회관 설립. 11 월 20 일 순국문판 《공립신보》 발행. 장남 필립 ( 必立 ) 태어남 . | 을사 5 조약 ( 乙巳五條約 ) 늑결 |
1906 | 28 |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패시픽가에 있는 공립협회의 회관이 불탐. 오클랜드에 임시 본부 설치 ( 이듬해 돌아옴 ) | 3 월 한국통감부 초대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 ( 伊藤博文 ) 부임 |
1907 | 29 | 동경 거쳐 환국. 동경 체류 중 한국인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 ( 太極學會 ) 에서 애국 웅변. 귀국 후 서울에서 이갑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 ( 新民會 ) 창립. 평양에 대성학교 ( 大成學校 ) 설립을 비롯하여, 평양ㆍ서울ㆍ대구에 태극서관 ( 太極書館 ) 을 두고, 평양 마산동 자기회사 ( 磁器會社 ) 설립. 이토 히로부미와 회견하고 소위 안도산 내각의 조각 ( 組閣 ) 을 일축함 . | 1 월 국채보상 ( 國債報償 ) 운동 전개 6 월 헤이그 특사 파견 8 월 정미 7 조약 체결 |
1908 | 30 | 서북학회 창립. 교육에 몰두하는 한편 각지를 순행 ( 巡行 ) 하며 신민회사업을 의논함 | |
1909 | 31 | 청년학우회 ( 靑年學友會 ) 창설. 육당 최남선 ( 六堂 崔南善 ) 이 중앙총무로 도산을 도와 실무 담당. 안중근 ( 安重根 ) 의사 의거로 서울 용산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두 달만에 석방됨 . | 10 월 29 일 안중근 의사 하르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 |
1910 | 32 | 통감부의 내각 조직 제의를 다시금 일축하고 4 월 7 일 행주 출발, 국외 망명의 길을 떠남. 이 때 거국가 ( 去國歌 ) 를 남김. 이갑 등과 위해위 ( 威海衛 )ㆍ북경ㆍ청도 거쳐 상해ㆍ블라디보스톡 등지 유랑. 산동성 청도 ( 靑島 ) 에서 독립 운동자들과 합동하고 청도회담을 개최. | ' 안악 ( 安岳 ) 사건 ' 발단 |
1911 | 33 | 북만 밀산현 ( 密山縣 ) 에 무관학교를 세울 계획이 여의치 못해 러시아ㆍ독일ㆍ영국 등을 거쳐 미국 뉴욕항에 도착 . | |
1912 | 34 | 11 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외 지방총회를 망라한 대한인국민회 (Korean national association) 중앙총회 조직, 초대회장에 선임됨. 한편 민족운동의 핵심체로서 민족성부흥운동을 위한 청년 엘리트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 흥사단 ( 興士團 ) 조직에 착수. 《공립신보》를 《신한민보( 新韓民報 ) 》로 개제 ( 改題 ) 속간. 차남 필선 ( 必鮮 ) 태어남 . | 소위 105 인 사건 검거 선풍 |
1913 | 35 | 청년학우회 후신 ( 後身 ) 으로 흥사단 창립. 발기인은 전국 8 도를 대표하는 25 인의 동지로 함. | 윌슨 , 미국 대통령에 취임 |
1914 | 36 | 대한인국민회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정식 사단법인 ( 社團法人 ) 인가를 받음. 로스앤젤레스로 가족과 이거 | 세계제 1 차대전 발발 |
1915 | 37 | 장녀 수산 ( 繡山 ) 태어남 (1 월 16 일 ) | 하와이 교민사회 순회 |
1917 | 39 | 송종익, 임준기 등과 함께 북미 실업주식 회사 설립. 주로 멕시코 교민사회 방문하며 대한인국민회 조직 운동 강화. 차녀 수라 ( 秀羅 ) 태어남 . | 뉴욕서 세계약소민족대표회의 개최 러시아 혁명 |
1919 | 41 |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취임 연통제( 聯通制 )ㆍ독립 운동 방략 제창. 임시정부 기관지《독립》 발간. 내각 개편으로 국무위원 노동국총판이 됨 . | 중국 5.4 운동 |
1920 | 42 | 독립 운동 중심 세력의 통합에 주력하는 한편 흥사단 원동위원부 ( 興士團 遠東委員部 ) 설치. 미국 국회의원 동양 시찰단 일행을 북경에서 맞아 한국 독립 협조를 호소함 . | 국내 민간 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창간 청산리 대첩 유관순 순국 인도의 간디 반영운동 개시 |
1921 | 43 | 임시정부 ( 臨時政府 ) 세력 통일에 노력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인책사임 ( 引責辭任 ). 상해에서 국민대표회 ( 國民代表會 ) 발기 . | 하와이 태평양회의에 서재필, 이승만 참석 |
1922 | 44 | 서울에 수양동맹회 ( 修養同盟會 ). 평양에 동우구락부 ( 同友俱樂部 ) 발족을 지시. 국민회 분쟁 격화 , 하와이 지방 총회 해체하고 하와이 한인 교민단 조직됨. | 김규식 ( 金奎植 ) 이 모스크바 극동무산자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 |
1923 | 45 | 봄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 개최 , 동 부회장이 됨. 그러나 동회가 개화파와 창조파로 대립되어 결렬되자 대독립당 ( 大獨立黨 ) 결성과 독립 운동 근거지 이상촌 ( 理想村 ) 건설 계획 수립. | 김상옥 의사 순국 케말 파샤 대통령 취임 |
1924 | 46 | 북중국 만주 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 후보지 탐사. 남경에 동명학원 ( 東明學園 ) 을 설립 | < 동족에게 고하는 글 > 작성 |
1926 | 48 | 미주에서 다시 중국에 건너가 가을부터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며 이상촌 사업 추진 . | 《동광》지 창간 6.10 만세 사건 |
1927 | 49 | 길림에서 군사 행동 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을 토의중 동지 200 여명과 함께 중국 경찰에 감금되었다가 , 중국내 사회 여론이 비등하여 20 일 만에 석방 . | 신간회 ( 新幹會 ) 조직 |
1928 | 50 | 이동녕, 이시형, 김구 등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이때 대공주의 ( 大公主義 ) 제창 . | |
1931 | 53 | 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 남경서 토지 매수 . | 만주사변 |
1932 | 54 |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 정책에 따라 독립 운동 근거지의 건설 계획을 재검토 중인 4 월 29 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폭탄사건으로 이날 오후 피체되어 일경에 인도됨. 6 월 7 일 인천에 호송되어 서울로 압송. 4 년 실형을 받고 서대문 감옥, 대전 감옥에서 복역 . | |
1935 | 57 | 2 월 대전 감옥에서 2 년 반 만에 가출옥. 지방 순회 후 평남 대보산 송태 산장에 은거 . | |
1937 | 59 | 6 월 28 일 동우회 ( 同友會 ) 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 11 월 1 일 서대문 형무소 수감. 12 월 24 일 신병으로 보석 출감 . | |
1938 | 60 | 3 월 10 일 자정 경성대학 부속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서거. 망우리 공동 묘지에 안장됨 . | |
1962 | 건국 공로훈장 추서 (3.1 절) | ||
1969 | 4 월 21 일 미국에서 부인 이혜련 여사 별세 . | ||
1973 | 11 월 10 일 탄신 95 주년과 흥사단 창단 60 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구 신사동 649-9 에 도산공원을 조성하고, 망우리 공동 묘지의 도산 유해와 이혜련 여사 유해를 이장하여 안장함 | ||
1978 | 9 월 27 일 탄신 100 주년 기념 대회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거행. | ||
1988 | 3 월 10 일 서거 50 주기 추모식을 서울 류관순 기념관에서 거행. 5 월 6 일부터 15 일까지 도산 유품 및 사진 전시회를 도산 회관에서 가짐. | ||
1997 | 3 월 10 일 서거 59 주기 추모식전에서 거족적으로 도산기념관 건립을 결의하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12월 23일 기공식을 가짐. | ||
1998 | 11월 9일 도산 탄신 120주년을 맞아 ‘도산안창호기념관’을 개관함. 11월 9일 『도산안창호전집』 전 14권과 부록 1권을 간행함. | ||
2003 | 5월 13일 도산공원에서 흥사단 창단 90주년 기념일에 도산 선생의 새로운 동상을 세움. | ||
2004 | 3월 10일 도산 서거 66주기 추모식을 도산공원에서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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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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