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사기

안명애 2020. 8. 8. 13:17

사기(詐欺)

사기(詐欺)는 절도(竊盜) 강도(强盜)와 다르다

비록 속임수를 쓰더라도 재물을 쥔 자의 뜻에 따라 건네받지 억지로 빼앗는 게 아니다.

공갈과도 구별된다. 달래고 속여서 받지 위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남의 손에 있는 재물을 앗는 것이다.

내 손안에 있는 남의 것을 내 소유로 만들면 횡령이다. 사기죄는 그만큼 오묘한 구석이 있다. 그래서 법조에선 사기당하면 두 번 바보 된다는 말이 있다. 돈 날리고 마음속의 한탕주의까지 들키기 때문이다.

사기꾼은 한탕을 꿈꾸지 않는 건전한 이에게는 잘 붙지 못한다.

루소의 말처럼 [우리 자신을 속이는 건 항상 우리들]이고, 괴테가 탄식하듯 [남에게 속는 게 결코 아니요 자기가 자기를 속일 뿐인 것]이다.

[상대를 속이려 할 때만큼 잘 속는 때는 없다]는 17세기 프랑스의 문필가 로슈푸코의 말처럼 사기당하는 이는 한번쯤 되새겨 볼 일이다.

 

사기꾼

꾀쇠아비

변사또, 놀부, 뺑덕어멈.... 하면 나름대로 부정적 인간형이 연상되게 마련이다. 그런 한국인의 전통적 인간상 가운데 '꾀쇠아비'라는 게 있다. <흥부전>에 나온다.

가난했던 흥부는 초상난 집 부고 전하기, 출상할 때 명정 들기, 기생 서방에게 편지 전하기, 들병 장수 술짐 지기..... 별의별 험한 품 다 팔아도 살길이 없자 환곡(還穀)이라도 얻어먹을 셈으로 이방을 찾아간다. 그러나 환곡은 커녕 김부자(金富者) 대신 매 맞는 매품을 얻어 갖고 온다. 매 한 대 대신 맞는 데 1 냥씩 쳐 30 냥을 흥정하고 선금 닷 냥을 얻어 갖고 나온다.

나오면서 흥부는 이방의 귀를 빌려

'여보, 이런 말 내지 마오. 우리 동네 꾀쇠아비가 알면 먼저 가 매를 맞을 테니 소문내지 마시오'라고 귀엣말을 한다.

선금 닷 냥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먹는지라 수상히 여긴 꾀쇠아비, 엿들으니 흥부 마누라

'나 살려두고 매품 팔러 못 가니 죽여 묻고 가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옳거니, 매품 정보를 가로챈 꾀쇠아비가 흥부에 앞서 영문(營門)에 달려가 김부자 매를 대신 맞고 30냥을 가로채 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꾀쇠아비 때문에 매품도 못 팔고, 선금 닷 냥의 빚만 지게 된다.

이처럼 불행과 슬픔과 아픔에 빠진 사람의 곤경을 악용하여 한탕 후리는 비인간적 인간형을 '꾀쇠아비'라 한다. 여기에서 '꾀'는 교활한 지혜를 의미한 것 같다.

유괴 사건이 일어나면 으레 유리한 정보를 가진 체 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피해 가족의 심리를 악용하여 금품을 뜯는 꾀쇠아비가 수십 명씩 등장하게 마련이다.

실종된 자녀가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정보 값을 내라는 등, 애타는 실종자 가족치고 이 꾀쇠아비에게 사취당하거나 시달리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한다. 근간에는 국회의원 예비 입후보자들이 선심용으로 찾아주기 운동을 벌인답시고 관내 실종자의 집들을 찾아다닌다 하니 마음은 젯밥에 있는 시종 꾀쇠아비가 아닐 수 없다.

샘가에서 실족하려는 아이를 보고 어찌 달려가 구하려 않는 사람이 있으리요 하는 것이 맹자(孟子)라면, 샘에 빠지게 두고서 뛰어 들어가 구해 놓고 대가를 바라는 사람이 없지 않다는 것이 순자(荀子)다. 순자가 갈파한 꾀쇠아비는 그 나름대로 양심적이다. 구할 생각도 않고서 속임수로 돈을 후리는 꾀쇠아비가 양산되고 있으니 말이다.

흥부는 매품 선금 닷 냥만을 빚졌지만 현대의 한국인이 역사에 지는 부채는 5백, 5천만 냥이 더 넘고도 남을 것이다.

 

 

 

 

 

사업에 대하여

 

 

예측 못할 앞날

전 한남대총장 이원설박사의 이야기, 이 박사의 친구가 1990년 10월 서울을 방문했던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에게 [헝가리 공산독재자인 야노시 카다르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동독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길 기대합니다.

당신은 언제쯤 독일이 통일되리라 생각합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나 [동구정책의 설계자]인 그는 [우리가 인내를 가지고 한 10년을 더 기다린다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브란트수상의 이 말이 있은 후 10일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이박사는 말하고 있다. 누가 인간의 앞날, 역사의 전재를 예측할 수 있을까.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27:1).

 

 

 

 

 

사치(奢侈)에 대하여

 

 

현시점(現時點)을 모르는 사람들

아동문학가 윤석중(尹石重,1911-)씨의 동시(童詩)에 [넉 점 반]이라는 직품이 있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 시간과 동심에 얽힌 이야기를 詩的으로 엮어본 아름다운 글이다.

 

“ 아가가 아가가 가겟집에 가서

할아버지, 할아버지

지금 몇 시냐구요.

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거미 거동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해가 꼴깍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시의성(時宜性)을 알지 못한 꼬마의 천진난만함이 그대로 들어 있는 시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을 보면 이러한 시의성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시계는 저녁이 되어도 넉 점 반으로 착각하고 사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당면한 최대의 불행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점을 바로 아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 도대체 사치하고 방탕할 때인가? 정신없이 흥청망청할 때인가 말이다. 잘난 사람들의 목소리만 커질 뿐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제는 성직자들까지 현시점을 바로 알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죄를 짓기에 급급하니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사뭇 긴장감이 감돈다.

 

사치가 극에 달한 여자

아르헨티나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그들을 무조건 증오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기 집까지 저당 잡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웃 사람들이 좋은 것을 살 때마다 그녀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사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웃집에서 텔레비전을 구입하고 지붕 위에 안테나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녀는 이웃집 사람에게 지붕 위에 있는, 저 나무 같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그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장 텔레비전을 사고 싶은 욕구가 충동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빚이 산더미 같으니 그 빚을 갚기 전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소.”하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의 욕망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주가 되자 또 다른 이웃이 안테나를 지붕 위에 설치했습니다. 이제 주위에 텔레비전이 없는 집은 그녀의 집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대리점으로 가서 안테나만 사서 지붕 위에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텔레비전 수상기는 사지 못했습니다. 수상기는 없었지만 안테나만 꽂아도 그녀의 마음은 좀 가라앉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텔레비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테니까요.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著<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中에서-

안테나는 신앙생활의 외적인 것들입니다. 즉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순종의 측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아무리 엄격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수상기 없는 안테나 교인일 뿐입니다. 아들의 영이 없는 자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계명을 실천하려고 애를 쓴다 하더라도 죽은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우리는 충만해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온전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무엇이 우리에게 더 필요합니까?

 

일본 여성의 사치

자신의 몸치장에 일본 여성만큼 공을 들이는 여성은 없을 정도다.

일본 여자들은 치장에 돈을 참으로 많이 쓴다. 여자들의 장신구는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다고 한다.

지하철을 타고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현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들고 있는 백은 루이비통에 시계는 롤렉스 아니면 샤넬, 카르티에다. 물론 일본인들이 루이비통 헨드백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또 돼먹지 못한 프랑스 점원들에게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도 줄을 서서 그런 물건들을 사는 일본인들을 볼 수 있지만 정말로 일본인들의 일류 상품을 향한 열정은 사람을 당혹케 할 정도라고 한다. 해마다 감사의 마음으로 일본에 들르는 루이비통 본사의 부사장은 전 세계 루이비통 가방의 65%가 바로 일본 시장에서 팔리고 있음을 밝힌바가 있다.

그런 물건들을 구입하는 여자들이 대단한 부잣집 따님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저 보통 직장의 여자 사무원들이 대부분이라는 게 참으로 기이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두 달 치 월급쯤 되는 롤렉스시계를 차고 세린느 스카프를 두르고 반달치 월급은 되고도 남는 루이비통 핸드백을 들고 다닌다. 아마도 세계의 명품을 한 자리에서 모조리 볼 수 있는 장소는 일본의 백화점과 면세점 또는 일본의 지하철일 것이다.

그 아가씨들은 한 달에 2만 엔씩 48개월 할부로 산다고 한다. 물론 화장품도 백화점 카드를 이용해 몇 개월 할부로 구입한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면 월급이 모조리 월부와 카드 대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치장 비용으로 나가버린다.

멋 내는 돈을 버느라고 한 달 내내 또 고생을 한다. 그런 일본 아가씨들의 차림새는 그들이 그토록 얽매여 있는 루이비통 핸드백처럼 모두 같은 스타일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몸에 착 달라붙은 보디 콘셔스 라인의 미니스커트, 그리고 하이힐. 일본의 거리에서 하루 종일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런 아가씨들이다.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옷만 다를 뿐 하고 다니는 차림새는 구분조차 되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다만 비싸게 주고 샀다는 자기만족과 그 비싼 물건을 몸에 휘갑으로서 만족하고 멋쟁이 대열에 끼었다고 생각하는 일본 여성만의 독특한 멋 내기다.

명품을 몸에 지니고 귀족들이 입는 옷을 입었다고 귀족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귀족과 같은 품위와 고상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 멋 내는 것을 보면 속은 다 낡고 구멍 난 속옷을 입었을망정 겉만 화려하고 돋보이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요즘 형형색색 예쁜 모양의 속옷 선전이 텔레비전에서 자주 나오는가 보다. 속부터 멋쟁이가 되라고.......

 

허영

제이콤이라는 작가가 쓴 [원숭이 손]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떤 영국인 노동자가 여러 해 동안 인도에서 일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 동안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이상한 물건을 하나 사왔습니다. 그것은 마술사의 주술이 걸려 있는 [원숭이의 손] 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원숭이의 손]을 잡고 자기의 소원 세 가지를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국인 노동자는 이것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짐을 정리한 후 [원숭이 손]을 붙잡고 첫 번째 소원을 말했습니다.

?지금 나에게 200파운드의 돈을 다오.?

얼마 안 돼서 낮선 사람이 찾아와서 200파운드의 돈을 주었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이 돈이 무슨 돈입니까??

?당신 아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기계에 끼어 죽었기에 부의금을 가져왔습니다.?

대답을 들은 그는 너무나 안타까워서 [원숭이 손]을 붙잡고

?제발. 내 아들을 돌려주시오?라고 애걸했습니다. 마침내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처참한 유령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고통 하는 아들의 유령을 본 그는 마침내 세 번째 소원을 말했습니다.

?내 아들을 편히 쉬게 해주시오.?

이 이야기는 작품 속에 나오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영국인 노동자, 그는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술사의 주술이 걸린 [원숭이 손]같은 허영과 과욕에 사로잡혀 헤어 나올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숭이 손]을 통하여 물질과 명예와 향락, 인기와 장수하기를 바라는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주술 걸린 원숭이의 손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주술 걸린 원숭이 손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입니다.

 

 

 

 

 

사 탄 에 대하여

 

 

뱀,

요즘엔 뱀을 조각한 팔찌를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인들을 외국에 나가면 많이 볼 수 있게 된다.

세삼 뱀을 생각해 본다.

뱀은 차고 영리한 동물이다. 그러기에 녀석은 무척이나 교활하다. 한 입에 두개의 혀를 지니고 있기에 참과 거짓을 부담 없이 말할 수 있는 거짓의 상징이다.

뱀은 어느 동물보다 유연하고 날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지만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표독스러움과 의뭉스러운 측면을 공유하고 있다.

뱀은 곧잘 자기의 허물을 벗는다. 무릇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거듭 태어난다는 상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뱀의 경우는 그가 벗어던진 허물 때문에 감격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 까닭은 허물을 벗고 태어나는 것은 더 크고 싱싱한 뱀이기 때문이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방이 되고, 굼벵이가 허물을 벗은 다음 매미가 되는 식의 변신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실망만 안겨다 주는 존재다.

 

뱀의 눈을 보라

언뜻 보면 거기에 자비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유의해서 보면 그 속에 담겨있는 것이 증오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지상에 있는 무수한 동물들 가운데 유독 뱀이 사탄의 상징적인 존재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왜 여인들은 징그럽고 상징마저 좋지 않은 뱀의 형상을 자기네 액세서리로 삼아 몸에 걸치고 다니는 것일까?

서기 79년 8월 24일. 도시 뒤에 있던 베수비오(vesuvio)산이 화산 폭발을 일으킨 뒤 그 재와 용암에 완전히 파묻혀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던 폼베이(pompeii)는 1709년 이래 오늘날까지 꾸준히 발굴 작업이 계속되어 그 당시는 문화와 문물을 우리 눈앞에 적나라하게 펼쳐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 출토된 것 중에 우리의 눈을 유난히 자극하는 것 하나가 있다.

바로 황금으로 만든 뱀 팔찌다.

지극히 호화스럽게 살고 음란하기 그지없었던 당시의 로마,

하나님의 말씀이 발붙일 수 없었던 곳, 참된 진리를 말하고 옳고 바른 삶을 살려던 초대 크리스천들을 무자비하게 잡아 죽이던 곳이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의 최고 책임자인 티투스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역사상 전무후무한 재앙을 당해 멸망을 당한 것이다.

바로 그곳의 기름진 여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뱀장식,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실로 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아마 소돔과 고모라의 여인들도 뱀을 무척이나 좋아했으리라 생각하면서 유난히 뱀을 좋아했던 클레오파트라를 떠올리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자연히 본능적인 충동에 따라 살게 마련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자연스럽게 사탄의 충실한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에도 유난히 뱀을 좋아한 여인이 있었다. 우리의 조상 하와가 바로 그 여인이다.

이렇게 사탄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누구의 강요 없이도 스스로 사탄의 상징물을 만들어 달고 다니면서 사탄의 종 된 자신의 신분을 마음껏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의 비즈니스

사탄은 이제 비즈니스를 그만 두려고 했다. 그래서 자기가 그래서 그동안 사용하던 모든 연장들을 전부 경매에 붙이기로 했다. 사탄이 자기의 사용하던 모든 도구를 다 경매한다는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다.

마귀는 멋진 빨간색의 양탄자 위에다 그동안 자기가 인간들을 미혹하고, 망하게 하고, 약하게 만들고, 타락시키는 데에 사용했던 여러 가지의 도구들을 나란히 진열해 놓았다. 그것들을 보니 거기에는 시기심이라는 도구를 비롯해서 고집, 욕심, 보복심, 미움, 교만, 혈기 등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마귀는 신자들의 마음에 이러한 도구들을 한 가지씩 사용해서 그들을 시험에 들게도 하고, 유혹에 빠지게도 하고, 타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모든 연장들이 놓여있는 저 맨 끝에는 은으로 된 쐐기, 즉 틈을 내어서 박는 도구가 하나가 따로 놓여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것은 무슨 연장인가고 사탄에게 물에 보았다. 그러자 사탄이 설명을 했다.

“저 도구는 보시는 대로 은으로 된 쐐기이지요. 저것은 내가 가장 아끼는 것입니다. 나는 저것을 아주 빈번히 사용했지요. 보세요, 저것이 얼마나 번쩍이고 빛나는가 말입니다. 저것은 여기에 있는 모든 연장들보다도 가장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궁금해 하며 사탄에게 불어보기를 도대체 그 연장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마귀가 자못자랑스럽게 대답을 했다.

“저 도구의 이름은 ‘실망’이라고 하는 연장이지요. 어느 사람이 그리스도를 섬기며 봉사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실망’이라는 쐐기를 그의 마음에다 박으면 그는 곧 무기력해지고 아무 쓸모없는 신자가 되고 맙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그의 하는 일에서 기대하는 만큼의 결과를 못 볼 때, 교회의 집사가 수고한 열매를 못 거두고 있을 때, 또 교회의 다른 일군들이 이와 같은 형편에 처하게 될 때, 나는 즉시 저 실망이라고 하는 은 쐐기를 그들의 마음에다 박지요. 그러면 그 실망이라는 쐐기가 마음에다 틈을 내게 되어 그 틈으로 여러 가지의 것들이 다 몰려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곧 영적으로 미혹을 받아서 타락하거나 쓰러지게 됩니다.”

잠시 후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 하나가 질문을 했다.

“혹시 그 연장을 써도 넘어가지 않던 신자는 없나요?” 그러자 사탄이 대답을 했다.

“이 연장을 써도 넘어가지를 않는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소수이지만 나의 이 특별한 연장을 써도 효과가 없이 그들은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면 항상 자기들의 가슴 속에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는 신자들입니다. 그들은 대개가 겸손한 사람들이더군요. 그 신자들은 자기들의 생명과 이 삶의 모든 축복에 대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실감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내가 아무리 저 빛나는 쐐기로 미혹을 하고 그 신앙을 타락시키려고 해도, 오히려 점점 불이 붙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일에 대하여 마음에 항상 감사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요!”

당신도 사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멋진 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탄의 질문

하루는 하나님께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사탄이 묻기를 "당신은 빛을 만드시고 빛을 보니 '좋으니라'하시고 땅과 하늘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더라'하셨는데 어찌하여 사람을 만드셨을 때는 '사람을 보니 좋으니라'고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나는 빛과 땅, 하늘을 만들 때는 완성품으로 만들었으나 내가 인간을 만들 때는 완성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니라"라고 대답을 하였고, "그것을 인간들에게 맡겼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미완성에서 완성품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악마의 회심의 미소

루이스는 유명한 [악마의 편지]라는 책을 통해서 마음밭 비유를 가장 탁월하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영국의 노신사가 어느 날 대영제국의 도서실을 찾아갑니다. 그 노신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실에 들르는 그의 습관적인 태도로 그날도 도서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 가지 책 중에서 손에 쥐어진 책이 신앙에 관한 책이었고, 이 책을 읽어 보다가 노신사의 마음속에는 갑자기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노신사에게 그 순간 악마가 찾아옵니다. 악마는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점심시간이야, 뭘 그렇게 생각해.?

그 순간 그는 잠시 전 마음속에서 생각하려고 했던 하나님에 관한 의식을 누르고 식탁으로 갑니다.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나는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가??

이때에 악마는 그 마음속에 다시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 악마에게 감동을 받은 노신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밥 먹는데 뭘 골치 아프게 생각을 하나. 우선 식사를 끝내고 보자.?

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생각이 어렴풋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노신사는 사단의 역사를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뭐.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 오늘은 너무 바빠. 집에 가서 할 일이 많아.?

그는 밖으로 나와 버스를 탑니다. 버스 좌석에 앉자 신문을 읽으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루이스는 이런 인상 깊은 그림을 그립니다.

마치 자신에게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버스를 타고 가는 이 노신사 뒤에서 악마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고 말합니다.

 

 

조급해진 공산당

90년

지난 5월23일자 연변일보(중국조선족자치구신문)에 실린 [한당원의 퇴당(탈당) 을 두고]란 제하의 기사에는 거의 20년 동안 공산당 당원이었던 한 당원이 당을 퇴당하고 하나님을 믿는 길을 택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 신문은 퇴당이유에 대해병마에 시달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신론적인 지배사상이 그의 머리에 침투되어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점차적으로 사라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입당시의 선언은 공상이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현실적이냐고 반문하면서 공산당원은 장원한 목표인 공산주의 위업을 위해 분투하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물질이 풍부하고 사람들의 인식 고도로 제고된 문명사회를 이 세상에 내놓자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그 신문은 이러한 취지아래 입당하여 오랫동안 일해 온 한 당원이 당리당론 학습을 중시하지 않고 당 생활에 대한 열성이 결핍하다보니 당원이라는 것을 망각했다고 지적하면서 결론적으로 [개혁 개방의 물결이 더 세차게 일고 있는 오늘 매개 당원들이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재인식 재학습을 거쳐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인식을 보다 높임으로써 자기의 신앙을 굳혀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상의 글을 대충만 음미해 보아도 공산주의 사회는 확실히 조급해진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다.

90년 지난 7 월 1 일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합된 것은 공산주의의 목표가 물질이 풍부하고 사람들의 인식이 고도로 제고된 문명사회를 이 세상에 내놓자는 것이 실패하였다는 확인이라고 볼 때 한 당원의 탈당을 위협적으로 비난하고 논박함은 역시 공산당의 세기말적 몸부림처럼 보여서 비록 병석에 누워서라도 공산당을 탈당하고 교회에 들어오는 모습에서 오늘의 세계를 보는 것 같다.

 

 

 

 

 

생각에 대하여

 

 

생각

오래 전에 서반아왕 가운데 페르난디 5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이 어떤 점쟁이에게서 "왕께서는 마드리갈이라고 하는 곳에 아예 가지 마세요. 마드리갈에서 장차 왕은 죽게 됩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곳에는 왕의 별궁이 있었는데 왕은 무서워서 자기의 좋은 별궁을 지어놓고도 21년 동안 거기를 한 번도 못 갔다. 그러다가 한 번은 서반아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조그만 촌락에서 하룻밤 자면서 그만 병이 났다. 왕은 이 지방이 어떤 지방이냐고 물어 보았다. 옆에 있던 신하가 "이 곳은 마드갈레입니다"고 대답했다.

마드리갈과 비슷했다. 사실은 마드리갈이 아니고 그와 비슷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왕은 "아이고 나는 죽겠구나" 하더니 며칠이 안 되어 죽었다고 한다. 인생의 실패와 성공, 죽음과 삶의 갈림길은 언제나 자기의 생각 여하에 달려 있다.

 

 

 

 

 

 

선물에 대하여

 

 

"인간이 동물 중에서 가장 예지적인 것은 손을 가졌기 때문이다"는 말은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말이요, "손은 도구중의 도구요 정신은 현상중의 현상이라"는 말은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의 말입니다.

인간의 지혜의 산물이 모두 손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손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선물중에 가장 귀한 것이다.

 

 

 

 

 

 

 

설교에 대하여

 

 

개인에게 말하듯

존 D. 록펠러는 그의 목사인 포스딕의 천재성을 극찬하며 이렇게 평했다.

그분은 모든 회중들에게 마치 개인적으로 각자에게 말하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데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주일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합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내 문제를 이해하실 수 있으실까? 마치 내가 쓴 편지를 읽으신 것 같단 말이야."

통찰력 있는 설교는 사람들에 대해 알아서 복음의 관점에서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데서 온다.

 

유명한 연설

링컨 대통령이 게티스버그에서 연설하기로 정한 후 본인도 잘해 보려고 애썼고 국민들도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날이 되니 몸의 컨디션이 좋지를 않았다. 그래서 한 5분 정도쯤 하고 그쳤다. 본인은 물론 백성들의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의 별로라고 생각했던 말이 세월이 지날수록 유명한 연설로 남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마지막 말 곧 "백성을 위한 백성에 의한 백성의 정치는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다!"고 한 말이 바로 민주주의의 원리를 설파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당시에는 별로 신통치 않던 것이 먼 훗날에 유명한 말로 남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도 그럴 때가 있다.

 

 

 

 

 

성공에 대하여

 

 

결점을 잘 이용하자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박이가 되는 사람에겐 어딘지 성격적으로 한 쪽으로 기운 데가 있다. 성격상의 결함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결점이 있다 해서, 사회적으로 출세 못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름난 학자나 예술가 중에는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나폴레옹도 어릴 적에는 다른 아이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성미를 가진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학문에나 예술부문에 있어서, 남이 못할 큰일을 이룩한 것은, 그 결함이 외부조건과 조화를 얻었기 때문이다. 즉, 공치기를 한다든지, 또는 산으로 바다로 놀러간다든지 하는 대신, 책 읽기에 취미를 붙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가진 결점을 결점으로써 끝내지 않고, 새로운 정세에 적응시키고 조화시켰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결점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결점을 어떻게 이용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결점을 잘 이용함으로써 그것이 도리어 성공의 발판이 될 수 있다.

 

맥베드의 최후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 상연 시간이 제일 짧으면서, 템포가 빠르고 구성이 완벽에 가까운 희곡이 바로 맥베드입니다.

이 희곡은 살인 장면의 묘사가 너무 예리하게 묘사되었고 또 사건의 대부분이 살해와 죽음이 주는 이미지로 꽉 차 있어서 좀 살벌한 의식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맥베드를 읽거나 공연을 보면 다음에 두 가지 커다란 확신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는 모함과 살해의 동기가 자기 출세의 방법이 될 때 더 할 수 없이 잔인하고 비참하게 진행되는 것이며 그 대가는 반드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진리를 알게 됩니다.

다음으로 인간이란 어떤 일에든지 자신의 운명과 인간적인 한계를 꼭 알아야 하겠다는 결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개선장군으로 돌아오는 맥베드가 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게 되지만 맥더프 장군이 이끄는 적군에 의하여 파멸되고 전사하고 맙니다.

바로 그 맥더프장군이 동료 뱅코우의 유복자가 자란 것임을 알게 되지만 자기의 운명이 다하는 것을 어찌 할 길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맥베드는 버넘의 숲을 쳐들어 행군하여 오는 맥더프 장군에게 살해되고 짧은 그 인간의 역사가 닫힙니다.

순리대로 살아야지 억지로 올라서려고 바동거리면 오히려 분수에 맞지 않은 결말을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성공

미국의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는 그의 말년에 병균을 두려워하여 닭고기와 주스만 마셨으며, 이발사를 두려워하여 머리를 엉덩이까지 내려뜨리고, 손톱도 안 깎고, 매의 발톱처럼 긴 상태로 살다가 결국 영양실조 때문에 죽고 말았다.

모두들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기는커녕 오히려 법정에서 그의 유산을 빼앗으려는 싸움만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하워드 휴즈! 그는 미남이요, 억만장자요, 신념의 사람이었지만 하 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수많은 여성을 편력했지만 아무에게도 진실한 사랑을 주지 못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성공 그 자체가 사랑을 성취 하는데 목적을 두지 아니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공을 위한 태도

커밍 워크라는 사람은 성공의 요인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성공의 요인으로 첫째는 지능이 높아야 하며, 둘째는 지식이 있어야하며, 셋째는 기술이 좋아야 하며, 넷째는 태도를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요인 중에서 성공적인 삶에 대하여 적어도 93% 이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간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지혜로운 대답으로 결국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태도가 성공의 열쇠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공의 비결

쎄인트 루이스의 유명한 구두(신발)사업의 성공자인 부라운씨를 방문한 어떤 목사가, 어떻게 이처럼 대성공을 하였는지 그 사업비결이라도 있으면 말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라운씨는 목사를 자기 사무실로 인도하고 들어가 벽에 부쳐놓은 표어를 보여주었다. 그 표어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는 하나님! 둘째는 가정! 셋째는 구두!"

이것이 제화 및 판매의 대성공자 부라운의 성공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말씀은 진실하신 것이다.

 

성공의 절대비결

아더 디마스 장로는 미국의 기독실업인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신앙과 경영과 재력 면에서 성공한 대표적 인물이다. 내게도 회관 지으라고 50만 불(3억 원)의 돈을 준 일이 있고, 유산을 정리하여 약 7억불의 선교재단을 만드는 중이다.

그의 간증 가운데 절대 성공의 비결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그 자녀가 성공하고 형통하기를 원하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원칙대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한다.

성공의 비결은 주님을 위하여, 주님으로 하여금 사업주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1.주일을 철저히 성수하라

2.하루의 첫 시간은 기도로 주님께 바치라

3.십일조를 드리라

4.더 많은 시간, 더 많은 돈을 주님을 위해 쓰라

5.예수님이 가정의 주인이 되게 하라

6.사업의 모든 문제와 필요를 주님이 해결케 하라.

 

성공적인 삶의 철학

어떤 심리학자가 성공적인 삶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로, 그 앉은 자세부터 다르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맨 앞자리에 앉아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둘째로, 눈동자가 다르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그 눈동자가 기운이 있고 초점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눈동자에 확신이 있고 빛이 납니다.

셋째로, 성공적인 사람은 말에 음성이나 표현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넷째로, 성공적인 사람은 걸음걸이가 확신에 찬 빠른 걸음으로 걷습니다.

다섯째로, 성공적인 사람은 시간을 잘 지킨다고 합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시간을 꼭 지킨다고 합니다.

 

아홉 부자들

1923년에 시카고의 애지와트 호텔에 부자 아홉 사람이 한 테이블에 둘러앉았었습니다. 그들은 미국에서 제일가는 부자들이었는데 그들의 소유는 당신의 미국의 1년 예산을 합해놓은 것만큼 그렇게 막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20세기의 신화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미국 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은 우리나라에서처럼 도박해서 버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아주 착실히 일해서 모든 것에 출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들의 상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박사가 되는 것보다 부자가 되는 것이 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돈을 아주 많이 번 사람은 그가 어떻게 해서 돈을 벌었든지 일단 인생 우등생으로 봐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 아홉 사람은 모든 것에 성공한 사람들이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인데 25년 후의 그들의 운명은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중 네 사람은 파산하므로 부도를 내게 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자 무일푼으로 국외로 도피했습니다. 그리하여 외국에서 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은 징역을 살다가 나왔는데 한 사람은 죽고 다른 한 사람도 곧 죽게 생겼답니다. 또한 나머지 세 사람은 자살해 버렸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처럼 그렇게 장면이 바뀐 것도 아닌데 불과 25년 후에 아홉 사람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애벌레들의 희망

애벌레가 한 마리 태어났습니다. 이 애벌레가 계속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면서 무수한 다른 애벌레와 함께 경쟁을 합니다. 밟기도 하고 짓밟히기도 하고, 또 한 무더기씩 엉겨서 무리지어 있으니까 이것을 넘어야 하고 그러면서 쭉 높이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꼭대기로 꼭대기로 오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서 뭐가 있는지 어떤 형편의 곳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올라갑니다. 그런데 더러 내려오는 애벌레들이 '올라가 보아야 아무 것도 없어' 그래도 애벌레들은 밑으로부터 계속 올라갑니다.

그중에 두 마리의 애벌레가 꾸준히 올라갑니다. 노랑 애벌레와 몸통에 줄무늬 있는 애벌레입니다. 그러다가 노랑 애벌레는 오르기를 중지하고는 그냥 내려와 버렸고 오로지 줄무늬 있는 것만 계속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줄무늬 애벌레가 꾸준히 그리고 부지런히 올라갔던 곳은 이 애벌레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이 애벌레는 밑에 내려와서 조용히 고치를 치고 그 속에 들어가 있다가 얼마 후 찬란한 나비가 되어 날았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우리의 성공이라는 것이 애벌레의 장난과 같습니다. 계속 높이 올라가려고 버둥댑니다. 나비가 되어서 날아다니면서 보니까 모든 땅위의 애벌레들이 산더미처럼 뭉쳐서 높이 올라가려고 애쓰고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중단없는 전진

실패의 연속이 결국은 성공으로 바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832년에 그는 실직자가 되었습니다. 1833년에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했습니다.

1836년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도 그 해에 신경성 질환으로 고생했습니다. 1844년에는 국회 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1849년에 토지 등기소 직원으로 취직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1856년에는 상원의원선거에서도 낙선했습니다. 또 부통령 지명전에서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860년, 그는 마침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는 시민전쟁으로 북군에게 배척받고 남군에게는 원망을 사는 가운데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혼자 모든 결정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집무실에 따로 기도실을 만들어 놓고 기도했습니다. 대통령직은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그는 자객의 총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바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공적인 대통령 중의 한 사람인 에이브러햄 링컨이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이 보장받을 수 없는 광야의 행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야 합니다. 약속의 소망을 따라 게으르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끝없이, 중단 없는 전진을 해야 합니다.

 

참 성공의 기쁨

어느 날 유명한 목사님의 아들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를 찾아와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아버님은 은퇴하셨는데 전과 다름없이 늘 화가 나 계신 것 같고. 또 우울해 하십니다.”

나는 왠지 불길한 느낌을 주는 이 말에 놀라 차근차근 이유를 캐물었다. 청년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늘 .일에 중독되어. 살았던 아버지가 늘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고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했다고 계속하여 설명했다. 아버지는 목회를 하는 동안 줄곤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을 싫어했고 자신보다 더 .훌륭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부의 한 작은 도시에서 내가 만났던 목사는 이 경우와 얼마나 대조적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섬기는 교회는 마을 공용 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고. 그의 차는 털털거리는 낡은 차였으며. 트레일러를 개조해서 만든 그의 집 역시 낡아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내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좋은 아내가 있고. 섬길 교회가 있고. 또 햇빛 비치는 일 년 365일의 날들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는 그 날 하루 종일 일주일간의 전도 여행에 나선 나를 도와주었다.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역자들은 제 아무리 많은 일들을 이루었어도 결코 참 성공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늘 “.했으면 좋았을 걸”하는 생각 속에서 살고 또 최악의 상황을 두려워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는 자연히 시기심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른 사람의 행운을 부러워하게 만들거나 그들의 불운에 쾌재를 부르게 만든다. 이런 가련한 유형의 사람은 성공을 체험할 수 없다.

 

처세술

한국인의 처세술에 있어서 매우 소극적이면서 자신을 은폐해버리는 소심성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아니 나 자신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면 음식을 잔뜩 차려놓고도 .차린 것은 없지만..하고 말합니다. 배가 고파 허기지면서도 냉수를 마시고 이를 쑤시며 배가 고프지 않은 척하는 실속 없는 체면을 보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좋은 것을 보고 좋아하면서도 싫은 척 하고. 갖고 싶어 하면서도 사양하고. 잘 할 줄 알면서도 못한다고 하는 거짓말을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은 탁 트여있지 못하고 현실에 적극성이 없이 소극적으로 은폐하거나 포기하거나 외면하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정말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혼돈되고 그러니 이래도 좋고 저래도 그만이라는 처세가 되고 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예는 예 하고 아니면 아니다 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처럼 거짓 없는 자기표현의 적극적인 처세가 필요합니다. 사양하노라고. 겸손 하노라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거짓말을 미덕으로 삼는 처세는 결국은 참과 거짓을 혼돈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나도 몰라 하노라.. ..해서 무엇 하리오.. .허허 웃고 말리라.. .아마도 세상일이야 다 이런가 하노라. 하는 매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활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처세는 문제입니다. 그러한 처세는 진리를 가리고 진취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는 예 하고 아니면 아니다.라고 하는 분명한 처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진리로 보고 그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 때 거기에 평화와 행복과 참 생명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생명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토마스 모나한

미쉬건 주 잭슨에 있는 성요셉 고아원에 불쌍한 형제가 살고 있었다. 타미와 형 지미였다. 중학생 나이가 되자 그들은 양부모를 따라 헤어졌다.

타미군은 양부모 밑에서 중학생이 되었는데 문제아동으로서 여러 번 사고를 일으켜 퇴학 처분되었다. 교문을 나설 때 타미군의 머리에 고아원에서 자기를 지도해 준 베라다 수녀의 말씀이 울렸다. 베라다 수녀는 고아원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너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큰 별을 따도록 노력하라 (Strive for a great star)"고 교훈했던 것이다.

타미군은 새로운 용기로 갖고 피자 가게에 취직했으며, 열심히 배워 피자 한 개를 11초에 반죽하는 놀라운 솜씨를 발휘했다고 한다. 오늘날 미국의 피자연쇄점 중 둘째로 큰 도미노 피자는 1,400 점포를 소유하고 있는데 퇴학당한 고아 타미군 즉, 토마스 모나한 (Thomas Monaghan)씨의 창설이다.

모나한씨는 디트로이트 프로 구단을 사서 1984년 시즌에는 프로야구의 정상월드 시리즈를 따내는 정력도 보였으며, 현재 미국 천주교의 유명한 평신도 대표자로 깊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모나한씨가 자주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청년들이여, 그대의 생애를 하나님께 맡기고 단 한번 크게 승부를 걸라."

 

 

 

 

 

 

성장에 대하여

 

 

불완전의 가치

스펄전 목사님께 한 성도가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완전한 교회를 하나 소개하여주십시오. 그런 교회를 다니고 싶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런 교회가 있으면 제게도 소개하여주십시오. 나도 목회를 그만두고 그곳에 가서 한 사람의 회원이 되고 싶습니다” 하면서 덧붙이기를.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런 교회를 발견하거든 당신은 제발 그 교회의 회원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교회 회원이 되면 아마 당신 때문에 그 교회의 완전함이 깨어질지 모르니까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땅에 완전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문제가. 인간이 모인 교회에는 언제나 불완전이 있지만 사실은 그 문제. 그 불완전 때문에 인간은 완전을 향해 걸어가게 되는 동기가 부여됨을 알 때.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불완전이 아니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818년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오스트리아의 한 작은 시골 교회에 시무하는 26세의 젊은 모올 신부에게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성탄절에 연극을 발표할 준비를 하는데 그만 하나밖에 없는 풍금이 고장이 났습니다. 수리공이 온통 분해하여 늘어놓았지만 성탄절까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모올 신부는 근심 중에서 밤에 마을을 보니 참 고요했습니다. 그는 시를 써본 일이 없었지만 깊은 감동을 받아 한 편의 시를 종이 위에 썼으며. 그것을 31세의 학교 선생이면서 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인 구루버에게 작곡케 하여 연주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작사 작곡의 역사이며 불린 이유입니다.

이 노래는 오늘날 성탄절에 가장 많이 애창되는 성탄곡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에 어려움이 없었다면 위대한 이 곡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와 불완전은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그 문제와 불완전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문제는 성장하는 길이 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의 위로의 말씀입니다.

 

사과나무와 성장

우리가 미국 중서부에 살았을 때 매년 9월이 되면 우리 식구들은 미시간의 쓰리 리버즈(Three Rivers)에 있는 스토우버 과수원(Stover's Orchards)을 찾곤 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깔끔하게 상표가 붙여져 있는 사과나무들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바구니에다가 매킨토쉬와 와인샙과 로움(Mackintoshes, Winesaps and Romes: 사과의상표들)으로 가득 채웠다.

그 과수원의 뒷쪽에는 사과가 열리지 않은 나무들의 죽 늘어서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곳에는 사과가 전혀 열려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나무들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단지 어릴 뿐이었다. 어떤 나무는 높이가 5 피트도 채 못 되었다. 나이가 더 든 나무들이 숙성해서 많은 사과를 맺고 그 무게로 나무들이 축 늘어져 있는 반면, 이 어린 나무들은 그저 성장하는데 만 바쁜 것이었다.

만일 당신이 오늘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고 있고 당신을 변화시키는 그 분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다면, 당신은 정확히 하나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수준에 올라 있다. 열매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에 대하여 괴로워하지 말라. 나는 그 어린 나무들이 자기 자신을 더 오래된 나무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결코 보지 못했다. 성장은 하나의 과정이다. 그리고 성장의 각 단계는 하나같이 중요한 것이다.

 

성장하지 않는 생명을 보면서

결혼한 지 석 달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에 귀한 생명을 주셨다. 나는 병원에서 내 안에 2 .8센티미터의 6주 된 생명이 있음을 듣고 놀라움과 신비함 그리고 기쁨을 맛보았다. 우리 부부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찾아갔을 때는, 의사 선생님이 아기를 포기하자고 하실 만큼 아기의 성장이 멈춰져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데려가지 않으시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고통과 함께 아이를 데려가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허락하신 뜻이 분명히 있으리라 믿고 아멘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이일을 통해 성장하지 않는 생명을 보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아주 절실히 느꼈다. 성장하지 않는 아이를 보면서 얼마나 가슴 조였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그 성장하지 않는 아이가 바로 나였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성장이 멈춰진 내 아이처럼, 나는 하나님 앞에서 성장이 멈추어져 있었고, 또 비로소 나의 성장하지 않음으로 인해 가슴 조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의 성장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알았고, 또 그런 나의 성장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성장속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장시키는데 서두르지 않으신다는 명백한 사실을 깨닫는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빠르고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고 있다고 느낀다. 종종 초신자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당분간은 계속 그런 상태를 지속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건강한 성장이며 근본적인 성숙이라면 그런 성장은 계속되지 않는다. 하나님 자신이 보조를 수정하실 것이다.

존 다비는 이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첫 출발한 얼마 후 성도들을 홀로 남겨두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는 자신을 신뢰함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모세는 그때가 40세 때였다. 그는 처음 시도를 하자마자 도망해야만 했다. 바울은 그의 처음 간증 후 3년을 기다려야 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첫 간증을 인정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능력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을 의지할 때 더욱 성숙된 모습으로 훨씬 노련하게 영혼들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스트롱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 학생이 자기 학교 총장님에게 규정된 과정보다 더 짧은 과정을 밟을 수 없겠는가를 물었다. 총장님은 '물론 가능하네' 그런데 그것은 자네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가에 달려 있네. 하나님께서 참나무를 키우기 원하신다면 백년을 들이지만 호박을 키우기 원하신다면 육 개월밖에는 안 걸릴 테니 말일세.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자면 실제로 성장에 지름길이란 없다.

유성은 자신을 태우면서 잠깐 동안 빛난다. 그러나 별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빛을 내므로 항해자들은 이것을 의지하여 항해를 한다.

영국 수상 디즈레일리는 어느 날 하원에서 즉석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날 밤 한 숙녀가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즉석연설을 듣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당신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당신의 연설은 하루 종일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답니다.”

이때 디즈레일리는 이렇게 고백했다. “부인, 그 즉석의 말은 20년 동안 제 마음에 있던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성장

갓 태어난 아기는 눈은 떴어도 물체를 알아보자 못한다. 그러나 한 달, 두 달,시간이 지나면 물체의 색깔을 구분하고 아빠, 엄마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면 우리 속에 있는 미개인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갓난아기는 아무에게나 아빠, 엄마 한다. 우리 속에 있는 미개인도 그 눈이 성령에 의해서 밝아지지 아니하면 아무나 보고 아빠 엄마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과 신비의 대상을 보면 무조건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상령께서 역사하시면 점점 깨어나면서 진정한 영적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영적 차원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건전한 영적 기능이 성숙되어 가면서 사물과 역사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모든 사물을 과학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는 동시에 그 사물의 깊은 의미를 꿰뚫어 보게 되는 통찰력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있는 사람, 진실 되게 예수를 믿고 바르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성장한 것이다.

[이제 다 큰 것이다]

 

영적 어린 아이

제가 미국 신학교에 있을 때 어떤 흑인 학생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의 형제 여섯이 다 감옥에 가 있었습니다. 이 학생도 은행 강도를 하다가 3년을 갇혀 있었는데 거기서 복음을 듣고 6개월간 성경공부를 한 후 출감하자마자 신학교에 왔습니다. 그 학생은 아주 거칠었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믿은 지 6개월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옛날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신학교 기숙사에는 학생들 각자의 음식이 있었는데 이 학생은 냉장고를 열어서 아무 것이나 먹었습니다. 자기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있으면 무조건 먹어치우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먹었으니 도둑질인데 이 학생은 그런 생각도 없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학생들은 이 학생에게 “정말 예수님을 믿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어느 날 복도에서 그와 마주쳤는데 그가 “김 교수님, 어떻게 내가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느냐고 물으니까 6개월 전에 영접했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예수를 믿느냐?"고 하니까 정말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면 내가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네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은 말해줄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며 안도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그 순간에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영적으로 갓 태어난 상태입니다. 아이가 이제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마라톤 대회에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가 똥을 싼다고 “너 정말 세상에 태어났니? 세상에 태어났는데 왜 똥을 싸니? 왜 오줌을 싸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은 받았으나 신앙의 성장이 없었기 때문에 어린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영적 성장

주일 아침 공과공부 시간에, 이제 겨우 2년째 교사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신참 교사인 나는 변함없이 출석을 부르며 아이들에게 성경을 얼마나 읽었느냐고 질문하고 읽지 않은 아이들에겐 “다음 주엔 꼭 읽어” 라고 어른스럽게 타이른 뒤 공과를 시작한다. 성경을 몇 장 읽었느냐고 아이들에게 확인할 때 그중 한 명이 “선생님은요?”라고 되묻는다면 난 뭐라고 했을까. 자신 있게 '○○장'아니면 “응, 선생님은 좀 바빠서`...”

아마도 후자의 답을 하기가 쉽지 않을까. 교사라는 위치가 꼭 누굴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참으로 힘들게 느껴진다.

언젠가 버스가 길이 막혀 오랫동안 도로 위에 정차해 있을 때, 잠깐의 신호대기 중에도 기사 아저씨는 운전대 왼쪽에서 무엇인가를 자꾸 집어 들었다. 손바닥만 한, 낡아서 누렇게 변하긴 했지만 여러 가지 형광펜이 칠해진 책, 바로 성경이었다. 얼마나 찔렸던지. 환경이 사람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그건 일종의 자기와의 싸움에서 도피하려는 모습인 듯하다. 나는 교사로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성장해야만 할 나의 신앙을 기대한다면 이런 작은 일에 먼저 깨어져야 할 것이다. 아이들 앞에 떳떳하지 못한 교사가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그럴 수 있을까. 육적인 성장보다 더 중요한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나는 혹시 영적 성장을 멈춰버린 위험한 신앙인은 아닌지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본다.

 

영적으로 어린 사람

영적으로 어린 사람의 특성은 싸움질을 잘하는 것이다. 당을 짓고 분파가 심하다. 또한 세상 풍조에 쉽게 휩쓸리고, 문제를 만나면 도무지 헤어날 줄을 모른다.

 

영적 침체

선교 현장에서 믿음으로 섬겨왔던 한 선교사가 심각한 영적 침체로 인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도무지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제가 깨닫기도 전에 저는 침체되어 있었으니까요. 저는 결코 장래나 경제적인 문제. 건강이나 은퇴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 많이 걱정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걱정스럽고. 거의 1년 반 동안이나 계속 침체 상태에 있었답니다. 죄책감도 들고. 부끄럽기도 하고. 패배당한 느낌도 듭니다."

이 선교사의 경우는 약간 특별하다. 왜냐하면 이 선교사는 고립된 선교 현장에서 사역해왔기 때문에 초신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초급 단계를 제외하고는 더 깊은 성경 공부를 거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여러 일들로 매우 바빠서.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사탄은 너무나 간교해서.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일이 둔화되어 힘을 잃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영적 성장을 멈출 때. 사탄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의 믿음을 더욱 약화시키기에 주력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상태가 침체되면 감정적인 체험을 찾아 나선다. 감정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얼마간은 다시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침체 상태는 다시 시작되고. 옛 성품으로 말미암은 감정들은 또 다시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성찬에 대하여

 

 

주님의 식탁

워싱턴 장군의 사령부 산하에 있는 미군들이 뉴저지 주 메리스타운을 포위주둔하고 있을 때 그 부락의 장로교회에서 성찬식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장군은 교회의 목사를 방문하고 인사를 하면서 "목사님, 성찬식은 다음 주일에 있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이 다른 교파의 사람의 참석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목사는 반색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이것은 장로교인의 식탁이 아니고 주님의 식탁입니다. 장군님,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초대를 모두에게 전할 뿐입니다."

 

 

귀중한 성만찬

백 년 전 프랑스 혁명이 진행될 당시, 프랑스 의회에 의해 종교가 폐기되었고 주일은 지킬 수가 없게 되었으며, 목사는 숲 속으로 쫓겨났다. 그리하여 아무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예배를 행하거나 참석하지를 못했다. 그렇다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두 그 기간 동안 아무런 집회도 가지지 않았는가?

그것은 아니다! 때때로 심부름꾼이 집마다 다니면서 모임의 장소를 알리는 비밀 암호를 말해주었다. 그러면 밤중에 모두 같은 장소로 모였다. 그리고 목사 중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어느 때인가 군인들에 의해 습격을 당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그들을 일으키시라고 분명하게 약속하신 것을 믿고 있었다.

 

 

 

 

 

 

 

성취에 대하여

나를 사용하소서

뉴잉글랜드의 어느 봄날이었다. 죤 앨덴이라는 친절하고 활기찬 한 젊은이가 프리스실라라는 아름다운 아가씨 앞에 몸이 굳어져 서 있었다. 앨덴은 메이플라워호를 탄 사람 중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 소녀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일즈 스탠디쉬라는 플리먼스 선장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선장의 마음을 전하였다. 아가씨는 앨덴을 더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의 상관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왜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선 말을 하지 않는 거죠?" 가엾은 젊은이! 그는 얼마나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그는 그의 상관에게 충실함이 틀림없었다. 그는 결코 선장대신 자신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죤 앨덴의 마음속에서는 고통과 좌절된 열망만이 들끓게 되었다. 그는 매일 프리스실라를 보았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참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일즈 스탠디쉬가 인디언과 싸우던 중 살해되었고 프리스실라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또 어찌된 일인가! 그들이 결혼하는 날, 마일즈 스탠디쉬가 거기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보고는 거짓이었다. 그는 기뻐하며 그 결혼은 지켜보았고, 그들 부부를 축하해 주였다. 그는 미소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가 어떤 것이 이루어지길 원한다면 네가 그것을 직접 해야 한다."

 

 

 

 

 

세리에 대하여

 

 

세리에 대해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리는 로마 정부로부터 세금 징수 권한을 부여 받았다. 로마는 세리들이 얼마를 징ㅅ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래가 이루어지면 그만큼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드릴 수 있었다. 사업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세리의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금 비율을 알려주는 로마정부의 공식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로마의 감사원 관리들은 어느 누구도 세리를 조사하지 않았으며 세리와 함께 일하지 않고는 누구도 일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세리의 술책을 마피아의 술책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세리는 사람들에게서 짜낸 가외의 수임은 얼마든지 자기의 것으로 챙길 수 있었다. 세리의 일은 순전히 착취로 이루어져 있었다. 세리는 상대방의 목을 쥐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그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백성 유대인들에게는 반역자였으며 로마인들에게는 송유관과 같은 중요한 존재였다.

세리들은 사회의 쓰레기들이었다.

만일 사람들이 최고의 죄인을 꼽는다면 바로 세리가 그에 해당이 될 것이다.

그러한 사회의 규범에 비추어 보았을 때 바리세인들은 그들 중에서 으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논란의 여지가 없이 백성들 중의 최고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았음을 선포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셨다. 그 말은 그 당시 사회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무시무시한 말씀이었다. 세상의 규범을 거스르고 무시한 처사였다.

세리는 최소한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이었다. 바로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겸손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리세인은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탄에 대하여

 

 

 

역사의 주인공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져서 불바다를 이루고 있을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어거스타 선상의 갑판 위에서 식사를 들고 있었다. 그때 백악관 참모인 프랭크린 그래함(Franklin Grahaam)은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건네주었다.

"대통령 각하! 워싱톤 시간으로 8월 6일 7시15분에 일본 히로시마에는 커다란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오랜 시간동안 어리벙벙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그 후에 하는 말이 "그래함 참모! 아마도 이것은 인류 역사를 전환시킬 가장 커다란 사건이군!" 이라고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로 인하여 4년간이나 질질 끌던 태평양 전쟁은 끝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말을 잘못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전환시킨 가장 큰 사건은 히로시마의 원자탄 투하가 아니라 이 세상에 강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인류의 역사를 주님 오시기 이전 시대와 이후의 시대 즉, 주전과 주후로 갈라놓았다.

 

은종아 울려라

크리스마스가 지났습니다.

아직 마루에는 크리스마스 나무가 서 있습니다.

"우린 곧 창고로 들어가게 될 거야. 어둡고 답답한 곳에 가서 잠자기 전에 마음껏 반짝거리자." 빨간 색 반짝 전구가 말하니까"그래 눈부시도록 반작거리자. "다른 반짝 전구들이 좋아하며 불빛을 뿜어내기 시작합니다. 빨간 불빛, 노란 불빛, 파란 불빛, 초록 불빛이 번갈아 가며 반짝댑니다. 넓은 마루에 오색 꽃이 가득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마음껏 노래하자."

나뭇가지에 조롱조롱 매달린 전자 종들도 목소리를 가다듬기 시작합니다.

"쟁그랑 쟁그랑 쟁그랑..."

전자종마다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낮은 목소리와 높은 목소리가 어울려서 합창이 됩니다.

"나도 저 전자 종들처럼 아름답게 노래해 보았으면 좋겠다. 마음껏 목소리를 내어 보았으면 좋겠다."

나뭇가지 끝에 달랑달랑 매달린 은종이 부러워합니다.

은종은 목소리를 내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도 아름답게 노래를 해보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난 벙어리인가 봐.'

은종이 슬퍼하고 있을 때, 뚱보 가정부 아줌마가 청소기를 들고 쿵쿵 걸어오셨습니다.

발자국 소리에 깜짝 놀란 은종은 바르르 떨다가, 그만 마룻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이쿠! 아이고, 아파!"

은종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이 은종은 소리도 내지 못하니 버려야 되겠다."

뚱보 아줌마는 은종을 주워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셨습니다.

'아이쿠쿠! 아이고, 아파!'

은종은 아까보다 얼굴을 더 찡그렸습니다. 얼마 뒤에, 청소를 끝낸 뚱보 아줌마가 쓰레기통을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뚱보 아줌마는 쓰레기통에 담긴 쓰레기를 비닐자루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쏴르르..."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쓰레기통 속에서 미끄러져 내리던 은종은 몸을 날려서 비닐 자루 밖으로 튀어 나왔습니다. '앗, 차가와!'은종은 하얗게 쌓은 눈 위에 떨어졌습니다. 눈이 차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쓰레기 자루 속에 들어가지 않아서 기뻤습니다.

은종은 눈 속에 파묻힌 채 하루를 지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 골목이 시끌시끌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눈송이가 나풀나풀 춤을 추며 뛰어내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눈송이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은종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눈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겠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그때입니다. 강아지 복실이가 달여 왔습니다. 복실이는 여기저기 코로 냄새를 킁킁 맡더니, 은종을 찾아 입에 물었습니다.

'아얏!'

복실이의 날카로운 이 사이에 물린 은종은, 아프기도 하고 겁도 나서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복실아, 그게 뭐야? 아무거나 씹어 먹으면 안 돼. 이리 내놓아."

샘이가 뽀득뽀득 발자국 소라를 내면서 달려와, 복실이가 입에 문 것을 빼앗았습니다.

"어머나! 은종이구나."

샘이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집에 가져가서 꽃나무 가지에 매달아 두어야겠다."

샘이는 은종을 들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샘이가 사는 집에는 대문이 없어서, 눈이 마당에 가득 밀려 들어가 있습니다. 눈이 골목보다 마당에 더 많이 쌓였습니다.

방문을 여니, 구석에 꽃나무 화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샘이는 은종을 꽃송이 사이에 매달았습니다.

"은종아, 예쁜 종소리를 울려 줘. 꽃향기가 나는 종소리를 자꾸자꾸 울려 줘." 샘이는 은종을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이를 어쩌나? 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지?'

샘이의 말을 들은 은종이 걱정을 하고 있는데, 꽃향기가 모락모락 풍겨 와 코를 찔러서 재채기가 났습니다.

"에에취."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재채기 소리가 귀에 들렸습니다.

'인제 내 목소리가 열린 것일까?'

은종은 얼른 노래를 불러 보았습니다. "쟁그랑 쟁그랑 쟁그랑..."

노래 속에 꽃향기까지 향기롭게 풍겼습니다.

"은종이 울린다! 꽃향기도 난다!"

샘이는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습니다. 꽃송이들도 방긋방긋 웃었습니다.

은종은 자꾸 노래를 불렀습니다.

"쟁그랑 쟁그랑 쟁그랑..."

그러나, 그 종소리는 샘이와 꽃송이들만이 들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유래

"크리스마스"의 날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12월 25일 설은 고대 "로마"에서 지키던 동짓날을 채택한데서 비롯됐다. 당시 "로마"의 이교도들은 동지절(12월 24일 - 다음해 1월 6일)을 하나의 대축제적인 명절로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로마"주교는 기독교가 이교도들을 정복했다는 의미에서 이교의 축제일인 동지를"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했다.

"크리스마스"를 교회가 교리적으로 지키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부터이다. 고대 "로마"교회에서 기원한 "크리스마스"를 지키기 시작한 년대에 대해서는 335년 설과 354년 설이 맞서있다.

"성탄일"은 그 후 동방 교회로 퍼져나가 "콘스탄티노롤리스"(379년),"카파도기아"(382년)등에서 지키기 시작했고 교회력의 기원이 되었으며,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시력 기원의 시원이 되었다.

"로마"의 "액시그누스"(500-544)가 533년 부활절 표를 작성할 때 기산한데서 비롯된 시력기원의 기점인 "그리스도"의 탄생은 실제로는 현재보다 4년이 앞당겨진다.

"성서"에는 예수님의 탄생 년도나 날짜의 기록이 전혀 없다.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정한 최고(최고)의 기록이라는 "안디옥" 주교의"데오필로스"기록(175-183)도 학자들 간에는 위작(위작)이라고 단정되고 있다.

"그리스도"와 "미사"가 합쳐 구성된 용어인 "크리스마스"사건에 관한 성서적 근거로는 "마태복음 제 1 장"과 "누가복음 제 2 장"을 들 수 있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처녀 탄생은 천사의 고지, 이상한별의 출현, "베들레헴"의 말구유까지 박사들을 인도한 빛 등은 "그리스도"가 인간이 된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바늘과 실의 관계처럼 성탄에 널리 유행하는 "크리스마스트리"의 관습은 고대 "애급"에서의 동지제(동지제) 때의 나뭇가지 장식, "로마" 축제 행렬에서의 촛불을 단 월계수 가지 장식 등 옛날의 성목(성목) 숭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흔히 "크리스마스트리"로 전나무를 사용하게 된 데는 전설이 있다. 8세기경 독일에 파견된 선교사 "오딘"은 신성하다는 떡갈나무에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 풍습을 중지시키기 위해 옆의 전나무를 가리키며 " 이 나무 가지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라"고 설교한데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모든 성실한 종교개혁의 후예들, 정통 신앙의 말씀 중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하나님께서는 말씀 하신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라."(출23:1,2)

 

크리스천의 유머

사강은 "어떤 미소"를 썼다. 살벌하고 처절한 생의 어떤 상황에서도 크리스천에게는 어떤 여유, 어떤 공간이 있어야한다. 그것을 신앙적 유머 혹은, 품성의 해학적 매력이라 해도 좋다.

지금은 주부인 내가 사랑하는 C.C.C.의 한 자매가 있다. 아무리 긴장되고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가 말하면 모두들 영혼 속까지 웃음의 문이 열린다. 구린내로 모두들 상을 찡그린 분위기에서 맛있는 멸치젓 냄새 같다고 할 사람, 다사로운 햇볕같이 만나기만 하면 모두들 행복을 느끼는 밝고 포근한 자매, 자기 자신은 항상 담백하고 욕심이 없다.

그와 반대로 서릿발 같고 먹구름처럼 저기압을 몰고 다니는 보기만 해도 오싹하는 사람이 있다.

크리스천은 만나고 싶어지는 사람, 말이 없어도 옆에 있으면 예수같이 느껴지는 어떤 공간을 가져야 한다.

 

큰 기쁜 소식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성탄이 왜 큰 기쁜 소식일까? 성탄절하면 그 축제무드와 산타크로스와 캐럴과 파티와 휴가, 크리스마스 휴전과 크리스마스 특사, 어려운 이웃들에게 베푸는 구제와 선물들, 사랑의 캠페인 이런 것들이 연상된다.

예수의 복음 때문에 당장 지상천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천사처럼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왕국은 예수 재림 이후에야 온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접하는 사람마다 그 독생자를 선물로 주셨다. 천국은 이미 그 생활 속에서 나무처럼 자라고 있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새 생명은 애기처럼 그 속에 성장하고 있다. 필요한 모든 것은 다 주신다.

복음을 받은 사람은 자연법칙 세계에서 초자연 법으로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사람들이다. 그의 기쁨은 빼앗을 자가 없다. 절대적인 복음이기 때문이다.

 

 

 

 

 

 

셀라(Selah)에 대하여

 

 

셀라(Selah)

시편 전체를 통하여 73회 언급하고 있는 낱말이다.

의미

이 말은 음악용어로서, 강조하고 싶은 말의 인상(감동)이 강하게 전달 되도록 하기 이하여 붙여진 듯하다. 그리하여 이 표시 부분에서는 목소리나 악기의 소리를 더 높였거나, 혹은 잠시 멈추고 이 용어가 붙은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했다고 한다.

 

셀라의 뜻

보통 구약성경 시편에 나오는 말로서 그 뜻이 분명치 않는 히브리 말이다.

보통 악곡상의 지시어로서 그 의미를 갖는데 [휴지]라는 뜻도 있다.

 

 

 

 

 

소속감에 대하여

 

 

나는 누구에게 속해야 하는가?

인도의 한 왕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예쁜 조카딸이 하나 있었다. 근친혼이 인정되는 사회인지라 예쁘고 총명한 공주를 서로 사랑하게 되는데 왕은 이런 눈치를 채고 수요 공급의 차질을 해결하기 위해서 긍리 끝에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낸다.

그는 왕자들을 불러서 일정한 기간의 여유를 줄 터이니 각각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을 구하여 오라 그러면 가장 진귀한 보물을 가져온 왕자에게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첫째는 거액의 돈을 주고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융단을 구했다.

둘째 역시 큰돈을 지불하고 어디든지 볼 수 있고 아무리 먼 곳도 볼 수 있는 신비한 망원경을 샀다.

세째 또한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이것을 먹으면 무슨 병이든지 고칠 수 있다는 사과를 샀다.

세 왕자는 각각 자기가 지닌 보물이야말로 천하에서 제일 좋은 것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한 자리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둘째가 망원경으로 수만리 떨어져 있는 공주를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공주가 병에 걸려 다 죽어가고 있었다.

셋은 지체하지 않고 첫째의 융단을 타고 단숨에 공주에게로 날아갔다. 그리고 셋째가 지닌 사과를 먹게 해서 공주를 살렸다.

왕자들은 서로 자기의 보물이야 말로 최고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자기의 망원경이 없었다면 공주의 위기를 볼 수 없었다는 이유이다.

첫째는 아무리 공주의 위기를 보았다 해도 자신의 융단이 없었다면 단숨에 공주의 곁으로 달려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고라고 말했다.

셋째의 주장을 들어보자

아무리 빨리 발견하고, 빨리 달려왔다고 해도 자신의 사과가 없었다면 공주가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것을 최고로 두었다.

왕은 보물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게 되자 마침내 조카 공주에게 그 판단을 맡기기로 했다.

공주는 한참을 명상에 잠기더니 입을 연다. 망원경이나 융단이 귀한 것이긴 하지만 사과가 없었다면 나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생명의 사과를 준 셋째의 아내가 되겠다고 했다. 잘 알려진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간은 소속감이 분명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공주의 논리에 의하면 나에게 생명을 준 대상에게 속해야 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에게 육체적 생명을 준 부모에게 속해야 하고,

나에게 영, 육간의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속해야 한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자고 하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고리타분하게 아직도 효도 운운하고 하나님운운하고 있는가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바보들이나 주장하는 괴변이라고 일축해 버리는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소외감(疎外感)에 대하여

 

 

거부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1. 거부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쉽게 상처를 받는다.

2. 거부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3. 거부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 부터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4. 거부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거부]의 상황에 부딪힐 때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쓴다.

5. 거부당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 빌 웨버 -

 

 

어느 심장병 환자의 고백

수술 받기 전 날 간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간호사는 상냥하게 나의 손을 잡고서 나에게 자기 손을 꽉 잡아보라고 시켰다. 그리고 말했다.

내일 수술을 받으시는 동안 당신의 몸에서 심장이 분리되고 오직 기계의 도움에 의하여 생명이 유지될 것입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심장은 새롭게 연결되어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 다음 당신은 회복실로 옮겨질 것이고 그곳에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의식은 깨어납니다. 의식이 깨어난 후에도 여섯 시간 동안은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볼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심지어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나는 당신 곁에서 지금과 같이 손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닥칠지 모르는 모든 위험을 일일이 점검하고 기록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완벽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내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다음날 내 운명이 결정되는 수술이 진행되었고 이어서 담당간호사가 말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그때 나는 내 손을 붙들고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간호사의 손길을 확인하면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과 위로를 얻었고 아울러 삶에 대한 확신을 지닐 수 있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순간에 그녀가 내 손을 붙들고 내 모든 문제 하나하나 처치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와 함께하는 그 순간이 내게 얼마나 가치 있고 포근한 것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다. 고 고백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시 바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성령님은 원문에 의하면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우리 옆에 와 계시는 분]이라고 한다.

아울러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약속하시기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와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고 바로 내 곁에 오셔서 내 손을 꼬옥 붙잡고 나와 항상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다윗은 그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에 남다른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렵고 힘든 역경 중에서도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와 삶의 용기를 받았던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살 때에 우리는 절망하고 불안해하며 사는 것이다.

 

소외감의 극복

피퍼라고 하는 사람은 구원의 범주에 속한 종교로서 대표적인 두 가지를 공산주의와 기독교를 들었다.

공산주의는 종교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이상이지만 어떤 면에서 볼 때 주체사상, 막스와 레님의 교조적 사상은 그 신봉자들에게는 하나의 절대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종교의 범주에 넣어도 과히 무리가 없을 지경이다. 공산주의는 현재 삶의 여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능히 개선할 수 있고 변혁시켜 나갈 수 있다고 강조해 왔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도 역시 현실의 여러 어려운 조건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것을 변혁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기독교 집회에 참석하는 것도“어떻게 하면 현제보다 좀더 나은 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나의 불리한 조건들을 어떻게 개선해 나갈 수 있겠는가?”하는 희망을 갖기 때문이다.

또 성경의 결론 자체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

하는 변혁의 약속이기 때문에 기독교는 변혁을 상당히 강조하는 종교인 것이다.

인생 자체도 예수 안에서 완전히 변화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유사점은 바로 현실 부정과 인간 사회의 현실을 개혁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인간이 소외 상태에 있다고 하는데에는 기독교나 공산주의가 모두 공감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소외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인간 회복을 시도해야 한다는 데에서는 동의하면서도 인간 소외의 원인 규명에서는 양자가 서로 그 의견을 달리한다.

인간 소외의 원인을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에 두고 나름대로의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공산주의와는 달리 기독교에선 인간 소외의 원인을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된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소외되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불안과 인격 분열과 고통을 경험하며 증오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원치 않는 악을 자꾸 행하며 사회적으로는 구조적인 악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내리신 해산의 고통이 개인의 영역에 속한 심리적이 문제로, 아담에게 노동을 하고 땀을 흘려야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신 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소외의 문제에 대해 공산주의와 기독교 모두 매우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절대적인 변화를 주장하지만 그 실현 방법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계급투쟁을 통해서 제도적으로 혁명을 일으켜서 해결하려는 것이 공산주의의 방식이다. 공산주의는 세상을 변혁시켜 나가는 동기 부여와 진행 과정에서 언제나 그 주체가 인간이 된다.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서 혁명이라는 방법을 통해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옛 사람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는 것을 통한 문제 해결을 주장한다.

인간과 사회를 새롭게 하고자하는 이 동기는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변혁의 진행 과정에서도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고 인간은 그분의 동역자로 참여한다는 생각이 바로 공산주의와 다른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적 유물사관에 근거하여 필연적으로 자율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 혁명을 이야기하며, 기독교는 죄인 스스로 죄에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타율적인 인간 변혁을 이야기 한다.

신약 성경을 보면 변혁의 동기를 가지 주체 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이 나타나 있다.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를 떠나 돼지를 치며 고생하던 둘째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 올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 아버지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가 집을 떠나갈 때 그의 등 뒤에서 아버지는 돌아올 것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아들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대문 앞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탕자는 다시 돌아왔고 아버지는 자신을 받아 주실 것이라는 잠재의식을 안고 떠나갔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을 다시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고 탕자가 집을 나섰다면 어찌 그가 다시 아버지를 향하여 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가 돌아갈 수 있었던 힘을 제공한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였다.

인간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인 것이다. 공산주의가 그래서 실패한 것이다.

 

 

 

 

 

소유에 대하여

 

 

크리스천 소유개념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 8:12-14).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8:17-18)

우리는 청지기일 뿐이다. 내 시간, 내 몸, 내 가족, 내 혀, 내 재간, 내 지식, 내 것 같지만 잠시 주님이 빌려주신 것, 맡겨 주신 것이다. 그 대여 기간의 길이는 하나님만의 절대 비밀에 속한다. 소유 개념을 바꿔야 하겠다. 크리스천의 전 소유를 자원해서 예수 재단에 기증해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소중함(所重)에 대하여

 

 

가장 소중한 것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세상의 부와 권세가 아닙니다. 바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깎아지른 암벽을 오르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의 몸을 묶고 있는 하나의 밧줄입니다.

파도가 이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어부에게는 한척의 배가 가장 소중합니다. 그 소중함에는 작고 크고하는 문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새것이든 낡은 것이든 그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바다위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몸을 실을 그 배가 가장 소중합니다.

복잡한 장터를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에게는 그 무엇도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누가 좋은 것으로 유혹해도 엄마가 가고 있다면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엄마를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엄마의 인도하는 손길이 이 아이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경하게 여긴 사자

이솝우화를 보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자하나가 어느 동네 길을 걸어가다가 참으로 아름다운 처녀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눈에 반해버린 이 사자는 그 처녀의 뒤를 따라갔죠, 그 처녀는 그 동네 농부의 딸로 아름답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사자는 한눈에 사랑에 빠져 농부를 찾아가서

"나는 당신 딸을 사랑하니 결혼을 하겠소, 만약 싫다면 당신 딸을 잡아먹고 말겠소. "

갑자기 사자의 청혼을 받은 농부는 앞이 캄캄했으나 사자가 무서워 거절하지 못하고 하루의 말미를 달라고 사정을 해서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걱정 때문에 그날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걱정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서 딸은 그 자초지종을 묻고는 괜찮으니까 내일 사자가 오거든 이렇게 저렇게 시키는 대로 하시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사자가 아침 일찍 찾아왔습니다.

"생각해 봤소?"

사자가 큰 소리로 묻자 농부는 반색을 하며 사자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는 웃는 낯으로

" 내 딸도 당신처럼 성실하고 용감한 사자라면 결혼하고 싶다고 그럽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을 하더군요.

기분이 좋아진 사자는 침을 삼키며 물었습니다.

"한 가지 걱정이라니“

농부는 머뭇거리다가

"저..말입니다. 내 딸도 당신을 좋아하는데 사자님의 그 날카로운 발톱이 무서워 가까이 갈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발톱을 뽑아주면 시집을 가겠답니다."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농부의 딸에게 마음을 온통 빼앗긴 사자는 자기의 발톱을 모조리 뽑고는 다음날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사자를 추켜세우며 말했습니다.

"내 딸은 사자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답니다. 그것만 들어주시면 기꺼이 시집을 가겠답니다."

"오 그래? 그 부탁이 뭐요?"

"실은 내 딸이 사자님의 그 날카로운 이빨이 무서워 가까이 갈 수가 없답니다."

"알았소. 그럼 내일 다시 오겠소"

이미 발톱을 뽑아버린 사자는 뒤뚱거리며 물러갔습니다.

사자는 그대로 돌아갔다가 다음날 다시 왔습니다. (이빨빠진 소리)

"내 당신 말대로 이빨도 뽑았소, 자 이제 당신 딸을 나에게 주시오"

그러자 농부는 갑자기 몽둥이를 들더니

"네 이놈, 지금까지는 네 발톱과 이빨이 무서워 꼼짝 못했지만 이제는 무서울 게 없다."

하며 사자를 마구 두들겨 팼습니다. 사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쳤지만 이미 발톱도, 이빨도 다 뽑아버린 뒤였습니다.

눈앞에 것에만 집착하여 자신의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자와 같은 것이죠.

우리에게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문제가 다가올 때마다 우리에게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합니다.

 

소중한 것

대머리 친구가 있다. 언제부터 머리카락이 현주소를 떠나는 이탈의 행군을 계속했는지에 대해선 아는 바 없지만 아무튼 그 친구의 머리카락은 손으로 셀 정도에 불과하다. 그는 언제나 주머니에 머리빗을 지니고 다닌다. 그리고 틈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고 빗질을 해댄다. ?빗어 넘길 머리도 없는 주제에 웬 빗질이냐?고 핀잔을 주면 그는 정색을 한다. 즉 머리숱이 많은 사람은 한 올의 머리카락이 소중할 리 없겠지만 몇 가락 남지 않은 자기로서는 마치 오 헨리의 단편에 나오는 '마지막 잎새' 같은 느낌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진다는 것이다. 그 현대인 모두가 자신의 소유라고 인식되는 모든 것들을 상실치 않고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몸부림치며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은 건강과 정력에 좋다는 이야길 믿고 코브라 뱀을 하루에 두 마리 씩 2년간을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결국 뱀독에 빠진 채 사경을 헤매고 있다니 몬도가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해괴망측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현대인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건강, 권력, 명성, 재산, 인기 따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현대인이다. 그러나 처참하리만큼 강력한 자기 보존의 투쟁에도 아랑곳없이 현대인은 얻는 것보다는 잃어버리는 것이, 지키는 것보다 빼앗기는 것이, 쌓아올리는 것보다는 무너지는 것이 더 많은 아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가치관의 정립이 없는 데서 오는 혼란, 바로 그것이다. 청진기로 내 인생의 맥박 소리를 들어보자.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아파하고 있는가? 잃은 것과 찾은 것, 그것들을 올바로 분별하는 능력이야말로 현명한 삶의 비결이다.

 

 

 

 

 

솔선수범(率先垂範)에 대하여

 

 

사람을 찾기 전에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되라

B.C.6세기경 그리스의 노예라고 전해지는 이솝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의 주인이 ?목욕탕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하며 보냈습니다. 얼마 후 이솝은 돌아와서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라고 보고 했습니다.

목욕할 준비를 하여 목욕탕으로 갔으나 사람으로 가득한 목욕탕에서 고생을 많이 하고 돌아온 주인은 이솝에게 속은 것이 분해서 화를 내면서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이솝은 태연하게

?주인님. 제가 확실히 보았습니다. 목욕탕에는 한 사람만 들어갔습니다.?

이솝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주인은 오히려 이솝을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이솝이 목욕탕에 가 보았더니 길 가운데 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목욕탕에 가는 사람들이 이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누구 한 사람 돌을 치우는 사람이 없고. 불평과 원망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얼마 후 한 손님이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손님은 팔을 걷어 부치고 땀을 흘리며 돌을 치워버리고 목욕탕에 들어갔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단 한 사람만 목욕탕에 들어간 것입니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잠25:13)

내 자신이 팔을 걷어붙이고 길 가운데 돌을 치워야 합니다. 사람을 찾으려 하지 말고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에 대하여

 

 

새해에 대한 성구

1. 시145:1-4 -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라.

2. 신31:6 -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수1:5하 -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않음.

3. 사42:9-10 -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계21:5 -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4. 시105:3-5,8 -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하라.

5. 신11:12하 - 세초부터 세말까지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다. 계3:8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6. 겔18:31 -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시90:12 -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새 것에 대한 성구

1. 새 왕 - 출1:8 2. 새 소제 - 레23:16

3. 새 집 - 신20:5 4. 새 아내 - 신24:5

5. 새 술 - 삿15:13 6. 새 수레 - 삼상6:7

7. 새 의복 - 왕상11:29,30 8. 새 노래 - 시33:3, 40:3, 96:1

9. 새 이름 - 사62:2 10.새 하늘과 새 땅 - 사65:17, 66:22, 계21:1

11.새 언약 - 렘31:31, 히8:13 12.새 마음과 새 영 - 겔18:31, 36:26

13.새 신 - 겔11:19 14.새 일 - 렘31:22

15.새 계명 - 요13:34 16.새로운 피조물 - 고후5:17

17.새 예루살렘 - 계21:2 18.새롭게 된 만물 - 계21:5

19.새 포도주 - 마9:17, 26:29 20.새 부대 - 마9:17

 

새롭게 하는 원천

하나님 - 시51:10, 103:5, 계21:5

성령 - 시104:30, 딛3:5

여호와를 앙망하는 신앙 - 사40:31

 

새롭게 하는 방법

소원이 만족됨 - 시103:5

회개케 함 - 에5:21, 겔18:31

창조 함 - 시104:30

심판 함 - 마19:28

 

새롭게 되는 대상

성도의 형편 - 애5:21 심령 - 겔18:31, 롬12:2, 엡4:23

만물 - 계21:5 정직한 영 - 시51:10

세상 - 마19:28 청춘 - 시103:5

나라 - 삼상11:14 민족들 - 사41:1

속사람 - 고후4:16 힘 - 사41:1

 

 

 

 

 

순결에 대하여

 

 

석탄갱속의 흰 꽃

광산촌을 방문 중이던 한 젊은 목사가 석탄갱 속으로 인도되어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더럽고 새까만 길목 한 곳에 새하얀 꽃이 아름답게 자라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 왔다.

“이 더러운 갱에 어떻게 저런 꽃이 자랄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저와 같은 순결과 아름다움을 상실치 않을 수 있을까.”

목사는 놀라움 때문에 이렇게 외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광부가

“거기에 석탄가루를 좀 뿌려 보시죠.”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목사는 석탄가루를 꽃 위에 뿌려 보았다. 놀랍게도 검은 흙은 눈송이 같이 고운 그 꽃을 더럽히지 못하고 그냥 미끄러져 내리는 것이었다. 목사는 그 순간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꽃이 자라는 곳을 옮길 수 없듯이 인간도 죄악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흰 꽃처럼 아주 순결하고 깨끗하게 지키면서. 아무리 죄를 접한다거나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이었다. 세상이 험할수록 순결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 순결은 더욱 고귀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 갱 속의 흰 꽃과 같은 순결한 기독교인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습관에 대하여

 

 

습관에 대하여

펄벅 여사의 소설 <대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주인공 왕융이 장가를 들어 부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복숭아를 씹어 먹는 왕융이 신나게 맛있게 먹고서 속의 씨를 길가에 버립니다. 아무런 생각이나 조건 없이 복숭아를 먹었으니 그 씨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결혼하기까지 어떤 부잣집에서 하녀 노릇을 하였습니다. 하녀 생활을 통해서 주인이 버리는 것에서 새로운 생산적인 것으로 돌리는 지혜를 길러 왔었습니다. 새신랑 왕융이 복숭아를 다 먹고는 무심코 씨를 버리는 것을 보고 부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속으로 혼자 말합니다. "이걸 심으면 또 복숭아가 열릴 텐데..." 그러고는 그 씨를 감추어 가지고 와서 자기 집안에다 심었습니다. 물론

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큰 복숭아나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동양의 여인들이 얼마나 지혜로우며 얼마나 생산적이냐 하는 찬사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의 대목에서 습관적인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음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습관은 하루 이틀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수십 년, 또는 민족적인 것은 수천 년간의 생활 속에서 고정되어 굳어버리는 생의 형태를 일컬어 습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습관에서 생산성이 있는 씨알들을 아무런 생각이 없이 쓰레기로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랬다는 식의 생활 태도는 소위 만네리즘에 빠져서 신선한 맛이 없고 쾌감을 느끼는 순간도 없이 질펀한 대지에 아지랑이 끼어들고 있듯이 아무러한 상념이나 의식이 없이 소가 걸어가듯이 어슬렁어슬렁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권태와 낭비만이 깔리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까뮈의 작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스>가 태양이 너무 뜨겁다는 이유만으로 총을 쏘아 살인을 하는 그러한 어리석은 일이 있을 법한 그러한 생의 과정을 걸어가는 습관적인 삶을 우리는 시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습관은 바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다만 비생산적이고 고루한 생의 형태는 바꾸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언입니다. 말하자면 생의 유신을 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습관과 인생

그 사람이 어떤 습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 행불행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그 나쁜 습관 한 가지만 없으면 임금님 진지 그릇 같이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는데 그 악습 때문에 강아지 밥그릇 밖에 못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술,도박,담배,음란,부부싸움,거짓말등 어느 것에도 해당될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실수로 죄를 짓지만, 그 다음에는 고의로 죄를 범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습관이 되어 죄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고 말씀하신대로 새해에 새사람이 되고 새 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새사람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고 영접할 때 시작됩니다.

 

 

 

 

 

시기에 대하여

 

 

마이어목사의 시기심

챨스 스펄젼 목사님과 켐벧 몰간 목사님, 그리고 마이어 목사님이 세 분 목사님은 모두 기독교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분들이시다. 그런데 스펄젼 목사님과 켐벧 몰간 목사님이 인도하는 교회가 큰 부흥을 이룰 때 마이어 목사님이 이런 고백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기도를 드리는데 그 자신이 스펄젼 목사님과 켐벧 목사님을 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회개하여 시기심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질투는 감당할 수 없었다.

마이어목사님은 "주님! 시기를 없애고 평화의 영을 갖게 해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이어 목사님께서 이 시기의 마음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는 기도의 방법을 바꾸었던 것이다.

"주님! 스펄전 목사님과 캠벧 목사님의 교회를 부흥시켜주시고 축복해주세요 라고 기도 드린 후 참 평화를 경험했다.

 

거룩함을 방해하는 것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탄의 졸개들이 리비아 사막에 살고 있었던 어느 성직자를 유혹하여 쓰러뜨리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 악한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범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사람의 육신의 정욕을 건드려도 보고 의심과 두려움의 화살로 맹공을 가해 보았으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졸개들의 완패에 화가 치밀어 오른 사탄은 직접 나섰다.

"너희들의 전략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어. 내가 하는 것을 잘 봐." 사탄은 그 성직자의 귀에다 이렇게 속삭였다.

"이봐 당신 동생은 벌써 알렉산드리아의 주교(主敎)가 되었다고!" 이 말은 듣고 있던 성직자의 얼굴은 금세 험악해지면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사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군대에게 말했다. "시기! 바로 이거야.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겐 이게 최후의 무기지!"

 

 

 

 

 

식사(食事)에 대하여

 

 

식사기도의 효과

사람은 먹어야 하는 존재다.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모든 생명체가 먹어야 한다.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고 일상적이다. 하루 세 번씩 음식을 대하기 마련인 인간들, 그 개성과 모습이 다르듯이 음식을 대하는 태도 또한 여러 가지이다.

또 음식이야 고 짜증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고, 무덤덤하고 의례적인 마음으로 음식을 대하는 사람도 있고, 주어진 음식에 감사하고 감격적인 자세로 음식을 대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그 음식을 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감사하고 그것을 주기 위해 수고한 분들의 손길을 생각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미국의 의사 죤 자웻(John Jaweet)이라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그들에게서는 여느 사람들에게선 발견할 수 없는 세 가지의 특이한 분비물이 나오더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바가 있다.

첫째는, 연구자인 죤 자웻도 완전히 규명할 수 없는 일종의 신비한 백신인데 그것은 모든 질병을 예방해 주는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주장은 결코 그만의 주장이 아니다. 이 기도 백신이 질병을 예방하고 인간의 면역기능을 항진시킨다는 연구보고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부단히 발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기도 후에는 항독소(抗毒素)라는 물질도 분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항체 역할을 담당하여 각종 질병의 진행을 억제시켜 주고 병균의 침입을 막으며 살균을 해 주기 때문에 질병의 예방과 아울러 치료에 까지 도움을 준다고 한다.

셋째로, 안티셉틴(antiseptin)이라는 물질인데 이것은 방부제 구실을 한다고 한다.

이 방부제는 위장 내에서 음식물이 이상 발효하거나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고 소화 흡수를 도와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작용을 한다고 한다.

솔로몬은 전도서 3:12-13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조금 살기 좋아졌다고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며 곰발바닥 요리를 사먹고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동남아 각국의 뱀을 싹쓸이하는 추한 한국인들이 참 많이 있다고 한다.

바로 그들에게 진정 건강한 삶을 바란다면 우선 하나님을 믿고 끼니마다 주신 음식을 감사하며 시고하고 먹는 사람이 도라고 권하고 싶다.

 

 

 

 

 

신념(信念)에 대하여

 

 

기도와 신념

기도는 신념을 낳고 신념은 기적을 낳는다. 세상에 신념처럼 무서운 힘은 없다.

그러한 신념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바로 기도에서 생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것은 신념의 힘을 간파하신 예수님의 명언이다.

신념은 바로 소망을, 꿈을 가꾸는 것이다. 그러한 신념이 없이는 소망의 나무는 곧 시들어 버리고 만 다.

신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의 힘이 된다.

신념은 불가능을 현실로 바꾸어 주는 놀라운 힘이 된다.

이러한 신념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바로 기도에서이다.

[아버지여 할 수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 이것이 바로 신념이다.

 

신념

필라델피아의 백만장자였던 스티븐 지라드씨는 어느 토요일에 자기의 직원들에게 말하기를 다음날 나와서 방금 도착 입항한 선박의 짐을 내리라고 했다. 그러자 한 청년이 창백한 얼굴로 지라드씨 앞에 나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라드씨. 저는 내일은 주일이기 때문에 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와는 헤어지는 수밖에 없지.?

?그것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비록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입장이지만 주일은 일을 할 수 없군요.?

?그러면 경리 계에 가보시오. 그동안 일한 급료를 계산해 줄 것이요.?

청년은 이런 일 후에 삼주일 동안이나 발이 아프도록 시내를 다니며 일자리를 구했으나 얻지를 못했다. 어느 날. 필라델피아시의 한 은행 총재가 지라드씨에게 연락해 오기를 새로운 은행을 하나 열어야 하겠는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한 지라드씨는 해고한 청년을 추천했다.

?하지만 자네는 그 청년을 해고하지 않았나.?

?물론 그랬지. 그 청년이 일요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해고했네. 그러나 자기의 처하는 형편에 따라서 신념과 원리를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야 새 은행의 돈을 믿고 맡길 수 있지 않겠나.?

그 청년은 지라드씨의 친구인 은행 총재에게 발탁 기용되어서 전의 직장보다 훨씬 좋은 자리에 근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수에 대하여

 

 

성급한 판단

한 목사님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하루는 목사님이 집에 와보니 또 창고 유리창이 깨어져 있었다. 작은 아들이 몇 번 야구공을 던져 창고 유리창을 깨뜨린 적이 있었기에 목사님은 "이 녀석 또 말썽을 부렸구나!"라고 생각하면서 곧장 작은 아들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전에 약속한 대로종아리 두 대를 아프게 때렸다. 막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내려오자 큰 아들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용서해 주셔요. 제가 아까 그만 유리창을 깨뜨렸어요." "아니 그럼 네가 깨뜨렸다는 거냐?" 목사님은 즉시 상황을 알아 차렸다. 정작 잘못한 사람은 여기 있는데 너무 성급하게 판단을 하고는 잘못이 없는 작은 아들을 때렸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목사님은 다시 작은 아들 방으로 들어갔다. "얘야, 이 아비가 잘못했구나, 네 형이 그랬는데 네가 그랬다고 생각하고 너를 때렸구나. 용서해 다오. 자 이번에는 네가 아빠를 때릴 차례다." 그 순간 작은 아들은 빙긋이 웃으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아빠, 아빠도 완전하실 순 없지 않아요? 제가 용서해 드릴게요!" 두 부자는 기분 좋게 악수를 했다.

 

 

 

 

 

실천(實踐)에 대하여

 

 

나를 따르라

67년 6월 일어난 6일간의 중동전쟁은 절대적 열세인 것처럼 보이던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거의 파죽지세로 시나이반도와 골란 고원, 요르단 강 주변 등등 아랍 쪽 지역을 점령, 세계를 놀라게 했다.

후에 군사전략 가들이 그 비결을 찾아보고는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다는데 모두 동감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전쟁에 임할 때 아랍 군 지휘관들의 공격명령은 "가라!"였다. 누구나 목숨은하나이고 아까운 법, 남보다 앞서 나서질 리 없었다.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판국이라 영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그래서 참패했다.

그런 아랍 군에 반해 이스라엘군 지휘관들은 "나를 따르라!"고 외쳤다. 상관이 용기 있게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그를 따르지 않을 병사가 없었던 것이다.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부정부패, 무사안일의 필연적 귀결로 나타난 복지부동현상을 타개하는 방법은 "나를 따르라"이다. 솔선수범하며 나설 생각은 접어준 채 당근을 줄 테니 좀 달려보라고 구슬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모자란 생각이다. 따를만한 위의 모범을 보면서 바르게 행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영적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 악의 영들에 대한 믿음의 싸움을 하면서 지치고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는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그의 명령을 따라 행할 때에는 반드시 승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처한 곳에서 예수를 온전히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이다.(요한복음 8:12)

 

 

반복되는 설교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어떤 목사가 교회에 새로 부임했다. 첫 번째 주일, 그는 '당신은 헌신했는가?'라는 제목의 설교로 교인들을 감동케 했다. 그 다음 주일 목사는 똑같은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 다음 주일에도 같은 설교를 반복했다. 듣다못해 교인들은 대표자를 뽑아 왜 같은 설교를 하는지에 대해 항의했다.

"한 가지 설교밖에 준비하지 못했습니까?"

이 말을 들은 목사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많은 설교를 준비했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첫 번째 설교를 듣고도 실천하지 않아 그 다음에 준비된 설교를 할 수 없었답니다. 여러분이 들은 말씀을 실행에 옮길 때 나는 준비된 다음 설교를 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별것도 아닌 걸..

한 농부가 밭 한가운데에 있는 바윗덩이를 늘 피해서 농사를 지어왔다. 그런데 이 바위로 인하여 벌써 쟁기 두개를 망가치고 괭이 등 여러 연장들을 부러뜨렸다.

뿐만 아니라 바위가 땅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절감한 농부는 큰 결심을 했다. "무슨 수고와 무슨 대가가 들더라도 내가 저 바위를 캐어 내리라!"

화도 나고 큰 작정을 한 농부는 바위 밑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바위가 늘 생각했던 것처럼 큰 바위가 아니라 두께가 겨우 한 자도 안 되는 바위였던 것이다. 농부는 그 바위를 쉽사리 움직여 마차에다 싣고 내어다 버리며 생각했다.

"별것도 아닌 것을 대단한 바위로 알고 피해서 농사를 짓고 손해 본 그 동안이 참 아까운 일이었구나!"

당신이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던 그 일, 항상 부담스럽던 그 일을 착수해 보시라 별 것이 아닐 것이다.

 

성경읽기

성경을 읽으라고 권하면 대부분의 경우 “너무 바빠 성경을 읽을 틈이 없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 미국 로스엔젤리스의 사업가 리처드 위키씨도 그런 분 가운데 하나였다.

어느 날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대개의 사업가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신문과 사업상의 서신과 잡지와 좋아하는 책을 읽을 시간은 있으나, 어째서인지 모든 사람들이 다 좋은 책이라고 말하는 이 위대한 책은 읽을 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위키씨에게는 이 말이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있습니까?? 라는 질책처럼 들렸다.

위키씨는 집에 돌아와 자신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과거에는 성경이 자신에게 있어서 어쩌다가 가끔 들여다보는 참고서에 불과했으며, 한 번도 통독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읽지 않고 보내온 생애에서 어떤 허탈감을 느끼게 되었다.

위키씨는 사업가다운 머리로 하루에 3페이지 반씩 읽으면 1년에 성경을 한 번 통독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에 20분이 필요하다는 계산을 해냈다.

그는 읽은 부분에 대해 명상하기 위해 10분을 추가하기로 하고 자명종을 30분 앞당겨 놓았다. 위키씨는 19년 전에 이 일을 시작해서 이제 성경을 20번째 읽고 있다.

위키씨는?처음 성경을 읽을 때보다 지금은 그 20배를 성경에서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아침 이른 시간이 성경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며 손에 연필을 들고 성경을 읽어서 뜻을 알 수 없는 부분에 표시를 해 놓았다가 주석을 찾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다가 보니 위키씨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의 일기장이 되었다. 바쁜 현대인에게 있어서 위키씨의 체험은 많은 도움이 될 줄로 안다.

 

사랑을 통한 축복

인도의 성자인 선다싱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눈이 잔뜩 덮인 히말라야 산 건너편에 있는 사원에 가기 위하여 어느 나그네가 추운 겨울날 눈보라를 헤치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눈 속에 쓰러져 동사 직전에 있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은 어물어물하다가는 자기도 얼어 죽겠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얼마 후 그 길을 또 한 사람의 나그네가 가다가 거의 얼어 죽게 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사람을 내가 구해야 되겠구나.'하고 생각하고는 그를 업고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산 너머 사원까지 갔습니다. 그 사람은 힘이 들어 땀이 났습니다. 그런데 가다 보니 길가에 얼어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먼저 가면서 지나쳤던 사람이 얼어서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만 살겠다고 혼자 지나쳐 간 사람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그를 업고 가던 사람은 그를 업었던 탓으로 힘을 쏟아 그 자신의 체온을 높이고, 그로 인해 등에 업힌 사람까지 살려내어 결국 두 사람의 주고받은 체온 덕택에 둘 다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것이 기독교 사랑의 실천윤리입니다.

 

실천하는 믿음의 결여(缺如)

데이브 비어만의 가정에서는 매주 성경을 한 구절씩 암송하기로 했습니다. 열 살짜리 카라와 여섯 살짜리 다나, 두 딸이 부모보다 더 성경암송을 잘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큰딸 카라와 둘째딸 다나가 소리를 지르며 싸움이 붙었습니다. 서로 밉다면서 싸우고 있을 때 아버지인 비어만이 큰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이번 주 성경구절이 어디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카라는

?요한 1서 4장 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줄줄 암송하며 대답했습니다. 그리곤 다시 방으로 들어가 더 심하게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알고 있지만 그대로 살지 못하는 작은 실례입니다.

데이브 비어만은 말합니다.

?기독교 서적과 음반이 쏟아져 나오고 교회 출석 인구가 늘어나고 방송설교가 넘쳐 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혼, 범죄, 자살, 마약중독, 낙태 등 범죄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종교가 발전하는 것만큼 죄도 발전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삶의 현장인 가정, 학교, 직장, 시장 등에서 그대로 적용하고 실천할 때 가능해 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문제는 말씀을 듣지 못함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그대로 살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하루하루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십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눈동자처럼 소중히 받고 지키고 실천합시다. 그리하면 형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하라

새벽 기도회라고는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었던 아들이 밤이 짧은 여름날이나 그 추운 겨울 새벽에도 4시만 되면 일어나서 새벽 기도를 나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고 어느 날 새벽, 아버지 뒤를 멀찌감치 따라가서 교회 뒷좌석에 앉아 기도하며 조용히 들려오는 아버지의 기도 소리를 들었다. “주의 종을 도와주시고, 가난한 성도들에게 쌀을 주시며, 병든 사람에게 고침을, 가난한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주옵소서.”

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같이 매일 반복되는 아버지 기도에 집으로 달려온 아들은 금고에서 돈을 꺼내어 담임 목사님에게 필요한 양의 돈을 갔다 주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쌀을 한 가마씩을 사서 돌렸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는 입원비를 나누어 주었으며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등록금을 갖다 주었다.

새벽기도를 끝내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금고문이 열린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막 집 대문을 들어서는 아들에게

“얘야, 금고 문이 다 열려 있고 돈이 없어졌으니 혹시 도적이 든 것은 아니냐?” 하시면서 놀라는 것이었다. 그때 아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버지의 기도를 내가 다 응답하여 드렸습니다.”

주님은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셨는데 우리 주위에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많아도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이 그립고 필요한 것이 아닐까?

 

자계삼개조

'집손'은 캐나다 주 메리스 마을의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나 물방앗간 심부름꾼으로 시작하여 당대에 거만의 재산을 모으고 산림 이십만 에카와 철도 280마일을 가진 미국에서 몇째 안 가는 부호가 된 사람이었다. 어느 친구가 그에게 돈 버는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나에게는 성공의 삼개조 자계가 있어요. 제일은 술을 먹지 말 것. 제이는 수고를 싫어 말고 일할 것. 제삼은 신을 믿고 만사를 의심하지 말 것. 이 삼개조가 나로 하여금 오늘이 있게 한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에 대하여 친구는 이상한 얼굴로

"그야 누구나 말하는 바로 삼척동자라도 잘 아는 일이 아닌가요?" 하고 되묻자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아무리 삼척동자라도 잘 알고 있긴 하지만 60 노인이라도 실천을 못하면 소용이 없지 않나요?"하고 말하였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종달새가 푸른 밀밭 속에다 보금자리를 틀고 예쁘고 귀여운 새끼를 낳아 정성으로 돌보고 있었다. 새끼들의 이마에 볏이 생기고 날개가 다 자랄 때까지 여린 싹을 뜯어다가 먹여야 했다.

어느 날, 농부가 어미 종달새가 어디간 사이에 자기 밭을 살피러 왔다. "밀이 다 익었군. 친구들을 모두 불러 수확을 도와달라고 해야겠군." 농부의 말을 엿들은 종달새 새끼들이 어미 종달새에게 큰일 났다고 야단이었다. "빨리 이사해야겠어요. 밭주인이 친구들을 데리고 와 밀을 벤데요."

그러나 어미는 태연하였다. "아직은 이사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친구에게 무얼 맡겨서 일하려는 사람은 급한 사람이 아니란다."

몇 일 후에 농부가 다시 와서는, "내일 당장 일꾼을 얻어 수확을 해야겠군"하였다. 그제야 어미 종달새가 이사할 채비를 차렸다. "이제 직접 나서는 걸 보니 정말 이사해야겠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옛날에 '안토니'라는 수도사는 하나님과 함께 일생을 보내기 위하여 사막에서 지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오직 기도만 했다. 어느 날 뜨거운 한 낮에 음성이 들려왔다. “안토니, 그대의 아름다운 생활이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데 저쪽 한 도시에는 그대보다 더 신앙이 깊은 사람이 있다.” 안토니는 자기보다 더 경건하고 신앙심 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경건한 삶이겠습니까?” 그때 또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내 아들아, 너는 네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안토니는 그 음성이 말하는 사람을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는 길고 먼 여행길에 나섰다. 사막을 지나서 어떤 도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존이라는 이름의 구두 고치는 사람을 만났다.

“무슨 일을 하시기에 그 덕행이 하늘에까지 알려졌습니까?”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한일이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구두 한 켤레를 수선할 때마다 예수님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수선한 것뿐이랍니다.”

 

행함과 진실으로

한번은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지방의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투고 했다.

“나는 지난번 연휴에 기차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기차 안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비집고 앉을 틈조차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가까스로 빈자리를 하나 차지해서 편안하게 여행을 끝마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감사드린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날 똑같은 신문, 똑같은 자리에 이런 글이 실렸다.

“나도 어제 아무개가 말했던 그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다행스럽게도 처음부터 앉아서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내 옆에 어떤 노인이 서 계신 것을 보고는 그 즉시 자리를 양보하고는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서서 여행을 했다.”

이것은 그 지방의 어떤 무신론자가 전 날에 글을 실었던 그 기독교인을 비웃기 위해서 쓴 기사였다. 결국 이 기독교인은 무신론자보다도 더 못한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하고만 셈이 되고 말았다.

사랑은 우리의 입으로, 말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3에서 말씀한 것처럼 사랑에는 언제나 수고가 뒤따르는 법인 것이다. 사랑이란 실천하는 데에 의미가 있음을 깨닫고 매일매일 한 가지씩이라도 몸소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행함이 없는 기도

어떤 마을에 부자 신자가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기도할 때마다 빈민과 걸인을 불쌍히 여겨 그들이 살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시라고 기도했다. 어떤 때는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다.

하루는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니 그의 아들이 금고의 열쇠를 달라고 해서 그 이유를 물으니 "다름 아니라 아버지의 그 간절한 기도가 성취되는 것을 보여드리고자 해서요." 그러자 그는 "기도를 성취하여 주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야" 하며 아들을 꾸짖자 아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고를 열어놓고 빈민과 걸인을 구제하면서 그런 기도를 해야지요."

 

 

 

 

실패(失敗)에 대하여

 

 

거미에게 인생을 배운 왕(王)

스콜틀렌드는 원래 잉글랜드와 악착스럽게 싸웠던 나라였다. 이런 까닭에 그 지역엔 자기네 독립 영웅에 관한 이야기가 풍성하다.

그 중에 하나가 있다.

흔히 스코틀렌드의 해방자요 불세출의 영웅으로 존경받는 로버트 1세라는 왕이 있다. 본명이 로버트 부르스라고 하는 그에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당시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의 침입을 받아 그들의 통치아래 있던 그들은 부르스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 격렬한 항쟁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전쟁에서 무려 6번이나 패전을 했고 그 결과 군사들마저 뿔뿔이 달아나 나중엔 왕 한 사람만 남아 자신의 목숨을 걱정할 지경에 이르렀다.

심신이 모두 파김치가 된 왕은 깊은 산속을 헤매다가 다 쓰러져가는 움막을 하나 발견하고 거기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천정을 향해 누운 채로 찢어지고 상한 자신의 마음을 재 정일하고 있을 때였다.

한 마리의 거미가 나타나서 왕이 누워있는 움막의 구멍 뚫린 천정에서 부지런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거미는 지붕 밑 서까래에 자기 나름대로 기초를 두고 거미줄을 늘어뜨리더니 그 줄을 타고 움막 중간쯤 되는 공간에 까지 타고 내려와 거기서 부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왕은 본의 아니게 거미의 공중 곡예를 구경하게 되었다.

“저 녀석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호기심이 일자 왕은 그의 행동 하나 하나를 주위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거미는 한껏 넓은 진폭을 형성하더니 건너편 서까래에 순간적으로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기술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거미는 실패하고 말았다. 거미는 줄이 끊어져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왕은 실패의 동료를 만났다는 생각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거미는 원래 처음자리로 다시 돌아가더니 그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부터 왕은 숨을 죽이고 거미의 거동을 살피기 시작했다 . 두 번째 시도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거미는 다시 일어나 작업을 반복한다. 그렇게 거미는 무려 여섯 번이나 실패를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포기를 하겠지 했는데 일곱 번째 다시 시도를 하더니 드디어는 멋지게 목표지점에 몸을 착 붙이더니 아주 멋있는 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왕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거미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그는 산을 내려와 자신도 일곱 번째 전열을 가다듬어 싸워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결국 그는 보잘것없는 거미를 스승으로 삼고 배운 진리를 통해 성공을 거둔 것이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깨닫는 바를 실천에 옮기는 그 사람은 분명 겸손한 승리자였다.

그러나 인간이 못나면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도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배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성경은 우리를 항하여 의로운 사람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단 한 번의 재앙으로도 쓰러지고 만다는 것을 잠언24:16에서 교훈하고 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37:24에서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붙드시는 자이기 때문에 실망하고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사소한 일

미국 콜로라도의 <롱의 봉우리>에는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400여년이 넘은 그 나무는 14번이나 벼락을 맞고도 이겨냈고 수많은 눈사태와 폭풍우를 이겨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딱정벌레들이 이 나무에 기어들어 나무의 속을 갉아먹고 나무의 거대한 체구를 지탱할만한 힘을 빼앗았던 것입니다.

나무는 거대한 사건과는 투쟁하여 장장 400년이 넘도록 이겨 왔지만 딱정벌레들의 습격에는 당하지 못하고 그만 쓰러져 버린 것입니다. 사소한 일 때문에 패망하는 경우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소한 일 즉 대수롭지 못한 일 때문에 커다란 목적을 상실한 것이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페이스 세터(Pace-setter)의 기도:

"주님 제가 실패할 때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만일 제가 실패를 했다면 그것은 적어도 최선을 다한 결과일 것입니다. 아멘"

실패는 우리의 감시자가 아니라 스승이 되어야 한다. 실패는 약간 늦어지는 것이지 결코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일시적으로 우회해서 가는 길이며 막다른 골목은 더더욱 아니다. 승리자는 자기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자이며, 실수를 통해 좋은 점을 배우고 다시 바른 길을 갈 줄 아는 용감한 자이다. 성공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유일한 차이는 성공한 사람의 경우는 다섯 번 중에서 세 번을 성공하는 반면,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는 다섯 번 중 세 번을 실패한 다는데 있다.

 

실패없는 성공은...

미국의 야구역사상 베이브 루스라고 할 것 같으면 너무나 유명한 홈런왕이다. 그는 714개의 홈런을 때려서 1976년 까지도 세계의 최고 기록을 유지했던 사람이다. 1927년에 양키즈 팀이 필라델피아 팀과 대전했을 때, 그가 날린 장타의 유명한 결정타는 야구 역사상 잊혀질 수 없는 홈런이었다.

그런데 베이브 루스가 홈런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그가 아직도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세계 기록의 보유자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는 자그마치 1330번이나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기록을 가진 사람이다. 아마 야구 역사상 이 기록을 깨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을 것이다.

베이브 루스에게 1330번의 스트라이크 아웃이라는 쓰라린 체험이 없었던들 그는 홈런왕이 결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실패 연구소

고대 그리스와 트로이가 싸웠을 때 그리스군은 트로이를 진멸시키고 보복할 수 없게끔 트로이의 남성을 갓난아기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학살해버린다. 유일하게 숨겨진 채 트로이의 구세주로 촉망받던 한 소년마저 적발해내어 그의 어머니로 하여금 천 길 벼랑에서 밀어뜨리게 함으로써 여자만의 슬픈 트로이로 변모시켜버린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최초의 `실패'로 휴머니즘이 상처 입을 때마다 곧잘 거론되어왔던 사실(史實)이다. 한데 이 `실패'를 실패로 묻어두질 않았던 그리스 합리주의에 주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학살을 저지른 같은 희랍의 동시대인인 작가 유리피데스로 하여금 <트로이의 여인>이라는 비극을 남기게 하여 그 잔혹한 희랍인 자신들의 `실패'를 고발하고 참회하게 하며 다시 그런 일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정신적 공유 재산으로 후세에 물렸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실패를 자인하는 겸허함과 그 실패를 발전의 도약대로 삼는 희랍 합리주의가 바로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문화를 이끌어온 원점이 되고 있으며 유럽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미군(美軍)이 국지(局地) 전투에 패하더라도 최선의 조치를 취했다고 판단되면 지휘관이 표창 받고, 승전했더라도 전술적 실패로 필요 이상의 손실을 내면 해임시키곤 한다는 것도 이 전통 때문일 것이다. 실패는 저지르지 않는 것만은 못하지만 일단 저지르면 유사한 경우에 다시는 저지르지 않게 하는 값비싼 교훈이나 공유 재산이 되는 것이다.

한데 한국 사회는 실패로부터 발전적 교훈을 얻어낸다는 데는 대체로 서툰 것 같다. 실패의 이유 추궁은 곧잘 감정적, 도덕적 책임 추궁이 되고 책임자의 탄핵으로 끝나버릴 뿐, 그것이 유사한 실패로 번질 수 없게끔 하는 사회 전체의 교훈이나 공유 재산으로 남아나질 않는다.

저무는 금년만 되돌아보더라도 대형 금융 사건이며 증수뢰 사건, 지하철 부실 사고며 광산 사고 등 엄청남 금전적, 인명적 희생을 수반한 `실패'가 많았다. 당사자의 법적, 도의적 책임만 묻고 또 시간이 흐르노라면 국민의 기억 속에서 망각돼버리도록 방임해둘 게 아니라 그 커다란 손해에서 객관적인 교훈을 끌어내어 그것을 국민 전체의 공유 재산으로 삼는 제도적 보장이 있었으면 한다. 곧 정부는 `실패 연구소' 같은 것을 만들어 커다란 실패에는 내외의 두뇌를 총동원, 그때그때 실패백서(失敗白書)를 만들게 한다든지-.

 

실패와 성공

사람은 성공을 좋아하고 실패를 싫어한다. 성공한 사람은 박수와 갈채를 받지만, 실패한 사람은 모욕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가 일쑤다. 그래서 저마다 성공을 원하고 실패를 피하려 한다. 그러나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 밝혀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에는 성공 같지만 실패로 끝나는 일도 많고, 얼른 보기에는 실패 같지만 종당에는 성공으로 마무리 지어지는 일도 적지 아니하다. 역사상 정말 위대하게 높임을 받는 인물 가운데에서 살아생전에 남들이 성공했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오늘날, 모든 한국인으로부터 우리나라 5천 년 역사에서 뛰어나게 훌륭한 어른 중의 한 분이라고 존경을 받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도 그의 생전에는 그에 어울리는 대접을 받아 본 일이 있었던가? 그의 ‘난중일기’를 보건대, 그의 일생은 고난과 슬픔으로 이어진, 실패처럼 보이는 일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살피건대, 한국 역사 반만 년에 그를 앞지를 영웅호걸이 드묾을 부인하지 못하리라.

‘근세 교육의 아버지’ 하면 으레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치를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교육자로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일생은 성공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일생이었다. 그가 교육에 대한 새로운 뜻으로 펴낸 교과서는 당시 학교에서 써 주지도 않고, 사람들이 읽어 주지도 않아서, 전혀 팔리지가 않았다. 불쌍한 고아들을 모아 고아원을 시작하면 번번이 운영난에 빠져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페스탈로치보다 뛰어난 교육자가 누구인가!

사람의 눈에는 실패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실패가 아니고, 사람의 눈에는 성공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성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한 번, 두 번의실패로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을 용기만 있다면, 일곱 번 쓰러졌다가도 여덟 번째에 다시 일어날 기백만 지녔다면, 실패는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

엔리코 카루소라는 가수는 어려서 노래를 잘 부른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막상 큰 도시로 스승을 찾아가서 제자가 되겠다고 그 앞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 그 유명한 선생은 “너 따위의 목소리를 가지고 가수를 지망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선고를 하였다. 그래서 그는 울면서 일단 고향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 때, 어머니는 오히려 그 아들을 위로하면서 “그 선생님이 네 목소리를 몰라주다니! 엔리코야, 낙심 말고 다른 스승을 찾아가 공부를 해 보자.”고 격려해 주었다는 것이다. 만일, 카루소에게 그런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우리는 위대한 성악가 한 사람을 잃을 뻔 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가 어떤 한 스승의 말만 듣고 낙심하여 노래 부를 생각을 아예 포기해 버렸다면, 그는 성악가로서 대성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실패를 전혀 모르고 성공을 거듭한 사람은 커다란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약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약자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양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생각과 마음이 좁고 옹졸할 수밖에 없다. 실패는 사람을 겸손하고 너그럽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청소년이여,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정진하기만 하면, 그대는 진정 폭이 넓고 보람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실패한 자

어떤 철도사업가가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종업원을 거느린 거대한 철도왕국을 이룩했고 수 천만 달러의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둔 이 사업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는 지금 이 세상에서도 가장 비참한 실패자의 손을 붙잡고 있다.?

그때 아들이 대답하기를

?무슨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 아버지가 실패자라뇨. 아버지는 위대한 철도왕국을 건설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을 고용했으며 수 천만 달러를 벌어들이셨잖아요. 아버지가 실패자라니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업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런 일을 하는 동안에 나는 그리스도를 멀리 떠났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한 모든 자는 다 실패자들이다.?

그의 말은 참으로 옳았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리석은 자여, 너는 실패한 자로다'라고 말씀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작은 문제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

옛날에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장수가 지휘하는 큰 군대가 적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적보다 훌륭한 지휘관과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싸움에 패한 원인이 무엇인가 살펴보았더니 그 군대를 지휘하던 장수의 말 편자의 못이 하나 빠져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작은 일은 무시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무관심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큰 실패를 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가 한 신문사와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당신은 훌륭한 기록으로 우승을 하였는데, 당신이 달리는 동안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나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신발 속에 들어간 작은 모래였습니다."

우리의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는 많은 요인들도 단순하고 작은 이유들입니다.

우리가 작은 문제에 소홀히 해서는 행복을 쉽게 잃어버리게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콤스톡씨의 자살

100년 전 네바다 주에 살던 콤스톡(Henry Comstock)씨는 버지니아시티에 큰 산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겨우 11, 000달러로 팔아 버렸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산에서 미국 최대 규모의 금과 은이 발견되었고, 그 매장량은 그 당시 평가로 5억불 이상이었다.

콤스톡씨는 너무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일 개월을 고민하다가 1885년 10월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

5억불의 가치를 만여 불로 팔아넘길 때, 그는 첫 번째 실수를 했고 억울함에 못 이겨 자살할 때 두 번째 패배를 한 것이다.

스승을 겨우 은30량에 팔고 자살한 유다처럼 두 번 죽은 불쌍한 인간이었다.

건강의 실패, 사랑의 깨어짐, 물질 상실, 학업 중퇴 등 사람들은 실패 속을 살아간다. 그러나 진짜 실패는 두 번 지는 사람이다.

 

 

 

 

 

 

 

쓰임에 대하여

 

 

잡초도 쓰임이

고기잡이를 가는 어부들에게서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고기잡이를 할 때에는 일부러 먹지 못하는 메기를 물통에 몇 마리 넣어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잡힌 고기들은 대부분 넓은 대양을 마음껏 헤엄치다가 좁은 물통에 잡히면 이제는 죽었구나하는 체념으로 맥이 빠지고 눈이 충혈 되어 곧 죽어가는 시늉을 한답니다. 이윽고 부두에 와서 상인들에게 고기를 팔 때에는 상품의 가치가 없어지게 된 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메기를 그 통에 넣게 되면 그 메기가 온갖 휘졌고 다니면 그 고기들은 그 공격을 피하기 위해 눈망울을 크게 뜨고 싱싱하게 살아있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상품의 가치는 올라가게 되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에게 필요 없는 것이 내 주변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무익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쓰레기통이 필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원사가 때때로 정원을 손질하다보면 잡초를 발견하고 "저 잡초만 없다면 일이 더 쉬울 텐데 하나님은 왜 잡초를 만드셨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웃으시면서 " 잡초가 있기에 흙이 견고하게 붙어있고 잡초가 있기에 경쟁하듯 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에 강해지고 잡초가 결국은 죽어 비료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란다. 그러기에 정원의 아름다운 꽃을 볼 때 그 아름다움만 즐기지 말고 밑에 있는 잡초들이 꽃의 성장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지혜가 필요한 걸세."

하나님과 같이 쓸모없는 것을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있다면 우리는 풍요롭고 성공 자가 될 것이다.

잡초도 쓸모가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

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16:4).

 

 

 

 

 

슬픔에 대하여

 

 

믿음이 슬픔을 덜어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나는 절친한 친구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의 동료 목사인 그는 방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발지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사망 통지서를 받은 터였다. 그 아들도 목사가 되기로 결정되어 있었고 충분한 성직자의 자질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꼈다. 그와 내가 침묵 속에서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는 차분하고 사랑스럽게 아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

"나는 한탄하거나 하나님께 반항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내 아들은 가 버렸다오. 언젠가는 그 애를 다시 만날 수가 있겠지요. 한 가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제 그 아이가 여기 없기 때문에, 내 몫의 목사직뿐만 아니라 아들 몫까지 두 몫의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할 작정입니다."

그는 이 불가피한 사건을 용기 있게 받아들였으며 그를 좌절시키는 힘과 싸워서 승리한 것이다. 우리가 슬픔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지닌 믿음의 크기에 따라 그 슬픔을 유발하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다.

 

성공의 기초

위대한 음악가 엘가는 그의 수제자인 젊은 소프라노 가수의 음색이 훌륭한 기술을 늘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연주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다른 것은 다 좋았는데 중요한 대목에서 한번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때 실수를 안타깝게 여기며 슬퍼하는 젊은 가수에게 엘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아, 낙심하지 말라. 네 마음을 상케 한 이것이 바로 너를 위대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을 믿는다.” 사실 그 후 그녀는 실패 중에서 다시 일어나 훌륭한 음악가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패는 공공의 어머니'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은 눈물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슬픔은 우리의 삶을 위대하게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슬픔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습니다.

눈물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인생의 어떤 중요한 무엇이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상하고 슬픔을 초래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인간생활의 성공의 기초가 될 수도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랍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항상 햇빛만 나면 사막을 이룬다.” 땅에는 가끔 비도 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종종 당하는 슬픔을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가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습관에 대하여

 

 

배를 침몰시킨 눈 덩이

미국의 어느 곳에 매우 높고 경사가 급한 강 언덕이 있었는데 그 곳은 아이들이 즐겨 뛰어 노는 장소였다.

어느 해 겨울, 아이들이 눈이 쌓여 있는 언덕 위에서 놀다가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눈덩이를 절벽 아래로 굴렸고 그 눈덩이는 굴러 떨어지면서 더욱 커졌다. 집채만 한 눈덩이가 되어 강물에 떨어질 때 마침 지나가던 배가 눈덩이에 맞아 균형을 잃고 침몰하였다.

우리가 악한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커져서 결국에는 영혼이 망하게 되기가 쉬우므로, 악한 습관을 금지할 가장 적합한 시기는 아주 작은 죄가 시작되는 처음임을 알아야만 한다. (신학지남)

 

 

습관과 인생

그 사람이 어떤 습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 행, 불행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그 나쁜 습관 한 가지만 없으면 임금님 진지 그릇 같이 귀한 그릇이 될 수 있는데 그 악습 때문에 강아지 밥그릇 밖에 못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술,도박,담배,음란,부부싸움,거짓말등 어느 것에도 해당될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실수로 죄를 짓지만, 그 다음에는 고의로 죄를 범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습관이 되어 죄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고 말씀하신대로 새해에 새사람이 되고 새 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새사람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고 영접할 때 시작됩니다.

 

습관에 대하여

펄벅여사의 소설 <대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주인공 왕융이 장가를 들어 부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복숭아를 씹어 먹는 왕융이 신나게 맛있게 먹고서 속의 씨를 길가에 버립니다. 아무런 생각이나 조건 없이 복숭아를 먹었으니 그 씨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결혼하기까지 어떤 부잣집에서 하녀 노릇을 하였습니다. 하녀 생활을 통해서 주인이 버리는 것에서 새로운 생산적인 것으로 돌리는 지혜를 길러 왔었습니다. 새신랑 왕융이 복숭아를 다 먹고는 무심코 씨를 버리는 것을 보고 부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속으로 혼자 말합니다.

" 이걸 심으면, 또 복숭아가 열릴 텐데..." 그러고는 그 씨를 감추어 가지고 와서 자기 집안에다 심었습니다. 물론 씨가 싹이 나고 자라서 큰 복숭아나무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동양의 여인들이 얼마나 지혜로우며 얼마나 생산적이냐 하는 찬사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의 대목에서 습관적인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음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습관은 하루 이틀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수십 년, 또는 민족적인 것은 수천 년간의 생활 속에서 고정되어 굳어버리는 생의 형태를 일컬어 습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습관에서 생산성이 있는 씨알들을 아무런 생각이 없이 쓰레기로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그렇게 해왔으니까 그랬다는 식의 생활 태도는 소위 만네리즘에 빠져서 신선한 맛이 없고 쾌감을 느끼는 순간도 없이 질펀한 대지에 아지랑이 끼어들고 있듯이 아무러한 상념이나 의식이 없이 소가 걸어가듯이 어슬렁어슬렁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권태와 낭비만이 깔리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까뮈의 작품,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스>가 태양이 너무 뜨겁다는 이유만으로 총을 쏘아 살인을 하는 그러한 어리석은 일이 있을 법한 그러한 생의 과정을 걸어가는 습관적인 삶을 우리는 시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습관은 바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다만 비생산적이고 고루한 생의 형태는 바꾸어야하지 않겠느냐는 제언입니다. 말하자면 생의 유신을 해보자는 뜻이었습니다.

 

죄에 오래 묻혀 사는 위험

캐나다의 케이프 브레톤 섬에 있는 시드니라는 도시에는 석탄을 캐내는 탄광이 있다. 이 탄광은 바다 밑으로 수 마일을 뻗어가서 석탄을 캐내는 엄청난 탄광이다. 탄광 속에서는 작업을 위해서 말들을 여러 마리 쓴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들을 깊고 어두운 탄광에 데리고 들어가서 일을 시키면 다시는 탄광 밖으로 끌고 나오지를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말들이 탄광 밖으로 나오는 순간 곧 눈을 못 보는 소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 탄광 속으로 들어가 일을 하게 되는 말은 그 말이 늙거나 병들어서 일을 못 할 때까지 계속 바다 밑 어두운 땅속에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못된 취미나 습관, 죄의 행습에 빠져있는 사람은 그 순간 즉시 나와, 다시는 그곳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념에 대하여

 

 

 

개는 짖어도 달은 밝다

미국에서의 일이다. 재임 기간 동안 큰 과오가 없었던 판사가 재선을 위해서 선거운동을 할 때였다. 그 판사는 덕망이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능력도 뛰어난 사람이었고, 자신의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판사였다.

그러나 그와 함께 선거에 도전한 상대는 그 판사에 대해서 악의가 가득찬 비난을 퍼부어 대며 유권자들을 선동했다. 그 지방 방송국의 뉴스 시간이었다. 방송국의 사회자가 판사에게 물었다.

"판사님! 상대방이 당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당신에게 비난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그 판사는 천천히 미소를 띤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에 우리 집에서 늙은 사냥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 놈은 언제나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면 달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밤새도록 끙끙거리며 으르렁거리며 짖어댔습니다. 우리는 그런 날이면 제대로 밤잠을 자지 못하고 잠을 설쳤습니다."

사회자는 어리벙벙해진 모습으로 "주제에 빗나간 이야기 같습니다"라고 했다. 판사는 설명이 필요함을 알고, "그 개가 달을 보고 짖어댈 때에도 보름달은 계속 넓은 대지 위에 빛을 밝혔습니다. 나는 나에 대한 비난에 관해서 아무런 변명도, 해명도 안 하겠습니다. 달과 같이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내가 해야 할 나만의 일을 계속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진정한 신념이며, 참된 일꾼의 태도이다. 어디에서 이와 같은 신념을 공급받을 수 있겠는가?

바울 역시 신념의 사나이였다. 그를 가짜라고 매도하고 그가 전한 복음을 거짓으로 매도하는 무리들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받은 복음에 대한 신념이 있었다.

 

석두 에디슨

발명왕 에디슨은 소학교 1학년 1학기도 채우지 못하고 퇴학을 당했다. 이유는 1+1=2란 것을 인정하면서도 때로는 1이 된다고 고집했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한 선생님이 에디슨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오게 하고는 흥분한 어조로 "당신 아들은 석두이니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습니다. 데려 가십시오!"라고 했다.

"아니, 얘가 똑똑한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반문했더니 선생님이 에디슨을 불러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1+1은 얼마가 되지?" "예, 둘이지만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고 함으로 선생님이 "보시요. 언제나 이렇게 말을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 교육에 막대한 지장이 있습니다. 데리고 가십시오"라고 하기에 하는 수 없이 데리고 나왔다.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엄마, 1+1이 1이 되는 것 보여 줄까?"하고는 진흙을 이겨 양손에 가져 와서 "엄마, 잘 봐야 돼, 자 합치니 하나가 되잖아!"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는 어릴 때부터 1+1이 2지만 때로는 1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 전기가 합하면 하나의 전등이 켜지는 원리를 발견한 것이다.

물론 1+1=2임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때로는 1+1=1이 된다는 것도 틀림이 없는 진리임을 알아야겠다.

 

신념의 생활

필라델피아의 백만장자였던 스티븐 지라드씨는, 어느 토요일에 자기의 직원들에게 말하기를 다음날 나와서 방금 도착 입항한 선박의 짐을 내리라고 했다. 그러자 한 청년이 창백한 얼굴로 지라드씨 앞에 나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라드씨, 저는 내일이 주일이기 때문에 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 ? 그러면 나와는 헤어지는 수밖에 없지!"

"그것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비록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입장이지만 주일은 일할 수가 없군요."

"그러면 경리계로 가보시오. 그 동한 일한 급료를 계산해 줄 것이오."

청년은 이런 일 후에 삼주일 동안이나 발이 아프도록 시내를 다니며 일자리를 구했으나 얻지를 구했습니다.

어느 날 필라델피아의 한 은행총재가 지라드씨에게 연락해 오기를, 새로운 은행을 하나 열어야 갰는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한 지라드씨는 해고한 청년을 추천했다.

"하지만 자네는 그 청년을 해고하지 않았나?"

"물론 그랬지. 그 청년이 일요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해고 했네.

그러나 자기의 처한 형편에 따라서 신념과 원리를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야 새 은행의 돈을 믿고 맡길 수 있지 않겠나?"

그 청년은 지라드씨의 친구인 은행총재에게 발탁, 기용되어서 전의 직장보다 훨씬 좋은 자리에 근무하게 되었다.

 

왕양명의 인간 분류

양명학을 세운 왕양명이 인간으로서의 공자를 채점한 적이 있다. 그에 의하면 가장 위대한 성현을 만점으로 친다면 공자는 9천점이 된다. 고사리를 먹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는 5천점이다. 이보다 낮은 점수로는 "광"이 있고 최하가 "향원"이 된다. "광"이란 미친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길을 향해 돌진해 나가는 자세를 가리킨다. 공자도 "광"을 높이 평가했다. 누가 뭐라든지, 무슨 위험이나 손해가 따르든지 자기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행동한다는 것은 분명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한편 뭇사람의 귀여움을 받고 모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속마음을 숨기는 사람을 공자는 "향원"이라 부르고 경멸했다. 맹자도 향원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다. 그도 나무랄 데가 없이 처세하고, 세속에 영합하고 그런 대로 살아 나가는 게 "향원"이라고 했다. 왕양명은 그저 거리에 흔한 보통사람을 향원이라고 불렀다. 아닌 게 아니라 보통사람은 대가 약하고 남의 눈치를 잘 살피고, 그저 편안히 살기만을 바란다. 자기가 못하는 일을 감히 남이 할 때 장하다고 칭찬을 할 수 있을망정 ,그렇다고 감히 그 뒤를 따르지 못하는 게 보통사람이다.

바울은 "광"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자신이 받은 복음을 지키고자 하였고, 사도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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