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 교수)
안식일과 주일
- 언약적 의미와 영광의 실천적 주일 -
1. 서론
2. 안식의 언약적 의미
3. 안식일과 이스라엘 민족
4. 안식일과 주일: 연관성과 단절성의 문제
5. 교회와 주일
6. 결론
1. 서론
최근 안식일과 주일에 관한 논의가 관심을 끌고 있다.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의 주일과 단절되었는가 연속적인가에 대한 관심이다. 더 정확하게는 주님이 오신 이후 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가 안식후 첫날을 특별히 주일로 지켜야만 하는가, 아니면 굳이 그 날을 특별히 간주할 필요가 있는가, 혹은 우리시대의 일요일만이 주일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만일 안식후 첫날에 해당하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면 구약시대의 안식일 처럼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주일의 지킴의 의미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는 달리 지켜야 할 이유나 방법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교회 역사 가운데서 이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어왔다. 칼빈은 구약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며 신약시대에 일요일을 주일로 지킬 필요가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나아가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한 날을 우상화 하는 사람이라며 맹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대요리문답 116, 소요리문답 59. 참조). 안식일과 주일에 관한 논쟁은 많이 있었겠지만 우리가 기억할만한 대표적인 경우는 17세기 화란의 Voetius(1589-1676)와 Coccejus(1603-1669)의 논쟁을 기억한다. Voetius는 구약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나 주일을 지키는 것은 전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 주장했다. 반면 Coccejus는 안식일은 폐지되었으며 주일을 지키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의 전통일뿐이라고 주장한다.
한국교회사 가운데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는 개념이 짙었으며, 박윤선 목사는 선교사를 배웅하기 위해 주일날 돈을 주고 택시를 탄 것이 문제가 되어 교단을 떠나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 와서 성도가 주일날 택시를 탄다고 해서 징계하는 교회는 있지 않을 것이다. 만일 과거의 주일성수에 대한 교회 전통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거의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신학적 해석이 없이 관행을 바꾸어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지금도 이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되고 있다. 필자가 속해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동대구노회는 제10회 제1차 임시회(2001.6.22)에서 주일성수 문제로 인해 박상현 목사를 제명했다(기독교보 2001.6.30, 10면 제명공고. 참조). 그리고 같은 노회 제11회 제1차 임시노회(2001.12.27)에서 동일한 문제로 인해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어 박길현 목사를 제명하기로 결정하였으며(2002년 3월 7일), 제12회 정기노회(2002년 4월 16일)가 전권위원회 보고를 채택함으로써 완전히 제명했다(뉴스앤조이, 제33호, 2002.4.19, 14면 참조).
이에 여러 언론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되 해결의 기미가 아니라 도리어 첨예한 대립과 갈등만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필자는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성경적 해석에 접근해 보고자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과연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 어떠한가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기를 기대한다. 즉 단일한 정답을 찾아나서기 보다는 주님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며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가운데 주님 안에서의 대화를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2. 안식의 언약적 의미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안식’이라는 용어의 성경적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교회 역사 가운데서도 그러하였거니와 오늘날에도 많은 학자들은 안식의 개념을 ‘쉰다’는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대요리문답 문117은 주일과 안식일을 동일하게 이해하며 그날을 일로부터 쉬는 날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출애굽기 20:9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소요리문답 59에서도 일요일을 그리스도인의 주일 즉 안식일로 설명하고 있으며, 소요리문답 문60에서는 주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하는 방법을 이야기 하면서 역시 일을 ‘쉼’에 집중하고 있다.
‘쉰다’고 하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이러한 개념은 신구약을 통한 교회 역사 가운데 모세로 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까지 이른바 율법시대에 강조되었던 개념이다. 그러나 ‘안식’의 의미는 단순히 용어적으로 해석할 문제가 아니라 창조에서 출발하는 ‘하나님의 안식’으로부터 이해해 가야할 내용이다.
(1) 하나님의 안식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 마지막 날 안식(shabat)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 안식의 의미는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 안식의 언어적 의미는 ‘쉼’을 표현하지만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쉰다’는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실 때 어떠한 ‘피곤’의 개념도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으나 우리는 그것을 노동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힘든 노동을 하신 후에 얻는 ‘안식’이라면 그것을 ‘쉼’으로 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지어져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바 안식에 대한 의미도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지어 설명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성이 없는 안식에 대한 설명은 땅의 신학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안식을 언급하실 때 이미 거기에는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스스로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백성의 안식
하나님의 안식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는 오직 그의 백성이며 그의 백성 아닌자는 어느 누구도 그의 안식이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들 가운데 구원의 대상이 된 자신의 백성에게, 자신이 천지창조를 완성하신 후 안식하신 날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통해 안식의 의미를 기억하도록 요구하셨다. 특히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서 누려야 할 의미로서 안식일은 명령과 요구로서 절대화된 형태로 제시되었다. 그래서 그 날은 일하지 않고 쉬어야 함을 요구했으며 이스라엘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쉬어야 할 것을 명령하셨다(출20:8-11, 신5장 참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날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한 언약의 백성의 삶은 자기 능력이나 노동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그 영광에 참여함에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3) 구별의 의미
안식일을 다른 날과 구별함으로써 세상과의 구별의 뜻이 있음을 보인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의 일이다. 범죄한 인간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 막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세상 가운데 ‘원래의 안식의 의미’와 함께 그 안식일을 기억케 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안식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받으심과 직결되며 그것이 원래의 안식의 의미이다.
그것이 모세 이후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규례와 법령으로 주어졌으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곧 구별됨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함으로써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과 구별됨을 나타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보이는 언약과 고백적 행위로서 요구되었던 것이다.
3. 안식일과 이스라엘 민족
(1) 모세시대 이전의 안식일
아담 이후 모세 이전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모세 이후에 주어진 율법 형태의 안식일을 지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삶을 소망으로 알며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즉 모세 이전의 신앙의 선배들은 안식일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영광의 의미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통해 모세 이전의 성도들도 안식일을 지켰던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 역시 다른 날이 아닌 안식일을 특별한 날로 기억하며 지켰던 것이다. 물론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애굽에 있던 모세 이전의 성도들이 율법적 안식일을 지켰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기억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신앙을 이어갔던 것이다.
(2) 모세시대 이후부터 그리스도 오시기 까지의 안식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안식일 제도를 제정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의 땅에서 지켜야할 특별한 안식일 제도를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서 살아야 할 백성들에게 안식일에 대한 특별한 규례를 정하셨던 것이다. 그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살 것을 명하시면서 저들의 삶의 본분을 깨닫도록 해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시대 이후 안식일을 지켜야 했던 것은 그의 땅과 관련이 있다. 그 땅에서 가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특별하게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모세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갔을 때 주변에는 많은 민족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도 날마다의 일상생활을 하면서 살아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과는 다른 구별된 민족으로써 구별된 삶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다른 이방민족들이 날의 구별없이 열심히 노동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한 삶을 포기하도록 요구하셨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은 괴로운 날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안식일날 일을 하지 않고 쉰다고 하는 것은 편안하게 하루를 지나는 것을 의미할 터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다른 날이 오히려 편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날은 노동을 하면서 하고 싶은 일도 하고 다소간 자유롭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식일에는 노동을 쉬는 반면에 훨씬 복잡한 규례들로 인해 상당히 긴장된 상태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시대 안식일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날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뿐 율법이 정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그렇게 지킴으로써 저들의 삶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지속적으로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의 노동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살게 됨으로써 생명이 보존됨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순간순간이 고통스러웠을지 몰라도 그것이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3) 안식일의 의미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안식일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안식과 직접 연관된다. 이 글 2.(1) 하나님의 안식. 참조.
성경은 안식의 주인이 ‘인자’(그 사람의 아들; 그 여자의 후손; 메시야)라고 밝히고 있다(마12:8). 여기서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영광과 통치의 의미를 포함한다. 즉 안식일의 주인이 ‘인자’인 만큼 그 의미에 속해서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은 완전한 그의 영광과 통치 아래 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의 부패와 무능력에 대한 인식을 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범죄한 인간들은 노동함으로써 자기 생명을 영위하게 된다. 인간의 노동은 범죄에 기인하는 것이다(창3:17-19). 그러나 원래 인간은 노동력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양식을 통해 유지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날 노동을 금했던 것은 저들의 생명이 노동력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시고자 함이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로 살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그 광야시기 동안 노동력으로 인해 살아간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자기 노동력에 의존해 살던 그들에게 인간의 노동력이 아닌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한 생명의 의미를 깨우쳐 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시내산에서 제정된 안식일의 의미는 그와 연관된 것이었다.
4. 안식일과 주일
(1) 언약과 성취, 재창조의 의미
안식일이 구별된 날로써 그 날을 지킴으로써 이스라엘이 구별된 백성임을 확증하듯이 에스겔20:20,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
오늘날 주일도 구별된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주님의 백성이 세상의 죄인들과 구별된 자들임을 누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율법적 개념이 아니라 언약적 개념이다. 우리의 시대 성도들은 여전히 세상과 뒤섞여 살고 있다. 그들과 함께 과학적 편의들을 누리며 국가와 세속의 변화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 사람들의 삶과 같지 않다는 구별의 표징이 허락되는데 그것이 주일의 개념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2) 안식일의 주인, 주일의 주인, ‘영광’의 주인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인자’(the Son of Man)로 오신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포하셨다. 구약시대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비단 안식일의 주인일 뿐 아니라 모든 날의 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안식일의 주인임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And he said unto them, The sabbath was made for man, and not man for the sabbath: Therefore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곳 sabbath; KJV, 막2:27-28). 우리가 이 말씀에서 보는 것은 안식일의 의미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의미는 사람이 그 날을 자기를 위해 누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사람이 안식일의 종속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인간의 타락한 이후부터 약속되어 온 그 인자(the Son of Man)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즉, 안식일의 의미는 그 인자가 회복하게 될 영광과 관련된다는 의미이다.
주일의 의미도 동일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주일 하루만 주님의 날이 아니라 모든 날이 주님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유독 안식후 첫날을 ‘주님의 날’로 정하셨다. 이는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를 위해서이다. 주님의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는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세상 가운데 살며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할 존재임을 아는 주님께서 그 날과 그의 백성들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시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과 주일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다. 완성하실 주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누리게 될 영광을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시간을 통해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안식후 첫날’이 성도들에게 특별한 선물로 주어진 것은 날 자체에 대한 성분적 구별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 때문이다.
(3) 연관성과 단절성의 문제
① 안식일과 주일의 연관성과 단절성의 문제
우리 보다 앞선 시대부터 있어 온 안식일과 주일에 관련된 신학적 입장에서의 중요한 논제는 양자의 연관성 문제였다. 즉 안식일과 주일 사이에 각기 한 날로서 어떤 연관성을 가지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면 지속되는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바 언약적 측면에서 살펴져야 하며, 연관성이 없이 단절된 것이라고 한다면 역사에 대해 초월적 관점에서 살펴져야 할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시대에 존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특별한 연관성이 있는 역사성을 말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개,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호세아2:11)라는 기록과 신약성경에서 성취된 말씀들에 대한 해석을 근거로 하여 그렇게 생각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안식일과 주일의 연관성이 있다는 점이다. Roger T. Beckwith, The Christian Sunday, 기독교인과 주일, 신현재 역, 서울: 할렐루야 서원, 1992, pp.77-82; 이환봉,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 것인가, 부산: 글마당, 2001, pp.375-377.
우리시대의 교회 역시 역사 가운데 존재하며 구속사 가운데서 각각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교회 시대, 초대교회 시대, 로마제국의 제도화된 교회시대, 종교개혁시대, 그리고 그 이후의 각기 다양한 교회시대 교회사를 시대구분하는 문제는 역사신학을 하는 입장에서는 중요하다. 그 시대구분은 주님이 오신 이후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살필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위에서 언급된 교회사의 시대구분이 가장 타당한 시대구분이라 생각한다.
의 역사적 특성과 그 안에 존재하는 교회들의 연속적 특성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 시대의 교회들은 율법적 의무 때문이 아니라 언약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주일을 지켜왔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기독교가 일요일을 안식일로 제정한 것은 법률적 성격이 강하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는, “우리 조상들이 주일이라고 불렀던 일요일에는 모든 기소와 소송에 관한 처리와 업무를 일절 중지할 것”을 공포했다.
종교개혁시대의 마르틴 루터는, “제4계명은 과거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이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주일이 주의 날이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잘못된 율법주의적 사고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칼빈은,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하면서 성수를 주장하는 것은 율법주의와 미신적 사고에 기인한 것으로 결국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가리우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당시의 영국교회와 청교도들은 안식후 첫날을 철저하게 지켰다. 물론 그들은 주일을 율법적 의미 때문에 지킨 것이 아니라 언약적 개념으로 인해 주일을 지켰던 것이다.
② 한 주일의 마지막 날인 안식일
이 세상의 날은 첫째 날부터 시작된다. 그 첫째 날이 오늘날의 주일에 해당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에서 시작하여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다. 그리고 오늘날 토요일에 해당되는 마지막날 스스로 창조하신 세계를 보시며 영광을 누리신다. 그것은 노동의 결과가 아니며 하나님의 뜻에 따른 자기영광이었다.
후일 인간이 하나님의 요구를 떠나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온 세계가 함께 타락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하게 된다. 그러나 천지창조를 완성하신 후 하나님께서 영광을 누리시던 안식일의 의미는 택한 백성들에게 상속이 되었으며 그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개념도 더불어 상속된다.
창세기 3:15의 메시야 언약은 나중에 회복하게 될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과도 연결이 된다.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구체화되었으며 약속의 땅을 하락하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태어난 백성들을 통해 안식의 개념을 더욱 구체화하게 된 것이다.
③ 한 주일이 끝난 뒤 새로운 첫날인 주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창세기 3장에서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그가 이 세상에서 고초를 당하시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주님께서 3일 동안 죽음 가운데 계셨다는 사실과 그 3일의 의미가 안식일 하루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왜 나흘이나 이틀이 아닌 3일이었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 3일은 24시간 곱하기 3일인 72시간이 아니었다. 우리 시간으로 계산해서 안식일 전날 오후에서부터 안식후 첫날 이른 새벽까지이므로 실제로는 안식일의 24시간을 감싸고 있는 앞 뒤 날을 포함한 3일이었던 것이다. 이광호, 교회를 위한 신학적 관심들, 조에성경신학연구원, 2002, pp.30-33.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마지막 유월절 안식일에 무덤에 계심으로써 안식일에 거두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값을 치루었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이해해야 할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안식후 첫날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안식’의 성취 곧 영광의 성취였던 것이다. 그 부활하신 첫날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을 표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첫 번 창조의 완성을 기념한 것처럼 새 창조에 속한 주의 백성들이 새 창조의 완성을 기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Paul K. Jewett, The Lord's Day, 주일의 참 뜻, 옥한흠 역, 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4, p.91.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원한 안식의 완성을 위한 서곡이다. 즉 주님께서 부활하신 역사 속의 그 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출발이었다.
5. 교회와 주일
(1) 성경의 가르침
① 안식후 첫날과 주일
신약성경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부터 성도들이 안식후 첫날 정례적인 모임을 가졌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막연한 전통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할 교회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보이실 때 ‘안식후 첫날’(요20:19), ‘여드레째 날’(요20:26) 그 모임에 나타나신 사실을 우리는 우연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후 사도시대 교회들이 안식후 첫날 함께 모여 떡을 떼며 연보를 거두었던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 사도행전20:7(‘안식후 첫날 우리가 떡을 떼려하여 모였더니’); 고린도전서16:2(‘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그리고 고린도전서 11:18 ‘너희가 교회로 모일 때’ - ‘when you come together as a church’의 말 속에서 그들이 모인 날은 16:2의 ‘안식후 첫날’과 동일 날이었음이 분명하다); 요한계시록1:10(‘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등 참조.
그 날은 초대교회가 임의로 약속한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결정된 날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주의 날’에 대한 언급(계1:10)은 안식후 첫날을 지칭하고 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면서 특별히 ‘주의 날’이라고 했을 때 안식후 첫날이 아닌 다른 날을 지칭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사도교회가 끝나가고 계시된 말씀인 신약성경이 완성되어갈 때 즈음 그 날은 교회 가운데 주의 날로서 정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②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어떤 사람들은 초대교회가 날마다 모였으므로 지금도 그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단 주일 뿐만 아니라 날마다 모이던 것이 점차 안식후 첫날 모이는 것으로 정착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날마다 모인 것은 특정한 날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모든 날을 동일하게 생각했으며 우리도 그와같이 안식후 첫날이라는 특정한 날을 주일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옳지 않다. 사도행전 2:46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오순절 성령의 오심으로 교회를 이룬 초기의 성도들이 성전과 교회를 동시에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성전에서 모이고 또다시 집에서 모였는데 여기서 집이란 교회가 모이는 집 우리시대에는 따로 교회당이 있어서 그곳에서 성도들이 모이지만 사도교회나 초대교회시대에는 별도로 예비된 교회당이라는 회집 공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집에서 모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약성경에서 ‘집’이라 표현된 곳 중 많은 경우 그것은 오늘날의 교회당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을 의미한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였는데, ‘날마다’라는 말은 어디에 걸리는가를 문법적, 의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And day by day continuing with one mind in the temple, and breaking bread from house to house, they were taking their meals together with gladness and sincerity of heart(NASB); And they, continuing daily with one accord in the Temple, and breaking bread from house to house, did eat their meat with gladness and singleness of heart(KJV); Every day they continued to meet together in the temple court. They broke bread in their homes and ate together with glad and sincere hearts(NIV).
이 본문에서 우리는 성도들이 성전에서 모이는 행위와 성도의 집에서 교회로 모이는 행위의 분리됨을 알 수 있다. 성도들이 성전에서 모이는 행위는 오순절 성령께서 오신 후 지극히 짧은 기간 중 예루살렘에 살았던 성도들에게 제한적으로 있었던 일이다. 이러한 성전 모임에 참여 할 수 있었던 성도들은 사도행전 1:15에 기록된 120명의 성도들을 중심한 무리였을 것이다.
이 때 ‘날마다’ 성전에 모인 성도들은 당시의 전체 성도들이 아니라 늘 성전 중심으로 사고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모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전에서 모이는 모임 이외에 집에서 모이는 모임은 성도들의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모임 즉 성도들의 예배모임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날마다’ 모인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라 해석한다.
위에 소개된 영어성경에서는 그 의미를 더 분명하게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필자는 위의 성경구절과 신약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통해, 초기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사도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의 모임을 가졌으며 그들의 주일예배는 안식후 첫날로 정했을 것이라 이해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성도들이 기억했으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드렛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여러 기록들에 근거한다. 요한복음 20:19; 20:26 등 참조
이는 오늘날 주일에 대한 논의를 할 때 매우 중요한 논거라 믿는다.
③ 갈라디아서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주일에 대한 말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의 의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며 실체가 도래했으니 더 이상 구약의 율법에 얽매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는 율법주의적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유혹하는 거짓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사도행전 15:1 이하, 갈라디아서 3:1이하 참조.
사도바울은 구약의 율법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풀어진 은혜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그것을 지킴으로써 의에 이르려는 사람들을 경계하며 이 말을 하였다.
갈라디아서에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는 구약시대의 율법적 날들을 의미하며 안식일, 유월절, 희년 등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날들이 우리시대의 주일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④ 로마서 14:5, <“이 날을 저 날 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이 말씀 가운데 나타나는 바는 날들에 관해서 각자 알아서 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그런말은 아니다. 우리는 이 말을 잘 깨닫기 위해서 사도교회 시대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사도교회 시대는 아직 율법의 내용이 교회에 계승되어 나타나고 있던 시대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기도시간에 맞추어 성전으로 갔던 것이다(행3:1). 이러한 예는 신약성경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도들이 여러 지역을 여행할 때 안식일날 유대인 회당을 찾았던 것은 그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시대적 특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는 가운데 신앙을 유지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에 기록된 바, 이 날을 저 날 보다 낫게 여기거나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밝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⑤ 골로새서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말 가운데 나타나는 바는 역시 구약의 율법이 완성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본문 역시 다른 신약성경의 관련 본문들 처럼 구약의 율법시대에 있던 특정한 날들을 오늘날에 있어서도 다른 날과 구별되는 날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안식후 첫날인 주일도 이 날들과 함께 설명하려는 이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본문의 가르침이, 구약의 율법적 지킴들이 신약의 주일을 통해 완성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구약의 음식 규례와 절기들은 장래의 그림자로서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안식후 첫날 주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눔으로써 이룩되는 회복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날에 그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성찬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 모든 것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2) 우리 시대와 주일: 언약과 전통의 문제
① 주일은 하나님의 언약의 표지
교회는 주일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구약의 율법을 기본으로 한 안식일 처럼 지켜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도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역사적 소명 가운데 모든 소망이 주님께 있음을 안식 가운데 누리는 것이다. 그것은 곧 교회의 예배와 직접 관련이 있다. 주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그리스도의 피와 살에 참여함은 놀라운 언약의 확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다. 즉 타락한 인간으로 인해 영광을 방해받게 된 하나님의 영광이 역사 가운데 회복된 부활의 날에 성도들을 통해 확증되고 기념되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일을 통해 지속되어야 할 일이다.
주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기능은 완성된다. 대신 하나님의 복음은 개방되어 특정 민족의 범위를 넘어 지역적으로 전 세계를 향하게 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통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교회는 안식후 첫날 즉 부활하신 주님의 날에 반영된 언약과 더불어 세상속을 침투해 확장되어 가게 된다. 보편교회에 속한 세상의 흩어진 교회들은 비단 지역에 따라 시간적 차이가 나지만 모든 참된 교회들이 ‘하나’인 표지로서 ‘주일’에 대한 언약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② 주일은 교회의 좋은 전통: 안식후 첫날을 주일로 지킬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특별히 안식후 첫날 즉 오늘의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견해에는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언약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부터 있어온 좋은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는 생각에 연유한다.
안식후 첫날 즉 오늘날의 일요일을 주일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한날 뿐 아니라 일주일 모두가 주님의 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말은 옳은 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한 주일중 하루만 주일로 지키고 나머지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틀린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과 더불어 우리의 나약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고르반’에 관한 교훈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것이라 해놓고는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악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주일 전체가 주님의 날이라 해 놓고는 한 주일 모두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 버릴 우려가 있는 연약한 인간들이다. 우리가 한주일 중 하루를 주일로 지키는 의미와 구체적으로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을 주일로 지켜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우리시대에 안식일 문제와 함께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십일조 문제이다. 우리시대에도 수입의 십일조 연보를 하는 것은 영적인 삶의 최소한의 기준이며 그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실은 모두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게 되는 연약한 자들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소유한 물질을 겸손하게 이웃을 위해 잘 사용하면 될 것 아니냐고 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자신이 공력을 염두에 둔 행위에 빠질 수 있으며 자기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십일조 연보를 하는 것은 최소한의 물질을 교회에 맡김으로써 교회가 기도하는 가운데 그 물질을 사용하며 자기의 모든 물질도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즉 우리시대의 십일조연보는 율법적 의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자발성에 기초한다. 이처럼 안식후 첫날을 주일로 지키는 것 또한 대표성을 가지며 자기의 모든 날이 주님의 것임을 나타내는 고백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즉 성도에게 있어서 주일은 전체의 날들에 대한 대표성을 띠며 그 대표성이 있는 안식후 첫날을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은혜로 허락한 것이다.
(3) 주일성수의 방편
① 날의 거룩성에 관하여
주일이라는 날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안식후 첫날인 일요일이 성분적으로 다른 날들과 어떤 차등이 있지는 않다. 즉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의 날은 속되고 일요일은 거룩하기 때문에 그날을 주일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날 자체로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구약시대의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그의 성도들이며 그들이 언약적 의미를 가지는 그날 모임으로써 주일에 대한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즉 주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올바른 고백과 진정한 예배를 동반할 때 주일의 참된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②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켜야 하는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에 아무런 일을 하지 못하고 쉬어야 했다. 그것은 일의 중지를 의미하는 것이며, ‘쉼’의 의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는 날’과는 다른 의미이다.
우리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주일을 구약시대의 안식일처럼 일하지 말아야 하다고 주장한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 날 쉼으로써 그 다음날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Christopher Townsend &Michael Schluter, Why Keep Sunday Special(Cambridge: The Jubilee Centre, 1985), p.61.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십계명에서 안식일에 쉬라고 했으니 쉬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 관련조항들 참조.
그러나 우리시대 주일을 지키는 방법이 구약의 안식일과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시대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즉 주일을 온전히 지키는 방편에 대한 이해를 함으로써 구약시대에 요구되었던 안식일 준수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할 수 있는 것이다.
③ 주일성수의 참된 의미
우리 시대에 주일을 지키는 방편은 하나님의 언약적 경륜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그 주일을 지킴의 핵심에는 예배와 말씀에 있다. 이광호, 교회를 위한 신학적 관심들, pp.347-351.
물론 그 가운데는 주님의 피와 살을 나누는 거룩한 의례가 동시에 존재한다.
과거 청교도 시대와 그로부터 이어지는 시대의 성도들은 외형을 매우 중시했다. 필자는 청교도들의 엄격한 주일성수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일을 엄격하게 지켰던 이유 중에 하나는 예배와 그 가운데 있는 내용의 보존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형식은 내용을 보존, 보호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 시대 이후 나약한 교회시대의 교인들은 형식만 상속하게 되고 그 내용을 등한시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형식을 지킴으로써 주일을 지키려 하고 그러한 행위가 곧 주일성수를 충족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용이 결여된 형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일날 일을 하지 않고 정장한 복장으로 교회에 출석하며 교인들과 즐거운 교제를 나눈다 해도 그 실제 내용인 예배와 그 가운데 존재하는 말씀과 성례를 등한시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주일성수가 될 수 없다.
반대로 형식은 다소 다르다 할지라도 내용이 잘 보존될 수 있다면 그것이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다. 형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른 문화적 요소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내용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라 할지라도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④ 선택적 편의주의의 경계
우리 인간은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 역시 성령의 도우심이 있지 않다면 스스로 죄악 세상 가운데서 버틸수 없다. 주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 주어진 날이다. 하나님께서 안식후 첫날을 교회가운데 주일로써 허락하신 것은 다양한 인종, 문화, 세속적 수준을 가진 세계에 흩어진 교회들에게 주신 언약적 선물이다. 이광호, 기독교 신앙과 윤리, 대구: 조에성경신학연구원, 2002, pp.193-195.
만일 안식후 첫날을 주일로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가 있지 않다면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 어린 교인들은 훨씬 쉽게 편의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며 보편교회가 가지는 외연적 통일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언약적 방편으로써 주일을 허락하심으로 흩어진 보편교회의 외연적 비통일성 내지는 인간적 편의주의를 경계하셨던 것이다.
5. 결론
오늘날 우리는 주일을 지켜야 하는가? 우리는 안식후 첫날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2권 8. 33, 34에서 일요일을 특별한 날로 정해서 예배를 보아야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칼빈의 시대 주일성수에 대한 경직된 시대적 상황 때문이며 안식일과 주일의 연관성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약의 안식일이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날이었듯이 그 날이 모델이 되어 주님께서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이 주일의 의미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율법적으로 성도들을 얽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은혜의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다. 즉 그것은 율법적 행위의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언약적 요청 때문이다. 필자는 심지어 일요일을 공휴일로 정하지 않은 국가에서도 안식후 첫날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예를들어 이슬람교를 믿는 지역의 국가들은 금요일이 공휴일이다. 만일 그런 지역에 교회가 세워진다면 역시 주일을 지켜야 할 것이다. 이광호, 교회를 위한 신학적 관심들, pp.146-149.
그러나 그 주일을 지켜야 하는 것이 구약시대 안식일을 지키듯이 율법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에 와서 주일을 구약시대의 안식일 처럼 지켜야 한다는 율법적 주장은 우려할 만한 것이며 주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음성이 높아지고 있음에 대해서도 우려되는 바다. 교회는 주일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여 ‘주님의 날’로 올바르게 지켜야 할 것이다.
한주일 가운데 특정한 날이 다른 날들보다 거룩한 것은 아니다. 즉 날과 날들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지 않다. 그리고 하루만 주일이 아니라 모든 날이 주님을 위한 날이어야 한다는 견해 역시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다. 그 의미는 우리의 생애동안의 모든 날들이 주님께 속한 날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안식후 첫날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는 말이 날마다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부활하신 안식후 첫날을 특별히 주일로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신 은혜이다. 그 날을 특별히 주일(Lord' Day)로 허락하신 것은,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룩하신 놀라운 일을 교회로 하여금 역사 가운데서 기억하게 하시는 언약적 경륜인 것이다.
우리는 주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영원한 안식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있어온 아름다운 전통이기에 앞서 역사적 언약의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유혹을 받고 있다. 주님의 가르침 보다 죄의 속성을 지닌 원래의 성품이 세상을 따르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상의 교회가 안식후 첫날을 주일로 지키도록 언약하신 것은 성도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총임을 교회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그 언약을 기억하는 가운데 안식 후 첫날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공적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시대 교회가 우려하고 있는 바 주5일제 근무라든지, 대형교회로 인한 무교회적 경향성과 사이버 교회 등이 급속히 번지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분명한 신학적 입장을 정리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한 날을 정하신 것은 인간을 얽매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백성을 보호하시고자 함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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