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도>
일본열도에 있어서 민족이 형성된 이후, 지켜지고 있던 일본독자의 전통적 종교. 일본국가 형성이전의 부족 종교는, 외래의 종교전통에 의해서 배제되는 일 없이, 일본국가의 정신적지주의 하나로 생존해 왔다. 궁연제사의 확립과 기기(記紀)신화의 성립은 신도성립의 중요한 계기이다. 한편, 도교,불교,유교등의 영향 을 받으면서 신도의 교리도 창조되었다. 또, 그것과는 별도로 민속종교중에도 신기(神祇)신앙은 뿌리깊게 잔존하며, 신사신도라는 형태를 가지고 교파신도로 발전했다. 신도란, 외국종교의 전래이후에 이름지어진 명칭으로 처음부터 체계화가 어려웠다. 전통적 종교자체의 발전이나, 불교,유교,도교,음양도등의 영향 또는 그 반동으로의 '순수한'신도의 제창, 더욱이 습속(관습과 풍속)이 되어있는 민간의 행사등의 다양함때문이 었다. 천황가의 제사인 궁연신도, 신사를 중심으로 하는 신사신도, 연중행사, 습속에서 나타나는 민간신도 및 교파신도등으로 분류된다.
<신사신도(神社神道)>
신사를 중심으로한 신도. 숫자상으로는 대부분이 신사본청에 소속된다. 명확한 교전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고전신화를 근거로하여 신사제사를 중시한다. 한쪽에서는 '진실한 마음'과 같은 윤리적인 면도 강조되지만, 다른 쪽에서는, 새해참배,결혼식등의 습속(관습과 풍속)과도 연결이 깊다. 일부에서는 이세신사,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국가의 원조(援助)등, 정치와 종교의 관계로 논의되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전쟁전의 국가신도 의 흐름상에서도, 아직 신도가 습속과 미분화되어있다 라는 점과 얽힌 문제이다.
<국가신도>
황실과 국가를 중심으로하는 신도. 메이지 1년에, 불교, 그리스도교를 억제하고 신도를 국교로하는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신사는 국가의 제사이고 초종교적인 것이 되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 종전후, 점령군의 신도지령에 의해서 해체, 신사는 종교로써 국가권력을 이탈하여 재출발하였다.
<야스쿠니신사>
야스쿠니신사는 메이지유신 및 그 이후의 국사(國事)로 순열한 사람들이나 전몰자 250만여명의 혼령을 합사 한 신사. 1869년 쇼우콘샤(招魂社)로써 창립, 79년 야스쿠니신사로 개칭하여 별관궁폐사(斃社)로 되었지 만, 전후에는 하나의 종교법인으로써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69년에 발표된 자민당의 야스쿠니신사법안은 현재의 야스쿠니신사로부터 종교성을 제거하여 내각총리대신의 감독하에 두고, 그 의식행사등의 업부에 필 요한 경비의 일부를 국비에서 부담한다는 취지로, 말하자면 국가보호유지를 바랐다. 이것에 대하여, 유족 의 비원, 국민감정등의 입장에서 나오는 찬성론과, 헌법제 20조(신교(神敎)의 자유, 정교의 분리), 제89조 (종교단체에 대한 공금지출의 금지)의 규정과, 국가신도로의 부활에 대한 경계등에 의한 반대론이 격렬하 게 대립, 자민당과 야당, 신사신도측과 제종교측의 논쟁으로, 국민적논의의 촛점이 되었다. 74년의 중의원 에서 강해채결되었고, 참의원에서 폐안(廢案)되었다.
<공식참배>
1984년 4월-자민당총무회는 수상,각료의 야스쿠니신사 공시참배등의 제경비의 국가부담등이 합헌이라는 해석을 당의 견해로써 결정했다. 말하자면 국가보호유지를 겨냥한 '야스쿠니신사법안'이 성립되지 못한 후, 자민당은 공식참배실현이라는 전술을 전환해 왔었다. 이 문제는 75년 8월15일에 수상참배부터 현존화되어, 당초에는 사적참배라고 했지만, 점차로 공식참배로 변해왔다. 85년 8월15일, 전후 처음으로 수상,각료의 공 식참배가 이루어졌다. 이것에 대하여 국내외로부터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다. 외교상의 배려가 있었는지,당 시의 나카소네수상도 춘추의 '예대제'에는 참배를 포기했고, 86년 이후에는 8월15일에도 수상의 공식참배 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신종교>
19세기 들어와서, 전통적인 불교나 신도의 교단에서 독립하여 민중을 짊어지는 역활을 하는 많은 종교집단 이 발흥하였다. 메이지시대에는 그 대부분이 교파신도제도의 틀에서 활동하는 것만을 인정받았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다시쇼우 이후에는 이 집단들이 다양화 하면서 세력을 넓히고, 전후에는 국민의 10% 를 넘는 사람들이(추정) 그 어느쪽에 소속하기에 이르렀다. 이 집단이 신종교이다. 그러나, 학자들에 의하 면, 1900년 전후의 시기를 기점으로 나누면, 이 이전에 성립한 천리교, 대본교등은 ZUSUDS민중종교라고 부 르며, 영우회,생장의집, 창가학회등 그 이후에 성립된 것을 ZUSUDS신흥종교라고 부르는 일도 있다.
<교파신도>
종전전에 허가를 받은 13개의 신도계의 종교집단. 신사신도에 대치하고 있다. 신도대교, 신도수성파, 출령 대사교, 흑주교, 천리교, 김광교 등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에 걸쳐서 종교로써의 체제가 정립되었고, 교조, 교의, 교회를 가지며, 이전부터 있었던 민속종교(특히 산악종교)등의 집단을 끌어모은 연합체등가 그 주요 한 교파신도들이다.
< 참고사진 별첨--2장 : 일본신사의 모습>
야스쿠니신사참배문제로 한국, 일본, 중국이 떠들썩합니다.
왜 문제가 되는걸까요?
다른 신사라면 상관없겠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2차대전의 전범의 유패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신사라면 우리가 열받을 필요가 없겠지만 야스쿠니 신사에 절하고
예를 갖추는 것은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에게 식민지라는 고통을 준
당사자의 넋을 기리는 행동이므로 우리나라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어떻게 보면 일본인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일본에서는 전쟁이 외세에서 아시아를 독립시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기 때문에...
[야스쿠니 신사]
일본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區]에 있는 일본 최대의 신사.
구분 : 신사
설립연도 : 1869년
소재지 : 일본 도쿄 지요다구
설립목적 : 황군의 혼령을 달래기 위한 국가 신사
주요활동 : 태평양전쟁 전몰자 246만여 명의 위패 안치
규모 : 9만 9000㎡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일본 도쿄[東京]의 한가운데인 지요다구[千代田區] 황궁 북쪽에 있는 신사(神社)로
8만여 개에 달하는 일본 전역의 신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신사 중의 신사로 불린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인 1869년 막부(幕府) 군과의 싸움에서 숨진 영혼을
'호국의 신'으로 제사 지내기 위해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의 명칭은 도쿄 쇼콘샤[招魂社]로, 일본 전역에 세워진 쇼콘샤 가운데 황실이 직접 납폐하는 으뜸 신사였다. 이후 쇼콘샤는 일본의 대외침략과 발맞추어 국가신도의 군사적
성격을 대표하는 신사로 자리잡았고, 세이난[西南]전쟁 2년 뒤인 1879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말 그대로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즉 호국신사이자 황국신사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몰자를 호국의 영령으로 제사하고, 여기에 천황의 참배라는 특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전쟁 때마다 국민에게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를 고무, 침투시키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 전몰자들은 천황을 위해 죽음으로써 생전의 잘잘못은 상관 없이
신(神)이 되어 국민의 예배를 받았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떠났을 만큼 모든 가치의 기준을 천황에 대한 충성 여부에 두었고, 따라서 야스쿠니신사의 제신(祭神) 원리는 국민의 도덕관을 매우 혼란하게 만들었다.
천황을 위한 죽음은 대부분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서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는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로 신화의식을 조작해 야스쿠니신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총사령부는 야스쿠니신사의 호국적 성격을 알고 단순한 종교시설과 순수한 전몰자 추도시설 중 하나를 택하라고 일본에 강요, 일본은 종교시설을 택하였지만, 야스쿠니신사의 특수한 기능인 전몰자 추도시설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지는 못하였다.
1947년 일본은 신헌법에서 정교분리를 규정한 뒤에도 야스쿠니신사가 종교시설이자
전몰자 추도시설임을 인정하였고, 1960년대 말부터는 야스쿠니신사를 국가의 관리 아래
두자는 법안을 계속 제출하였다.
비록 여론에 밀려 번번이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갈수록 이러한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1978년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합사되는 일이 발생하자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보수 우파 세력은 'A급 전범은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일 뿐, 일본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부채질하였고, 일본 정부 역시 후생성이 중심이 되어 민관합동기구가 결정한 일일 뿐이라고 발뺌하였다.
1985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참배하였고, 2000년에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 지사가, 2001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공식 참배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부활시키고 있어 주변국뿐 아니라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2001년 현재 야스쿠니신사에는 총 246만여 명의 전몰자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고,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무라 에키지의 동상, 대형 함포 등 각종 병기,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神風] 돌격대원의 동상, 전함 야마토의 특대형 포탄, 군마와 군견의 위령탑, 제로센[0戰] 전투기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유물과 전범의 동상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전시되어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상징인 흰 비둘기가 평화를 의미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시물들은 전쟁과 전투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어 전쟁박물관인지 신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비교종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가학회(남묘호렌게교) (0) | 2015.04.16 |
---|---|
셰계의 종교 (0) | 2015.04.08 |
한국을 향항 이슬람의 포교 전략 (0) | 2015.03.27 |
이단이 만든 기독교카페를 주의하라 (0) | 2015.03.23 |
다원주의 비판 (0) | 2015.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