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방언이라고 칭하는 소리현상은 성경의 방언과 너무나도 다르다. 오늘 날의 정체불명의 소리현상을 천사의 언어, 기도의 언어, 영혼의 언어, 영적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예찬하는 주장을 지지해주는 성경의 말씀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 명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는 난해구절들이 도용되고 있을 뿐이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동일한 현상이 타종교인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다니면서 그런 소리를 지속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 소리현상과 타종교에서 나타나는 그것의 차이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소리는 성령의 방언이고 이상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소리는 귀신의 장난이라고 막연하게 여길 뿐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나쁜 불륜’이라는 우스운 말이 지금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이 정체불명의 소리의 세계를 대변해주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방언의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복음의 표적
신약성경에서 방언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마가복음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자신의 새 십자가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할 것은 부탁하시는 내용에서 방언이 최초로 언급되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이 부분에서 언급된 방언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의 방언이 지금의 방언이라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음 좋은 성도들이 맹독을 품은 뱀을 다루다 물려도 죽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농약 등의 맹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 기적들이 지금 함께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이 말슴은 오늘날의 소리현상이 성경의 방언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가 없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 믿고 성도들 앞에서 뱀을 다루다가 죽은 목사가 있었다. 수 년 후 목사가 된 그 아들도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서 성도들 앞에서 뱀을 다루다가 또 물려 죽었다는 기사가 2012년 6월 2일 한국의 뉴스파워라는 신문에 나왔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죽음과 사탄의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는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계시라는 뜻이다. 여기의 뱀은 실제의 동물이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인간을 속이고 훼방하는 사탄을 의미한다.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는 새 생명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복음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의 새 생명의 복음이 출범함을 증거하는 특별한 표적으로서 방언이 나타날 것임을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우주를 향하여 출발하는 거대한 우주선이 이륙할 때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우주선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지된 우주선을 이륙시키기 위해 1초에 약 5,000톤의 연료를 폭팔시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새 복음이 온 세상을 향하여 힘 있게 출발하도록 특별한 이적을 베푸셨다.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과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신지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태어나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맹인,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 천형이라고 여겨졌던 문둥병,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이적 등은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보냄 받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계시를 전하는 사도들이 이러한 일을 행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다.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제자들의 전도사역에 특이한 이적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확증하여 주신 것이다. 초대교회의 방언도 이 차원에서 나타났다. 일반적인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새로운 계시의 시작을 증거하는 초대교회의 이적이었던 것이다.
오늘 날 계속해서 이러한 초자연적 이적들이 지속되는지가 중요하다.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거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이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비슷한 이야기들이 들려오지만 모두 과장되었거나 크게 와전된 내용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임을 드러내기 위한 이적이었고, 지금은 이미 다 드러나고 확증되었으므로 이러한 이적이 계속 이어지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방언도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부어졌을 때 성경을 통하여 검증받기를 구하였고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을)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오직 충성’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방언이 취향이든 그것에 어떤 체험과 이해가 있든지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입니다. 마가는 누가가 말하는 ‘성령의 권능’을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 약속하신 성령님이 부어졌고 모든 제자들이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행2:4). 마가는 그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확실히 복음을 증거했다(막16:20)고 기록했습니다. 그 ‘표적’(권능)가운데는 ‘예수님의 이름’, ‘새 방언’, ‘치유’가 들어 있습니다.”
김우현 PD는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소리현상 이적을 성경을 통하여 검증받고자 원했고, 마가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검증될 수 있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믿는자에게 나타난다고 하신 ‘새 방언’이 지금 자신을 통하여 나타나는 방언의 은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뱀을 집어올리고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김우현 PD에게 묻고 싶다. 김우현 PD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계시적인 이적을 일반적인 성령의 은사로 이해하였고, 그리고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소리현상에다가 연결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2.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한 심판의 이적
방언은 새로운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유래하였음을 증거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완고함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담긴 이적이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방언이 나타날 것임을 최초로 예언한 선지자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늘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언어로 복음을 설명하는 언어의 이적이 나타날 것임을 예언하였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사 28:11)
놀라운 사실은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에 대하여 가르친 사도 바울이 이사야의 이 예언을 인용하였다는 것이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고전 14:21,22)
율법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이라는 뜻이다. 오늘 날의 소리현상이 성경의 방언과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방언이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표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요지는 그것이 아니다. 먼저 택하심을 입은 이스라엘이 완고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는 차원에서 이방인들의 언어로 복음이 설명되어지는 방언 이적이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 자부하는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자녀 됨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 옮겨졌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방언에 대한 언급,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그리고 바울의 설명을 종합하여 보면 초대교회의 방언은 새 복음의 기원이 하나님이며, 먼저 택하심을 받고서도 완악하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과 책망의 메시지가 담긴 표적이었다.
실제로 방언이 나타났던 초대교회의 상황을 보면 이러한 이해가 단순한 가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방언이 나타난 곳에는 꼭 유대인들이 있었다. 방언이 풍성하게 나타났던 고린도에도 유대인들의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바울의 전도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즉시로 방언이 나타났던 에베소(행 19:6)에도 복음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베드로의 전도를 받은 고넬료 가정의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방언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현상(행 10:46)이 나타남을 베드로와 동행한 유대인 신자들이 보았다. 그리고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에게 개최된 지도자들의 회의에서 예수를 믿는 이방인도 하나님의 자녀되었음을 증거하는 현상으로 이해되어 이방인 선교가 공식화되었다. 최초로 성령이 임하여 방언이 나타난 사도행전 2장에서도 사도들과 제자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복음을 설명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지켜보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았을지라도 그 주변에 유대인이 없을 때에는 방언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지역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았지만, 방언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고국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는 노중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읽으며 복음을 상고하고 있던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빌립이 찾아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세례를 주었으나 그에게서 방언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방언에 함축된 자신들을 향한 책망의 메시지를 들어야 할 유대인들이 근처에 없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 방언은 초대교회 시대에만 국한되었던 것일까? 이후의 시대에도 계속 이어지는 것일까? 성경어디에도 이 표적이 언제부터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내용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복음이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음을 드러내는 표적이었으므로, 더욱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책망의 메지지가 되었던 표적이었으므로 교회가 출범할 당시에 국한되는 표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히 유대인들이 새 복음을 핍박하는 것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내포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이 복음을 강력하게 대적하던 때에 국한되었던 표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이 표적을 받아야 할 유대인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의 복음이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박해하는 불신자들도 우리 주변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방언이 지금도 나타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금 도 어떤 상황에서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듣는 다른 언어로 복음을 전하고 설명할 수 있는 권능을 행하실 수도 있음을 믿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3.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의 방언
성경의 방언은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 당시에 통용되고 있었던 다른 나라의 실제 언어였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방언이라고 하는 소리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오늘 날의 방언이 영혼의 언어, 천사의 언어, 기도를 위한 특별한 하늘의 언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사 28:11)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초대교회에 나타난 방언을 설명할 때에 인용하였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서 등장하는 ‘더듬는 입술’이란 낮선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는 표현이고, ‘다른 방언’란 모르는 신비한 외계의 언어를 뜻하지 않고 그 시대의 외국 언어를 의미한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예언의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는 천사의 언어, 영혼의 언어, 기도의 언어라는 개념으로 방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사야가 말한 방언은 그 시대에 통용되는 다른 나라의 언어를 의미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사야의 이 예언을 인용하여 초대교회의 방언을 설명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가 신약 성경의 방언은 배우지 않은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흔히 짐작하는 것처럼 모르는 외계의 언어가 아니라 당시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었던 외국인들의 언어였다고 보아야 한다.
최초로 방언이 나타난 2장의 방언이 다양한 외국어였다는 사실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성령이 최초로 강림하던 오순절 날에 사도들과 제자들의 입에서 한번 도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외국의 다양한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도들과 제자들의 자신들의 현지 외국어를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랬다.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행 2:8)라고 기이하게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갈릴리 출신 사도들과 제자들에게서 나타난 성령의 초자연적인 외국어 방언은 그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실제 언어였음을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방언에 대한 신비적인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성경에 두 종류의 방언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하나는 ‘디알렉토스’라는 헬라어로 표기된 그 당시의 실제 외국어를 의미하는 방언이고, 또 하나는 ‘글롯사’라는 헬라어로 표기된 그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외계어를 의미하는 방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였고 고린도전도의 방언은 외계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최초의 방언인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성경에 기록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글롯사’(4절, 11절)라는 단어와 ‘디알렉토스’(6절, 8절)라는 두 단어를 모두 동원하여 방언을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떤 방언은 외국어였고 또 어떤 방언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외계어였다는 이론은 방언에 대해 그릇된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사람들의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모두 ‘글롯사’라는 헬라어로 표기되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방언은 외국어였고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외계어, 또는 천사의 언어라 주장도 근거가 없는 공상이다. 방언에 대해서 그릇된 말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외계어에 능통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성경 구절을 이 말씀이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헬라어 ‘글롯사’)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8절)
이 말씀은 바울이 다양한 외국어를 통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뜻으로 보아야 더 자연스러운 해석이 된다. 바울은 적어도 그 당시에 지중해 세계에서 통용되었던 대표적인 다섯 개의 언어에 능통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바울은 성경을 기록 할 때에는 헬라어를 구사하였다. 유대인들을 만나면 유대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다. 사도행전 21장 40절과 22장 2절을 보면 바울이 ‘히브리어 방언’으로 유대인들에게 직접 설교하였다고 한다. 여기의 방언이라는 단어도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묘사한 단어 ‘디알렉토스’이다. 로마에서 감옥생활 할 때에도 언어의 막힘이 없이 자신을 변호하며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기회가 되기만 하면 서바나(스페인, 롬 15:23,28))에 가서 복음전하기를 소원하였으므로 스페인어도 구사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바울은 터어키에서 출생하고 자랐으므로 터어키의 언어를 구사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방언을 표기하는 헬라어 단어가 외국어를 의미하는 말이었다는 점, 그리고 바울이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바울이 방언을 더 말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씀은 천사의 말이나 외계어에 능통했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외국어로 다양한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감사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방언으로 표기된 또 다른 헬라어 단어 ‘디알렉토스’도 마찬가지이다. 다메섹 도상의 청년 사울에게 찾아오신 예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26:14)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다메섹 도상까지 찾아오신 예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이스라엘 말이었다. 예수게서 ‘히브리 방언(말)’(‘디알렉토스’, 행 26:14))로 바울에게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여기의 ‘방언’(말)이라는 단어가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표기하는데 사용된 ‘디알렉토스’이다. 방언을 의미하는 헬라어 ‘디알렉토스’ 역시 그 당시에 통용되었던 다른 나라의 언어를 의미하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지구상의 민족들의 언어를 의미하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수 없이 등장하는데, 모두 사도행정 2장의 방언을 표기하는데 활용된 ‘글롯사’라는 단어가 활용되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성경의 방언이 지구상의 다른 나라의 언어가 아니고 천상의 외계어였기 때문에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지구상에는 없다고 볼 근거가 전혀 없다. 성경의 방언은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를 성령의 역사로 구사하면서 복음을 설명하는 초자연적인 이적이었다. 그러나 오늘 날 여러 종교에서 나타나는 소리현상은 전혀 언어적인 구조가 결여되어 있고, 또한 그 내용을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어떤 나라의 언어와 유사한 사운드를 내는 경우도 많지만, 그 나라의 사람들 앞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실험해 보면 아무도 알아듣는 못한다. 그 나라의 실제 언어와 유사한 단어들이 일부 나열되기도 하지만, 그곳의 현지인들에게 아무런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어떻게 현지의 언어와 너무나도 유사한 사운드를 내게 되는 것일까? 가장 유력한 대답은 성령의 진짜 방언을 모조하여 영혼들을 미혹하는 사탄의 장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배우지 않은 언어를 구사하게 하는 하나님의 참 방언을 사탄도 어느 정도 모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처럼 하지는 못한다.
수년 전 내가 사는 도시의 한 교회에서 외부 강사를 모시고 특별집회를 했다. 그 분이 우리 도시의 연합집회의 강사로 거론되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적합한 분인지 알아보고 싶어 참석하여 그 분의 설교를 들었다. 설교 중에 자신의 완고했던 친척이 예수님을 믿게 된 과정을 잠시 이야기하였는데, 너무나도 그 내용이 이상했다. 불신자였던 그 친척 여성이 자신의 집에서 사워를 마치고 발가벗은 상태로 방으로 들어섰는데, 예수님(?)이 침대에 걸터 그 여인에게 전도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친척이 왜 자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지에 대하여 그녀가 이전에 했던 말들을 다 알고서 언급하셨다고 했다. 이후 그 분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과연 예수께서 그런 분일까? 샤워를 마치고 들어오는 여인의 침대에 앉아서 발가벗고 들어오는 여인을 맞이하시는 그런 놈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인가? 그런 놈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해하고 믿는 신앙구조를 가진 그 분도 제법 이름 난 목사였는데, 정말 뭐가 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남의 교회에 와서 다른 성도들에게 그러한 설교를 할 수가 있을까? 결코 정상적인 목사라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을 연합집회의 강사가 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에 그 목사가 또 한 번 그 교회에 와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 목사는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 그 교회의 성도에게서 외국어 방언이 터졌다고 하였다. 그 말을 전해주었던 사람에게 나는 그 방언이 외국어와 유사하게 들릴지라도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은 외국인은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여자의 빈 방에서 여인의 침대에 걸터앉아 샤워를 마치고 발가벗고 들어오는 여인을 맞이하고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놈을 예수라고 믿고, 그런 가증한 거짓 예수와 동행하는 사람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에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 성도에게서 그 외국어 방언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사탄의 장난이다. 지금은 한국에 가 있는 우리 교회의 한 성도는 서울의 오륜교회에서 알파코스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는데, 그때 금이빨과 방언을 경험했다고 했다. 그런데 금이빨이 삼일 후에 본래의 이빨로 돌아가 버렸다고 했다. 이런 것이 사탄의 장난이다. 사탄의 장난을 간단히 구별하면 그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구별하지 못하고 가당치 않게 성경을 대입하여 설명하려 시도하기 때문에 계속 말려드는 것이다.
4. 성경의 방언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성경의 방언의 주체는 하나님이었고 방언의 대상은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방언을 통하여 사람에게 메시지를 주셨다. 그러나 오늘 날의 방언이라고 주장되는 소리현상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여 시행되고 있다. 방언을 한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기도 시간에 그 소리현상을 써먹는다. 이점에 있어서 오늘 날의 방언이라고 주장되는 소리와 성경의 방언은 매우 다르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최초의 방언은 성령의 강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방언을 발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방언에 대한 어떤 난해한 부분은 마치 사람의 영혼이 방언을 말하는 주체인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보면 사람의 영혼이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로 사람이 방언을 사람에게 말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하고 방언이 나타났고,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교회의 경우도 먼저 성령이 임하고 난 후에 방언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었으므로 방언을 만들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의 영혼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방언에 대해 언급하는 모든 성경의 말씀들이 성령의 역사로 방언을 사람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결코 방언으로 하나님께 말하였다는 표현을 찾아보기 어렵다. 성경의 방언은 사람이 듣도록 말하는 방언이었지 하나님이 듣도록 기도하는 방언이 아니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행 2:4)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10:46)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19:6)
“방언을 말하는 자는”(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고전 14:4)
“방언으로 말하고”(고전 14:6)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고전 14:13)
“방언을 더 말하므로”(고전 14:18)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고전 14:19)
“다 방언으로 말하면”(고전 14:23)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고전 14:27)
“방언말하기를”(고전 14:39)
방언에 대한 바울 사도의 가르침 속에 방언이 하나님께 전하는 특별한 영혼의 언어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난해한 부분이 두 군데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이 부분은 참으로 해석하기 난해한 부분이다. 성경의 많은 말씀들이 초대교회의 방언의 주체를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 방언을 한다고 했으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혀를 이용하여 하나님 자신에게 말하였다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만일 바울이 사람의 영혼이 성령의 감동을 입어 하나님께 방언으로 말했다고 하면 더 논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방언을 말하는 주체가 사람의 영혼이라는 주장은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라는 부분으로 말미암아 또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 오늘 날의 소리현상이 성경의 방언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근거로 들면서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을 한다. 그 소리들이 사람의 귀에는 무의미한 소리 같으나 사실은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 비밀스러운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한다. 랠랠랠레 우알랄라 엘렐렐레 우알라스데 ... 이런 소리를 통하여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께 비밀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보면 방언에 이러한 이론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영상이 많다. 유명한 신사도운동교회인 하베스터 샬롬 교회의 문정혜 목사라는 분이 방언에 대해서 이런 내용을 가르치는 영상을 보았다. 이 영상을 보니 약 9분 30초가 경과하는 무렵부터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이 방언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방언은 비밀을 말하는 기도예요. 제가 방언은 비밀을 말하는 기도라는 것을 보고나서 가장 먼저 성경의 아가서가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속하였고 내가 하나님께 속한 자. 비밀을 누구에게 마하지요 정말 친밀한 자에게 말합니다. 귀에다 대고 아무도 못 알아듣게 살포시 이야기하는 것이 비밀입니다. 여러분, 육성의 기도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방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사랑으로 고백하는 비밀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이상한 친밀감을 강조하는 신부운동의 개념을 실어서 방언이 사람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감을 높여주고 증진시키는 비밀스러운 대화의 수단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과연 바울은 그러한 뜻으로 ‘비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까? 그러나 바울이 여기에서 사용한 헬라어 ‘뮈스테리온’(비밀)이라는 단어는 한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신약성경에서 수 없이 사용되고 있는 이 말은 사람에게 다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을 의미한다. 개인의 인생과 영혼의 비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전해주시는 복음의 비밀, 즉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에 전해지는 계시를 말한다. 이 단어가 쓰여진 또 다른 성경의 문장을 보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뮈스테리온’)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여기서 바울이 무슨 뜻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믿으라고 성도들에게 말하였겠는가?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먼저 받아서 성도들에게 전하는 사람임을 믿으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비밀’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감을 증진시키는 사적인 비밀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임하는 구원계시를 말하다. 이것이 다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엉뚱하게 방언기도는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성을 증진시키는 비밀대화라고 하면서 많이 할수록 좋다고 가르치고 있다.
고전 14:2절은 방언이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는 바울의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나님께 방언으로 복음의 비밀을 하나님께 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비밀을 모르시니까 사람이 방언으로 가르쳐 드린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난해구절이다. 난해구절을 억지로 풀면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이러한 난해구절을 멋대로 해석하면서 아무렇게나 인용하여 방언이 하나님께 영적인 비밀을 이야기하는 기도라고 가르치는 것은 위험스러운 행동이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
이 말씀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중대한 사실은 초대교회의 방언은 객관적인 통역과 함께 교회에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점이 오늘 날의 소리현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오늘 날 방언을 한다는 사람은 수 없이 많으나 객관적으로 신빙성있는 통역이 이루어지는 방언은 없다. 통역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마다 다 다른 뜻으로 푼다. 그러므로 오늘 날의 방언이라는 것은 결코 신뢰할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방언이랍시고 공개적으로 교회에서 소리를 발하는 행동은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위험스러운 행동이다.
조용기 목사가 예배 중에 했던처럼 스스로 방언을 말하고 스스로 통역하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2인 이상의 다른 사람이 방언하는 사람과 사전에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고서 방언을 듣고 즉석에서 성령의 역사를 따라 말해야 한다. 그때 두 사람 이상이 같은 뜻으로 통역하면 그들의 방언과 방언 통역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르는 것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과연 어디에서 그러한 방언과 방언통역을 볼 수 있겠는가?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에는 그 통역하는 내용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더 이상 새로운 단어와 내용은 나타나지 않고 비슷한 내용들이 반복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라면 그 의미와 내용과 표현이 무궁무진할 것인데, 왜 비슷비슷한 말들이 반복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고 자신들의 느낌과 감각대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용기 목사처럼 스스로 방언 말하고 스스로 그 내용을 통역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영적가교 역할을 자처하는 현상은 더욱 더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현존하는 계시의 통로가 되기 때문인데, 성경이 있는 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자기 자신에게와 하나님에게만 말하라고 하였을까?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께 말하고, 또한 자신에게도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해석해야 할까? 방언으로 인한 무질서가 횡횡했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반드시 현장에서 객관적인 통역이 가능 할 때에만 방언을 활용하라고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하지 말라는 말을 더욱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께 말하고 자기에게 말하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을 근거로 방언이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던 특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방언을 교회에서는 반드시 통역과 함께 활용하라고 하였다는 것에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방언의 내용을 통역함으로 교회와 성도에게 신앙의 유익이 분명하게 나타났었다는 추론이다. 바울 사도가 유익이 없는 일을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방언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설명이었거나, 복음에 근거하여 성도에게 주시는 권면과 교훈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을 보면, 성경의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복음전파의 보조적인 수단이었다. 이첨 초대 교회의 방언은 성도와 교회에 확실한 유익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방언을 통한 유익을 얻는다고 객관적으로 말할 근거가 없다.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권면을 받고 있지도 않다. 이미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여 적용하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을 따라 신앙생활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보조수단이었던 방언이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초대교회의 방언에 대해 언급하는 대부분의 성경말씀들이 방언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사람에게 말했다고 기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날 방언한다는 사람들은 방언이 하나님께 더 잘 기도하게 하는 은사라고 우긴다.
5. 하나님과의 비밀대화가 방언이었나?
특이한 소리현상을 성경의 방언이라고 하면서 영혼에 매우 유익하니 그 모양이 우스꽝스러울지라도 인내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실행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그런 비성경적인 말에 현혹되어 단잠을 줄이고 새벽부터 교회에서 “우알랄라 우알랄라 엘렐렐레 센노리세”...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이런 소리를 내는 분들이 있다. 그 소리 때문에 새벽에 함께 기도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의 귀에는 저리 유치할지라도 그 속에는 무궁무진한 영적인 의미가 있고 하나님은 다 알아들으신다고 가르치는 말들은 성경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이런 괴이한 소리가 신령한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다음의 성경구절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5)
이 부분을 근거로 들면서 방언은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의 기도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영’(헬라어 ‘프뉴마’)는 무엇이고 또 ‘마음’(헬라어‘노우스’)은 무엇인지를 규명하여야 한다. 단순히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따라 영과 마음을 완전히 분리하고, 영과 마음은 전혀 다른 세계이며, 서로 교차하거나 함께 맞물려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이 구절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이분법적인 이해는 그리이스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전에 우리에게 입력되어 있는 선입견이 아닐까? ‘영’(프뉴마)라는 개념이 성경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셀 수 없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바울 사도가 이 단어를 또 다른 성경에서 ‘마음’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고 나면 여기서 말하는 영과 마음이 서로 분리된 각각 배타적으로 독립된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방언은 영의 기도이고 모국어 기도는 육의 기도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주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금방 드러난다.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프뉴마’)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후 4:1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프뉴마’)이 아니요”(딤후 1:7)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니 마음으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바울의 난해한 말은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오용하는 성도들에게 방언은 기도의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친 내용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싶다. 하나님께서 개인의 기도에 활용하라고 방언을 주시지 않았으며, 방언을 기도에 도입할지라도 그 자신에게는 영적인 유익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일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 바를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3:1)
이 구절을 통하여 방언이 천사의 언어라는 주장을 펼치는 더욱 한심한 사람들도 있다. 이 말씀은 방언이 천사의 언어라는 내용이 뜻이 전혀 아니다. 사랑이 중요한 신앙의 핵심 덕목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말씀일 뿐이다. 사람들은 방언 등의 겉으로 드러나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게 하는 은사와 이적에 더 예민해진다. 종종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있는 겉으로 과시할 수 있는 은사를 자랑하거나 남의 은사에 대한 시기심이 발동하여 보기 흉하게 경쟁하는 모습들이 나타난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서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더불어서 행하는 것이 그 어떤 은사보다 더 가치있는 최고의 은사라고 강조한 것일 뿐이다.
성경이냐? 체험과 현상이냐?
불행히도 오늘 날의 방언이라는 소리현상을 성경에 나타난 방언이라고 확신하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나타나는 소리현상을 방언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성경의 방언과 같을 것이라고 믿어버리고 있다. 이 어이없는 소리의 헤프닝이 전 세계의 교회에 퍼져버렸다. 물론 이미 대부분의 신학의 거장들이 이 사실을 정확히 연구하여 지적하였지만, 방언바람을 잠재우지 못했다. 왜냐하면 현상과 체험과 느낌이 이론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자신에게서 그 현상이 나타나고 느낌이 일어나면 그대로 맹신하고 추종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이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진리일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성경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도 많이 나타남으로 손을 대지 못하려고 한다. 하기야 나도 그랬었다. 내가 하지 않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모를 소리를 내면서 그것이 성경의 방언이라고 다들 말하니 그런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성경과 다르고 성경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 교회에 가득하면 기독교가 아니다. 성경을 뒤로 제치고 나타나는 현상을 따라 믿기로 합의를 보고서 기독교라는 간판도 내려야 할 것이다. 요즘에는 방언찬양을 한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있다. 성경에는 방언찬양을 설명하는 말씀이 하나도 없는데,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니 인정할 것인가? 그러나 어떤 여성도들이 찬양 시간에 시퍼런 식칼을 꺼내들고 멋지게 춤을 추면서 찬양을 부르면 그것도 성령의 역사라고 인정할 것인가? 성령춤이라는 것도 마음대로 추고, 입신과 환상이라는 것도 오는 대로 놔두고, 쓰러지고, 낄낄거리고, 금가루를 보고, 금이빨을 보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라 다 인정하고 받은 것인가?
“성경을 좇을 것이냐? 체험과 현상을 따를 것이냐?”
결국 우리가 운명을 걸고서 고민하고 결정을 지어야 마지막 결단은 이것이다. 기독교는 성경을 따르는 종교이다. 기독교의 원리와 기준은 성경이다. 성경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가르칠 것이면 기독교 안에 머물지 말고 떠나야 한다. 기독교와 유사한 다른 종교를 표방하면서 모여서 이상한 소리를 주절거리고, 이상한 음으로 노래를 부르고, 요상한 춤을 추고, 드러누워서 천국을 보면서 생방송으로 보고 중계한다면야 힘써 말리지 않겠다. 문제는 성경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며, 모든 신앙의 활동을 성경에 근거하는 기독교 안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문제이다.
최근에 한국 교회에서 일어난 방언열풍은 한국 교회가 얼마나 성경에 관하서 무지한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무속적인 영성에 점령당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신나게 도처에서 쏟아지는 이상한 방언들이 과연 성경을 통하여 검증될 수 있는지 상고하는 자세가 없었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이며, 나타나면 그대로 받고 기뻐해야 하다는 식이었다. 한국 교회는 귀신의 놀이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에게서 어떤 현상이 나타나기만 하면 무조건 성령을 갖다가 붙여도 다 통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3,14)
성령이 오신 이유는 복음의 진리를 더욱 선명하게 깨우쳐주시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더욱 잘 설명하여 온전한 믿음을 가지도록 성령께서 도우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은 반드시 성경의 내용과 맞게 되어있고, 성령이 하시는 일이 성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상한 소리가 방언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왜 그런 소리가 성령의 역사인지 성경으로서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그 소리와 최면실습, 타종교, 정신질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같은 소리현상과는 어떻게 분명히 다른지를 설명을 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런 괴이한 소리에 현혹되게 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변질시키는 일을 무슨 배짱으로 계속하는지 모르겠다. 왜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무의미한 소리인가? 귀신의 장난인가?
자신의 괴이한 소리현상이 성경의 방언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다음의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잠시만이라도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지금 방언이라고 믿고 있는 소리현상은 아무 의미가 없는 현상일 뿐이다. 거기에 사람들의 종교적 감성이 추가되어 의미가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귀를 스스로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 이마와 두피 전체를 위 아래로 움직이는 묘기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영웅시하거나 우월한 인종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굳이 필요하지 않는 근육과 신경이 더 섬세하게 발달되어 있을 뿐이다. 성대의 신경과 근육이 필요한 언어를 구사하는 기능 외에 다른 소리를 내는 기능을 발휘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기독교, 타종교, 무종교를 가리지 않고 이런 분들에게서 이런 소리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착실한 성도에게서 나타나면 성령의 은사로, 타종교인이나 이단에 속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면 귀신의 장난으로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소리현상이 귀신들과 상관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귀신의 장난으로서 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소리현상이 특히 많이 나타나고 있는 곳에서 무당들처럼 점하는 예언, 쓰러뜨림, 기괴한 웃음, 금이빨, 금가루 등의 귀신장난도 더불어서 일어나고 있다. 괴이한 소리를 나게 하면서 ‘하늘의 언어’라고 미화하여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김우현 PD를 보면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김우현 PD는 수년 전 일본의 나고야에 있는 신사도운동가 다께모또 준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었다. 그 때 집회를 마쳤을 때 예배 당 벽에 금가루가 나타났다고 했다. 다음은 김우현 PD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나고야의 신시로 교회에서 금가루가 나타났다고 소개하는 내용이다.
“주일 오후에 그들은 내게 집회를 인도해 달라고 했다. 나는 영상과 간증을 통해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70년에 대해 나누고, 그것을 여는 물꼬로서 사도행전에 오순절 성령님이 오셔서 부어 주신 '하늘의 언어'를 나누었다. 그 흩어진 유대인들에게..언어가 달라진 그들에게 동일하게 '하나님의 큰 일'(행2:11)을 듣게 하신 것은 그 유치해 보이는 '방언'을 통해서 였다. 누가 뭐라해도 방언은 바벨론의 영을 깨트리는 하늘의 권세다. 그냥 방언이 아니라 성령님과 진정으로 하나 되어(성령세례) 구하는 '불의 혀'를 의미한다. 부담을 가졌으나 일본의 지체들이 모두 나와 함께 구할 때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수많은 이들이 방언을 말하며 감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에서 집회를 하는 것처럼, 그들은 모두 오랜 시간 강력한 기도를 토해냈다. 성령님과 더불어 기도하는 영이 부어져야 영적전쟁을 이길 수 있다. 내 지식, 생각, 전략으로는..대단해 보여도 어림도 없다. 이미 작년에 이 '하늘의 언어'는 일본을 위해 부어 주셨음을 응답하셨다. 그런데 신시로에서 그것을 처음 열릴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기도가 끝나고 우리는 더 놀라게 되었다. 집회 장소 정면 벽에 금가루가 가득 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환호와 그것을 만지려는 이들로 강단이 가득 채워졌다. 이것은 아버지의 이벤트였다.”
김우현 PD를 통하여 역사하는 영의 정체가 성령이라고 볼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를 그 스스로 밝혀주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결코 금가루 장난을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원하시면 뭐든지 금으로 변하게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결코 성령님은 이유 없는 도술을 부리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이유없이 과시하시는 분이 아니고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의 십자가를 선전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과 존귀가 돌려지게 하시는 분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뒤에 오실 성령이 자기 자시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라 하셨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4)
금가루가 나타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없고 오히려 사탄의 장난의 도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비판이 자신에게 주어지자 김우현 PD는 마음이 무척 상했던 모양이다. 미국의 한 신사도운동 교회의 홈페이지에서 우연하게 김우현 PD가 남긴 이와 관련된 말을 발견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일본에서 집회를 하는 동안에 벽에 금가루가 뿌려진 것이 발견되었다고 저를 ‘금가루 사역자’라고 인터넷에 어이없는 글을 썼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런 것을 구한 적도 없고 그전에는 본적도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일본의 부흥을 경험했던 그 교회에 작은 응원처럼 부어진 것이라고만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교회의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즐거운 구경거리가 되고 이어진 바비큐 파티를 더욱 축제처럼 만드는 기쁨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사로잡히거나 그것을 마치 신비로운 무엇으로 지나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마치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현상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의 흔적으로 금가루를 남기시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증거도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집회에서 하나님 노릇을 한 그 영의 정체가 무엇인가? 사탄이 아니라면 또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김우현 PD는 생각이 거기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금가루가 작은 교회에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응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런 글들을 보고서 후에 교제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금가루가 나타나는 것이 성경적이며 가능한가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천국에 황금길이 있는데...그것이 이 땅을 침투하거나 영광으로 나타났을 때 ... 금가루로 나타날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무엇으로 인간이 판단하고 비판한다는 말입니까?’”
금가루가 나타난 현상에 대해 어떤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물었더니 천국에 황금길이 있으니 하나님의 영광이 금가루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대체 어느 정신 나간 신학자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궁금하다. 천국에 황금길이 있어 하나님의 영광이 집회 중에 금가루로 나타날 수 있다면 왜 거짓 복음과 거짓된 이적을 선보이는 신사도운동과 관련된 사람들의 집회에서만 금가루와 금이빨이 나오는가? 왜 다른 복음적인 사역자들의 집회에서는 금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누런 금가루를 본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신령한 변화가 일어나서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의 말씀을 따라 잘 믿는 결과가 일어났을까? 기독교를 신기한 장난을 부리는 머털도사들의 종교로 전락시키는 것 외에 돌아오는 유익이 없다. 금가루가 나타나게 하는 현상이 성령의 사역이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처음부터 더럽고 천한 우상종교였다. 금가루 현상은 가증한 귀신의 사술이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게 되고, 삶에서 신령한 변화가 일어나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가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하는 것을 그렇게 설명하셨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7,8)
혹시 많은 거짓 귀신의 방언들 중에서 어쩌면 진짜 성령의 방언이 있지는 않을까? 성령의 역사로 인한 진정한 방언이 지금도 누군가에게서 나타나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할 이유도 없다. 성경적인 방언은 한 번도 학습한 적이 외국어를 구사하면서 복음을 설명하는 현상이다. 외국어를 학원에 가서 배우고 난 다음에 그 언어로 복음을 말하는 것은 성경의 방언에 속하지 않는다. 지금도 성경의 초자연적인 방언 현상이 나타난다는 주장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다.
피터 와그너는 자신의 제 3의 물결 이론을 설명하면서 지금 이러한 방언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아르핸티나 선교사였던 제임스(James)라는 사람에게서 아르핸티나 현지인들의 언어가 저절로 구사되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더 자세한 증거들이 전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비록 잠시이지만 그 사람이 학교에서 스페인어를 배웠고, 또한 이미 수년 동안 아르핸티나에서 선교하면서 현지어를 익히고 있었으니 더욱 더성경의 방언이라고 할 수가 없다. 또 다른 곳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2009년 10월경에 미국 미시간 주의 Ann Arbor에서 열렸던 인터콥의 비젼스쿨에 참여할 당시에 강의하였던 어떤 선교사님이 외국인에게서 한국어 방언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영국의 어떤 선교훈련센타에 있을 때에 한 흑인선교사가 한국의 경사도 사투리 방언으로 “하나님! 용서하여 주이소!”라고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그 이상의 자세한 증거나 그 내용의 신빙성을 설명하여주는 다른 보충설명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외국인에게 한국어 방언을 주시려면 한국의 표준말을 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왜 한국의 한 지역의 사투리를 주셨을까? 사탄이 장난을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그 외국인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 몇 마디의 한국어를 배운 적은 없었는지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짧은 한 문장이나 단어 몇 개가 나타났다고 성경의 방언이 나타났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교회사를 보면 원주민들의 언어를 배우지 않고 원주민들의 언어 방언을 받아 쉽게 선교하려고 했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공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례는 없다. 오순절 교회의 성령세례와 방언의 이론을 최초로 정립하였던 찰스 펄햄은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방언이 나타나자 그것이 곧 사도행전 2장의 지역 언어로서의 방언이 회복된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이제는 선교사들이 외국어를 공부할 필요가 없고 오직 성령세례를 받으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펼햄의 가르침을 받은 알프레드 가르라는 목사가 방언을 받고서 인도에 가서 원주민들에게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였을 때에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방언이 인도 사람들의 실제 언어처럼 들렸지만, 인도 사람들이 사용하는 실제 언어는 아니었다.
모세 시대에 바로의 술사들이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의 상당부분을 따라하였던 것을 보면 사탄이 하나님의 진정한 방언을 부분적으로 모조하면서 미혹할 가능성도 충분하니 미혹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 두 단어와 짧은 한 문장이 나타났다고 쉽게 사도행전의 방언이 나타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성경의 방언이 나타난다고 말 하려면 외국어 단어 몇 개가 아니라 완벽한 문장과 문단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태이어야 한다. 이러한 방언이 종결되었다고 보는 일반적인 이유는 초대교회의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복음이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특별한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 복음전파를 돕는 계시적인 은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계시가 다 나타나고 성경으로 기록되었으므로 방언과 같은 계시적인 은사가 필요하기 않다.
왜 많은 믿음의 거장들은 이 소리와 무관한가?
오늘 날의 방언이라는 것이 과연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사이고 성경에 나타난 그 방언이라면 믿음이 위대한 사람들에게서 더욱 집중적으로 이 현상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오늘 날의 이 소리들이 하나님과 친밀성을 높여주는 방언이라면 많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것의 도움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더 많이 선물로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린 시절 중한 병을 앓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받은 이후 평생을 기도의 사람으로 살면서 스펄전, 조지 휫필드, 웨슬리 등의 믿음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훌륭한 성경주석을 남긴 메튜 헨리(Mattew Henry)의 저술에서도 이 괴인한 소리를 기도에 활용하라고 한 적이 없다. 삶이 곧 설교였다고 존경받았던 ‘주님은 나의 최고봉’(The Upmost for His Highest)의 저자 오스왈드 챔버스의 어떤 책을 보아도 이 소리현상을 영적으로 높이고 칭찬한 적이 없고, 오히려 이러한 체험을 추구하는 자세를 격렬하게 비판하였을 뿐이다. 하루 5시간 기도했던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John Wesley)도 방언이라는 것을 하지도 않았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지난 세기의 최고의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이 남긴 수 천여 편의 설교 어디에도 이러한 소리가 영적으로 유익하다고 예찬한 내용이 없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주역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도 방언이라는 소리현상을 가르치거나 권장하지 않았다. 위대한 어둠의 시대에 진리의 말씀의 빛을 비추어 교회와 세상을 구한 종교개혁을 시작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종교개혁을 완성한 존 칼빈(John Calvin)의 어떤 책에서도 이런 소리를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 적이 없다. 5만 번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기도의 성자 죠지 뮬러 (George Muller)도 방언이라는 것을 기도에 도입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미국의 복음주의의 거장 존 맥아더 목사는 가장 앞장서서 오늘 날의 소리현상이 성경의 방언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교회를 굳건하게 말씀 위에 세우며, 많은 영혼들을 구원한 위대한 사람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이 소리현상과 무관하게 살았다.
그런데 어떻게 오늘 날의 괴이한 소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영혼의 비밀기도이라고 할 수 있을가? 정말 그렇다면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 소리를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소리를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삼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위험천만한 것인지 이 소리를 사랑하는 분들은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지나칠지라도 성경의 근거가 분명하지 않는 이 소리현상을 계속 즐기고 사랑할 것이라면 반드시 신앙이 지식의 많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영향을 주지 않도록 홀로 있을 때에만 해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마치 자신이 영적으로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증거인 것처럼 이 괴이한 소리를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참으로 무지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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