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 감리교, 순복음의 구원관 무엇이 다른가?
I. 기독교의 구원 및 구원관
1. 구원의 본질
1) 구원의 정의
구원이란 죄로 인해 멸망할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구원이란 헬라어로 소테리아(σωτηρια)라고 하는데 이는 본래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자, 예를 들면 물속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건져 올림을 받는 것을 말한다. 즉 인간이 자신의 죄가 예수님을 죽게 하기까지 엄청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한 가운데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섬기며 그의 온전하신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2) 구원의 필요성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한 결과 죄를 짓게 되었으며 이 죄는 온 인류에게 유전되었다. 이 원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시 51:5). 또한 이 원죄 가운데서 태어난 인간은 날마다 자범죄를 범하며 살아간다. 이 원죄와 자범죄로 인해 인간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다가오게 되었다. 그것은 사망과 저주이다. 이 사망과 저주로부터 놓여남을 받기 위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이 필요하다.
3)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약속의 말씀대로 동정녀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악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요 3:16).
2. 구원의 일반적인 모습
1) 중생(重生)- 타락한 인간이 회개와 믿음을 통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2) 성화(聖化)- 중생한 성도가 말씀과 성령을 통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
3) 영화(榮化)- 성도가 죽어 하늘나라에 갈 때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
3. 구원관에 차이가 있게 된 이유
1) 성경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성경에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구절들이 나온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시며 인간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된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은 인간의 구원의 문제에도 나타난다.
2)다양한 교리(신학)의 형성
성경의 이러한 상이한 해석은 논리적인 체계에 따라 다양한 교리(신학)를 형성하게 된다. 이처럼 다양한 교리(신학) 가운데 상이한 구원관이 있게 된다.
II. 구원관에 차이가 있게 된 신학적 배경
인간은 어떻게 구원이 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예정인가 아니면 인간의 믿음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9-30절, 9-11장에 구원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에 대한 예정을 말하는 구절들이 있는 반면(롬 8:29,30, 9:11, 11:2), 인간의 믿음과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구절들도 있다(롬 10:9-15).
1. 칼빈주의
칼빈은 구원의 문제를 생각하는 중 “이 생명은 어디서 온 것일까?”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던 중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나의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의 은총으로 된다. 나의(다른 어떤 사람에 있어서도) 구원의 최종적인 원천은 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자기가 보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밖에 생각할 다른 도리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것이 비관적인 진리인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칼빈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선택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멸망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과감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칼빈이 주장한 구원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인간의 전적인 타락- 인간은 영적으로 완전히 죽었기 때문에 인간의 자발적인 의지나 선택의 행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만한 능력이 없다. 2)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 어떤 사람은 구원이 되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도록 선택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이중 예정). 3)제한적 구속- 하나님께서는 예정 가운데 특정한 사람만 구원받도록 하셨다. 4)불가항력적인 은혜- 택함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는다. 5)성도의 견인-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해 결코 배도하거나 타락하지 않는다.
이 칼빈주의에서 장로교(개혁 교회)의 구원관이 형성되었다.
2. 알미니안주의
16세기 종교 개혁의 시대에 어거스틴의 예정설이 부흥되었는데 칼빈에 이르서는 그것이 극도로 발달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까지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화란의 코른허트라는 사람이 칼빈주의를 배격하는 책을 내었다. 화란 정부에서는 이 코른허트의 반포 운동을 막기 위해 라이든 대학 출신의 알미누스(Jacobus Arminius, 1560-1609)를 시켜 코른허트의 소위 구원 보편설을 연구하여 이를 공박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알미누스는 이 구원 보편설을 연구하는 중 그것이 바로 참된 진리라고 생각하여 칼빈주의를 버리고 소위 알미누스설을 창도하게 된 것이다.
이 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만민을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그 속죄의 은혜도 또한 만민에게 미치는 것으로서 누구든지 이 은혜를 받을 기회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만민을 인도하여 이 은혜에 참예케 하신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은혜를 받고 안받고 하는 것은 사람의 자유 선택에 달려 있으며,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끝까지 참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 은혜를 받은 자라도 나중에 이를 버리고 또 다시 타락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은 만민을 사랑하시고 만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안받 것도 다 그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 하는 것이므로 멸망할 자가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회가 없어서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이 예정하셨기 때문도 아니라고 하였다. 알미니안주의는 나중에 요한 웨슬레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알미니안주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자유의지- 인간의 타락이 전적인 타락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를만한 자유의지가 타락한 인간 속에 선한 부분으로 있다고 믿는다. 2)조건적 선택(예지예정)- 하나님의 선택은 누가 믿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바탕을 둔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초청받았을 때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이를 수락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으므로 인간의 믿는 행위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기 위한 조건이다. 3)만인구원-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는 바,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4)가항력 은총-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 5)성도의 보호 불확실- 인간은 구원받은 후에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있다.
3. 웨슬레주의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는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고 칼빈의 예정설을 반대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웨슬레주의로 불리우게 되었다. 웨슬레주의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웨슬레는 칼빈의 예정론과 무조건적인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폭군으로 보며 그러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신이 아닐 수 없다고 비판한다.
2) 웨슬레주의는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은 물질적인 사건은 임의로 결정하시지만 도덕적인 범위에 속한 것은 임의로 결정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의지에 맡기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생기는 근원이라고 본다.
3) 사람은 부패한 도덕적 성정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속죄는 보편적인 것이며 성령님은 널리 모든 사람을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므로 누구든지 그의 나타난 성정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만 택하면 그에 의해 복음적인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사람을 중생의 생활로 향하게 하거나 안하게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 의지이지 하나님의 강제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즉 회개와 신앙은 하나님의 은사지만 이것을 실제로 이용하는 것은 사람의 자각적 의지와 개인적 동작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4) 회개는 인간의 자각적 신앙의 결과로써 감정의 자각적 변화를 포함한다. 또한 건전한 체험은 성서와 함께 이 변화된 관계가 사실임을 증명한다. 이를 “성령의 증거”라고 한다.
5)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신앙에 의해 사람이 이땅에서 그 부패성을 떠나 완전한 자리에 이를 수 있음을 믿는다. 이것이 소위 ‘그리스도인의 완전’, 즉 완전한 성화론이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신앙에 의해 인간은 구원을 얻고 완전한 성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으며, 또한 그러한 구원을 얻은 자라도 중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타락할 수 있다고 본다.
웨슬레주의는 감리교, 성결교 그리고 오순절 교단의 구원론을 형성하는 신학적 배경이 되었다.
III.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의 구원관의 차이
1. 장로교의 구원관
장로교의 구원관은 칼빈주의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절대 주권에 의해 인간이 구원됨을 강조한다.
1) 인간의 전적 타락
2)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
그리스도에 의해 준비된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예정 가운데 부르시고 선택하신다.
3) 중생
중생은 거듭남, 다시 태어남, 새로운 출생이라고 하는데 아담 안에서 타락됨으로 죽었던 영혼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중생은 오직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수단에 의해 가능하다. 중생의 역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임하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이다.
4) 회개
중생으로 인해 영적으로 소생한 사람은 죄이 비참함과 무서움을 깨닫게 되어 회개하게 된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죄로부터 돌아서서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행위이다.
5) 믿음
죄인인줄 깨닫고 회개한 사람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능히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고 또한 구원하시리라는 확신(객관적 확신)과, 나아가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죄사함과 구원을 받았다는 개인적 확신이 있어야 한다(주관적 확신).
6) 칭의(의롭다 하심)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 바로 칭의(稱義)이다. 이것은 죄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부르는 법정에서의 판결적인 용어이다.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신 대속의 은혜 때문이다. 인간은 칭의로 말미암아 원죄와 자범죄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7) 양자됨(하나님의 자녀로의 입양)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는 또한 즉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자녀의 모든 특권과 권리를 부여하시는 것이다.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입양이라는 법적 절차에 의해 되는 것이므로 양자(養子)라고 한다.
8) 성화
구원받은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점점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거룩해져 간다. 성도들은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을 받았지만 죄의 성향과 생활로부터 죄가 아직도 남아 있다. 마치 사형수가 특별 사면되어 법적으로는 죄가 없지만 죄의 성향을 여전히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성화는 하나님의 말씀, 기도, 성례전, 하나님의 섭리적인 지도에 의해 이루어진다. 성도가 죽는 날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9) 성도의 견인(堅忍)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와 전능하신 능력에 의해 끝까지 신앙을 지키게 되는데 이를 견인이라고 한다. 물론 성도들도 시험에 들 수 있고 죄의 유혹에 굴복할 수 있으며 때로는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러나 한번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를 저버리지 않고 보존해 주신다.
성도의 견인은 장로교만의 독특한 교리이다. 로마 카톨릭, 루터교, 알미니안주의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성도의 신앙 생활에 따라 구원이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10) 영화
성도들은 죽음의 순간에 성령의 역사에 의해 성화가 완성되어 영화롭게 되고 몸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부활함으로써 영화롭게 된다.
칼빈주의는 현재 그다지 크게 확장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추세이다.
2. 감리교의 구원관
장로교의 구원관에는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이 강조되고 있다면, 감리교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이 강조된다.
1) 인간의 타락
인간의 타락과 원죄성을 인정
2)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
감리교의 구원론은 예정에서 출발하지 않고 은총의 역사에서 시작한다. 구원의 첫 출발점을 선행 은총(先行 恩寵)에서 시작하여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는 영화를 향한 구원의 순서를 구원론의 구조로 삼고 있다.
선행 은총이란 믿음보다 앞서서 타락한 인간에게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의미한다. 웨슬레에 의하면 타락한 인간에게도 선행적 은총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의 증거로 양심과 이성의 부분적 작동을 들고 있다. 선행적 은총에 근거한 인간의 이성과 양심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는 자유의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본다. 자유의지를 자극하는 선행적 은총은 구원의 충분한 은총은 아니지만 구원의 문으로 이끌어 가는 하나님의 이끄심이다. 이 선행적 은총이 구원의 구성에 있어서는 구원을 사모하는 열심, 마음의 문을 여는 결단,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유의지적 참여로 나타난다. 감리교의 구원론은 선행적 은총으로 회복된 자유의지의 열심히 시작되어 인간이 구원을 열망하고 마음의 문을 열면서 회개함으로 시작된다. 이 자유의지는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행적 은총에 의해 회복됨을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서의 자유의지는 펠라기우스적 자유의지가 아니라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입각한 알미니우스적 자유의지이다. 이 알미니우스적 자유의지론은 칼빈주의의 불가항력적 은총론과 대조되어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 응답과 책임적 결단을 강조한다. 그러나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며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수동적 참여하는 것이다.
3) 회개
죄를 깨달을 뿐 아니라 모든 죄에서 거룩한 것으로 마음을 바꾸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4) 칭의(의롭게 됨)
인간이 믿는 순간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이 된다. 인간이 의롭게 여김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에 근거한다.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속에는 죄의 뿌리 또는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이 점에서 감리교의 칭의론은 루터의 의롭다함을 얻은 죄인 혹은 용서받은 죄인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은 의롭다함을 받는 객관적 은총을 넘어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에 참여하는 변화도 받는다는 것이다. 전가되는 의와 참여하는 변화의 의를 말하고 있다. 곧 전가되고 주어지는 의 뿐만 아니라 본성이 의롭게 변화되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의를 덧입게 된다고 한다. 수동적인 의는 믿음으로 주어지지만, 능동적인 의는 수동적인 의로움의 결과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바, 능동적, 내면적, 주관적, 본성적 의로움의 변화를 얻게 된다.
5) 거듭남
감리교에서는 의롭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은총이라면, 거듭남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제 인간은 의롭다함과 거듭남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성품을 총체적으로 본받기 시작한다. 거듭남은 성화와 연결된다. 거듭남을 통해 성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 거듭남이 성령이 내주하는 은총이라면 성화는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는 은총이라고 한다.
6) 성화
감리교는 의롭다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성화의 출발점을 삼아 그후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화의 신학을 강조한다. 여기서 감리교(웨슬레)의 구원론은 루터와 칼빈의 성화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루터는 죽는 날까지 인간은 완전해 질 수 없다고 보았고, 칼빈은 인간의 의지를 노예신세로 본다는 점에서 웨슬레가 말한 인간의 본성에 참여하는 적극적 동반자로 본 점에 미흡하다.
거듭남이 순간적인 탄생이라면 성화는 태어난 아기가 계속 자라는 것과 같다. 의롭다함은 오직 믿음만으로 가능하지만 이 성화의 과정에서는 믿음과 선행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성화는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성화의 완성에는 인간의 참여 곧 선행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선행은 믿음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믿음의 열매이다. 참 믿음은 선한 생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으로 그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 사랑은 신인협동적인 행위로 동반된다고 한다.
7) 그리스도인의 완전
감리교 성화론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다. 감리교에서 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결코 인간이 그의 무지와 실수 등의 제약에서 탈피하여 자유를 얻게 되는 무죄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제약성을 벗어나는 절대적 완전은 영화의 순간 즉 신령한 몸으로 ?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을 몸으로 거듭나는 상태는 이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상대적 완전으로 인간의 연약함과 실수와 유혹의 요소가 남아 있는 인간의 한계성을 가진 그대로의 완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온전한 성화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성도가 자기의 무능과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 체험이다. 온전한 성화는 제2의 체험, 두 번째 변화라고도 하며 그 내용은 온전한 사랑, 순수한 사랑이다. 감리교에서는 이 순간적인 체험을 통하여 성도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으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8) 구원받은 자의 타락 가능성
하나님의 은총은 조건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구원은 결코 무조건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 믿음을 저버림으로 인해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3. 순복음의 구원관
순복음 교단의 구원론은 웨슬레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오순절주의 특유의 독자적인 구원관도 지니고 있다. 특히 조용기 목사님의 구원관은 웨슬레주의, 오순절주의 그리고 복음주의가 통합된 이른바 ‘통합적 구원관’이라고 할 수 있다.
1) 인간의 타락
인간은 자발적인 죄에 의한 타락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그리고 환경에 저주가 임하는 환경적 죽음이 임하게 되었다(타락으로 인한 삼중 죽음).
2) 구원의 예비
순복음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망과 절망에 처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 대속 사역을 통해 인간이 구원받게 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음을 전제한다. 순복음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고 믿는다. 이 점에서 조용기 목사님은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역사를 인정하는 가운데(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섭리), 웨슬레주의의 보편 구원론을 강조한다(추하고 버림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라도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된다).
3) 회개와 믿음(인간의 반응)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한다.
4) 중생
회개하고 믿음을 지니면 우리의 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나므로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게 된다. 중생의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으며(칭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지닌다(양자). 중생한 자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바, 축복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5) 성화(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중생은 죄로 죽었던 영이 성령의 역사로 살아나는 영적 변화이다. 성령세례는 중생한 자가 성령의 세례를 받음으로 권능을 얻어 신앙 생활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영적 체험이다. 성령세례를 받게되면 성령의 은사가 임하고(능력),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성화).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가 계속되는 상태가 성령충만이다.
6) 구원의 상실 가능성
순복음에서는 사람이 성령의 훼방죄를 범할 때(마 12:31,32)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반하는 경우(히 6:4-6)에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인내가 요구된다고 한다(마 24:13; 눅 21:19; 히 3:14).
* 전인구원(全人救援, Whole Salvation)
조용기 목사님의 구원관은 일반적으로 전인구원으로 불리운다. 전인구원이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데 그 구원은 인간의 영혼, 육체, 범사(환경)에 총체적, 전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 생각할 때 영혼만의 인간을 생각할 수 없으며, 육체와 환경에만 의지하는 인간만을 상정할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한 인간은 전인적인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미치는 구원이 영혼, 육체, 범사(환경)의 전인적이어야 함은 성경적으로 합당하다.
IV. 결 언
성경에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 장로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의 은총과 감리교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순종과 믿음에 대한 부분을 다 포괄하고 있다. 사람 편에서 보면 자기의 주장이 옳다고 고집할 수 있으나 그것에 말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다. 하나님의 너무나도 위대하고 큰 진리를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 변론하다보니 부족하고 빈틈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은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34) 이러므로 우리도 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믿음의 형제끼리 서로 대적하지 말고 서로 수용하면서 보다 더 깊은 진리 탐구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조정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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