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크교
A. 시크교 개관
시크교(The Sikh Religion)는 '다섯 개의 강이 있는 땅'(land of the five rivers)이란 의미를 가진 인도 서북쪽의 편잡(Punjab) 지역과 파키스탄 지역에서 시작된 종교이다. 오늘날 파키스탄과 인도 분쟁의 뿌리는 시크교와 힌두교 간의 종교적인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크교는 종교 개혁 시기였던 15세기 말에 구루 나낙(Guru Nanak, 1469-1539)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때는 이미 이슬람교와 힌두교가 이 지역에 전파되어 있었고,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과연 어떤 종교를 믿어야만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갈 수 있는지 묻고 있던 때였다.
이 종교는 자이나교와 같이 힌두교 안에서 개혁 운동으로 시작된 종교이다. 자이나교는 불교가 시작되기 이전에 발생한 매우 오래 된 종교이나 시크교는 가장 최근에 시작되고 발전된 그 역사가 매우 일천한 새계 종교이다.
이슬람교와 힌두교 어느 쪽도 그들에게 신망을 주지 못한 것이 시크교 설립의 직접적인 동기였다. 시크교 신도들의 수는 서북 5개 강 유역인 펀잡(Punjab)에 살고 있는 토착민 약 620만 인데, 이것은 인도 전체의 인구의 1%밖에 되지 않는 수이다. 그런데 이 종교는 현재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시크교는 유대교처럼 지역성과 종교성이 결합한 지역 종교의 특징이 짙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시크교의 시작은 힌두교의 내적 개혁을 목표로 일어난 힌두교도 가운데 제 2계급인 크샤트리아 출신인 구루 나낙으로부터이다.
그는 9세에 페르시아어를 습득하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종교 문제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그의 출생지 탈반디(Talvan야)에는 힌두교의 박티(Bhakti)파와 이슬람교의 수피(Sufi)파 순회 성자들이 자주 찾아와서 자기들의 종교 포교에 힘쓰곤 하였는데, 소년 나낙은 이들과 더불어 종교의 심오한 진리 문제를 주제로 한 토론을 벌이곤 하였다.
이들 순회 성자 중에서 수피파 성자 파리드(Sufi Shaikh Ibrahim Farid 1450-1535)의 제자가 되어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신앙을 결합시키고자 애쓴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나낙에 의해서 시작된 시크교는 힌두교의 사상과 이슬람교의 사상이 혼합된 혼합 종교이다. 진리 추구를 위한 영적 충동이 너무 커서 나낙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걸식 생활을 하면서 금식, 기도, 묵상들을 하다가 각성하여 세계를 향한 유명한 선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힌두(Hindu)도 없고 무슬림(Muslmim)도 없다." 이것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양쪽을 다 부인하는 선언이다.
B. 시크교는 구루의 종교(Religion of Gurus)
시크교는 구루의 종교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정한 구루라고 본다. 구루는 인간에게 신성(His divine)과 창조적인 말(shabad)이라는 특별한 방법으로 와서 역사적으로 10가지의 다른 형상을 입었다고 본다.
시크교의 경전(the Sacred Scriptures)은 구루가 말한 것이다(The Gru Granth Sahib).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궁극적이고 영원하신 구루(Satguru)이다. 그는 마음속에 진정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자에게 깨달음(enlightenment)과 이해(understanding)를 주시는 분이다.
그는 모든 존재보다 선재하시고 인간의 언어로는 묘사할 수 없는 분이다. 인간이 찾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그 이상의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실 때는 잘 알려진 현상을 통해서 계시하신다. 인간의 종교적인 생활은 하나님의 즉각적이고도 세상에 존재하는 형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행위이다.
시크교에서 뜻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힌두교의 전통에서 신의 현현이나 아바타르스(Avatars)가 지상에 나타난 것과는 다르다.
시크교 초기에는 매우 신비스럽고도 강력한 헌신적인 요소가 있었다. 나낙을 추종하는 제자들이 그 주변에 몰려들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을 하였다. 나낙이 초기 헌신자들에게 매우 강력한 생명력을 불언넣어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낙을 구루라고 불렀다. 구루는 힌두교 전통에 의하면 사람들을 진리에로 인도해 주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나낙은 자신을 하나님의 특별하신 현현인 궁극적이고 참된 구루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C. 시크교의 초기 교세 확장
시크교 창시자인 나낙은 59년의 생애를 마치기까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참되고 유일하신 신인 사트남(Satnam)을 전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가 마지막 죽을 때까지 그를 충성스럽게 도운 자는 그의 종 마르다나(Mardana)였다. 그는 전에는 회교도였으나 시크교로 개종한 후 노래를 부르며 나낙을 따라 전도를 도왔다.
나낙은 처음 12년 동안은 북인도 히말라야 산 속에 있는 모든 순례처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선교하였으며, 두 번째는 마드라스(Madras)를 거쳐서 세일론(Ceylon) 섬 에이즈기까지 남부 지방 선교를 하였다. 세 번째는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 바그다드(Baghdad)와 이슬람의 성지 메카(Mecca)에 까지 이르렀다. 그는 힌두교의 농부 한 사람과 이슬람교의 음악 잘하는 마르다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전도를 하였다. 그의 교훈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교리를 혼합하여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마르다나가 레밥(rebab)이라는 바이올린 비슷한 민속 악기를 연주해서 군중을 모으면 나낙이 나서서 "힌두도 없고 무슬림도 없다"고 선포한다. 군중에서 누군가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그는 매우 반가워하면서 알라와 힌두교의 모든 신들은 실제로는 한 분, 큰 하나님뿐이라고 가르친다.
그는 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트남(Satnam: 그 뜻은 "참된 이름")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또 사트남을 사랑하는 구루(Guru: "선생"이란 뜻)라고 했다. 그가 시작한 새 종교는 기성 종교에 있는 형식주의와 위선에 대항하는 종교 개혁 운동이었다.
그가 개혁에 성공한 것은 그 운동이 적절한 때(the tight time)를 만났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의 성실성과 유머(humor) 때문이었다. 힌두교의 고행이나 금식이 너무 형식에 치우쳤고 이슬람교의 외식적 위선도 마찬가지로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나낙은 진실과 성실함을 모범적인 삶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었으며, 그의 해학(humor)적인 표현은 기성 종교의 위선과 진부함을 대중에게 폭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이슬람의 본래의 사상을 재해석해 주었고, 힌두교도들에게는 힌두교의 요체를 가르쳐 주었다. 이리하여 그의 가르침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양 진영에 있는 신도들로부터 환영르 받았고 그의 교세는 날로 커져 갔다.
D. 종교 개혁과 종교 전쟁
1. 구루(Guru: 지도자, 선생) 시대
1)전반기의 개혁
시크교에는 10명의 구루들이 있는데 앞의 다섯 구루들은 종교 개혁으로 뒤의 다섯 구루들은 종교 전쟁으로 특징지어진다. 구루 종교로서의 시크교의 현저한 특징은 나낙과 그의 후계자 9명이 모두 개인적이거나 살아 있는 구루들의 명확한 역사적 국면을 한데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열 명의 구루들은 동일한 진리를 서로 나누며, 하나님께 대한 동일한 통찰력을 갖고 동일한 공동체 의식을 갖기 위함이라는 말을 들었다. 시크교도들은 10명의 구루들은 서로 서로를 비추어 주는 10개의 촛불과 같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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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의 구루들과 그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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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낙(Nanak) 1469-1539
앙가드(Angad) 1504-1552
아마르 다스(Amar Das) 1479-1574
람 다스(Ram Das) 1534-1581
아르잔(Arjan) 1563-1606
하르 구비두(Har Govind) 1595-1644
하르 라이(Har Rai) 1630-1661
하르 크리샨(Har Krishan) 1656-1664
테그 바하두르(Tegh Bahadur) 1621-1675
고빈드 싱(Gobind Singh) 1666-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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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대부분이 전임자 사후 그 직임을 계승한 것이다. 나낙은 "There is no Hindu, there is no Muslim"이란 말을 함으로써 시크교의 정체성 확정에 애를 썼으며, 고행주의자인 아들을 후계자로 삼지않고 결혼한 제자인 앙가드(Angad)를 후계자로 삼았다. 앙가드는 1539년부터 1552년까지 13년 동안 시크교를 힌두교로부터 독립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훈련 규칙을 만들어서 신도들을 훈련시켰다.
셋째 구루 아마르다스(Amar Das)는 재임 기간 1552년부터 1574년까지 22년 동안 교구 조직에 힘쓰고 중앙 성소를 건립하였으며, 예배 의식 등 여러 의식을 제정하였다. 그는 랑가르(langar) 또는 일반 부엌을 개조해서 공동 취사 및 식사할 수 있는 처소를 만들어서 교인들이 남녀노소 빈부귀천 차별없이 함께 식사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것은 당시 힌두교와 같은 엄격한 4성계 계급 제도(Caste) 정신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써 힌두교도 브라민스(Brahmins)들과 같은 정통 사제(orthodox priesthoods)로부터 거부(rejection) 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크교도들에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차별없이 식사하는 공동체 제도가 대단히 큰 환영을 받았다. 시크교는 4성 계급 제도(Caste)의 편견(prejudice)없이 서로서로 형제애를 나누면서 시크교가 아닌 사람들까지도 환영함으로써 빠르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제도 때문에 후에 이슬람이 침략해 왔을 때에도 힌두교는 계급 제도 때문에 쉽게 무너졌지만 시크교는 공동체를 든든히 지탱할 수가 있었다.
넷째 구루 라마다스(Ramadas)는 1574년부터 1581년까지 7년 재임기간 동안 구루의 세습제를 완성하였다.
다섯째 구루 아르잔(Arjan)은 시크교 역사상 대전환기(the great turning point)를 만들었다. 그가 죽은 이후부터는 시크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그는 하리 만드리(Hari Mandri)라는 황금 성전(the Golden Temple)을 암리트사르(Amritsar)에 세웠다. 그것이 후일에 시크교의 중심이 되었고, 시크교의 상징이 되었고, 시크교도의 긍지이자 희망과 믿음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시크교 최초의 경전(A야 Granth)을 편찬하고, 시크교의 교단을 강력한 조직과 튼튼한 재정적 기초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그는 황제 반역 운동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했고, 시크교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러한 다섯 구루의 기간 동안 시크교의 대부분의 교리가 정비되었다. 그리고 종교적 추구에 의해서 모여진 헌신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 교리의 대부분은 하나님과 연합관계의 신비한 체험을 헌신과 사랑에 의해서 찾고자 하는 북인도의 전통에서 보편화된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시크교에는 대체로 이와 같은 신비적 측면과 공격적이고 군사적인 면(mystical aspect and aggressive and military aspect)이 있다.
2) 후반기의 전쟁
AD 1606년에 아르잔 구루(Guru Arjan)가 무슬림 후견인에 의해서 죽자, 여론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철저한 진상을 규명해서 정의를 밝혀야 한다는 측과 순교자의 죽음으로 처리하자는 의견이었다. 아르잔의 지도력에 의해서 시크교도는 무슬림의 침략에 대항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펀잡 지방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규합하고 자트(Jat) 농장의 카스트들이 그와 동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섯째 구루 하르 고빈드(Har Govind, AD 1596-1644)는 구루 재임 기간 32년(AD 1606-1638) 동안 델리(Delhi)의 무갈 제국 무슬림들과 싸우려고 시크 성채(군사 요새)를 축조하고 시크교도들을 군대로 편성하여 상비군을 만들고 자신은 사제(司祭)와 통치자를 겸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통치 형태를 갖추었다.
일곱째 구루 하르라이(Har Rai, AD 1630-1661)는 구루 재임 기간 22년(AD 1638-1660) 동안에0 무갈 제국의 무슬림들과 끈질기게 싸우면서 농사형 제단을 군사적 도당(徒黨)으로 개편했다.
여덟째 구루 하르 크리샨(Har Krishan, AD 1656-1664) 역시 재임기간 4년 (1660-1664 AD)동안 무슬림의 아우랑 제브(Aurang Zeb) 황제의 위협에도 도망하지 않다가 델리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아홉째 구루 테그 바하두르(Te호 Bahadur, AD 1621-1675)는 전사(warior)로서 비상한 재능을 가졌는데 무슬림들과의 싸움에서 쾌거를 올린 무용담은 인도 전체에 널리 알려졌다. 그도 결국 아우랑 제브 황제에 의해서 순교당했는데, 그의 최후 순교의 장면이 그의 아들이며 나중에 10대 구루가 된 고빈스 싱(Gobind Singh, AD 1666-1708) 동안 구루에 재임하며서 시크교 안에 칼사(Khalsa: 뜻은 "정제된-purified")라는 신권정체(神權政體)를 만들었다. 그는 판다키 파훌(Phandaki-Pahul)이라는 세례 의식 전환을 시켜 줌으로써 강한 전사(warriors)들을 만들어 나갔다. 입회자들로 하여금 모든 악습 폐풍을 끊을 것을 서약하게 하고 강한 전사가 되기를 축원해 주는 의식이다. 또 그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신권정치를 강화하고 제 2그랜트를 편찬하였다.
2. 칼사(Khalsa: the Guru Panth) 시대
제10대 구루(지도자) 고빈드 싱은 무갈 제국과의 전쟁에서 순교하면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후에는 너희가 어디를 가든지 인간 지도자(Guru) 대신에 경전을 지도자로 삼아라. 너희가 무엇을 묻든지 경전은 너희에게 대답하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유언에 따라 인간 지도자 대신에 과거 10대 구루들의 언행과 교훈을 기록한 경전을 늘 외우고 그대로 실행하기를 힘썼다. 카스트의 상위 신분자들은 다시 힌두교로 재개종하여 가고 낮은 신분 출신자들, 특히 자트(Jats)들은 이러한 칼사 제도를 적극 환영하였다.
과거에 포교에만 힘쓰던 교단(敎團)이 군단(軍團)으로 바뀐 후부터는 수많은 세속적 혼합주의 사상이 시크교 내에 범람하였다. 영혼을 돌보는 전도가 거의 중지되자 우상이 가정과 신당 안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10대 구루 고빈드 싱이 죽자 살아 있는 개인 지도자 대신(instead of a livingm individual, directing men) 구루로서의 권위가 주어진 집단 공동체(the Guru Panth)와 경전(經典)으로서의 구루(the Guru Granth)에게 시크교도들의 신적 존경(the divine respects)이 주어졌다.
1699년에 인간 구루가 그 권위를 집단 공동체9community)에 넘겨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서(the sacred scriptures)들을 수집해서 1708년에는 그것들을 집대성한 경전을 그 권위에 이양하였다. 지도자 권(the guruship)의 사상에 변화가 온 것이다. 이제까지는 사람 지도자 중심의 종교가 공동체(the Guru Panth)와 책(the Guru Granth)을 중심으로 한 종교가 된 것이다. 이러한 집단 지도 제도(Khalsa)가 시작된 이후부터 시크 집단은 케쉬드하리파(Keshdhari)와 사히즈드하리파(Sahijdhari) 두 파로 분열되었다. 전자는 사자(lions: 냐ㅜ혼)로 상징되는 호전적 구룹이었고, 후자는 나낙을 흠모하고 고빈드 싱의 강경 노선에 반대하는 민간인 시크들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생겨난 새 공동체(new community)는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엄격한 수직 사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했고 강해야 했다. 그래서 과거 힌두교의 카스트 신분 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이름 대신에 남자들에게는 singh(사자)라는 이름을 여자들에게는 kaur(공주)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여성의 신분이 상승되어 남녀 동등의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고빈드 싱이 죽은 후 시크들이 분산되고 심한 박해를 받자 생존 경쟁의 원리상 그들은 더욱 결사적 호전성을 띠게 되었다. 무갈 제국(Moghul Empire)이 붕괴되자 "펀잡의 사자"라는 별명을 가진 마하라자 란지트 싱(Maharaja Ranjit , AD 1780-1839)은 AD 1800년에 시크 왕국을 건설하고 펀잡 및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그의 사후 서틀레즈 강(Sutlej River) 건너 영국인과 싸우다가 1845년 제 1차 시크 전쟁이 있었고 AD 1848-49년에 제 2차 시크 전쟁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교단 국가(敎團國家)는 전멸했다.
AD 1857년 마하라자 덜립 싱(Maharaja Dhulip singh)은 영국인에게 항복하였고, AD 1947년 8월 15일까지 영국의 통치 아래 있다가 독립된 인도 공화국 내에서 현재까지 작은 군대로 남아 있다.
고빈드 싱을 추종하는 시크들은 다시 브다시스(Vdasis), 수트레(Suthre), 피와네(Piwane), 니리말레(Nirimale), 아칼리스(Akalis) 등 5개 파로 나누어졌다. 이들이 갈라진 이유는 자이나교가 옷 색깔로 갈라진 것과 같다. 그 밖의 원인으로는 면도하는 문제, 머리카락을 자르느냐 잘라서는 안 되느냐, 자르면 어느 정도 자르느냐 등의 문제로 나누어졌다.
E. 시크교의 경전과 황금 사원
그 어떤 종교가 고등 종교로서 갖추어야 할 필수 요건 중에 가장 중요한 요건은 경전(經典)의 유무이다. 시크교가 고등 종교로서 요건을 갖춘 것은 그란트(the Granth)라는 경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란트(the Granth)라는 말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로 책(the book)이란 뜻이다. 시크교의 예배 의식(Sikhrites)은 그 책을 읽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많은 음악과 기도가 그 책과 연관되어 있다.
구루 그란트(the Guru Granth: 경전)는 역사적인 여러 명의 교주에 관한 시적 운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경전은 구루 아르잔(Guru Arjan)의 노력에 의해서 제작되었고, 구루 고빈드 싱(Guru Gobind Singh)에 의해서 최종판이 출간되었는데, 아르잔 이후의 구루들의 사역들이 포함되어 있다. 최초로 나온 경전을 아디 그란트(A야 Granth)라고 하는데 이것은 AD 1604년에 제 5대 구루(Guru) 아르잔(Arjan)이 편집하여 완성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구루 고빈드 싱(Guru Gobind Singh) 자신의 찬양 노래와 시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수집되어 만들어진 것이 제 10판 다삼 그란트(Dasam Granth)이다.
시크 경전 저자의 총수는 37인이고, 전체가 힌두어, 펀잡어, 페르시아어, 마라히어, 프라크리트어, 산스크리트어 등 6개 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모두 운문 형식이어서 읽기가 어렵다. AD 1708년에 구루 고빈드 싱(Guru Gobind Singh)은 자신의 권위로서 시크 종교의 전체 골격을 모두 바꾸어 놓았다. 인도 인도 종교의 특징은 영적인 데 초점을 맞추어 인간의 필요에 따라 실천 가능한 방법에 따라서 보이는 의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성전(聖典)과 성수(聖水)의 강과 성인(聖人)이 인도 종교의 중심이고 인도의 영성의 기초이다.
제1대 구루 나낙이 비록 명상과 헌신을 통해서 마음이 바르게(正心)되어 있지 않으면 종교의 외향적 형식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시크교에서는 성전, 강, 성인 등 3종의 형식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구루 고빈드 싱(Guru Gobind Singh)이 영적 통찰의 도구로서 책을 신적 진리의 근거로 넣었을 때 그것이 곧바로 수납되었다. 그애서 지금은 모든 예배나 의식 행위에서 이 책이 중심이 되어 있다. 시크교도들은 마치 힌두교도들이 그들의 경배 대상물 앞에서 절하듯이 이 책 앞에서 절한다.
어린아이가 성전에 왔을 때 그 책 가운데서 자유 선택(random) 형식으로 책을 읽고 아기의 이름을 선택하기 위한 기초를 이 책(Granth)에 둔다.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신부는 신랑을 따라 책을 네 바퀴 돌고 나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는 노래를 한다. 장례식은 7일에서 10일 동안 책의 특별 부분을 계속 읽으면서 기다리다가 최종 2일간 축제로서 마친다.
성전(聖典) 혹은 구루 드와라(Gurdwara: 구루의 문)는 책을 두는 매우 핵심적인 위치인데 시크교도들이 그곳을 중심으로 모여 앉는다.
시크교에서 경전과 관련된 공식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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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uru Granth + The Guru Panth = gu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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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시크교의 진리의 기준은 경전의 권위와 공동체의 권위를 합친 것이라는 뜻이다. 즉 사상과 행동, 이론과 실천의 종합을 의미한다.
시크교에서는 종교 의식을 전담하는 사제가 없다. 누구든지 경전을 읽을 수 있다면 예배 의식을 진행해 나갈 수 있다.
황금 사원은 시크교의 상징이자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며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주는 것인지 잘 보여 주고 있는 기념물이다. 시크교도들에게 이 황금 사원은 하나님(Darbar Sahib)의 궁전이다. 그들은 이 구내에는 평화가 있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이 가득한 곳이라고 믿고 있다.
힌두어와 펀잡어 고대 노래에서 시크교도가 아닌 사람들도 부르는 신비한 내용들 가운데 구무키(Gumukhi: 구루의 입)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이 AD 1604년에 아르잔(Arjan)에 의해서 처음으로 편집되었다. 그 후대의 구루스에 의한 운문들이 추가되면서 헌신과 명상이 강조되었다. 이 노래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원 안에서 불리어졌다. 그리고 줄이 끊어지지 않는 순레자가 이 사원에 들어가서 이 찬양 소리를 듣고 축복의 말을 듣기 위해 몰려온다.
황금 사원은 외곽이 긴 회랑(cloisters)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 암리트사르(Amritsar: 과즙으로 채워진 물)가 있다. 그 연못 안에는 황금 사원이라고 하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다. 그 사원 안에는 이른 아침에 경전이 펼쳐진 채 놓여진다. 이 사원 안에서는 종교 생활에 필요한 해석(interpretations)이 제공된다. 예를 들면 연꽃 식물(lotus plant)이 혼탁한(murky) 물에서 자라는데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은, 악한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더 높은 소망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지만 낙심하지 말 것을 교훈해 주는 내용들이다.
바깥뜰은 네 개의 평범한 문이 있는데, 그것이 항상 열려 있는 것은 시크교의 보편적 진리에 관한 것, 다시 말해서 어느 누구에게나 구도의 문은 열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밖으로는 길다란 담으로 둘러싸인 아칼 탁트(Akal Takt)라고 하는 정치 및 공동체의 중심으로 중요한 장소가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공지 사항 등이 발표된다.
이 사원은 제6대 구루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것은 시크교도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인식을 얻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사원 안에서는 정치 문제와 종교 문제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이 황금 사원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시크 문화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종교적 생활에 있어서의 대통합을 위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노력의 표현으로 볼 수가 있다.
F. 시크교의 교리(Doctrines)
제1대 구루 나낙(Nanak)의 교훈이 "잡지"(Japji)라는 표제가 붙은 시모음집에 나타나 있다. 그것들은 모두 운문(poetry)으로 되어 있는 38편의 시(psalms) 3775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그란트 사힙(Granth Sahib)의 요약이다.
1. 신관
시크교도들이 아침 기도 때 드리는 기도문인 물만트라(Mulmantra)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 하나님이 계시네
그는
최고의 진리
창조자
그에겐 공포도 증오도 없네
그는
어디든 계시고
우주 어디나 계시네
그는
자존하시며
죽지 아니하시네
그 은혜로
그를 예배하라
시간 이전에
진리는 있었네
지금도
진리는 있네
영원히
진리는 있을 것이네
영원히
진리는 이길 것이네
여기서 시크교는 그들의 신관에 의하면, 유일신, 창조자로서의 최고 신의 존재를 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신의 이름은 사트남(Satnam: 진리의 이름)이다. 또한 사트남 신의 편재, 자존, 불사의 속성과 시간 이전의 자존적 존재, 영원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시크(Sikh)라는 말의 뜻은 제자(disciple)라는 뜻인데, 제자가 구원을 얻는 데 필수적인 것은 스승(Guru)을 잘 만나야 한다. 사트남(Satnam)은 절대적이고 가장 완전한 유일무이의 최고 구루이다. 그는 높은 자와 낮은 자들의 차별을 두지 않으시는 우주의 창조자(시 2편)이시다. 그의 사랑과 친절은 무한하시다(시 4편). 사트남의 이름은 매 시편의 시작하는 말이며, 잡지의 시작하는 말이며, 교도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불러야 하는 이름이다.
이와 같은 신론은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유사한 점이 많은데 그것은 이슬람교가 기독교에서 모방했고, 시크교가 이슬람의 꾸란(Q'uran)에서 영향받은 신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낙(Nanak)은 시크교를 창립하고자 할 때부터 힌두교 농부 한 사람과 이슬람교로부터 개종해 온 악기 다루는 한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서 포교에 힘썼다는 말을 앞서 언급했다. 이와 같이 시크교는 혼합 종교의 성격이 강한 까닭에 시크교에서 신의 이름도 힌두교신, 이슬람교신이 혼성되어 있다.
브라마(Brahma), 파람 브라마(Param Brahma), 파람 이슈바라(Param Eshvara: 최고신), 하리(Hari: 친절), 라마(Rama), 고빈드(Gobind), 나라얀(Narayan)의 이름만 보아도 힌두교의 신의 이름이나 이슬람의 신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가 사용하거나 변조하거나 혼성해서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크교의 사트남 신은 힌두교의 최고신인 브라만보다 위에 있지만 이슬람의 알라신처럼 완고하지 않고 매우 부드러워 여성다운 신이다. 시크교의 조각된 신상은 아름다운 나체의 여성상이다.
2. 시크교의 구원 개념
제1대 구루 나낙(Guru Nanak)의 교훈 가운데서 "구원은 하나님의 지식과 신비스러운 이름 사트남(Satnam)을 묵상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궁극적 은혜"라고 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시크교의 구원관을 분석해 보면, 여기에는 분명히 힌두교의 구원 사상과 이슬람교의 구원 사상이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은 인적 자아(human self)와 신적 자아(divine self)가 몰아지경(沒我之境)에서 하나로 만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범신론적 병합(汎神論的 竝合)은 힌두교의 우파니샤드(Upanishad)의 구원론에서 가져온 사상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사상은 우주 최고의 신 절대자인 사트남(Sarnam)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에게 철저히 순복하는 것으로, 이것은 이슬람교에서 배운 구원 사상이다. 구원과의 관점에서 볼 때 시크교의 개혁도 역시 힌두교의 업(業, Karma)과 윤회적 전생(輪廻的 轉生, Transmigrational Rebirth)의 토착적 쌍둥이론(indigenous twin theory)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시크교는 전지전능 절대 주권자인 사트남(Satnam)의 사랑과 은혜의 수납자요 구원의 대상인 인간이 업(Karma)의 무거운 짐과 윤회의 고리에 매여진 것에서 끊어 주어 구원을 얻도록 도움을 받지만, 사람편에서는 의로운 행위와 생활을 통한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시크교는 구원론의 측면에서 볼 때는 확실히 자력 종교이다. 그런데 시크교에서의 업과 힌두교에서의 업은 차이가 있다.
힌두교에서의 업은 인생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것이지만 시크교에서의 업은 인생의 의지 및 행위와 관계된 것이다.
잡지(Japji)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는 파르샤드(Parshad: 은혜)라는 말이다. 이 말은 최고의 신 사트남이 그를 섬기는 모든 자에게 베푸는 호의와 사랑이라는 뜻이다. 얼른 보아서 기독교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호의와 사랑처럼 보이지만, 아디 그란트(A야 Granth)에서 636회나 사용되고 있는 은혜는 카르마(Karma)를 제한하여 그것의 좋지 않은 응보는 막아주고 좋은 응보는 선양해 주는 것으로서 신약성경에 보이는 은혜의 개념과는 다르다.
시크교는 인도의 폐습인 조혼, 유아 살해, 과부 순장, 카스트 제도, 흡연 등을 반대하고 수엽 기르는 일이나, 아이들의 입회식, 사원에 가서 이름을 받는 일, 세례(Pahul), 결혼 의식, 장례는 철저한 종교 의식대로 지킨다. 힌두교와는 상호 교류도 하고 혼인도 한다.
3. 혼합주의 신학
시크교는 발생 초기부터 힌두교와 이슬람교라는 두 개체 사이에서 태어난 혼합 종교이다. 선생 또는 지도자의 뜻을 가진 구루(Guru)의 이름을 훌륭한 지도자에게 붙여서 10명의 구루를 신격화한 인격신(mangods)을 숭배하는 것은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 숭배와 비슷하다. 또한 Granth 숭배는 비인격적 베단타(Vedanta)에 대한 힌두들의 신앙을 생각나게 한다.
시크의 신학에는 일관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혀 다른 두 개 이상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 생활의 궁극적 목표를 낙원(Sach Khand)에 가는 것이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신에의 귀의, 합일이라고 할 때도 있다.
하나님 이해에서 유일, 무형의 영적 존재임을 믿는 나낙과 그 후계자들은 우상 숭배를 엄금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되 그 이름을 영적으로만 묵상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제사, 고행, 순례들을 공공연하게 공격함으로써 이슬람교와의 차이를 나타내려고 하였다. 시크교는 브라만의 최고 특권을 부정한다. 그러나 업과 전생(Karma and Rebirth)의 교리 때문에 카스트(Caste)를 철저히 거부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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