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지명들
사해(The Dead Sea)
염분이 바닷물보다 5배나 함유되어 생물이 살 수 없으므로 ‘죽음의 바다’라고 한다.
사해는 길이 75㎞, 폭 16㎞, 수면 면적이 900㎢이고 최대 수심은 380m 정도 된다.
지중해수면보다 390m 낮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곳은 지상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기도 하다.
이 곳은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바다, 즉 사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곳의 바닷물은 세계에서 가장 짠물로 되어 있는데 보통 바닷물의 염분농도가 4-6%인데 비해
무려 5배나 많은 26%의 염분농도를 가지고 있다.
요르단 강을 비롯한 여러 지류들로부터 황과 질소성분을 함유한 수만 톤의 물이 쏟아져 들어와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고 이 곳에 고여 증발로 인해 화학물질이 풍부하다.
그리고 요르단계곡의 폭염에 노출되어 있는 이 고인 물은 계속되는 증발로 인해 화학물질 침전현상이 생겨난다.
이런 풍부한 광물이 포함된 사해는 병의 치료에 독특한 효험을 나타낸다.
꿈란(Qumran)
1947년 사해 서쪽지역에서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매던 한 베두인 사람이
이 시대 최대의 발견인 그 유명한 사해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모하메드 에디브라는 이 아랍 양치기는
이 동굴에 마귀가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서워서 도망쳐 버렸다.
다음날 그의 사촌과 같이 다시 동굴에 들어간 양치기는 그 안에서 8개의 항아리를 발견했는데
그 중 몇 개는 두껑이 덮여있었다.
이것을 바깥으로 가져와 금이 들어 있기를 기대하며 열어 보았으나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글자가 쓰여진 가죽뭉치만 있는 것을 보고는 실망해 버렸다.
총 7개의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는데,
양치기는 그것을 칼릴칸도라고 하는 시리아 정교인에게 가지고 가서 팔아 넘겼다.
칸도는 그 중 4개의 두루마리를 예루살렘에 사는 시리아 정교회 대주교에게 보였다.
대주교는 4개의 두루마리가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즉각 사들여으며
두루마리가 매우 귀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이겔 야딘 이라는 교수에게 25만 달러를 받고 팔았고, 그 후 이스라엘로 옮겨졌다.
이 거래는 야딘의 아버지인 엘리자 슈케닉 교수가 베들레헴에서 나머지 3개의 두루마리를 이미 사들인 후였다.
이 두루마리들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에 있는 고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로 세로 0.3m, 7.2m인 이사야의 두루마리이다.
이 후 요르단 왕국 암만 박물관장 히딩 교수와 성서 연구소장 드보 신부와
많은 베두인 사람들은 두루마리의 높은 가치를 알고 사해 서쪽지역을 뒤지기 시작했다.
1952년 이 지역 30개가 넘는 동굴에서 900개가 넘는 두루마리를 발견하였으며
꿈란에서 9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4호 동굴에서 가장 많은 필사본을 발견하였다.
그 중에는 가죽과 파피루스에 쓰여진 두루마리 이외에 구리에 쓰여진 것도 두 개 있었다.
엔게디(En Gedi)
‘들염소의 샘’이란 뜻으로 물이 흔한 오아시스 지대이며, <아가>서에서 아름다운 포도원이 있다고 적혀 있다.
다윗이 사울의 질투를 받아 이곳으로 피신했는데, 추격하던 사울이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에 들어왔으나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냈다고 한다.
엔게디 폭포 위쪽에는 BC 300년대에 월(月)신을 섬기던 자리와 유다 시대의 유적 및 로마시대의 성터 일부가 있다.
마사다(Masada)
엔게디 남쪽 16㎞ 지점의 사해 중부 서안에는 사방이 절벽인 마사다 천연 요새가 우뚝 솟아 있다.
절벽 높이는 사해 해면에서 410m이고, 정상 마당의 길이는 600여m, 너비는 300여m이다.
일찍이 알렉산데르 얀네우스 왕이 동쪽 국경을 방어할 목적으로 이 천연 요새에 진지를 구축했으며,
그 후 헤로데 대왕이 유다 왕으로 제수 될 때까지는 자기 자신과 가족의 피난처로 활용했다.
왕이 되고 나서는 마사다 요새에 궁전을 지어 화려한 욕탕, 작은 유다 회당 이외에
무기와 양식 보관창고 등을 두어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기원전 66년 유다 독립전쟁 때에는 독립군의 기지로 이용되었으며, 960여병이 모두 자결로 최후를 마쳤다.
이곳은 이스라엘 군인과 학생이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예리고(Jeriho)
예루살렘 동쪽 35㎞지점의 요르단 계곡에 위치한 가나안 지역 최대의 오아시스 마을 예리고는
‘종려의 도시’로 불렸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인들이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장 먼저 정복한 가나안 땅이며,
풍치가 수려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헤로데를 비롯한 예루살렘의 귀족들이 별장을 짓고 겨울을 지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께서 당하신 유혹, 자캐오, 착한 사마리아인 등 이곳을 무대로 한 사건과 비유로 알려졌으며,
7,000-8,000년 전의 주거가 이 일대에서 발굴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요르단 강(The River Jordan)
눈 덮힌 헤로몬산 아래에서 시작하여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요르단강은 특이한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강의 직선 거리는 단지 104㎞ 바껭 되지 않지만 꼬불꼬불 돌아 흐르기 때문에 총 길이가 256㎞나 된다.
이 강은 헤르몬산 네 곳에서 지하수가 솟아 요르단강이 형성되어,
사해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알 우르단(내려오는 강)이라는 뜻을 가진 요르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평균 폭이 30m 되는 요르단 강은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성스럽게 여겨졌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장소였다.
갈릴리 호수 ★
갈릴리 호수가 그 주변의 겐네사렛의 언덕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덕으로 유명하다.
남북의 길이 21㎞, 동서의 폭 14㎞, 넓이 170㎢로 하프 모양이며, ‘겐네사렛’ 호수라고도 한다.
깊은 곳은 수심이 약 50m이고 지중해의 수면보다 212m나 낮다.
일대에는 겨울철에 lq가 약 50㎜나 내려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하며, 키브츠가 밀집해 있고 인구가 조밀하다.
주변에는 성서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사파르나움, 진복팔단산, 티베리아, 타브가, 게라사 등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 호수를 중심으로 제자들을 부르셨으며,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행하기도 하셨다.
이 호수에는 37종의 어족이 살고 있다.
이곳의 물이 요르단강 줄기를 따라 흘러가서 이스라엘 전국에 식수는 물론, 농업, 공업 용수까지 공급한다.
언덕으로 둘러싸인 분지 속의 호수지만 때때로 폭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티베리아(Tiberias)
갈릴래아 호수 서안에 있는 도시로 기원전 29년경에 헤로데가 세웠다.
당시의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티베리아라는 이름을 붙임에 따라
갈랠래아 호수 티베리아 호수라 불리기도 하였다.
가버나움(Capernaum)
갈릴래아 호수 북단에 있는 작은 어촌이다.
고대 가파르나움은 세관과 회당을 갖춘 큰 도시였으나,
지금은 헐린 가파르나움 회당과 베드로가 살던 집터와 몇몇 주거지 이외는
마을의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고 잡초만 무성한 거친 들판이 되었다.
그러나 수 차례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베드로의 집터와 예수시대의 회당이 위치한 곳을 발견,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타부가(Tabgha)
타브가는 ‘일곱 개의 샘물’이란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헤프타페온’을 아랍어로 옮긴
‘아인 엣 카브가’에서 나온 말이며, 히브리어로는 ‘엔 세바’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빵의 기적 기념성당과 진복팔단 성당, 부활하신 그리스도 발현 기념성당(베드로 수위권 성당)이 있다.
필립보의 가이사리아(Caesarea Philippi)
헤르몬 산의 남서쪽 13㎞ 지점에 있으며, 웅대한 암벽과 펑펑 치솟는 동굴 안 지하수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
요르단 강으로 흐르는 하천의 원천들 가운데 두 번째로 크다. 맑고 시원한 물이 넘쳐흐르는 폭포수는 이곳을
찾아오는 이들의 더위를 말끔히 씻어 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판’이라고 불리는 그리스신이 모셔지기도 했다.
현재 지명인 바니야스는 바로 이 ‘판’의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파네아스’라고 하였고,
로마 시대에는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라 불렀는데, 이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 형제인 헤로데 필립보가
BC 2년경에 이곳에 도시를 세워 그렇게 명명하였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는 예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관련이 되는 곳으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이다. 삼림이 우거지고 수원이 풍부하며 토지가 비옥하여 풍요로운 곳이다.
1967년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하기까지는 시리아에 속하였다.
헤르몬산
이스라엘 북부의 안티레바논 산맥은 서남쪽으로 내려가다가 헤르몬산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는데,
최고봉(2,950㎞)에서의 전망은 장관이다. 동쪽으로는 시리아의 다마스커스가 발밑에 보이며,
서쪽으로는 레바논의 띠로항을 비롯하여 지중해 연안을 끼고 아꼬, 하이파, 가르멜산이 전개되고,
남쪽으로는 갈릴래아 평원과 호수, 그리고 요르단강 골짜기와 사해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므기또(Mugiddo)
북구 팔레스티나에 위치한 이즈르엘 평야는 블레셋과 이스라엘간에 싸움이 잦았던 곳으로
므기또는 이 평야를 지켜주던 도성의 하나였다. 솔로몬이 요새로서 강화하여 군사상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교역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이파항에서 남쪽으로 35㎞쯤 떨어진 곳에 있으며,
아랍 사람들은 이곳을 ‘텔 엘믓셀림’이라 부른다.
이 곳 도성이 겪어 온 수많은 불행은 최근에 발굴해낸 고고학적 자료가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유적 지층이 20여 개나 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흥망 성회가 오고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중해 연안을 차지하려는 이들과 북쪽과 동쪽에서 침입해 오는 서방민족들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므기또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이 곳에서 전투는 불가피했었다.
이집트인, 가나안인, 팔레스타인인, 이스라엘인, 앗시리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페르시아인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인들이 이 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1917년 알렌비 장군은 전략적인 중요성을 알고 므기또를 대 터키전의 작전본부 기질 정했다.
이 곳에서 수많은 전투가 있었기 때문에 이 곳은 전쟁의 상징이 되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이 세상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짓는 싸움이 이 곳 므기또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그들은 만물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의 큰 날에 일어날 전쟁에 대비하여 온 세계의 왕들을 모으려고 떠나갔다.
그리고 히브리말로 하르마게돈(므기또산)이라고 하는 곳에 그 왕들을 모았다(묵시 16,13-16).
므기또는 고대 이집트의 기록에 최초로 등장한다.
BC 1478년 이집트의 투트모스 3세 왕이 이 도시로 침입해 왔고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가
이집트 신왕국의 신전벽화에 묘사되어 있다. 그 후 여호수아가 이도시를 탈환하여 므기또의 왕을 죽였다(수 12,21).
BC 10세기에 솔로몬은 특별과세를 거둬들여 도시를 재건하고 요새화하였다.
그 후 이곳은 당대 번창했던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고, 그의 왕국의 방어벽 구실을 하였다.
이 곳에서 유대의 왕 아하지야가 예후에 의해 살해되었으며(2열왕 9,13-27),
요시아왕이 이집트 파라오 느고가 유프라테스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하다가 전사했다(열왕 23,30).
므기또는 1926년까지 시카고 대학의 학회에 의해 발굴되었다. 약 16,000평의 땅을 발굴한 결과
20개의 도시가 위아래 수직으로 겹쳐져 있는 유적지들을 발견하였는데 각 도시의 유적들은 각 층마다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450필의 말과 150대의 전차를 수용할 수 있었던
솔로몬의 마굿간과 식량저장소, 부서진 성벽, 시대별로 발견된 집들과 성문들의 기초들이며
아주 절묘하게 다듬어진 상아는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진 수로시설이 있는데 수직 갱도를 40m나 파내려 간 다음
그곳에서부터 65m 정도 떨어진 성벽 바깥쪽 샘까지 터널을 만들어 물을 끌어 들였다.
그리고 샘은 침입자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흙으로 덮어 위장해 놓았다.
지중해변의 가이사리아(Caesarea)
하이파와 텔아비브 중간에 있다. BC 22년경 헤로데 대왕이 사마리아 북부 지중해 연안에 대역사를 일으켜
큰 부두를 갖춘 도시를 건설한 다음, 로마 제국의 첫 황제 아우구스토 케사르를 기리는 뜻으로
가이사리아라고 명명하였다.
기원 후 6년부터 500년간 로마 총독이 이곳에 주재했으며 오랫동안 행정수도 구실을 하였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으나 고고학자들이 헤로데 대왕 때의 항구를 수중에서 발굴하고 있어,
수중고고학 연구의 실험장이 되고 있다.
갈멜산 (Mt. Carmel)
이즈르엘 평원에서 지중해의 하이파 항구로 빠지는 지점까지 약 23㎞에 걸친 가르멜산 줄기가 있다.
가르멜산은 높이 540m, 길이 25.6㎞, 폭 6-8㎞ 정도 되며 지명은 하느님의 포도밭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
가렘엘’에서 유래되었다. 과거에 포도밭으로 덮여 있었던 이 당은 비옥함으로 항상 이름나 있던 지역이다.
일년내내 푸른빛을 유지하고 있는 이곳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매혹적인 곳이며 예로부터
아름다움의 상징처럼 되어 있었다.
이 산의 정상에는 예로부터 여러 신들이 모셔있었다. 예언자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하였던 장소이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인들은 모두 엘리야를 그들 일신교의 영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장소를 아낀다. 13세기 때 이 곳에서 엘리야를 수호 성인으로 모신 가르멜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나자렛(Nazareth)
이즈르엘 평야 북쪽 해발 375m의 언덕 위에 있는 도시로, 이곳에서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예수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예고를 들었다. 또한 예수께서 공생활에 들어가시기 전까지 오랫동안 사셨던 곳이다.
마리아의 우물
마리아의 우물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장소 중의 하나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현재에도 이곳은 이 마을의 유일한 우물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자렛 어린이들이 그랬듯이 틀림없이
예수도 그의 모친 마리아를 따라 이 우물에 물을 길러 왔었을 것이다.
산에서 솟아난 물줄기가 도관을 타고 흘러와서 오랜 옛날부터 이 곳에 기념성당을 세웠다.
가나(Cana)
몇 지역이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가나로 거론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나자렛에서 티베리아로 가는 길목에서 6.4㎞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곳이
가장 유력한 곳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나는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던 첫 번째 기적을 행했던 곳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는 지역이다(요한 2,1-11).
가나에는 이 기적을 기념하는 2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다.
예루살렘(Jerusalem)
예루살렘은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구 시가지와 20세기에 들어서 새롭게 발전한 신 시가지로 구분된다.
구시가지의 면적은 불과 1㎢이지만 신 시가지는 그 100배나 되며,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BC 1000년 다윗 왕이 여기에 도읍을 정했으며, 그 후 약 3,000년 동안 주인이 수없이 바뀌면서
영욕의 세월을 겪었다.
그리스도교와 유다교, 이슬람교의 공통적 중심지이며, 성지 중의 성지로서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요,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예루살렘 성벽
현존하는 예루살렘의 성벽은 여러 시대를 통해 이루어진 과거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성벽이 현재의 모습처럼 최종적으로 재건된 것은 1542년 터키의 슐레이만 황제 때였다.
이 성벽의 둘레는 4㎞이고 높이는 12m 정도 된다. 34개의 탑이 있고 8개의 성문이 있다.
동쪽: 성 스테파노 성문, 황금문(1530년 터키군이 봉쇄). 사쪽자파 성문
남쪽: 오물 성문, 시온성문
북쪽: 뉴 게이트, 다마스커스 성문, 헤로데 성문
성전의 서쪽 벽 (통곡의 벽)
솔로몬왕이 세운 예루살렘 대성전은 BC 587년 바빌론에 의해 파괴되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BC 515년 성전을 재건하였는데 이것이 제2성전이다.
헤로데 대왕 때 성전을 대폭 증축했기 때문에 헤로데 성전이라고도 한다.
이 성전도 유다 전쟁시(66-70)에 파괴되었고, 이때 남은 부분이 통곡의 벽이며, 성
전의 서쪽에 있으므로 서벽이라고도 한다.
150-200m 길이의 높은 벽으로 바빌로니아의 로마군과 터키에 의해 폐쇄되었고
유대인은 이곳을 신앙의 원천이라 믿는 중요한 장소이다.
그들이 비록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어도 3000년 전통을 갖고 있고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긍지를 갖고 산다.
이슬람교도는 메카를 향해 기도하며 성전을 건축할 때도 메카와의 방향을 고려해서 짓는다.
AD 70년 티투스는 거의 모든 벽을 부수었으나 거대한 벽돌의 일부분을 그의 후손들에게 로마군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벽을 남겨 놓는다. 로마 통치기간 동안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비잔틴 시대에 들어와 그들은 사원몰락 기념일에 신성한 사원의 잔해인 이 벽에 와서 그들 민족의 이산의 슬픔을
나누기 위하여 일년에 한번씩 방문이 허락되었다.
1967년 6월 6일 전쟁 대에도 예루살렘성 탈환에 있어서는 통곡의 벽 장악을 최우선으로 삼았다고 한다.
조상드르이 애환이 서린 이 성벽에 각별한 애착과 감동을 느낀 유다인들은 7세기경부터
이를 기도의 구심처로 정하고,
세계 어느 곳에 살더라고 이곳을 향하여 기도해 왔다.
해마다 바브달 9일이 되면(성전이 파괴된 날로서 아브달은 태양력의 7-8월에 해당함)
유다인들은 파고된 성전의 이 서벽에 모여 예레미야의 <애가>를 읽으며 옛날을 회상하고
통곡한다. 여기에 들어갈 대는 유다인은 물론 일반 관광객도 ‘키파’라고 하는 모자를 써야한다.
황금문(Golden Gate)
올리브산 정상에서 서쪽을 내려다보면 예루살렘 옛 성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의 동남부, 예루살렘 대성전이 있던 자리에 이슬람교 대사원이 있고,
그 동쪽 성벽에 한 쌍의 아피문이 보이는데 돌로 메워져 있어 지금은 사용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이 황금문 내지 아름다운 문이며, 예수께서도 어린 나귀를 타시고 여기로 입성하셨다고 한다.
제2성전 시대에는 이 문이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이 문으로 오시면 맨먼저 부활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이 문이 보이는 곳에 묻히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고 주변에 묘를 쓰기 시작하였다.
십자군 시대에는 봄이면 성지주일, 가을이면 거룩한 십자가의 날이라 하며 이 문이 두 번 열렸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입성하는 행사를 벌였었다
올리브산(Mt. Olives)과 게쎄마니 동산
올리브산은 예루살렘 동쪽,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으며, 예로부터 올리브 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가 두루 깊게 박혀 있는 곳으로서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아주 중요시되는 성지이다.
예수께서 베다니아에 머무르시는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오가실 때마다 올리브산고갯길을 오르셨고,
예루살렘 시가지를 내려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곳이기도 하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을 내려다보시며 세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고,
올리브산의 한 언덕 게쎄마니 동산에서 밤을 세우기도 하셨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고뇌하시며
성부께 기도하신 곳,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신 곳, 그리고 부활 후 승천하신 곳도 이곳 올리브산이다.
게쎄마니 동산(Garden of Gethsemane)
올리브산 서편 하단부, 예루살렘 구 시가지의 성벽 바로 맞은 편으로 4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동산이다.
이는 히브리어 갇세마님의 그리스식 발음이며 ‘기름틀’이란 뜻이다.
이곳은 예수께서 죽음의 공포와 불안 속에 고뇌하시며 온갖 정성을 다해 성부께 기도드리시던 곳이며,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신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곳, 예수님의 체취가 담긴 자리에는 게쎄마니 대성당이 세워져 ‘고뇌의 성당’이라고 불리고 있다.
게쎄마니 대성당은 14개국의 재정적인 보조로 1919년 완성된 성당으로 ‘여러나라 민족의 대성당(만국성당)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눈물의 성전(Dominus Flevit Church)
‘도미누스 블레빗’이란 ‘주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루가 13,34-35)는 뜻인데,
게쎄마니 대성당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거리, 즉 올리브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 성당이다.
구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며 예수께서 예루살렘 시가지르 바라보시며 한숨을 쉬시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6세기경 이 자리에 비잔틴 양식의 기념 소성당이 자리하고 있었고,
1955년 폐허가 된 이 성당 자리에 새 성당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님의 기도 교회(Church of the Pater' Noster)
예수 승천 경당에서 남쪽으로 100m정도 내려가면 있는데 ‘
파테르 노스테르’는 라틴어 주의 기도 시작 부분으로 ‘우리 아버지’라는 뜻이다.
성당 옆에는 갈멘 수녀원이 자리하고 있고, 지하 소 경당은 예수께서 가끔 머무시며 기도하시고,
또 주의 기도를 가르치셨다고 하는 동굴에 위치하고 있다.
성당의 회랑 벽에는 세계 80여개 국어로 된 주의 기도문 판들이 걸려 있는데,
그 중에는 부산교구에서 기증한, 우리말로 된 주의 기도문도 있다.
예수 승천 교회
올리브산 정상에 있는 엣투르라는 아랍인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슬람교에 속한다.
이 성당 안에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남겨놓고 가셨다는 예수님의 오른쪽 발자국이 찍힌 바윗돌이
잘 보관되어 있으나 역사적인 신빙성은 전혀 없다.
예수 승천 대축일에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승천 기념 신심예절을 거행 할 수 있게되어 있다.
안나 교회(Church of Anne)
스테파노 성문을 지나 예루살렘성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있는데,
이 자리에서 마리아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가 살았고,
마리아가 탄생했다고 한다. 건물은 1140년 십자군이 예루살렘 지역을 관장할 때 세워진 것이다.
5세기경 비잔틴 시대에는 마리아 성당이 있었는데, 예루살렘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파괴되었으나
지하실에는 당시의 모자이크와 기둥머리 조각이 남아 있어, 옛날의 영화를 말해 주고 있다.
십자군이 퇴각한 후 이슬람교에서 이 성당을 학교로 사용하였다.
1856년 오스만 투르크가 크림전쟁을 지원해준 프랑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성당 일원을 기증하였으며,
오늘날도 프랑스 가톨릭 교회가 이 성당의 구내에 있는 베짜타 못을 관장하고 있다.
베짜타 못(fool of belorosa)
양의 문 곁에 있던 못으로,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맨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낫는다는 소문에 수많은 병자들이 못의 5개 행각에 즐비하게
누워서 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 중에 38년이나 앓고 있던 병자를 고쳐주신 곳이다.
지금은 말라서 못이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며, 안나 성당의 후원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까지 걸어가신 수난과 죽음의 ‘슬픔의 길’이다.
18세기 이전에는 7개처이던 것이 그 후 14개처로 늘어났는데, 그 모두가 역사적으로 실증되지는 않았지만,
이길을 따라 걸으며 예수께서 걸으신 수난과 죽음의 길을 묵상하는 데 그 뜻이 있다.
지금도 매주 금요일 오후 3시면 십자가를 앞세우고 줄지어 가는 순례 행사가 프란치스코회 주관으로 열린다.
주의 무덤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골고타 언덕은 원래 예루살렘 밖의 사형장이었는데, 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 그리스도교의 성지다 되었다.
135년경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말살정책에 따라 골고타 언덕에 비너스 신전이 세워졌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황제의 모후 헬레나의 요청으로 신전이
철거되고 성당이 세워졌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이라 하여 주의 무덤성당 도는 예수부활기념성당이라 한다.
지금의 주의 무덤성당은 1149년 십자군 시대에 확장 보수되었으며, 구역안에 십자가의 길
제10처에서 제14처까지의 유적을 수용하고 있다.
시온산(Mt. Zion)
예루살렘 일대는 해발 770여 m의 고원지대로,
크고 작은 언덕이 줄이은 사이사이로 골짜기가 패어 있어 지세가 마치 파도가 일고 있는 수면과 같다.
시온산 지역은 예루살렘의 남쪽에 있으며,
시온산이란 ‘산등성이’ 또는 ‘요새’ 곧 성벽으로 둘러싸인 언덕을 뜻하는 말로,
예루살렘성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예수께서 사시던 당시의 시온산 지역은 예루살렘성 안에 있었으나,
16세기 중엽 오스만 투르크의 술래이만 황제가 성벽을 구축할 때 성밖으로 제외하였다.
키드론 골짜기는 예루살렘성과 올리브산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로, 수코푸스산 근처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2.5㎞쯤 뻗어나가닥 시온산 밑에서 힌놈의 골짜기와 합류한다.
1948년부터 1967년의 6일전쟁대까지 시온산 지역은 이스라엘군과 예루살렘에 포진한 아랍군이
시온 성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는데, 이스라엘군이 이 문으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수복할 때
격전을 벌였으므로 성문과 성곽에는 수많은 탄흔이 남아있다.
문안에는 외부인에게 가장 폐쇄적인 아르메니아인의 거주지가 있으며,
문 밖은 정적이 감돌아 대낮에도 음침하게 느껴진다.
시온간에는 마리아 영면 기념성당과 최후의 만찬 기념성당, 베드로 회개 기념성당(닭 울음 성당)이 있다.
성당 앞 돌계단을 다라 내려가면 실로암 연못으로 통하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은 다윗왕 때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지였던 기혼샘과 히즈키야 수로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수의 수압에 의해 내뿜어진 기혼샘물은 암반을 뚫어 만든 길이 535m의 히즈키야 수로를 거쳐
실로암 연못으로 흘러 들어간다.
키드론 골짜기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비석이 즐비한 기슭 묘역에 즈가리야의 묘가 포함되어 있고,
그 끝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비석이 있다.
예리고로 가는 길을 따라 서쪽으로 고개를 넘어서면 라자로의 무덤이 있는 베다니아에 이르게 된다
다윗 무덤 경당(Tomb of David)
이스라엘에서 통곡의 벽 다음가는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유대인의 성지 중의 하나인 다윗왕의 무덤은
기념무덤이지 실제무덤은 아니다.
석실 안에 ‘다윗왕의 별’을 수놓은 천이 덮인 석관이 있고 그 뒤에는 은을 입힌 토라 통 2개와 등잔, 촛대
등이 놓여 있다. 뒷벽에도 역시 ‘다윗왕의 별’과 ‘이스라엘 왕 다윗이 살아서 여기 계시다’는 글을 수놓은
천이 걸려 있다.
최후의 만찬 기념 교회(Coenaculum)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나누셨고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 주셨다. 예
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뒤에도 제자들은 이곳에 자주 모여 열심히 기도하던 중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하게 되었으며, 예수께서 선포하신 그 말씀들이 사도들을 통하여 전파되어 나갔다.
베드로 회개 기념 교회
시온산 남동쪽 언덕에 위치해 있는 성당으로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도는 닭 울음 성당이라고 한다.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은 대사제 가야파의 집터라고 추측되는 곳에 세워져 있다.
기혼샘(Gihon Spring)
‘기혼’은 히브리어로 ‘물을 내뿜다’ 또는 ‘처녀의 샘’의 뜻이다. 예루살렘성의 유일한 수원이었으며,
예전에는 풍부한 지하수가 쏟아 키드론 골자기로 흘러들어 키드론 시내를 이루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이 샘가에서 부왕의 뜻을 따라 사독과 나단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다.
히즈키야 수로(Hezekiah's Tunnel)
BC 710년경 유다의 왕 히즈키야가 아시리아의 침공에 대비하여,
예루살렘 지역의 유일한 수원인 기혼샘의 입구를 돌로 막아 외부에서는 이용할 수 없게 한 다음,
암벽을 뚫고 수로를 만들어 샘물을 성 안의 실로암 연못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적의 장기 포위에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이 터널 수로는 기혼과 실로암에서 S자로 동시에 굴착하여 두 곳을 연결하였는데, 길이가 535m이며,
고대 공법으로서는 기술이 뛰어나 터널이 맞물렸을 때 오차가 30㎝밖에 나지 않았다고 한다.
실로암 연못(Siloam Pool)
다윗성의 서남쪽 구석에 만든 저수지로, 히즈키야 터널을 통하여 기혼샘의 물이 공급되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성전 재단에서 사용되어쏙, 병을 고치는 신통한 물로도 알려져 있다.
예수께서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더러 눈을씻게 하신 곳도 실로암 연못이었다.
라자로의 무덤(St. Lazarus Tomb)
베다니아는 올리브산 동쪽기슭에 있는 마을로, 현재의 아랍 지명은 ‘엘 아자리야’이며,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라자로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라자로가 죽어서 무덤에 장사지낸 지 나흘 되던 날,
예수께서 오셔서 그를 부활 시키셔쓴는데, 이 기적은 장차 있을 주님의 부활을 예시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아인 카림(Ein Karem)
히브리어로 엔 케렘, 도는 아랍어 아인 카림은 ‘포도원밭의 샘’이란 뜻으로,
예루살렘 구시가지로부터 서쪽으로 약 8㎞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곳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곳인 동시에 세례자 요한이 탄생한 곳이라고 한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한 후 예루살렘 행정구역에 편입되었고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당과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다는 장소에 있는 아인 카림 기념성당 등이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베들레헴(Bethlehem)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쯤 떨어진 언덕 위에 자리 잠은 인구 3만의 도시이다.
‘베들레헴’은 ‘베이트(집)’와 ‘레헴(빵)’을 합친 ‘빵 집’이란 뜻의 히브리어이다.
성서에 의하면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이고,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곳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곳이다.
베들레헴의 위치는 지금이나 같지만, 현재의 베들레헴은 규모가 많이 커졌다.
그러나 올리브나무와 목자들의 들판, 동굴 등은 여전하여 구세주 탄생의 날을 생각게 한다.
예수 성탄 교회(Church of the Nativity)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 베들레헴에 순례 온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청에 따라 324년 예수 탄생지로 전해 오는 동굴 위에다 첫 번째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339년 5월 31일에 축성하였다.
이 성당은 후일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510년 대지진 때의 화재 또는 529년 사마리아인들 폭동
대의 화재 때문이라는 등 그 시기에 대해서는 설이 구구하다.
지금의 성탄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531년 완공한 것인데,
그 후 지붕과 내부 장식 정도만 바뀌었을 뿐 나머지는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말이나 마차를 타고 들어 올 수 없도록 입구를 처음에는 아치형으로 줄이고,
이어 장방형으로 줄인 흔적이 보이는데, 이제는 머리를 숙이고야 들어갈 수 있다.
성당 안에는 양옆으로 늘어선 붉은색 돌기둥이 40개나 있으며, 구유 동굴이 있다.
헤브론(Hevron)
베들레헴 남쪽 약 28㎞ 지점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아랍인 도시로 약 4만명의 아랍인이 살고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와서 가족 무덤 장소가 된 막벨라의 동굴을 샀다(창세 23,8-6). 사라, 아브라함, 이사악, 레베가, 야곱, 레아가 헤브론에 묻혔다. 모슬렘에 의해서 예언자로서 존경받던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사악의 무덤으로 하여 헤브론은 유대인의 4대 신성한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윗은 이곳에서 왕이 되었고 헤브론은 통치 첫 7년 동안 수도였다(2사무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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