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예화모음

안명애 2014. 12. 6. 00:14

이기적인 기도
어느 교회 청년회원들이 기도모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청년회를 지도하시는 전도사님이 “그 동안 우리의 기도가 너무 이기적 관심에 매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기도할 때는 자신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자신을 넘어서 부모님이나 나라의 지도자를 위해서도 기도하시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신 후 기도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청년회원들이 차례대로 기도하는데 어떤 자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큰 소리로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그 동안 저는 자신만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저의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의 부모님은 무엇보다도 인품이 훌륭하고 능력이 있는 사위를 보기 원하십니다. 부디 좋은 사위를 맞이하여 그들의 딸이 행복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야고보서 4:3

 

자격 없는 자를 위한 탄원
나폴레옹이 이끄는 병사들 중에 한사람이 탈영을 했다가 붙들려 왔습니다. 그 병사는 이번이 두 번째의 탈영이었기 때문에 벌로써 최고형인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나폴레옹에게 달려와서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절하게 탄원했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두 번씩이나 탈영한 당신의 아들을 위해서 이런 탄원을 하는 것은 의롭지 않다”고 거절했습니다.
이때 그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제시여, 저는 의를 베풀어 달라고 탄원하는 것이 아니라 폐하께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자비를 탄원하고 있는 것이지 의를 탄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나폴레옹은 단호하게 “한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탈영을 한 당신의 아들은 자격이 전혀 없다”라고 뿌리쳤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단념하지 않고 다시 엎드려 간절하게 빕니다. “황제시여, 제 아들이 자격이 없기 때문에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기 때문에 제 아들에게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격이 있다면 제가 왜 긍휼과 자비를 구하겠습니까? 그러니 폐하, 제 아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하박국 3:2

요구할 대상이 있는 행복
아주 오래 간만에 만난 두 사람이 서로 자기 살아온 이야기며, 가정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자녀들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이 “자네 아들은 어떤가?”라고 물었습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자네와 마찬가지로 밤낮 돈 드는 일뿐이네. 처음에는 자전거 사줬더니 조금 있다가는 자동차를 사달라고 난리야. 눈만 뜨면 자식들이 그저 돈만 요구한다네. 자네는 어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게도 자네같이 요구하는 아들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네. 내 아들은 2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네. 죽은 내 아들은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단 말이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복음 7:7

길가에 떨어진 씨
C. S. 루이스(C. S. Lewis)는 그의 저서, 「악마의 편지」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를 설명하는 마음 밭의 비유를 탁월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어떤 노신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습관적으로 도서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다가 수많은 책 중에 우연히 신앙에 관한 책을 한 권 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책을 읽다가 마음에 갑자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은 어떤 분일까? 나는 그 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그 순간 사단이 찾아와 그의 마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점심 시간이야. 배고픈데 뭘 그렇게 생각하나? 골치 아프게?"
그 순간 그는 마음에 생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누르고 식당으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배가 고파서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점심을 먹다가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나는 그 분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 때 사단은 노신사의 마음에 다시 찾아와 방해를 했습니다. 노신사는 사단의 말대로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면서 우선 식사를 끝냈습니다. 또 다시 하나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 했지만 사단의 방해 때문에 노신사는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지금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라고 그의 마음에 솟아오르는 생각을 막았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와 버스 타자마자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때 마치 자신에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며 버스를 타고 가는 노신사의 뒤에서는 사단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마가복음 4: 15

 

시기, 질투를 누르는 축복의 힘
옛날에 영국 런던에는 세 분의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그리스도 교회의 F. B. 마이어 목사님인데 책을 무척 많이 쓰신 목사님이었습니다. 또 한 분은 기독교 역사상 제일 설교를 잘 하시는 침례교회 스펄전 목사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분은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이 세 분 중에 몰간 목사님이 잠시 미국에 가서 사역을 하게 된 때가 있었습니다. 몰간 목사님과 친구 사이였던 마이어 목사님은 그 분이 미국에 있는 동안 그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몰간 목사님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웨스트민스터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을 때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몰간 목사님이 미국이 있을 때에는 기도하기가 좋았는데 서로 같은 도시에서 일하게 되니까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더군요.” 이 말의 의미는 세탁소에서 일하는 사람이 보석상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기는 쉽지만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하기란 쉽지 않은 마음과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자꾸만 마이어 목사님의 마음에 다른 목사님에 대한 시기심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스펄전 목사님처럼 설교에 인기를 얻지 못하고 몰간 목사님처럼 권위 있는 목회를 하지도 못하는 구나’라는 마음이 자꾸 생겨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마음에서 이 시기와 질투를 없애 주시옵소서.”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 시기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깊이 기도하는 마이어 목사님에게 하나님의 인자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 기도를 바꾸어라. 질투를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해라.” 주님의 음성을 들은 후부터 마이어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스펄전 목사님과 그 교회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캠벨 몰간 목사님과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축복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니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가득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담임하는 교회의 공개 기도석상에서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몰간 목사님의 교회를 축복해 주셔서 사람들이 가득 메워지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남거든 우리 교회에 보내 주시옵소서.” 그 후 이 세 분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이 세 교회는 모두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아름답게 주를 위해 사역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로마서 15:2

 

하늘 향해 두 손 든 하이든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하이든(Franz Joseph Haydn)에게 하루는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제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에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작곡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며 또한 제가 작곡한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그의 곡 가운데 ‘천지창조’라는 유명한 곡이 있는데, 이 곡은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턴의 ‘실락원(失樂園)’에 근거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되던 날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파 뒤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청중들이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내자 지휘자는 박수를 중단시키며 뒷좌석 발코니에 앉아있는 하이든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분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하이든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하이든은 청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중단시키고는 두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오직 그 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시편 24: 10

도둑질한 영광
제가 전도사로 있었을 당시, 선명회의 총재였던 스탠 무니햄 박사가 한국에 방문하여 부산 구덕 체육관에서 집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집회의 통역을 맡게 되어 생애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열심히 통역했습니다. 그날 밤 집회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진행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숙소로 돌아왔을 때 부산 시내의 많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매우 은혜로운 집회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세상에 이렇게 통역 잘하고 목소리와 외모까지 좋은 사람은 처음 본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정말 기분이 좋아 ‘드디어 내가 한국 교회에서 떠오르는 샛별이 되는 구나’하며 자아 도취에 빠졌습니다.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그날 밤에는 잠조차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저녁 집회 때 또 다시 통역을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갔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집회가 시작된 지 5분쯤 지나자 목이 완전히 잠겨 버렸습니다. 통역이고 뭐고 목소리 자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내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는 다른 목사님께 통역을 부탁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참담한 심정으로 집회가 끝나기도 전에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체면 손상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밤 12시가 지나자 갑자기 제 마음에서 조용한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목소리가 네 목소리냐? 통역하는 능력이 네 것이냐? 내가 준 선물, 내가 준 은사, 내가 준 목소리, 내가 준 능력을 가지고 하면서 왜 네가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느냐?” 그 즉시 저는 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려 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펼쳤는데 시편 115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저는 마음이 찔려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눈물로 얼굴을 적시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커다란 손이 저를 붙잡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를 의지하고 겸허하게 사역을 계속하라.” 저는 그날 새벽 주님의 위로와 받은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셋째 날 저녁이 되었는데 목사님들이 걱정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날 제가 다시 기회를 얻어 통역을 시작했는데 첫날과 같은 깨끗한 목소리가 되살아나서 은혜 가운데 무사히 집회를 마쳤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제 자신을 높이고 싶은 유혹이 찾아오면 부산에서 새벽을 맞이하며 주님 앞에 엎드렸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시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
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천국으로 보낸 재료
밴 다이크(Van Dike)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로마의 어떤 부자가 천국에 갔는데 한 천사의 안내를 받아서 천국의 이곳 저곳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을 구경하던 중 매우 아름다운 집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집은 아주 근사하고 멋있는 집이었습니다. 부자는 부러움의 말투로 “도대체, 이 아름다운 집의 주인은 누구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 집은 당신이 종으로 부렸던 사람의 집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깜짝 놀란 부자는 당황하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천국에서 이런 멋진 집을 소유 할 수 있습니까?”라고 천사에게 불평했습니다. 그의 불평에 천사는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천국에는 실수가 없고 오류가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그가 보낸 재료로 이 집을 지었을 뿐입니다.”
천사의 단호한 대답에 더 이상 우길 수 없었던 부자는 천국의 다른 장소로 한참을 가게 되었습니다. 더 가다보니 이번에는 너무나 낡고 허술한 집 한 채가 보였습니다. 부자는 천국에도 이런 초라한 집이 있는가 의아하게 생각되어 “도대체 저 집은 누구의 집이요?”라고 천사에게 또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놀랍게도 “당신 집이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더럽고 누추한 집이 내 집일 수 있습니까?”
“천국에는 절대 오류가 없습니다. 실수도 없습니다. 착각도 전혀 없습니다. 이 집은 당신이 세상을 살면서 보낸 재료로 지어진 집입니다.”
지금 우리의 물질은 무엇을 위해서, 어떤 일에 쓰여지고 있습니까?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0-21

하늘 집을 분양 받은 할머니
제가 잘 아는 할머니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분은 일찍이 홀로 되셔서 콩나물 장사를 하면서 자녀들을 모두 교육시키셨습니다. 그 자녀들이 장성하여 나름대로 세상에서 인정받고 잘 사는데도 할머니는 자녀들과 같이 살지 않고 작은 오두막집에 혼자 검소하게 사셨습니다.
자녀들은 혼자 사시는 어머니를 보며 “어머니, 이제 우리들도 모두 잘 사니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리며 살 수 있어요. 이런 보잘것없는 집에서 혼자 살지 마시고 저희랑 좋은 집에서 사세요”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이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애원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그렇다면 나를 위해 이런 집을 지어다오. 집 바닥은 온통 유리로 하되 기둥은 12개로 하고 그 기둥 밑바닥에는 반드시 보석을 박아라. 보석은 각기 다른 색깔로 하고 문은 12개가 되어야한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자녀들은 하나같이 “어머니, 농담이시죠. 세상에 그런 집이 어디 있으며, 그런 집을 어떻게 짓나요?”라며 기가 막힌다는 듯이 되물었습니다. 그들의 반응에 대한 어머니의 말은 더 걸작이었습니다.
“그런 집이 어디 있냐고? 왜 없냐? 나는 그런 집을 하늘나라에 분양 받았는데…. 그래서 곧 그곳에 살게 될 테니 나보고 더 좋은 집으로 가서 살자고 하지 말려무나.”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린도후서 5:1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1.천당지점
일제 시대에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전한 최권능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전하는 메시지는 오로지 “예수 천당!”이었습니다. 하루는 일본 경찰이 길을 지나가는데 목사님이 큰 소리로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다가 경찰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이상한 소리를 외치고 다니는 거요?”라고 일본 경찰이 묻자, 목사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답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이 약간의 호기심이 담긴 어투로 목사님께 이렇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예수 천당이라고만 외치는데, 진짜 천당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오? 만일 있다면 예수를 보여주던지 천당을 보여 주던지 하시오?”
그 때 목사님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답니다.
“지금 당장 천당 본점은 보여 줄 수 없어도 천당 지점은 언제든지 보여줄 수 있소. 바로 내 마음이 천당 지점이라오.”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희망의 종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 영국의 국민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 때 영국의 황실과 윈스턴 처칠 수상은 영국 교회의 요청에 의해서 온 교회에서 같은 시각에 일제히 종을 울리도록 했습니다. 그 종은 전쟁 중에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한 ‘희망의 종’이라고 불리었습니다. 그 희망의 종이 울리기 전 영국 황실은 영국 성공회의 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에게 전국민에게 보내는 설교 방송을 의뢰하였습니다.
윌리엄 템플 주교는 방송을 통해 역사적인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대영 제국 국민 여러분, 잠시 후 이 땅의 모든 교회에서는 종이 울릴 것입니다. 종소리를 듣거든 모두 교회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역대하 20:12

3.희망을 심어준 기사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영국 런던이 첫 번째 폭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런던에 있던 모든 언론계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때 한 저널리스트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영국 언론은 사회에 대하여 아주 예리한 비판적 안목을 가진 언론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판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시(戰時)이고 지금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비판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제 잠시 동안만은 희망을 선전하고 희망의 기사를 씁시다. 신문에서 희망을 보게 하여 우리의 현실이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과 희망을 우리 민족에게 주도록 합시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신문 기자들은 그 저널리스트의 말에 모두 합의하여 모든 기사의 논조를 다르게 썼습니다.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실었고 군대에 출정하는 젊은이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러 예배당에 모인 성도들의 모습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차지했습니다. 또한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희망에 찬 메시지가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영국 국토 전체는 한순간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고 승리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시편 62: 5

4.작은 희망
유명한 심리학자였던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이 나치 독일 수용소에 갇혔을 때 그는 감옥 안에 있는 동료들이 삶을 포기하고 죽어 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 여러분, 저 조그마한 창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한 죄수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창을 봐야 시커먼 회색 담벼락밖에 없지 않소.”
“아니, 그 회색 담벼락 저 건너편에 있는 맑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밤에도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십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갈라디아서 5: 5

5.꿈을 위한 대가
알렉산더 대왕은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리스와의 대대적인 전쟁에 출정하기 직전에 자기의 보물창고를 열어 자기 휘하의 장군들에게 그 보물을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한 참모가 물었습니다. “보물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다 나누어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알렉산더 대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남겨 두었네. 바로 희망을 남겨두었지. 나는 동(東)과 서(西)로 나누어진 이 세계가 나의 꿈으로 하나가 되는 위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네. 그리고 이 희망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 보물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네.”
그의 희망은 세계를 향한 비전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창고에 모아 두었던 보물보다 희망이 더 위대한 보물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위대한 비전을 위해서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할 수 있는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마태복음 13: 46

6내일이 없는 삶
6. 25 동란 중에 한 미국인 군목이 전선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적과 싸움을 하고 있는 미군 병사들을 위로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 중 전쟁터에서 고생을 하고 있는 한 미군 병사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일 나에게 한가지만 요구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요구하겠습니까?”
이 때 미군 병사는 군목에게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내일을 주시오.”
그에게는 내일이 없다는 불안과 운명에 대한 불안이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27:1

7.꿈을 잃어버린 사람
불란서의 레지스탕스 저항운동이 한창일 때에 저항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이 조국을 위하여 거사하려던 모의 계획이 모두 탄로가 나게 되었습니다. 절망한 청년들은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났다”라고 소리치며 낙심했습니다.
그때 한 청년이 우뚝 서서 이렇게 절규하며 외쳤습니다.
“동지 여러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꿈을 잃어버릴 때, 그때가 마지막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마지막은 꿈을 잃을 때 찾아옵니다.
잠 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8꿈이 없는 자
리처드 바크의 저서,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인 갈매기 조나단은 고독한 선구자였습니다. 갈매기들은 해변가를 조금 날아서 겨우 먹이를 찾아 먹고는 제자리로 돌아가 있다가 다시 배가 고프면 다시 가서 먹이를 먹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그것밖에는 갈매기들이 더 이상 날아다닐 곳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갈매기 인생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꿈을 가진 조나단이라는 갈매기가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더 높이 날 수 있어. 그리고 우리는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어.” 그는 친구들에게 미지의 나라를 향하여 가자고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갈매기들은 조나단을 미쳤다며 쫓아내어 그 사회에서 추방하였습니다.
추방당한 조나단은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 슬픔은 그들의 사회에서 쫓겨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더 커다란 꿈을 모르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고독한 선구자 조나단의 슬픔은 높이 날 수도 있는데, 멀리 갈 수도 있는데 친구들이 자기의 한계 이상을 거부하는 짧은 안목에 대한 슬픔이었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미가 7:7

9.한 심리학자의 시각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이라는 유대인 심리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수용소에 갇혀 있었지만 실망하지 않고 심리학자로서 의무를 다합니다. 죽음의 기로에 선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상황에 처해있으면서도 나이와 건강 등에 상관없이 어떤 사람은 일찍 죽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명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실제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수용소 생활을 잘 견디고 버텨나갔던 것입니다.
그는 동료들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자신도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은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지만,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죽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내게는 행운인가! 이런 곳에서 심리학계에 공헌할 만한 진정한 삶의 의미와 생존의 상관 관계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난 곧 이곳을 나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게 될 것이다.’
결국 그는 희망대로 살아남아 수용소를 나오게 되었고 그 후에 「실존 분석적 의미의 정신요법」(Logo-therapy)을 창안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시 25: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10.큰 바위의 얼굴
어느 마을 산마루에는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 얼굴을 닮은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큰 바위에 얽힌 전설이 그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들에게 행복을 안겨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하는 어떤 장군이 나타나서 마을 전체가 소동이 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장군은 실망을 안겨준 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정치가도, 시인도 나타났지만 그들 역시 마을 사람들에게 상처만 남기고 떠나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행복을 가져다 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으려나 보다며 희망을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오랫동안 그 마을에 살던 한 사람이 위로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 그의 모습이 붉은 저녁 노을에 비추이자 마을 사람들 중 하나가 외쳤습니다.
“어네스트를 보셔요. 저 사람이 바로 큰 바위의 얼굴입니다.”
큰 바위의 얼굴을 닮은 사람은 바로 마을 토박이인 어네스트였던 것입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산마루의 바위의 얼굴을 보고 그 바위를 닮은 사람을 기다리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점차 그 큰 바위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스토리는 청교도 작가인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의 작품입니다. 작가는 이 “큰 바위의 얼굴”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과연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 인지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11.산 소망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Martin Luther)도 개혁의 말기에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 누워 ‘모든 것이 끝났어'하며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 때 지혜로운 그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상복을 입은 아내를 보고 깜짝 놀란 그는 “아니 누가 죽었소?”라고 다급히 물었습니다.
아내는 “예,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내의 황당한 대답에 루터는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무슨 소리요?”라고 소리쳤습니다.
루터의 아내는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안 돌아가셨으면 당신이 그렇게 누워 있을 리가 없지요.”
이 아내의 말 한마디가 루터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렇지! 살아 계시지.”
그는 벌떡 일어나 그의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 3

12.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 패니 크로스비(F. J. Crosby)는 신앙이 좋은 할머니와 어머니 밑에서 성경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육체의 질병과 앞을 보지 못하는 어둠 때문에 날마다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부모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의 원망의 마음은 설교를 들어도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오드르 캠프라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항상 그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들려주었습니다. 뉴욕에 전염병이 유행하던 어느 날 패니 크로스비는 꿈속에서 자기의 선생님이 죽어 가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네가 나를 천국에서 만나 주겠니?”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깬 크로스비는 자신이 천국에 갈 확신이 없음을 깨닫고 불안해졌습니다.
그때부터 크로스비는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인생의 의미를 찾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고민 끝에 간호원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착한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는 뉴욕에서 간호원이 되려고 지원했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평안히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죽음 건너편에 있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과 참된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1850년 11월 20일 어느 교회의 전도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의 설교가 끝나고 이 찬송이 불려질 때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이 몸밖에 더 없어서 이 몸 바칩니다.”

그녀는 주님 앞에 걸어 나와 주님께 고백했습니다.
“주님!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을 고쳐 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나의 인생을 주님께서 맡으시고 주관하시고 변화시켜 주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베드로전서 2: 25

13.돈으로 살 수 없는 것
미국의 한 신문에서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돈으로 어디든지 다 갈 수 있다. 다만 천국을 빼놓고는.
우리는 돈으로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다. 다만 행복을 제외하고는.”

이 신문기사의 내용은 제가 인도하는 새생활 세미나에서 말한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으나 돈으로 잠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음식은 살 수 있으나 돈으로 식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으나 돈으로 참된 가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으나 돈으로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사치는 살 수 있으나 돈으로 문화는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쾌락은 살 수 있으나 돈으로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금 십자가는 살 수 있으나 돈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살 수 없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디모데전서 6: 17

14.김구 선생의 변화된 꿈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를 보면 그가 어렸을 때에 관상쟁이를 희망한 적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시대에 출세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급제해야만 하는데, 그 당시만 해도 돈이 있어야 급제할 수 있었답니다. 김구 선생에게는 그런 운이 찾아올 수 없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의 농담이 그의 귀에 들렸습니다.
“관상쟁이가 되면 돈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
그래서 그는 관상쟁이가 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그것에 관련된 책들을 읽다가 자신의 관상에 대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관상이 천하에 불길하고 흉한 상이라고 적혀 있더랍니다. 그래서 ‘내 관상이 이 모양인데 남의 관상을 본들 무엇하리요’라는 생각이 들어서 관상쟁이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책에 “관상(觀相)은 신상(身相)만 못하고 신상은 심상(心相)만 못하다”(얼굴이 잘 생긴 관상은 몸이 튼튼한 신상만 못하고 몸이 튼튼한 신상은 마음이 순전한 심상만 못하다는 뜻)라는 마지막 글귀가 김구 선생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렇다. 무엇보다 바른 심상을 가져야 하는데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계속 그 책을 읽어 가는 가운데 “심상은 마음먹은 대로 결정된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조국과 민족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의 결정이 그로 하여금 애국자의 길에 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15.포기하지 않는 충성
어느 선교사가 여러 해 동안 아프리카에 수많은 열정과 노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충격에 부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선교사는 한꺼번에 두 아들을 잃고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 보낸 슬픔에 비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이런 큰 시련을 주실까? 나에게 이 선교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선교를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모든 짐을 싸서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탔습니다. 마침 그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을 때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온 수많은 사람들이 선착장에 나와 있었습니다. 군악대들의 예포소리와 함께 붉은 주단이 깔리고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대통령이 선착장을 빠져나가자 군악대의 나팔소리도 멈추고 사람들도 모두 돌아갔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는 홀로 고독하게 내려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휴가를 갔다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큰 환영을 받는데, 선교를 하다가 두 아들과 부인을 잃고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구나?’ 그리고는 고독감과 실패감으로 정신없이 거리를 헤맸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에는 군악대의 나팔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내가 직접 너를 맞이할 것이다.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 길을 깔고 내가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내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이 음성을 들은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그 동안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했던 죄를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 10

16.맡은 자의 자부심
유명한 지휘자 마이클 코스타가 어느 날 오케스트라 연습을 시키다가 갑자기 악기 하나가 조용해진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상황을 보니 한 피콜로 연주자가 연주를 멈추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장엄한 오르간 소리와 천둥 같은 드럼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으니 나 하나쯤 소리를 안내도 표가 안 날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예리하게 알아차린 지휘자는 갑자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피콜로 어디 있소! 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오케스트라가 산다오. 자부심을 가지시오. 피콜로! 당신이 있음으로 해서 오케스트라가 산단 말이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누가복음 16:10

17하나님께 드린 기업
미국 오하이오주 나이마에 사는 스텐리 팜(Stanley Pam)이라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 제가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주님을 위한 사업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이 사업을 통해 최상의 것을 주께 드리며 영광 돌리기 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경영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는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를 위해 사업을 하고 나에게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면, 너는 단순히 종업원이 되어라. 끝까지 종업원으로 일하여라.”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스텐리는 회사 설립 신고를 할 때 회사의 주인을 ‘하나님’이라고 써넣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생애를 걸고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사업을 하는 동안 다른 기업처럼 여러 번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놀랍게 발전했으며 그는 은퇴할 때까지 하나님의 음성대로 월급을 받는 종업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18.미국 50개 주의 최고봉에 오른 장애인
20세 타드 허스턴은 1981년 4월 미국의 수상스키 선수를 꿈꾸는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수상스키 경주를 마치고 스키 로프를 끌다가 그만 배에 달린 기어 프로펠러에 다리가 끌려 들어가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두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그 청년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성경을 매일 읽었습니다. 그는 하박국서를 읽으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남아있는 포기할 수 없는 인생과, 나의 가능성 그리고 내가 도달하고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에 들어가 심리학을 전공한 후 남부 캘리포니아 재활병원 의학센터에 상담원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자기와 같은 발을 잃어버리고 손을 잃어버린 장애인들을 돕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기도하다가 잠들었을 때, 꿈에서 하나님이 자꾸만 산으로 올라가라고 하시며 미국의 각 주를 보여 주셨습니다. 캘리포니아 주, 몬타나 주, 뉴멕시코 주 등을 계속 보여주시며 각 주마다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하나님께 “올라가라면 올라가야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희한한 꿈을 몇 번이고 자꾸 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꿈에서 깨어나 웃으면서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재미있네요. 주님은 저에게 정말 저의 불편한 의족을 가지고 미국 50개 주마다 최고로 높은 산을 정말로 올라가라고 요구하시는 겁니까? 좋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이 도전은 저와 같은 장애인 친구들에게 놀라운 꿈과 삶의 격려가 될 것입니다. 제가 그 계획을 세워서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는 미국 50개 주의 최고봉을 의족으로 정복하는 “서키트 아메리카”(Circuit America)라는 프로젝트로 도전했습니다. 1994년 6월 1일 드디어 알라스카 주 매킨리봉에서부터 그의 정복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죽음에 다다르는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겼습니다. 수많은 기자들이 이런 무모한 도전에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능성에 대해 도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도전이 내가 사랑하는 장애인 친구들에게 꿈과 용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드디어 그는 이 힘든 정복의 여정을 출발한지 66일째 되던 날인 1994년 8월 7일 오전 11시 57분에 50번째 주 50번째 산인 하와이의 마흐나키아 정상에 우뚝 섰습니다. 이것은 바로 50개의 산 정상을 66일 21시간 47분만에 다 정복한 기록이었습니다. 그는 그 마지막 정상 높은 곳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을 부르는 그의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전지역에 방송되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를 드렸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정상을 도전할 수 있는 나의 가능성을 열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땅의 모든 장애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 3:19

19.실패를 딛고 일어선 성공
1940년대에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라는 영국의 청년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 정복에 나섰다가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내려오는 길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산아, 너는 자라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라날 것이다. 나의 기술도, 나의 힘도, 나의 경험도, 나의 장비도 자라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네 정상에 설 것이다.”

약 10년 후인 1953년 5월 29일, 그는 다른 산악인 두 명과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했습니다. 실패는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경험으로서 다만 큰 과제는 어떻게 실패를 딛고 일어서 승리의 미래를 향하여 전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로마서 11: 12

20.가능성의 안목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어느 날 아주 잘 생긴 돌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돌을 보고는 거의 미칠 지경으로 큰소리로 웃으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다윗이 걸어나온다. 다윗이 걷고 있어.” 주변 사람들은 그의 한심하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 돌을 보면서 그 돌이 다듬어지고 깎여져 다윗 상이 만들어질 위대한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능성의 안목입니다. 하나님은 하잘 것 없는 기드온을 바라볼 때 그의 가능성을 보시고 선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사용하실 때 일어날 놀라운 미래를 보셨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하리라 -사사기 6:15, 16

21.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할 말씀
저는 몸이 무척 피곤할 때마다 “한 두 주간만 설교하지 않고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목사로 부름 받은 후부터 20년 동안을 거의 한 주간도 빠짐없이 설교를 했습니다. 군대에 가서도 논산훈련소에서 만큼은 설교를 안 할거라고 생각했지만 훈련소에 입소한지 일주일 되는 날부터 훈련소를 졸업할 때까지 설교를 했습니다.
훈련소에 입소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군종실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가봤더니 환경 조사서에서 신학교에 다닌 것을 보고 불렀다면서 설교할 수 있냐고 물어 보더군요. 군종 참모가 갑자기 자리를 비우게 되어 설교할 사람이 없다며 오늘 당장 설교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계속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훈련을 끝내고 강원도 춘천으로 부대 배치를 받았을 때에는 부대 앞 교회 목사님이 일주일 전에 사임하시는 바람에 제대할 때까지 그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또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 주일 이상을 아파 본 적도 없어서 이따금씩 피곤할 때마다 제 마음에 그런 소원이 생깁니다.
그러나 한 두 주간만 설교 안하고 푹 쉬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정말 두 주간을 쉬게 되면 그 다음에는 못살 것 같은 기분이 든답니다. 어떤 때에는 정말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다가도 막상 강대상에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다 보면 어디서 생기는 지 새로운 용기와 능력이 속에서 솟아오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라는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이런 힘이 생기는 것일 겁니다. 오히려 설교를 못하게 되는 때에야말로 저의 생(生)의 마지막 날이 될 것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데모데후서 4:2

22.그리스도인의 D-day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이라는 명장이 있었습니다. 롬멜 장군은 1944년 6월 1일 독일 군대에게 불란서 서부 해안의 경계를 한층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연합군에게 불란서 상륙을 허용하게 된다면 독일군이 한층 불리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상이 악화되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불란서 서부 해안을 덮고 있었습니다. 기상 상황을 본 롬멜 장군은 안개가 낀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도 되겠다고 판단해 6일날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롬멜 장군이 안심하고 자리를 비운 그 다음날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역사는 그날을 가리켜서 ‘디데이(D-day)’라고 부릅니다. 연합군이 독일을 패배시키고 세계 대전을 결정적인 승리의 자리로 바꿨던 날, 결정적인 승리가 확보된 날을 ‘디데이’라고 합니다.
물론 디데이로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연합군이 불란서에 상륙한 뒤에도 독일은 최후의 저항을 계속했지만 마침내 독일이 패배하고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합니다. 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던 날은 ‘디데이’라고 안하고 ‘브이데이(V-day)’라고 합니다. 바로 승리의 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여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날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디데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모든 계교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새 시대를 활짝 열어놓았지만 아직도 사단의 격렬한 저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단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종적으로 완전히 패배하고,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바로 브이데이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디데이’와 ‘브이데이’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긴장 지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로새서 2: 15

23.수전절의 유래
예루살렘의 절기중 하나인 “하누카”라 불리는 수전절의 유래입니다. BC 168년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의 영토를 크게 몇 등분으로 나누어서 다스렸을 때, 그 당시 유대 나라를 포함한 그 주위의 지역을 시리아(수리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시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팔레스틴을 완전히 장악한 후, 유대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체의 예배 행위를 금지시켰고 하나님 대신에 제우스 같은 그리스의 신들을 성전 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부정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돼지를 잡아서 그 머리를 성전 제단에 놓고 유대인들에게 예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치욕스럽고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마음으로만 분노하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먹고살기 위해서 이 악한 지도자와 타협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끝까지 치를 떨며 분노했던 마카비라는 가문이 있었습니다. 그 가문 중에서도 유다 마카비 형제들이 유명했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땅을 어지럽히고 부패시키는 이 적들로부터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성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게릴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BC 164년부터 시작되어 2, 3년 동안의 혈전을 벌인 끝에 드디어 악한 세력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마침내 더럽혀졌던 성전을 깨끗케 하여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회복해서 봉헌하는 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금 촛대에 겨우 하루 정도만 쓸 수 있는 기름을 넣었는데 그 촛불이 8일 동안이나 계속 활활 타올랐습니다. 그래서 꺼지지 않고 환하게 성전을 비추는 그 불빛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찾은 성전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요한복음 10:22

24.황금률의 원리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 교포 2세인 대학생 한 명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학생이 한국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한국 관광객이 와서 설렁탕을 먹다가 깍두기가 떨어졌는지 “깍두기 더!”라고 소리를 치더랍니다. 이 학생이 “조금만 기다리세요”라고 했더니 그 관광객은 더 큰 소리로 “야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난 사장이야 사장. 직원을 70명이나 거느리고 있어”라며 신경질을 내더랍니다. 이 학생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하도 기가 막혀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선생님, 제가 누군 줄 아세요? 저는 손님에게 깍두기를 얼마나 많이, 얼마나 빨리 주느냐를 결정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

25.심은 대로 거둔다
제가 아주 공과 대학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성경 공부 모임을 주관하여 인도하였는데 그 중에 교수님 내외가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신앙이 매우 좋은 데 비해 교수님을 그렇지 않아서 그분을 위해 따로 많은 시간을 내어야만 했습니다. 사실 저는 와서 성경공부를 인도해 달라고 하는 요청에도 못 가는 형편이었는데도 그 사모님의 열성 때문에 교수님 집으로 직접 찾아가서 사정사정 해가며 끈질기게 성경 공부를 인도했습니다. 그렇지만 교수님의 태도는 여전히 냉담해서 제가 실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연락이 끊기게 되었는데 3년 전 어느 날 갑자기 그 교수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신 겁니다. 전화내용은 자기 집에 꼭 한 번 들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찾아갔더니 그 완고하던 교수님이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랍고 반가워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그 동기를 물었습니다.
그 교수님이 대답하기를 “어떤 특별한 동기는 없었어요. 그런데 예전에 목사님과 성경 공부할 때 별 관심 없이 보고들은 것이 나중에서야 깨달아지더군요. 그 후에 예수님을 믿을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전도도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저는 예전에 그 교수님을 보면서 그 분은 절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깨끗이 단념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수님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도 아주 뜨겁게 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분은 교수 선교사가 되어 C국에서 사역하고 계십니다. 그때 그 교수님 댁을 나와 집에 오면서 이런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남을 돕고 격려하는 일처럼 피곤하고 힘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열매가 나타나는 일은 더더욱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일단 심어 놓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영광스러운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26.배워야 할 인내
유명한 설교가인 필립 브룩스에게는 무엇이든지 참지 못하는 큰 약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참지 못하는 약점 때문에 그는 무슨 문제든지 늘 고민하며 하나님께 매일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루는 어떤 일을 참지 못하여 더욱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그를 보고 있던 한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브룩스 박사님, 오늘 따라 무엇을 그리 고민하십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내게 있는 문제도 고민이지만, 더 큰 고민은 나는 이렇게 급한데 하나님은 도무지 급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오.”
우리에게도 참지 못하는 상황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급한데 하나님은 잠잠히 계시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야고보서 5:11

27.인내의 필요성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기질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특성은 무슨 일이든 참지 못하고 성급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미국인들은 잘 참아서 그들 중에서 한국인을 가려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곳이든 줄을 설 때 참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는 사람이 있으면 틀림없이 그 사람이 한국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인내가 너무 부족한 것을 느끼고 하나님께 이렇게 절실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인내가 부족합니다. 저에게 인내를 주십시오. 지금 당장 인내를 주십시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데살로니가전서 5:14

28.쉼의 축복
우리 나라의 유명한 작가 이어령은 ‘신한국인’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보면 지난날의 한국인과 오늘날의 한국인의 생활 양식을 밥 세대와 라면 세대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이 두 세대의 차이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속도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 우리의 어머니들과 아내들은 밥을 짓기 위해 뜸을 들이고, 또 늦게 들어오는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서 밥을 아랫목에 묻어 둡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한국인의 어머니와 아내의 따뜻한 기다림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세대가 잘 먹는 라면은 끓여 먹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 않고 아주 간편합니다. 그리고 금새 불어버리기 때문에 누구를 기다려 줄 수도 없습니다.
근래에는 패스트푸드(fast food) 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여 먹는 습관이 많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가져온 현대 문화에는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빠른 것을 추구하느라 기다리지 못하는 문화가 생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림과 휴식의 중요성을 많이 잊고 살아서 오히려 가만히 있거나 기다리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결국 안식의 축복을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1,000년을 1초처럼
어떤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업을 하는데도 영 사업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당신에게는 1,000년도 1초와 같은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나는 영원한 존재이니 네가 한 말이 맞다”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이 사업가가 다시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1,000달러도 하나님께는 1달러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도 맞단다.”
“그렇다면 하나님, 제게 1달러만 주십시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네가 원한다면 줄 테니 1초만 기다려라”고 하셨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베드로후서 3:8

30. 목표를 가리는 장애물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영국 해협을 헤엄쳐서 왕복한 수영선수 플로렌스 채드윅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후 1952년 7월 4일, 36세의 플로렌스는 로스엔젤레스(Los Angeles)에서 가까운 카타리나 섬에서부터 캘리포니아 해변까지 수영해서 가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 선언은 미국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미국 전 지역에서는 그 도전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도착지점인 해변가에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16시간 동안 계속 수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안개를 헤치고 사력을 다해 나아갔지만 자기의 힘이 점점 떨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녀는 안타깝게도 기권하고 자기를 따라오던 구조선에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배로 해변에 도달하고 보니까 안개 때문에 안보였던 도착지점이 포기한 지점에서 불과 5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습니다.
이 실패 후에 그녀는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실패한 이유는 추위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피곤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개로 인해 제가 목표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표 지점을 볼 수 있었다면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도착했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안개는 마지막 장애물이었습니다. 그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31. 한 코미디언의 유언
미국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몇 해전 그가 죽기 전에 이러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고 난 후 나의 시체를 대학의 해부용 실험 대상으로 기증하겠습니다. 특별히 대학 중에서도 꼭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 부모님의 소원을 풀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 부모님의 평생 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이 길 밖에 없습니다.”
평생동안 다른 사람들을 웃기며 살았던 그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이어서 이런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립보서 3:14

32.하나님의 침묵
잉거솔(Ingersoll)이라는 독일의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강연에서든지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무신론 강연에 열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연이 절정에 이르자 갑자기 자기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더니 하나님에 대한 도전장을 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당신에게 5분이라는 시간을 주겠소. 나는 5분 동안 당신을 저주할 것이오. 만약 당신이 살아있다면 나를 저주하고 형벌을 내리시오.”
그리고 그는 5분 동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하나님을 저주하고 모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5분이 지났는데도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자 그는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외쳤습니다.
“여러분, 저를 보십시오. 이만하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때 그의 강연장 뒤편에 있던 한 노인이 서서히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러우면서도 감히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한 그리스도인이오. 내가 감히 당신의 연설에 대해서 평가를 한다면, 오늘 당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단지 당신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명했을 뿐이지요. 내가 믿고 경험한 하나님은 내가 그분을 떠나서 거스를 때 책망하시고 때로는 징계까지 하셨던 분이시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서 침묵하셨소. 그분의 침묵은 곧 당신이 그의 자녀가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로마서 1:28

33.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독일의 아우슈비치 수용소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곳입니다.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왜 이런 일을 허용하고 계십니까?”
그들의 피맺힌 절규는 연합군이 독일을 물리쳐 수용소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 연합군이 탈환한 수용소를 점검하러 들어갔습니다. 점검하던 연합군 병사 중 한 명이 한쪽 벽 후미진 곳에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인 것 같은 그 글에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 유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니? 그 연합군 병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또 하나의 문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35

34.존 듀이의 도전 정신
교육 철학자로서 유명한 존 듀이(John Dewey)의 일화입니다. 그의 90세 되는 생일 잔치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은 한마디씩 축하 메시지를 그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 의사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연로하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 못지 않은 정열을 가지고 삶을 사시는지… 그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비결? 나는 산에 오른다네. 자네도 산에 한번 올라 보게나.”
“산에는 왜 오르십니까?”
“나는 또 다른 산을 보기 위해서 산에 오른다네.”
그는 나이를 뛰어 넘어서 산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의 도전 정신이 나이를 초월한 정열적인 삶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9:62

35.인생의 기회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 중에서 가장 강력한 자원은 기회입니다. 세리 삭개오에게도 그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기회를 잡았을 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축복인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모습을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에 시라큐스라는 이상한 동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동상의 모습을 묘사해 보면 발에 날개가 붙어 있고 앞머리에는 무성한 머리카락이 있는 반면 뒷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였습니다. 이 이상한 동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만들었습니까? 리시퍼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기회
왜 날개가 발에 달렸습니까? 빨리 날아다니기 위해
왜 당신의 앞머리는 그렇게 무성합니까? 그것은 내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왜 뒷머리는 대머리입니까? 지나가면 도저히 다시 붙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36.진정한 깨달음
어느 날 토레이 목사님에게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저는 집회에 많이 참석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실감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도 실감나지 않는데 왜 그럴까요?”
이 말을 듣고 있던 토레이 목사님은 고민하는 이 부인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부인, 오늘부터 집에 가서 다른 기도는 하지 말고 이 한 가지 기도만 계속하십시오. 하나님께 부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한 주간만 계속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목사님의 충고에 따라 이 부인은 집에 돌아가 이 기도만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하나님, 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십시오.” 이 기도를 계속 하던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추하고 불결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마침내 부인은 자기의 죄악을 보며 절망한 채 일 주일만에 토레이 목사님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죽어버리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녀에게 토레이 목사님은 “이제부터는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달라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부인은 집에 다시 돌아가 두 번째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보여 주십시오.” 그때 이 부인은 십자가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내 자신이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완전히 포기하고 절망을 선언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분을 통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써 나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으며 그로 인해 깨끗하게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 8

37.인생의 의미
오래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기사로 실린 글입니다.
그리스도인이자 작가였던 아서 고든(Arthur Gordon)이 어느 날 갑자기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무력증에 빠진 그는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작가가 글을 쓸 수 없다는 충격은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의사이면서 상담자인 친구를 찾아가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네.”
우울증과 무력증으로 고민하는 고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어렸을 때 가장 하고 싶어했고 좋아했던 일은 무엇이었나?”
“내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것은 해변에서 파도 소리를 듣는 일이었지.”
“그러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한 번 따라 보겠나?”
의사인 친구는 시간마다 다른 처방전을 네 장의 종이에 써주었습니다. 별다른 대안도 없고 희망도 없었던 고든은 친구가 써준 처방전을 가지고 어린 시절 자주 놀러 갔던 해변으로 갔습니다.
친구의 말대로 아침 아홉 시에 첫 번째 처방전을 펴보았습니다.
“자네가 좋아하는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를 잘 들어보게.” 우스꽝스럽지만 처방대로 바닷가에 앉아 어린 시절 듣던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조금 후 열두 시가 되어 두 번째 처방전을 펼쳤습니다.
“이제 자네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참 행복했다고 기억되는 순간들을 생각해 보게.” 그는 바다를 바라보며 행복했던 추억들을 하나씩 떠올리자 마음에 조금씩 기쁨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 세 시에 세 번째 처방전을 펴 보았습니다.
“자네 인생의 동기와 의미를 다시 한번 검토해 보게.” 그는 자신이 왜 글을 쓰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니 글을 쓰는 이유가 자기의 명예와 이름을 내고 사람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마음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의미 없고 헛된 내 이름을 위해서 살았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동안 자신의 추했던 삶의 모습을 발견하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저녁 여섯 시가 되자 친구가 준 마지막 네 번째 처방전을 폈습니다.
“이제 자네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할 시간이네. 자네가 자백해야 할 죄들을 모래사장에 써보게.” 고든은 눈물을 흘리면서 모래사장에 이렇게 써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이기심과 욕망과 출세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고 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수많은 죄들을 다 쓰기도 전에 갑자기 바다의 밀물이 들어와 그가 써놓은 그의 죄들을 한꺼번에 다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본 고든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그 순간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시간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한일서 1:9

38.도박으로부터의 탈출
“목사님, 제 왼손의 손가락을 한번 보시겠어요?”
어느 날 제가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는 중에 한 장로님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장로님의 왼손 손가락 중에 가운데 손가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인지 사연을 물어보니 장로님의 기막힌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예전에 도박을 밥먹듯 즐겼습니다. 도박을 끊기 위해서 별별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도박은 계속했지요. 그날도 밤새도록 도박판을 벌이다가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내가 울고 있더군요. 그 순간 제 모습이 너무나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아내가 보는 앞에서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부엌에 있는 칼을 들어 손가락 하나를 잘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성경공부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쳐다보자 장로님은 내밀었던 잘린 손가락을 감추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작심삼일이라는 속담이 맞더군요. 사흘이 지나자 다시 도박을 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리더니 저로 하여금 도박장으로 떠밀더라구요. 결국 아내 앞에서 한 나의 다짐들은 한순간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몇 분이 지났을까요?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성경공부를 시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후로는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아픔도 별 수 없었던 나의 도박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완전히 도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로새서 2:23

39.참 행복의 의미
기독교 철학자이며 전도자였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님은 그의 생애 말년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하는 조국과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 설교를 자신의 온 힘을 쏟아 피를 토하듯 전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젊음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계십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행복만을 구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우연히 발생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우연하게 일이 잘되고 우연하게 돈이 벌리고 우연하게 성공하는 것이 되어야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 복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이라는 단어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blessing이라는 단어는 본래 bleed, ‘피를 흘리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으며, 앵글로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으로 간주했습니다. 바로 축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거룩한 삶이 바로 축복된 삶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4:6-8

40참된 만족
저는 어느 날 이름만 대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부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그분을 만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싶었는데 마침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제일 먼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회장님은 행복하십니까?” 그 분은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행복이라고? 나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초조하고 불안하다네.” 한국 사람들에게 부의 대명사로 불려왔던 그 분의 대답 속에서 생활의 부유함이 곧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갑부 록펠러에게 어느 날 타임지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현재 가지고 있는 부유함에 만족하십니까?”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기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얼마만큼의 돈을 벌어야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록펠러는 “조금만 더!”라는 대답을 했답니다. 그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많이도 아닌 조금 더 돈을 벌어야겠다는 아주 흥미로운 대답을 하였습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3: 5

41.한사람의 가치
스코틀랜드에서 목회하시는 두 분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두 목사님은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역했지만 그분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두 분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먼저 한 목사님이 “사실 저는 지난 3년 동안 사역을 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난 성도는 아직 한 사람밖에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 한 사람이 로버트 마펫이라는 청년이며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또 다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한 주간 동안 부흥회를 가졌습니다. 저는 커다란 기대를 걸고 열심히 집회를 인도했는데 예수를 영접하고 헌신한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두 목사님은 서로 목회 생활의 쓰라린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목사님이 3년만에 얻은 한 명의 사람, 로버트 마펫은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적인 틀을 마련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목사님이 부흥회를 통해 영접한 단 한 사람,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불을 지른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단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한 사람의 가치는 정말 소중합니다. 성경은 결코 하나의 가치, 그리고 작은 것을 작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7

42.보물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
중동 사막에는 베드윈이라는 무리가 있는데 이들은 장막을 치며 이리 저리로 옮겨 다니는 유목민입니다. 1947년 어느 봄철 이들 중 한 목동이 이스라엘 사해 북서쪽 어느 지역을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유난히 동굴이 많았는데, 그는 심심풀이로 돌 하나를 들어 어떤 동굴을 향해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던진 돌이 동굴로 들어가더니 쨍그랑하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리를 신기하게 여긴 목동이 들어가서 보니 그 동굴 안에는 10개의 항아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10개의 항아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아홉 개의 항아리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고 한 개의 항아리에서만 글씨가 적혀있는 가죽으로 된 두루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실망한 채 그 두루마리를 가지고 와서 자기 집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그 가죽으로 신발 끈이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신발 끈으로도 적합할 것 같지 않아 그냥 매달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사해사본’이라 불려지는 성경사본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보물이나 진주보다도 더 귀한 역사를 보여 준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성경 사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 사본을 그저 신발 끈으로 사용하려 했을 뿐더러 가치도 모른 채 2년 동안이나 묵혀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7: 6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한국 사람들은 유독 자신의 존재와 이름에 대하여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어느 곳이나 한국 사람들이 다녀간 곳이면 어떤 곳이든지 자신의 이름과 흔적을 남기는 것을 봅니다.
수년전 제가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유명한 인터라켄을 통해 융프라우 꼭대기를 올라갔습니다. 그 산은 아주 아름다운 산인데 그 산꼭대기에도 한국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가노라 한국 남자 김 O O.” 제가 이름까지 기억할 정도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인간은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은 아주 집요한 갈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곧 영원을 사모하는 본능적인 몸짓이라 할만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11

가치 있는 수고
유명한 영국 사상가 가운데 토마스 칼라일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의 평생 소원은 ‘불란서 혁명사’라는 책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쓴 책을 통하여 유럽 땅에서 더 이상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인간다운 민주주의와 건강한 국민의 문화가 꽃피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성을 다해 거의 10년에 걸쳐 원고를 썼습니다.
그리고 완성하기 전 절친한 친구이자 철학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에게 마지막으로 원고의 검토를 맡겼습니다. 스튜어트 밀은 서재에서 친구가 보낸 원고를 검토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침대로 가 잠이 듭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그 집 하녀가 서재를 청소하다가 방에 흐트러져있는 원고지를 보고 쓰레기인 줄 알고 한꺼번에 집어서 불 속에 넣었습니다. 토마스 칼라일의 그 길고 긴 노력과 수고는 한순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낙담한 채 서너 달 동안 자는 것과 먹는 것조차 하지 않고 고민에 빠졌으며 생의 의욕조차 완전히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비오는 날 그가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비가 서서히 그치자 자기의 집 앞에 새집을 짓는 일꾼들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터를 닦고 줄을 놓은 후 벽돌을 하나하나 쌓았습니다. 그러다 벽돌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다시 허물고 다시 쌓고 하였습니다. 허물고 쌓는 일을 반복하면서 차근차근 벽돌을 쌓는 그 광경을 보던 토마스 칼라일은 무릎을 쳤습니다.
“한 채의 집을 짓기 위해서도 저토록 정성스러운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데 유럽의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일에 내가 다시 땀을 흘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는 다시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가치 있는 일에는 가치 있는 도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9

다섯 손가락들의 자랑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우화 중에 다섯 손가락이 각자 자기 자랑을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첫째 손가락이 자신을 뽐냅니다. “내가 엄지니까 최고야.”
둘째 손가락이 이에 질세라 자랑합니다. “무언가를 가리킬 때는 내가 제일 많이 사용된다.”
셋째 손가락은 다른 손가락들을 쳐다보며 으스댔습니다. “그렇지만 나란히 놓고 키를 재 봐. 내가 우리 중에 제일 크다.”
넷째 손가락은 잘난 체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혼이나 결혼 같은 귀중한 사랑을 서약할 때 내 손가락이 사용되는 거 알지?”
손가락들은 모두 다 자기 자랑을 한가지씩 내놓았지만 마지막 남은 다섯째 손가락은 내놓을 자랑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손가락이 당당히 나와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나 없으면 병신이다.”
세상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말은 쓸모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디모데후서 2:20

시한부 인생
제가 알고 지내는 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몸이 이상하여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검사를 받고 병실에 누워있는데 병실 밖에서 가족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렸답니다.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병명은 암이고 몇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집사님은 무척 놀랐지만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때부터 집사님은 자기의 삶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집사님은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해결하기도 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를 구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유서까지 써 놓았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암을 선고한지 여섯 달이 지났는데도 집사님의 몸이 멀쩡한 것입니다. 너무나 이상해 다른 큰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해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전 병원의 암 진단이 오진으로 밝혀졌습니다. 얼마나 황당합니까? 주변사람들은 그가 병원의 오진을 모르고 그 동안 모아놓은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린 것에 대하여 아까워하며 집사님의 심정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6개월 동안의 시한부 인생이 저의 삶 전체 중에서 가장 진지하고 보람있게 살았던 순간이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디모데후서 4:6

잊어버린 보화
윌리엄 허스트(William R. Hearst)라는 신문 편집인이면서 고대 미술품 수집광인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대 미술품이라면 뭐든지 좋아해서 어떻게 해서든 그것이 자기 손에 들어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럽의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귀중한 도자기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야할 일을 모두 뒤로하고 즉시 유럽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는 도자기를 찾으려고 유럽의 이곳 저곳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도자기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한 도자기 상에게 새로운 정보를 들었습니다. 몇 해전에 미국의 어떤 언론인이 그 물품을 사갔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 도자기를 사간 사람이 누구인지 수소문하는 가운데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이 산 저 산을 넘어 헤매다가 돌아와 보니 행복은 바로 옆에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처럼 자신이 찾던 보화를 이미 오래 전에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값어치도 모르고 창고에 쳐 넣고 있었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혹시 우리들도 그처럼 자신 안에 있는 보화를 잊어버리고 다른 곳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골로새서 2:2-3

아는 데 드는 비용
제가 잘 아는 재미 교포 사업가가 한 분 있습니다. 그분은 제지업(製紙業)을 크게 하시는데, 어느 날 한번은 그 집에 들렀을 때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얼마 전 공장에 종이를 접는 대형 기계가 고장이 나서 기술자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리하는 시간이 겨우 5분 정도 걸렸을 뿐인데 수리비로 5,000 불을 청구하더랍니다. 그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도대체 수리하는데 겨우 5분밖에 안 걸렸는데 왜 비용이 5,000 불이나 나왔냐고 따져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수리하는 데 든 비용 100불에 고장 난 곳을 정확히 알아내는 데 든 비용이 4,900불이라고 하더랍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어떤 것에 대하여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언 3:14

격려의 중요성
네덜란드 출신인 어떤 사람이 런던에서 그림을 파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전도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 생애를 드리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열심히 교회 봉사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전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 사역했던 교회에서는 그의 서투른 설교에 대하여 이런 저런 비판을 가했습니다. 비판적인 영성으로 충만했던 이 교회는 이 젊은이를 세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거기서 좌절하고 다른 사람의 권유에 따라 다른 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거의 신앙을 잃어버릴 뻔한 위기였지만 그렇다고 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빈센트 반 고흐(Gogh, Vincent van)입니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가 그에 대해 이런 흥미로운 기록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던 열정과 창의력을 보면 그가 만약 전도자로 헌신했더라도 세계에서 위대한 설교가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인류는 위대한 화가를 얻었지만 위대한 설교가는 잃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브리서 10: 24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
어떤 사람이 군대 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좌절 등의 감정에 대해서 이런 재미있는 글을 썼습니다. “잠들만하면 기상, 먹을만하면 식사 끝, 외박할만하면 외박금지, 놀만하면 휴식끝, 볼 만하면 동작 그만 그리고 정들만하면 전출, 휴가 갈만하면 비상, 편지 볼만하면 소등, 그리고 놀려고 하면 개인활동금지, 편안할만하니까 전역.”
군대에 가면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모든 것을 책임져주는 아주 편한 곳 같은데도 사람들이 매우 불편한 곳으로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곳에서는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교제하며 그 분의 도우심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날마다 살아갈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자족하며 평안하고 넉넉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족함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립보서 4: 11

축복이 된 짐
외국 어린이 동화 중에 ‘개미들의 사랑’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한 청년 개미가 큰 길 건너편에 사는 아가씨 개미를 사랑했습니다. 어느 날 그 청년 개미는 애인을 만나기 위해 용기를 내어 큰길을 건너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큰길은 오래되어 낡고 험한 아스팔트길이기 때문에 아버지 개미는 무척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개미는 아들에게 건너갈 때 쓰라고 아주 기다란 지푸라기 두 개를 등에다 업혀 주었습니다. 이 아들 개미는 이것을 왜 가져가야 하느냐고 아버지께 항의했지만 아버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청년 개미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투덜거리며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 보니 아스팔트에 상당히 넓어 보이는 갈라진 틈새가 있었습니다. 그 틈새는 개미에게 깊은 벼랑과도 같은 난관(難關)이었습니다. 이 청년 개미는 낙담한 채 등에 엎고 있던 지푸라기 두 개를 팽개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지푸라기가 그 틈새 사이로 떨어져 어느새 틈새를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되어주었습니다.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했던 지푸라기 두 개가 만든 구원의 다리를 건너가면서 청년 개미는 아버지 개미의 지혜에 감탄하며 감사드렸습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30

포기 할 줄 아는 지혜
올랜도 매직 농구팀의 감독인 팻 윌리암스의 저서, ‘올랜도 매직의 성공 비밀’의 내용 중 재미있는 디즈니의 한 일화입니다.
디즈니 초창기에 워드 킴벨이라는 전설적인 만화가가 있었는데, 그는 23살에 미술대학을 졸업하여 월트 디즈니사에 스카웃 되어 입사하였습니다. 그 당시 10분을 초과하는 만화가 없었는데, 그는 최초로 영화 길이와 맞먹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라는 야심만만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이 작업을 하면서 그린 많은 그림들 중, 백설공주를 위해 난쟁이들이 수프를 끓여서 바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은 불과 4분 30초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장면을 위해 그는 무려 8개월 동안이나 혼신을 다해 그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매우 흡족해 하며 월트 디즈니 사장에게 그것을 갖다 드렸습니다. 디즈니 사장은 그림을 보더니 매력적이고 참 잘됐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완성한 그 장면이 영화의 전체 줄거리에는 별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삭제되었다는 말을 사장으로부터 듣게 된 것입니다. 그의 8개월 동안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그 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새벽녘쯤 자꾸만 사장의 얘기가 귓전을 맴돌았습니다. “전체 줄거리에 별 의미가 없잖아. 오히려 이야기 흐름에 방해가 된단 말이야.” 이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다가 그는 사장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작품 자체는 매력적이지만 전체 줄거리에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신의 그림을 깨끗이 포기하였습니다. 포기를 배운다는 것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립보서 3: 8

하나님 없는 지식
옛날 로마에 작은 대학이 하나 있는데 그 정문 입구에는 대단히 인상깊은 표어 하나가 붙어 있습니다. 대학 문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던 간판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 표어는 대학 설립자의 의도에 따라 정문에 설치되었고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그 대학 설립자가 젊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고학생이었던 그는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애를 썼지만 학비가 없어 전전긍긍하며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곳 저곳 단체도 알아보고 사람들에게 동정도 구하다가 마침내 그는 로마에 사는 어느 유명한 그리스도인 귀족 부인이 젊은이들의 미래에 큰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돕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귀족 부인을 찾아가 자신이 법률 공부를 하기 원하고 이 공부를 해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장학금을 보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 긴 시간을 대화하지 않았는데도 이 부인은 쉽게 청년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번 학기부터 장학금을 드릴 테니 돌아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십시오.”
부인의 배려에 감격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정중히 인사하고 집을 나오려는데 부인이 다시 이 청년을 불렀습니다.
“젊은이, 잠깐만 이리로 오세요. 그 장학금을 가지고 가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먼저 이번 학기부터 등록해서 공부를 시작해야겠지요.”
“부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그 다음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시험에 합격하여 제 꿈이었던 훌륭한 법률가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그 다음에는 저와 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후원하고 그 밖의 많은 불행한 사람들을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좀 더 돈이 축적되고 나이가 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사회 사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인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질문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그리고 … 그 다음에는 늙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요?”
“죽겠지요 뭐.”
“그리고 그 다음에는…?”
“글쎄요…”
부인은 갑자기 청년에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 그 다음도 모르면서 무슨 공부를 한단 말인가? 아까 자네에게 주었던 장학금을 돌려주게.”
부인의 호통에 청년은 매우 당황스럽고 곤혹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의 마음에 “그 다음에는…”이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그 청년은 그 질문을 되새기다가 마침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날 장학금을 얻으러 갔다가 그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기가 세운 학교에 자기가 깨달은 뜻깊은 교훈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 경구를 정문에 붙여놓았던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 7

제 삼의 귀
유명한 철학자 제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개의 귀를 허락하셨는데 입술은 하나밖에 주시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말하는 일보다 듣는 일을 갑절이나 더하게 하시려는 의도였다”고 말했습니다.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정말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대화의 기술에 대한 중요성을 말할 때 “제 삼의 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귀는 두 개밖에 없지만 또 하나의 귀가 더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이 귀는 나와 얘기하고 있는 상대방이 입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마음에 들어있는 분노, 불안, 삶에 대한 짜증, 불만 등의 숨겨진 이야기를 듣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화의 삶을 풍요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쉴새없이 이야기를 쏟아 내며 자기의 무지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언어 생활의 태도와 자세를 통해서 그 사람의 지혜로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잠언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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